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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⑮

3권 제1부 · 제1장

어차피 파리에 오기로 되어 있던 생루는, 나를 빌파리지 부인 댁에 데려가겠노라 약속했는데, 나는 그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게르망트 부인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나를 어느 식당의 오찬에 자기 정부(情婦)와 함께 초대했고, 우리는 오찬 뒤에 그녀를 리허설에 데려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침에 나가서 파리 변두리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그녀를 데리러 갈 참이었다.

나는 생루에게, 우리가 오찬을 하러 갈 식당이(돈을 쓸 줄 아는 젊은 귀족들의 삶에서 식당은 아라비아 이야기 속 상품 꾸러미만큼이나 중요한 몫을 한다) 되도록이면, 에메가 발베크 철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석 급사장으로 일하러 갈 거라고 내게 말했던 바로 그 식당이면 좋겠다고 부탁해 두었다. 그토록 많은 여행을 꿈꾸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떠나지 못하는 내게는, 발베크에 대한 내 기억의 일부일 뿐 아니라 발베크 그 자체의 일부이기도 한 누군가를, 해마다 그곳을 찾는 누군가를 다시 본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병약함이나 학업 탓에 내가 파리에 머물러야 할 때에도, 그는 그곳에서 여전히, 길고 긴 7월 오후 내내 손님들이 저녁을 들러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큰 식당의 유리창 너머로 해가 하늘을 가로질러 내려가 바다로 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빛이 스러지는 시각, 그 유리창 뒤에서는 멀리 연푸른 연기처럼 아스라한 배들의 움직이지 않는 돛이, 진열장 속 이국적이고 야행성인 나방들처럼 보였다. 발베크라는 강력한 자석과 맞닿아 스스로 자기(磁氣)를 띤 이 수석 급사장은, 이번에는 나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었다. 나는 그와 이야기함으로써 단번에 발베크와 통하기를, 여기 파리에서 여행의 즐거움 얼마쯤을 실현하기를 바랐다.

나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프랑수아즈는 몹시 투덜대고 있었으니, 약혼한 그 하인이 또다시 전날 저녁에 애인을 만나러 가지 못하게 된 탓이었다. 프랑수아즈는 그가 눈물짓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수위를 한 대 치러 가고 싶어 좀이 쑤셨지만, 제 일자리가 소중했기에 꾹 참았던 것이다.

생루의 집에 이르기 전에, 그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로 되어 있던 그곳에 닿기 전에, 나는 르그랑댕과 딱 마주쳤다. 콩브레 시절 이후로 소식이 끊겼던 그는, 이제 머리가 온통 세었으면서도 젊은이다운 천진한 기색만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가 걸음을 멈췄다.

