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가을의 평범한 일요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나는 다시 태어난 셈이었고, 삶은 온전한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날 아침, 온화한 날들이 이어진 끝에 찬 안개가 끼어 정오가 다 되어서야 걷혔기 때문이다. 날씨의 변화 하나만으로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새로이 창조하기에 충분하다. 예전에 바람이 굴뚝에서 울부짖을 때면, 나는 바람이 쇠 뚜껑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것은 마치 다단조 교향곡의 서두를 여는 저 유명한 활머리 두드림처럼, 신비로운 운명의 거역할 수 없는 부름이기라도 한 듯 강렬한 감동을 자아냈다. 자연의 모습이 바뀔 때마다 우리에게는 그와 비슷한 변형이 일어나는데, 우리의 욕망을 사물의 새로운 형태에 어우러지도록 맞추어 주기 때문이다. 안개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맑은 날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바깥으로 뻗어 나가려는 원심적 존재 대신, 나를 자기 안으로 움츠러든 사람으로, 굴뚝가 구석과 부부의 잠자리를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이 달라진 세계에서 한자리에 머무는 이브를 찾아 헤매는, 떨고 있는 아담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침 풍경의 부드러운 잿빛과 초콜릿 한 잔의 맛 사이에서, 나는 한 해쯤 전에 동시에르로 가지고 갔던 육체적·지적·도덕적 삶의 온갖 독자성을 헤아려 보려 애썼다. 그 삶은 헐벗은 언덕의 길쭉한 형상으로 문장(紋章)처럼 새겨진 채,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늘 곁에 있었으며, 내 안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일련의 기쁨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벗들에게는 도무지 전할 수 없는 기쁨이었으니, 서로 풍부하게 얽혀 그 기쁨들에 관현악 같은 반주를 입혀 주던 인상들이야말로, 내 무의식에는 내가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는 어떤 사실보다도 훨씬 더 그 기쁨들의 본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아침의 안개가 나를 잠기게 한 새로운 세계는 이미 내가 아는 세계였고(그래서 더욱 실감이 났고), 한동안 잊고 있던 세계였다(그래서 온갖 새로움을 되찾은 세계였다). 그리하여 나는 내 기억이 그러모은 안개 낀 풍경의 그림 여러 폭을, 특히 ‘동시에르의 아침’이라 이름 붙일 만한 연작을 바라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병영에서 맞은 첫 아침이 있었고, 또 하나는 생루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러 갔던 이웃 시골 저택에서의 아침이 있었다. 그 저택에서 나는 동틀 녘에 커튼을 걷고 다시 잠자리에 들기 전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앞의 그림에서는 기병 한 명이, 뒤의 그림에서는(못과 숲의 가느다란 가장자리, 나머지 온갖 것이 안개의 한결같고 유연한 부드러움 속에 삼켜져 버린 그 언저리에서) 가죽끈을 손질하던 마부 한 명이, 반쯤 지워진 프레스코에서 떠오르는 저 희귀한 형상들처럼, 그 어스름한 반음영의 신비로운 어렴풋함에 눈을 맞추어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형상들처럼 내 눈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 그림 같은 기억들을 나는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콩브레에 가 있는 부모님이 안 계신 틈을 타, 그날 저녁 빌파리지 부인의 응접실에서 열리는 작은 연극을 보러 갈 작정으로, 그 시각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집에 계셨더라면 나는 아마 감히 외출하지 못했으리라. 어머니는 할머니의 추억을 향한 섬세한 존중에서, 그 추억에 바치는 애도의 표시가 자유롭고 진실하게 우러나오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이 외출을 금하지는 않았겠지만 못마땅해했을 것이다. 반면 콩브레에 계신 어머니께 내가 의향을 여쭈었더라면, 어머니는 “네 마음대로 하렴. 이제 옳고 그름을 분간할 만큼 컸으니” 하고 서글프게 대답하는 대신, 나를 파리에 홀로 남겨 둔 것을 자책하며 내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가늠하고는, 당신 자신에게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종류의 기분 전환을 나를 위해 바랐을 것이며, 무엇보다 내 건강과 신경의 균형을 지키는 데 마음 쓰던 할머니라면 나에게 그런 기분 전환을 권했으리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을 것이다.
