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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⑦

3권 제1부 · 제1장

생루가 내게 품은 우정과 찬탄은 내게 과분해 보였고, 그때껏 나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별안간 나는 거기에 값어치를 매겼고, 그가 그것을 게르망트 부인에게 드러내 주었으면 싶었으며, 그에게 그리해 달라 청할 각오마저 서 있었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상속에서 밀려난 이들이나 그 밖의 온갖 따분한 자들이 일상에서 우리에게 그러듯이, 우리가 누리는 사소하고 자잘한 특권이란 특권은 죄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털어놓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것을 모른다는 데 우리는 애가 타고, 바로 그것이 결코 눈에 띄지 않기에 그녀가 이미 우리에 대해 지닌 평가에, 끝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을 그 이상의 이점의 가능성까지 보태 두었으리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찾는다.

생루는 오래도록 파리에 오지 못했는데, 본인 설명으로는 군무 때문이라 했으나, 더 그럴듯하게는 정부(情婦)와의 골칫거리 때문이었으니, 그 여자와는 이제껏 두 번이나 관계를 끊으려는 지경에 이르렀던 터였다. 그는 내가 그 수비대 도시로 자기를 찾아와 준다면 얼마나 기쁠지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도시의 이름은, 그가 발베크를 떠난 지 이틀 뒤, 벗에게서 받은 첫 편지의 봉투에서 읽었을 때 내게 그토록 큰 기쁨을 주었던 것이다. 그곳은 (온통 내륙에 둘러싸인 주변 풍경이 짐작케 하는 것만큼 발베크에서 멀지는 않았는데) 귀족적이고 군사적인 작은 요새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맑은 날이면 그 위로 이따금 아득히 어떤 간헐적인 소리의 아지랑이가 떠돌곤 했으니, 마치 늘어선 포플러 나무들이 그 굽이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강줄기를 그려 보이듯 그 소리가 열병(閱兵) 중인 연대의 움직임을 알려 주는 까닭에, 그 거리와 큰길과 광장의 대기 자체가 차츰 일종의 끝없는 진동으로, 음악적이면서 군사적인 진동으로 조율되어 버렸고, 짐수레바퀴나 전차의 지극히 평범한 소리조차 환청에 사로잡힌 귀에는 정적을 통해 무한히 되풀이되는 어렴풋한 나팔 소리로 길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곳은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아, 급행열차를 타면 돌아가 어머니와 할머니 곁에서 내 침대에 누워 잠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고통스러운 그리움에 사로잡혀, 나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이 도시에 머무르기로 결심할 만한 의지도 너무 모자랐지만, 짐꾼이 내 짐을 마차로 나르는 것을 막을 만한 의지도, 그 뒤를 따라 걸으면서 짐을 챙기는 여행자, 집 어디에도 기다리는 할머니 따위 없는 여행자의 홀가분한 마음을 짐짓 갖추지 않을 만한 의지도, 무엇을 원하는지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되어 정작 제가 원하는 바를 아는 듯한 사람의 완전한 초연함으로 마차에 오르지 않을 만한 의지도, 마부에게 기병 병영 주소를 대지 않을 만한 의지도 너무 모자랐다. 나는 생루가 그날 밤 내가 묵을 호텔에 와서 자 줄지도 모른다고, 그리하여 이 낯선 도시와 처음 부딪치는 충격을 덜 고통스럽게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위병 하나가 그를 찾으러 갔고, 나는 병영 문 앞에서, 11월 바람에 웅웅 울리는 그 거대한 돌배 앞에서 기다렸는데, 그 안에서는, 이제 여섯 시가 되었으므로, 순간마다 병사들이 둘씩 짝지어 거리로 나오면서, 마치 잠시 닻을 내린 어느 낯선 항구에 상륙하는 사람들처럼 비틀거렸다.

생루가 회오리바람처럼 움직이며 나타났는데, 외알 안경이 그 앞에서 허공에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나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그의 놀람과 기쁨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이거 참 낭패로군!” 문득 나를 알아보고 그가 귀 끝까지 붉어지며 소리쳤다. “방금 일주일 휴가를 받았는데, 다음 한 주가 지나야 다시 근무에서 풀려난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이 첫날 밤을 홀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쓰며(그는 누구보다도 내 잠자리의 고통을 잘 알았으니, 발베크에서 여러 번 그것을 눈여겨보고 달래 주었던 것이다), 그는 탄식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며 잔잔한 미소로, 다정하되 좌우가 어긋난 눈길로 나를 어르는데, 그 눈길의 절반은 곧장 그의 눈에서 나오고 나머지 절반은 외알 안경을 거쳐 나왔으나, 두 가지 다 한결같이 나를 다시 만나 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암시였고, 또한 내가 늘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이제 내게 절실히 관계되는 그 중대한 것, 곧 우리의 우정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다.

