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내 자신의 인상은, 지난번보다 더 즐겁기는 했어도 실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이제 그것을, 미리 존재하던 추상적이고 그릇된 극적 천재의 관념에 견주어 시험하지 않았고, 극적 천재란 바로 이것임을 이제 깨달았다. 방금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라 베르마를 처음 들었을 때 아무런 즐거움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보다 더 이전에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를 만나곤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너무나 강한 욕망을 품고 그녀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내 두 실망 사이에는 어쩌면 이 닮음뿐 아니라 한층 더 깊은 또 다른 닮음이 있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닌 사람이나 작품(그 문제라면 하나의 연기도 마찬가지다)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그 사람이나 작품 고유의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아름다움’, ‘문체의 폭’, ‘비장미’ 따위의 관념을 가지고 가는데, 그것들은 달리 더 나은 것이 없을 때 ‘반듯한’ 얼굴이나 재능의 흔해 빠진 볼거리 속에서 발견했다고 착각했을 법한 것들이지만, 우리의 비평 정신 앞에는 지적으로 대응할 만한 것을 조금도 지니지 못한 하나의 형식이 집요하게 도전해 오고, 그 안에서 정신은 미지의 요소를 찾아내 따로 떼어 놓아야만 한다. 그것은 날카로운 소리, 기이하게 묻는 듯한 억양을 듣는다. 정신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것이 좋은 것인가? 지금 내가 느끼는 이것이 감탄인가? 저것이 빛깔의 풍요로움인가, 고귀함인가, 힘인가?” 그러면 다시 그것에 답하는 것은 날카로운 목소리, 묘하게 묻는 듯한 어조, 곧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자아내는, 온전히 물질적이며 ‘해석의 폭’ 따위가 들어설 자리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그 전제적인 인상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까닭에,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일수록, 우리가 진심으로 귀 기울인다면, 우리를 가장 뼈저리게 실망시키기 마련이니, 우리 관념의 곳간에는 하나의 개별적 인상에 들어맞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라 베르마의 연기가 내게 보여 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고귀함이란, 대사법의 지성이란 바로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폭넓고 시적이며 힘찬 해석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아니 오히려, 그런 수식어들이 관례적으로 붙는 대상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다만 그것은 우리가 고전 신화 속에는 자리도 없는 행성들에 마르스, 베누스, 사투르누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방식일 따름이었다. 우리는 한 세계에서 느끼고, 다른 세계에서 생각하며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 그 둘 사이에 우리는 어떤 대응 관계를 세울 수는 있으나 그 간극에 다리를 놓지는 못한다. 내가 라 베르마를 처음 들으러 갔던 그날 오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곤두세우고서, ‘해석의 고귀함’이니 ‘독창성’이니 하는 내 관념들을 짜 맞추는 데 얼마간 애를 먹었고, 잠깐 넋을 놓은 뒤에야 겨우 박수를 터뜨렸는데, 그 박수는 마치 내 실제 인상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내 선입관과, 곧 “드디어 나는 라 베르마를 듣고 있다”고 속으로 되뇌며 느끼던 즐거움과 이어져 있는 듯했으니, 그때 내가 건너야 했던 이 간극, 이 균열은 자못 좁은 것이었다. 