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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②

4권 제1부 · 서곡

이 장면이 시작될 무렵부터, 마침내 눈이 뜨인 내게는 샤를뤼스 에게 하나의 혁명이 일어나 있었으니, 마치 마법사의 지팡이가 그를 건드리기라도 한 듯 그토록 온전하고 그토록 순식간의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깨닫지 못했기에 보지 못했다. 악덕은(이 낱말을 쓰는 것은 그저 편의를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 저마다의 악덕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한 그들 눈에 보이지 않던 그 친숙한 정령처럼, 한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우리의 선함도, 우리의 비열함도, 우리의 이름도, 우리의 교제 관계도 눈에 저를 드러내지 않으니, 우리는 그것들을 제 안에 감추고 다닌다. 오디세우스조차 아테나를 대뜸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들은 서로를 이내 알아보는 법이며, 같은 것은 같은 것을 그토록 빨리 알아보는 법이니, 샤를뤼스 또한 쥐피앙에게 그러했던 것이다. 그 순간까지 나는 샤를뤼스 앞에서, 부른 배의 윤곽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임신한 여인 앞에 선 어떤 얼빠진 사내와 같은 처지였으니, 그 여인이 웃으며 “네, 지금은 좀 피곤하네요”라고 거듭 말하는데도, 그는 눈치 없이 “아니, 어디가 편찮으신 거요?”라고 자꾸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에게 “저분은 아이를 가졌어요”라고 말해 주기만 하면, 그는 문득 그녀의 배를 알아보고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설명이며, 하나의 오류가 걷히는 것은 우리에게 감각 하나를 더해 준다.

이 법칙의 예를, 오랜 세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가 어느 날, 여느 사람과 똑같은 그 개인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여태 보이지 않던 잉크로 그려진, 고대 그리스인들이 소중히 여긴 그 낱말을 이루는 글자들이 문득 나타나던 그날에야 비로소 알아본, 제가 아는 샤를뤼스 씨 같은 이들에게서 굳이 찾아보고 싶지 않은 독자라면,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처음에는 벌거벗은 채, 더 잘 아는 이들의 눈에는 내어 주는 그 숱한 장식을 벗은 채 저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그저 제 한평생에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지를 뻔했던가를 떠올려 보기만 하면 된다.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의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 같은 얼굴에는, 그가 바로, 사람들이 막 “저 여편네 좀 보게!”라고 말하려던 어떤 여인의 오라비이거나, 정혼자이거나, 정부라고 짐작하게 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다행스럽게도, 곁에 선 누군가가 그들에게 속삭인 한마디가 그 입술 위의 치명적인 말을 붙들어 세운다. 그러면 이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처럼, 이런 말들이 떠오른다. “그는 …와 약혼한 사이야”, 혹은 “그는 …의 오라비야”, 혹은 “그는, 우리가 그 앞에서 여편네라고 불러서는 안 될 그 여인의 정부야.” 그리고 이 하나의 새로운 관념은, 우리가 그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에 관해 지녀 온 토막토막의 관념들을, 이제부터는 온전한 하나가 될 그 관념들을, 어떤 것은 뒤로 밀치고 어떤 것은 앞으로 끌어내며, 통째로 다시 짜 놓을 것이다. 샤를뤼스 안에는, 말이 켄타우로스를 다른 존재로 만들듯 그를 다른 사내들과 그토록 다르게 만드는 또 다른 피조물이 실로 그와 한 몸을 이루고 있었을 터이고, 그 피조물이 실로 남작 안에 깃들어 있었을 터이건만, 나는 그것을 여태 언뜻도 보지 못했다. 이제 그 추상은 물질로 화하였고, 마침내 알아본 그 피조물은 보이지 않은 채로 있을 힘을 잃었으며, 샤를뤼스 가 새로운 사람으로 뒤바뀐 것이 어찌나 온전했던지, 그의 얼굴과 목소리의 상반됨뿐 아니라, 돌이켜 보건대 나와의 관계에서 그가 보인 그 온갖 부침(浮沈)까지도, 여태 내 머릿속에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던 모든 것이 환히 알아지고 뚜렷이 드러났으니, 마치 탁자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글자들로 조각조각 남아 있는 한 아무 뜻도 없던 문장이, 그 글자들을 올바른 차례로 다시 늘어놓으면, 그 뒤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았다.