“아! 자네였군,” 하고 그가 소리쳤다. “멋쟁이 신사가 다 됐구먼, 그것도 프록코트 차림이라니! 그건 내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거북해할 제복이지. 하기야 자네야 사교계 사람일 테고, 방문 인사를 다니러 나선 게로군! 나처럼 반쯤 허물어진 무덤 앞에서 몽상에 잠기러 갈 요량이라면, 이 헐렁한 넥타이와 재킷도 어울리지 않을 게 없지. 자네 영혼의 그 매력적인 자질을 내가 얼마나 아끼는지 자넨 알 걸세. 그러니 자네가 그것을 이방인들 틈에 들고 나가 저버리려 한다는 게 얼마나 애석한지도 말해 두는 걸세. 내가 도무지 숨 쉴 수 없는 저 응접실의 역겨운 공기 속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자넨 제 앞날에 예언자의 단죄를, 저주를 스스로 선고하는 셈이야. 훤히 보이는군, 자넨 그 ‘경박한 이들’을, 대갓집들을 드나들 테지.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 중간계급의 악덕이야. 아! 그 귀족들이라니! 공포정치가 그자들의 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쳐 버리지 못한 건 크나큰 잘못이었어. 그자들은 하나같이, 그저 따분한 얼간이가 아닐 때면, 음험한 난봉꾼들이지. 그래도, 가엾은 친구, 그런 게 자네를 즐겁게 한다면야! 자네가 다과회를 향해 가는 동안, 자네의 옛 벗은 자네보다 나은 팔자로, 외진 변두리에 홀로 앉아 보랏빛 하늘에 분홍 달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볼 걸세. 실은 나는 이 지상에 거의 속하지 않아서, 여기서 나 자신을 그런 유배자처럼 느낀다네. 중력의 온 힘을 다해야 겨우 나를 이곳에 붙들어, 다른 천구로 달아나지 못하게 막을 정도지. 나는 다른 별에 속한 사람이야. 잘 가게. 비본의 농부, 그러면서 도나우의 농부이기도 한 이 늙은이의 예스러운 솔직함을 언짢게 여기지 말게. 내가 자네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 최근작 소설을 자네에게 보내 주겠네. 하지만 자넨 그걸 좋아하지 않을 게야. 자네 취향에는 충분히 나긋하지도, 충분히 세기말적이지도 않을 테니까. 너무 솔직하고, 너무 정직하거든. 자네가 원하는 건 베르고트지, 자네 입으로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나. 쾌락을 좇는 식도락가들의 물린 입맛을 돋우는 진귀한 사냥감 말일세. 자네네 무리에서는 나를 한물간 늙은이로 여기겠지. 내가 쓰는 글에 마음을 쏟는 건 잘못이라나, 이제 그런 건 유행이 지났다니까. 게다가 민중의 삶이란 자네의 그 어린 속물 나부랭이들의 흥미를 끌 만큼 고상하지가 못하지. 가게, 어서 가 보게. 이따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올리려 애써 보게나.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잘 있게, 벗이여.”

내가 르그랑댕과 헤어진 것은 그에 대한 어떤 특별한 원한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기억들은 공통의 벗과도 같아서 화해를 이뤄 낸다. 미나리아재비가 별처럼 점점이 박힌 들판 한복판, 봉건 시대 영화의 폐허가 쌓여 있는 그곳에 놓인, 그 작은 나무다리가, 비본 강의 양쪽 기슭을 이어 주듯, 르그랑댕과 나를 여전히 이어 주고 있었다.

봄이 시작되었건만 큰길의 나무들이 첫 잎조차 거의 내밀지 않은 파리를 벗어나, 순환선 기차가 생루와 나를 그의 정부가 살고 있는 교외 마을에 내려놓았을 때, 오두막마다 딸린 정원이 꽃이 만발한 과일나무들의 거대한 축제 제단으로 흥겨운 것을 보는 일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이였다. 그것은 사람들이 정해진 때에 맞춰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는, 저 독특하고 시적이며 덧없는 고장의 축제 가운데 하나 같았다. 다만 이 축제만은 자연이 여는 것이었다. 벚나무의 꽃은 하얀 칼집처럼 가지에 바싹 붙어 피어 있어서, 아직 꽃도 잎도 거의 보이지 않는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멀찍이 바라보면, 아직도 그토록 추운 이 햇살 좋은 날에, 다른 곳에서는 다 녹았으나 아직 덤불에 매달려 있는 눈으로 여길 만도 했다. 그러나 키 큰 배나무들은 저마다의 집, 저마다의 조촐한 안뜰을, 한결 드넓고 한결 고르며 한결 눈부신 흰빛으로 감쌌으니, 마치 마을의 온 집들, 온 울안이 어느 엄숙한 날에 첫 영성체를 하러 가는 길인 듯했다.

