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산책하는 인파를 헤치며 가브리엘 거리를 따라 되돌아왔다. 나는 할머니를 벤치에 앉혀 쉬게 하고 마차를 찾으러 갔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에 대해서라도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때면 나는 늘 할머니의 마음속에 나를 놓아 보곤 했는데, 그런 할머니가 이제는 내게 닫혀 버려 바깥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그 어떤 낯선 이에게보다도 더욱, 그녀의 상태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그녀에게 숨겨야 했으며 내 불안을 한마디도 내비쳐서는 안 되었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 이상으로 그녀에게 그것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이래로 내가 영원히 그녀의 보관에 맡겨 두었던 그 생각들, 그 슬픔들을 문득 내게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이미 혼자였다. 그리고 그녀가 게르망트가에 대해, 세비녜 부인에 대해, 작은 패거리에 관한 우리의 대화에 대해 넌지시 던졌던 그 말들조차도, 요점도 계제도 없이 엉뚱하게 들렸으니, 그것들이 바로 이 존재의 허무에서 솟아나온 까닭이었다. 내일이면 어쩌면 존재하기를 그쳤을 존재, 그 말들이 더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존재, 그것들을 떠올릴 능력조차 없는 그 허무, 머지않아 나의 할머니가 되어 버릴 그 허무 말이다.
“글쎄요, 선생,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소만, 예약을 하신 것도 아니고 시간을 정해 두신 것도 아니잖소. 게다가 오늘은 내가 환자를 보는 날이 아니오. 분명 댁에도 주치의가 있을 텐데. 그가 나를 진찰에 불러들이지 않는 한 나는 그의 진료에 끼어들 수 없소. 이건 의사들 사이의 예의 문제요.…”
마부에게 손짓을 보내려던 참에, 나는 저 유명한 E⸺ 교수의 모습을 언뜻 보았다. 그는 내 아버지, 할아버지와도 거의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였고 적어도 두 분 모두와 아는 처지였으며 가브리엘 거리에 살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어떤 영감이 떠올라, 마침 자기 집으로 들어서려던 그를 붙잡아 세웠으니, 어쩌면 그가 할머니에게 조언을 해 줄 바로 그 적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분명 서두르고 있었고, 자기 앞으로 온 편지를 청해 받고는 나를 어서 떼어 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유일한 기회란 그와 함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것뿐이었는데, 그는 승강기 조작만은 자기가 직접 하게 해 달라고 내게 청했으니, 그것이 그의 별난 버릇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여기서 제 할머니를 봐 달라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만 들어 보셔도 아시겠지만 할머니는 이리로 오실 형편이 못 됩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제가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다 드린 뒤 삼십 분쯤 있다가 저희 집으로 왕진을 와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댁으로 오라고! 원, 선생, 그건 내게 기대해선 안 되오. 나는 상무부 장관과 저녁을 들기로 되어 있소. 그 전에 들를 데도 한 군데 있고. 당장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예복 상의가 찢어져서 다른 상의를 입어야 하는데 그건 훈장을 달 단춧구멍이 없단 말이오. 부디 청하건대, 조작 단추에는 손대지 마시오. 이게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지 않소,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그 단춧구멍 하나 내려면 또 그만큼 늦어지겠지. 뭐, 나는 댁 식구들과 아는 사이니, 할머니가 지금 당장 이리로 오신다면 봐 드리겠소. 다만 미리 일러두거니와, 딱 십오 분밖에는 시간을 낼 수 없소, 단 한순간도 더는 안 되오.”
나는 그 즉시 출발했는데, E⸺ 교수가 나를 다시 아래로 내려보내려고 몸소 움직여 준 승강기에서 미처 내리지도 않은 채였고, 그는 그러면서 내게 미심쩍은 눈길을 던졌다.
