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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②

4권 제2부 · 제4장

나는 마지막 결별의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엄마는 이튿날 콩브레로 떠나 외할머니의 자매 한 분의 임종을 지키기로 되어 있었고, 할머니가 바랐을 대로 내가 바닷바람의 덕을 보도록 나를 남겨 두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나는 엄마에게 알베르틴과 결혼하지 않기로 돌이킬 수 없이 마음을 정했으며 머지않아 그녀를 만나는 일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로써 떠나기 전날 어머니에게 얼마간의 만족을 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그 만족이 참으로 지극한 것임을 어머니는 내게 감추지 않았다. 나는 알베르틴과도 이야기를 매듭지어야 했다.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그녀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단골들은 더러는 생마르르베튀에서, 더러는 생피에르데지프에서, 또 더러는 동시에르에서 내렸고, 유난히 홀가분하고 그녀에게서 벗어난 기분이던 나는, 이제 마차 안에 우리 둘만 남게 되자 마침내 이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발베크 무리 가운데 내가 정말로 사랑한 처녀는, 비록 그 순간 그녀의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없었지만 곧 그곳으로 돌아올 앙드레였다(나는 그들 모두와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는데, 처음 그들을 보던 날처럼 저마다에게서 나머지 전부에 공통된 어떤 본질적인 특질이 느껴져, 마치 그들이 하나의 별종 인종에 속하기라도 한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며칠 뒤면 발베크로 다시 돌아오는 만큼, 그녀가 곧바로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은 분명했고, 그러면 내가 원치 않을 경우 그녀와 결혼하지 않아도 되도록 자유로이 남으면서, 베네치아에도 갈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녀가 발베크에 있는 동안 그녀를 온전히 내 것으로 두기 위해, 내가 취할 방책은 그녀에게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었다. “몇 주만 더 일찍 당신을 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쉬워요. 그랬다면 당신에게 반했을 텐데, 이제 내 마음은 이미 임자가 있답니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우리는 자주 만날 테니까요, 나는 다른 사랑 때문에 괴로운데, 당신이 나를 위로해 주겠지요.” 이 대화를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 술책으로 나는 앙드레에게 내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 줄 터였고, 그러면 그녀는 나에게 싫증 내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녀의 애정을 즐겁고 기분 좋게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때문에, 무례하게 굴지 않으려면 나는 결국 알베르틴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해야만 했고, 그녀의 친구에게 나를 바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녀 자신에게는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두어야 했다. 앙드레가 언제라도 도착할 수 있으니 나는 당장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파르빌에 가까워지자, 그날 저녁에는 시간이 모자라리라는 것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정해진 일을 이튿날로 미루는 편이 낫겠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 저녁 베르뒤랭가에서의 만찬 이야기만 그녀와 나누는 데 그쳤다. 기차가 파르빌 직전의 마지막 역인 앵카르빌을 막 떠났을 때, 그녀는 외투를 걸치며 내게 말했다. “그럼 내일 또 베르뒤랭이네요, 나를 데리러 오시는 것 잊지 마세요.” 나는 다소 퉁명스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그들을 ‘바람맞히지’ 않는다면 말이죠. 이런 식의 생활이 정말 어리석게 느껴지기 시작했거든요. 어쨌든 그곳에 간다면,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보낸 시간이 완전히 헛되지 않도록, 베르뒤랭 부인에게 나 자신에게 크게 흥미로울 만한, 연구거리가 될 만한, 게다가 즐거움도 줄 만한 무언가를 여쭤보는 걸 잊지 말아야겠어요. 올해 발베크에서는 정말이지 그런 게 거의 없었으니까요.” “나한테 그리 예의 바르진 않네요, 하지만 용서할게요,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보이니까요. 그 즐거움이란 게 뭔데요?” “베르뒤랭 부인이 아주 잘 아는 어느 음악가의 곡을 몇 개 들려주는 거예요. 나도 그의 곡 하나는 알지만, 다른 것들도 있는 모양이라, 나머지 작품이 출판되었는지, 내가 아는 것과 다른지 알고 싶어요.” “무슨 음악가요?” “이봐요, 그 사람 이름이 뱅퇴유라고 말한들 당신이 뭘 더 알겠어요?” 