그곳은 본디 시골 마을이었고, 햇볕에 그을어 거뭇해진 옛 면사무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오월제 기둥과 깃발 대신, 키 큰 배나무 세 그루가, 무슨 시민의 지역 축제라도 벌이는 양, 흰 공단으로 늠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파리 근교의 이런 마을들에는 아직도 그 어귀에, 대귀족의 집사와 총신들이 지은 ‘별장(folie)’이었던 17~18세기의 정원들이 남아 있다. 어느 과수원 주인이, 길보다 낮게 파인 그런 정원 하나를 제 나무들을 위해 이용했거나, 아니면 그저 옛날 어느 드넓은 과수원의 배치를 그대로 보존해 두었는지도 몰랐다. 오점형(五點形)으로 늘어선 이 배나무들은, 앞서 내가 보았던 것들보다 덜 빽빽하고 아직 그만큼 만개하지도 않았는데, 낮은 담으로 나뉜 눈꽃 같은 커다란 사각형들을 이루고 있었고, 그 각 면에는 빛이 저마다 다르게 내려앉아, 이 지붕 없는 대기의 방들이 모두 어느 태양의 궁전에, 이를테면 크레타 같은 데서 파낼 법한 궁전에 딸린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것은 어느 저수지의 서로 다른 못들이나, 사람이 어떤 어장을 만들거나 굴 양식장을 두려고 나누어 놓은 바다의 구획들을 떠올리게 했으니, 가지들의 방향에 따라 빛이 달라지며, 봄기운에 미지근해진 물 위에 내려앉듯 그 길들여진 팔들 위에 내려앉아 노니는 것을, 그리하여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이룬 트인 하늘빛 격자 사이로 반짝이는, 크림빛으로 햇살을 머금은 꽃의 거품 같은 흰빛을 피어나게 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러했다.

이 산책을 하는 동안만큼 로베르가 제 애인 이야기를 그토록 다정하게 내게 들려준 적은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군에서의 앞날, 사교계에서의 지위, 가문, 물론 그가 이런 것들에 아주 무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제 애인과 관련된 아주 하찮은 일에 비하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으니, 게르망트가와 이 땅의 온 임금을 다 합친 것보다도 한없이 더 중요했다. 그가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우월한 자질을 지녔다는 신조를 뚜렷이 세워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오직 그녀와 관계된 것만을 마음에 두고 애썼다는 것만은 안다. 그녀를 통해, 그녀를 위해 그는 괴로워할 수도, 행복할 수도, 어쩌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그의 애인이 바라는 것, 하려는 것, 벌어지고 있는 일, 기껏해야 그녀의 얼굴이라는 좁은 폭 안에서, 그 은밀한 이마 뒤에서 스치듯 바뀌는 표정으로나 알아챌 수 있는 그것 말고는, 그의 흥미를 끌거나 그를 들뜨게 할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모든 일에는 그토록 사려 깊던 그가, 오로지 그녀를 계속 부양하고, 언제까지나 곁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만, 눈부신 결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가 그녀에게 매기는 값이 얼마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나로서는 아무리 높은 액수를 떠올려도 모자랄 성싶었다. 그가 그녀와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자기에게서 더는 바랄 것이 없어지는 순간 그를 떠나거나, 적어도 제멋대로 살아갈 것이며, 그러니 날마다 애를 태우게 함으로써 그녀를 붙들어 두어야 한다고, 어떤 실제적인 본능이 그에게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랑이라 불리는 그 보편적인 정(情)은, 모든 사내를 그러하듯 그로 하여금 이따금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가 자기에게 품은 이 사랑이라는 것이, 그녀가 오직 제 돈 때문에 곁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을 지워 버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자기에게서 더는 바랄 것이 없어지는 날이면(제 친구들과 그들의 문학적 이론에 놀아나면서도, 실은 내내 그를 사랑하면서, 라고 그는 생각했다) 서둘러 그를 떠나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 내게 상냥하게 굴면,” 하고 그가 내게 털어놓았다. “그녀가 좋아할 걸 하나 줄 참이야. 부슈롱에서 봐 둔 목걸이거든. 지금 나한테는 좀 과하긴 해, 삼만 프랑이나 하니까. 하지만 가엾은 것, 사는 게 낙이 너무 없어. 분명 그걸 받으면 무척 좋아할 거야. 그녀가 나한테 그 얘길 꺼내면서, 어쩌면 그걸 사 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안다고 하더군. 정말 그런지는 안 믿지만, 위험을 무릅쓸 순 없어서, 우리 집안 단골 보석상인 부슈롱한테 그걸 맡아 두라고 일러 뒀어. 네가 그녀를 만나게 된다니 기뻐. 뭐, 생김새가 그리 대단할 건 없지만,” (그가 실은 정반대로 여기면서, 내가 정작 그녀를 보았을 때 더욱 감탄하도록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닌 건 놀라운 판단력이야. 어쩌면 네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하기 겁낼지도 모르지만, 이런! 나중에 너에 대해 나한테 늘어놓을 그 말들이란, 알잖아, 그녀는 몇 시간이고 곱씹게 되는 말을 하거든. 정말이지 그녀에겐 어딘가 델포이 무녀 같은 데가 있어.”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작은 정원들이 늘어선 곳을 지났고,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정원마다 배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만 해도 세 든 이 없는 빈집처럼 텅 비고 생기 없던 그 정원들은, 간밤에 당도한 이 새 손님들로 문득 북적이고 단장되어 있었으며, 그 사랑스러운 흰 옷자락을 우리는 정원 오솔길을 따라 난 울타리 사이로 볼 수 있었다.

