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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브레 ④

1권 · 콩브레

「이봐라, 얘야, 이제 그만 갈 시간이다.」 삼촌이 말했다.

나는 일어섰다. 분홍 옷 부인의 손에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을 나는 좀처럼 억누를 수 없었으나, 그렇게 하려면 그녀를 억지로 채어 가는 것만큼이나 큰 대담함이 필요하리라 느꼈다. 나는 속으로 「할까, 말까?」를 헤아리는 동안 가슴이 쿵쾅거렸고, 그러다가 적어도 무언가는 하려고, 마땅히 어찌해야 할지 자문하기를 그만두었다. 앞뒤 없이, 뜨겁게, 미친 듯이, 방금 그런 행동을 뒷받침하려고 찾아낸 온갖 이유를 죄다 팽개치고서, 나는 그녀가 내미는 손을 붙잡아 내 입술로 들어 올렸다.

「어쩜 이리 사랑스러울까! 벌써 여자 다룰 줄 아는 도련님이네, 제 삼촌을 닮았어요. 이 앤 완벽한 '신사(gentleman)'가 될 거예요.」 그녀는 그 낱말에 영국식 억양 같은 것을 입히려고 이를 앙다물며 말을 이었다. 「언제 한번 저희 집에 와서 '차 한잔(a cup of tea)' 하면 안 될까요, 해협 건너 우리 친구들 말마따나 말이에요. 아침에 저한테 '블루' 한 통만 보내면 돼요.」

'블루'가 무엇인지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부인이 쓰는 말의 절반도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속에 혹시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무례가 될 어떤 물음이 감춰져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 말들에서 바짝 주의를 거두지 못했고, 그러다 나는 몹시 지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니, 안 될 말이지. 그건 불가능해요.” 삼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 애는 온종일 집에서 바쁘답니다. 할 일이 아주 많아요. 학교에서 상이란 상은 죄다 타 온다니까요.” 삼촌은 내가 이 거짓말을 듣고 아니라고 끼어들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모르는 일이지요. 어쩌면 어린 빅토르 위고가 될지도, 보라벨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잖소.”

“어머, 나는 예술 하는 분들이 정말 좋아요.” 분홍 옷의 부인이 대답했다. “여자를 이해하는 데는 그런 분들만 한 이가 없지요. 그런 분들, 그리고 당신처럼 정말 근사한 남자분들 말이에요. 그런데 내 무식을 좀 용서하세요. 보라벨이라는 게 대체 누구예요, 뭐예요? 당신 응접실 그 작은 유리장 안에 든 금박 책들이 그건가요? 그거 나한테 빌려 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정말 소중히 다룰게요.”

