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느리고 근엄한 걸음걸이로 한 노부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키가 큰 그녀는, 챙을 위로 접어 올린 밀짚모자 아래로 마리 앙투아네트풍으로 새하얗게 쌓아 올린 기념비 같은 머리 뭉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녀가 파리 사교계에서 아직 볼 수 있는 세 여인 가운데 하나임을 몰랐다. 이들은 빌파리지 부인처럼 하나같이 더없이 고귀한 태생이었으되, 이제는 세월의 어둠 속에 파묻혀 오직 그 시절의 어느 늙은 한량이나 들려줄 수 있을 어떤 사연 탓에, 다른 데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사교계의 찌꺼기 같은 이들만 접대하는 처지로 전락해 있었다. 이 부인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게르망트 공작부인”, 곧 꼬박꼬박 문안을 오는 눈부신 조카딸을 하나씩 두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다른 두 부인의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제 집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빌파리지 부인은 이 세 부인과 더없이 사이가 좋았지만,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사교적 처지가 자기 것과 비슷하다는 점이, 그들에 대해 그리 유쾌하지 못한 인상을 그녀에게 주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심사가 뒤틀린 재원들이던 그들은, 제 집에서 벌이는 응접실 연극의 수효와 잦기로 그럴듯한 살롱이라는 환상을 스스로에게 심으려 애썼는데, 그들 사이에는 어떤 경쟁이 자라나 있었고, 다소 파란만장한 삶을 거치며 기운 재산 탓에, 직업 배우의 고마운 도움을 확보하는 문제가 걸리면 그 경쟁은 저마다에게 일종의 생존 투쟁으로 변하곤 했다. 더욱이 마리 앙투아네트풍 머리를 한 그 부인은, 빌파리지 부인을 볼 때마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이 자기 금요회에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위안이 된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라, 바로 그 금요회에는 언제나 푸아 대공비가 와 주리라 믿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공비는 그녀만의 게르망트였고, 빌파리지 부인과는 친한 사이였으면서도 그 집 근처에는 결코 얼씬하지 않았다. 물론 푸아 부인은 공작부인과 절친한 벗이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말라케 강변로의 저택에서부터 투르농 거리, 라 셰즈 거리, 포부르 생토노레의 응접실들에 이르기까지, 몰락한 세 여신을 하나로 묶는 것은 강압적인 만큼이나 미운 어떤 유대였다. 나로서는 사교계 신화 사전이라도 뒤져, 그들이 어떤 색정의 모험, 어떤 신성모독의 오만으로 그런 벌을 자초했는지 알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의 한결같이 눈부신 출신, 지금 처지의 한결같은 쇠락은, 서로 미워하면서도 서로의 자리를 드나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필연에 필경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저마다 다른 두 사람에게서, 제 손님들에게 예의를 차리는 편리한 방편을 찾아냈다. 손님들로서야, 누이가 사강 공작이나 리뉴 대공에게 시집간, 작위를 줄줄이 단 부인에게 소개를 받고 나면, 어찌 자기가 포부르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봉우리에 올랐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신문에는 진짜 살롱보다 이런 가짜 살롱에 관한 기사가 비할 바 없이 더 많이 실렸으니 말이다. 실제로 이 노부인들의, 사교계를 드나드는 조카들은, 그중 으뜸이 생루였는데, 친구가 누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면 곧바로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우리 빌파리지 이모님(이든 누구든)한테 데려가 주지. 거기 가면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그렇게 하는 편이, 그 부인들의 세련된 조카딸이나 올케를 통해 그 친구들을 초대받게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자기들 수고가 덜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아주 나이 많은 노인들과, 그 노인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젊은 여인들은 내게, 이 부인들이 더는 사교계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은 그 품행이 유별나게 문란했던 탓이라고 일러 주었다. 문란한 품행이 사교계의 성공을 반드시 가로막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이의를 달자, 그 문란함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도를 넘은 것이었다고 그들은 내게 그려 보였다. 그토록 꼿꼿이 몸을 세운 이 근엄한 귀부인들의 비행은, 그것을 넌지시 내비치는 이들의 입에 오르면, 내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것, 선사시대의 웅대함에, 매머드의 시대에 걸맞을 만한 어떤 것을 띠었다. 한마디로, 희거나 푸르거나 붉은 머리채를 한 이 세 파르카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사들의 운명의 실을 자아냈던 것이다.