그날 아침 새 증기 난방기의 화로에 처음으로 불이 지펴졌다. 그 거슬리는 소리, 간헐적인 딸꾹질 같은 소리는 동시에르에 대한 내 기억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내 안에서 그 소리가 그 기억들과 오래도록 마주친 탓에, 둘 사이에는 지속적인 친연이 생겨나, 그 뒤로 그 소리를 그럭저럭 잊고 지내다가도 중앙난방기가 다시 딸꾹질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언제나 그 기억들이 떠오르게 되었다.
집 안에는 프랑수아즈밖에 없었다. 잔비처럼 대지에 내려앉는 잿빛 빛은 쉼 없이 투명한 그물을 짜 냈고, 그 그물 너머로 일요일의 나들이객들이 은빛 광택을 두르고 나타났다. 나는 침대 발치에 피가로를 던져 두었는데, 내가 기고한 글이 아직 실리지 않은 뒤로 아침마다 경건하게 그 신문을 받아 오게 하던 터였다. 해가 없는데도 대낮의 빛이 여전히 강렬한 것으로 보아 아직 오후의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맑은 날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안개처럼 어리고 바스러질 듯한 튈 커튼은 잠자리의 날개나 베네치아 유리가 지닌 것과 똑같은 아름다움과 연약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날 아침 스테르마리아 양에게 편지를 보낸 터라, 이 일요일을 혼자 보내야 한다는 것이 한층 더 나를 우울하게 했다. 로베르 드 생루는 어머니가 고통스럽고도 번번이 실패한 시도 끝에 마침내 정부(情婦)에게서 떼어 놓는 데 성공했고, 그 직후 이미 얼마 전부터 사랑하지 않게 된 여자를 그곳에서 잊기를 바라는 마음에 모로코로 보내졌는데, 전날 나에게 도착한 짤막한 편지로 곧 짧은 휴가를 얻어 프랑스로 온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파리는 그저 스쳐 지날 뿐이었으므로(그의 가족은 필시 그가 라셸과 관계를 다시 맺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는 내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보이려고, 탕헤르에서 스테르마리아 양, 아니 정확히는 부인(결혼한 지 석 달 만에 남편과 이혼했으므로)을 만났다고 알려 왔다. 그리고 로베르는 내가 발베크에서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는, 나를 대신해 그녀에게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녀는 브르타뉴로 돌아가기 전 파리에서 보낼 어느 저녁, 나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 기쁘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한다. 그는 스테르마리아 부인에게 지체 없이 편지를 쓰라고 당부했는데, 그녀가 내가 그의 편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도착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나에게 놀랍지 않았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앓던 무렵 그가 나를 배신이니 불충이니 하며 몰아세운 뒤로 그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었는데도 그러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질투를 부추기기 좋아하던 라셸은, 나에게 앙심을 품을 다른 이유들도 있던 터라, 자기 애인에게 내가 그의 부재를 틈타 자기와 관계를 맺으려 비열하게 수작을 부렸다고 믿게 했던 것이다. 그는 아마 이 주장이 사실이라고 계속 믿었겠지만, 이미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그 진위는 그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고, 우리의 우정만이 남았다. 그를 다시 만나 그가 나를 몰아세운 일을 이야기하려 했을 때, 그의 유일한 대답은 다정하고 정겨운 미소였으니, 그 미소는 마치 용서를 비는 듯한 표정을 그에게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렇다고 그가 얼마 뒤 파리에 있을 때 이따금 라셸을 만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몫을 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아주 드물다. 그들은 영영 떠나가기 전에, (사람들이 옛사랑이 되살아났다고 믿을 만큼) 뜻하지 않은 순간에 되돌아와 옛 자리를 다시 차지하곤 한다. 