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뤼스 씨의 비애. 그의 거짓 결투. ‘대서양횡단선’의 정거장들. 알베르틴에게 싫증이 나,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졸음에 겨워 쓰러질 지경이었다. 나를 내 층까지 데려다준 것은 승강기 사환이 아니라 사팔뜨기 사환이었는데, 그는 말을 붙이느라, 자기 누이가 아직도 그 대단한 부자 신사와 지내고 있다고, 그리고 한번은 누이가 제 일을 계속하는 대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신사 친구가 사팔뜨기 사환과 좀 더 운 좋은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를 찾아왔고, 어머니는 곧 그 어리석은 것을 그 보호자에게 돌려보냈노라고 알려 주었다. “있잖아요, 손님, 제 누이는 훌륭한 귀부인이랍니다. 피아노도 치고 스페인어도 해요. 손님을 승강기로 모셔다드리는 이 보잘것없는 종업원의 누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거예요. 누이는 아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마님한테는 전속 하녀가 있고, 언젠가 자기 마차를 갖게 된대도 저는 놀라지 않을 거예요. 아주 예쁘답니다, 손님이 보시면요, 좀 지나치게 도도하고 거만하긴 해도, 원, 그야 이해하실 만하죠. 장난기도 넘쳐요. 호텔을 떠날 때면 늘 옷장이나 서랍에 먼저 뭔가를 해 놓고 나오는데, 그걸 닦아 내야 할 객실 하녀에게 조그만 기념품을 남겨 주려는 거죠. 이따금은 삯마차 안에서 그러기도 하는데, 요금을 치르고 나서 나무 뒤에 숨어서는, 마부가 제 마차를 청소해야 하는 걸 알아챌 때 얼마나 웃어 대는지 몰라요. 우리 아버지는 옛날에 알고 지내던 그 인도 왕자를 제 동생한테 붙여 준 것도 큰 행운이었죠. 물론 같은 종류의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굉장한 자리랍니다.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꿈같을 거예요. 아직 팔리지 않고 남은 건 저뿐이죠. 하지만 모를 일이잖아요. 우리 집안은 운 좋은 집안이니까요. 어쩌면 언젠가 제가 공화국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가 손님을 붙들고 떠들었네요.”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의 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다가 잠이 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손님. 아! 고맙습니다, 손님. 다들 손님처럼 마음씨가 고왔다면, 가난한 사람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제 누이 말마따나, ‘이제 내가 부자가 됐으니 그것들 위에 똥이라도 눌 수 있게, 가난뱅이는 언제까지나 있어야 하는 법이지’랍니다. 표현이 험한 건 용서하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손님.”
어쩌면 우리는 밤마다, 잠든 사이에 겪을 고통을 마주할 위험을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그 고통을 우리는 비현실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데, 우리가 의식이 없다고 여기는 잠의 과정에서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늦게 돌아온 그런 저녁이면 나는 몹시 졸렸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진 뒤로는 곧바로 잠들지 못했는데, 불이 방 안을 마치 등불이 켜진 것처럼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활활 타는 장작에 지나지 않았고, 등불이 그러하듯, 또 밤이 내려앉는 낮이 그러하듯, 그 너무 밝은 빛도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나는 일종의 선잠 상태로 접어들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잠을 자려 할 때 제 방을 떠나 옮겨 가는 두 번째 방과도 같다. 그 방에는 그 방만의 소리들이 있어서, 아무도 울리지 않았는데도 우리 귀에 또렷이 들리는 종소리에 이따금 우리는 거칠게 잠을 깬다. 그 방에는 그 방의 하인들이 있고, 우리를 데리고 나가려고 찾아오는 그 방만의 방문객들이 있어서, 우리는 일어날 채비를 갖추지만, 곧이어 다른 방, 곧 간밤의 방으로 거의 즉각적으로 옮겨 가면서, 그 방이 텅 비어 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방에 사는 종족은 우리의 첫 조상들의 종족이 그러했듯 남녀양성이다. 그 안에서는 한 남자가 잠시 뒤에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안에서는 사물이 남자로 변하고, 남자가 벗이며 적으로 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선잠의 시간 동안 잠자는 이에게 흘러가는 시간은, 깨어 있는 사람의 삶이 지나가는 시간과는 전혀 다르다. 