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내 사랑은 오직 클로에뿐,
클로에는 신성한 이이기에.
금빛 머리 곱게 곱슬거리니,
그이 향해 이 마음 애타누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훗날 그들에게서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어떤 취향을 그런 삶의 초입에 돌려야만 하는 걸까. 마치 장차 가장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 마련인, 아이들 머리 위의 저 아마빛 곱슬머리처럼 말이다. 여자들의 사진이란 위선의 첫 징후, 또한 다른 성도착자들에 대한 혐오의 첫 징후가 아니라고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러나 고독한 부류란 바로 위선을 괴로워하는 자들이다. 어쩌면 유대인들의 예마저도, 다른 유형의 이산민 집단인 그들의 예마저도, 그들이 받은 양육이 그들에게 미치는 힘이 어찌 그리 무른지, 또 그들이 어떤 삶으로 되돌아가는 그 교묘함이 어찌 그러한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리라. 그 되돌아감이란(어쩌면 광인들이 되돌아가는 저 자살만큼 오롯이 끔찍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광인들은 아무리 조심을 시켜도 자살로 되돌아가, 제가 몸을 던진 강에서 건져 올려지고 나면 독을 삼키고 권총을 마련하고 하는 식이니. 그러나) 다른 종족의 남자들로서는 그 본질적 쾌락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상상조차 못 하고 혐오할 뿐 아니라, 그 삶에 잦은 위험과 영원한 수치를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그런 삶으로 되돌아감을 말한다. 어쩌면 이런 자들을 그려 보려면, 결코 길들지 않는 야생 짐승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온순하다고들 하나 속마음은 여전히 사자인 새끼 사자들을, 아니면 적어도, 백인의 안락한 생활이 도리어 절망적으로 불행하게 만들어, 야만적 삶의 위험과 그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되는 흑인들을 떠올려야 하리라. 남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한꺼번에 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는 날이 밝으면, 그들은 시골로 물러가 살면서, 그 괴물스러움에 대한 두려움에서든 유혹에 대한 두려움에서든 제 부류의(그들은 그 수가 적으리라 믿는다) 무리를 피하고, 수치심에서 나머지 인류의 무리마저 피한다. 참된 성숙에는 끝내 이르지 못한 채, 늘 우울에 잠겨 지내다가, 이따금, 달 없는 어느 일요일 저녁이면, 그들은 한 갈림길까지 홀로 산책을 나가는데, 거기에는, 아무런 말도 오간 바 없건만, 이웃 어느 집에 사는 소년 시절의 벗 하나가 그들을 만나러 나와 있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전의 그 놀음을 다시 시작하니, 풀밭 위에서, 밤 속에서, 둘 다 한마디 말도 없이. 주중에는 서로의 집에서 만나, 이런저런 아무 이야기나 나누되, 둘 사이에 있었던 일에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니, 마치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또 다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처럼 군다. 다만 그들의 사이에는 얼마간의 냉담함과 빈정거림과 짜증과 원한이, 때로는 증오의 자취가 남을 뿐이다. 그러다 그 이웃은 말을 타고 고된 원정길에 오르고, 노새를 타고 산봉우리에 올라 눈 속에서 잠을 잔다. 제 악덕을 기질의 나약함과, 갑갑하고 소심한 삶과 동일시하는 그의 벗은, 이제 해발 수천 피트나 되는 높이로 올라가 해방된 제 벗에게는 그 악덕이 더는 있을 수 없으리라 여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이웃은 아내를 맞는다. 그런데도 버림받은 자는 낫지 않는다(뒤에 보게 되겠지만, 성도착이 치유되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침마다 몸소 부엌으로 내려가 우유 배달 소년의 손에서 우유를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욕망이 너무 거세지는 저녁이면 일부러 길을 돌아, 술 취한 자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거나 눈먼 이의 “옷매무새를 고쳐” 준다. 