우리는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을 다 굴려 보고도 정작 진실은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하는 법이며, 진실이 잔혹한 일격으로 우리를 찔러 영영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히는 것은, 우리가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온다. “당신이 나를 얼마나 재미있게 하는지 모를 거예요,” 기차가 속도를 늦추고 있던 참이라 알베르틴은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건 당신 생각보다 나한테 훨씬 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베르뒤랭 부인 없이도 당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라면 뭐든 구해 줄 수 있어요. 나보다 나이 많은 친구 이야기, 나한테 어머니이자 언니 같았던 사람, 트리에스테에서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함께 보냈고, 게다가 몇 주 뒤면 셰르부르에서 만나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그 친구 이야기를 한 적 있는 거 기억나죠(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얼마나 바다를 좋아하는지 알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그 친구가(어머! 당신이 짐작할 법한 그런 여자는 전혀 아니에요!), 이거 놀랍지 않아요, 바로 당신이 말한 그 뱅퇴유 딸의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벗이에요, 그리고 나는 뱅퇴유 딸을 그 친구만큼이나 잘 알아요. 나는 늘 그 둘을 내 두 언니라고 부른답니다. 음악이라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것도 아주 옳게 당신이 말하던 이 문제에서, 당신의 어린 알베르틴이 당신한테 쓸모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나는 싫지 않아요.” 콩브레와 몽주뱅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뱅퇴유가 죽은 지 그토록 오랜 뒤에, 파르빌 역으로 들어서던 참에 내뱉어진 이 말들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한 이미지가 꿈틀거렸다. 오래도록 간직해 둔 나머지, 예전에 그것을 간직할 때 그것이 해로운 힘을 지녔음을 설령 짐작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 힘을 온전히 잃었으리라 여겼을 그런 이미지가. 그 이미지는 내 존재의 깊은 곳에 산 채로 보존되어 있었으니, 마치 정해진 날 고국으로 돌아가 아가멤논의 살해자를 벌하도록 신들이 그 죽음을 막아 두었던 오레스테스처럼, 어쩌면 내가 할머니를 죽게 내버려 둔 데 대한 벌로서, 응보로서(누가 알겠는가?) 그러했던 것이다. 영영 묻힌 듯하던 캄캄한 밤에서 문득 솟아올라, 복수자처럼 내리쳐, 나를 위해 새롭고 무섭고 마땅한 삶을 열어젖히고, 어쩌면 또한 악한 행위가 끝없이 낳는 숙명적 결과를, 그것을 저지른 자들뿐 아니라, 그저 신기하고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바라볼 뿐이라고 여긴 자들에게도 미치는 그 결과를 내 눈앞에 눈부시도록 또렷이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오래전 그날 오후 몽주뱅에서, 덤불 뒤에 숨어 있던 나 자신이 바로 그런 자였으니(스완의 연애 이야기를 흐뭇하게 귀 기울여 듣던 때처럼), 나는 내 안에서, 끝내 나를 괴롭히도록 정해진 그 숙명의 길, 곧 앎의 길을 위태롭게 넓혀 가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장 쓰라린 슬픔에서 나는 거의 자랑스럽다 할, 거의 기쁘다 할 감정을, 방금 받은 충격이 그 어떤 자발적 노력으로도 다다를 수 없었을 지점까지 단숨에 실어다 준 사람의 감정을 이끌어 냈다. 뱅퇴유 과, 실천하는 직업적 사포주의자인 그 여자친구의 벗이 된 알베르틴은, 내가 그녀를 가장 의심하던 때에 상상하던 바에 견주면, 한 집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소리를 겨우 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1889년 박람회의 작은 확성기에 견주어, 거리와 도시와 들판과 바다 위로 솟구쳐 이 나라와 저 나라를 잇는 전화기와도 같았다. 내가 방금 발 디딘 이곳은 무서운 미지의 땅이었고, 꿈에도 몰랐던 고통의 새로운 국면이 내 앞에 열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삼키는 이 현실의 홍수는, 우리의 소심하고 미세한 억측에 견주면 엄청난 것일지언정, 실은 그 억측들이 미리 내다본 것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방금 알게 된 것과 비슷한 무엇, 알베르틴과 뱅퇴유 의 친분과 비슷한 무엇, 내 머리로는 결코 지어낼 수 없었을 무엇이었으되, 알베르틴과 앙드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을 때 내가 어렴풋이 감지했던 무엇이었다. 