우리는 물론 죽음의 시각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 우리는 그 시각을 아득하고 먼 시간의 벌판 어딘가에 놓인 것으로 상상할 뿐, 그것이 이미 밝아 온 오늘 하루와 어떤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는, 혹은 죽음이, 그러니까 죽음의 첫 습격이자 우리에 대한 부분적 점령이, 한번 붙들면 다시는 놓지 않을 그 죽음이 바로 오늘 오후에 닥쳐올 수 있다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정해져 있지 않기는커녕 매 시각이 이미 어떤 일과에 배정되어 있는 바로 이 오후에 말이다. 당신은 한 달쯤 뒤에는 신선한 공기의 효험을 톡톡히 보리라 여기며 날마다 어김없이 드라이브를 나가기로 한다. 어느 외투를 걸칠지, 어느 마부를 부를지 망설이다가 마차에 오르고, 하루가 온전히 눈앞에 펼쳐져 있으나, 벗이 찾아오기로 되어 있어 일찍 집에 돌아가야 하므로 그 하루는 짧다. 당신은 내일도 이처럼 날이 맑기를 바라며, 죽음이 다른 평면을 따라, 꿰뚫을 수 없는 어둠에 싸인 채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가는 하고많은 날 가운데 하필 오늘을, 마차가 샹젤리제에 다다른 순간에 몇 분 남짓 뒤로 나타날 날로 골라잡았다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못한다. 아마도 여느 때 죽음의 그 철저한 낯섦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하는 이들은 이런 종류의 죽음에서, 이런 종류의 죽음과의 첫 접촉에서 무언가 안심되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죽음이 이처럼 낯익고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띠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훌륭한 오찬이 있었고, 더없이 건강한 사람들이 나서는 것과 똑같은 나들이가 있었다. 그 첫 급습에 뒤이어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이어진다. 할머니가 그토록 편찮으셨는데도, 그래도 여섯 시에 우리가 샹젤리제에서 돌아올 때 그녀가 더없이 화창한 날씨 속에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콩코르드 광장 쪽으로 걸어가던 르그랑댕은 우리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하고는 놀란 기색으로 멈춰 서서 우리를 눈으로 좇았다. 아직 삶에서 초연해지지 못한 나는 할머니에게 그의 인사에 답례를 했느냐고 물으며, 그가 걸핏하면 토라진다는 것을 일깨웠다. 할머니는 필경 나를 어지간히 경박하다 여기며, 마치 “그게 뭐 대수라고?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려는 듯 손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그렇다, 몇 분 전만 해도 내가 마차를 찾고 있을 때 할머니는 가브리엘 거리의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고, 조금 뒤에는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지나갔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과연 참으로 사실이었을까? 이를테면 벤치는 어떤 균형의 조건에 따라야 할지언정, 큰길가 제자리를 지키는 데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이, 벤치에 기대거나 마차에 타고 있을 때조차도, 안정을 유지하려면 우리가 보통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힘의 긴장이 필요하니, 그것은 (그 작용이 어디에나 미치기에) 우리가 대기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 속이 텅 비도록 도려내진 채 대기의 압력을 홀로 떠받치게 된다면, 우리는 소멸에 앞선 그 순간에, 이제 우리 안에 그것을 중화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무시무시한 무게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과 죽음의 심연이 우리 안에서 열리고, 세계와 우리 자신의 몸이 우리에게 덮쳐 오는 그 격동에 더는 아무런 저항도 내밀 수 없게 될 때, 그때는 우리 자신의 근육의 긴장을 견디는 것마저, 우리를 골수까지 얼어붙게 하는 그 전율을 견디는 것마저, 나아가 우리가 보통은 생명 없는 사물의 단순한 소극적 자세일 뿐이라 여기는 그 상태에 우리 몸을 가만히 두는 것마저도,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고요히 두고자 한다면 생명력의 소모를 요구하며 진 빠지는 싸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르그랑댕이 그런 놀란 기색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면, 그것은 그에게도, 그때 우리 곁을 스쳐 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할머니가 앉아 있는 듯 보이던 그 마차 안에서 그녀가 침몰하는 듯,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드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겨우 붙들까 말까 한 방석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눈은 사나웠으니, 이제는 그 동공이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한 온갖 형상들의 습격을 더는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내가 여전히 그녀 곁에 있었건만, 그들에게 그녀는 어딘가 알 수 없는 세계에 잠겨 든 것처럼 보였다. 