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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브레 ⑭

1권 · 콩브레

그날 이후로,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하는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더 짙어진 우수에 잠겨, 내게 문필의 길에 어울릴 자질이 없다는 것, 언젠가 이름난 작가가 되리라는 희망을 죄다 접어야 한다는 것을 곱씹었던가. 이에 대해 느끼는 회한은, 홀로 뒤처져 잠시 혼자 몽상에 잠겨 있을 때면, 어찌나 사무치게 나를 괴롭혔던지,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내 마음은 절로, 아픔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종의 억제 작용으로, 시 짓기며 소설이며, 재능이 없는 탓에 기대할 수도 없는 시적 장래 따위를 생각하기를 아주 멈추어 버렸다. 그러다가, 그 모든 문학적 골몰과는 아주 동떨어져, 무엇에도 뚜렷이 매이지 않은 채, 불현듯 어느 지붕이, 돌에 반사된 한 줄기 햇살이, 어느 길의 냄새가 나를 우뚝 멈춰 세우곤 했다. 저마다 내게 주는 그 남다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였고, 또한 그것들이 내 눈에 보이는 것 아래에 무언가를, 다가와 붙잡으라고 나를 부추기면서도 아무리 애써도 끝내 알아낼 수 없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싶었기 때문이다. 그 신비로운 것이 그 안에 있다고 느꼈기에, 나는 그 앞에 꼼짝 않고 서서, 바라보고, 숨 쉬며, 보이거나 냄새 맡이는 것 너머로 마음을 밀어 넣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때 할아버지를 서둘러 뒤따라 길을 계속 가야 하면, 나는 눈을 감아 그것들에 대한 느낌을 되살리려 애썼고, 지붕의 선을, 돌의 빛깔을 어김없이 떠올리는 데 마음을 모았으니, 그것들은 까닭도 모른 채 내게 무언가로 가득 차, 막 열리려는 듯, 저 스스로는 그저 바깥 껍질에 지나지 않는 그 감추어진 보물을 내게 내어 줄 듯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인상이라 해서, 언젠가 작가와 시인이 되리라던 잃어버린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거나 그러할 리는 없었으니, 그 하나하나가 아무런 지적 값어치도 없고 어떤 추상적 진리도 암시하지 않는 어떤 물질적 대상과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들은 내게 까닭 모를 즐거움을, 일종의 정신적 풍요의 환상을 주었고, 그리하여 어떤 위대한 문학 작품을 위한 철학적 주제를 찾을 때마다 느끼던 권태로부터, 내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형태며 향기며 빛깔에 대한 이 인상들이 내 양심에 지운 과업, 곧 그 아래 숨은 것을 알아채려 애쓰라는 과업이 어찌나 절박했던지, 나는 그 고된 노력을 늦추고 거기 따르는 피로를 덜 구실을 찾는 데 오래 걸리는 법이 없었다. 다행히도 부모님이 나를 불렀다. 나는 지금으로서는 내 탐구를 성공적으로 밀고 나갈 만한 차분한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집에 이를 때까지는 그 일을 더 생각지 않고, 그동안 부질없이 스스로를 지치게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형태나 향기 속에 숨은 신비에 더는 마음 쓰지 않았으니, 그것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껍질에 싸서 집으로 가져가는 셈이라 마음이 아주 놓였기 때문이며, 그 껍질 아래에서 나는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게 되리라 여겼다. 마치 낚시 나가도 좋다고 허락받은 날이면, 서늘하고 싱싱하게 지켜 주는 풀 자리에 파묻어 바구니에 담아 가져오던 물고기처럼. 다시 집에 들면 나는 딴것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내 마음은 (내 방이 산책길에 꺾어 온 꽃들이나 남들이 준 자질구레한 물건들로 어수선했듯) 표면에 햇살이 반사되던 돌 하나, 지붕 하나, 종소리 하나, 낙엽 냄새 하나로, 온갖 다른 영상들이 뒤섞인 어수선한 무더기로 채워졌으니, 그 아래에서는 내가 어렴풋이 예감하곤 하던, 그러나 끝내 파헤쳐 밝혀낼 기운이 없던 그 현실이 진작에 스러져 버렸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 번은, 우리가 여느 때보다 훨씬 멀리까지 산책을 늘여, 오후가 저녁으로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중도에서 페르스피에 박사를 만나 무척 반가웠던 적이 있는데, 그가 마차를 몰아 우리 곁을 쏜살같이 지나치다가 우리를 알아보고 멈춰 서서 제 곁에 냉큼 올라타게 해 주었으니, 그때 나는 이런 종류의 인상 하나를 받았고, 그것을 조금 더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서는 놓아 버리지 않았다. 나는 마부 곁 마부석에 앉혀졌고, 우리는 바람처럼 달렸다. 박사가 콩브레로 돌아가기 전에 마르탱빌르섹에 있는 어느 환자의 집에 들러야 했기 때문인데, 그는 그 문 앞에서 자기를 기다려 달라고 우리에게 청했다. 길이 굽어드는 어느 지점에서, 나는 불현듯 그 남다른 즐거움을, 다른 무엇과도 닮지 않은 그 즐거움을 맛보았으니, 지는 해가 어리는 마르탱빌의 쌍둥이 종탑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마차의 움직임과 길의 굽이 탓에 그 종탑들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는 듯싶었다. 그리고 이어 세 번째 종탑, 곧 비외비크의 종탑이 나타났는데, 언덕과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고 멀리 조금 더 높은 땅에서 솟아 있었건만, 그럼에도 그 둘 곁에 나란히 서 있는 듯 보였다.