어떤 때는 그 흐름이 훨씬 빨라서, 십오 분이 하루처럼 여겨지고, 어떤 때는 훨씬 길어서,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이라고 여기는데 실은 하루 내내 잔 것이다. 그러다 잠의 수레를 타고, 우리는 기억이 더는 뒤쫓을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데, 정신은 그 가장자리에서 발길을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의 말들은, 태양의 말들처럼, 더는 아무런 저항도 없는 대기 속을 어찌나 한결같은 걸음으로 나아가는지, 우리에게 낯선 자그마한 운석 하나가 (어떤 미지의 존재가 창공에서 내던진 것이) 우리의 규칙적인 잠을 (그렇지 않았다면 멈출 까닭이 없어 같은 운동으로 세세토록 이어졌을 그 잠을) 때려서, 그것을 홱 돌려세워, 현실을 향해 되돌아오게 하고, 쉼 없이 나아가 삶과 맞닿은 지역을 가로지르게 해야 하며, 그리하여 이윽고 잠자는 이는 삶에서 오는 소리들을, 아직은 아주 어렴풋하지만 이미 알아들을 만하게, 비록 일그러진 채로나마 듣게 되고, 그러다 문득 땅에 내려앉아 잠에서 깨어난다. 그런 다음 그 깊은 잠에서 우리는 어느 새벽에 깨어나,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아무도 아닌 채, 갓 태어난 채,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채로, 앞서 우리 삶이었던 그 과거가 뇌에서 비워진 채로 깨어난다. 그리고 어쩌면, 깨어남의 지점에 다다르는 것이 급작스럽고, 망각의 외투에 가려진 잠의 생각들이 잠이 끝나기 전에 차례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겨를이 없을 때, 그것은 한결 더 유쾌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 우리가 지나온 듯한 그 검은 폭풍우에서 (그러나 우리는 우리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진해 빠져나오는데, 그것은 내용이 텅 빈 하나의 우리다. 저기 누워 있는 저 사람 혹은 저것은 대체 어떤 망치질을 당했기에, 기억이 다시 밀려들어 그것에게 의식이나 인격을 되돌려 주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넋을 잃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 두 종류의 깨어남 모두를 위해서는, 우리는 습관의 법칙 아래서 잠드는 일을, 깊은 잠에조차 빠져드는 일을 피해야 한다. 습관이 제 그물로 옭아매는 모든 것을 습관은 바짝 지켜보므로, 우리는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하고, 우리가 잠자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하고 있다고 여기던 순간에 잠을 붙잡아야 하며, 한마디로 예견의 후견 아래, 비록 잠재적일지언정 사려가 곁에 있는 가운데 머무르지 않는 잠을 취해야 한다. 적어도, 방금 내가 이야기한 이 깨어남들, 곧 간밤에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저녁을 든 뒤면 으레 겪곤 하던 그 깨어남들에서는, 모든 것이 마치 이러한 과정을 거치듯 일어났고, 나는 그것을 증언할 수 있으니, 죽음이 자기를 풀어 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닫힌 덧문 뒤에서 살아가며,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올빼미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그 새처럼 어둠이 깔릴 때에야 비로소 사물을 조금 또렷이 보기 시작하는, 나라는 이 기이한 인간이 말이다. 모든 것이 마치 이러한 과정을 거치듯 일어나지만, 어쩌면 한 겹의 솜뭉치가 잠자는 이로 하여금 기억들의 내적 대화와 잠의 끊임없는 수다를 알아듣지 못하게 막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리고 이것은 더 광대하고 더 신비로우며 더 별처럼 아득한 저 다른 체계에서도 똑같이 뚜렷할지 모르는데) 깨어 있는 상태로 접어드는 순간, 잠자는 이는 제 안에서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오늘 밤 이 만찬에 오시겠어요, 친애하는 벗이여? 무척 즐거울 텐데요.” 그러고는 생각한다. “그래, 얼마나 즐거울까, 가야지.” 그러다 잠이 더 깨면서, 그는 문득 떠올린다. “할머니는 이제 겨우 몇 주밖에 못 사신다고, 의사가 우리에게 장담했지.” 그는 벨을 울리고, 예전처럼 그의 할머니가, 죽어 가는 할머니가 아니라, 그의 부름에 응해 무심한 웨이터가 들어오리라는 생각에 눈물짓는다. 