그리고 뚜렷이 개성적인 한 사람, 또는 예술 작품과 아름다움의 관념 사이에 있는 그 차이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과 사랑, 혹은 감탄의 관념 사이에도 꼭 그만큼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것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라 베르마를 듣는 데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지 못했다(그보다 더 이전에 질베르트를 보는 데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글쎄, 나는 이걸 감탄하지는 않는걸.” 그러나 그때 나는 오직 라 베르마의 연기가 지닌 비밀을 알아내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 하나에만 골몰해 있었으며, 그녀의 연기에 담긴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마음을 되도록 활짝 열려 애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감탄이었음을 나는 이제 깨달았다.
라 베르마의 배역 연기가 그 계시에 지나지 않았던 이 천재는, 과연 라신의 천재이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처음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페드르의 막이, 관객의 열광적인 커튼콜 속에서 내리자 나는 곧 그 착각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 갈채 한가운데서 그 늙은 여배우는, 분에 못 이겨, 자그마한 몸을 한껏 곧추세우고, 자리에서 옆으로 돌아앉아, 얼굴 근육을 굳히고 가슴 위로 팔짱을 껴서, 자기는 남들처럼 박수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스스로에게는 대단해 보였으나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간 항의를 한결 두드러지게 하려 했다. 뒤이어진 작품은, 한때 내가,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당장 상연되는 그 공연 바깥에서는 아무런 존재도 지니지 못한 만큼, 으레 하찮고 두루 통하는 데가 없으리라 여기던 그런 새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에 대해서는, 고전을 볼 때와 달리, 걸작의 무한함과 영원함이 무대 각광의 너비와, 그 걸작을 무슨 즉석용으로 쓴 작품이나 다름없이 깔끔하게 끝내 버리는 공연의 길이만큼의 공간과 시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실망은 없었다. 게다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언젠가는 유명해지리라 내가 느낀 대목이 새로 나올 때마다, 나는 그 작품이 과거에 얻지 못하도록 가로막혔던 명성 대신, 그것이 미래에 누리게 될 명성을 거기에 보태었으니, 그것은 걸작들이 처음 초라하게 상연되던 날, 곧 이제껏 아무도 들어 본 적 없는 제목 하나가 언젠가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 옆에, 똑같이 그윽한 빛에 잠긴 채 나란히 놓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보이던 그날의 걸작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과정과는 정반대되는 정신의 과정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 배역은 언젠가 그녀의 가장 빼어난 배역들의 목록에, 페드르 역 곁에 나란히 놓일 것이었다. 물론 그 작품 자체로는 아무런 문학적 가치도 없기는 했다. 