물론 어떤 성도착자들의 삶은 때로 달라진 듯 보이고, 그들의 악덕은(그렇게들 부르거니와) 더는 그들의 습관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잃어버리는 것이란 결코 없으니, 없어졌던 보석은 다시 나타나는 법이요, 병자의 오줌 양이 줄어드는 것은 그가 땀을 더 많이 흘리기 때문일 뿐, 배설은 어김없이 일어나고야 만다. 어느 날 이 동성애자는 젊은 사촌 하나의 죽음을 전해 듣는데, 달랠 길 없는 그의 슬픔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의 욕망이 일종의 녹화(綠化) 현상으로 옮겨 간 곳이 바로 이 사랑, 어쩌면 순결하며 소유를 얻기보다 존경을 지키기를 겨눈 이 사랑이었음을. 마치 예산에서, 총액에는 아무런 변동 없이 어떤 지출이 다른 항목으로 옮겨 계상되는 것처럼. 느닷없는 두드러기 발작이 만성 지병을 잠시 사라지게 하는 병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듯, 젊은 친척을 향한 이 순수한 사랑은 성도착자에게 있어, 전이(轉移)를 통해, 그 습관들을 잠시 대신해 놓은 듯하다. 다만 언젠가는 그 습관들이, 대신 나은 그 병의 자리를 도로 채우러 되돌아오고야 말 테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 은둔자의 그 결혼한 이웃이 돌아왔다. 젊은 신부의 아름다움과 그 남편의 살가운 애정 앞에서, 그들 부부를 만찬에 초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날, 그는 지난날이 부끄러워진다. 이미 몸이 무거운 신부는 남편을 남겨 둔 채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편은 자기도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주인에게 가는 길 얼마간을 함께 가 달라고 청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도 그의 머릿속에 들지 않으나, 갈림길에 이르자 그는, 머잖아 아버지가 될 그 산사나이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풀밭 위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의 밀회는 다시 시작되어, 그 젊은 아내의 사촌 하나가 멀지 않은 곳에 와서 살게 되고, 이제 그녀의 남편이 그 사촌과 늘 붙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는 날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남편은, 두 번 버림받은 벗이 저녁에 찾아와 그에게 다가서려 하면, 노발대발하며, 이제부터 자기가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그 혐오를 상대가 눈치껏 미리 헤아리지 못했다는 데에 분개하여 그를 밀쳐 낸다. 그러나 한번은 낯선 사람 하나가 나타나니, 그 배신한 벗이 그에게 보낸 자였다. 그러나 마침 바빴던 탓에 버림받은 자는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 방문객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리하여 고독한 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그에게는 이웃한 온천 휴양지로 가서 그곳의 어느 철도원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보는 것 말고는 달리 기분을 풀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철도원은 승진하여 나라의 반대쪽 끝으로 전출되어 버렸다. 고독한 자는 이제 그를 찾아가 기차 시각이나 일등석 표 값을 물을 수 없게 되었고, 그리젤다처럼 제 탑 속으로 물러나 꿈꾸기 전에 해변을 서성인다. 그를 풀어 주러 올 아르고나우테스가 없는 기이한 안드로메다, 모래 위에서 스러질 수밖에 없는 불모의 메두사가 되어. 아니면 기차가 떠날 때까지 승강장에 우두커니 서서, 승객들의 무리 위로 시선을 던지는데, 다른 종족에 속한 이들에게는 무심하거나 경멸하거나 넋 나간 듯 보일 그 시선도, 어떤 곤충들이 제 동족을 끌어들이려고 몸에 두르는 빛나는 광채처럼, 또는 어떤 꽃들이 저를 수정시켜 줄 곤충을 꾀려고 내미는 꿀물처럼, 그에게 주어진 너무도 유별나고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쾌락을 함께 나눌, 거의 찾아낼 수 없는 상대는 속이지 못할 것이니, 우리의 전문가가 반쯤 잊힌 언어로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그 동류만은 속지 않는다. 