게다가 잠이 그를 기억과 사유가 깃든 세계에서 그토록 멀리, 그가 홀로, 홀로보다 더 외로이 있던 어떤 에테르를 지나 데려갔을 때, 곧 우리가 그 안에서 사물을 지각하게 되는 그 동반자, 곧 우리 자신을 곁에 두지 못한 채였을 때, 그는 시간과 그 척도의 범위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인이 방 안에 있는데도, 그는 감히 몇 시냐고 묻지 못하니, 자기가 잠을 잤는지, 몇 시간이나 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문한다,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이렇게 지친 몸과 개운해진 정신으로, 집을 그리는 병든 마음을 안고, 오래 걸리지 않았을 리 없을 만큼 먼 여행에서 돌아오듯 돌아오면서). 물론 우리는 시간이 오직 하나뿐이라고 우길 수도 있는데, 그것은 하루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십오 분에 지나지 않았음을 시계를 보고서야 알아냈다는, 부질없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내는 순간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이며, 깨어 있는 사람들의 시간 속에 잠긴 채, 저 다른 시간을 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시간 이상, 곧 다른 삶인지도 모른다. 잠 속에서 누리는 쾌락을, 우리는 살아오는 동안 느낀 쾌락의 목록에 넣지 않는다. 그중 가장 노골적으로 관능적인 것 하나만 넌지시 들자면, 우리 가운데 누가, 깨어난 뒤에, 잠 속에서 어떤 쾌락을, 곧 스스로를 지치게 하지 않으려거든 깨어난 뒤에는 낮 동안 마음대로 되풀이할 수 없는 그 쾌락을 겪고서, 얼마간의 짜증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낭비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다른 삶에서 쾌락을 누린 것이다. 꿈 세계의 고통과 쾌락은 (대개 깨어난 뒤 이내 사라지고 마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어떤 예산표에 넣는다 해도, 우리 삶의 경상 계정에 넣는 것은 아니다.
두 개의 시간, 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결국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깨어 있는 사람의 시간이 잠자는 이에게 어떤 효력을 지녀서가 아니라, 어쩌면 저 다른 삶, 곧 그가 잠들어 있는 그 삶이, 그 더 깊은 부분에서는 시간의 범주에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저녁을 든 이튿날 아침이면 그토록 온전히 잠들어 있곤 하던 때,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잠에서 깨어날 때, 벨을 열 번이나 울렸는데도 웨이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절망하기 시작하곤 했다. 열한 번째로 울렸을 때 그가 왔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첫 번째였던 것이다. 앞의 열 번은, 내가 울리려고 마음먹고 있던 그 종소리가, 아직도 내게 매달려 있던 잠 속에서 떠오른 암시에 지나지 않았다. 마비된 내 손은 움직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이면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나는 잠이 어쩌면 시간의 법칙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인데) 깨어나려는 나의 노력은 무엇보다도, 방금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있던 그 어둡고 형체 없는 잠의 덩어리를 시간의 저울 위에 올려놓으려는 노력에 있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두 시간을 잤는지 이틀을 잤는지 알지 못하는 잠은 아무런 실마리도 주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실마리를 바깥에서 찾아내지 못하면, 시간 속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잠들고 마는데, 우리에게는 세 시간처럼 여겨지는 오 분 동안 그러하다.
나는 늘 말해 왔고, 실험으로 증명하기도 했는데, 가장 강력한 수면제는 잠 그 자체다. 두 시간을 깊이 잔 뒤, 그토록 많은 거인과 싸우고, 그토록 많은 평생의 우정을 맺고 나면, 베로날을 몇 그램 먹은 뒤보다 깨어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이것저것 미루어 따지다가, 나는 노르웨이 철학자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는 그것을 부트루 씨(‘나의 저명한 동료, 아니 실례지만, 나의 형제’)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했으니, 수면제 약물이 기억에 미치는 독특한 효과에 대해 베르그송 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이지요.” 