몇 분 전 샹젤리제에서 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을 때 아직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던 그 타격을, 그녀가 이미 그 세계 어딘가에서 받아 낸 것이다. 그녀의 모자며 얼굴이며 외투는, 그녀가 맞붙어 씨름한 보이지 않는 천사의 손에 헝클어진 채였다. 나는 그 뒤로 생각하게 되었거니와, 할머니의 그 발작의 순간이 그녀를 아주 놀라게 하지는 못했으리라고, 아니 어쩌면 그녀는 그것을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그것을 기다리며 살아왔으리라고 여긴다. 물론 그녀는 이 숙명의 순간이 언제 올지 알지 못했고 결코 확신하지도 못했으니, 그것은 비슷한 의심에 사로잡혀 정부의 정절을 두고 터무니없는 희망과 부당한 의혹을 번갈아 품는 저 연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친 이런 중병들이, 그 병자를 죽이기에 앞서 오랜 세월 그의 몸속에 거처를 틀지 않는 일이란 드물다. 그동안 그 병들은 마치 “사귐성 좋은” 이웃이나 세입자처럼 서둘러 그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그것은 무서운 지인이니, 그것이 일으키는 고통 때문이라기보다 삶에 부과하는 명확한 제약의 그 기이한 새로움 때문에 그러하다. 여자는 이런 경우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본다. 실제로 죽는 순간이 아니라, 죽음이 흉측하게 그녀 안에 들어와 살게 된 때로부터 몇 달, 때로는 몇 해 전에 말이다. 그 병자는 자기 머릿속에서 오가는 소리가 들리는 그 낯선 자와 알고 지내게 된다. 물론 그를 얼굴로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그가 규칙적으로 내는 소리로써 그 습관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범죄자일까? 어느 아침, 그녀는 더는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가 떠난 것이다. 아! 이대로 영영 가 버린 것이라면! 저녁이 되자 그가 돌아와 있다. 그의 속셈은 무엇일까? 흠모하는 정부에게 캐묻듯 그녀가 전문의에게 다그쳐 물으면, 그는 어느 날은 믿기고 다른 날은 그녀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확언으로 대답한다. 아니, 차라리 의사가 맡은 것은 정부의 배역이 아니라 우리가 캐묻는 하인들의 배역이다. 그들은 제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대답을 다그치며, 우리를 속이려 드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삶 그 자체이니, 우리는 그녀가 더는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믿거나, 적어도 그녀가 마침내 우리를 저버리는 날까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나는 할머니를 부축해 E⸺ 교수의 승강기에 태웠고, 잠시 뒤 그가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진찰실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그토록 바쁜 몸이었건만 그의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바뀌었으니, 습관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의 습관은 환자들에게 다정한 것, 다시 말해 활기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할머니가 대단한 독서가임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독서가였던지라, 처음 몇 분간은 그 눈부신 여름 날씨에 어울리는, 아끼는 시 구절들을 이것저것 읊는 데 바쳤다. 그는 할머니를 안락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빛을 등지고 자리를 잡아 그녀를 잘 살필 수 있게 했다. 그의 진찰은 세밀하고 철저했으며, 한번은 내게 잠시 방을 나가 있으라고까지 했다. 내가 돌아온 뒤에도 진찰을 이어 갔고, 그러고서 다 마치고는 십오 분이 거의 다 지났는데도 할머니에게 여러 시구를 되풀이해 읊었다. 그는 제법 재치 있는 농담을 몇 마디 던지기까지 했는데, 나로서는 다른 자리에서 들었더라면 싶었으나, 그가 그것을 내뱉는 즐거운 어조가 나를 완전히 안심시켰다. 그때 나는 상원 의장인 팔리에르 씨가 여러 해 전에 거짓 발작을 일으켰다가 정적들이 아연실색하게도 며칠 뒤 직무에 복귀했고, 소문에 따르면 머잖아 공화국 대통령직을 이어받을 채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곧 회복하리라는 나의 확신은 한결 완전해졌으니, 마침 팔리에르 씨의 사례를 떠올리고 있던 참에 그 교수의 농담 하나에 마침표를 찍는 한바탕 웃음소리에 그 유비를 더 좇아가지 못하고 정신이 팔린 까닭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오 분이나 늦은 것을 보고는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렸고,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 다른 상의를 당장 가져오라고 초인종을 울렸다. 나는 할머니가 방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그에게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청했다.