게다가 나는 이제 이해했다. 그날 낮에 그가 빌파리지 부인 댁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어째서 내가 샤를뤼스 가 여자처럼 보인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는지를. 그는 정말로 여자였던 것이다! 그는 겉보기만큼 역설적이지는 않은 어떤 종족에 속해 있었으니, 그들의 이상이 남성적인 것은 오로지 그들의 기질이 여성적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삶 속에서 겉모습으로만 다른 남자들을 닮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온 우주를 바라보는 그 두 눈 속에, 눈동자 표면에 새겨진 하나의 인간 윤곽을 지니고 다니는데, 그들에게 그 윤곽은 요정의 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의 것이다. 저주가 짓누르는 종족, 거짓과 위증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종족이니, 세상이 그들의 욕망을, 모든 인간 존재에게 삶의 가장 큰 행복을 이루는 바로 그것을, 벌받아 마땅하고 수치스러우며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마저 부인해야 하니, 그리스도교도조차 법정에 서서 심문을 받을 때면 그리스도 앞에서, 또 그분의 이름으로, 자기들에게는 삶 그 자체인 그것에 대한 고발을 하나의 비방인 양 변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없는 아들들, 어머니가 살아 있는 내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고 심지어 죽어 가는 그 눈을 감겨 드리는 순간에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아들들이며, 우정 없는 친구들이니, 흔히 인정받는 그들의 매력이 불러일으키는 온갖 우정에도 불구하고, 또 자주 너그러운 그들의 마음이 기꺼이 느끼고자 하는 온갖 우정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그러나 오직 거짓 덕분에만 무성해지는 그런 관계를, 그리고 그들이 자칫 빠져들고 싶은 첫 신뢰와 진심의 토로가 곧바로 그들을 혐오 속에 내쫓기게 만들 그런 관계를 과연 우정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다만 상대가 공정한, 다시 말해 동정 어린 마음의 소유자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사람은 통속적인 심리학에 이끌려 그들을 오해한 나머지, 고백된 악덕에서 정작 그 악덕과는 가장 무관한 애정이 솟아난다고 여길 것이다. 마치 어떤 판사들이 원죄와 종족적 숙명에서 끌어온 이유로, 성도착자의 살인과 유대인의 반역을 으레 그러려니 여기고 더 기꺼이 용서하려 드는 것처럼. 그리고 끝으로, 적어도 내가 그때 대강 그려 본 첫 번째 이론에 따르면(이 이론은 뒤에 가서 얼마간 수정되는 것을 보게 되겠지만, 또 이 이론대로라면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그들을 분노케 했으련만, 그들로 하여금 보고 살아가게 하는 바로 그 환상이 이 역설을 그들의 눈에서 가려 주지 않았더라면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많은 위험과 그토록 큰 고독을 견뎌 낼 힘을 주는 바로 그 사랑의 가능성을 언제나 원천봉쇄당한 연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필이면 여성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그런 유형의 남자, 성도착자가 아니어서 결국 그들을 마주 사랑해 줄 수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돈이 그들에게 진짜 남자를 구해다 주지 않는다면, 또 그들의 상상력이 끝내 그들 스스로 몸을 판 그 성도착자들을 진짜 남자로 착각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들의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으리라. 그들의 명예는 위태롭고, 그들의 자유는 잠정적이어서 그들의 죄가 발각되는 순간까지만 지속되며, 그들의 처지는 불안정하니, 마치 어느 날은 온갖 식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런던의 온갖 극장에서 갈채를 받다가, 이튿날에는 어느 하숙집에서도 쫓겨나 머리 하나 누일 베개조차 찾지 못한 채, 삼손처럼 연자매를 돌리며 그처럼 “두 성은 각기 따로 죽으리라!” 