“이봐, 넌 아무래도 여기 남아서 저 나부랭이나 바라보며 시적인 감상에나 젖고 싶은 눈치로군,” 하고 로베르가 말했다. “그러니 여기서 날 좀 기다려 줘. 내 친구 집은 아주 가까우니, 내가 가서 그녀를 데려올게.”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이 조촐한 정원들을 지나 길을 오르내리며 거닐었다. 고개를 들면 이따금 창가에 앉은 처녀들이 보였지만, 바깥, 탁 트인 공기 속, 반 층 높이쯤 되는 곳 여기저기에는, 가볍고 낭창낭창하게, 싱그러운 분홍빛 옷을 걸친 어린 라일락 송이들이 잎사귀 사이에 매달려, 제 초록빛 저택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행인 따위는 아랑곳없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도록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에서, 봄의 따뜻한 오후, 그 작고 흰 울타리를 지나 스완 의 정원 어귀에, 마치 매혹적인 시골 태피스트리처럼 늘어서 있던 보랏빛 제복의 부대들을 알아보았다. 나는 어느 초원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콩브레에서처럼 차가운 바람이 그 길을 매섭게 훑고 지나갔지만, 비본 강가였을 법한 기름지고 촉촉한 시골 흙 한복판에서, 그럼에도 제 형제들 무리처럼 어김없이 약속의 자리를 지키며, 커다란 흰 배나무 한 그루가 솟아나 햇살을 마주하고 방긋 웃듯 물결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질이 되어 만질 수 있게 된 빛의 장막 같았으니, 그 꽃들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햇살에 은빛으로 윤나고 서릿발처럼 반짝였다.

문득 생루가 제 애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에게는 온갖 사랑이자 삶의 온갖 가능한 기쁨이며, 그 인격이 감실(龕室) 속에 모셔지듯 한 육체 속에 신비로이 안치되어, 내 벗의 고달픈 상상이 여전히 쉼 없이 매달리는 대상이었던 이 여자, 그가 결코 참으로 알 수 없으리라 느꼈던, 눈과 살의 장막 뒤에 숨은 그녀의 은밀한 자아가 대체 무엇일지 끊임없이 자문하던 이 여자, 바로 이 여자에게서 나는 대번에 ‘라셸, 주님 곁에서 오실 때’를 알아보았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그런 세계에서는 여자들이, 처지가 바뀔 때면, 그토록 빠르게 바뀌는 법이다) 뚜쟁이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던 바로 그녀였다. “그럼 내일 저녁이에요, 누가 날 찾거든 사람을 보내 줘요, 알겠죠?”