그 언어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승강장의 어느 초라한 건달이 관심 있는 척을 해 보일 뿐인데, 그나마도 오직 금전적 이득 때문이니, 마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산스크리트 교수가 청중 없이 강의하는 강의실에, 그저 그 방이 따뜻하다는 이유만으로 출석하는 사람들과 같다. 메두사! 난초! 본능만을 따르던 시절, 발베크에서 그 해파리는 나를 진저리 나게 했다. 그러나 미슐레처럼 박물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볼 눈이 내게 있었더라면, 나는 하늘빛 불꽃의 정묘한 바퀴를 보았을 것이다. 투명한 벨벳 같은 그 꽃잎을 두른 그것들은, 말하자면 바다의 연보라 난초가 아니겠는가? 동물계와 식물계의 숱한 생물들처럼, 바닐라를 맺으려 하나 그 구조상 수술이 칸막이로 암술과 갈라져 있어 벌새나 어떤 작은 벌들이 꽃가루를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주거나 사람이 인공적인 방법으로 수정시켜 주지 않는 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식물처럼, 샤를뤼스 씨는 (여기서 수정이라는 말은 정신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하니, 육체적인 의미에서 수컷과 수컷의 결합은 불모이며 또 불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쾌락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 아래의 모든 피조물”이 다른 누군가에게 “제 음악이나 제 향기나 제 불꽃”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샤를뤼스 씨는 예외적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다른 이들에게는 그토록 손쉬운 성적 욕구의 충족이 그들의 경우에는 너무 많은 조건, 그것도 확보하기에 너무 어려운 조건들이 한꺼번에 맞아떨어지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샤를뤼스 씨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드러날, 그리고 독자가 이미 짐작했을지도 모를, 부분적인 만족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쾌락의 필요가 강요하는 타협은 논외로 치더라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란, 보통 사람에게서도 마주치는, 거의 넘어설 수 없을 만큼 큰 그 어려움에 더하여 너무나 예외적인 다른 어려움들까지 겹쳐서, 누구에게나 언제나 지극히 드문 일이 그들의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그들에게 정말로 운 좋은 만남이, 또는 자연이 그렇게 보이도록 꾸민 만남이 찾아든다면, 그들의 행운은 보통의 연인이 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무언가 예사롭지 않고 선택된 것이며 깊이 필연적인 데가 있다. 캐풀렛가와 몬터규가의 반목도, 은퇴한 재단사 한 사람이, 얌전히 제 일터로 나서려던 참에 쉰 줄의 다소 뚱뚱한 사내 앞에서 황홀에 떨며 서 있게 되기까지 넘어서야 했을 온갖 종류의 장애물에, 사랑에 이르게 하는, 이미 여간 드물지 않은 그 우연들에 자연이 감내해야 했던 특별한 솎아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로미오와 이 줄리엣은, 자신들의 사랑이 한순간의 변덕이 아니라 참된 예정임을, 그들 기질의 조화가 마련해 놓은 것임을, 그것도 그들 자신의 기질만이 아니라 그 조상들의 기질이, 가장 먼 유전의 갈래들이 마련해 놓은 것임을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으니, 그리하여 그들과 맺어지는 그 동류의 존재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의 것이었고, 우리가 전생을 보낸 세계들을 다스리는 힘에 견줄 만한 힘으로 그들을 끌어당겼던 것이다. 샤를뤼스 씨는, 벌이 난초에게 그 오래도록 받기를 기다려 온 꽃가루를, 기적이라 부를 만큼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이 아니고서는 받을 길 없던 그 꽃가루를 가져다주는지 지켜보던 내 눈길을 딴 데로 돌려놓았었다. 그러나 내가 방금 목격한 것 또한 하나의 기적이었으니, 거의 같은 부류에 속하며 그에 못지않게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들의 만남을 이런 관점에서 헤아리자마자, 그 만남의 모든 것이 내게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보였다. 