그러나 라 베르마는 이 작품에서도 저 작품에서와 똑같이 숭고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극작가의 작품이란 여배우에게는 제 해석의 걸작을 빚어내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재료의 성질이 어떠한지는 비교적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마치 내가 발베크에서 만났던 위대한 화가 엘스티르가, 아무런 특색 없는 학교 건물과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인 대성당에서 똑같이 값진 두 폭의 그림을 위한 영감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화가가 집이며 수레며 사람들을 그것들을 모두 엇비슷하게 만드는 어떤 폭넓은 빛의 효과 속에 녹여 넣듯이, 라 베르마도 공통의 거푸집 속에 한데 녹아들어 하나의 높이로 낮추어지거나 높여진 낱말들 위로, 못한 예술가라면 서로서로 정성껏 갈라놓았을 그 낱말들 위로, 공포나 애틋함의 커다란 천을 펼쳐 덮었다. 물론 낱말들은 저마다 제 나름의 억양을 지니고 있었고, 라 베르마의 대사법은 시행의 운율을 알아듣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운(韻) 하나를 들을 때, 곧 앞선 운과 동시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그 앞선 운에서 촉발되었으되 새로운 관념의 변주를 끌어들이는 어떤 것을 들을 때, 하나는 지적이고 다른 하나는 운율적인 두 체계가 서로 겹쳐지는 것을 우리가 의식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질서 잡힌 복잡함의, 아름다움의 첫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라 베르마는 동시에 제 낱말들을, 제 대사들을, 나아가 대사 전체를 그것들보다 더 광대한 소리의 호수 속으로 흘려보냈고, 그 호수의 가장자리에서 그것들이 어쩔 수 없이 멈추고, 뚝 끊기는 것을 보는 일은 하나의 기쁨이었다. 이는 시인이 이제 막 튀어나오려는 낱말을 운을 맞추는 지점에서 한순간 머뭇거리게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고, 작곡가가 제 대본의 갖가지 낱말을 그 낱말들을 거스르고 붙잡고 다스리는 하나의 리듬 속에 녹여 넣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라 베르마는 라신의 시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 극작가의 산문 문장 속에도, 슬픔과 고귀함과 열정의 저 광대한 이미지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니, 그것들은 그녀 자신의 개인적 예술이 낳은 걸작이었고, 우리가 한 화가가 서로 다른 모델을 그린 초상화들에서 그 화가를 알아보듯, 그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지난번처럼, 라 베르마의 자세들을, 곧 그녀가 오직 한순간 각광의 빛줄기 속에서만 내주었다가 이내 스러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그 고운 빛깔의 효과를 붙잡아 영원히 붙들어 두고 싶은 욕망도, 그녀에게 대사 한 줄을 백 번이고 되풀이하게 하고 싶은 욕망도 더는 없었다. 나는 깨달았다, 나의 애초의 욕망이 시인의, 여배우의, 그리고 그녀의 무대를 감독하던 위대한 장식 예술가의 의도보다 더 까다로운 것이었음을, 그리고 대사가 읊어지는 동안 그 위로 떠돌던 그 매력, 끊임없이 다른 자세로 바뀌던 그 불안정한 포즈들, 잇따라 이어지던 그 화면들이야말로, 연극이라는 예술이 빚어내기로 떠맡은, 그리고 지나치게 넋을 빼앗긴 청자가 그것을 영원히 붙박아 두려 든다면 스러져 버릴, 덧없는 결과이자 순간의 대상이며 변화하는 걸작이었음을. 나는 다른 날 다시 와서 라 베르마를 또 듣겠다는 결심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만족했다. 내가 감탄의 대상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골똘히 감탄할 때에야, 그 대상이 질베르트든 라 베르마든, 나는 이튿날 받게 될 인상에게, 어제의 인상이 내게 베풀기를 거부했던 그 즐거움을 미리 요구하곤 했던 것이다. 이제 막 느끼기 시작한, 어쩌면 좀 더 이로운 데에 쓸 수도 있었을 그 기쁨을 굳이 분석하려 들지 않은 채, 나는, 옛날 학교 친구에게 말하곤 했을 법하게, 속으로 말했다. “암, 나는 라 베르마를 첫째로 꼽아!” 그러면서도, 나의 이런 선호의 단언이, 혹은 그녀에게 ‘첫째’ 자리를 매기는 이런 시상이, 그것이 내게 부수적으로 되찾아 줄 마음의 평온이 어떠하든 간에, 어쩌면 라 베르마의 천재를 그리 정확히 나타내 주지는 못하리라는 어렴풋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 두 번째 작품의 막이 막 오를 때 나는 게르망트 부인의 관람석을 올려다보았다. 