그 첨탑들의 모양을, 그 겉모습의 변화를, 그 표면의 볕받이 온기를 살피고 마음에 새기는 동안, 나는 내 인상의 온 깊이까지 파고들지는 못하고 있음을, 그 움직임과 그 빛남 뒤에 무언가가 더 있음을, 그것들이 동시에 품으면서도 감추는 듯한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종탑들은 어찌나 멀어 보였고 우리 자신은 어찌나 조금밖에 다가가지 못하는 듯했던지, 몇 분 뒤에 마르탱빌 성당 앞에 마차가 멈추어 섰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지평선 위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느낀 기쁨의 까닭을 나는 알지 못했고, 그 까닭을 알아내려 애쓰는 일은 성가시게만 여겨졌다. 나는 다만 햇살 속에서 움직이며 모여드는 그 선들을 머릿속 한구석에 간직해 두고, 당분간은 그것들을 더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만 했더라면, 그 두 종탑은 내가 알아차리기는 했으되 그것들이 주는 어렴풋한 기쁨의 감각 때문에 따로 떼어 두었을 뿐 결코 더 깊이 파고들어 본 적 없는 무수한 나무와 지붕과 향기와 소리의 큰 뒤섞임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나는 의사 선생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부모님과 이야기하려고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이윽고 떠날 때가 되어, 나는 다시 내 자리로 올라가 고개를 돌려 내 종탑들을 한 번 더 돌아보았고, 조금 뒤 길이 굽어지는 곳에서 그것들의 작별 인사 같은 마지막 모습을 언뜻 잡아냈다. 마부는 도무지 이야기할 마음이 없어 보여 내 말에 겨우 대꾸만 했으므로, 나는 다른 벗이 없는 터라 하는 수 없이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내 종탑들의 환영을 다시 붙잡아 보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내 그 윤곽과 햇빛 어린 표면이, 마치 껍질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벗겨져 갈라졌다. 그것들이 내게 감추고 있던 것의 일부가 드러났다. 조금 전만 해도 내게 존재하지 않던 하나의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라 머릿속에서 말로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조금 전 그것들을 처음 보았을 때 나를 채웠던 기쁨이 어찌나 커졌던지, 나는 일종의 도취에 사로잡혀 이제 그것들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제 마르탱빌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것들을 눈에 담았는데, 이번에는 아주 검은 빛이었으니, 그새 해가 저물었기 때문이다. 몇 분마다 길이 굽어지며 그것들을 시야에서 쓸어 가곤 했다. 그러다 그것들은 마지막으로 한 번 제 모습을 보였고, 그리하여 나는 더는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마르탱빌의 종탑들 속에 묻혀 있던 것이 어떤 매혹적인 악구와 비슷한 무엇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그것이 내게 기쁨을 준 말의 형태로 나타났던 만큼, 나 자신에게 인정하지는 않은 채, 나는 의사 선생에게서 연필과 종이를 얻어, 마차가 흔들리는데도 아랑곳없이, 내 양심을 달래고 내 열광을 채우기 위해 다음의 작은 단편을 지었으니, 그것을 나는 그 뒤 다시 찾아내어, 여기저기 조금만 손질하여 지금 그대로 옮겨 적는다.