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그 전설적인 시절의 악덕을 과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그리스인들이, 훗날 자신들을 신격화한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던 사람들에서 이카로스와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를 만들어 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악덕을 죄다 헤아려 목록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이제 그런 악덕을 저지를 만한 상태에서 거의 벗어난 뒤에나 하는 일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제 그 형기가 끝나 가는, 그래서 오직 그것만은 가늠할 수 있는 그의 사회적 형벌의 크기에서, 저질러진 죄의 크기를 재고, 상상하고, 부풀리는 것이다. “사교계”라는 저 상징적 인물들의 화랑에서, 정말로 행실이 헤픈 여인들, 진짜 메살리나들은 어김없이 적어도 일흔은 된 부인의 근엄한 풍모를 하고 있다. 고고한 기품을 풍기며, 초대할 수 있는 이는 죄다 초대하되 정작 오게 하고 싶은 이는 다 오게 하지는 못하고, 제 품행이 조금이라도 완전무결에 못 미치는 여인이라면 결코 그 집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으며, 교황이 꼬박꼬박 황금 장미를 보내 주고, 그러면서 심심찮게 라마르틴의 초년에 관한 논문을 써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상을 받은, 그런 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알릭스?” 빌파리지 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풍 머리의 그 부인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 부인은 이 응접실에 혹시 제 살롱에 값진 보탬이 될 만한 물건이 없는지 살피느라 좌중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런 것이 있다면 제 눈으로 직접 찾아내야 할 판이었으니, 빌파리지 부인이라면 심술을 부려 그것을 제게서 감추려 들 것이 틀림없다고 그녀는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파리지 부인은, 블로크가 자기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 연극을 말라케 강변로의 응접실에서도 올려 달라는 청을 받을세라, 그를 그 노부인에게 소개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했다. 게다가 그것은 되갚음일 뿐이었다. 바로 전날 저녁, 그 노부인은 리스토리 부인을 불러 낭송을 시켰으면서, 정작 그 이탈리아 예인을 슬쩍 가로챈 상대인 빌파리지 부인에게는 그 행사가 다 끝날 때까지 아무 낌새도 알아채지 못하게 해 두었던 것이다. 빌파리지 부인이 그 소식을 신문에서 먼저 읽고 언짢아하지 않도록, 노부인은 조금도 죄책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몸소 찾아와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던 참이었다. 빌파리지 부인은, 나를 소개하는 것은 블로크를 소개하는 것과 같은 난처한 결과를 낳지는 않으리라 여겨, 나를 말라케 강변로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부인은, 되도록 움직임을 아낌으로써, 여러 해 전 사교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고 삼류 시인들이 여태껏 운을 맞춘 수수께끼 시로 기리던 쿠아즈보의 여신 같은 그 자태를, 늘그막에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스스로의 전락 탓에 끊임없이 남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 온갖 이들에게 공통된, 그 고고하고도 보상적인 뻣뻣함을 몸에 익힌 터였다. 그녀는 그저 알아챌 듯 말 듯 차갑고도 위엄 있게 고개를 숙이더니,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마치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양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 교활한 태도로 그녀는 빌파리지 부인에게 이렇게 다짐해 두는 듯했다. “봐요, 나는 저 애 근처에도 안 가잖아요. 부디 알아 두세요, 나는 그 어떤 뜻으로도, 이 늙은 여우 같으니, 사내애 따위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그러나 이십 분쯤 뒤 방을 나설 때, 그녀는 좌중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다음 금요일에 자기 관람석으로 오라는 초대를 내 귀에 슬쩍 흘려 넣었다. 그 자리에는 세 부인 가운데 또 다른 한 사람도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게다가 슈아죌 가문 태생이던 그 부인의 쟁쟁한 이름은 내게 엄청난 감흥을 주었다.
“듣자 하니, 선생, 몽모랑시 공작부인에 관해 뭔가 쓰실 생각이라던데.” 빌파리지 부인이 프롱드의 난을 다루는 역사가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 크고 진정한 친절의 효과를 망쳐 버리곤 하던 무뚝뚝한 말투였다. 나이가 들면서 몸에 따라붙기 마련인 오그라드는 심술과 불만스러운 기분에서 나온 말투이자, 옛 귀족의 거의 촌스러운 말씨를 흉내 내는 겉멋에서 나온 말투이기도 했다. “그 부인의 초상을 보여 드리리다. 루브르에 있는 모사본의 원본이지요.”