우리가 고통의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흔히 그저 창조하는 정신이 모자란 탓이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현실은 우리에게 고통과 더불어 위대한 발견의 기쁨을 안겨 주는데, 그것은 우리가 오래도록 알아채지 못한 채 곱씹어 온 것에 새롭고 또렷한 형태를 부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기차는 파르빌에 멈춰 섰고, 우리 말고는 탄 사람이 없었으므로, 제 일이 부질없다는 느낌에, 그럼에도 그 일을 하게 만들며 정확함과 나른함을 동시에 불어넣는 습관의 힘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잠에 대한 갈망에 짓눌려 낮아진 목소리로 역무원이 외쳤다. “파르빌!” 나를 마주 보고 서 있던 알베르틴은, 자기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알고 우리가 탄 객실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리려고 하는 이 몸짓은 견딜 수 없이 내 마음을 찢어 놓았으니, 마치, 알베르틴의 몸이 내 몸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을 차지한 채 내 몸과는 별개의 자리에 있는 듯 보였음에도, 정확한 제도공이라면 우리 사이에 그려 넣어야 했을 그 공간의 거리가 겉보기일 뿐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새로 그리려는 사람이라면 이제 알베르틴을 나에게서 얼마쯤 떨어진 곳이 아니라 내 안에 놓아야 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떠나가는 것이 나를 몹시 괴롭혔으므로, 나는 그녀를 뒤쫓아 필사적으로 팔을 붙잡았다. “발베크에 와서 하룻밤 묵는 게 실제로 불가능한 일인가요?”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불가능하진 않아요. 하지만 졸려 쓰러질 지경이에요.” “나한테 엄청난 도움을 주는 셈일 텐데요…” “그래요, 그럼, 도무지 영문은 모르겠지만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갈게요.” 다른 층에 알베르틴의 방을 잡아 준 뒤 내 방으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얇은 칸막이 하나로만 나와 떨어져 있는 어머니가 듣지 못하도록 흐느낌을 억눌렀다. 덧문 닫는 것조차 잊고 있었으니, 어느 순간 눈을 드니 하늘 저편에, 리브벨의 식당에 걸려 있던, 엘스티르가 석양의 효과를 담아 그린 습작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사그라드는 불씨 같은 희미한 빛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발베크에 처음 도착하던 날 기차에서, 밤이 아니라 새 하루에 앞서는 저녁의 이 똑같은 이미지를 보고 얼마나 가슴 설레었던가를 나는 떠올렸다. 그러나 이제 어떤 하루도 더는 나에게 새롭지 않을 것이며, 미지의 행복에 대한 욕망을 내 안에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내 고통을, 그 고통을 견딜 힘이 더는 남지 않을 지점에 이르기까지 늘여 갈 뿐이었다. 코타르가 파르빌의 카지노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이제 한 점 의심의 여지 없이 사실로 드러났다. 내가 오래도록 두려워하고 알베르틴에 대해 어렴풋이 의심해 온 것, 내 본능이 그녀의 온 인격에서 미루어 짐작했으되 욕망에 지배된 내 이성이 차츰 부인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었다! 알베르틴의 뒤로 나는 이제 바다의 푸른 산줄기가 아니라, 그녀가 제 쾌락의 야릇한 소리를 내지르던 그 웃음과 함께 뱅퇴유 의 품에 안기던 몽주뱅의 그 방을 보았다. 알베르틴만큼 예쁜 처녀를 두고서, 그런 욕망을 지닌 뱅퇴유 이 그 욕망을 채워 달라고 그녀에게 청하지 않았을 리 있겠는가? 그리고 알베르틴이 그 청에 놀라기는커녕 응했다는 증거는, 두 사람이 다투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그들의 친밀함이 꾸준히 깊어 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베르틴이 로즈몽드의 어깨에 턱을 얹고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 그 목덜미에 입 맞추던 그 우아한 몸짓, 뱅퇴유 을 떠올리게 하던 그 몸짓, 그것을 풀이하면서도 나는 몸짓이 그리는 똑같은 선이 반드시 똑같은 성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망설였건만, 알고 보면 알베르틴은 그저 그것을 뱅퇴유 에게서 배웠을 뿐인지도 몰랐다. 차츰 생기 없던 하늘에 불이 붙었다. 그때껏 나는 더없이 하찮은 것들에도, 밀크커피 한 사발에도, 빗소리에도, 세차게 우는 바람 소리에도 미소 없이 깨어난 적이 없었건만, 이제 나는 곧 밝아 올 그 하루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하루가 다시는 미지의 행복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주지 않고 오직 내 수난을 늘여 갈 뿐임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삶에 매달렸다. 이제 삶에서 기대할 것이라곤 잔혹한 것뿐임을 알면서도. 나는 시간도 아랑곳없이 승강기로 달려가, 야간 경비를 겸하던 리프트보이를 부르는 벨을 울려, 알베르틴의 방으로 가서, 그녀가 거기서 나를 만나 줄 수 있다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께서 차라리 손님께 오시겠다 하십니다,” 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곧 이리로 오실 겁니다.” 