하고 되뇌던 그 시인의 처지와도 같다. 그들은 다수가 희생자 주위로 결집하는 전면적 재난의 날들, 유대인들이 드레퓌스 주위로 결집하던 그런 날들을 제외하면, 동료들의 동정에서, 때로는 그들의 교제에서마저 배제되어 있으니, 그 동료들은 그들에게서, 더는 아첨하기를 그치고 그들이 스스로에게서 보기를 거부해 온 온갖 흠결을 도리어 도드라지게 하는 거울에 비친 제 본모습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혐오밖에 느끼지 못한다. 그 거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자기 사랑이라 불러 온 것이(그들은 이 말을 가지고 말장난하듯, 시와 회화와 음악과 기사도와 금욕이 사랑에 덧붙여 놓은 온갖 것을 연상 작용으로 거기에 끌어다 붙였거니와) 그들이 선택한 아름다움의 이상에서가 아니라 치유될 수 없는 병에서 솟아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또다시 유대인들처럼(자기 종족끼리만 어울리며 입에는 늘 의례적인 말과 판에 박힌 우스개를 달고 사는 일부를 빼면), 그들은 서로를 피하고, 자기와 가장 정반대인 자들, 자기와의 교제를 바라지 않는 자들을 찾아 나서며, 그들의 퇴짜를 용서하고, 그들의 겸양 어린 태도에 황홀해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해지는 배척과 그들이 떨어진 오명 때문에 결국 같은 부류끼리 어울리게 되니, 이스라엘이 겪은 것과 비슷한 박해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의 종족이 지니는 육체적, 정신적 특징을, 때로는 아름답고 흔히는 흉측한 특징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반대편 종족에 더 가깝게 뒤섞이고 더 잘 동화되어 겉보기로는 상대적으로 가장 덜 도착적인 자가, 여전히 더 도착적인 채로 남은 자에게 퍼붓는 온갖 조롱에도 불구하고) 같은 부류의 무리와 어울리는 데서 하나의 위안을, 나아가 자기 삶에 대한 어떤 확증마저 얻는다. 어찌나 그러한지, 자기들이 하나의 종족임을(그 종족의 이름이야말로 가장 저열한 모욕이거니와) 한사코 부인하면서도, 자기가 거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용케 감추고 있는 자들의 정체를 그들은 서슴없이 폭로하니, 그것은 그들을 해치려는 뜻에서라기보다(물론 그런 짓에 거리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히려 자기 변명을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은(의사가 맹장염 사례를 찾듯이) 역사 속에서 성도착의 사례를 뒤지고 다니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가 자기들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듯, 소크라테스가 자기들 중 하나였음을 떠올리며 즐거워한다. 정작 이런 것은 헤아리지 못한 채로 말이다. 동성애가 상례이던 시절에는 비정상이란 없었고, 그리스도 이전에는 반그리스도교도란 없었다는 것, 오직 치욕만이 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 치욕은, 온갖 경고와 온갖 본보기와 온갖 처벌에도 완강히 버틴 자들만을, 그것도 어찌나 유별난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그 성향이(설령 고매한 도덕적 자질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저 절도나 잔혹함이나 배신처럼, 그런 자질과는 양립할 수 없어 도리어 뭇사람이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 더 쉬이 용서해 주는 어떤 다른 악덕들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역겹게 여겨지는, 그런 자들만을 살아남게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취향, 필요, 습관, 위험, 수련, 지식, 거래, 은어의 동일함에 기반을 두기에, 프리메이슨 지부의 그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더 강력하며 덜 의심받는 하나의 프리메이슨 결사를 이루면서, 그 결사 안에서는, 서로 모른 척하려는 구성원들조차 자연스럽거나 관습적인, 본의 아니거나 의도적인 신호로써 이내 서로를 알아본다. 