곤충들로 하여금, 수꽃이 암꽃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의 개입 없이는 수정될 수 없는 꽃들의 수정을 반드시 이루어 내도록 강제하려고 자연이 고안해 낸 가장 놀라운 장치들, 또는 꽃가루의 운반을 바람이 맡아야 하는 경우, 자연이 그 꽃가루를 수꽃에서 훨씬 더 쉽게 떨어져 나오도록, 날아가다 암꽃에 훨씬 더 쉽게 붙들리도록 만들고, 끌어들일 곤충이 없으니 더는 쓸모없어진 꿀의 분비를 없애 버리며, 또 그 꽃이 제게 필요한 꽃가루, 오직 제 안에서만 열매 맺을 수 있는 그 꽃가루를 위해 비워져 있도록 다른 모든 꽃가루에 대해 면역이 되게 하는 액체를 분비하게 하는데, 그런 장치들도, 늙어 가는 성도착자에게 사랑의 쾌락을 보장해 주도록 마련된 성도착자 아종(亞種)의 존재보다 더 경이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들은 다른 모든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라, lythrum salicoria 같은 삼형태 이형화주 꽃들의 수정에 앞서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상응과 조화의 현상에 의해, 오직 자기보다 상당히 나이 많은 남자에게만 끌리는 자들이다. 이 아종의 한 본보기를 쥐피앙이 방금 내게 보여 준 셈인데, 그것은 다른 어떤 본보기들보다는 덜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 다른 본보기들이란, 인간 표본집을 모으는 이라면 누구나, 도덕의 식물학자라면 누구나 그 드묾에도 불구하고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눈앞에 이런 광경을 펼쳐 보인다. 곧, 건장하고 배 나온 쉰 줄 사내의 구애를 기다리는 가냘픈 젊은이가, 단주(短柱)의 primula veris가 오직 같은 단주의 다른 primulae veris에 의해서만 수정되는 동안에는 그 자웅동체 꽃들이 그러하듯 다른 젊은이들의 구애에는 무심한 채 있다가, 장주(長柱)의 primula veris의 꽃가루는 기쁘게 맞아들이는, 그런 광경이다. 이 거래에서 샤를뤼스 씨가 맡은 몫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중에야 그에게 여러 종류의 결합이 있음을 알아차렸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그 다양함과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빠름, 그리고 무엇보다 두 당사자 사이에 접촉이 없다는 점에서, 정원에서 결코 서로 닿을 일 없는 이웃 꽃의 꽃가루로 수정되는 그 꽃들을 한층 더 강하게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저 자기 집으로 오게 하여 한두 시간 자기 이야기의 지배 아래 붙들어 두는 것만으로도, 앞선 어떤 만남으로 되살아난 그의 욕망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말을 쓰는 것만으로 그 결합은 이루어졌으니, 적충류(滴蟲類) 사이에서 그럴 수 있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게. 때로는, 게르망트가의 만찬 뒤에 그가 나를 불러들였던 그날 저녁의 내 경우가 분명 그러했듯, 그 해소는 남작이 방문객의 얼굴에 대고 격렬한 말을 쏟아 냄으로써 이루어졌으니, 마치 숨은 용수철을 지닌 어떤 꽃들이, 저도 모르게 협력하다 어리둥절해진 곤충에게 안에서 물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샤를뤼스 씨는 패자에서 승자로 돌아서서, 불안이 씻겨 나가고 진정된 것을 느끼며, 이내 더는 탐나 보이지 않게 된 방문객을 돌려보내곤 했다. 끝으로, 성도착 자체가, 성도착자는 여자와 너무나 가까운 친족이어서 그녀와 어떤 실질적인 관계도 맺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만큼, 그것은 그토록 많은 자웅동체 꽃들이 열매 맺지 못하도록 정해 놓은 더 높은 법칙, 곧 자가수정의 불모라는 법칙 아래 놓인다. 