평원의 지평면에서 홀로 솟아올라, 저 탁 트인 들판의 넓이 속에 잃어버린 듯이, 마르탱빌의 쌍둥이 종탑이 하늘로 기어올랐다. 이윽고 우리는 세 개를 보았다. 대담한 도약으로 그것들과 마주 서듯 제자리에 뛰어들며, 세 번째의, 뒤늦은 종탑, 곧 비외비크의 종탑이 그것들과 합류하러 온 것이다.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세 종탑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참 앞서 있어, 평원 위에 앉은 세 마리 새처럼, 햇빛 속에 미동도 없이 또렷했다. 그러다 비외비크의 종탑이 물러나 제 간격을 되찾자, 마르탱빌의 종탑들만이 홀로 남아, 저무는 해의 빛으로 도금되었는데, 그 빛이 그토록 먼 거리에서도 그것들의 비스듬한 옆면에 어른거리며 미소 짓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하도 오래 그것들에게 다가가고 있던 터라, 나는 아직 그것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더 지나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마차가 모퉁이를 돌더니 우리를 그것들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것들은 어찌나 급작스레 우리 앞길로 몸을 던졌던지, 우리는 성당 현관에 부딪히기 전에 멈출 겨를조차 겨우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마르탱빌을 떠난 지 얼마쯤 지나, 몇 초 동안 우리를 따라오던 마을이 어느새 사라졌을 때, 우리의 달아남을 지켜보려 홀로 지평선에 머무르던 그 마을의 종탑들과 비외비크의 종탑이, 작별의 표시로 햇살에 잠긴 첨두를 다시 한 번 흔들었다. 이따금 하나가 물러나, 나머지 둘이 잠시 더 우리를 지켜볼 수 있게 했다. 그러다 길이 방향을 바꾸자, 그것들은 세 개의 금빛 축처럼 빛 속에서 돌더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조금 뒤, 우리가 이미 콩브레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새 해가 저물어, 나는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멀리서 눈에 담았는데, 이제는 낮게 깔린 들판의 선 위 하늘에 그려진 세 송이 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것들은 또한 나로 하여금 어느 전설 속 세 처녀를, 밤이 내리기 시작한 외딴 자리에 버려진 세 처녀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질주하며 그것들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나는 그것들이 겁먹은 채 제 갈 길을 더듬으며, 고귀한 실루엣으로 몇 번 어색하게 비틀거리다가, 서로 바짝 다가서고, 하나가 다른 하나 뒤로 미끄러져 들어, 이제 여전히 장밋빛인 하늘을 배경으로 매혹적이고 체념한 하나의 어스름한 형체 말고는 아무것도 더 보이지 않게 되더니, 그렇게 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글을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 선생의 마부가 마르탱빌 장에서 사 온 닭들을 광주리에 담아 두곤 하던 마부석 내 모퉁이에서, 그것을 다 쓰고 났을 때, 나는 어찌나 큰 행복감을 느꼈던지, 그 글이 종탑들에 대한 강박과 그것들이 감추고 있던 신비로부터 내 마음을 그토록 온전히 풀어 주었음을 느꼈던지, 마치 내가 암탉이 되어 방금 알을 낳기라도 한 듯이, 목청껏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온종일, 이런 산책을 하는 동안, 나는 게르망트 공작부인과 벗이 되는 데, 송어를 낚는 데, 홀로 비본 강 위를 배로 떠도는 데 있을 기쁨을 마음껏 꿈꿀 수 있었다. 그리고 행복을 탐하며, 나는 그런 순간에는, 삶이 언제나 즐거운 오후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더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왼편으로, 서로 바짝 붙어 있는 다른 두 농가에서 조금 떨어진 농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곳에서 콩브레로 돌아가려면 떡갈나무 가로수길로 접어들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 길 한쪽에는 과수원 울짱이 죽 늘어서서 저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사과나무가 심겨 있었고, 그 나무들은 저무는 해가 비추면 제 그림자의 일본 판화 무늬를 땅에 드리웠는데, 바로 그때, 돌연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반 시간 뒤면 우리가 집에 