그녀는 붓을 꽃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러자 허리께에 드러난 작은 앞치마, 곧 물감으로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두른 그 앞치마가, 보닛과 큼직한 안경이 자아내던 늙은 시골 아낙 같은 인상을 한층 더 짙게 했고, 그녀를 둘러싼 호사스러운 세간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차와 케이크를 날라 온 집사며, 프랑스 동부에서 가장 이름난 수녀회 가운데 하나의 원장이었던 몽모랑시 공작부인의 초상에 불을 밝히도록 그녀가 방금 종을 울려 부른 제복 차림의 하인이 그러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런데 꽤 재미있는 건 말이오,” 안주인이 말했다. “우리 대고모들이 그토록 자주 원장으로 앉던 이 수녀회에, 정작 프랑스 국왕의 따님들은 들어오지 못했으리라는 점이지요. 아주 폐쇄적인 단체들이었거든요.” “국왕의 따님들을 안 받아들이다니요.” 블로크가 어이없어하며 외쳤다. “대체 왜죠?” “아니, 그 격 낮은 혼인 뒤로는 프랑스 왕가의 가문 문장(紋章)이 충분치 못했으니까요.” 블로크의 어리둥절함은 더해 갔다. “격 낮은 혼인이라고요? 프랑스 왕가가요? 언제 그런 일이 있었죠?” “아니, 메디치가와 혼인을 맺었을 때 말이오.” 빌파리지 부인이 더없이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멋진 그림 아니오, 게다가 보존 상태도 나무랄 데 없고.” 그녀가 덧붙였다.
“이봐요,” 마리 앙투아네트풍 머리의 부인이 끼어들었다. “내가 리스트를 데리고 당신을 보러 갔을 때, 그이가 이쪽이 바로 모사본이라고 한 걸 설마 잊진 않았겠죠.”
“음악에 관해서라면 리스트의 어떤 견해에도 나는 머리를 숙이겠지만, 그림에 관해서라면 아니에요. 게다가 그이는 그때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나는 그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억이 도무지 없어요. 그리고 그이를 여기 데려온 건 당신이 아니었어요. 나는 자인비트겐슈타인 공비 댁 만찬에서 그이를 수도 없이 만났는걸요.”
알릭스의 한 방은 불발로 끝났다. 그녀는 말없이, 꼿꼿하게,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겹겹이 분을 처바른 그 얼굴은 돌로 된 얼굴 같았다. 그리고 옆모습이 고귀했던 터라, 그녀는 망토에 가려진 삼각형의 이끼 낀 받침돌 위에 선, 세월에 닳은 어느 공원의 회벽 여신상처럼 보였다.
“아, 또 다른 멋진 초상이 눈에 띄는군요.” 역사가가 입을 뗐다.
문이 열리고 게르망트 공작부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래, 잘 지냈니?” 빌파리지 부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앞치마 주머니에서 한 손을 꺼내 이제 막 들어선 이에게 내밀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대뜸 조카딸에게는 더 눈길도 주지 않고 역사가에게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저것이 라 로슈푸코 공작부인의 초상이오. …”
당돌한 몸가짐에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젊은 하인이 (그러나 그 완벽함을 얻으려고 어찌나 곱게 깎아 냈던지, 코는 조금 붉었고 나머지 살갗도 마치 방금 조각칼로 새겨진 자리가 아직도 얼얼하기라도 한 양 발그레했다) 쟁반에 명함 한 장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여러 번 후작 부인을 뵈러 왔던 그 신사분입니다.”
“내가 집에 있다고 말했느냐?”
“말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오, 그럼 좋다, 안으로 모셔라. 나한테 소개받은 사람이에요,” 그녀가 설명했다. “이 집에 꼭 오고 싶다고 하더군요. 내가 와도 좋다고 한 적은 물론 결코 없지만요. 그런데 이렇게 벌써 다섯 번이나 몸소 찾아오는 수고를 했으니,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요. 선생,” 그녀가 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생도,” 프롱드의 난을 다루는 역사가에게, “내 조카딸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소개하리다.”