남에게 책 빌려 주기를 몹시 싫어하는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현관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분홍 옷의 부인에게 흠뻑 반한 채, 담배 진에 절은 늙은 삼촌의 두 뺨에 열렬한 입맞춤을 퍼부었고, 삼촌은 어색하게나마, 이 방문을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으면서) 내비쳤으며,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삼촌의 다정함이 내게 어찌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언젠가 반드시 그 고마움을 갚을 길을 찾겠노라고 다짐했다. 그 인상이 어찌나 강했던지, 두 시간 뒤, 이런저런 알쏭달쏭한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그것이 내가 새로 얻은 중대한 지위를 부모님께 충분히 또렷이 전하지 못하는 듯싶자, 나는 그날 오후에 다녀온 방문을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털어놓는 편이 더 간단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서 삼촌에게 어떤 곤란을 끼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나 자신은 아무런 해도 보지 못한 그 방문에서 부모님이 무슨 해를 보리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우리 살아가는 나날 가운데, 어떤 친구가 편지를 쓰지 못한 어느 여인에게 부디 자기 대신 사과의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없는 날이 어디 있으며, 또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무게도 없는 그 침묵을 그 여인이라고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으리라 여기며 그 부탁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나 한가?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다른 이들의 머릿속이란 어떤 자극을 가해도 그에 맞는 특유의 반응을 일으킬 힘이 없는, 생명 없고 고분고분한 그릇에 지나지 않으리라 상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삼촌 집에서 알게 된 그 사귐의 소식을 부모님의 마음속에 들여놓으면, 그와 동시에 그 소개를 두고 내가 스스로 내린 호의적인 판단까지 함께 전해지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모님은 삼촌의 처신을 평가하는 데 이르러, 내가 따라 주셨으면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원칙에 기대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삼촌과 격한 “말다툼”을 벌였다는 것을 나는 건너건너 알게 되었다. 며칠 뒤, 삼촌이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삼촌에게 전하고 싶었던 슬픔과 고마움과 뉘우침을 단번에 온통 느꼈다. 이토록 큰 감정 앞에서, 그저 모자를 살짝 들어 인사하는 것쯤은 어울리지도 옹색하기 그지없다고, 게다가 내가 삼촌에게 가장 흔해 빠진 예의밖에는 차릴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토록 하잘것없는 몸짓은 삼가기로 마음먹고,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삼촌은 내가 그렇게 한 것이 부모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 여겼다. 삼촌은 끝내 부모님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 뒤로도 여러 해를 더 살다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다시는 삼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더는 아돌프 삼촌의 작은 응접실(이제는 늘 닫혀 있는)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 대신 프랑수아즈가 뒷부엌 문턱에 나타나 “부엌데기더러 커피를 내가고 더운물을 올려 오라고 해야겠어요. 옥타브 부인께 갈 시각이 됐거든요.” 하고 알릴 때까지 부엌 언저리를 어정거리다가, 그제야 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곧장 이층 내 방으로 올라가 책을 읽곤 했다. 부엌데기란 하나의 추상적인 인격, 변함없는 한 벌의 속성이 저 오랜 세월 잇달아 나타났다 스러지는 인간의 형상들 속에서도 일종의 고정성과 연속성과 동일성을 그 인격에 보장해 주는 상설 기구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같은 처녀를 두 해 잇달아 그 자리에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스파라거스를 그토록 많이 먹던 해에, 그것을 다듬는 일을 맡은 부엌데기는 가엾고 병약한 아이였는데, 우리가 부활절을 지내러 콩브레에 이르렀을 무렵 이미 배가 제법 “불러” 있었다. 그런데도 프랑수아즈가 그 아이더러 마을에 그렇게 많은 심부름을 시키고 집안일도 그토록 많이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는 나날이 그득해지고 커지는, 헐렁한 겉옷의 주름 사이로도 그 훌륭한 윤곽이 비쳐 나오는 저 신비로운 궤짝을 앞으로 안고 다니기가 점점 힘겨워지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그 겉옷은 스완 씨가 내게 사진을 준, 조토가 그림 속 몇몇 우의적 인물들을 감싼 망토를 떠오르게 했다. 그 닮은 점을 짚어 준 이가 바로 그였고, 그는 부엌데기의 안부를 물을 때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 조토의 ‘자비’는 어떻게 지내나요?” 실로 그 가엾은 처녀는, 임신으로 온몸이, 얼굴까지도, 뺨의 반듯하고 네모진 윤곽까지도 부풀고 굵어져, 아레나 예배당에서 여러 미덕을 의인화한, 억세고 남성스러워 오히려 아낙네처럼 보이는 저 처녀들을 뚜렷이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저 파도바의 미덕과 악덕들은 또 다른 점에서도 그 아이를 닮았다. 이 처녀의 모습이 제 몸속에 지닌 그 뜻을 이해하는 기색도 없이, 얼굴 표정에 그 모든 아름다움과 정신적 의미를 조금도 담아내는 일 없이, 그저 여느 것이며 좀 무거운 짐이라도 되는 양 지고 다니는 그 상징으로 인해 커져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아레나에서 “카리타스”라는 이름표 아래 그려진, 그리고 그 초상의 복제화가 콩브레의 내 공부방 벽에 걸려 있던 저 억센 살림꾼 여인도,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채는 기색 없이 그 미덕을 몸으로 나타내고 있으니, 그 천박하고 힘찬 얼굴에 자비의 생각이라고는 도무지 떠올랐던 적이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화가의 절묘한 착상으로, 그 여인은 땅의 온갖 보물을 발밑에 쏟아 밟고 있는데, 마치 즙을 짜내려고 포도를 밟는 것과 꼭 같이, 아니 그보다도 더, 마치 더 높이 올라서려고 자루 더미 위에 기어오른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은 불타는 제 심장을 하느님께 내밀고 있는데, 말하자면 그것을 그분께 “건네고” 있는 셈이니, 그것은 흡사 요리사가 지하 부엌의 채광창을 통해, 위쪽 땅바닥에서 코르크 마개뽑이를 달라고 부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올려 건네는 모양과 꼭 같다. 한편 “인비디아”는 그 얼굴에 시샘하는 낯빛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 프레스코에서도 상징이 어찌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또 어찌나 실감 나게 그려졌는지, 시샘의 입술 사이로 쉭쉭거리는 뱀이 어찌나 크고 또 그 딱 벌어진 입을 어찌나 가득 채우고 있는지, 얼굴 근육이 죄어 뒤틀려서, 마치 숨을 불어 넣어 풍선을 부풀리는 아이의 얼굴처럼 되어 버렸고, 그래서 시샘도, 또 우리도 그 상 앞에서, 그녀의 온 주의와 우리의 온 주의가 그 입술의 움직임에 쏠려 있는 통에, 시샘하는 생각에 쏟을 겨를이라고는 거의 없다.