그 신호는 거리의 거지에게는 그가 마차 문을 닫아 주는 대귀족 안에서 같은 부류의 하나를 알아보게 하고, 아버지에게는 제 딸에게 청혼하러 온 구혼자 안에서, 치유와 사면과 변호를 구하러 온 자에게는 자기가 찾아간 의사와 사제와 변호사 안에서 같은 부류의 하나를 알아보게 한다. 그들 모두는 저마다 자기 비밀을 지켜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지니는 하나의 비밀에 한몫 끼어 있으니, 그것은 나머지 인류가 짐작조차 못 하는 비밀이요, 그 때문에 그들에게는 가장 터무니없이 있음직하지 않은 모험담조차 참말로 여겨진다. 이 낭만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삶 속에서는 대사가 중죄인과 둘도 없는 벗이 되고, 대공은 귀족적 가문 교육이 갖추어 준, 소심한 소시민이라면 갖지 못했을 어떤 행동의 자유를 지닌 채, 공작부인의 야회에서 나오면서 곧장 불량배와 은밀히 밀담을 나누러 가는 것이다. 인류 전체 가운데 버림받은 한 부분, 그러나 중요한 한 부분이니,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의심받고, 그 존재가 결코 짐작되지 않는 곳에서는 뻔뻔스럽고 처벌받지 않은 채 제 모습을 뽐낸다. 그것은 어디에나 자기 무리를 두고 있으니, 민중 속에도, 군대에도, 교회에도, 감옥에도, 옥좌에도 있다. 요컨대 그것은 적어도 상당 부분, 다른 종족의 남자들과 장난스럽고도 위태로운 친밀함 속에서 살아가며, 그들을 도발하고, 제 악덕을 마치 저와는 무관한 무엇인 양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가지고 논다. 그 놀이는 상대편의 눈멂이나 이중성 덕에 수월해지는 놀이요, 이 맹수 조련사들이 잡아먹히고 마는 추문의 날이 오기까지 여러 해 이어질 수도 있는 놀이다. 그날까지 그들은 제 삶을 비밀로 감추어야 하고, 본디 눈길이 절로 머물 것들에서는 눈을 돌려야 하며, 본디 눈을 돌릴 것들에는 도리어 눈길을 붙박아야 하고, 제 어휘 속 숱한 낱말의 성(性)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구속은, 그들의 악덕이, 아니 부당하게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그들에게 지우는 내면의 구속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니, 그 내면의 구속은 이제 남들에 대해서라기보다 그들 자신에 대해 가해지는 것이요, 그것도 그들 자신에게는 그것이 악덕으로 보이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 더 실리적이고 더 바빠서 몸소 흥정을 벌이러 다닐 시간도, 협력에서 오는 삶의 간소화와 시간 절약을 마다할 여유도 없는 자들은 두 개의 결사를 만들어 냈는데, 그 둘째 결사는 오로지 자기들과 비슷한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는 가난하고 시골에서 갓 올라온 자들에게서 눈에 띄는데, 그들은 친구도 없이, 언젠가 이름난 의사나 변호사가 되겠다는 야심 하나만을 지녔을 뿐, 아직 이렇다 할 견해로 채워지지 않은 정신과, 아무런 몸가짐으로도 꾸며지지 않은 인품을 지녔으되, 그 인품을 되도록 빨리 치장하려 든다. 마치 라탱 지구의 조그만 다락방에 들여놓을 가구를 사들이듯, 그들이 몸담아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그 유익하고 진지한 직업에서 이미 “출세한” 이들에게서 관찰한 것이면 무엇이든 그대로 본떠 가면서 말이다. 이런 자들에게 있어,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소질처럼, 혹은 시력의 결함처럼 무의식적으로 물려받은 그들의 특별한 취향은, 어쩌면 그들에게 남은 유일하게 살아 있는, 그리고 전제적인 독창성일 터인데, 그 취향은 어떤 저녁이면 그들로 하여금, 말하는 법도 생각하는 법도 옷 입는 법도 머리 가르마 타는 법도 죄다 그대로 따라 배운 그런 사람들과의, 앞길에 이로운 어떤 모임을 놓치게 만든다. 그들이 사는 동네에서, 평소라면 동문 학생들이나 스승들, 혹은 먼저 출세하여 그들을 밀어 줄 만한 같은 고향 사람 정도와만 어울릴 그곳에서, 그들은 재빨리 같은 유별난 취향이 자기들에게 끌어당기는 다른 젊은이들을 알아본다. 마치 작은 고을에서 실내악이나 중세 상아 세공에 다 같이 관심을 둔 조교와 변호사 사이에 친분이 싹트는 것을 보게 되듯이. 