그리고 이윽고, 과연, 실내복 차림의 알베르틴이 들어왔다. “알베르틴,” 나는 그녀에게 속삭이며, 우리를 그 칸막이 하나로만 갈라 놓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고 일렀는데, 오늘은 우리를 속삭임에 가두어 성가시기만 한 그 칸막이의 얇음이, 예전 할머니의 뜻을 그토록 또렷이 전해 주던 시절에는 일종의 음악적 투명함을 닮아 있었다, “이렇게 방해해서 미안해요. 들어 봐요. 당신이 이해하도록, 당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말해 줘야겠어요. 내가 이곳에 올 때, 나는 마땅히 결혼했어야 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던 한 여자를 두고 왔어요. 그녀는 오늘 아침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고,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날마다, 돌아가겠다고 그녀에게 전보를 치지 않을 용기가 나에게 있을지 자문해 왔어요. 나는 그 용기를 냈지만, 그 때문에 어찌나 비참했던지 죽어 버릴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젯밤 당신에게 발베크에 와서 자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던 거예요. 죽어야 한다면, 당신에게 작별 인사는 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러고서 나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 덕에 자연스러워진 눈물을 마음껏 쏟았다. “가엾은 사람, 진작 알았더라면 당신 곁에서 밤을 지새웠을 텐데,” 하고 알베르틴은 소리쳤다. 내가 어쩌면 이 여자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자기가 ‘좋은 혼처’를 잡을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 따위는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조차 않았으니, 내가 그 원인은 감출 수 있었으되 그 실재와 강도는 감출 수 없었던 슬픔에 그녀는 그토록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내게 말했다, “어젯밤,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오는 내내, 당신이 초조하고 우울해 보였어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싶어 걱정됐어요.” 사실 내 슬픔은 파르빌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고, 그와는 사뭇 달랐으되 다행히 알베르틴이 그 슬픔과 같은 것으로 여긴 내 신경의 불편함은, 며칠 더 그녀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권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가 덧붙였다. “이제 다시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여기서 내내 지낼래요.” 실상 그녀는 나에게, 오직 그녀만이 줄 수 있는 것을, 나를 태우던 독의 유일한 해독제를 내밀고 있었으니, 공교롭게도 그 해독제는 독과 닮은 것이었다. 하나는 달고 다른 하나는 썼지만, 둘 다 똑같이 알베르틴에게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의 병인 알베르틴이 나를 괴롭히기를 그치자, 해독제인 알베르틴은 나를 회복기의 환자처럼 기진하게 남겨 두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곧 발베크를 떠나 셰르부르로, 거기서 다시 트리에스테로 가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의 옛 버릇이 되살아날 것이었다. 내가 무엇보다도 바란 것은 알베르틴이 배를 타지 못하게 막는 것, 그녀를 파리로 데려가려 애써 보는 것이었다. 파리에서라면 발베크에서보다도 더 쉽게, 마음만 먹으면 그녀가 트리에스테로 갈 수 있음은 사실이었으나, 파리에 가면 어떻게든 되리라 싶었다. 어쩌면 나는 게르망트 부인에게 부탁해, 뱅퇴유 의 여자친구에게 은근히 영향을 미쳐 그녀가 트리에스테에 머물지 않도록, 다른 데서, 이를테면 내가 빌파리지 부인 댁에서, 또 실은 게르망트 부인 댁에서 만난 적 있는 드 ⸻ 대공 밑에서 일자리를 얻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는, 설령 알베르틴이 그 친구를 보러 자기 집에 가고 싶어 한다 해도, 게르망트 부인의 언질을 받아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막아 줄 수도 있었다. 물론 나는, 파리에서도 알베르틴에게 그런 취향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줄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찾아내리라는 것을 스스로 되새길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질투의 충동은 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불러일으킨 존재, 이 경우에는 뱅퇴유 의 여자친구의 낙인을 지니는 법이다. 내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뱅퇴유 의 여자친구였다. 예전에 오스트리아를 두고 내가 품었던 그 신비로운 열정, 그곳이 알베르틴이 온 나라였기에(그녀의 삼촌이 그곳 대사관 참사관을 지냈다), 그 지리의 특색이며 그곳에 사는 종족이며 유서 깊은 건물들이며 풍광을, 마치 지도책에서처럼, 사진첩에서처럼 알베르틴의 미소와 몸가짐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품었던 그 신비로운 열정을, 나는 여전히 느끼고 있었으나, 상징이 뒤집힌 탓에, 이제는 공포의 영역에서였다. 