“이봐! 어디서 잘 셈이야? 정말이지, 우리가 식사하는 그 호텔은 권하고 싶지 않네. 박람회장 옆이라, 지금 막 무슨 행사가 시작돼서 지독하게 붐빌 거야. 아니, 플랑드르 호텔로 가는 게 낫겠어. 18세기풍의 작은 궁전인데 낡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지. 아주 ‘고풍스러운 저택을 내거든.’ ”

생루는 무슨 말에나 ‘같은 느낌을 준다’는 뜻으로 ‘낸다’라는 낱말을 썼는데, 이는 구어가 문어와 마찬가지로 이따금 이런 식으로 낱말의 뜻을 바꾸고 표현을 다듬을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문 기자들이 흔히 자기가 빌려 쓰는 ‘말투’가 어느 문학 유파에서 온 것인지 전혀 모르듯, 생루의 어휘와 말씨 자체도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심미가를 흉내 내어 형성된 것으로, 그는 그중 누구와도 직접 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나 그들의 말투가 간접적으로 그에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말을 맺었다, “내가 말하는 그 호텔은 자네의 유별나게 예민한 청각에도 그럭저럭 맞을 거야. 이웃이 없을 테니까. 하기야 그게 대단한 이점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아. 어차피 내일 다른 손님이 하나 올 수도 있으니, 그토록 불안정한 것을 노리고 굳이 그 호텔을 고를 값어치는 없겠지. 아니, 내가 그 호텔을 권하는 건 눈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야. 방들이 꽤 아담하고, 가구가 죄다 낡고 편안하지. 거기엔 뭔가 마음을 놓이게 하는 데가 있어.” 그러나 생루만큼 예술가가 못 되는 내게는, 멋진 집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란 피상적이고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내 커져 가는 번민을 가라앉혀 주지 못했으니, 그 번민은 오래전 콩브레에서 어머니가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이층에 올라오지 않던 때 느끼던 것만큼, 혹은 발베크에 도착하던 날 저녁, 유난히 천장이 높고 꽃 핀 풀 냄새가 나던 방에서 느끼던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생루는 내 붙박인 시선에서 이 모든 것을 읽어 냈다.

“하기야 자넨 이 멋진 궁전 따위엔 도통 관심이 없구먼, 가엾은 친구. 얼굴이 아주 새파래졌어. 그런데 나는 큰 짐승처럼 자네가 쳐다볼 마음조차 없을 태피스트리 얘기나 늘어놓고 있으니. 저들이 자네를 넣어 줄 방을 나도 아는데, 나로서야 더없이 활기가 돌아 좋지만, 자네처럼 예민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리란 걸 나도 잘 알아. 내가 자넬 이해 못 한다고 여기진 말게. 나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지만, 자네 처지가 되어 볼 수는 있으니까.”

그때 광장에서 말을 훈련시키던 하사 하나가, 말을 뛰어오르게 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지나가는 기병들의 경례에는 아랑곳없이, 길을 가로막는 자들에게는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미소 지으며 생루를 돌아보았고, 그가 벗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우리에게 경례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말이 앞발을 번쩍 쳐들었다. 생루가 말 머리로 달려들어 고삐를 붙잡고는, 겨우 말을 가라앉히고 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래,” 그가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자넬 온전히 이해해. 자네 자신만큼이나 절실히 자네 심정이 느껴진다고. 참 딱한 노릇이야,” 그는 다정하게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밤 자네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아침까지 이야기를 나눠 자네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도 있으련만,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책이라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지만, 그런 심정으로야 읽고 싶지 않겠지. 게다가 여기 내 근무를 대신 서 줄 사람도 구할 수가 없어. 여자가 나를 보러 내려오는 바람에 벌써 두 번이나 내리 빠졌거든.”