성도착자들이 남성을 찾는 과정에서, 자기만큼이나 여자 같은 다른 성도착자들로 만족하는 일이 흔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여성(女性)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그들은 그 여성의 배아(胚芽)를 제 안에 지니되 아무 쓸모 있게 쓰지 못하니, 이는 그토록 많은 자웅동체 꽃들에서, 나아가 달팽이처럼 제 힘으로는 수정하지 못하나 다른 자웅동체에 의해서는 수정될 수 있는 어떤 자웅동체 동물들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이 점에서, 스스로를 동방의 고대나 그리스의 황금시대에 열심히 결부시키는 성도착자의 종족은, 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으니, 암수딴그루 식물도 단성(單性) 동물도 존재하지 않았던 저 실험적인 시대들, 곧 여자의 해부 구조에 남은 어떤 수컷 기관의 흔적과 남자의 해부 구조에 남은 어떤 암컷 기관의 흔적이 아직도 그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듯한, 저 최초의 자웅동체 상태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처음엔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쥐피앙과 샤를뤼스 씨의 그 무언극을, 나는 다윈이 우리에게 일러 주는, 곤충을 향한 저 유혹의 몸짓들만큼이나 신기하게 여겼다. 그 몸짓들이란, 멀리서도 보이도록 제 머리 부분의 작은 꽃들을 곧추세우는 국화과라 불리는 꽃들만이 아니라, 이를테면 곤충에게 길을 터 주려고 제 수술을 뒤로 젖혀 구부리거나 곤충에게 목욕물을 내미는 어떤 이형화주 꽃, 또는 당장의 예를 들자면 바로 그때 우리 안뜰로 곤충들을 끌어들이고 있던 꽃부리들의 꿀 향기와 선명한 빛깔이 보내는 것이었다. 이날 이후로 샤를뤼스 씨는 빌파리지 부인을 찾아가는 시간을 바꾸게 되는데, 다른 곳에서 더 편하게 쥐피앙을 만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에게와 꼭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오후의 햇살과 꽃 핀 식물이 기억 속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이 밖에도 그는 쥐피앙네 사람들을 빌파리지 부인에게,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그리고 쟁쟁한 후원자들의 명단 전체에 추천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니, 그 후원자들은 버티던, 또는 그저 굴복을 미루던 몇몇 부인들이 남작에게서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보복을 당하는 것을, 곧 본보기로 삼으려는 뜻에서든 그의 노여움을 산 데다 그의 지배 시도에 맞서 버틴 탓에서든 그런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 젊은 재봉사에게 한층 더 극진히 마음을 쏟았다. 그는 쥐피앙의 처지를 점점 더 벌이가 좋게 만들어 주었고, 마침내 그를 아주 자기 비서로 들여앉혀, 뒤에 우리가 보게 될 그런 형편에 자리 잡게 해 주었다. “아이고, 이런! 정말이지 팔자 좋은 사람이라니까요, 저 쥐피앙 말이에요” 하고 프랑수아즈가 말했다. 그녀는 남의 후함이 제게 베풀어진 것이냐 남에게 베풀어진 것이냐에 따라 그것을 깎아내리거나 부풀리는 버릇이 있었다. 하기야 이번만큼은 부풀릴 까닭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샘을 느낀 것도 아니었으니, 쥐피앙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것이다. “아유, 참 좋은 분이세요, 그 남작님은” 하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찌나 행실 바르고 신앙심 깊고 반듯한 분이신지. 저한테 시집보낼 딸이 있고 저도 부자 축에 든다면야, 눈 딱 감고 남작님께 드리겠어요.” “하지만 프랑수아즈” 하고 어머니가 부드럽게 이르셨다. “그럼 자네 딸은 남편감이 넘쳐나겠구먼. 벌써 쥐피앙한테 주기로 약속해 놓은 걸 잊지 말게나.” “아이참! 세상에나” 하고 프랑수아즈가 대답했다. “그이도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지요. 부자든 가난뱅이든 그런 건 타고난 됨됨이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남작님하고 쥐피앙은 딱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니까요.”
그러나 그때 나는 이 첫 계시에 기대어, 그토록 신중히 골라진 결합의 그 선택적 성격을 크게 부풀려 생각했다. 물론 샤를뤼스 씨 부류의 사람은 누구나 예사롭지 않은 존재이니, 삶의 여러 가능성에 타협하지 않는 한, 그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족에 속한 남자의 사랑을, 다시 말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따라서 그를 사랑할 수 없는 남자)의 사랑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안뜰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곳에서 나는 쥐피앙이 마치 난초가 벌에게 수작을 거는 양 샤를뤼스 씨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았지만, 우리가 가엾이 여기는 이 예외적인 존재들은, 이 작품이 흘러가면서, 오직 그 끝에 가서야 밝혀질 어떤 이유로 우리가 보게 되듯, 실은 어마어마한 무리를 이루며, 스스로도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자신들을 가엾이 여긴다. 