“조금의 희망도 없소.” 그가 내게 일러 주었다. “요독증으로 인한 뇌졸중이오. 요독증 자체가 반드시 목숨을 앗는 것은 아니나, 이 경우는 내 보기에 가망이 없소. 내가 틀렸기를 바란다는 말은 새삼 할 것도 없고. 어쨌든 댁에는 코타르가 있으니, 더없이 좋은 손에 맡겨진 셈이오. 실례하오.” 하녀가 그의 상의를 팔에 걸치고 방으로 들어오자 그가 말을 끊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상무부 장관과 저녁을 들기로 되어 있고, 그 전에 들를 데도 있소. 아! 인생이란 자네 나이에 흔히 여기듯 온통 장밋빛 꽃길만은 아니라오.”
그러고서 그는 정중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등 뒤로 문을 닫고, 하인 하나가 우리를 현관으로 안내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한바탕 성난 고함을 들었다. 하녀가 훈장을 달 단춧구멍을 째서 감치는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그러려면 또 십 분이 걸릴 터였다. 교수가 계속 노발대발하는 동안, 나는 층계참에 서서 조금의 희망도 없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저마다 참으로 혼자다. 우리는 집을 향해 떠났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 햇살은 우리가 사는 거리에 이르기 전에 우리 마차가 지나가야 하는 끝없이 긴 담벼락을 붉게 물들였는데, 지는 해가 말과 마차의 그림자를 그 담벼락 위에 붉은 바탕 위의 검은 형상으로 드리우니, 마치 폼페이의 어느 테라코타에 그려진 영구차 같았다. 이윽고 우리는 집에 다다랐다. 나는 병든 할머니를 현관 층계 밑에 앉혀 두고, 어머니에게 알리러 올라갔다. 나는 할머니가 현기증을 일으킨 뒤 몸이 조금 편찮으신 채로 돌아오셨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내가 입을 떼기 무섭게 어머니의 얼굴은 절망의 발작으로 일그러졌는데, 그 절망은 이미 어찌나 체념에 젖어 있던지, 나는 어머니가 여러 해 동안 달력에 적히지 않은 그러나 끝내 오고야 말 그날을 위해 조용히 마음의 채비를 갖추어 왔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치 악의가 남의 고통을 부풀리기를 즐기듯이, 그 지극한 정성 속에서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중병임을, 더구나 뇌를 침범할 수도 있는 병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듯했다. 어머니는 몸서리쳤고, 눈물 없이 눈으로 울었으며, 당장 의사를 부르라고 이르러 달려갔다. 그러나 프랑수아즈가 누가 편찮으시냐고 묻자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으니,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얼굴을 옥죄는 흐느낌을 지우려 안간힘을 쓰며 나와 함께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할머니는 아래 현관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기 무섭게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어머니를 향해 명랑하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할머니의 머리를 흰 레이스 숄로 반쯤 감싸 두면서, 층계에서 감기 드시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나는 어머니가 할머니 얼굴의 변화를, 일그러진 입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의 조심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그 손에 마치 자기 신의 손인 양 입 맞추고, 그녀를 일으켜, 어설픈 몸짓으로 아프게 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아울러,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만지기에 스스로 부족하다 느끼는 이의 겸허함을 담아, 더없이 조심스럽게 승강기로 옮겼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눈을 들지 않았고, 병든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이 딸을 놀라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할머니가 슬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어쩌면 감히 마주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에는 슬픔이 두려워서였으리라. 어쩌면 경외심에서, 그 우러르는 이목구비에 어린 정신적 쇠약의 흔적을 짚어 내는 것이 불경 없이는 스스로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느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지혜와 선함으로 빛나는 할머니의 참된 얼굴, 그 모습을 기억 속에 고스란히 온전히 간직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란히 올라갔으니, 할머니는 숄에 반쯤 가려진 채, 어머니는 눈을 돌린 채였다.
