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틴이 밤이 되기 전에 이 집으로 돌아오리라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을 때, 나는 그때까지 나의 버팀목이던 믿음을 뜯어낸 그 벌어진 상처를 새로운 믿음으로 덮으려 부랴부랴 서둘렀다. 그러나 나의 자기보존 본능이 아무리 재빠르게 움직였던들, 프랑수아즈가 내게 말을 건넸을 때 나는 한순간 아무런 위안도 없이 남겨졌고, 이제 알베르틴이 바로 그날 저녁 돌아오리라는 것을 안다 해도 소용없었으니, 아직 그녀의 귀환을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던 그 순간에 (“알베르틴 아가씨가 짐 상자를 달라고 하셨어요, 알베르틴 아가씨가 떠나셨어요”라는 말에 뒤이은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아픔이, 예전만큼이나 날카롭게, 다시 말해 마치 알베르틴이 곧 돌아오리라는 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기라도 한 듯, 저 혼자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그렇더라도 그녀가 돌아오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다만 제 발로 돌아와야 했다. 어떤 경우를 가정하든,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처럼 보이는 것, 돌아와 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목적을 스스로 그르치는 일이 될 터였다. 분명 나는, 질베르트를 단념했던 것처럼 그녀를 단념할 힘이 없었다. 알베르틴을 다시 보는 것보다도 더, 내가 바란 것은 예전만큼 튼튼하지 못한 내 심장이 더는 견딜 수 없던 그 육체적 고뇌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데 스스로를 길들여 온 탓에, 나는 더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고뇌는 여러 이유로 비할 데 없이 날카로웠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내가 게르망트 부인이나 질베르트와는 어떠한 육체적 쾌락도 맛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날마다, 하루의 매 시각 보지는 않았기에, 그들을 볼 기회도 따라서 볼 필요도 없었기에, 그들을 향한 내 사랑에서는 습관의 그 어마어마한 힘이 덜 두드러졌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제 자유의지로는 내가 겪던 고통을 바랄 수도 견뎌 낼 수도 없던 내 심장이 이제 오직 하나의 가능한 해결책, 곧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베르틴이 돌아와야 한다는 해결책만을 찾아낸 지금, 그 반대되는 해결책은 (의도적인 단념, 점진적인 체념은) 내게 소설가의 해결책, 실제 삶에서는 있음 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만일 지난날 질베르트와 관련해 내가 스스로 그것을 택한 적이 없었더라면. 그러니 나는 이 다른 해결책 또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그것도 같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얼마간 그대로였으니까. 다만 시간이 제 몫을 했을 뿐인데, 나를 더 늙게 만든 시간, 게다가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 알베르틴을 늘 내 곁에 붙들어 두었던 시간이. 그러나 덧붙여야겠다, 그런 삶에 대한 생각을 접지 않으면서도, 질베르트에 대해 내가 느꼈던 온갖 것 가운데 자존심 하나가 내 안에 남아 있었으니, 그 자존심은 내가 돌아오라고 조르며 알베르틴에게 혐오스러운 노리개가 되기를 거부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귀환에 아무런 중요성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나는 더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고뇌에 붙들리고 말았다. 알베르틴이 나를 떠난 뒤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문지기에게 가서 알아보려면 당장 옷을 입어야 했다.