스완 씨가 조토의 이 인물들에게 아무리 감탄을 늘어놓았더라도, 그가 가져다준 복제화가 걸린 우리 공부방에서 저 자비 없는 ‘자비’를, 혀에 생긴 종양으로, 또는 시술자의 기구를 밀어 넣어 성문(聲門)이나 목젖을 눌러 놓은 모양을 그린 어느 의학서의 도판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저 ‘시샘’을, 그리고 잿빛에 밋밋하니 반듯한 이목구비가, 내가 미사에서 보곤 하던 콩브레의 얌전하고 신심 깊으며 다소 시든 어떤 부인들의 얼굴과 똑 닮은 저 ‘정의’를 바라보며 어떤 즐거움을 느끼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 부인들 가운데 여럿은 이미 오래전부터 ‘불의’의 예비군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었다. 그러나 훗날 나는, 이 프레스코들의 사람을 붙드는 기이함, 그 남다른 아름다움이 저마다의 상징이 그 안에서 맡은 커다란 몫에 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 상징들이 상징으로서가 아니라(상징된 생각은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느껴지거나 손으로 만져지는 진짜 사물로서 그려졌다는 사실이, 그 뜻에 무언가 더 또렷하고 더 문자 그대로인 것을, 그것이 일러 주는 가르침에 무언가 더 구체적이고 더 사무치는 것을 더해 주었던 것이다. 저 가엾은 부엌데기의 경우에도, 그녀의 배는 그것을 채운 짐 때문에 우리 눈길을 쉴 새 없이 끌지 않았던가. 또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고통 속에 놓인 남녀의 생각은 흔히 그 실제적이고 고통스럽고 어둡고 내적이며 창자에 얽힌 국면 쪽으로, 죽음의 저 “뒤틀린 이면” 쪽으로 향하지 않던가. 공교롭게도 그것이야말로 죽음이 그들에게 실제로 내미는, 그리고 억지로 느끼게 하는 국면이며, 우리가 흔히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추상적 관념보다는 짓누르는 짐이며 숨 막힘이며 사람을 말려 죽이는 갈증에 훨씬 더 가까운 국면이다.

