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제3장: 알베르틴의 도주 ⑨

5권 제2부 · 제3장: 알베르틴의 도주

“… 무시무시한
위엄이 나를 온통 보이지 않게 하나니
나의 신하들에게.”

그런데 별안간 정경이 바뀌었다. 이번에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옛 인상의 기억이 아니라, 파랗고 금빛으로 물든 포르투니 드레스가 아주 최근에 다시 일깨운 오랜 욕망의 기억이었으니, 또 하나의 봄, 그러나 결코 잎이 무성한 봄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방금 스스로에게 내뱉은 이름, ‘베네치아’로 인해 나무도 꽃도 홀연 벗겨져 버린 봄, 정수만 남도록 걸러진 봄이었다. 그 봄은 그 본질적인 성질로 환원되어, 날들이 길어지고 따뜻해지고 서서히 무르익어 가는 과정을, 이번에는 불순한 흙이 아니라 파랗고 순결한 물의 점진적인 발효로써 드러냈으니, 봉오리도 꽃도 없이 봄다운 그 물은 그 달이 새겨 놓은 반짝이는 단면들로써만 5월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었고, 어스름한 사파이어빛의 변함없이 눈부신 벌거벗음 속에서 그 달과 정확히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계절이 꽃 피지 않는 그 바다의 후미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듯, 근대의 세월도 이 고딕 도시에는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상상할 수는 없었으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옛날 소년이던 시절, 떠남의 열망 그 자체가 여행에 필요한 힘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을 때와 똑같은 욕망으로 바라보고 싶어 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베네치아 상상들과 마주 서고 싶었고, 저 갈라진 바다가 대양의 물줄기처럼 제 굽이굽이 속에, 세련되고 우아하지만 그 쪽빛 띠에 고립된 채 스스로 발전하여 저만의 회화와 건축의 유파를 지니게 된 하나의 문명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 바라보고 싶었으며, 바다 한가운데 피어나 그 바다가 늘 신선하게 적셔 주는, 채색된 돌로 이루어진 저 전설적인 과일과 새들의 정원을 찬탄하고 싶었다. 그 바다는 밀물로 기둥들의 밑동을 철썩였고, 주두(柱頭)의 대담한 부조 위에는 그늘 속에서 지켜보는 짙푸른 눈처럼, 끊임없이 일렁이게 두는 빛의 얼룩들을 놓아 두었다. 그렇다, 나는 떠나야 한다, 때가 온 것이다. 이제 알베르틴이 더는 내게 화가 나 있어 보이지 않으니, 그녀를 소유한다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만한 보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 했던 것은 오로지 어떤 슬픔, 어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는데, 그것들은 이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순간 결코 통과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옥양목 고리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폭풍을 걷어내고, 미소의 평온을 되찾았다. 까닭도 알 수 없고 어쩌면 끝도 없을 증오의, 그 괴로운 수수께끼가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잠시 밀쳐 두었던 문제, 곧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 행복이라는 문제와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알베르틴과의 생활이 다시 가능해진 지금,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거기서 비참함밖에는 얻을 것이 없으리라 느꼈다. 차라리 그녀가 동의하는 이 흐뭇한 순간에 그녀와 헤어지고, 그 순간을 기억 속에서 길이 늘이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나는 앙드레가 파리를 떠나는 날짜를 확실히 알아 두고, 봉탕 부인에게 내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그 시기에 알베르틴이 네덜란드에도 몽주뱅에도 갈 수 없도록 해 두어야 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좀 더 잘 분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종종 여자가 우리 눈에 높아지는 것이 오로지, 우리가 그녀를 두고 겨루어야 하는 남자들의, 생각만 해도 견디기 힘든 그 육중한 무게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평형추가 사라지면 여자의 매력도 시든다. 우리는 이에 대한 고통스럽고도 유익한 예를, 남자들이 자기를 알기 전에 이미 잘못된 길로 빠져 버린 여자들에게, 위험한 모래 수렁에 잠겨 가라앉고 있다고 느껴져 사랑하는 내내 구해 내야만 하는 그런 여자들에게 품는 편애에서 본다. 반면에 조금도 극적이지 않은 사후(事後)의 예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애정이 식어 가고 있음을 의식한 나머지, 스스로 이끌어 낸 규칙들을 저절로 적용하여, 그 여자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 그녀를 위험한 환경에 놓아 두고 날마다 거기서 지켜 내야만 하는 처지에 자신을 두는 남자에게서 본다. (무대에 선 여자였기에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정작 그 여자에게 무대에서 물러날 것을 고집하는 남자들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이런 식으로 알베르틴의 출발에 아무런 걸림돌도 없게 되면, 나는 오늘 같은 화창한 날을, 머지않아 그런 날은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하루 골라야 할 것이었다. 그녀가 더는 내게 대수롭지 않아지고, 내가 무수한 욕망에 이끌리는 그런 날을 말이다. 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은 채 집을 나서게 두고,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채비를 모두 갖춘 뒤 그녀에게 쪽지 한 장을 남겨야 할 것이었다. 그녀가 당분간은 생각만 해도 나를 뒤흔들어 놓을 만한 곳으로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 여행하는 동안 그녀가 어쩌면 저지르고 있을 나쁜 짓들을, 하기야 그 순간의 내게는 그런 것들이 도무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지만, 굳이 상상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그녀를 다시 보지 않은 채 베네치아로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프랑수아즈를 부르는 종을 울려, 안내서 한 권과 시간표를 사 오라 이르려 했다. 소년 시절, 지금 느끼는 것만큼이나 격렬한 욕망의 실현인 베네치아 여행을 미리 준비하고 싶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사이에 내가 이미 이루었으나 아무런 만족도 얻지 못한 욕망, 곧 발베크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베네치아 역시 눈에 보이는 현상인 이상, 봄철의 바다로 현실이 된 고딕 시대의 저 이루 말할 수 없는 꿈, 이따금 매혹적이고 부드럽고 붙잡을 수 없고 신비롭고 아득한 이미지로 내 영혼을 뒤흔들러 오던 그 꿈을, 발베크보다 더 잘 실현시켜 주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내 종소리를 들은 프랑수아즈가 방으로 들어왔는데, 자기가 할 말과 자기가 한 일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참으로 난처했답니다.” 하고 그녀가 내게 말했다. “도련님께서 오늘 아침 종을 이리 늦게 울리시니 말이에요. 저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어요. 오늘 아침 여덟 시에 알베르틴 아가씨가 제게 트렁크를 달라 하시는데, 감히 거절하지 못했지요. 도련님을 깨우러 갔다가 꾸중을 들을까 겁이 났고요. 아가씨를 붙들고 이것저것 캐물으며, 도련님이 곧 종을 울리실 것 같으니 한 시간만 기다리시라 해도 소용없었어요. 아가씨는 막무가내로, 도련님께 전하라며 이 편지를 제게 맡기고는, 아홉 시에 떠나 버리셨답니다.” 그러자, 우리가 우리 안에 지닌 것을 이토록 모를 수도 있는 법이어서, 나는 알베르틴에 대한 나 자신의 무관심을 확신하고 있었건만, 숨이 턱 막혔고, 그 작은 열차 안에서 내 연인이 뱅퇴유 의 여자친구에 관해 폭로한 이후로는 알지 못했던 땀에 별안간 젖어 든 두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었으며, 이렇게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잘했네, 나를 깨우지 않은 건 참 잘한 일이야. 이제 잠시 나가 있게, 곧 종을 울려 부를 테니.”

준비 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55화: 제3장: 알베르틴의 도주 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