그렇다, 알베르틴은 바로 그곳에서 왔다. 그곳에서라면, 집집마다, 뱅퇴유 의 여자친구는 아닐지언정 그런 부류의 다른 여자들을 그녀는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버릇이 되살아나, 그들은 석 달 뒤 크리스마스에, 이어 새해에 만날 터였다. 그 날짜들은 그 자체로 이미 나에게 고통스러웠으니, 오래전 크리스마스 방학 내내 나를 질베르트에게서 떼어 놓던 그날들에 느꼈던 비참함이 본능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긴 만찬이 끝난 뒤, 한밤의 흥청거림이 끝난 뒤, 모두가 즐겁고 들뜬 그때, 알베르틴은 그곳의 친구들과, 앙드레에 대한 우정은 순결한 것이었을망정 내가 앙드레와 함께 있을 때 짓던 것과 똑같은 자태를, 어쩌면 몽주뱅에서 여자친구에게 쫓기던 뱅퇴유 이 짓던 것과 똑같은 자태를 취할 것이었다. 여자친구가 뱅퇴유 위로 내려앉기 전에 그 욕망을 애무로 돋우는 동안, 나는 이제 그녀에게 알베르틴의 달아오른 얼굴을, 달아나면서, 이윽고 몸을 내맡기면서 그 야릇하고 깊은 웃음을 내지르는 것을 내가 들은 그 알베르틴의 얼굴을 씌웠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고뇌에 견주면, 동시에르에서 생루가 나와 함께 있던 알베르틴을 만났을 때 그녀가 그에게 짓궂게 수작을 걸던 그날 내가 느꼈을 질투가, 혹은 스테르마리아 부인의 편지를 기다리던 날, 파리에서 그녀가 나에게 준 첫 입맞춤을 내가 빚진 그 미지의 입문자를 떠올리며 느꼈던 질투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생루가, 혹은 여느 젊은 남자가 불러일으킨 그런 종류의 질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경우에 나는 기껏해야, 이겨 보려 애썼을 경쟁자 하나를 두려워하면 그만이었으리라. 그러나 여기서 경쟁자는 나와 닮지 않았고, 다른 무기를 지녔으며, 나는 같은 터에서 겨룰 수도, 알베르틴에게 같은 쾌락을 줄 수도, 그 쾌락이 대체 무엇일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살아가는 숱한 순간에 우리는 그 자체로는 하찮은 어떤 힘을 얻고자 미래 전부와도 맞바꾸려 든다. 한때 나는 블라탱 부인과 사귀려고 삶의 온갖 좋은 것을 마다했을 것이니, 그녀가 스완 부인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알베르틴이 트리에스테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고문이라도 견뎠을 것이고, 그것으로 모자란다면 그녀에게 고통을 가하고, 그녀를 격리하고, 자물쇠로 가두어 두고, 그녀가 지닌 얼마 안 되는 돈마저 빼앗아 실제로 그 여행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오래전 발베크에 가기를 애태우던 때, 나를 떠나도록 부추긴 것이 페르시아풍 성당에 대한, 동틀 녘 사나운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었듯이, 이제 알베르틴이 어쩌면 트리에스테로 가리라는 생각에 내 마음을 갈가리 찢은 것은, 그녀가 그곳에서 뱅퇴유 의 여자친구와 함께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리라는 것이었다. 상상이란 그 본성을 바꾸어 감수성으로 돌아설 때에도, 그렇다고 해서 한꺼번에 더 많은 이미지를 다루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지금 셰르부르에도 트리에스테에도 있지 않으며 알베르틴을 만날 가망이 조금도 없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 주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기뻐 눈물을 흘렸을까. 내 삶 전부와 그 앞날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렇지만 나는 내 질투를 이렇게 한곳에 못 박아 두는 것이 자의적임을, 알베르틴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면 다른 처녀들과도 그것을 채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그 처녀들조차, 다른 곳에서 그녀를 볼 수 있었더라면 내 마음을 그토록 날카롭게 괴롭히지는 않았으리라. 그 적대적이고 알 수 없는 기운을 내뿜은 것은 트리에스테였고, 알베르틴이 즐거워한다고 내가 느낄 수 있던, 그녀의 추억과 우정과 어린 날의 사랑이 깃든 그 미지의 세계였다. 그것은, 콩브레의 내 침실로 식당에서 피어오르곤 하던 기운과 같았으니, 나이프와 포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사이로 낯선 이들과 이야기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오던,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올라오지 않던 그 식당의 기운, 또 오데트가 상상도 못 할 쾌락을 좇아 밤이면 드나들던 집들을 스완에게 가득 채우던 그 기운과 같았다. 이제 나는 트리에스테를, 사람들이 사색에 잠기고 석양이 금빛이며 교회 종소리가 애수 어린, 그 감미로운 곳으로 떠올리지 않고,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싶은, 실재하는 사물의 세계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저주받은 도시로 떠올렸다. 그 도시는 붙박이고 항구적인 한 점으로 내 마음에 박혀 있었다. 