저 파도바의 미덕과 악덕들에는 강렬한 현실의 요소가 담겨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들이 내게는 임신한 하녀 처녀와 다름없이 살아 있는 듯 보였고, 반면에 그녀 자신은 그것들에 못지않게 우의적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한 사람의 영혼이 제 특유의 미덕을 나타내는 그 의미심장한 표징에 이렇게 참여하지 않음은(혹은 참여하지 않아 보임은), 그 미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설령 엄밀히 심리적이라고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인상학적이라고는 부를 만한 하나의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 훗날, 살아가는 동안에, 이를테면 수도원 같은 데서 말 그대로 성스러운, 실천적 자비의 본보기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대개 바쁜 외과 의사처럼 활달하고 단호하며 흔들림 없고 다소 무뚝뚝한 태도를, 고통받는 인간을 보고도 어떤 연민도 어떤 다정함도 읽어 낼 수 없고, 또 그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는 얼굴을, 부드러움이나 동정이라고는 없는 얼굴을, 참된 선함의 저 숭고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다음, 부엌데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대비의 힘으로 오류가 진리의 승리를 돋보이게 하듯, 프랑수아즈의 뛰어난 자질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들면서, (엄마 말씀으로는) 더운물이나 다름없는 커피를 내가고, 이어 우리 방으로 미적지근하기만 한 더운물을 올려 오는 동안, 나는 침대에 길게 드러누워, 손에 책을 든 채, 반쯤 닫힌 덧문 뒤에서 오후의 햇살에 맞서 그 여리고 투명한 서늘함을 지키려 애쓰느라 떨고 있는 내 방 안에 있곤 했다. 그 덧문 사이로도 어느새 햇빛 한 자락이 금빛 날개를 타고 미끄러져 들어와, 유리와 나무틀 사이 한구석에, 마치 꽃 위에 앉은 나비처럼 꼼짝 않고 머물러 있었다. 책을 읽기에는 빛이 거의 모자랐고, 그날의 밝음과 찬란함에 대한 내 느낌은 오로지, 아래쪽 라 퀴르 거리에서, 카뮈가(프랑수아즈가 고모는 “쉬고” 있지 않으니 소리를 내도 괜찮다고 일러 준 터라), 낡은 포장 상자 몇 개를 두드리는 소리에서 왔을 뿐이었다. 그 상자에서는 실은 먼지밖에 튀어 오를 것이 없었으련만, 무더위에 따르는 저 울리는 대기 속에서 그 소리는 핏빛 붉은 별들의 비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듯싶었다. 또 그 느낌은, 여름의 실내악이라도 되는 양 저희 자그마한 음악회를 나를 위해 벌이던 파리들에게서도 왔다. 사람이 만든 음악의 가락이라면, 어느 화창한 여름에 그것을 우연히 들었을 경우 언제나 그 여름을 마음에 되불러 오는 식으로 더위와 빛을 불러일으키지만, 파리들의 음악은 그와 사뭇 다르게, 더 가깝고 더 절실한 끈으로 그 철에 매여 있어서, 햇살 좋은 나날에서 태어나 오직 그 나날과 더불어서만 다시 태어나며, 그 나날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품고 있기에, 우리 기억 속에 그 나날의 모습을 불러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나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우리 바로 곁에 있어 곧바로 다가갈 수 있다는 보증까지 우리에게 준다.