그들은 자기 소일거리의 대상에다가도, 앞길을 이끌어 주는 것과 똑같은 실리적 본능, 똑같은 직업적 정신을 들이대면서, 이 젊은이들을 어떤 모임에서 만나는데, 그 모임에는 낡은 코담뱃갑이나 일본 판화나 진귀한 꽃을 모으는 수집가들의 모임과 마찬가지로 문외한인 외부인은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는, 정보를 얻는 즐거움과 교환의 실질적 이득과 경쟁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마치 우표 경매장에서처럼, 전문가들 사이의 긴밀한 협력과 수집가들 사이의 격렬한 경쟁이 동시에 판을 친다. 게다가 그들이 자리를 잡은 카페에서는 그 누구도 그 모임이 무엇인지, 낚시 동호회의 모임인지, 어느 편집부의 모임인지, 아니면 “앵드르의 아들들”의 모임인지 알지 못하니, 그만큼 그들의 옷차림은 반듯하고, 그만큼 그들의 태도는 차갑고 조심스러우며, 그만큼 그들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제 정부들을 두고 요란을 떠는 멋쟁이 젊은이들, 젊은 “사자들”에게 지극히 은밀한 눈길 이상은 겸손하게 삼가는 것이다. 그리고 감히 눈도 들지 못한 채 그 사자들을 흠모하던 자들은, 스무 해가 지난 뒤에야, 정작 자기들은 아카데미 입회를 눈앞에 두고 그 사자들은 클럽 창가에 앉은 중년 신사가 되었을 무렵에야 알게 되리라. 그들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던 자, 이제는 뚱뚱하고 희끗희끗해진 샤를뤼스 같은 자가, 실은 자기들과 한 부류였음을. 다만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외적 표지 아래, 그 낯섦이 자기들을 오판으로 이끈 이국의 딱지를 붙인 채로 그러했음을. 그러나 이 무리들은 저마다 다른 진전 단계에 있으니, 마치 “좌파 연합”이 “사회주의 연맹”과 다르고, 어느 멘델스존풍 음악 모임이 스콜라 칸토룸과 다르듯이, 어떤 저녁이면 다른 탁자에는 극단적인 자들이 있어, 소맷부리 아래로 팔찌를 슬며시 흘러내리게 하고, 때로는 옷깃 사이로 목걸이를 반짝이게 한다. 그들은 끈질긴 응시와 간드러진 소리와 웃음과 서로 어루만지는 짓으로 한 무리의 학생들을 부랴부랴 자리를 뜨게 만들며, 겉으로는 공손하나 그 밑으로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시중을 받는데, 그 시중을 드는 웨이터로 말하자면, 드레퓌스파를 시중들어야 하는 저녁이면 그러하듯, 팁을 챙기는 잇속만 아니라면 기꺼이 경찰을 부르고 싶어 할 자였다.

바로 이런 직업적 조직들과 대비하여 사람들은 고독한 자들의 취향을 떠올리는데, 한편으로는 그 차이점을 억지로 부풀리지 않으면서 그러하다. 그것은 고독한 자들 스스로가, 자기들에게는 오해받은 사랑으로 비치는 그것만큼 조직화된 악덕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고 여기는 바를 그대로 옮겨 놓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간 억지가 없지 않으니, 이 서로 다른 부류들은 각기 다른 생리적 유형에 대응할 뿐 아니라, 병리적인 혹은 그저 사회적인 진화의 잇따른 단계들에도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상 고독한 자들이 언젠가는, 때로는 그저 지쳐서, 때로는 편의를 좇아 그런 조직 어딘가에 스스로를 녹여 넣게 되지 않는 경우란 지극히 드물다(마치 그런 새로운 것에 가장 완강히 반대하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전화를 놓고, 이에나가를 제 야회에 초대하고, 포탱과 거래하게 되고 마는 것처럼). 게다가 그들은 대개 거기서 그리 살가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데, 비교적 순결한 그들의 삶과 경험의 부족과 그들이 잠겨 있던 몽상의 과포화가, 저 직업적인 자들이 지우려 애써 온 여성스러움의 특별한 표시들을 그들에게 도리어 더 짙게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신참들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서는 여자가 남자와 안으로만 결합해 있는 것이 아니라 흉측하게도 겉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니, 히스테릭한 경련에 사로잡히고, 무릎과 손을 뒤흔드는 날카로운 웃음에 흔들리는 그들은, 우울하게 그늘진 눈과 무엇이든 움켜쥐는 발을 가진 채 야회복 상의에 검은 나비넥타이를 차려입은 