그러는 동안, 딸조차 감히 바라보지 못하는, 달라진 할머니의 이목구비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이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것에 놀랍고도 무람없으며 불길한 눈길을 못 박은 그 사람은 바로 프랑수아즈였다. 그녀가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정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어머니가 자기 어머니 품에 흐느끼며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지라, 어머니가 보인 그 냉담함에 실망하고 거의 분개하기까지 했다.) 다만 그녀는 늘 사물의 나쁜 쪽을 보려는 어떤 기질이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서로 배타적일 법하면서도 한데 합쳐지면 오히려 서로를 강화하는 두 가지 특성을 지녀 왔다. 하나는 미천한 태생의 사람들에게 흔한 절제 없음이니, 즉 못 본 척하는 편이 더 점잖을 육체의 변화를 목격할 때 그들 안에 일어나는 그 인상, 다시 말해 그 괴로운 놀람을 감추려 들지 않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닭의 목을 비트는 것을 허락받기까지 잠자리의 날개부터 뜯어내는 농부의 그 무정한 거칢이니, 고통받는 살덩이를 보며 느끼는 관심을 감추게 할 만한 그 조심성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프랑수아즈의 나무랄 데 없는 간병 덕에 할머니가 잠자리에 뉘어지자, 그녀는 훨씬 수월하게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요독증을 일으켰던 혈관의 그 작은 파열인지 폐색인지가 아마도 아주 경미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어머니가 어려움에 처한 이때 어머니를 저버리지 않으려, 어머니가 여태 겪어야 했던 가장 참혹한 순간들을 헤쳐 가도록 도우려 애를 썼다.
“자, 얘야,” 그녀는 한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은 여전히 어떤 낱말을 발음하는 데 조금 어려움을 겪는 것을 얼버무리려고 자기 입술 앞에 대고서 말을 꺼냈다. “네 어미를 걱정하는 마음이 겨우 이 정도로구나! 넌 마치 체한 것쯤은 아주 즐거운 일이라 여기는 것 같구나!”
그러자 처음으로 어머니의 눈이 할머니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니, 나머지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며, 어머니는 우리가 맹세하지만 지킬 수 없는 저 거짓 약속들의 목록을 늘어놓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엄마, 곧 씻은 듯이 나으실 거예요. 엄마 딸이 그렇게 되도록 할 테니까요.”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의 가장 애틋한 사랑을, 어머니가 낫기를 바라는 자신의 온 결의를, 거기에 실어 보내는 입맞춤 하나에 담아, 그것이 입술 위에 피어오를 때까지 마음으로, 온 존재로 뒤따르며, 몸을 굽혀 그 소중한 이마 위에 겸허히, 경건히 입을 맞추었다. 할머니는 침구가 늘 같은 자리, 왼쪽 다리 위에 계속 쌓이는 일종의 충적물 같은 것에 대해 하소연했는데, 아무리 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의 원인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날이면 날마다 그녀는 프랑수아즈가 잠자리를 제대로 “봐” 주지 않는다고 애먼 탓을 했다.) 발작적인 몸놀림으로 그녀는 그 고운 양모 이불의 물결치는 홑청을 죄다 그쪽으로 자꾸만 몰아붙였으니, 그것이 마치 밀물이 잇달아 실어다 놓는 침적물로 이내 (주민들이 방파제를 쌓지 않는 한) 해변으로 변하고 마는 어느 만(灣)의 모래처럼 그 자리에 쌓였다.