역사가는 나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깊이 숙여 절했다. 그리고 이 인사 뒤에는 무언가 상냥한 말이 뒤따라야 하리라 여긴 듯, 그의 눈이 반짝이고 막 입을 열려던 참에, 그는 게르망트 부인의 모습에 또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부인은 상체가 따로 노는 것을 이용해 그것을 과장된 정중함으로 앞으로 내밀었다가, 얼굴이나 눈은 제 앞에 누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챈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은 채, 상체만을 말끔히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그녀는 역사가와 나를 본 것이 자기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했으니, 무언가에 쏠리지 않은 그 주의력이 완전히 멈춰 있음을 증언하듯 정확하게 콧방울을 몇 차례 실룩였다.
그 성가신 방문객이 방으로 들어와, 천진하고도 열렬한 기색으로 빌파리지 부인에게 곧장 다가갔다. 다름 아닌 르그랑댕이었다.
“이렇게 찾아뵙도록 허락해 주시니 정말이지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가 ‘대단히’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문을 열었다. “한 늙은 은둔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더없이 드물고 그윽한 종류의 기쁨입니다. 장담하건대 그 여운은 …”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말을 뚝 끊었다.
“마침 이 신사분께 라 로슈푸코 공작부인의 멋진 초상을 보여 드리던 참이에요. 『잠언집』을 쓴 이의 부인이지요. 집안 그림이랍니다.”
그러는 동안 게르망트 부인은 알릭스에게 인사를 건네며, 해마다 그랬듯 올해도 찾아뵙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당신 소식은 마들렌한테서 죄다 듣고 있답니다.” 그녀가 덧붙였다.
“그 애는 오늘 나와 점심을 함께했어요.” 말라케 강변로의 후작부인이, 빌파리지 부인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리라는 흐뭇한 생각을 곱씹으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블로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들은 터라, 그가 내 삶을 부러워하고 있을까 봐, 나는 그에게 둘 중에서는 자네 쪽이 더 행복할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오로지 다정하게 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다정함은, 스스로를 높이 여기는 이들에게는 제 행운을 손쉽게 확신시켜 주거나, 남들을 그렇게 설득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래, 나는 참으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지.” 블로크가 더없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힘주어 말했다. “둘도 없는 벗이 셋이나 있고, 더는 하나도 바라지 않네. 사랑스러운 정인(情人)도 있지.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네. 제우스 아버지께서 이토록 큰 복을 내리시는 인간은 드물지.” 짐작건대 그는 무엇보다도 제 자랑을 늘어놓고 나를 부럽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제 낙천주의에서 남다름을 뽐내고 싶은 마음도 얼마간 있었으리라. 내가 가지 못하게 된 그의 집 오후 무도회를 두고 “재미있었나?” 하고 물었을 때, 그가 누구나 쓰는 그 진부한 상투어, 곧 “아, 뭐 별것 아니었어” 따위로 대꾸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마치 그 무도회가 남이 연 것이기라도 한 양, 평온하고 심상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그럼, 꽤 괜찮은 자리였지, 더 바랄 게 없었어. 정말이지 매력적이었다니까!”
“방금 들려주신 이야기가 저로서는 여간 흥미롭지 않습니다,” 르그랑댕이 빌파리지 부인에게 말했다. “실은 바로 며칠 전에도 혼자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부인의 말씨에 담긴 그 또렷한 굴림새에서, 부인이 그이와 뚜렷이 닮았다고 말입니다. 감히 서로 모순되는 두 낱말로 그 특질을 그려 보자면, 기념비적인 신속함이자 불멸의 순간성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오후 부인이 하시는 말씀을 죄다 받아 적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다 기억해 두겠지요. 그 말씀들은, 제 생각에 주베르에게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의 벗’이니까요. 주베르를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으셨다고요? 오! 그이라면 부인을 얼마나 흠모했을까요! 오늘 저녁 실례를 무릅쓰고 그이의 전집을 한 질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이의 정신을 부인께 선물로 드리는 것은 저에게 하나의 특권입니다. 그이에게는 부인 같은 힘은 없었지요. 그래도 매력만은 그득했답니다.”
나는 당장 르그랑댕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으나, 그는 되도록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필경, 어떤 화제가 나오든 놀랍도록 능란한 표현으로 빌파리지 부인에게 끊임없이 쏟아붓던 그 아첨의 물줄기를 내가 엿듣지 못하기를 바라서였으리라.