노르웨이 철학자의 말을 믿는다면, 베르그송 씨는 부트루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따금 적당한 분량으로 복용하는 수면제는, 우리 안에 그토록 굳게 자리 잡은 일상생활의 그 확고한 기억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에는 다른 형태들이 있는데, 더 높지만 또한 더 불안정하지요. 내 동료 한 사람은 고대사를 강의합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간밤에 잠들려고 알약을 하나 먹으면, 강의 중에 필요한 그리스어 인용구를 떠올리는 데 몹시 애를 먹는다는 겁니다. 그 알약을 권한 의사는 그것이 기억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고 장담했다더군요. ‘그건 아마 선생께서 그리스어를 인용하실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겠지요.’ 그 역사학자가 대꾸했는데, 조롱기 어린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 대화가 베르그송 씨와 부트루 씨 사이에서 정확히 오간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노르웨이 철학자는, 그토록 깊이 있고 그토록 명석하며 그토록 열렬히 주의 깊은 사람이긴 했으나, 잘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나 개인으로 말하자면, 내 경험에서는 그 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어떤 마취제를 먹은 뒤 아침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망각의 순간들은, 자연스럽고 깊은 밤잠 동안 지배하는 망각과 부분적으로만, 그러나 마음을 어지럽힐 만큼 닮아 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에서 내가 잊어버리는 것은, 오히려 내 귓가에 줄곧 울리는 보들레르의 어떤 시구도 아니고, 앞서 이름을 든 철학자들 가운데 누군가의 어떤 개념도 아니며, 나를 둘러싼 평범한 사물들의 실제 현실이니, 내가 잠들어 있는 경우, 그것을 지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또 내가 깨어나 인공적인 선잠에서 빠져나오려는 경우에 잊는 것은, 여느 때처럼 술술 논할 수 있는 포르피리오스나 플로티노스의 체계가 아니라, 어떤 초대에 응하기로 약속해 놓은 그 대답인데, 그에 대한 기억이 온통 하나의 공백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드높은 사유는 제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고, 수면제가 작동을 멈추게 한 것은 사소한 일들에서, 곧 알맞은 때에 붙잡기 위해, 일상생활의 어떤 기억을 움켜쥐기 위해 활동을 요하는 모든 것에서 움직이는 힘이다. 뇌가 파괴된 뒤에도 살아남는다는 온갖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뇌의 변질 하나하나가 부분적인 죽음임을 본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떠올리는 능력은 지니지 못한다, 고 그 저명한 노르웨이 철학자가 베르그송 씨의 말을 되받아 말했는데, 나는 내 이야기를 공연히 길게 늘이지 않으려고 그의 말투를 흉내 내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떠올리는 능력은 지니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아니, 실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우리는 지난 삼십 년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지만, 그 속에 온통 잠겨 있다. 그렇다면 왜 삼십 년에서 멈추는가, 왜 태어나기 이전으로까지 이 이전의 삶을 거슬러 늘이지 않는가? 내 뒤에 있는 기억의 온 구역을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 그것들이 내게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들을 내게로 불러올 능력이 내게 없는 순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그 덩어리 속에, 나의 인간으로서의 삶보다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이 없다고 그 누가 내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 안에, 그리고 내 둘레에, 기억하지 못하는 그토록 많은 기억을 지닐 수 있다면, 이 망각은 (적어도 사실상의 망각인데, 나로서는 아무것도 볼 능력이 없으므로) 내가 다른 사람의 몸으로, 심지어 다른 행성에서 살았던 어떤 삶에까지 뻗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공통된 망각이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 그러나 그렇다면 노르웨이 철학자가 그 실재를 단언하던 영혼의 불멸이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죽은 뒤에 될 그 사람이, 태어난 이래의 나였던 사람을 기억할 까닭은, 그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의 나를 기억할 까닭보다 조금도 더 크지 않다.