이르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게르망트 쪽'을 다녀와 그 탓에 저녁 식사가 여느 때보다 늦게 나오는 날의 관례대로, 나는 수프를 삼키기가 무섭게 잠자리로 보내지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손님이라도 있는 만찬처럼 식탁에 붙들려 있는 어머니가 잠자리에 든 내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위층으로 올라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내가 들어선 우울의 지대는, 조금 전 내가 기쁨에 겨워 뛰놀던 저 다른 지대와는 온전히 구별되는 것이었으니, 마치 이따금 하늘에서 분홍빛 띠 하나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그어진 듯이, 초록이나 검정의 띠와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새 한 마리가 분홍빛을 가로질러 나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 그것은 경계선에 가까이 다가가, 그것에 닿고, 그 안으로 들어가, 검정 위에서 사라진다. 게르망트로 가고, 여행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조금 전 나를 사로잡았던 그 갈망으로부터, 나는 이제 어찌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지, 그것들이 이루어진들 내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밤새도록 엄마의 품에 안겨 울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나 기꺼이 그 모든 것을 희생했으랴! 감정에 몸을 떨며, 나는 괴로움에 찬 두 눈을, 그날 저녁 내가 상상 속에서 이미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그 침실에는 나타나지 않을 어머니의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다만 내가 죽어 누워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상태는 이튿날까지 이어져, 아침 햇살이 그 빛의 막대들을, 정원사가 사다리를 기대듯이, 한련이 창턱까지 기어오른 담벼락에 기대어 걸치면, 나는 저녁이 반드시 다시 오리라는 것, 그와 더불어 내가 어머니를 떠나야 할 시각이 오리라는 것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뛰어 일어나 곧장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곤 했다. 그리하여 나는 '게르망트 쪽'에서, 어떤 시기에는, 내 마음속에서 번갈아 지배하며, 급기야 하루하루를 그 둘 사이에 나누어 버리고, 저마다 학질의 열이 오르내리듯 규칙적으로 되돌아와 상대를 몰아내던 이 두 상태를 분간하는 법을 배웠으니, 그것들은 서로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토록 낯설고, 서로 통할 길이 그토록 없어, 나는 한 상태에 있으면서 다른 상태에서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무엇을 했는지조차 더는 이해할 수도, 그려 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게 있어, 우리가 그 평행선을 따라 옮겨져 가는 여러 갈래 삶 가운데, 운수의 급작스러운 뒤바뀜이 가장 넘쳐 나고 삽화가 가장 풍부한 그 하나, 곧 정신의 삶에 얽힌 온갖 자잘한 일들과 이어져 남아 있다. 분명 그것은 우리 안에서 눈에 띄지 않게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삶의 뜻과 모습을 바꾸어 놓고 우리 발밑에 새 길을 열어 준 진리들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것들을 발견할 채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채비는 무의식적인 것이었고, 우리로서는 그 진리들이 오직 그것들이 뚜렷해진 그 날, 그 순간부터 비롯할 뿐이다. 그때 풀밭 사이에서 어우러지던 꽃들, 햇살 속을 잔물결 지어 흘러가던 물, 그것들의 출현에 환경이 되어 준 온 풍경은, 지금도 무심하거나 개의치 않는 낯빛으로 그것들의 기억 언저리에 서성이고 있다. 그리고 분명, 그것들이 이 보잘것없는 행인, 이 몽상하는 아이에 의해 천천히 낱낱이 뜯어보였을 때, 마치 군중 속에 잃어버린 청원자에 의해 임금의 얼굴이 뜯어보이듯이, 그 자연의 한 조각, 그 정원의 한 귀퉁이는, 바로 그 아이 덕분에 자신들이 가장 덧없는 세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도록 뽑히리라고는 결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산울타리를 따라 노략질하듯 떠도는 산사나무 향기, 머잖아 들장미가 그것을 그 울타리에서 쫓아내 버릴 그 향기, 자갈길 위 아무 메아리도 뒤따르지 않는 발걸음 소리, 물풀 곁에서 물살에 지어져, 지어지자마자 터지려고 지어진 물거품, 그것들을 내 정신의 고양이 함께 실어 날라, 이 잇따른 세월을 모두 가로지르게 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그동안 그것들 둘레의, 한때 밟히던 길들은 사라져 버렸고, 그 길들에 몰려들던 이들도, 그 밟히던 길들에 몰려들던 이들에 대한 기억마저도 죽어 버렸다. 