생루가 라셸과 갈라선 상처는, 그녀가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데서 오는 위안 어린 즐거움 덕분에 이내 견딜 만해졌다. 사랑의 지속을 늘려 주는 질투도 다른 상상의 형태들보다 그리 많은 재료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을 떠날 때 도중에 잃어버리기 십상인 서너 개의 심상(가령 폰테베키오에 수북이 쌓인 백합과 아네모네라든가, 안개에 싸인 페르시아풍 교회 같은)을 지니고 나선다면, 이미 여행 가방은 제법 가득 찬 셈이다. 정부와 헤어질 때, 그녀를 잊기 시작하기까지는, 마음속에 그려 둔 서너 명의 있을 법한 보호자들, 다시 말해 질투의 대상이 되는 그 서너 명의 소유물이 그녀가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며, 그렇게 그려 두지 않은 다른 이들은 전혀 안중에 없다. 그런데 버림받은 정부가 자주 돈을 요구한다고 해서, 높은 열을 표시하는 도표가 병의 실상을 온전히 보여 주지 못하듯이, 그것이 그녀의 삶을 온전히 그려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후자가 적어도 그녀가 앓고 있다는 표시는 되듯이, 전자는 버림받은 여자든 버린 여자든(어느 쪽이든 간에) 부유한 보호자를 이렇다 할 만큼 얻지는 못했으리라는, 사실 꽤나 막연한 짐작거리는 되어 준다. 그리하여 요구가 올 때마다 질투하는 이는, 자기 고통에 찾아든 소강이 안겨 주는 기쁨으로 그것을 반기며, 곧바로 돈을 부쳐 응한다. 물론 그는 그녀가 무엇에든 궁하기를 바라지 않으니, 다만 애인만은 예외로(마음속에 그려 둔 세 애인 가운데 하나) 궁하기를 바라며, 마침내 세월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후임자의 이름을 알게 될 때까지 그러하다. 이따금 라셸은 밤늦게 찾아와, 아침까지 옛 애인 곁에 누워 있어도 되겠느냐고 청하곤 했다. 이는 로베르에게 큰 위안이었으니, 아무리 그가 침대의 대부분을 차지해도 그녀의 잠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쨌든 둘이 한때 다정하게 함께 살았다는 기억이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자기 몸에 바싹 붙어 누우면 다른 어디에서보다 편안해한다는 것을, 호텔에서조차 자기 곁이라면 오래전부터 알던 방, 습관의 힘이 지배해 더 잘 잠들 수 있는 방에 있는 듯이 여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의 어깨도, 팔다리도, 온몸이 그녀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것들이어서, 잠을 못 이루거나 밤중에 일어나야 해서 그가 지나치게 뒤척여도 그녀를 방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느끼는 것이 그녀의 안식을 한층 더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로베르의 편지에 한층 더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가 차마 더 노골적으로 쓰지 못한 것을 행간에서 읽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별실을 잡아 함께 저녁을 들자고 청해도 좋아.” 그는 이렇게 적었다. “매력적인 아가씨에다 성품도 사랑스러워서, 너와 아주 잘 어울릴 테고, 분명 둘이 멋진 저녁을 보낼 거야.” 부모님이 주말에,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돌아오시고, 그 뒤로는 저녁마다 집에서 먹어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나는 곧바로 스테르마리아 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금요일까지 그녀가 좋을 아무 저녁이나 정하자고 청했다. 그날 저녁 여덟 시쯤 서면으로 답을 주겠다는 전갈이 돌아왔다. 그녀의 편지를 기다리는 오후 동안 누군가 찾아와 준다면 시간은 제법 빨리 갔을 것이다. 이야기에 파묻혀 시간이 흐를 때면 우리는 시간을 세지도, 아니 알아차리지도 않게 되고, 그리하여 시간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문득 우리가 놓쳐 버린 그 지점을 훌쩍 지나서야 저 날쌘 도망꾼 같은 시간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면 우리의 골똘함은, 아직 멀고 끊임없이 기다려지는 그 순간을 똑딱거리는 시계추처럼 잦고 한결같게 눈앞에 들이밀어, 벗들과 함께였다면 세지 않았을 온갖 분(分)으로 시간을 나누어, 아니 곱해 놓는다. 그리하여 이 오후, 나 혼자 보내야 할 이 오후는, 스테르마리아 부인과 함께 (아, 그러나 며칠 뒤에야!) 맛보게 될 뜨거운 기쁨을 향한 나의 욕망이 끊임없이 되살아나 그 기쁨과 맞부딪히는 가운데, 몹시도 공허하고 몹시도 서글퍼 보였다.