저 원숭이들만큼이나 보통 남자들과는 딴판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새 가담자들은,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그리 정결하지도 못한 다른 자들에게서, 함께 어울리다간 낭패를 볼 상대로 여겨지고, 그들의 입회에는 갖은 까다로움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받아들여지고, 그러고 나면 상업과 대규모 사업이 개개인의 삶을 바꾸어 놓으며 가져다준 저 편의들의 덕을 보게 되니, 그 편의란 여태껏 손에 넣기엔 너무 비싸고 실로 찾기도 힘들던 물건들을 그들의 손이 닿는 곳까지 가져다주는 것이요, 그 물건들은 이제, 그들 홀로였다면 아무리 빽빽한 군중 속에서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을 것들의 넘쳐 남으로 그들을 뒤덮는다. 그러나 이렇듯 무수한 배출구가 있는데도, 어떤 이들에게는 사회적 구속의 짐이 여전히 너무 무거우니, 그런 이들은 주로 자제를 습관으로 삼지 못한 자들, 그리고 제 사랑의 방식을 실제보다 더 드문 것으로 여전히 여기는 자들 가운데서 나온다. 당분간 다음과 같은 자들은 논외로 해 두자. 곧, 제 성향이 유별나다는 점 때문에 스스로를 다른 성보다 우월하다 여겨 여자들을 얕보고, 동성애를 위대한 천재와 역사의 영광스러운 시대들의 특권으로 삼으며, 남에게 제 취향을 전하려 할 때면(마치 모르핀 중독자가 제 모르핀을 두고 그러하듯) 그 취향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 자들에게 다가가기보다, 오히려 그 취향을 누릴 자격이 있어 보이는 자들에게 사도적 열의로 다가가는 자들 말이다. 마치 다른 이들이 시온주의를, 병역 거부를, 생시몽주의를, 채식주의를, 혹은 무정부주의를 설파하듯이. 여기 한 사람이 있어, 아침에 아직 잠자리에 든 그를 불쑥 찾아가 본다면, 우리 눈앞에 감탄스러운 여인의 얼굴을 내보일 것이니, 그 표정이 어찌나 두루뭉술하게 여성 전체를 대표하는지 그러하다. 그의 머리카락마저 이를 확증하니, 그 물결침이 어찌나 여성스러운지 모른다. 빗질하지 않은 그 머리카락은 어찌나 자연스럽게 긴 곱슬로 뺨 위에 드리워지는지, 이 젊은 여인이, 이 소녀가, 갓 생명에 눈뜬 갈라테아가, 자기를 가둔 이 남성 육체의 무의식적 덩어리 속에서, 아무에게도 배운 바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제 감옥 벽의 가장 좁은 틈새들을 이용해 제 존재에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데 어찌 그리도 교묘하게 성공했는지 경탄하게 된다. 물론 이 감미로운 얼굴을 뽐내는 젊은이는 “나는 여자다” 하고 말하지는 않는다. 설령 그가, 있을 수 있는 무수한 이유 중 어느 것 때문이든 한 여자와 함께 산다 해도, 그는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그녀에게 부인할 수 있고, 남자와는 한 번도 관계한 적이 없노라고 그녀에게 맹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드러내 보인 그대로의 그를, 곧 잠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반듯이 누워, 팔을 드러내고,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목과 멱까지 드러낸 그를 그녀가 한번 보게 해 보라. 잠옷 저고리는 여인의 속옷이 되고, 그 얼굴은 어여쁜 스페인 처녀의 얼굴이 된다. 그 정부는, 어떤 말로 하는 고백보다도, 아니 어떤 행동보다도 더 진실한, 제 눈앞에 내밀어진 이 은밀한 토로에 소스라친다. 하기야 그의 행동들도, 아직 그러지 않았다면, 훗날 반드시 이 토로를 확증하고야 말 것이니, 무릇 모든 생명체는 제 쾌락의 선을 따르게 마련이요, 이 생명체가 지나치게 타락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제 것과 상보적인 성에서 그 쾌락을 구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착자에게 악덕이 시작되는 것은, 그가 관계를 맺을 때가 아니라(관계를 맺게 하는 이유야 온갖 것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가 여자들과 더불어 쾌락을 취할 때다. 