그리고 그는 반은 언짢은 마음에서, 반은 의사처럼 내 병에 어떤 처방을 쓰는 것이 가장 좋을지 궁리하느라 눈살을 찌푸렸다.

“얼른 가서 내 숙소에 불 좀 지펴 놔라,” 그가 지나가는 기병에게 소리쳤다. “서둘러, 어서 움직여!”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았고, 그의 외알 안경과 근시로 찡그린 눈길이 우리의 두터운 우정을 넌지시 비쳤다.

“아니! 자네가 여기, 내가 그토록 오래 자네를 생각하며 지낸 이 병영에 있다니, 내 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꿈만 같아. 그래 어떻게 지내나? 좀 나아졌길 바라네. 자네 얘기는 이따가 다 들려주게. 우리 내 방으로 올라가지. 광장에서 너무 오래 어정거리면 안 돼. 바람이 지독하거든. 나야 지금 못 느끼지만 자넨 익숙하지 않으니, 감기라도 들까 봐 걱정이야. 그래 일은 좀 어떤가, 시작은 했나? 아직? 자넨 참 별난 친구야! 나한테 자네만 한 재능이 있다면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글을 쓸 텐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재미있나? 참 딱한 노릇이지, 언제나 일할 채비가 된 건 나 같은 쓸모없는 놈들이고, 정작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자들은 안 하려 드니 말이야. 아 참, 자네 할머님은 어떠신지 여쭙는 걸 깜빡했군. 그분 프루동은 잘 간수하고 있어. 늘 곁에 두고 있다네.”

키 크고 잘생기고 위엄 있는 장교 하나가 계단 밑에서 느릿하고 엄숙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생루가 그에게 경례하며, 손을 군모 챙에 갖다 대는 그 순간만큼은 끊임없이 흔들리던 제 몸을 멈춰 세웠다. 그러나 그가 어찌나 힘껏 그 동작에 몸을 던지고, 어찌나 날카롭게 몸을 곧추세우고, 경례가 끝나자 어찌나 갑작스레 손을 툭 떨어뜨리며 어깨며 다리며 외알 안경의 자세를 죄다 바꾸어 놓았는지, 그 순간은 부동(不動)의 순간이라기보다 방금 그가 취한 지나친 동작과 곧 취하려는 동작이 서로 상쇄되어 떨리는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동안 장교는, 우리에게 조금도 다가오지 않은 채, 침착하고 자애롭고 위엄 있고 제왕다운, 요컨대 생루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그 자신도, 그러나 서두르는 기색 없이, 손을 군모 챙으로 들어 올렸다.