내 방의 이 어스름한 시원함은, 거리의 환한 대낮에 대해, 그림자가 햇살에 대해 지니는 관계, 곧 그에 못지않게 빛나는 관계에 있었고, 밖에 나가 거닐었더라면 내 감각이 조각조각으로만 맛보고 누릴 수 있었을 여름의 온 파노라마를 내 상상 앞에 펼쳐 보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내 안온한 상태와 아주 잘 어우러졌으니, 그 안온함은 (내 책들이 들려주며 방금 그것을 부추긴 모험들 덕분에) 마치 흐르는 물살 속에 꼼짝 않고 잠긴 손처럼, 활기와 생명이 소용돌이치는 급류의 충격과 생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너무 더워졌다가 날씨가 꺾여, 소나기든 그저 한줄기 비든 우리 위로 쏟아진 뒤에도, 올라와서는 밖으로 나가라고 나를 졸랐다. 나는 읽던 책을 놓고 싶지 않아, 정원으로 나가 밤나무 아래, 천과 돗자리로 만든 자그마한 초소 같은 것 속에서 책을 이어 읽곤 했는데, 그 가장 깊숙한 안쪽에 앉아 있으면 우리 집을 찾아올지도 모를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숨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내 생각들 또한 그와 비슷한 은신처를 이루고 있지 않았던가. 그 깊은 곳에 나 자신을 파묻고,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을 때조차 남의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있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무언가 바깥 사물을 볼 때면,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의식이 나와 그것 사이에 남아, 그것을 가느다랗고 형체 없는 윤곽으로 에워싸는 바람에 나는 그 물질적 형태와 결코 직접 맞닿지 못했다. 그 사물은 내가 미처 만지기도 전에 어떤 식으로든 증발해 버렸으니, 마치 무언가 젖은 것에 다가가는 뜨겁게 달아오른 물체가 늘 제 앞에 증발의 지대를 앞세우고 있어 결코 실제로는 물기에 닿지 않는 것과 같았다. 온갖 상태와 인상으로 무늬 진 저 일종의 화면, 내가 책을 읽는 동안 내 의식이 가만히 펼쳐 내는, 내 마음속 가장 깊이 감춰진 열망에서부터 정원 저 끝 내 눈앞에 펼쳐진 지평선의 완전히 외적인 광경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는 그 화면 위에서, 애초부터 나의 가장 항구적이고 가장 내밀한 부분, 곧 그 쉼 없는 움직임이 나머지 모두를 좌우하는 지렛대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내 믿음, 그리고 그 책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 싶다는 내 욕망이었다. 설령 내가 그 책을 콩브레에서, 보랑주의 가게 앞에서 보고 샀더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의 식료품 가게는 우리 집에서 너무 멀어 프랑수아즈가 카뮈네에서처럼 거기서 물건을 살 수는 없었으나, 문방구 겸 서점으로는 더 많은 손님을 끌었는데, 설령 내가 그 책을, 그의 문간 양쪽을 장식하던 월간 낱권과 소책자들의 모자이크 속에 제자리에 붙들어 두려고 노끈으로 묶어 놓은 것을, 성당 문간보다도 더 신비롭고 더 암시로 그득한 그 문간에서 보았더라도, 나는 오로지 그것을, 그때 그 무렵 내게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비밀을 맡은 이로 여겨지던 선생님이나 학교 친구가 내 귀에 들리도록 칭찬하던 책이라고 알아보았기에 눈여겨보고 샀을 것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이란 내게 반쯤은 느껴지고 반쯤은 알 길 없는 것들이었으며,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내 생각의 어렴풋하나 한결같은 목표였다.