우리가 그려 보려 애써 온 이 젊은이는 어찌나 뻔히 여자였던지, 그를 갈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들은(그녀들 편에 특별한 취향이 있지 않은 한) 셰익스피어 희극에서 젊은이로 행세하는 변장한 처녀에게 속아 넘어가는 이들과 똑같은 실망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기만은 서로 간의 것이요, 성도착자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으니, 그는 일단 가면이 벗겨지고 나면 그 여자가 겪게 될 환멸을 짐작하며, 성(性)에 관한 이 착오가 얼마만큼이나 시적 공상의 원천이 되는지를 느낀다. 게다가 까다로운 정부에게조차, 그가 (그러니까 그녀 자신이 고모라의 주민이 아닌 한) “나는 여자다!”라는 고백을 감추어 봤자 헛일이니, 그러는 내내 그의 안에 든, 의식되지는 않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여자가 어떤 술책으로, 어떤 날렵함으로, 덩굴식물과도 같은 어떤 집요함으로 남성의 기관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흰 베개 위에 놓인 그 곱슬머리를 바라보기만 하면 이해하게 되나니, 저녁이 되어 이 젊은이가, 그를 붙들려는 감시자들의, 아니 그 자신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면, 그것은 여자들을 뒤쫓으러 가는 것이 아니리라는 것을. 그의 정부가 그를 나무라고 가두어 둔들, 이튿날이면 이 남자-여자는 어떻게든 한 남자에게 매달릴 길을 찾아냈을 것이니, 마치 메꽃이 알맞은 말뚝이나 갈퀴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제 덩굴손을 뻗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의 얼굴에서 우리 마음을 울리는 어떤 섬세함을, 어떤 우아함을, 남자들에게는 없는 어떤 저절로 우러나는 상냥함을 우리가 감탄하며 바라볼진대, 이 젊은이가 권투 선수들을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들 어찌 낙담할 일이겠는가. 그것들은 동일한 실재의 서로 다른 면모일 뿐이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를 밀어내는 그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슴 뭉클한 것, 그 어떤 섬세함의 세련됨보다도 더 뭉클한 것이니, 그것은 무의식적이나마 자연이 기울이는 감탄스러운 노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성적 기만에도 불구하고 제 성(性)이 스스로를 알아보는 일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애초에 사회가 저지른 오류가 저에게서 떼어 놓은 것을 향해 스스로에게서 벗어나려는, 고백되지 않은 시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필시 어린 시절 가장 소심했던 자들일 텐데, 자기가 받는 쾌락을 남성적인 얼굴과 결부시킬 수만 있다면 그 쾌락의 물질적 종류에는 거의 개의치 않는다. 반면 다른 자들은, 그 관능이 필경 더 격렬한 만큼, 제 물질적 쾌락을 어떤 명확한 한계 안으로 단호히 제한한다. 이런 자들은 어쩌면 토성의 선도성이 부리는 지배를 덜 오롯이 받으며 살아가는데, 그들에게 여자들이란 앞의 부류에게처럼 아주 금지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의 부류의 눈에는 여자란 대화나 시시덕거림, 그리고 마음의 사랑이 아니라 머리의 사랑 말고는 아무런 존재도 아닐 터이지만. 그러나 둘째 부류는 다른 여자들을 사랑하는 여자들을 찾아 나서니, 그런 여자들은 그들에게 젊은 남자를 구해다 주고, 그 남자와 함께 있게 될 때 그들이 느끼는 쾌락을 한층 돋우어 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은 그런 여자들과 더불어, 남자와 나눌 때와 똑같은 쾌락을 똑같은 방식으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바, 앞의 부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질투를 지피는 것은 오직 그 상대가 남자와 더불어 누릴지도 모를 쾌락뿐이니, 그들의 연인에게는 오로지 그것만이 배신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은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는 끼어들지 않고, 다만 습관으로만 그것을 행해 왔으며, 언젠가 