“대위님께 한마디 말씀만 여쭙고 오겠네,” 생루가 속삭였다. “미안하지만 내 방에 가서 기다려 주게. 삼층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방이야. 곧 갈 테니까.”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가, 사방으로 나부끼는 외알 안경을 앞세운 채, 느릿하고 위엄 있는 대위에게 곧장 다가갔는데, 대위의 말은 방금 끌려 나온 참이었고, 그는 말에 오르기에 앞서 무슨 역사화(歷史畫)에서처럼 짐짓 고상한 몸짓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니, 마치 제1제정 시절의 어느 전투에 나서기라도 하는 듯했지만, 실은 그저 집으로, 곧 동시에르에서 복무하는 동안 빌린 집으로 말을 타고 돌아가려는 것뿐이었고, 그 집은 이 나폴레옹 후예의 등장을 얄궂게 예고하기라도 하듯 레퓌블리크 광장이라 이름 붙은 광장에 서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못이 촘촘히 박힌 계단마다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하면서, 맨벽에 침상과 장비가 두 줄로 늘어선 병사(兵舍) 방들을 언뜻언뜻 들여다보았다. 누군가 내게 생루의 방을 일러 주었다. 나는 닫힌 문 앞에 잠시 서 있었으니,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옮기고, 또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나는 그 방이 비어 있지 않다고, 분명 누군가 있으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지핀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불은 도무지 가만있질 못하고 장작을 이리저리 옮겨 놓았는데, 그것도 아주 서투르게 그랬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불은 장작 하나를 난로 받침으로 굴러떨어뜨리고 또 하나를 연기 나게 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을 때조차, 불은 버릇없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는 불길이 이는 것을 본 순간부터 내게 불이 내는 소리임이 드러났으나, 만일 내가 벽 저편에 있었더라면 누군가 코를 풀며 이리저리 거니는 소리로 여겼을 것이다. 나는 방 안에 앉아 기다렸다. 리버티 벽걸이와 18세기 독일산 낡은 천이, 건물 나머지 부분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 곧 눅눅해진 토스트 냄새 같은 거칠고 밍밍하고 곰팡내 나는 냄새를 그럭저럭 몰아내 주었다. 바로 이곳, 이 아늑한 방에서라면 나는 차분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저녁을 들고 잠들 수 있었으리라. 생루는 그의 탁자를 어지럽힌 교재들로 하여, 그 사진들 틈에서(그 가운데서 나는 내 사진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사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침내 벽난로에 익숙해진 불빛 아래 거의 그 자리에 있는 듯싶었으니, 그 불은 열렬하고 소리 없고 충직한 경계 속에 웅크린 짐승처럼, 이따금씩만 스러져 가는 장작 하나를 불티로 부스러뜨려 떨어뜨리거나 불길의 혀로 굴뚝 벽을 핥는 것이었다. 나는 멀리 있을 리 없는 생루의 회중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를 들었다. 이 째깍임은 순간마다 자리를 옮겼으니, 시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리는 뒤에서, 앞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오는 듯했고, 때로는 아주 멀리서인 양 잦아드는 듯했다. 문득 나는 탁자 위의 시계를 보았다. 그러자 째깍임이 한자리에 고정되어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들렸다. 아니, 그 자리에서 들린다고 여긴 것이지, 실은 거기서 들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그것을 보았으니, 소리란 공간 속에 아무 자리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차라리 우리는 소리를 움직임과 결부시키고, 그럼으로써 소리는 그 움직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며 그것을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구실을 한다. 물론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귀를 솜으로 틀어막은 병자는, 바로 그 순간 생루의 벽난로에서 탁탁거리며 장작과 재를 빚어내다가 그것을 난로 받침으로 떨어뜨리던 불소리도 더는 듣지 못하고, 동시에르의 대광장 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 음악을 실어 나르던 전차의 지나감도 듣지 못한다. 그 병자가 책을 읽는다 치면, 책장은 마치 어느 신의 손가락이 넘기기라도 하듯 그의 앞에서 소리 없이 넘어갈 것이다. 물이 채워지는 욕조의 둔중한 우렛소리는 하늘의 새 지저귐처럼 가늘고 희미하고 아득해진다. 소리가 물러나고 옅어지면, 소리는 우리를 아프게 하던 온갖 힘을 잃는다. 방금 전만 해도 머리 위 천장을 부수는 듯한 망치질에 미칠 것 같았건만, 이제 우리는 잔잔한 기쁨 속에 그 소리를 그러모으니, 길가에서 스치는 산들바람과 어우러져 노니는 잎새들의 살랑임처럼 가볍고 부드럽고 아득한 것이다. 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 카드로 페이션스 놀이를 하다가, 마침내 우리가 카드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카드가 저 혼자 움직이며, 함께 놀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음을 앞질러 우리와 놀아 주기 시작한 것이라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만하다, 사랑의 경우에도(여기에 삶에 대한 사랑과 명성에 대한 사랑을 덧붙일 수 있으리니, 이 뒤엣것들을 아는 이들도 있는 듯하므로), 소음에 시달릴 때 그것이 그치기를 비는 대신 제 귀를 틀어막는 이들처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본보기 삼아, 우리의 주의와 방어력을 사랑하는 그 ‘상대’가 아니라 그 상대의 손에 우리가 겪는 고통의 능력 자체에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소리의 문제로 다시 돌아오면, 귓구멍을 막는 솜뭉치를 더 두툼하게 하기만 하면 그것은 방금 머리 위에서 요란한 곡조를 치던 처녀를 피아니시모로 가둬 버린다. 더 나아가 그 솜뭉치를 기름에 적시면, 대번에 온 집안이 그 폭군의 통치에 복종해야 하고, 그 법은 우리 집 문턱을 넘어서까지 뻗친다. 피아니시모로도 모자라, 솜뭉치는 당장 피아노를 닫으라 명하여 음악 수업이 뚝 끝나 버리고, 위층 방에서 서성이던 신사는 걸음 한복판에서 멈춰 서며, 마차와 전차의 움직임은 마치 군주라도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양 끊긴다. 그리고 실로 이렇게 소리가 옅어지는 것이 때로는 우리 잠을 지켜 주기는커녕 도리어 어지럽힌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귓속의 끊임없는 소음이, 거리와 집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해 줌으로써, 지루한 책처럼 마침내 우리를 잠들게 했건만, 오늘 밤에는 우리 잠 위에 드리운 정적의 장막을 뚫고 어떤 충격이, 다른 어떤 소리보다도 큰 충격이, 한숨처럼 부드럽고 다른 어떤 소리와도 무관하며 알 수 없는 그 충격이 기어이 제 소리를 들리게 하고야 마니, 그것이 내뿜는 해명의 요구만으로도 우리를 깨우기에 충분하다. 병자의 귀를 막고 있던 솜을 잠깐 걷어 내 보라, 그러면 순식간에 온전한 대낮이, 소리의 태양이 다시 밝아 와 그의 눈을 부시게 하며 그의 우주 속에 새로이 태어난다. 부랴부랴 추방되었던 소리의 무리가 되돌아오고, 우리는 마치 천사들의 합창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의 부활에 참례한다. 텅 빈 거리는 잠시 노래하는 전차들의 빠르고 잇단 날갯짓 소리로 가득 찬다. 침실 안에서 병자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불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불의 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솜뭉치를 더하거나 덜 때, 그것은 마치 우리가 바깥 세계의 울림의 폭을 넓혀 준 두 개의 페달을 번갈아 밟는 것과도 같다.