이 중심되는 믿음, 곧 책을 읽는 동안 내 안쪽 자아에서 바깥세상을 향해, 진리의 발견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던 그 믿음 곁에는, 내가 몸소 참여하고 있던 그 이야기의 사건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이 뒤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오후들은 흔히 한평생을 통틀어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극적이고 자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읽던 책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었다. 물론 거기 얽힌 사람들은 프랑수아즈라면 “진짜 사람”이라 불렀을 그런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사람의 기쁨이나 불행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어느 것 하나 그 기쁨이나 불행에 대한 마음속 그림을 거치지 않고서는 일깨워질 수 없다. 그리고 최초의 소설가가 지녔던 재간은 바로, 그 그림이 우리 감정의 복잡한 얼개에서 하나뿐인 본질적 요소인 이상, 그 그림을 단순화하는 일, 곧 “진짜” 사람들을 순전히 그리고 온전히 없애 버리는 그 단순화야말로 뚜렷한 개선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챈 데 있었다. “진짜” 사람은, 우리가 그에게 아무리 깊이 공감하더라도, 대개는 오직 우리 감각을 통해서만 지각될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불투명한 채로 남아, 우리 감수성으로는 들어 올릴 힘이 없는 죽은 무게를 내민다. 그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그에 대해 지닌 완전한 관념 가운데 아주 작은 한 부분에서만 우리는 어떤 감정이나마 느낄 수 있다. 아니, 그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지닌 완전한 관념 가운데서도 오직 아주 작은 한 부분에서만 그 자신 또한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소설가의 행복한 발견이란, 인간 정신이 꿰뚫을 수 없는 저 불투명한 부분들 대신, 그것에 맞먹는 비물질적 부분들을, 곧 정신이 제 것으로 동화할 수 있는 것들을 갈아 끼우려는 착상이었다. 그러고 나면 이 새로운 부류의 피조물들의 행동과 감정이 우리에게 진실의 모습으로 나타나든 말든 문제 될 것이 없다.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삼았기에, 그것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우리가 열에 들뜬 채 책장을 넘기며 숨을 몰아쉬고 눈을 부릅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자신 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소설가가 우리를 그런 상태로, 곧 오로지 정신적인 모든 상태가 다 그렇듯 온갖 감정이 열 배로 부풀려지는 그런 상태로 이끌고 나면, 그의 책은 마치 한 편의 꿈처럼, 다만 잠결에 우리에게 찾아드는 꿈들보다 더 또렷하고 더 오래 남는 인상을 주는 꿈처럼 우리를 뒤흔들러 오는데, 그렇게 되면 그는 한 시간 남짓 우리 안에 세상의 온갖 기쁨과 슬픔을 풀어놓는다.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실제 삶에서라면 알게 되기까지 여러 해를 보내야 할 것들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예리하고 가장 격렬한 것들은 그 더딘 진행 과정이 우리 지각을 가로막는 탓에 우리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들이다. 삶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다. 마음은 변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독서를 통해서나 상상을 통해서만 그 변화를 알게 된다. 실제로는 그 변화가, 어떤 자연 현상의 변화가 그러하듯, 어찌나 완만한지, 설령 우리가 그 여러 상태를 하나하나 차례로 가려낼 수 있다 하더라도, 변화한다는 실제의 감각만은 여전히 겪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 인간적 요소보다는 나 자신의 덜 내밀한 부분으로,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이야기의 사건이 벌어지는 고장의, 얼추 내 눈앞에 투사된 광경이었다. 그것은 내가 책에서 눈을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실제 풍경보다도 내 마음에 훨씬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식으로, 두 해 잇달아 나는 콩브레 우리 정원의 더위 속에 앉아, 그때 읽던 책이 불러일으킨 그리움에 사무쳐, 산과 강의 고장을 애타게 바랐다. 거기서라면 끝없이 이어지는 제재소들이 눈에 보였고, 맑은 물살 아래로는 나뭇조각들이 물냉이 밭에 잠긴 채 삭아 가고 있었으며, 그 가까이, 낮은 담을 따라 어수선하게 무리 지어 피어난 보랏빛 꽃과 붉은 꽃이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자기 사랑으로 나를 넉넉하게 해 줄 한 여인의 꿈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그 두 해 여름 동안 그 꿈은 흐르는 물의 싱그러움과 서늘함으로 늘 되살아나곤 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누구든, 내가 마음에 떠올린 그 여인의 모습 양옆으로는, 보색이라도 되는 양 보랏빛 꽃과 붉은 꽃이 이내 솟아나곤 했다.

이것은 다만, 우리가 꿈꾸는 어떤 심상이, 마음속 그림에서 그것을 우연히 둘러싸게 된, 본디 그것의 것이 아닌 빛깔들과 어우러지며 영원히 남달라지고, 꾸며지고, 풍요로워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읽던 책 속의 장면들은 내게, 콩브레가 내 눈앞에 펼쳐 보일 수 있었을 그 어떤 풍경보다 내 상상으로 한결 생생히 그려졌을 뿐, 그 밖에는 같은 종류의 그런 풍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장면들을 골라냈다는 이유로, 또 그 인쇄된 글자를, 마치 어떤 계시라도 풀어내듯, 내 마음이 넘어서고 앞질러 헤아리던 그 믿음의 정신 때문에, 그 장면들은 내게 어떤 인상을 주곤 했다. 그것들이 자연 그 자체의 진정한 일부이며, 마땅히 파고들어 살피고 탐구할 값어치가 있다는 인상, 곧 내가 있게 되는 그 어떤 곳에서도 좀처럼 얻지 못했고, 우리 정원, 할머니가 그토록 업신여기던 저 정원사의 판에 박히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공상이 빚어낸 저 볼품없는 산물에서는 결코 얻은 적 없는 그런 인상을 말이다.