대공비는, 내 정신이 허공 속까지 좇아가던 절묘한 선 하나를 불러일으키는 몸짓으로, 고개를 관람석 뒤쪽으로 돌리는 참이었다. 그녀의 일행은 모두 일어서서 역시 뒤쪽을 향하고 있었고, 그렇게 그들이 이룬 이중의 산울타리 사이로, 방금 그 관람석에 들어선 게르망트 공작부인이, 자기가 바로 그런 여신이라는 온갖 확신과 위엄을 지니고서, 그러나 공연 도중에 이토록 늦게 도착해 남들을 모두 일어서게 만드는 데서 오는, 그녀가 걸친 흰 모슬린 옷과 어우러지던 기이한 유순함을 띠고서, 마치 솜씨 좋게 뒤섞인 소박함과 수줍음과 당혹의 기색이 그녀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누그러뜨리듯, 사촌을 향해 다가와, 앞줄에 앉은 금발의 젊은이에게 깍듯이 절을 하고는, 다시 동굴 깊숙한 곳에 떠 있는 그 양서류 괴물들 쪽으로 몸을 돌려, 자키 클럽의 이 반신들에게, 곧 그 순간, 그 모든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팔랑시 씨야말로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사내들이었던 그 반신들에게, 지난 십오 년 동안 그들과 날마다 이어 온 교유를 넌지시 일깨우는, 오랜 절친한 벗의 스스럼없는 “안녕하세요”를 건넸다. 그녀가 벗들에게 보내던 그 미소 띤 눈길, 곧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차례로 손을 내맡기는 동안 쪽빛 광채로 빛나던 그 눈길의 신비를 나는 느꼈으나, 그 수수께끼는 풀 수 없었으니, 만일 내가 그 눈길의 프리즘을 분해하고 그 결정(結晶)을 분석할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 눈길은 그 순간 그 속에 드러나던 미지의 삶의 형식이 지닌 본질을 내게 밝혀 주었을지도 모른다. 게르망트 공작이 아내를 뒤따랐는데, 외알 안경의 번뜩임, 이의 반짝임, 카네이션이며 주름 잡힌 셔츠 앞섶의 새하얌이, 제 빛에 자리를 내주려는 듯, 그의 눈썹과 입술과 외투의 어둠을 흩뜨려 놓았다. 그는 고개는 까딱도 않은 채, 앞으로 뻗은 손을 그들의 어깨 위로 수직으로 떨구는 손짓 하나로, 제게 길을 터 주던 그 하급 괴물들에게 도로 자리에 앉으라 명하고는, 금발의 젊은이에게 깍듯이 절을 했다. 공작부인이, 소문에 따르면 그녀가 ‘과장’이라 부르던 것을 두고 곧잘 놀려 대던 그 사촌이(그토록 전형적으로 프랑스적이고 절제된 그녀 자신의 관점에서는, ‘과장’이라는 그 말이 게르만 사람의 시정과 열광에 붙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리라), 오늘 저녁 공작부인이 ‘한껏 치장했다’고 여기던 그런 의상 가운데 하나를 걸치고 오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그녀에게 좋은 취향에 관한 한 수 가르쳐 주기로 작정했다고 말할 법도 했다. 대공비의 정수리에서 흘러내려 목덜미를 쓸던 그 놀라운 솜털 깃장식 대신, 조개껍데기와 진주로 된 그물 대신, 공작부인은 머리에 소박한 백로 깃털 장식 하나만을 꽂았는데, 그것은 반듯한 눈과 우뚝한 코 위로 솟아올라 새 머리 위의 볏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목과 어깨는 눈처럼 흰 모슬린 더미에서 솟아 나와 있었고, 그 위로 백조 솜털 부채가 나부꼈으나, 그 아래로 그녀의 드레스는, 그 몸통 부분의 유일한 장식이라고는 수도 없이 많은 반짝이 장식(자잘한 금속 막대와 구슬이거나, 어쩌면 인조 보석이었을)뿐이었는데, 그야말로 영국식이라 할 만한 정확함으로 그녀의 몸매를 빚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상이 그토록 달랐음에도, 대공비가 사촌에게 자기가 앞서 앉아 있던 의자를 내준 뒤,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돌려 상대를 흡족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게르망트 부인은 이튿날 대공비가 쓰고 있던, 조금 지나치게 복잡한 그 머리 장식을 입에 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을지도 몰랐으나, 그러면서도 틀림없이, 그래도 그것이 자못 사랑스럽고 놀랍도록 잘 매만져진 것이었다고 단언하리라. 그리고 대공비는, 제 취향으로는 사촌의 옷차림에서 어딘가 조금 차갑고, 조금 엄격하며, 조금 ‘맞춤 양복 같은’ 데를 느꼈으면서도, 그 뻣뻣한 수수함 속에서 절묘한 세련됨을 발견하리라.