웨이터가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벨을 여러 번 울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여태껏 벨을 울린 것은 그저 꿈이었을 뿐임을 깨닫기 시작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꿈이 실제 경험의 또렷한 정확성을 지녔다는 생각에 나는 섬뜩했다. 거꾸로, 경험도 꿈의 비현실성을 띠게 되리라.
대신 나는 밤새 그토록 자주 벨을 울린 것이 누구였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내게 “아무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고, 게다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으니, 벨이 울렸다면 벨 게시판에 어떤 종이든 표시가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내 귓가에 울려 대는, 되풀이되는, 거의 광란에 가까운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은 며칠 동안이나 알아들을 수 있게 남아 있을 참이었다. 그러나 잠이 이렇게 저와 함께 스러지지 않는 기억들을 우리의 깨어 있는 삶 속으로 던져 넣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이런 운석들을 셀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잠이 벼려 낸 어떤 관념이라면, 그것은 이내 가느다랗고 되찾을 수 없는 파편들로 부서지고 만다. 그러나 이 경우 잠은 소리를 빚어냈던 것이다. 더 물질적이고 더 단순한 그 소리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웨이터가 일러 준 시각이 비교적 이르다는 데에 나는 놀랐다. 그런데도 나는 개운했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얕은 잠이니, 깨어 있음과 잠 사이의 중간 상태로서, 앞의 것의 다소 바랜,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간직하기에, 짧을 수도 있는 깊은 잠보다 우리를 개운하게 하는 데에 한없이 더 많은 시간이 드는 까닭이다. 또 다른 이유로도 나는 아주 편안했다. 우리가 피곤하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피로를 느끼기에 족하다면, 스스로에게 “나는 개운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개운함을 지어내기에 족한 법이다. 그런데 나는 샤를뤼스 씨가 백열 살이며, 방금 자기 어머니인 베르뒤랭 부인의 뺨을 후려쳤다는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제비꽃 한 다발에 오십억을 치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나는 내가 깊이 잤음을, 곧 간밤의 내 생각과 그 순간 삶의 온갖 가능성과는 정반대되는 꿈을 꾸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고, 이것만으로도 나는 온전히 개운함을 느끼기에 족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깜짝 선물이 되게 하려고 알베르틴에게는 한마디도 없이 그녀의 토크 모자를 주문한 바로 그날) 샤를뤼스 씨가 발베크의 그랑 호텔 별실로 저녁을 먹으러 데려온 이가 누구였는지 어머니에게 말했더라면, 샤를뤼스 씨가 베르뒤랭가를 부지런히 드나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어머니를 나는 크게 놀라게 했을 것이다. 그의 손님은 다름 아닌 캉브르메르가의 사촌뻘 되는 어느 부인의 하인이었다. 이 하인은 아주 말쑥하게 차려입고서, 남작과 함께 홀을 가로지르며, 생루라면 말했을 법하게, 손님들의 눈앞에서 ‘멋쟁이 신사 행세’를 했다. 실로 그때가 마침 그들이 근무를 시작하는 시각이어서 성전 계단을 우르르 내려오던 젊은 사환들, 그 레위인들은 두 낯선 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인 샤를뤼스 씨는 그들에게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는 그들 한복판을 뚫고 나아가려 애쓰는 듯 보였다. “번영하라, 거룩한 민족의 소중한 희망이여.” 그는 라신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거기에 전혀 다른 뜻을 붙여 말했다. “네?” 고전에 밝지 못한 하인이 물었다. 샤를뤼스 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니, 그는 결코 질문에 답하지 않고, 호텔에 다른 손님이라곤 없는 듯이, 세상에 자기, 곧 샤를뤼스 남작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일종의 긍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자베트의 대사를 계속 인용해, “오라, 오라, 나의 아이들아.”