이따금 나는 승강기가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 뒤에는 두 번째 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바라던 소리, 곧 우리 층에 멈추는 소리가 아니라, 그와는 사뭇 다른 소리, 승강기가 위층으로 계속 올라가며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내가 손님을 기다릴 때면 으레 내 층이 버림받았음을 뜻했기에, 다른 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조차 그 자체로 음산한 소리로 남아, 마치 독방 감금의 선고가 그 안에서 메아리치는 듯했다. 지치고 체념한 채 아직 몇 시간이나 그 태곳적 일에 매달린 잿빛 낮은 빛과 그늘로 어른거리는 바느질감을 꿰매고 있었고, 나는 나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와 홀로 남겨지리라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그것은 마치 더 잘 보이려고 창가에 자리 잡고 일을 마무리하면서 같은 방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는 바느질꾼 같았다. 문득, 초인종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프랑수아즈가 문을 열어 알베르틴을 들여보냈다. 알베르틴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다가왔는데, 통통한 몸에는, 내가 그 뒤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은 저 발베크에서 함께 보낸 나날들이, 내가 그 나날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춘 채, 나를 찾아 담겨 있었다. 관계가 아무리 하찮았던 사람이라 해도, 그 관계가 달라진 뒤 다시 만나면,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시기를 나란히 붙여 놓는 일과 같다. 그러려면 옛 정부가 벗으로서 우리를 찾아올 필요까지도 없이, 그저 어떤 특정한 삶의 나날 속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파리로 찾아오고, 그 삶이 우리에게는, 불과 일주일 전일지라도, 끝나 버렸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소 지으며 무언가 묻는 듯 발그레해진 알베르틴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나는 이런 물음들을 읽을 수 있었다. “빌파리지 부인은요? 무용 선생은요? 과자 장수는요?”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 그 등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머! 여기엔 절벽이 없네요. 그래도 발베크에서 그러던 것처럼 곁에 앉아도 괜찮죠?” 그녀는 시간을 비추는 거울을 내게 건네는 요술쟁이 같았다. 이 점에서 그녀는 이제 좀처럼 만나지 않지만 한때 더 가깝게 지내던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알베르틴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발베크에서도, 날마다 마주칠 때면, 그녀가 나타나는 모습에 나는 늘 놀라곤 했으니, 그만큼 그녀의 겉모습은 날마다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예전에 감돌던 장밋빛 아지랑이가 걷히자 조각상처럼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얼굴이, 아니 차라리 마침내 하나의 얼굴이 생겨 있었다. 몸도 자라 있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발베크에서는 그 겉면에 앞날의 윤곽이 겨우 어른거리던 그 껍질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에 알베르틴은 여느 때보다 일찍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보통 그녀는 봄에야 오곤 했는데, 그래서 나는 이미 몇 주 전부터 첫 꽃들을 짓눌러 떨어뜨리는 폭풍에 심란해하던 터라, 내가 느끼는 기쁨의 요소들 가운데 알베르틴의 귀환과 화창한 날씨의 도래를 따로 구별하지 못하곤 했다. 그녀가 파리에 와서 집에 들렀다는 말만 들어도, 나는 바닷가에 피어난 장미처럼 그녀를 다시 보는 듯했다. 그런 순간에 나를 사로잡은 것이 발베크에 대한 욕망이었는지 그녀에 대한 욕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를 향한 내 욕망은 그 자체로 발베크를 손에 넣는 게으르고 비겁하고 불완전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떤 것을 물질적으로 소유하는 것, 어떤 고을에 거처를 정하는 것이 그것을 정신적으로 소유하는 것과 맞먹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게다가 물질적으로 보아도, 그녀가 더는 바다의 지평선을 배경으로 내 상상 속에 놓여 있지 않고 나와 함께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면, 그녀는 흔히 아주 초라한 장미로 보였고, 어찌나 초라하던지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그 꽃잎의 이런저런 흠을 보지 않고, 그 대신 바닷가에서 짭짤한 바닷바람을 들이마시고 있다고 상상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기서 이 점을 말해 두어야겠다. 