고통은, 바깥에서 온 정신적 충격의 연장으로서, 끊임없이 제 형태를 바꾸려 애쓴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정보를 구함으로써 그것을 흩어 버릴 수 있기를 바라고, 그것이 헤아릴 수 없는 변신을 거치기를 바라는데, 이는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것보다 용기가 덜 드는 일이다. 우리가 슬픔을 안고 눕는 침대는 그토록 좁고 딱딱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나는 두 발을 바닥에 디뎠다. 한없이 조심하며 방을 가로질러, 알베르틴의 의자도, 그녀가 금빛 슬리퍼로 페달을 밟곤 하던 자동피아노도, 그녀가 쓰던 물건 하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자리를 잡았는데, 그 물건들은 하나같이, 내 기억이 그것들에게 불어넣은 은밀한 언어로, 내게 새로운 번역, 색다른 판본을 건네려는 듯, 그녀가 떠났다는 소식을 두 번째로 알려 주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보지 않고도 나는 볼 수 있었고, 힘이 빠져나가, 나는 그 푸른 새틴 안락의자 가운데 하나에 주저앉았는데, 한 시간 전, 아침 햇살 한 줄기로 마취된 듯한 침실의 어스름 속에서 그 의자의 반들거리는 표면은 내게 온갖 꿈을 꾸게 했고, 그때 나는 그 꿈들을 열렬히 어루만졌으되, 이제 그 꿈들은 내게서 그토록 멀리 있었다. 아, 이 순간까지 나는 알베르틴이 아직 내 곁에 있을 때가 아니고서는 단 한 번도 그 의자들 가운데 어디에도 앉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어섰다. 그리하여 매 순간, 우리 인격을 이루는 그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보잘것없는 “자아들” 가운데, 아직 알베르틴의 떠남을 알지 못해 그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할 자아가 하나씩 더 있었다. 나는, 그 자아들이 낯선 이들이어서 고통에 대한 내 감수성을 빌려 오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잔혹하게도, 아직 그것을 모르는 이 모든 “자아들”에게 방금 벌어진 재앙을 낱낱이 일러 주어야 했으니, 그들 하나하나가 차례로, “알베르틴이 짐 상자를 달라고 했다”라는, 발베크에서 어머니의 것과 함께 기차에 실리는 것을 내가 보았던 그 관 모양의 상자들에 관한 말과, “알베르틴이 떠났다”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어야 했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나는 내 슬픔을 이야기해야 했으니, 그 슬픔은 여러 개탄스러운 정황에서 자유로이 끌어낸 비관적 결론이 결코 아니라, 바깥에서 우리에게 와 우리가 고르지 않은 어떤 특정한 인상이 간헐적으로, 저도 모르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 “자아들” 가운데는 내가 오래도록 마주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예컨대 (나는 그날이 이발사가 오는 날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를 자를 때의 나였던 그 “자아”. 나는 이 “자아”를 잊고 있었기에, 이발사가 오자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았으니, 장례식에서 고인을 잊지 않은 늙은 연금 하인이 나타날 때처럼. 그러다 문득 나는 떠올렸다, 지난 한 주 동안 이따금 나 자신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공황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음을. 그러나 그런 순간이면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따져 보며 속으로 말하곤 했다. “물론 그녀가 갑자기 나를 떠난다는 가설을 헤아려 봐야 소용없지. 그건 터무니없어. 내가 이걸 냉철하고 총명한 사람에게 털어놓는다면” (그리고 질투가 속을 터놓지 못하게 막지만 않았던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그렇게 했으리라) “그는 틀림없이 내게 말하겠지. ‘아니, 자네 미쳤군. 그건 불가능해.’ 게다가 사실, 요 며칠 우리는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어. 사람들은 까닭이 있어 헤어지지. 그 까닭을 네게 말해 주고. 대답할 기회를 주고. 그렇게 달아나 버리지는 않아. 아니, 이건 완전히 애 같은 생각이야. 터무니없는 가설이라곤 이것뿐이야.” 그런데도 날마다, 아침에 내가 종을 울렸을 때 그녀가 여전히 거기 있음을 알면, 나는 커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리고 프랑수아즈가 내게 알베르틴의 편지를 건넸을 때, 나는 그것이 일어날 수 없는 바로 그 한 가지, 곧 내가 안심할 만한 논리적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 날 앞서 알아채고 있던 이 떠남에 관한 것임을 대번에 확신했다. 나는 절망 속에서 내 자신의 통찰에 거의 만족하다시피 하며 이렇게 속으로 말했으니, 마치 제 죄가 드러날 리 없음을 아는 살인자가 그런데도 두려워하다가, 자기를 부른 경찰관의 책상 위 서류 첫머리에 제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문득 보게 되는 것과 같았다. 