라고 하고서, 그는 역겨움을 느껴, 그녀처럼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라.”라고 덧붙이지는 않았으니, 이 젊은이들은 아직 성(性)이 완전히 무르익어 샤를뤼스 씨의 마음을 끄는 그 나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슈브르니 부인의 하인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의 고분고분함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는 좀 더 사내다운 이를 만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막상 그를 보니, 그는 바라던 것보다 더 여자 같았다. 그는 하인에게,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말했으니, 그가 슈브르니 부인의 또 다른 하인 하나를 얼굴로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하인은 부인의 마차 마부석에 앉아 있는 것을 눈여겨보아 둔 터였다. 그자는 지극히 촌스러운 농사꾼 유형으로, 지금 온 자와는 정반대였다. 반면에 온 자는 제 여자 같은 태도가 제 매력을 더해 준다고 여기며, 샤를뤼스 씨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이 세련된 신사다운 분위기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으므로, 남작이 누구를 말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댁엔 다른 사람이 없는데요, 손님이 눈여겨보셨을 리 없는 한 사람 말고는요. 그자는 흉측하답니다, 꼭 덩치 큰 농사꾼처럼요.” 그리고 남작이 본 것이 어쩌면 그 촌뜨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남작은 이를 알아챘고, 자기 물색의 범위를 넓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부인이 아니라 슈브르니 댁 사람들만 알겠다고 맹세한 것은 아니네. 자네가 곧 떠난다니 하는 말인데, 여기나 파리의 이 집 저 집에 자네가 내게 소개해 줄 만한 녀석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 “오, 안 됩니다!” 하인이 대꾸했다. “저는 제 신분의 사람들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아요. 근무 중에만 말을 나누죠. 하지만 아주 괜찮은 분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누구 말인가?” 남작이 물었다. “게르망트 대공님이요.” 샤를뤼스 씨는 그토록 연로한 사람만을, 게다가 소개를 받으려고 하인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는 사람만을 내세우는 데에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그 제안을 물리치고, 이 종놈의 사교적 허세에 기죽지 않은 채, 자기가 원하는 바를 다시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으니, 그 풍모, 그 유형, 이를테면 기수(騎手) 같은 자 따위를 말이다. … 그 순간 지나가던 사무 변호사가 그들의 말을 들었을까 봐 겁이 나서, 그는 제가 듣는 이가 짐작할 만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 무엇에 대해서든 말하고 있는 척하는 것이 영리한 짓이라 여기고, 힘주어, 낭랑한 목소리로, 그러나 그저 하던 대화를 이어 가는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수집에 대한 열정, 예쁜 것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네. 오래된 청동상 하나, 초기의 광택 도자기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하지. 나는 아름다운 것을 흠모한다네.” 그러나 자기가 그토록 잽싸게 해치운 화제의 전환을 하인이 알아듣게 하려고, 샤를뤼스 씨는 낱말 하나하나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게다가 사무 변호사에게 들리게 하려고 어찌나 큰 소리로 낱말을 외쳐 댔는지, 이 익살극 자체만으로도, 법원 관리의 귀보다 더 예민한 귀에는 그것이 감추고 있는 바를 드러내기에 족했을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호텔의 다른 투숙객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모두 그 말쑥하게 차려입은 하인에게서 세련된 외국인을 보았다. 