물론 그때 나는 훨씬 나중에야 벌어질 일을 알지 못했지만. 분명 우표나 낡은 담뱃갑에, 심지어 그림이나 조각상에 삶을 바치기보다 여자들에게 삶을 바치는 편이 더 이치에 맞다. 다만 다른 수집가들의 예를 보아 우리는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여자를 하나만 두지 말고 여럿 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하리라. 처녀에게 넘쳐 나는 저 매혹적인 암시들, 바닷가라든가, 성당에 놓인 조각상의 땋은 머리라든가, 오래된 판화라든가,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그녀에게서 매혹적인 구도를 보고 감탄하게 하는 온갖 것의 암시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여자와 아주 함께 살아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내 당신을 사랑에 빠지게 한 그 온갖 것을 더는 보지 못하게 되리라. 다만 덧붙이자면, 이렇게 갈라진 두 요소는 질투로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랜 동거 끝에 내가 알베르틴에게서 그저 평범한 여자밖에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녀와 발베크에서 사랑했던 누군가 사이의 밀회 하나면, 어쩌면 그녀 속에 바닷가와 밀려드는 물결을 다시 불어넣어 하나로 녹여 내기에 넉넉할지 모른다. 다만 이 이차적인 암시들은 더는 우리의 눈을 사로잡지 못하므로, 그것들은 마음에나 느껴지고 마음에나 치명적이다. 그토록 위험한 형태로 그 기적이 되풀이되기를 바랄 만한 일로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 해 뒤의 일을 앞질러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만, 사람들이 낡은 손잡이 안경 수집품을, 아무리 갖추어도 진열장에 더 진귀한 하나를 들일 자리가 늘 남아 있는 그 수집품을 간직하듯, 내 여자들의 수집품을 그저 그렇게 간직할 분별이 내게 없었음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휴가철에 늘 다니던 순서에서 벗어나, 올해 그녀는 발베크에서 곧장 왔는데, 게다가 그곳에 여느 때만큼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그녀를 못 본 지 오래였고, 파리에서 그녀가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으므로, 그녀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 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아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기간은 흔히 꽤 오래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화창한 날, 알베르틴이 불쑥 들이닥치곤 했는데, 그 장밋빛 출현과 말없는 방문은, 내 눈이 굳이 꿰뚫어 보려 애쓰지 않던 그 감춰진 삶의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그 사이 동안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나에게 별다른 것을 알려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조짐들이 그녀의 삶에 무언가 새로운 경험이 끼어들었음을 가리키는 듯했다. 하기야 어쩌면 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란, 알베르틴이 이제 이른 그 나이에는 처녀들이 아주 빠르게 변한다는 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그녀의 지성이 이제 더 뚜렷이 드러났으니, 소포클레스가 “친애하는 라신 님께”라고 편지를 쓰게 하자는 자기 착상이 더 낫다고 그토록 열을 올려 우기던 날의 일을 내가 일깨워 주자,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아주 진심으로 자기 어리석음을 두고 웃었다. “앙드레 말이 옳았어요. 내가 바보였죠.” 그녀는 인정했다. “소포클레스라면 이렇게 시작했어야 했어요. ‘귀하’ 하고요.” 나는 앙드레의 “귀하”나 “삼가 아룁니다”도 그녀 자신의 “친애하는 라신 님께”나 지젤의 “친애하는 벗에게”만큼이나 우스꽝스럽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로 어리석은 자들은 아직도 소포클레스가 라신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그 선생들이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여기서 알베르틴은 내 말을 따라오지 못했다. 그녀는 그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지성은 동트고 있었으나 아직 활짝 피어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더 마음을 끄는 다른 새로움들도 있었다. 