다만 일시적이지 않은 소리의 사라짐도 있다. 완전히 귀가 먼 사람은 침대맡에서 우유 한 냄비조차 데울 수 없으니, 기울어진 뚜껑 위로, 다가오는 눈보라의 그것과도 같은 희고 극지(極地)다운 반사광을 눈 뜨고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그가 마땅히 따라야 할 경고의 표시로서,(우리 주님이 물결에게 잔잔하라 명하셨듯이) 전류를 끊으라는 신호다. 이미 부풀어 오르며 들쭉날쭉 기어오르는 끓는 우유 막의 알 같은 덩이가 옆으로 미끄러지는 일련의 움직임 속에 절정에 이르러, 크림이 겉에 이룬 축 처진 돛을 가득 채워 불룩하게 부풀리고, 느닷없는 폭풍처럼 진줏빛 알갱이의 물보라를 뱃전 너머로 흩날려 보내기 때문이니, 만일 전류를 끊어 이 전기 폭풍을 제때 잠재우면 그 돛은 도로 저희끼리 접혀 썰물과 함께 가라앉으며 이제 목련 꽃잎으로 바뀌리라. 그러나 병자가 미처 필요한 조치를 재빨리 취하지 못하면, 이윽고 그의 물에 잠긴 책과 시계가 우윳빛 밀물 위로 겨우 삐죽 드러날 즈음, 그는 늙은 간병인을 불러야 할 터이고, 그 간병인은 그가 아무리 저명한 정치가나 이름난 작가라 할지라도 다섯 살배기 아이만도 못한 분별밖에 없다고 그에게 이를 것이다. 또 어떤 때에는 그 마법의 방 안, 우리와 닫힌 문 사이에, 조금 전까지 없던 사람이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손님으로, 그저 손짓 몸짓만 할 뿐이니, 마치 저 자그마한 인형극 무대 속의 인물 같아서, 말이란 것이 싫어진 이들에게는 더없이 마음 편하다. 그리고 이렇게 완전히 귀먼 사람에게는, 감각 하나를 잃는 것이 그것을 얻는 것 못지않게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해 주므로, 그는 이제 거의 에덴이 된, 아직 소리가 창조되지 않은 대지 위를 황홀히 거닌다. 가장 높은 폭포들이 오직 그의 눈만을 위해, 유리 같은 바다보다도 잔잔한 수정 리본을 펼쳐 보이니, 낙원의 폭포와도 같다. 귀가 멀기 전 그에게 소리란 어떤 움직임의 원인이 걸치고 있던 지각 가능한 형식이었으므로, 이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사물들은 원인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온갖 울리는 성질을 빼앗긴 채 저절로 일어나는 활동을 보이며 살아 있는 듯하다. 그것들은 저 혼자 움직이고, 멈추고, 불붙는다. 저 혼자 선사시대의 날개 달린 괴물들처럼 허공으로 사라진다. 이웃 하나 없이 외따로 떨어진 귀먹은 이의 집에서는, 그의 병이 온전해지기 전부터 이미 한층 조심스러워지고 소리 없이 이루어지던 시중이, 이제는 마치 동화 속 임금의 궁정에서처럼 벙어리들의 손으로 은밀하고도 날렵하게 그에게 베풀어진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처럼, 귀먹은 이가 창으로 내다보는 건물은, 그것이 병영이든 성당이든 시청이든 한낱 무대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어느 날 그것이 무너져 내린다면, 흙먼지 구름을 피우고 눈에 보이는 폐허를 남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대 위의 궁전보다도 물질성이 덜하면서도, 그렇다고 그만큼 옹색하지도 않게, 그것은 그 육중한 돌덩이가 무너져 내리면서도 소리 따위 천박한 것으로 온 사방을 지배하는 정적의 순결함을 더럽히는 일 없이, 마법의 우주 속으로 스러져 갈 것이다.