어머니와 나는 (우리의 거짓은 입을 떼기도 전에 프랑수아즈의 얄미운 통찰력 앞에 이미 들통이 나 있었지만) 할머니가 중병이라는 것을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니, 마치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그녀의 적들을 (그녀에게 적이 있을 리 없건만) 기쁘게 하기라도 할 듯이 여겼고, 그녀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느끼는 편이 더 정다운 일인 듯 여겼던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앙드레가 알베르틴을 너무 가엾이 여기는 나머지 정작 진심으로 좋아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내가 짐작하게 했던 바로 그 본능적 감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똑같은 개인적 현상들이 무리 속에서, 큰 위기 속에서 되풀이된다. 전쟁 중에,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라를 헐뜯지는 않되 그것을 이미 진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딱하게 여기며, 모든 것을 가장 어두운 빛깔로 본다.
프랑수아즈는 잠을 자지 않고 견디는 능력, 가장 고된 일을 해내는 능력 덕에 우리에게 더없이 값진 존재였다. 그리하여 병실에서 여러 밤을 새운 끝에 겨우 잠자리에 든 그녀를, 잠든 지 십오 분 만에 불러내야 할 때에도, 그녀는 가장 고단한 소임을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인 양 해낼 수 있음을 어찌나 기뻐하던지, 언짢은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그 얼굴이 겸손이 어린 흡족함으로 환히 밝아지곤 했다. 다만 미사 시각이나 아침 식사 시각이 되면, 할머니가 설령 임종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프랑수아즈는 늦지 않으려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리를 젊은 하인에게 내줄 수 없었고 내주려 하지도 않았다. 하기야 그녀는 콩브레에서 우리에 대한 저마다의 도리에 관해 지극히 드높은 관념을 가지고 온 터라, 우리 집 하인 중 누구라도 우리를 “저버리는” 것을 그냥 넘기지 못했으리라. 이 신조가 그녀를 어찌나 고결하고, 어찌나 위엄 있으며, 어찌나 유능한 교사로 만들어 놓았던지, 우리 집에 들어온 하인이라면 아무리 물이 든 자라도 이내 그 삶의 관념을 고치고 정화하여, 상인들의 심부름 같은 것에는 손도 대지 않으려 했고, 예전에는 아무리 남의 편의를 봐주려는 마음이 없었던 자라도 내 손에서 가장 작은 꾸러미 하나라도 받아 들고 내가 그것을 나르느라 힘들지 않게 하려고 부리나케 달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콩브레에서 프랑수아즈는 또한 자기 일에 어떤 도움도 참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버릇을 몸에 붙여 파리까지 가지고 왔다. 누군가 자기를 도우러 오는 꼴을 보면 그녀에게는 그것이 치명적인 모욕을 당하는 일처럼 여겨졌으니, 하인들이 몇 주 동안이나 그 집에 있으면서도 그녀에게서 아침 인사에 대한 답 한마디 받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작별 인사도 없이, 그들이 그 까닭을 짐작도 못 하는 채로 휴가를 떠나 버린 일도 있었다. 그 까닭이란 오로지, 그녀가 몸이 좋지 않던 어느 날 그들이 그녀 일의 한몫을 거들겠다고 나섰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토록 편찮은 이때에, 프랑수아즈에게는 그 소임이 유독 자기만의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정식 담당자인 자기가, 이 큰일 치르는 날들의 의식에서 자기 몫을 빼앗기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쫓겨난 젊은 하인은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집사의 본을 따 내 책상에서 편지지를 슬쩍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 서가에서 시집들까지 빌려 가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의 절반은 그것을 읽으며 보냈으니, 그 시를 쓴 시인들에 대한 흠모에서였으나, 또한 나머지 시간에 고향 마을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를 그 시구로 아로새기기 위함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그것으로 친구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는 앞뒤가 별로 없었던지라, 그는 내 서가에서 아무렇게나 골라낸 이 시들이 누구나 다 아는, 인용하는 것이 관례인 것들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어리둥절해할 것쯤은 미리 감안하지 않은 채, 이 시골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 나름의 감상 사이사이에 라마르틴의 시행을 끼워 넣었으니, 마치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오래 웃는 법!”이라거나 그저 “요즘 어떻게 지내나?”라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그리했다.