내 유일한 희망은 알베르틴이 투렌으로, 이모 집으로 갔다는 것이었으니, 어쨌든 거기서라면 그녀는 꽤 잘 지켜질 테고, 내가 그녀를 데려오기 전까지 그다지 심각한 일은 저지를 수 없을 터였다.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그녀가 파리에 머물러 있거나, 암스테르담이나 몽주뱅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 다시 말해 내가 그 낌새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어떤 밀회에 스스로 얽혀들려고 달아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속으로 파리, 암스테르담, 몽주뱅, 다시 말해 여러 지명을 뇌었을 때, 나는 그저 잠재적일 뿐인 장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알베르틴의 건물 문지기가 그녀가 투렌으로 갔다고 내게 일러 주었을 때, 내가 바란다고 여겼던 이 거처는 내게 그 모든 곳 가운데 가장 끔찍한 곳으로 보였으니, 그것이 실재였기 때문이고, 또한 현재의 확실함과 미래의 불확실함에 처음으로 시달리며, 나는 알베르틴이 나와 떨어져, 어쩌면 오래도록, 어쩌면 영영, 스스로 택해 살아가기로 한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삶 속에서 그녀가 그 미지의 요소를, 지난날 그토록 자주 나를 괴롭히던, 그렇지만 그 겉껍데기, 곧 꿰뚫을 수 없이 사로잡힌 그 매혹적인 얼굴을 소유하고 어루만지는 행복을 내가 누리던 그 미지의 요소를 실현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미지의 요소가 내 사랑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알베르틴의 집 문밖에서 나는 가난한 어린 소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고 어찌나 정직해 보였던지, 나는 충직한 눈망울의 개를 데려가듯 그 아이에게 나와 함께 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내 제안이 반가운 듯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한동안 아이를 무릎에 앉혀 두었지만, 이내 그 아이의 존재는 알베르틴의 부재를 너무나 사무치게 느끼게 하여 견딜 수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먼저 오백 프랑짜리 지폐 한 장을 쥐여 주고는 가 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잠시 뒤, 또 다른 어린 소녀를 집에 데리고 있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순진한 존재의 위안이 없지 않으리라는 생각만이, 알베르틴이 어쩌면 돌아오기까지 한동안 떠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가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알베르틴 자신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내 안에 거의 오직 자기 이름의 형태로만 존재했으니, 그 이름은 잠에서 깨어나는 몇몇 드문 유예의 순간을 빼면, 내 뇌리에 와 스스로를 새겼고 쉬지 않고 그렇게 계속했다. 만일 내가 소리 내어 생각했더라면 나는 그 이름을 되뇌고 또 되뇌었을 것이고, 내 말은 마치 내가 한 마리 새로, 곧 사람이었을 적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을 그 노래로 끝없이 되풀이하던 우화 속 그 새로 변해 버리기라도 한 듯 단조롭고 옹색했으리라. 우리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고, 잠자코 있을수록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새기는 듯하고, 그것이 우리 뇌리에 자국을 남기는 듯하니, 그 뇌리는 마침내, 누군가 재미 삼아 낙서를 해 놓은 벽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천 번을 거듭 적힌 그 이름으로 온통 뒤덮이고야 만다. 우리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늘 되풀이한다, 행복할 때조차도, 불행할 때는 더더욱.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아는 것에 아무것도 보태 주지 않는 이 이름을 되뇌려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욕망을 우리는 느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이 순간 나는 육욕의 쾌락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의 눈으로조차 그 알베르틴의 모습을, 그녀가 내 존재를 그토록 뒤흔든 원인이었건만, 보지 못했고, 그녀의 몸을 떠올리지 못했으며, 만일 내 고통에 얽혀 있는 관념을 (거기에는 늘 어떤 관념이 얽혀 있게 마련이니) 따로 떼어 내려 했다면, 그것은 번갈아, 한편으로는 그녀가 돌아올 생각을 품고서든 아니든 어떤 의도로 나를 떠났는가에 대한 내 의심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되돌아오게 할 방도였으리라. 