그리고 누군가가 그녀를 ‘찾으러 사람을 보내’ 오면, 그녀는 그 ‘누군가’와 방에 단둘이 남게 되었고, 자기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신중한 여자의 조심성인지 아니면 하나의 의례적 몸짓인지 문을 잠근 다음, 가슴 소리를 들으려는 의사 앞에서 그러하듯 옷을 죄다 벗기 시작했다. 다만 그 ‘누군가’가 나체를 즐기지 않아 속옷은 그냥 입고 있어도 된다고 말할 때에만 그 과정을 멈추었으니, 이는 귀가 유달리 밝은 몇몇 전문의가, 환자가 감기라도 들까 저어하여 셔츠 너머로 그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과 같았다. 그 온 삶이, 그 온 생각이, 그 온 과거가, 언제고 그녀를 안았던 모든 사내들이 내게는 하나같이 하찮기 짝이 없어서, 그녀가 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들 나는 예의상 들어 주었을 뿐 그 말을 거의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이 여자에게, 생루의 불안이, 그 고뇌가, 그 사랑이, 내게는 한낱 기계 장난감에 지나지 않던 것을 끝없는 고통의 원인으로, 존재의 바로 그 목적이자 보상으로 만들 만큼 응집되어 있음을 나는 느꼈다. 이 두 요소를 따로 떼어 보면서(나는 ‘라셸, 주님 곁에서 오실 때’를 매음굴에서 알았으므로), 나는 사내들이 그를 위해 살고 괴로워하고 목숨까지 끊는 숱한 여자들이, 그 자체로 보나 남들에게 보나, 라셸이 내게 그러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녀의 삶을 궁금해하며 애간장을 태울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아연하게 했다. 나는 로베르에게 그녀의 부정(不貞)을 얼마든지 일러 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것들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일로만 보였다. 한데 그것이 그를 얼마나 아프게 했으랴! 또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그가 무엇인들 내놓지 않았으랴, 그러나 헛일이었다!