알베르틴을 곧 셰르부르로, 트리에스테로 떠나보낸다는 생각은 나를 공포로 채웠고, 발베크에 머무른다는 생각마저 그러했다. 내 연인이 뱅퇴유 과 가까웠다는 폭로가 이제 거의 확실해진 마당에, 알베르틴이 나와 함께 있지 않은 매 순간마다(그녀의 이모 때문에 온종일 그녀를 볼 수 없는 날들도 있었다) 그녀가 블로크의 누이와 사촌에게, 어쩌면 다른 처녀들에게도 몸을 내맡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날 저녁 그녀가 블로크네 여자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미칠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앞으로 며칠은 내내 나와 함께 있겠다고 말한 뒤,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나는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요. 함께 가지 않겠어요? 파리에서 한동안 우리와 지내는 건 어때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그녀가 혼자 있게 두지 말아야 했고, 적어도 며칠간은 그녀를 곁에 붙들어, 그녀가 뱅퇴유 의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음을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실상 그녀는 집에서 나와 단둘이 있게 될 터였으니,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나야 할 시찰 여행을 기회 삼아, 할머니의 뜻에 따라 콩브레로 내려가 할머니의 자매 한 분과 며칠을 보내는 것을 제 의무로 떠맡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 이모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그토록 다정하던 할머니에게 그 이모가 자매다운 자매가 되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라난 뒤에도 아이들은 자기에게 매정했던 이들을 원망 어린 마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할머니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어머니는 원망이라는 것을 할 줄 몰랐다. 어머니에게 제 어머니의 삶은 순결하고 티 없는 어린 시절과도 같아서, 어머니는 그 시절에서, 다른 이들을 대하는 자신의 행동을 그 달콤함이나 씁쓸함으로 다스릴 그런 추억을 길어 올렸다. 그 이모라면 어머니에게 더없이 값진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제 이모가 중병을 앓고 있었으므로(암이라고들 했다) 어머니가 그것을 얻어 내기는 어려웠고, 어머니는 좀 더 일찍 가지 않은 것을 자책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일에서도, 제 어머니라면 했을 바를 그대로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찾아냈을 뿐이었으니, 마치 그토록 나쁜 아비였던 할머니의 아버지의 기일이면, 할머니가 늘 그 무덤에 가져다 놓곤 하던 꽃을 어머니가 대신 바치러 가던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이제 막 열리려는 무덤가로, 어머니는 그 이모가 할머니에게 와서 건네지 않았던 다정한 말들을 대신 전하고자 했다. 콩브레에 머무는 동안 어머니는, 할머니가 늘 이루어지기를 바랐으되 오직 제 딸의 감독 아래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던 몇 가지 일에 손을 대려 했다. 그래서 그 일들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채였으니,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먼저 파리를 떠남으로써, 아버지도 나누어 지긴 했으나 어머니를 괴롭히는 만큼 아버지를 괴롭히지는 못하던 그 슬픔의 무게를 아버지가 너무 사무치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지금 당장은 안 될 거예요,” 하고 알베르틴이 딱 잘라 말했다. “게다가, 그 부인이 떠났다면서 뭐하러 그렇게 서둘러 파리로 돌아가야 해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고 내가 진저리 내기 시작한 발베크보다는, 내가 그녀를 알던 곳에서 마음이 더 편할 테니까요.” 이 다른 여자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밤 내가 정말로 죽음을 갈망했다면 그것은 그녀가 뱅퇴유 의 여자친구와 가까이 지냈다고 어리석게도 나에게 털어놓았기 때문임을, 알베르틴은 훗날 알아차렸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법하게 여겨지는 순간들이 있다. 어쨌거나 그날 아침 그녀는 이 다른 여자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부인과 결혼해야 해요,” 하고 그녀가 내게 말했다, “가엾은 사람, 그러면 당신이 행복해질 테고, 틀림없이 그 부인도 행복해질 거예요.” 나는 대답하기를, 그 다른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하마터면 마음을 정할 뻔했으며, 얼마 전 아내에게 넉넉한 호사와 쾌락을 베풀어 줄 만한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희생을 받아들이기 직전까지 갔었노라고 했다. 