할머니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우리는 그녀에게 모르핀을 놓았다. 불행히도 그것은 다른 면에서는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었으나 알부민의 양을 늘렸다. 할머니 안에 거처를 튼 그 사악한 도깨비를 겨냥해 우리가 내지른 타격은 늘 빗나갔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하는 것은 그 사이에 낀 그녀의, 가엾은 몸뚱이였으니, 그녀는 하소연이랍시고 희미한 신음 한마디 넘어서는 소리를 결코 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그녀에게 안긴 고통은, 우리가 그녀에게 줄 수도 없는 이로움으로 벌충되지도 못했다. 우리가 없애 버리려고 안달하던 그 사나운 도깨비를 우리는 겨우 건드리는 데 그쳤고, 우리가 한 일이라곤 그것을 한층 더 노하게 하여, 어쩌면 그것이 그 가엾은 포로를 집어삼킬 순간을 앞당긴 것뿐인지도 몰랐다. 알부민 배출이 지나쳤던 어떤 날들에는, 코타르가 얼마간 망설인 끝에 모르핀을 끊었다. 그토록 하찮고 그토록 평범한 이 사내에게도, 그가 이런저런 치료법의 상대적 위험이 마음속에 번갈아 떠오르는 가운데 심사숙고하여 결단에 이르는 그 짧은 순간들에는, 여느 삶에서는 온통 속되기 짝이 없으나 뛰어난 전략가여서, 위기의 순간에 잠깐의 성찰 끝에 군사적으로 가장 현명한 방책을 정하고 “동쪽으로 진격하라”라고 명을 내리는 어느 장군에게서와 똑같은 그런 위대함이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이 요독증 발작에 어떤 한계를 지우기를 바랄 여지가 아무리 적을지라도, 콩팥을 지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할머니가 모르핀을 맞지 않으면 그 고통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그녀는 신음 없이는 하기 힘든 어떤 몸짓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려 했다. 크게 보면 고통이란, 자기를 불안하게 하는 새로운 상태에 스스로 익숙해지려고, 그 상태에 제 감수성을 맞추려고 유기체가 느끼는 일종의 필요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다 불편한 것은 아닌 어떤 불편들에서 이 고통의 기원을 알아볼 수 있다.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찬 방에, 무딘 신경을 지닌 두 사내가 들어와 제 볼일을 볼 것이다. 그러나 더 예민한 세 번째 사내는 끊임없는 불편을 드러낼 것이다. 그의 콧구멍은 그 냄새를, 마땅히 알아차리지 않으려 애써야 할 것 같은 그 냄새를 계속 불안스레 킁킁댈 터인데, 오히려 그것을 더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그 어지러워진 후각에 그것을 붙들어 매려 자꾸만 애를 쓸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한 가지 결과로, 그의 그 골똘한 마음 씀이 정작 그가 치통을 하소연하는 것은 막아 줄 법도 하다. 할머니가 고통에 시달릴 때면 땀이 그 발그레한 이마 위로 흘러내려 흰 머리카락을 거기에 달라붙게 했고, 방 안에 우리 중 아무도 없다고 여기면 그녀는 “아, 지독하구나!” 하고 부르짖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그녀는 곧바로 온 힘을 다해 얼굴에서 고통의 기색을 죄다 몰아내거나, 또는 그 대신 다른 방책을 써서, 똑같은 하소연을 되풀이하되 거기에다 어머니가 혹여 엿들었을 앞의 말에 소급하여 다른 뜻을 부여하는 설명을 곁들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