방금 내 침대 곁에 앉은 이 어여쁜 처녀에게서 나는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눈매를 비롯한 이목구비의 그 선(線)들, 삶을 대하는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그 선들에서, 자세의 전환이, 부분적인 회심(回心)이 느껴졌으니, 마치 오래전 발베크의 어느 저녁, 내가 헛되이 온 힘을 쏟아 부딪쳤던 그 저항들이 이제 무너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지금과 좌우가 뒤바뀐, 대칭을 이루는 한 쌍을 이루고 있었으니, 그때는 그녀가 누워 있고 내가 그 머리맡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가 입맞춤을 허락할지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감히 그러지 못한 채, 나는 그녀가 가려고 일어설 때마다 조금만 더 곁에 있어 달라고 청했다. 이는 쉬 얻어 낼 수 있는 양보가 아니었으니, 그녀는 딱히 할 일이 없으면서도(있었다면 집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 습관이 규칙적인 사람인 데다, 나에게 그리 살갑지도 않아 내 곁에서 도무지 편치 않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때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뒤 내 청에 다시 앉았고, 마침내 내가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는데도 몇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다. 내가 그녀에게 하는 말들은 그 앞 몇 시간 동안 한 말들에 논리적으로 이어졌을 뿐, 내가 속으로 생각하던 것, 내가 그녀에게서 바라던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그것은 언제까지나 나란히 평행선을 그은 채였다. 욕망만큼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 마음속 생각과 조금도 닮지 못하게 하는 것도 없다. 시간은 촉박한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를 사로잡은 바로 그 주제와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함으로써 시간을 벌려는 듯이 군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몸짓으로 곁들이려, 아니 차라리 몸짓으로 앞세우려 하는데, 이는 곧 우리가 당장 실행에 옮기는 즐거움을 스스로에게 안기고 그 뒤 따라올 반응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려 굳이 나서지 않고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실례합니다” 한마디조차 없이 이미 그 몸짓을 해 버렸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알베르틴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 바깥 안개의 자식인 그녀는 날씨의 변화가 내 안에 일깨운 상상 속 욕망을 채워 줄 수 있을 따름이었으니, 그 욕망은 부엌의 기술과 기념비적 조각의 기술이 각기 채워 주는 욕망들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그 욕망은 나로 하여금 내 살에 다르고 따뜻한 어떤 실체를 섞어 넣는 꿈과, 뻗어 누운 내 몸의 어느 지점에 비스듬히 어긋난 몸 하나를 잇대는 꿈을 동시에 꾸게 했으니, 마치 발베크 성당의 저 로마네스크 부조에서 이브의 몸이 겨우 두 발로만 아담의 옆구리에 매달려 그 몸에 거의 수직으로 놓여 있는 것과 같았다. 그토록 고결하고 그토록 고요한 방식으로, 여전히 고전적 프리즈에 가까운 모습으로 여인의 창조를 새긴 그 부조에서, 하느님은 두 시종처럼 두 작은 천사를 어디서나 거느리는데, 보는 이는 그 천사들에게서, 겨울이 불시에 덮쳤으나 살려 준 여름의 날개 달린 무리처럼, 헤르쿨라네움의 큐피드들을 알아본다. 그 큐피드들은 13세기까지도 살아남아, 지치긴 했으나 그들에게 으레 기대할 법한 우아함만은 결코 잃지 않은 채, 현관 정면 전체에 걸쳐 마지막으로 느릿한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욕망을 채워 줌으로써 나를 이런 명상에서 풀어 주었을 이 즐거움, 다른 어떤 어여쁜 여자에게서도 나는 그만큼 선뜻 구했을 이 즐거움에 대해 말하자면, 만약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면, 곧 그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물결 내내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단 한 가지만은 알베르틴에게 감추려 애썼는데, 그 물결 속에서 무엇을 근거로 그녀가 응해 줄지도 모른다는 나의 낙관적 가설을 세웠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그 가설은 (잊고 있던 알베르틴의 목소리 윤곽이 내게 그녀 인격의 굴곡을 다시 그려 주는 사이) 그녀의 어휘에는 없던, 적어도 이제 그녀가 부여하는 뜻으로는 없던 어떤 낱말들이 나타난 데서 비롯되었다고. 이를테면 그녀는 나에게 엘스티르가 어리석다고 말했고, 내가 그에 항의하자 이렇게 대꾸했다.