그녀가 나에게 안긴 참혹한 고통 바로 뒤에 찾아온 알베르틴의 다정함에 대한 고마움에 취해, 마치 여섯 잔째 브랜디를 따라 주는 웨이터에게 한 재산 약속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이, 나는 그녀에게, 내 아내는 자동차도 요트도 갖게 될 것이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알베르틴이 드라이브와 요트 타기를 그토록 좋아하니 그녀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 애석한 일이며, 그녀에게라면 내가 더할 나위 없는 남편이 되었을 텐데,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는 틀림없이 좋은 벗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술에 취했을 때조차 우리가 매를 맞을까 두려워 지나가는 이들에게 말을 걸지 않듯이, 나는 질베르트 시절이었다면 저질렀을 그 경솔함, 곧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 알베르틴이라고 그녀에게 말하는 경솔함(그것이 경솔함이었다면)을 범하지는 않았다. “봐요, 나는 그녀와 결혼할 뻔했어요. 하지만 끝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나처럼 병약하고 성가신 사람과 젊은 여자를 함께 살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당신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누구라도 당신과 사는 걸 기뻐할 거예요,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을 쫓아다니는지 좀 봐요. 베르뒤랭 부인 댁에서도, 상류 사회에서도 늘 당신 이야기를 한다던데요. 당신을 그렇게 자신 없게 만들다니, 그 부인이 당신한테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던 게 틀림없어요.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못된 여자예요, 나는 그 여자가 밉네요. 나라면, 내가 그 여자 처지였다면!” “천만에요, 그녀는 아주 다정해요, 지나치리만치 다정하죠. 베르뒤랭네니 뭐니 하는 것들은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요. 내가 사랑하는, 게다가 이미 단념한 그 여자를 빼면, 내가 마음 쓰는 사람은 오직 나의 어린 알베르틴뿐이에요, 나를 자주 만나 줌으로써, 그러니까 처음 며칠 동안 말인데,” 하고 나는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 며칠 사이 그녀에게 무엇이든 청할 수 있도록 덧붙였다, “나에게 얼마간의 위로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녀뿐이에요.” 나는 결혼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넌지시 비치기만 하고서, 우리는 결코 뜻이 맞지 않을 테니 그것은 도무지 실현될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생루와 ‘라셸, 주님 곁에서 오실 때’의 관계며 스완과 오데트의 관계에 대한 기억에 내 질투가 여전히 쫓기고 있던 터라, 나는 내가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는 그 사랑을 되돌려 받을 수 없으며, 오직 금전적 잇속만이 한 여자를 나에게 붙들어 둘 수 있다고 지나치게 믿는 편이었다. 알베르틴을 오데트와 라셸에 빗대어 재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고, 내 질투가 얕잡아 보게 만든 것은 바로 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릇된 이 판단에서, 장차 우리를 덮칠 숱한 재앙이 틀림없이 싹텄던 것이다. “그럼 파리로 오라는 내 청을 거절하는 건가요?” “이모는 지금 당장 내가 떠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나중에 내가 갈 수 있다 해도, 내가 그렇게 당신과 함께 지내면 좀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파리에서는 내가 당신 사촌이 아니라는 걸 다들 알 텐데요.” “그럼 좋아요. 우리가 사실상 약혼한 사이라고 하면 되죠.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아니, 아무 문제 될 게 없어요.” 잠옷 밖으로 통째로 드러난 알베르틴의 목은, 단단하고, 볕에 그을렸으며, 결이 거칠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내 마음에서 결코 뿌리 뽑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 어린애다운 슬픔을 달래려 어머니에게 입 맞추기라도 하듯, 그렇게 순결하게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알베르틴은 옷을 갈아입으러 나를 두고 나갔다. 벌써 그녀의 헌신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녀는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건만. (그리고 나는 그녀의 결심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확신했으니, 우리가 발베크에 머문다면 바로 그날 저녁 내가 없는 사이에 그녀가 블로크네 여자들을 만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방금, 멘빌에 들르고 싶으며 오후에 다시 돌아와 나를 보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전날 저녁 그녀는 그곳에 들르지 않았으니, 그녀 앞으로 온 편지가 놓여 있을지도 몰랐고, 게다가 이모가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게 다라면, 리프트보이를 보내 이모에게 당신이 여기 있다고 전하고 편지도 찾아오게 하면 돼요.” 