그녀는, 그가 자기를 놀리려 들기라도 한 양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역사가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쪽은 그 유명한 마리 드 로앙, 슈브뢰즈 공작부인이오. 맨 처음에는 뤼인 씨와 혼인했었지요.”
“이봐요, 뤼인 부인 이야기가 나오니 욜랑드 생각이 나네요. 그 애가 어제저녁 나를 찾아왔는데, 당신이 선약이 없는 줄 알았더라면 사람을 보내 오라고 청했을 거예요. 리스토리 부인이 순전히 우연히 들르셔서, 카르멘 실바 왕비의 시 몇 편을 그 지으신 분 앞에서 낭송했답니다.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이런 배신 같으니!’ 빌파리지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요전 날 볼랭쿠르 부인과 샤포네 부인에게 소곤거리던 게 바로 이 이야기였구나.’ “나는 선약이 없었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하지만 갔더라도 부질없었을 거예요. 리스토리라면 그 전성기 시절에 들어 봤는데, 이제는 한낱 잔해에 지나지 않아요. 게다가 나는 카르멘 실바의 시를 질색한답니다. 리스토리가 여기 온 적이 있었죠, 아오스타 공작부인이 데려와서, 단테의 지옥편 한 편을 낭송했어요. 그런 것이라면 그이는 견줄 데가 없지요.”
알릭스는 그 일격을 조금도 움찔하지 않고 견뎌 냈다. 그녀는 여전히 대리석이었다. 그 눈길은 날카로우면서도 공허했고, 코는 오만하게 아치를 그렸다. 그러나 한쪽 뺨의 살갗은 부스러져 벗겨지고 있었다. 초록빛과 분홍빛을 띤 희미하고 기이한 이끼 같은 것이 그녀의 턱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또 한 번의 겨울이면 그녀를 티끌과 나란히 눕혀 버릴지도 몰랐다.
“자, 선생, 그림을 좋아하신다면 몽모랑시 부인의 초상을 한번 보세요.” 빌파리지 부인이, 또다시 시작되려는 찬사의 물줄기를 막으려고 르그랑댕에게 말했다.
그가 등을 돌린 틈을 놓치지 않고, 게르망트 부인이 이모를 향해 빈정대는 듯 묻는 눈길을 던지며 그를 가리켰다.
“르그랑댕 씨란다,” 빌파리지 부인이 나직이 말했다. “캉브르메르 부인이라는 누이가 있는데, 그 이름을 들어도 너나 나나 딱히 짚이는 건 없겠지만 말이다.”
“어머! 아니, 그 여자라면 저야 아주 잘 알죠!” 게르망트 부인이 외치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잘 안다기보다는, 사실 저도 몰라요.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바쟁이, 어디서 만나는지도 모를 그 남편을 만나더니, 대뜸 그 딱한 여자한테 저를 찾아와도 좋다고 하지 뭐예요. 그래서 정말 왔지요. 그게 어땠는지는 말로 다 못 해요. 자기가 런던에 다녀왔다면서, 대영박물관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목록으로 읊어 대더라니까요. 그리고 바로 오늘, 이 댁을 나서는 길로, 지금 이 차림 그대로, 그 괴물한테 명함을 놓고 올 참이에요. 그게 결코 쉬운 일이라고는 잠깐도 생각지 마세요. 무슨 병으로 죽어 간다는 핑계로 그 여자는 늘 집에 붙어 있어서, 밤 일곱 시에 가든 아침 아홉 시에 가든, 딸기 타르트 한 접시를 차려 놓고 당신을 맞을 채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아니, 그래도 정말이지, 그 여자는 괴물이라니까요.” 게르망트 부인이 이모의 묻는 듯한 눈길에 대답했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에요. ‘플뤼미티프’니 뭐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린다니까요.” “‘플뤼미티프’가 무슨 뜻이냐?” 빌파리지 부인이 물었다. “저야 눈곱만큼도 모르죠!” 공작부인이 짐짓 분개한 척 외쳤다. “알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그런 말은 안 쓰거든요.” 그러다 이모가 정말로 ‘플뤼미티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알아채고는, 자기가 순수주의자일 뿐 아니라 박식하기도 하다는 걸 뽐내는 만족을 누리려고, 또 방금 캉브르메르 부인을 놀린 데 이어 이번에는 이모를 놀리려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거야 물론,” 짐짓 부린 언짢은 기색의 마지막 자취가 눌러 두는 반쯤의 웃음을 띠며 그녀가 말했다. “누구나 다 아는 뜻이죠. 플뤼미티프란 글 쓰는 사람, 펜대를 쥐는 사람을 말해요. 하지만 끔찍한 말이에요. 그런 말을 들으면 사랑니가 빠질 지경이라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런 말은 쓰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저이가 그 오라비란 말이죠? 여태 그건 몰랐네요. 하긴 못 믿을 일도 아니에요. 그 여자도 저이처럼 밟히고도 굽실대는 순종이 몸에 뱄고, 대출 도서관 같은 정보 덩어리인 데다, 저이 못지않게 아첨꾼이고 저이만큼이나 따분하니까요. 그래요, 이제 그 집안 내림이 아주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앉거라, 이제 막 차를 한 잔 들려던 참이다.” 빌파리지 부인이 조카딸에게 말했다. “어서 들려무나. 네 증조할머니들 그림이야 굳이 볼 것 없지, 나만큼이나 너도 훤히 아는 것들이니 말이다.”