내가 기다리며 앉아 있던 작은 병사 방을 감돌던, 비록 상대적일 뿐인 그 정적이 이제 깨졌다. 문이 열리고 생루가 외알 안경을 떨어뜨리며 뛰어들었다.

“아, 로베르, 자넨 여기서 아주 편안하게 지내는구먼,” 내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저녁 먹고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정녕, 규정에 어긋나는 일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거기서 슬픔 한 점 섞이지 않은 어떤 안식을 맛볼 수 있었으리니, 근심 없이 다스려지고 자유로운 수천의 의지, 무심한 수천의 넋이 지켜 내던 그 고요와 경계와 명랑함의 기운에 감싸여, 시간이 행동의 형태를 띠는 그 병영이라 불리는 커다란 공동체 안에서, 바깥에서 시각을 알리던 그 서글픈 종소리 대신, 도시의 포석 깔린 거리에 마치 햇살 속에 떠도는 먼지처럼 그 울리는 기억이 영원히 살아 있던 저 군대 나팔 소리의 한결같이 즐거운 신호가 자리했으니, 그것은 반드시 들리리라 확신하는 목소리, 권위가 복종에게 내리는 명령일 뿐 아니라 지혜가 행복에게 내리는 명령이었기에 음악적인 목소리였다.

“그래서, 혼자 호텔로 가느니 나와 함께 여기서 자는 편이 낫겠단 말이지?” 생루가 미소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 로베르, 그걸 가지고 비아냥거리다니 자네도 참 짓궂군,” 내가 하소연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자네도 알잖나. 저기서 내가 얼마나 비참할지도 알면서.”

“좋았어! 자네 아주 나를 치켜세우는군!” 그가 대답했다. “실은 방금 자네가 오늘 밤 여기 머물고 싶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바로 그걸 대위님께 여쭈러 걸음을 멈춘 거라네.”

“그래서 허락을 받았단 말이야?” 내가 소리쳤다.

“조금도 반대하지 않으시더군.”

“아! 그분이 정말 좋아 죽겠네!”

“아니, 그건 좀 지나쳐. 자, 이제 내 당번병을 붙잡아서 우리 저녁 채비를 시켜야겠어,” 그가 말을 이었고, 나는 눈물을 감추려고 얼굴을 돌렸다.

우리는 생루의 친구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통에 몇 번이나 이야기를 끊겼다. 그는 그들을 죄다 도로 내쫓았다.

“여기서 나가. 썩 꺼져!”

나는 그들을 그냥 있게 해 달라고 그에게 청했다.

“아니, 정말이야. 저들은 자넬 진저리 나게 할 걸세. 하나같이 도무지 교양이라곤 없어서, 입만 열면 경마 아니면 마구간 이야기뿐이라니까. 게다가 나도 저들이 여기 있는 게 싫어. 내가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이 귀한 순간을 망쳐 놓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이 친구들은 머리가 빈 놈들이라 한다고 해서, 군대의 모든 것이 지성과 담을 쌓았다고 여기진 말게. 천만의 말씀이지. 여기 우리 소령님 한 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야. 그분이 우리에게 강의를 하나 해 주셨는데, 거기서는 전쟁사를 마치 하나의 논증처럼, 대수 문제처럼 다루신다네. 심미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거기엔, 귀납적이었다가 연역적이었다가 하는 야릇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자네도 틀림없이 감탄할 걸세.”