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조화, 곧 그들의 교양이 두루 미리 정해진 대로 행사하던 그 인력(引力)은, 옷차림뿐 아니라 태도에서의 대비마저도 무디게 만들었다. 그들의 세련된 몸가짐이 두 사람 사이에 그어 놓은 그 보이지 않는 자기(磁氣)의 경선(經線)을 따라, 한쪽에서는 대공비의 활달한 천성이 딱 멎었고, 다른 쪽에서는 공작부인의 격식 차린 반듯함이 스스로 이끌려 와 누그러지며 다정함과 매력으로 바뀌었다. 지금 상연되고 있는 작품에서, 라 베르마가 거기서 얼마나 많은 개인적 시정을 뽑아냈는지 알려면 그녀가 맡은 배역, 오직 그녀만이 해낼 수 있는 그 배역을 아무 다른 여배우에게나 맡겨 보기만 하면 되듯이, 발코니로 눈을 들어 올린 관객은 그곳 두 개의 조금 작은 관람석에서, 게르망트 대공비의 ‘치장’을 흉내 내려던 ‘꾸밈’이 어떻게 모리앙발 남작부인을 그저 별나고 잘난 체하며 상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는지, 반면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옷차림과 스타일을 본뜨려던, 값이 많이 들었을 만큼이나 공들인 노력이 어떻게 캉브르메르 부인을, 철사에 매달아 세운 듯 뻣뻣하고 꼿꼿하며 메마르고 모난, 머리에 까마귀 깃털 장식을 수직으로 꽂은 어느 시골 여학생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부인에게 걸맞은 자리는, 오직 그 철의 가장 빛나는 스타들로써만 관람석들이(맨 위층의 관람석들마저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사람 꽃이 넘칠 듯 담긴 커다란 광주리 같았고, 플러시 천을 씌운 칸막이의 붉은 끈으로 그것들이 놓인 회랑에 붙들어 매여 있었다) 하나의 파노라마를 이루던 그런 극장은 아니었으니, 그 파노라마는 죽음이며 추문이며 병이며 다툼이 머잖아 뒤바꾸어 놓을 것이었으되, 이날 저녁만은 주의(注意)와 열기와 어지러움과 먼지와 맵시와 권태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무의식적인 기다림과 고요한 마비의 저 영원한 한순간 속에 꼼짝 않고 붙들려 있었으니, 그 순간은 돌이켜 보면 언제나 폭탄의 폭발이나 불길의 첫 일렁임에 앞서 있었던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캉브르메르 부인이 그날 그 자리에 나타난 사정은 이러했다. 대개 진정한 왕족이 그러하듯 속물근성이라고는 없는 파름 대공비는, 그 대신 자선에 대한 긍지와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마음은 스스로 예술이라 믿는 것에 대한 취향과 나란히 그녀의 가슴속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최상류 귀족 사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러 자선 사업으로 자기와 인연을 맺은 캉브르메르 부인 같은 여인들에게 여기저기 특별석을 몇 개씩 나누어 주곤 했다. 캉브르메르 부인은 게르망트 공작부인과 게르망트 대공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는데, 실은 두 사람 중 누구와도 정식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아는 척 눈길을 구걸한다는 의심을 살 일이 없어 그만큼 더 마음 편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두 대귀부인의 방문 명부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지난 십 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인내로 향해 나아온 목표였다. 앞으로 오 년이면 어쩌면 거기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셈해 두었다. 그러나 가차 없는 병에 걸린 터라, 그 병의 냉혹한 성질을 자기는 안다고 여겼으므로(그녀는 자신의 의학 지식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때까지 살아 있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이날 저녁 그녀는 적어도 이런 생각으로 흐뭇했다. 거의 알지도 못하는 이 여인들이, 자기 곁에 그들과 같은 부류의 한 남자가 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것. 