나는 또한 그때, 인간의 상상력이 이 처녀의 얼굴처럼 자그마한 얼굴 조각 뒤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아 둘 수 있는지를, 그것도 그 얼굴을 맨 처음 알아본 것이 상상력일 때에 한해 그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반대로, 아주 사소한 실제의 면식으로 말하자면 뒤집히기라도 하면, 수많은 몽상의 영감이었던 것이 얼마나 비참한, 조야하게 물질적이며 아무 가치도 없는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저 매음굴에서 20프랑에 나에게 내밀어졌을 때, 그때 나에게는 그저 20프랑을 벌고 싶어 하는 한 여자에 지나지 않던 그 얼굴이, 20프랑의 값어치도 없어 보였건만, 만일 그녀를 알아 두면 흥미로운, 붙잡아 두기 어려운 낯선 존재의 화신으로 상상하는 데서 시작했더라면 백만 프랑보다도, 제 가족보다도, 인생에서 가장 탐나는 온갖 지위보다도 더한 값어치가 나갈 수 있음을 나는 보았다. 물론 로베르와 내가 본 것은 똑같이 여위고 좁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통하는 데라곤 없는 두 반대의 길을 거쳐 그 얼굴에 이르렀고, 우리 둘이 같은 쪽에서 그 얼굴을 보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그 얼굴을, 그 응시와 미소와 입술의 움직임을, 나는 바깥에서, 20프랑이면 내가 청하는 무엇이든 해 줄 그런 부류의 여자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응시도, 미소도, 입술의 움직임도 나에게는 아무런 남다른 특질도 없는 한 계층의 일반적인 동작을 뜻할 뿐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밑에서 한 사람을 찾아볼 호기심 따위는 나에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내밀어졌던 것, 그 승낙하는 얼굴이, 로베르에게는 끝없는 희망과 의혹과 의심과 몽상을 헤치며 나아가 다다른 궁극의 목표였다. 그는 나에게, 아무에게나 스무 남짓에 내밀어졌던 것을 자기 혼자만 갖기 위해, 남들에게는 내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백만 프랑이 넘는 돈을 치렀다. 그 역시 더 싼 값에 그것을 누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한순간의 우연, 몸을 내맡길 듯하던 여자가 어쩌면 다른 데 밀회 약속이 있어, 그날따라 그녀를 더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드는 무슨 사정 탓에 빠져나가 버리는 그 찰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 남자가 감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녀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해도, 눈치챘다면 한없이 더욱, 가장 참혹한 유희가 시작된다. 실망을 삼키지 못하고 그 여자를 잊지도 못한 채, 그는 다시 뒤쫓기 시작하고, 그녀는 그를 피해 달아나며, 마침내 그가 더는 감히 바라지도 못하던 한낱 미소 하나가 마지막의, 가장 은밀한 은혜에 매겨졌어야 할 값의 천 배로 사들여진다. 이런 경우에는 때때로, 판단의 순진함과 고통 앞에서의 비겁함이 뒤섞여 한 처녀를 다가갈 수 없는 우상으로 떠받드는 극도의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되면, 그 마지막 은혜를, 아니 끝내 얻지 못할 운명인 첫 입맞춤조차, 플라토닉한 사랑의 가망을 망칠까 두려워 감히 청하지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가장 뜨겁게 사랑한 여자의 포옹이 어떠했는지 한 번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것은 쓰디쓴 고뇌다. 그렇지만 라셸의 은혜로 말하자면, 생루는 순전한 우연으로 그 전부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만일 이제 와서 그것이 온 세상 사람에게 1루이에 내밀어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그는 당연히 몹시 괴로워했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지킬 권리를 위해 백만 프랑을 내놓았을 것이다. 무엇을 알게 되든 그를 자기가 걷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것은 인간의 뜻을 넘어선 일이어서 어떤 위대한 자연 법칙의 작용에 의해서만, 그것도 인간의 뜻을 거슬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길에서 그 얼굴은 그가 이미 자아낸 몽상의 그물을 통해서만 그에게 나타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두 대기압의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는 한 장의 종이처럼 미동도 없는 그 여윈 얼굴은, 그녀에게로 뻗어 오면서도 서로 만나지는 않는 두 무한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듯 나에게는 보였다, 그녀가 그 둘을 갈라놓고 있었기에. 그리고 실로, 로베르와 내가 둘 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우리 둘은 같은 쪽 신비에서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에게 하찮게 여겨진 것은 ‘라셸, 주님 곁에서 오실 때’가 아니라, 인간 상상력의 힘, 사랑의 고통이 딛고 선 그 환영이었으니, 나는 이것들을 광대한 것으로 느꼈다. 로베르는 내가 감동한 듯이 보이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눈길을 맞은편 정원의 배나무와 벚나무로 돌렸다, 그가 나를 뭉클하게 한 것이 그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도록. 실제로 그것들은 얼마간 그런 식으로 나를 뭉클하게 했다. 그것들 또한 우리가 눈으로 볼 뿐 아니라 가슴으로도 느끼는 그런 것들을 나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정원에서 본 이 나무들을 마음속으로 기이한 신들에 견주었으니, 나의 착각은 막달레나가 또 다른 정원에서 사람의 형상을 보고 ‘동산지기인 줄로 여겼던’ 그 착각과 같지 않았던가. 황금시대의 추억을 간직한 보물지기, 현실이 우리가 짐작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약속, 시의 광휘와 순결의 경이로운 광채가 그 안에서 빛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얻으려 애쓰는 보답일 수 있다는 약속의 지킴이인, 쉬기에도 낚시질에도 독서에도 알맞은 그늘 위로 경이롭게 몸을 굽힌 이 크고 흰 존재들은, 차라리 천사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루의 정부와 몇 마디를 나누었다. 우리는 마을을 가로질렀다. 그 집들은 누추했다. 그러나 가장 초라한 집마다, 유황의 비에 그슬리고 낙인찍힌 듯한 집마다, 저주받은 도시에 하루 머무는 신비로운 나그네인 눈부신 천사 하나가 우뚝 서서, 꽃핀 순결의 날개가 드리우는 현란한 보호를 그 위로 널찍이 펼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배나무였다. 생루는 나를 조금 앞으로 끌어당겨 이렇게 설명했다.