반면에 신사들은 속아서 그를 지체 높은 미국인으로 여겼으나, 그가 하인들 앞에 나타나자마자 그들은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으니, 한 죄수가 다른 죄수를 알아보듯, 아니 실은 어떤 짐승들이 서로의 냄새를 맡듯 멀리서부터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수석 급사들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에메는 미심쩍은 눈길을 던졌다. 포도주 담당 급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예의라고 여겨)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누구나 다 들은 무례한 표현을 내뱉었다. 그리고 눈이 침침해진 우리의 늙은 프랑수아즈까지, 그때 마침 courriers들과 저녁을 들려고 계단 아래를 지나가다가, 고개를 들어, 호텔 손님들은 결코 눈치채지 못한 곳에서 하인 하나를 알아보았는데, 마치 늙은 유모 에우리클레이아가 잔칫상에 둘러앉은 구혼자들보다 훨씬 앞서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듯 그러했다. 그리고 그와 팔짱을 낀 샤를뤼스 씨를 보고서, 그녀는 마치 여태껏 되풀이해 듣고도 믿지 않았던 험담이 문득 그녀의 눈앞에서 가슴 찢어지는 개연성을 얻기라도 한 듯,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 일에 대해 내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그녀의 머릿속에 적잖은 소동을 일으켰음이 틀림없으니, 그 뒤로 파리에서 여태껏 그토록 각별히 정을 붙여 오던 “쥘리앙”을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정중히 대하기는 했으나, 그 정중함은 식어 버렸고 언제나 짙은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사건이 또 다른 이로 하여금 내게 속내를 털어놓게 했으니, 그가 바로 에메였다. 샤를뤼스 씨와 마주쳤을 때, 그는 나를 만날 줄 예상치 못한 터라, 손을 들어 “안녕하시오”라고 외쳤는데, 무엇이든 자기에게 허락되어 있다고 여기며 아무것도 감추는 티를 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대귀족의,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한 무심함을 띠고서였다. 그 순간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지켜보던 에메는, 자기가 하인임을 틀림없이 간파했다고 확신하는 그 사람의 동행에게 내가 인사하는 것을 보고, 바로 그날 저녁 내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얼마 전부터 에메는 이야기하기를, 아니 그 자신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 이야기들의, 그의 말로는 철학적인, 그 성격을 강조하려는 뜻에서였을 텐데, 나와 “토론하기”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그가 자리에 앉아 내 식사를 함께 나누지 못하고 식탁 곁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그에게 자주 말했으므로, 그는 손님이 그토록 “건전한 사리 분별”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본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그때 웨이터 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절을 했는데, 나는 그들의 대화가 내게는 새롭지 않게 들리는 가락을 띠고 있었는데도 어째서 그들의 얼굴이 낯선지 알 수 없었다. 에메는 자기가 못마땅해하는 그들의 혼약 때문에 둘 다 나무라고 있었다. 그가 내게 의견을 청하기에,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하니 그 일에 대해 아무 의견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게 제 이름을 대며, 리브벨에서 나를 자주 시중들었노라고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하나는 콧수염을 길렀고, 다른 하나는 콧수염을 밀어 버리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그런 까닭에, 비록 그것이 저마다의 어깨 위에 얹힌 예전과 똑같은 머리였는데도 (노트르담의 서투른 복원에서처럼 다른 머리가 아니라), 그것은 내게 거의 보이지 않는 채로 남아 있었으니, 가장 세밀한 수색에도 벗어나면서 실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곳, 곧 벽난로 선반 위에서 모두의 눈앞에 빤히 놓여 있는 그런 물건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이름을 알자마자, 나는 그들 목소리의 아리송한 가락을 정확히 알아들었으니, 그것을 또렷이 해 주던 옛 얼굴을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저것들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영어도 못 배웠지 뭡니까!” 