이따금 이렇게 현재로 옮겨진 풍경의 한 조각은, 온갖 연상으로부터 어찌나 외따로 떨어져 나오는지, 꽃 핀 델로스 섬처럼 내 정신 위를 정처 없이 떠다녀, 나는 그것이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서, 어쩌면 그저 내 어느 꿈에서 오는 것인지조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 정신의 토양에서 가장 깊은 지층으로서, 내가 여전히 그 위에 무언가를 지을 수 있는 단단한 터로서, 나는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트의 '쪽'들을 여긴다. 그것은 내가 그 길들을 거니는 동안 어떤 것들, 어떤 사람들을 두고 생각하곤 했기 때문이니, 그 길들이 내게 알게 해 준 그 것들, 그 사람들, 오직 그것들만을 나는 여전히 진지하게 여기고, 여전히 그것들로 기쁨을 얻는다. 창조하는 믿음이 내 안에서 사라져 버렸든, 아니면 실재란 오직 기억 속에서만 형태를 갖추든, 요즘 사람들이 내게 처음 보여 주는 꽃들은 결코 내게 참된 꽃으로 보이지 않는다. 라일락과 산사나무와 수레국화와 개양귀비와 사과나무가 있는 '메제글리즈 쪽', 올챙이가 가득한 강과 수련과 미나리아재비가 있는 '게르망트 쪽'은, 내게 영영 내가 삶을 보내고 싶어 하는 땅의 그림을 이루어 놓았으니, 그 땅에서 내 유일한 요구란 낚시하러 나갈 수 있고, 배에 실려 한가로이 떠돌 수 있고, 풀밭에서 고딕식 성채의 폐허를 볼 수 있으며, 생탕드레데샹이 숨어 있었듯 밀밭 사이에 숨은 낡은 성당을, 맷돌처럼 기념비적이고 시골스럽고 누런 성당을 찾아낼 수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걷다가 우연히 들판에서 마주치게 될 수레국화와 산사나무와 사과나무는, 그것들이 같은 깊이에, 내 지난 삶의 층위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에, 이내 내 마음과 맞닿는다. 그런데도 장소에는 하나하나의 개성이라는 것이 깃들어 있어, 내가 '게르망트 쪽'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힐 때면, 설령 나를 비본 강의 것들만큼 곱거나 그보다 더 고운 백합이 피어 있는 어느 강가로 이끈다 한들 그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니, 이는 마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훗날 인생에서 사랑의 정념으로 옮겨 가고 심지어 그 정념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되기까지 하는 저 불안이 내 안에 깨어나던 그 시각에, 설령 내 어머니보다 훨씬 아름답고 훨씬 총명하다 한들, 어떤 낯선 어머니가 들어와 내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해 주기를 바랐을 리 없는 것과 같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를 만족스레 잠들게 하는 데 필요한 단 하나의 것이란, 곧 훗날 어떤 정부도 결코 내게 줄 수 없었던 저 흔들림 없는 평안 속에서, 나로 하여금 잠들게 하는 데 필요한 단 하나의 것이란, 어머니가 와 주는 것, 어머니가 내게로 그 얼굴을 기울여 주는 것이었으니, 어느 정부든 그녀를 믿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를 의심하게 되고, 어머니의 입맞춤 속에서 내가 그 마음을, 온전하게, 아무 거리낌도 유보도 없이, 나 자신에 대한 것 말고는 어떤 짐도 지지 않은 그 마음을 받곤 하던 것처럼 그녀들의 마음을 결코 가질 수 없는 법이거니와, 어머니의 그 얼굴에는 눈 아래에 무언가가, 보아하니 흠이라 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는데도 나는 그것을 나머지 모든 것만큼이나 사랑했다. 그러니 내가 다시 보고 싶은 것은, 내가 알던 그대로의 '게르망트 쪽', 곧 떡갈나무 가로수길 어귀에 그토록 바짝 붙어 있는 두 이웃 농가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농가가 있는 '게르망트 쪽', 해가 갈고 닦아 호수의 거울 같은 광채를 띠게 한 그 표면에 사과나무 잎사귀들이 윤곽 지어지던 저 목장들, 밤이면, 꿈속에서, 이따금 거의 환상적이라 할 힘으로 나를 옭아매지만 깨어나면 그 자취를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는, 그 개성을 지닌 온 풍경인 것이다.