어쩌면 우리 불안의 원인이 되는 그 사람이 정작 그 불안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그토록 자잘하다는 데에는 무언가 상징적이고도 참된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사람 자체는 대수롭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거의 전부인 것은, 비슷한 불운들이 지난날 그녀와 관련해 우리에게 느끼게 한, 그리고 습관이 그녀에게 붙들어 매어 놓은 일련의 감정과 고뇌다. 이를 또렷이 증명해 주는 것은, 행복한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권태 이상으로, 문제의 그 사람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 그녀에게 흠모받느냐 받지 않느냐, 그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더는 그 문제를 (하도 부질없어 더는 헤아려 볼 수고조차 들이지 않게 될 그 문제를) 그 사람 자체와 관련해서 말고는 스스로에게 내걸지 않게 될 때 우리에게 더없이 하찮게 보이리라는 사실이니, 일련의 감정과 고뇌는, 적어도 그녀에 관한 한 잊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관련해 다시 새로이 자라났을지언정. 그 이전, 그것이 아직 그녀에게 붙들어 매여 있을 때, 우리는 우리 행복이 그녀의 존재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우리 불안이 멎느냐에 달려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 우리의 잠재의식은 우리 자신보다 더 밝게 내다보고 있었으니, 그것이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토록 자잘하게 만들어 놓았을 때 말이다, 그 모습을 우리는 실은 어쩌면 잊고 있었고, 또렷이 기억해 내지 못했을 수도, 매력 없다 여겼을 수도 있는 그 모습을, 그녀를 다시 찾아내어 그녀를 기다리기를 그만두는 것이 무엇보다 사활이 걸린 일이 되는 그 끔찍한 드라마 속에서. 자잘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모습, 사랑이 자라나는 방식이 낳는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이자, 그 사랑의 주관적 본성을 또렷이 드러내는 우의(寓意).
알베르틴이 나를 떠날 때의 그 속내는 틀림없이, 무력 시위로써 제 외교를 펼칠 길을 닦는 나라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녀가 나를 떠났을 리는 오직, 나에게서 더 나은 조건, 더 큰 자유, 더 많은 안락을 얻어 내리라는 희망에서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둘 중 이겼을 사람은 나였으리라, 만일 그녀가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음을 알고 제 발로 돌아올 그 순간을 기다릴 힘이 내게 있었더라면. 그러나 오직 승리만이 중요한 카드놀이나 전쟁에서라면 우리가 엄포에 맞서 버틸 수 있다 해도, 사랑과 질투가,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빚어내는 조건은 그와 같지 않다. 만일 기다리려고, “버티려고” 내가 알베르틴을 여러 날, 어쩌면 여러 주 나에게서 떨어져 있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한 해 넘도록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것, 곧 단 한 시간도 그녀를 혼자 두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망치는 셈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나를 배신할 시간과 기회를 내준다면 내 모든 대비책은 헛일이 되고 말 것이고, 설령 끝내 그녀가 내게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녀가 혼자였던 그 시절을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을 것이며, 설령 끝내 내가 이긴다 해도, 지난 일에서는,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이, 나는 패한 쪽이 될 터였다.
알베르틴을 돌아오게 할 방법으로 말하자면, 그녀가 오직 더 유리한 조건으로 다시 불러 주기를 바라며 나를 떠났을 뿐이라는 가설이 그럴듯해 보일수록 그 방법들의 성공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그리고 알베르틴의 진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를테면 분명 프랑수아즈 같은 이에게는, 이 가설이 더 그럴듯했다. 그러나 내 이성은, 어떤 언짢은 기분의 발작이나 어떤 태도를 두고 내가 무엇 하나 알기 전부터 그것을 그녀가 최종적인 떠남을 계획했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했던 그 이성은, 이제 그 떠남이 실제로 일어난 마당에 그것이 한낱 가장(假裝)일 뿐이라고는 좀처럼 믿기 어려워했다. 나는 내 이성이라고 말하지, 나 자신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가장이라는 가설은 그것이 있을 법하지 않을수록 내게 더욱 절실해졌고, 개연성에서 잃은 만큼 힘을 얻었다. 우리가 심연의 가장자리에 서서 마치 신이 우리를 버린 것처럼 여겨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주저 없이 그분께 기적을 기대하게 되는 법이다.