“못 알아들으시네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제 말은 그이가 그렇게 처신한 게 어리석었다는 거예요. 물론 그이가 정말 아주 걸출한 분이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마찬가지로 퐁텐블로 골프 클럽이 세련되었다는 말을 하려고 그녀는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거긴 아주 선택된 사람들만 모여요.”
내가 벌인 결투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내 입회인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입회인들이 참 엄선되었네요.” 그러고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콧수염을 길렀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심지어(그러자 내 승산은 엄청나게 커 보였다), 일 년 전이라면 그녀가 몰랐으리라고 내가 장담했을 어떤 표현으로, 지젤을 마지막으로 본 뒤로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알베르틴이 내가 발베크에 있을 때 이미, 집안이 넉넉함을 대번에 드러내는 그런 표현들을 제법 갖추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표현들은, 어머니가 딸이 자라남에 따라 중요한 자리마다 자신의 보석을 조금씩 물려주듯, 해마다 딸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알베르틴이 더는 어린애가 아님이 분명해진 것은, 어느 날 낯선 부인이 준 선물에 감사를 표하려고 그녀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을 때였다. 봉탕 부인은 남편을 건너다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남편의 촌평은 이러했다.
“허, 열넷치고는 조숙하군.”
결혼 적령기가 다가옴은, 알베르틴이 말투가 험한 다른 처녀를 두고 “저 앤 예쁜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분을 한 치나 두껍게 처발랐거든요”라고 말했을 때 한층 뚜렷이 드러났다. 마침내, 아직 여학생인데도 그녀는 이미 자기 가정 교육과 신분에 걸맞은 어엿한 부인의 몸가짐을 내보였으니, 얼굴을 씰룩거리는 누군가를 두고 “저 사람은 못 보겠어요, 나도 따라 하고 싶어지거든요”라고 하거나, 누군가의 흉내를 낼 때면 “우스운 건, 그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면 영락없이 그 사람하고 똑같아 보인다는 거예요”라고 하는 식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교계의 곳간에서 길어 온 것이다. 그러나 “걸출한”이라는 말이, 내 아버지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으나 지적 성취를 칭송하는 소리를 들은 어느 동료를 두고 “아주 걸출한 사람인 모양이야”라고 할 때 쓰던 그 뜻으로, 알베르틴의 타고난 환경에서 나왔을 리는 없어 보였다. “선택”이라는 말은, 골프 클럽에 쓰였을 때조차, “자연”이라는 형용사가 앞에 붙어 다윈의 연구보다 몇 세기 앞서 나온 글에 실린 것만큼이나 시모네 집안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얼마간의 세월”은 한결 더 좋은 조짐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그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나의 온갖 기대를 정당화하기에는 넉넉한 어떤 격변의 증거가 나타났으니, 결코 얕볼 수 없는 의견을 지닌 사람의 흐뭇함을 담아 알베르틴이 이렇게 선언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