이윽고 빌파리지 부인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이어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를 빙 둘러쌌고, 나는 그 틈을 타 르그랑댕에게 다가갔다. 빌파리지 부인의 응접실에 그가 와 있는 것을 나 자신은 조금도 흠으로 여기지 않았고, 내 말이 대번에 그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하고 또 내가 일부러 그를 상하게 하려 했다고 믿게 만들지도 꿈에도 몰랐던 터라,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선생님, 선생님까지 여기 계신 걸 보니 제가 다과회에 온 것도 거의 용서받을 만하군요.” 르그랑댕 씨는 이 말에서(적어도 며칠 뒤 그가 나를 두고 내비친 평은 그러했다), 내가 오로지 남을 괴롭히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뼛속까지 심술궂은 못된 애송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나한테 먼저 안녕하시냐고 인사할 예의쯤은 차릴 수 있었을 텐데.” 그가 내게 손도 내밀지 않은 채, 그가 지녔으리라고는 내가 여태껏 짐작조차 못 한 거칠고 성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목소리는 그가 평소에 하던 말과는 아무런 이어질 만한 관련도 없었으나, 그 순간 그가 느끼고 있던 무언가와는 한결 직접적이고 두드러진 또 다른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어찌 된 노릇인가 하면, 우리는 늘 제 감정을 속에만 감추어 두기로 작정한 터라, 그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 안에서 낯설고 외설스러운 어떤 짐승이 제 목소리를 내는데, 그 어조는, 우리의 결함이나 악덕을 뜻하지 않게, 함축적으로, 뿌리칠 수 없이 드러내는 그 전달을 받아 든 듣는 이에게, 그가 저질렀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못 했던 살인을 더는 참지 못하고 에두른 채 투박하게 실토하는 죄인의 느닷없는 고백만큼이나 큰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물론 알고 있었다. 관념론이, 그것도 주관적 관념론마저도, 위대한 철학자들이 여전히 왕성한 식욕을 지니거나 지칠 줄 모르는 끈기로 아카데미 회원 선거에 제 이름을 내미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르그랑댕이 자기가 다른 행성에 속한 사람이라고 그토록 자주 사람들에게 일깨울 까닭은 정말이지 없었다. 분노든 상냥함이든 그의 그 발작적인 몸짓들이 하나같이, 바로 이 행성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에 좌우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한 노릇이지만, 사람들이 어디 좀 가 달라고 스무 번씩 연거푸 졸라 대면,” 그가 한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내키는 대로 할 완전한 자유가 있다 한들, 그래도 아주 상놈처럼 굴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게르망트 부인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작위와 나란히 붙어, 그녀의 육체적 부피에 더하여 그녀 둘레로 뻗어 나가는 공작령을 얹었고, 게르망트 숲의 그늘지고 햇살 얼룩진 서늘함을 이 응접실 안으로 들여와, 그녀가 앉아 있는 둥근 방석을 에워쌌다. 다만 나는 그 숲의 자취가 공작부인의 얼굴에 더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에만 놀랐다. 그 얼굴에는 초목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전혀 없었고, 기껏해야 불그레하게 물든 뺨이, 마땅히 게르망트라는 이름으로 문장(紋章)처럼 새겨졌어야 할 그 뺨이 그 효과였을 뿐, 탁 트인 들판에서 오래 말을 달린 광경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훗날, 그녀가 더는 나의 흥미를 끌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공작부인의 여러 특징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지금으로서는 그 매력을 이미 이때 느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던 한 가지만 말하자면) 그녀의 두 눈이 그러했다. 