바로 다르장쿠르 부인의 오라비인 젊은 보세르장 후작으로, 그는 두 세계를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고, 아래 세계의 여인들은 위 세계 여인들의 눈앞에서 그를 장신구처럼 두르고 뽐내기를 더없이 기뻐했다. 그는 캉브르메르 부인 뒤편에 비스듬히 놓인 의자에 앉아, 오페라글라스로 다른 특별석들을 훑을 수 있게 했다. 장내의 모두를 알고 있던 그는, 친구들에게 인사하려고, 아름답게 굽은 몸매와 준수한 금발 머리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담아,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상체를 꼿꼿이 세웠고, 미소가 그의 푸른 눈을 밝혔으니, 거기에는 공손함과 초연함이 뒤섞여 있어, 마치 궁정의 자존심에 찬 대귀족을 그린 옛 판화처럼, 직사각형 액자 안에 섬세하게 새겨진 채 벽에 비스듬히 걸린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캉브르메르 부인과 함께 연극을 보러 가자는 이런 초대에 자주 응했다. 극장 안에서도, 나올 때 로비에서도, 그는 주위에 보이는 한결 화려한 친구들의 무리 한가운데서 정중하게 그녀 곁을 지켰는데, 어색해질세라 그들에게는 말을 붙이지 않았으니, 마치 떳떳지 못한 사람과 함께 있기라도 한 듯했다. 그런 순간에 디아나처럼 발걸음 가볍고 눈부신 게르망트 대공비가, 견줄 데 없는 망토 자락을 뒤로 끌며, 뭇 사람의 고개를 돌리게 하고 뭇 시선을(그중에서도 누구보다 캉브르메르 부인의 시선을) 거느린 채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 보세르장 씨는 짐짓 동행과의 대화에 열중하며, 대공비의 다정하고 눈부신 미소에는 마지못한 듯 억지로만, 게다가 그 순간에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거북할 수도 있는 사람 특유의 교양 있는 조심성과 사려 깊은 냉담함으로 응할 뿐이었다.
설령 캉브르메르 부인이 그 특별석이 대공비의 것임을 미리 알지 못했더라도, 게르망트 공작부인이 손님 쪽임은 능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녀가 초대한 이에 대한 예의로 무대와 일층 객석의 광경을 한결 열띤 관심으로 둘러보는 태도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원심력과 동시에, 사교적이고자 하는 바로 그 욕구에서 생겨난, 크기는 같되 방향은 반대인 힘이 그녀의 주의를 자기 자신의 차림새로, 곧 깃 장식과 목걸이와 몸판으로, 그리고 대공비의 그것으로 다시 끌어당겼다. 공작부인은 이로써 자기가 대공비의 신하이자 종임을 선언하는 듯했으니, 오직 대공비를 보러 그 자리에 온 것이며, 특별석의 정식 주인이 일어나 자리를 뜰 마음이 내키면 어디로든 뒤따를 채비가 되어 있었고, 나머지 장내는 그저 낯선 이들로 이루어진, 진기한 구경거리로나 눈길을 줄 만한 곳으로 여겼다. 하기야 그 장내에도 그녀에게는 친구가 여럿 있어 다른 저녁이면 으레 그들의 특별석을 찾곤 했고, 그럴 때면 이번과 똑같은, 배타적이고 조건부이며 한 주 단위로 갈리는 충성을 어김없이 드러내 보이곤 했지만 말이다. 캉브르메르 부인은 그날 저녁 그녀가 거기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공작부인이 게르망트에 아주 늦게까지 머무르고 있는 줄 알았고, 아직도 거기 있으려니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도 들은 바 있었다. 때때로 파리에서 참석할 만하다 싶은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게르망트 부인은 사냥 나온 이들과 차를 든 뒤 곧바로 마차 한 대를 대령시켜, 해가 저물 무렵 짙어 가는 숲의 어둠을 뚫고 힘차게 달려 나가서는, 이어 큰길로 접어들어 콩브레에서 기차를 잡아타고 그날 저녁 안으로 파리에 닿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라 베르마를 들으러 일부러 게르망트에서 올라왔는지도 몰라.' 캉브르메르 부인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 생각에 경탄했다. 그리고 그녀는 스완이, 샤를뤼스 씨와 함께 쓰던 그 모호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공작부인은 파리에서 가장 고결한 영혼 가운데 하나요, 더없이 세련되고 더없이 엄선된 사교계의 정수지요.” 