내가 어떤 책을 읽을 때, 부모님이 그 책에 그려진 고장을 찾아가도록 허락해 주었더라면, 나는 진리의 궁극적 정복을 향해 엄청나게 나아간 셈이라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의 영혼에 감싸이고 에워싸여 있다는 느낌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 영혼이 붙박여 꿈쩍 않는 감옥으로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영혼과 더불어 실려 가면서, 그것을 넘어서서 세상으로 뛰쳐나가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듯싶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방에서 그치지 않고, 바깥에서 오는 메아리가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떨림이 울려 나오는 저 한결같은 소리를 들으며 늘 낙담하게 된다. 우리는 사물들 속에서,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소중해진 사물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것들 위에 던져 놓은 정신적 매혹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다 환멸을 느끼고, 그것들이 그 자체로는 메마르고,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관념들의 연상 덕에 지녔던 그 매력이라고는 없다는 것을 배운다. 때로는 우리 밖에, 우리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인간들을 좌지우지하고 굴복시키려고 우리의 온 정신력을 눈부신 대오로 총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언제나, 그 무렵 가장 가 보고 싶던 어느 고장을 배경으로 상상했다면, 은밀한 그리움 속에서 나를 그 고장으로 이끌고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내게 열어 준 이가 바로 그 여인이었다면, 그것은 한낱 단순한 생각의 연상이라는 우연 탓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나의 여행에 대한 꿈과 사랑에 대한 꿈이 다만, 오늘 내가 마치 무지개처럼 번쩍이면서도 흐름도 움직임도 없어 보이는 물줄기를 여러 높이에서 단면으로 잘라 내듯 짐짓 갈라놓은 순간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내 삶의 온갖 힘이 벗어남도 거스름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는 그 물결 속 한낱 물방울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상들의 바깥으로 뻗은 흐름을, 내 의식 속 촘촘히 뭉친 내밀한 원천에서부터 좇아가다가, 그 인상들을 감싸는 현실의 지평선에 이르기 전에,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곧 편안히 앉아 있는 즐거움, 대기의 향긋한 내음을 맛보는 즐거움, 어떤 손님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즐거움, 그리고 생틸레르 종탑에서 한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이미 지나간 오후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마지막 종소리를 들으면 그 합계를 헤아릴 수 있게 되고, 그러고 나서 뒤따르는 고요가 내 머리 위 푸른 하늘에서, 저녁의 맛난 만찬이, 지금 프랑수아즈가 마련하고 있는 그 만찬이 책 속 주인공을 페이지마다 힘겹게 뒤쫓은 나를 북돋고 새롭게 해 주러 올 때까지, 아직 내게 독서로 허락된 그 긴 낮의 한때가 비로소 시작됨을 알리는 듯싶은 즐거움이다. 그리고 매번 종이 울릴 때마다, 나는 앞의 종소리로부터 겨우 몇 초밖에 지나지 않은 듯 느끼곤 했다. 가장 최근의 종소리가 앞선 종소리 바로 곁에, 하늘의 표면에 제 모습을 새기면, 나는 그 두 금빛 숫자 사이에 낀 그 자그마한 푸른 활 속에 예순 분이 다 밀어 넣어졌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때로는 이 성급한 종소리가 앞의 것보다 두 번을 더 치는 일마저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미처 듣지 못한 한 시각이 그 사이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무언가 일어난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책의 매혹이, 가장 깊은 잠 못지않게 강력한 마법이, 내 홀린 귀를 막아 버려, 우리를 에워싼 고요의 저 푸른 표면에서 그 금빛 종소리를 지워 버렸던 것이다. 콩브레 우리 정원 밤나무 아래의 달콤한 일요일 오후들이여, 내가 내 실제 삶의 흔해 빠진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애써 지워 내고, 그 자리를 살아 흐르는 시내가 적셔 주는 고장에서의 기이한 모험과 야망의 여정으로 갈음하던 그 오후들이여, 너희는 내가 너희를 떠올릴 때 그 모험과 야망을 여태 내 마음에 불러온다. 너희는 (내가 책을 이어 읽고 낮의 더위가 가라앉아 가는 동안) 그것들을 조금씩 에워싸고 가두어 넣음으로써, 곧 밤나무 잎사귀 무늬가 아롱진 채 형태를 천천히 바꿔 가는 너희의 고요하고 낭랑하고 향기롭고 맑은 그 시간들이 서서히 결정을 이룸으로써, 그 모험과 야망을 몸소 담아 간직하고 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