“그게 오늘 밤 나더러 여기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해 준 그 장교인가?”

“아니, 천만다행으로 그건 아니야! 자네가 그토록 하찮은 은혜를 두고 ‘좋아 죽겠다’는 그 사람은 세상천지에 다시없을 멍청이라네. 급식을 챙기고 장비를 검열하는 데는 도가 텄지. 상사며 재봉 담당이며와 몇 시간씩 붙어 지내니까. 거기서 그 위인의 됨됨이가 훤히 드러나는 거야. 그것 말고는, 여기 다들 그렇듯, 내가 얘기한 그 훌륭한 소령님을 몹시 깔본다네. 소령님이 프리메이슨인 데다 고해성사도 하러 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그분과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아. 보로디노 대공이라면 저런 뜨내기를 자기 집에 들이는 일이 결코 없었을 거야. 하기야 뭐, 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어지간히 뻔뻔한 노릇이지, 그 증조부가 소농이었고, 나폴레옹 전쟁만 아니었더라면 저 자신도 십중팔구 소농이었을 사람이 말이야. 그렇다고 그가 자기 자신의 어정쩡한 사회적 처지를 은근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이도 저도 아닌 신세지. 그래서 이 이른바 ‘대공’이라는 자는 자키 클럽에는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데, 거기 가면 어찌나 거북한지 그렇다는 거야,” 로베르가 덧붙였는데, 그는 바로 그 흉내 내는 기질에 이끌려 스승들의 사회 이론과 친척들의 세속적 편견을 함께 받아들인 나머지, 저도 모르게 인류에 대한 민주적 사랑을 제정(帝政) 귀족에 대한 경멸과 결합시켜 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의 이모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생루가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쩌면 내게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가 한층 더 사랑스럽게 여겨졌고, 그 대가로는 아주 하찮게만 느껴지는 온갖 시중을 그에게 들어 주고 싶어졌다. 이 사진은 내가 이제껏 게르망트 부인과 나눈 온갖 마주침에 하나를 더 보태 준 셈이었으니, 아니 그보다 더한, 오래 이어지는 마주침이었다. 마치 우리 관계가 문득 성큼 앞으로 나아가, 그녀가 정원 모자를 쓴 채 내 곁에 멈춰 서서, 내가 처음으로 여유롭게 그 도톰한 뺨을, 그 곡선을 이룬 목을, 그 가늘어져 가는 눈썹을(여태껏 그녀가 스쳐 지나가는 빠름과, 내 인상의 어리둥절함과, 기억의 불완전함에 가려져 있던 그것들을) 마음껏 바라보도록 허락하기라도 한 듯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울러 내가 목까지 올라오고 소매가 긴 몸통옷 차림으로밖에 본 적 없던 여인의 드러난 가슴과 팔을 찬찬히 바라보는 일은, 내게 관능적인 발견이요 값을 매길 수 없는 은총이었다. 거의 금단의 구경거리처럼만 여겨지던 그 선들을, 나는 거기서, 내게 조금이라도 값어치 있는 유일한 기하학의 교본에서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중에 로베르를 바라보다가, 나는 그 또한 이모의 사진을 조금 닮았음을 알아차렸으니, 그것은 내가 거의 그만큼이나 뭉클하게 여긴 어떤 신비로운 이치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서 곧바로 빚어진 것은 아닐지언정 두 얼굴이 어쨌든 공통된 근원을 지녔기 때문이다. 콩브레의 내 심상에 못 박혀 있던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이목구비, 곧 매의 부리 같은 코와 꿰뚫는 듯한 눈은, 로베르의 얼굴을(닮은꼴이되 더 갸름하고 살갗이 지나치게 고운 또 다른 사본으로) 오려 내는 데에도 밑본 노릇을 한 듯싶었으니, 그의 얼굴은 이모의 얼굴에 거의 포갤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에게서, 게르망트가의 그 특징적인 이목구비를, 저와 뒤섞이지 않는 세상 한복판에서 그토록 개성을 잃지 않은 채 새를 닮은 신성(神性)의 영광 속에 홀로 떨어져 있던 그 혈통의 이목구비를 간절한 그리움으로 바라보았으니, 그 혈통은 신화의 시대에 여신과 새의 결합에서 태어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