“자네하고 나하고 단둘이 있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실은 자네하고만 점심을 들고, 이모 댁에 갈 시간이 될 때까지 자네하고 있고 싶었어. 하지만 여기 이 가엾은 아가씨한테는 그게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고, 나한테도 어찌나 살갑게 구는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네. 그래도 자네도 저 애를 좋아하게 될 걸세, 알다시피 문학을 하는 여자니까, 아주 섬세한 천성이고, 게다가 식당에서 저 애와 함께 있는 게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야, 어찌나 매력적이고 소탈한지, 늘 무엇에나 기뻐한다니까.”

그렇지만 나는 짐작한다, 바로 이 아침,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베르가 한순간 자기가 겹겹의 애정으로 차츰 빚어낸 그 여자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기에게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라셸을, 겉모습은 제 여자의 판박이지만 완전히 다른, 다름 아닌 한낱 노는 계집일 뿐인 라셸을 문득 보았으리라고. 우리는 꽃핀 과수원을 떠나 우리를 파리로 데려다줄 기차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때 역에서, 혼자 걷고 있던 라셸이 그녀와 다를 바 없는 흔해빠진 두 ‘갈보’에게 알아보여 붙들렸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녀가 혼자인 줄 알고 소리쳤다. “어이, 라셸, 우리랑 같이 가자, 뤼시엔이랑 제르멘도 기차에 있어, 한 자리 더 있다니까. 어서 와. 다 같이 스케이트장 갈 거야.” 그러고는 자기들을 바래다주던 두 애인, 점원 나부랭이들을 그녀에게 소개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좀 거북해하는 눈치를 채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 너머를 보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사과를 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얼마쯤 당황했으나 그래도 다정한 어조로 그에 응했다. 그들은 가짜 수달 가죽 깃을 두른 가엾은 두 ‘갈보’로, 생루가 라셸을 처음 만났을 무렵의 그녀와 얼추 비슷해 보였다. 그는 그들을 몰랐고 이름조차 몰랐는데, 그들이 제 정부와 무척 허물없이 지내는 듯 보이자, 그녀 역시 언젠가는 자기가 꿈에도 그려 본 적 없는, 그와 함께하는 삶과는 판이한 삶, 여자를 하나에 1루이씩 사던 삶에 제자리가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도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로 말하면 라셸에게 한 해에 십만 프랑이 넘는 돈을 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삶을 언뜻 스치듯 보았을 뿐이지만, 그 한복판에서 자기가 아는 그녀와는 다른 라셸을, 기차 안의 두 ‘갈보’ 같은 라셸을, 20프랑짜리 라셸을 보기도 했다. 요컨대 라셸은 한순간 그의 눈앞에서 둘로 갈라져, 그는 제 라셸에게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갈보’ 라셸을, 진짜 라셸을 보았던 것이다, ‘갈보’ 라셸이 다른 라셸보다 더 진짜라고 친다면 말이다. 그때 로베르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라셸에게 해마다 십만 프랑을 계속 대주려고 부유한 결혼이니 제 이름을 파는 일이니 하는 전망을 안고 살아가는 그 지옥에서, 자기도 어쩌면 쉽사리 벗어나, 저 두 점원이 제 여자들의 은혜를 누리듯,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제 정부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으리라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의 존경을 잃을 만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보답이 더 인색해지면 그녀는 그에게 덜 다정해져, 그를 그토록 깊이 뭉클하게 하던 말들, 그가 자랑삼아 벗들에게 옮기면서 그녀가 그런 말을 해 주니 얼마나 갸륵하냐고 굳이 짚어 주되, 자기가 그녀를 더없이 호사스럽게 부양하고 있다는 것도, 하다못해 자기가 무언가를 준 적이 있다는 것조차도, 사진에 적힌 이 헌사나 전보 끝의 이 인사가 실은 십만 프랑을 가장 앙상하고 가장 값진 화폐로 환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밝히지 않으면서 옮기던 그 말들을, 하고 쓰기를 그만둘 터였다. 