이 모든 일에서 나는 가장 무기력하면서도 가장 조바심 내는 탐정이었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알베르틴의 도피는, 그녀를 남들에게 감시시키는 습관 탓에 내게서 사라졌던 능력들을 되돌려 주지는 않았다. 나는 오직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를 찾는 일에 누구를 부릴 것인가. 그 사람은 생루였고, 그는 응해 주었다. 그 오랜 나날의 불안을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는 것이 나를 기쁨으로 채웠고, 나는 성공의 확신에 몸을 떨었으며, 손은 프랑수아즈가 “알베르틴 양이 가 버렸어요”라고 말했을 때 나를 흠뻑 적셨던 그 땀기 하나 없이 예전처럼 다시 문득 말라 있었다.
독자는 기억하리라. 내가 알베르틴과 함께 살기로, 심지어 그녀와 결혼하기로까지 마음먹은 것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으며, 그녀가 뱅퇴유 양과의 옛 버릇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음을. 그것은 발베크에서 그녀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양 내게 털어놓았을 때 그 폭로가 불러일으킨 끔찍한 고뇌 속에서였고, 나는, 비록 그것이 내 생애에서 그때까지 느꼈던 가장 큰 슬픔이었음에도, 최악의 억측 속에서도 감히 상상해 본 적 없던 그 일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척하는 데 성공했다. (질투란, 사실이 아닌 자잘한 억측을 짜내는 데 시간을 다 쓰면서도, 정작 진실을 밝혀내야 할 때가 되면 얼마나 상상력이 모자란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먼저 알베르틴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필요에서 태어난 이 사랑은, 그 뒤로도 제 기원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빼는 것’을, 이곳저곳으로 가 버리는 것을 내가 막을 수만 있다면, 그녀와 함께 있는 것 자체는 내게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막기 위해 나는 그녀와 어울려 다니는 사람들의 감시와 동행에 기댔고, 그들이 하루 끝에 그런대로 안심되는 보고만 해 주면 내 불안은 이내 기분 좋게 사라지곤 했다.
어떤 조처를 취하든 알베르틴이 바로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있으리라고 스스로 다짐해 두었기에, 프랑수아즈가 알베르틴이 가 버렸다고 말했을 때 내게 안겨 준 슬픔에도 나는 잠시 말미를 주었다(그 순간 불시에 허를 찔린 내 마음은 한동안 그녀의 떠남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그러나 얼마간의 중단 뒤, 제 나름의 독립된 생명의 충동으로 처음의 고통이 내 안에서 저절로 되살아났을 때, 그것은 이전만큼이나 예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날 저녁 알베르틴을 돌아오게 하겠다고 내가 스스로에게 준 위안의 약속보다 앞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가라앉혔을 그 말을, 내 고통은 듣지 못했다. 그녀의 귀환을 이루어 낼 방법을 다시 한 번 가동하려고, 그런 태도가 내게 크게 성공을 가져다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알베르틴을 사랑하게 된 뒤로 나는 늘 그 태도를 취해 왔기에,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척, 그녀의 떠남에 마음 아프지 않은 척 굴도록 선고받았고, 그녀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도록 선고받았다. 내가 겉으로 그녀를 아주 단념한 것처럼 보이는 만큼, 그녀를 돌아오게 하려는 내 노력은 그만큼 더 힘차질 수 있었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기로, 그 편지에서 그녀의 떠남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고, 그러는 한편 생루를 내려보내 마치 내가 모르는 일인 양 봉탕 부인에게 알베르틴을 되도록 빨리 돌아오게 하라는 가장 가혹한 압박을 넣게 하려 했다. 물론 나는 질베르트를 통해, 처음에는 꾸며 낸 것이던 무관심이 끝내는 진짜가 되어 버리는 그런 편지의 위험을 이미 겪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가 질베르트에게 썼던 것과 같은 종류의 편지를 알베르틴에게 쓰지 못하게 나를 붙들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은 결국, 본래 되풀이되게 마련인 우리 성격의 한 특징을 우리 자신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특징은 우리가 이미 한 번 스스로 나서서 두드러지게 한 적이 있는 까닭에 더욱 뚜렷이 다시 나타난다. 그리하여 처음 그 일을 이끌었던 자발적 충동은 기억이 건네는 온갖 암시로 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개인에게(그리고 제 잘못을 고집하며 그것을 더욱 키워 가는 국민들에게조차) 가장 피하기 어려운 인간적 표절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