결혼할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남겨 두려고, 그 사랑이 줄 수 있는 쾌락을 어찌나 시답잖게 그려 보는지, 제가 사랑하는 자가 그 쾌락을 누린다는 생각에도 괴로워할 수 없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부류는 여자들과의 연애로 곧잘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그런 여자와 맺는 관계에서 그들은, 제 성을 사랑하는 그 여자에게 또 다른 여자의 역할을 해 주고, 그 여자는 동시에 그들에게, 그들이 다른 남자들에게서 찾는 것과 얼마간 비슷한 것을 내어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질투하는 벗은, 제가 사랑하는 자가 그에게는 거의 남자나 다름없는 그 여자에게 붙박여 있다는 느낌에 괴로워하는 동시에, 제 연인이 저에게서 거의 빠져나가 버린다고 느끼는데, 이런 여자들에게 그 연인은 정작 사랑하는 벗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엇, 곧 일종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젊은 바보들을 굳이 헤아리느라 멈출 필요가 없다. 곧, 일종의 발육 정지 탓에, 벗들을 놀리거나 제 집안을 경악게 하려고,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여자 옷을 닮은 옷을 골라 입고 입술을 붉게 칠하고 속눈썹을 검게 물들이는 데까지 나아가는 자들 말이다. 우리는 그들을 제쳐 두어도 좋으니, 그들은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자들, 곧 제 허세에 대한 너무나도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남은 평생을, 준엄하게 청교도적인 처신으로써 스스로에게 저지른 잘못을 되돌리려는 헛된 시도에 허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잘못이란, 포부르 생제르맹의 젊은 여인들을 부추겨 추문거리가 되도록 살게 하고, 온갖 관습을 대놓고 거스르게 하며, 친척들의 간청을 비웃게 만드는 바로 그 악마에게 휘둘렸을 때 저지른 잘못이다. 그러다 마침내, 미끄러져 내려가면 그토록 재미나겠거니 여겼던, 그리고 실제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그토록 재미났던, 아니 차라리 미끄러지는 것을 스스로도 멈출 수 없었던 그 비탈을, 끈질기게, 그러나 끝내 헛되이 되올라가려 애쓰는 날이 오는 것이다. 끝으로, 고모라와 협약을 맺은 남자들은 뒤에 나올 권으로 미루어 두자. 그들에 대해서는 샤를뤼스 가 그들과 알고 지내게 될 때 다루기로 하자. 지금으로서는, 저마다 차례가 되면 등장할, 이런저런 온갖 부류의 자들은 모두 제쳐 두고, 이 주제에 대한 이 첫 밑그림을 마무리하고자, 방금 이야기하기 시작한 자들, 곧 고독한 부류에 대해서만 한마디 해 두자. 제 악덕을 실제보다 더 유별난 것으로 여긴 나머지, 그들은 그것을 자기 안에 오래도록 모른 채 지녀 오다가, 그것을 발견한 그날부터 고독 속으로 물러났으니, 다만 어떤 다른 남자들보다 좀 더 오래 그것을 모른 채 지녀 왔을 뿐이다. 무릇 자기가 성도착자인지, 시인인지, 속물인지, 악당인지 처음부터 아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육욕적인 시를 읽거나 음란한 그림을 들여다보던 소년이, 그러고 나서 제 몸을 학교 친구의 몸에 밀착시킨다 한들, 그는 자기가 그 친구와 더불어 한 여자를 향한 동일한 욕망을 나눌 뿐이라고 여긴다. 라파예트 부인이나 라신, 보들레르, 월터 스콧을 읽으며 느끼는 것의 본질을 알아볼 때, 그가 어찌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겠는가. 아직 자기 자신을 관찰할 능력이 너무나 모자라, 그 그림에다 제 안의 재료에서 무엇을 덧붙였는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또 감정은 같을지언정 그 대상은 다르다는 것을, 곧 그가 욕망하는 것은 다이애나 버넌이 아니라 롭 로이임을 헤아리지 못하는 그 시절에 말이다. 많은 자들에게는, 지성의 보다 또렷한 통찰에 앞서는 본능의 방어적 조심성 때문에, 침실의 거울과 벽이 여배우들의 채색 판화 무더기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그들은 이를테면 이런 시를 짓는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