분명, 내 안에 서로 다른 인상의 무리들을, 그것들이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별개의 것을 한꺼번에 느끼게 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 까닭도 없이, 영구히 그리고 풀 수 없이 결합해 놓은 탓에,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트의 '쪽'들은 훗날의 삶에서 나를 숱한 환멸에, 심지어 숱한 잘못에까지 내맡겨 두었다. 이는 나로서는 어떤 사람을 다시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이 그저 그 사람이 내게 꽃 핀 산사나무 울타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한 경우가 흔했던 까닭이요, 그저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애정의 여운이라 믿고 또 남에게도 믿게 하기에 이른 까닭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같은 성질에 의해, 그리고 오늘날 그것들이 어떤 애착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 내 인상들 속에 그것들이 끈질기게 남아 있음으로써, 그 두 '쪽'은 그 인상들에게 다른 것들에는 없는 바탕과 깊이와 차원을 부여한다. 그것들은 또한 그 인상들에게, 오직 나만을 위한 매혹과 의미를 입힌다. 여름날 저녁, 울리는 하늘이 황갈색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저마다 그 뇌우를 두고 투덜댈 때면, 내 공상이 홀로 황홀에 잠겨 거니는 곳은 바로 '메제글리즈 쪽'이니,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보이지 않되 사라지지 않는 라일락 나무들의 향내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이 될 때까지 자주 누워, 콩브레의 옛날을, 그곳에서의 우울하고 잠 못 이루던 저녁을 꿈꾸곤 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날들을 꿈꾸곤 했으니, 그 기억은 한 잔의 차의 맛으로, 콩브레라면 '향기'라 불렀을 그것으로, 더 최근에야 내게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리고 기억들의 얽힘에 의해, 내가 그 작은 마을을 떠난 지 여러 해 뒤에 내게 이야기로 전해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스완이 얽혀들었던 어느 연애 사건을 꿈꾸곤 했으니, 그것도, 우리 자신의 가장 가까운 벗들의 삶을 기록하려 할 때보다 여러 세기 전에 죽은 사람들의 삶을 살필 때 흔히 더 얻기 쉬운 그 세부의 정확함으로써, 곧 한 고을에서 다른 고을로 말을 건네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루기 불가능해 보이는 정확함, 그러나 그 불가능을 넘어서게 해 준 그 장치를 우리가 알게 되기 전까지만 그러했던 그 정확함으로써였다. 이 모든 기억은, 하나 뒤에 또 하나가 이어지며, 하나의 실체로 응축되었으되, 내가 세 층위를, 곧 나의 가장 오래된 본능적 기억들과, 어느 맛이나 '향기'로 더 최근에 불러일으켜진 저 다른 기억들과, 실은 남의 기억이어서 내가 그에게서 간접으로 얻어 온 저 기억들 사이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하나로 녹아든 것은 아니었다. 갈라진 틈이랄 것도, 지질학적 단층이랄 것도 없이, 다만 어떤 암석 속에서, 어떤 대리석 속에서 기원과 나이와 형성의 차이를 가리키는 저 결들, 저 빛깔의 줄무늬 같은 것만은 있었다.

물론, 아침이 가까워지면, 나는 잠결의 짧은 미망을 오래전에 이미 가라앉혀 놓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실제로 어느 방에 누워 있는지를 알았을 것이고, 어둠 속에서 내 둘레로 그 방을 다시 짜 맞추어 놓았을 것이며, 오직 기억만을 길잡이 삼아, 혹은 그 발치에 커튼과 창을 자리 잡게 했던 희미한 빛의 어스름한 도움을 받아 내 방향을 잡아, 마치 건축가와 실내장식가가 버려진 옛 문짝·창문 도면을 놓고 일하듯이, 그것을 가구까지 온전히 다시 지어 놓고, 거울들을 제자리에 되돌리고, 서랍장을 늘 놓이던 자리에 앉혀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대낮으로 잘못 알았던, 놋쇠 커튼봉 위에서 마지막으로 꺼져 가는 잉걸불의 가물거림이 아니라, 대낮 그 자체가, 마치 칠판 위에 분필을 한 번 긋듯이, 어둠을 가로질러 그 첫 하얀 바로잡는 빛줄기를 그어 놓기가 무섭게, 창은, 그 커튼과 함께, 내가 잘못 그 안에 놓아두었던 문간의 틀에서 벗어났고, 한편 그것에 자리를 내주려고, 내 기억이 창이 있어야 할 곳에 서투르게 붙박아 두었던 글 쓰는 탁자는, 벽난로 선반을 제 앞으로 밀치고 복도의 벽을 옆으로 쓸어 내면서, 전속력으로 달아나 버렸다. 안뜰의 우물은 조금 전 내 화장방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올라앉았고, 내가 어둠 속에서 나 자신을 위해 지어 올렸던 거처는, 잠깨는 소용돌이 속에서 언뜻언뜻 보았던 저 다른 온갖 거처들에 합류하러 가 버렸으니, 낮의 치켜든 집게손가락이 내 창의 커튼 위에 그어 놓은 저 창백한 신호에 쫓겨 달아난 것이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