그 눈 속에는 한 폭의 그림에서처럼 프랑스의 어느 오후의 푸른 하늘이, 넓게 펼쳐지고 해가 비치지 않을 때조차 빛에 잠긴 채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처음의 쉰 듯한 울림만 들으면 거의 상스럽다 여겼을 법하나, 그 안으로는 콩브레 성당의 계단이나 광장 과자점의 계단 위로 그러하듯, 시골 햇살의 풍요롭고 나른한 금빛이 끌리듯 흘렀다. 그러나 이 첫날에는 나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으니, 나의 주의가 지닌 열기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에게서 끌어낼 수 있었을 그 얼마 안 되는 것마저 단숨에 증발시켜 버렸고, 그 속에서라면 나는 게르망트라는 이름의 어떤 표징을 찾아냈을 터였다. 어쨌든 나는 온 세상이 게르망트 공작부인이라는 작위로 가리키는 이가 바로 그녀임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 이름이 뜻하는 상상도 못 할 삶을, 이 육체가 실로 담고 있었다. 그 육체는 방금 그 삶을 온갖 다른 존재들의 무리 속으로 들여왔으니, 사방에서 그것을 에워싼 이 방 안에서였고, 그 방에 그것이 어찌나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던지 나는 그 신비로운 삶의 범위가 끝나는 자리에서 그 경계를 그려 보이는 부글거림의 가장자리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곧 그녀의 파란 페킹 치마가 풍선처럼 부풀어 양탄자 위에 그려 낸 원의 둘레에서, 그리고 안으로부터 그 눈을 채운 골똘함과 추억과 알 수 없고 경멸하고 즐거워하고 궁금해하는 생각들이, 그 표면에 비친 바깥 영상들과 맞부딪치는 지점의, 공작부인의 빛나는 두 눈 속에서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이렇게 후작부인의 ‘접견일’ 가운데 하루, 여인들에게는 오후 나들이 도중의 짧은 멈춤에 지나지 않는 그런 다과회 자리에서 보는 대신, 빌파리지 부인 댁의 야회에서 만났더라면 이토록 깊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다과회에서 여인들은 거리를 마차로 달리며 쓰고 있던 모자를 그대로 쓴 채, 응접실의 답답한 공기 속으로 바깥 신선한 대기의 기운을 실어 나르고, 그들의 사륜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높다란 열린 창들보다도 저물녘 파리의 모습을 더 잘 보여 준다. 게르망트 부인은 수레국화로 장식한 뱃놀이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꽃이 내게 떠올리게 한 것은 내가 그 꽃을 그토록 자주 꺾던 콩브레 언저리의 갈아 놓은 밭들, 탕송빌 울타리에 잇닿은 비탈에서의 지나간 세월의 햇살이 아니라, 한 시간 전 게르망트 부인이 라 페 거리에서 그 꽃을 스치며 마차로 지나갈 때 그러했던 황혼의 향내와 먼지였다. 미소를 띤 듯 경멸하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오므린 입술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는 마치 그 신비로운 삶의 더듬이 끝으로 그러듯 양산 끝으로 양탄자 위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윽고, 실제로 살펴보는 대상과의 모든 접점을 지워 버리는 데서 시작하는 그 무심한 주의로, 그녀의 시선이 우리 하나하나에 차례로 머물렀다. 그러고는 소파와 안락의자들을 살폈으나, 이번에는 아무리 하찮을망정 낯익은 것, 거의 사람이나 다름없는 것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그 인간적인 공감으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 가구들은 우리와는 달리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세계에 속했고, 그녀 고모의 삶과 얽혀 있었다. 이어 보베산 가구에서 그녀의 시선은 그 위에 앉은 사람에게로 되돌아왔고, 그러면서 다시 그 예리한 눈빛과, 게르망트 부인이 고모에게 품은 존경심이 말로 드러내는 것만은 막았을 그 못마땅함을 띠었는데, 만일 그녀가 그 의자들에서 우리의 존재 대신 기름 얼룩 한 점이나 먼지 한 켜를 발견했더라면 분명 느꼈을 바로 그 못마땅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