소돔의 성문에 세워져, (창세기에 따르면) 그 주민들이 과연 영원한 옥좌에까지 그 소문이 올라간 온갖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아보게 했던 두 천사로 말하자면, 그들은 주님께서 형편없이 잘못 고르신 것임에 틀림없으며, 이 점은 오히려 다행이라 할 만하니, 주님은 그 일을 소돔인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소돔인이라면, ‘여섯 아이의 아비올시다, 정부도 둘이나 두고 있고요’ 따위의 변명으로는, 그 불타는 칼을 자애롭게 내리고 벌을 누그러뜨리도록 결코 구슬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그래, 그리고 네 아내는 질투의 고통 속에 살고 있지. 허나 그 여자들을 네가 고모라에서 고른 것이 아니라 해도, 너는 헤브론에서 양 떼를 지키는 목자와 밤을 지새우지 않느냐.’ 그러고는 곧장 그를, 불과 유황의 비가 멸하려던 그 도시로 되돌아가게 했으리라.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그 두 천사는 부끄럼 타는 소돔인들은 모조리 달아나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이들이 소년 하나를 언뜻 보고 롯의 아내처럼 고개를 돌렸다 해도 그렇다고 그녀처럼 소금 기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많은 후손을 낳았고, 그 후손들에게 이 몸짓은 여전히 몸에 밴 버릇으로 이어졌으니, 마치 진열창에 늘어놓은 구두를 유심히 살피는 척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학생을 눈으로 좇는 저 방탕한 여인들의 몸짓과도 같다. 이 소돔인의 후예들은, 하도 많아서 창세기의 저 또 다른 구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자손도 세리라’를 그들에게 갖다 붙일 수 있을 만한데, 온 세계에 걸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모든 직업에 발을 들였고 가장 배타적인 클럽에도 어찌나 손쉽게 들어가는지, 어떤 소돔인이 회원 선출에서 떨어질 때면 그 반대표는 대개 다른 소돔인들이 던진 것이니, 이들은 제 조상이 저주받은 도시에서 빠져나오게 해 준 그 거짓을 물려받은 터라 소돔의 짓을 벌하려 애쓰는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으리라. 분명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하나의 동방식 식민지를 이루니, 교양 있고 음악을 즐기며 짓궂은 그 집단에는 어떤 매력적인 자질과 참기 힘든 결함이 함께 있다. 우리는 뒤이어질 여러 쪽에 걸쳐 그들을 한층 더 낱낱이 살펴볼 것이다. 다만 나는 여기서, (사람들이 시온주의 운동을 북돋운 것과 꼭 마찬가지로) 소돔주의 운동을 일으켜 소돔을 다시 세우자고 제안하는 그 딱한 오류에 대해 잠정적인 경고 한마디를 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소돔인들은 그곳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 도시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그 도시를 떠나 아내를 얻고, 다른 도시들에 정부를 두고서 거기서 마침 제 마음에 드는 온갖 소일거리를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더없이 절박한 날들에만, 제 도시가 텅 비었을 때에만, 굶주림이 늑대를 숲에서 몰아내는 그런 철에만 소돔으로 발길을 돌릴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오늘날 런던, 베를린, 로마, 페트로그라드, 또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어쨌든 그날, 공작부인을 찾아뵙기 전에 나는 그렇게까지 멀리 내다보지는 않았고, 쥐피앙과 샤를뤼스의 결합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벌이 꽃을 수정시키는 광경을 지켜볼 기회를 어쩌면 놓쳤음을 깨닫고는 속이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