그러자 그녀는, 상냥하게 굴고 싶어 하면서도 얽매이는 것이 못마땅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아주 다정하게 “좋아요” 하고는 리프트보이를 보냈다. 알베르틴이 방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소년이 와서 내 방문을 살며시 두드렸다. 내가 알베르틴과 이야기하는 동안 그가 멘빌에 다녀올 짬이 있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제, 알베르틴이 이모에게 쪽지를 써 두었으며, 내가 원한다면 그녀가 그날로 파리에 갈 수 있다고 전하러 온 것이었다. 그녀가 이 전갈을 말로 그에게 전한 것은 딱한 일이었으니,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지배인이 나와 돌아다니다가, 몹시 당황한 낯으로 나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정말로 떠나는 것이냐고, 며칠만 더 묵을 수는 없느냐고, 그날은 바람이 꽤 ‘피곤하다’(고약하다)고 물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중요한 단 한 가지는, 블로크네 여자들이 바람을 쐬러 나오는 시각 전에 알베르틴이 발베크를 떠나 있어야 한다는 것, 더구나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앙드레가 그곳에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다는 것, 그리고 발베크란, 숨쉬기 힘겨워하는 병자가 설령 여행 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룻밤도 더 묵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그런 곳들 중 하나와 같다는 것이었으나, 나는 그에게 이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비슷한 간청과 맞서 싸워야 할 터였으니, 우선은 호텔에서, 마리 지네스트와 셀레스트 알바레의 눈이 벌겋게 부어 있던 그곳에서였다. (게다가 마리는 산골 급류처럼 세찬 흐느낌을 터뜨리고 있었다. 더 온순한 셀레스트가 그녀에게 진정하라고 달랬지만, 마리가 저 아는 유일한 시구인 “이 세상에선 라일락도 스러지네”를 읊조리자, 셀레스트는 더는 참지 못했고, 라일락빛 얼굴 위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 그날 저녁이면 그들은 내 존재 따위 잊어버렸으리라.) 그러고 나서, 작은 지방 열차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온갖 조심을 다했건만 나는 캉브르메르 와 마주쳤는데, 그는 내 짐 상자들을 보고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으니, 모레 나를 오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숨 막히는 발작이 날씨 변화 탓이며 시월이면 그것들이 더없이 좋아지리라고 나를 설득하려 들어 나를 화나게 했고, “출발을 일주일만 미룰 수 없겠느냐”고 물었으니, 그 말의 어리석음이 나를 격분케 한 것은 어쩌면 그가 나에게 권하는 바로 그것이 나를 병나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열차 객실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동안, 역마다 나는, 헤리발트나 기스카르보다 더 무서운, 자기를 초대해 달라고 애원하는 드 크레시 가,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게, 나를 기어이 초대하려 드는 베르뒤랭 부인이 나타날까 두려웠다. 그러나 이것은 몇 시간 뒤에나 벌어질 일이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않았다. 나는 다만 지배인의 절망 어린 간청과 마주해야 했다. 나는 그의 면전에서 문을 닫았으니, 그가 목소리를 낮추긴 했어도 끝내는 어머니를 깨우고 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방에, 천장이 너무 높은 그 방에 홀로 남았으니, 처음 도착했을 때 그토록 비참하던 방, 스테르마리아 부인을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방, 해변에 내려앉는 철새들처럼 나타나던 알베르틴과 그 친구들을 지켜보던 방, 리프트보이를 보내 그녀를 데려오게 한 뒤 그토록 흥 없이 그녀를 안던 방, 할머니의 다정함을 겪고서 이윽고 그녀가 죽었음을 깨닫던 그 방이었다. 그 아래로 아침 빛이 떨어지던 그 덧문,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열어 바다의 첫 성벽을 내다보았었다(누군가 우리가 입 맞추는 것을 볼세라 알베르틴이 나에게 닫게 하던 그 덧문 말이다). 나는 내 주위가 한결같음에 견주어 봄으로써 나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우리는 사람에게 그러하듯 이런 사물에도 익숙해지는데, 문득, 그것들이 예전에 우리에게 전해 주던 다른 의미를, 이어 그것들이 모든 의미를 잃은 뒤에 그 안에 간직하고 있던 오늘과는 사뭇 다른 사건들을, 똑같은 천장 아래서, 똑같은 유리문 책장 사이에서 벌어진 갖가지 행위를 떠올릴 때, 그 갖가지 행위가 함축하는 우리 마음과 삶의 변화는, 바뀌지 않고 항구한 그 배경 탓에, 한결같은 무대가 그것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탓에, 한층 더 커 보이는 것만 같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