나로 말하면, 게르망트, 바이에른, 콩데라는 이름들에서 두 사촌 자매의 삶과 생각이라 상상하던 것을 길어 내던 터라(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더는 그런 것을 갖다 붙일 수 없었으니, 이미 그 얼굴을 보아 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평가의 평보다도 페드르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차라리 듣고 싶었다. 비평가의 의견에서라면 나는 그저 지성만을, 내 것보다 뛰어나되 종류는 같은 지성만을 발견했을 테니까. 그러나 게르망트 공작부인과 대공비가 무슨 생각을 할지, 이 두 시적인 존재의 본성을 짚어 낼 더없이 값진 실마리가 되어 줄 그 의견을, 나는 그들의 이름의 힘을 빌려 상상했고, 거기에 비이성적인 매력을 부여했으며, 열병 든 가련한 자의 갈증과 갈망으로, 페드르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내게 내어 주기를 바란 것은, 게르망트 쪽을 따라 거닐며 보낸 여름날 오후의 매력이었다.
캉브르메르 부인은 두 사촌 자매가 정확히 어떤 차림을 했는지 알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들의 의상이 오로지 그들만의 것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붉은 깃과 푸른 안단을 댄 제복이 한때 게르망트가와 콩데가에만 속했던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차라리 새에게 깃털이 고유하듯이, 곧 아름다움을 돋우는 동시에 제 몸의 연장이기도 한 그런 의미에서였다. 이 두 부인의 몸단장은 내게 그들의 내면 활동이 눈처럼 새하얗게, 혹은 색색으로 무늬 지어 구체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게르망트 대공비가 짓는 몸짓들을 내가 보며 그것이 그녀 안에 잠재한 어떤 관념에 대응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공비의 이마에서 아래로 드리운 깃 장식과 사촌의 반짝이는 스팽글 몸판은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듯했고, 이 부인 혹은 저 부인에게 오직 그녀만의 속성이어서, 나는 그 의미를 몹시도 알고 싶었다. 유노에게 공작이 떼어 놓을 수 없듯 극락조는 그것을 두른 이와 떼어 놓을 수 없어 보였고, 미네르바의 술 달린 번득이는 아이기스를 다른 여인이 빼앗을 수 없듯, 저 스팽글 몸판도 어떤 여인이 가로챌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특별석으로 눈을 돌렸을 때, 차갑고 생기 없는 우의화가 그려진 극장 천장을 볼 때보다 훨씬 더, 마치 여느 때 그것을 가리던 구름이 기적처럼 갈라진 덕분에, 진홍빛 천개 아래 환히 밝은 공간에서, 하늘의 두 기둥 사이에서, 인간 세상의 광경을 굽어보고 있는 신들의 회합을 본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짧은 변용을 어떤 동요와 함께 바라보았는데, 그 동요는 이 불멸의 존재들이 나를 모른다는 느낌에 얼마간 가라앉았다. 공작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을 때 나를 한 번 본 적이 있긴 하나 분명 그 일은 기억에 남겨 두지 않았을 터이고, 그녀가 특별석에서 차지한 자리 덕에 일층 객석에 모인, 이름도 없이 한데 뭉친 산호충 같은 관객들을 내려다보는 처지에 놓였다 해도 나는 조금도 괴롭지 않았으니, 내 개성이 그들의 그것 속에 녹아들었다는 흐뭇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떤 광학 법칙의 작용으로, 아마도 저 무심한 푸른 눈의 흐름 위에, 개별적 존재라고는 없는 원생동물의, 곧 나 자신인 그 원생동물의 흐릿한 윤곽이 그려졌을 바로 그 순간, 나는 한 줄기 빛이 그 눈을 밝히는 것을 보았다. 여신에서 여인으로 바뀌어 그 순간 천배는 더 사랑스러워 보인 공작부인이, 특별석 난간에 얹고 있던 흰 장갑 낀 손을 들어 내 쪽으로 가리키더니, 우정의 표시로 내게 흔들어 보였다. 내 시선은 대공비의 번득이는 눈에서 절로 피어난 불꽃에 사로잡힌 듯했는데, 그녀는 사촌이 대체 누구에게 그리 인사하는지 보려고 고개를 돌리다 무심결에 그 눈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한편 나를 기억해 낸 공작부인은 반짝이는 천상의 급류 같은 미소를 내게 쏟아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