라셸의 이 드문 다정함이 자기 손으로 후하게 값 치러진 것임을 그가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존심이나 허영 탓이라고 말한다면 잘못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조야한 논리로, 제 쾌락에 현금을 치르는 모든 연인에 대해, 또 숱한 남편에 대해 터무니없게도 그렇게 말하곤 한다. 생루는, 허영을 만족시키는 온갖 쾌락이라면 제 유서 깊은 이름과 잘생긴 얼굴 덕에 사교계에서 힘 안 들이고 거저 얻을 수 있으며, 라셸과의 관계는 오히려 자기를 따돌리게 하여, 남들이 자기를 덜 찾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만한 분별은 있었다.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애정의 겉 표시를 거저 받는 것처럼 보이려 드는 이 자존심이란, 그저 사랑의 결과,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기도 사랑받고 있다고 제 눈에도 남들의 눈에도 비치고 싶은 욕구일 뿐이다. 라셸이 두 ‘갈보’를 저희 칸에 들어가게 내버려 두고 우리에게 돌아왔지만, 가짜 수달 가죽 못지않게, 또 그 젊은 사내들의 어색한 꼬락서니 못지않게, 뤼시엔과 제르멘이라는 이름이 새 라셸을 잠시 더 살아 있게 했다. 한순간 로베르는 낯모르는 패거리와 어울리는 피갈 광장의 삶, 지저분한 정사, 소박한 놀이며 소풍이며 뱃놀이로 보내는 오후들을 그려 보았으니, 그 파리에서는 클리시 대로부터 이어지는 거리의 환한 볕이 자기가 정부와 함께 거니는 그 햇빛의 광휘와 같아 보이지 않고 무언가 다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또 사랑과 한 몸인 고통이, 취기처럼, 우리에게 무생물마저 바꾸어 놓는 힘을 지녔으니 말이다. 그가 어렴풋이 느낀 것은 파리 한복판에 있는 거의 낯선 파리였고, 그와의 관계가 그에게는 기이한 삶의 형태를 탐험하는 일처럼 보였으니, 라셸이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얼마간 그와 비슷했다 해도, 그녀가 그와 함께 사는 것 역시 그녀의 진짜 삶의 한 부분, 그것도 가장 값진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에게 물 쓰듯 돈을 쓴 것을 생각하면, 그 덕에 그녀가 친구들의 부러움을 그토록 샀고, 언젠가 한밑천 잡으면 시골로 물러나거나 일류 극장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될 그 부분 말이다. 로베르는 뤼시엔과 제르멘이 누구인지, 만일 그녀가 저희 칸에 끼어들었더라면 그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로베르와 내가 거기 없었더라면 스케이트장의 즐거움 끝에 최고의 여흥으로 어쩌면 올림피아 선술집에서 끝났을 그 하루를 다들 어떻게 보냈을지 물어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한순간, 그때까지는 그저 지루하기만 해 보이던 올림피아 근방이 그의 마음에 호기심과 아픔을 불러일으켰고, 코마르탱 거리를 내리쬐는 이 봄날의 햇살은, 만일 그녀가 로베르를 알지 못했더라면 라셸이 저녁나절에 그리로 나가 1루이를 벌었을지도 모를 그 거리를, 막연한 그리움으로 그를 채웠다. 하지만 라셸에게 물음을 퍼부어 본들 무슨 소용이랴, 그녀의 대답이란 그저 침묵이거나,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그가 듣기에 몹시 괴로우면서도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을 무엇이리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짐꾼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우리는 일등칸에 뛰어올랐다. 라셸의 훌륭한 진주가 그녀가 값비싼 여자임을 로베르에게 일깨웠고, 그는 그녀를 어루만지며, 인상파 화가의 피갈 광장에서 그녀를 본 그 짧은 찰나만 빼고는 여태껏 늘 그래 왔듯이, 그녀를 제 마음속 자리로 되돌려 놓아 안으로 들인 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