에메가 내게 말했는데, 내가 호텔 시중의 방식에 밝지 못하며,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일자리를 얻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리 없다는 점은 헤아리지 못한 채였다. 새로 온 이가 샤를뤼스 씨임을 그가 어렵잖게 알아내리라 여기고, 게다가 예전에 내가 발베크에 머물 때 남작이 빌파리지 부인을 만나러 와서 식당에서 그의 시중을 든 적이 있으니 그를 틀림없이 기억하리라 짐작한 나는, 그에게 그 이름을 일러 주었다. 에메는 샤를뤼스 남작을 기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듯 보였다. 그는 내게, 이튿날 자기 방에서 편지 한 통을 찾아보겠다며, 어쩌면 내가 그것을 그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더더욱 놀랐는데, 샤를뤼스 씨가 지난해 발베크에서 내게 베르고트의 책 한 권을 주려 했을 때 특별히 에메를 청했었고, 그 뒤 내가 생루와 그의 정부와 함께 점심을 든 파리의 그 식당에서, 샤를뤼스 씨가 우리를 엿보러 왔을 때 그를 알아보았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에메가 이 심부름들을 몸소 해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 앞의 경우에는 자리에 누워 있었고, 뒤의 경우에는 시중드는 일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샤를뤼스 씨를 모르는 척했을 때, 나는 그의 진심을 몹시 의심했다. 우선, 그는 남작의 마음에 들었음이 틀림없었다. 발베크 호텔의 위층 웨이터들이 모두 그러하듯, 게르망트 대공의 하인 몇몇이 그러하듯, 에메는 대공의 종족보다 더 오래된, 따라서 더 고귀한 종족에 속해 있었다. 응접실을 청하면 처음에는 자기 혼자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내, 배선실에서 조각상 같은 웨이터 하나가 눈에 띄는데, 에메가 바로 그 전형인 그 불그레한 에트루리아풍의 부류로, 샴페인을 지나치게 마셔 조금 늙수그레해지고 콩트렉세빌 광천수를 마셔야 할 피할 수 없는 시각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는 그런 부류였다. 손님이라고 다들 그들에게 그저 시중만 청한 것은 아니었다. 젊고 성실하고 바쁜, 바깥에 저를 기다리는 정부들이 있는 아랫것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러면 에메는 그들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나무랐다. 그럴 자격이 그에게는 충분했다. 그 자신은 진지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고, 그들을 위해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낯선 부인이나 신사가 그에게 건네는 수작을,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결코 물리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사가 먼저였으니까. 그는 샤를뤼스 씨의 마음을 끄는 그 유형에 어찌나 딱 들어맞았던지, 그를 모른다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그가 거짓말한다고 의심했다. 나는 틀렸다. 사환이 남작에게, 에메가 (이 일로 이튿날 사환을 호되게 꾸짖은 그 에메가) 잠자리에 들었다고 (혹은 나갔다고),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시중드는 일에 바쁘다고 말한 것은 완벽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을 넘어서는 법이다. 그리고 사환의 당황함은 아마도 샤를뤼스 씨의 마음속에 그 핑계들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터인데, 그 의심이 에메로서는 짐작조차 못 한 어떤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앞서, 생루가 에메로 하여금 마차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고, 그 마차 안에서, 어떻게든 웨이터의 새 주소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 샤를뤼스 씨가 또 한 번 낭패를 겪었음을 보았다.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에메는, 바로 내가 생루와 그의 정부와 함께 점심을 든 그날 저녁에, 게르망트 문장(紋章)으로 봉인된 편지 한 통을 받고서, 가히 짐작할 만한 놀라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 편지에서 몇 대목을, 총명한 사람이 사리를 갖춘 얼간이에게 편지를 쓸 때 드러나는 일방적 광기의 한 본보기로서, 여기에 인용해 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