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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알베르틴과의 생활 ⑫

5권 제1부 · 제1장: 알베르틴과의 생활

그리하여 우리는 거짓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이었다면 입 밖에 냈을 것보다 더 깊은 진실이, 이따금 진심이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해 표현되고 알려지기도 한다. “바깥의 저 소란이 거슬리지 않으세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저는 좋아해요. 하기야 당신은 워낙 잠귀가 밝으니까요.” 나는 오히려 지독히 잠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뒤에 이어질 이야기 때문에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아침이 되어서야 잠들기 시작했을 때는 그러했다. 이런 종류의 잠은 평균적으로 네 배는 더 개운하기에, 실제로는 네 배나 짧았는데도 깨어난 잠꾼에게는 네 배나 길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깨어남에 그토록 큰 아름다움을 주고 삶을 다른 척도 위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는, 열여섯 배에 이르는 눈부신 곱셈의 착오이니, 음악에서 안단테의 8분음표가 프레스티시모의 2분음표와 같은 길이를 지니게 되는 저 커다란 리듬의 변화와도 같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삶이 거의 언제나 한결같으니, 여행이 안겨 주는 실망도 거기서 비롯된다. 과연 우리의 꿈이 삶의 가장 거친 재료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재료는 어찌나 철저히 손질되고 반죽되는지, 게다가 깨어 있는 상태의 시간적 제약이 하나도 없어 그것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아득한 높이로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막지 못하는 까닭에, 그토록 길게 늘어난다. 이런 행운이 내게 찾아든 다음 날 아침이면, 잠이라는 해면이 칠판 위에 적히듯 내 뇌에 새겨진 일상사의 표지들을 말끔히 지워 버린 뒤라, 나는 내 기억을 되살려 놓아야만 했다.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우리는 잠이나 뇌졸중의 건망증이 우리로 하여금 잊게 한 것을, 눈이 떠지거나 마비가 풀림에 따라 차츰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다시 붙잡을 수 있다. 나는 단 몇 분 사이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살아 낸 터라, 내가 벨을 눌러 부른 프랑수아즈에게 현실의 사실에 들어맞고 시계에 따라 다스려지는 말로 이야기하려면, 이렇게 말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속으로 억눌러야만 했다. “그래, 프랑수아즈, 이제 저녁 다섯 시로군, 어제 오후부터 자넬 통 못 봤네.” 그리고 내 꿈을 몰아내려고, 꿈에 거짓이라 우기고 나 자신에게도 거짓말하면서, 안간힘을 써서 입을 다물게 하며 나는 정반대로 대담하게 말했다. “프랑수아즈, 적어도 열 시는 됐겠지!” 나는 아침 열 시라고도 하지 않고 그저 열 시라고만 했는데, 이 믿기지 않는 시각이 좀 더 자연스러운 어조로 발음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반쯤 깨어난 잠꾼이던 내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던 말 대신 이런 말을 하는 데는,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승강장을 따라 몇 야드를 내달려야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과 똑같은 균형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가 잠시 달리는 것은 방금 벗어난 환경이 커다란 속도로 움직이던 것이어서, 그의 발이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하는 저 움직임 없는 땅과는 전혀 딴판이기 때문이다.

꿈의 세계가 깨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해서, 깨어 있는 세계가 덜 참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다. 잠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지각이 어찌나 과하게 실려 있는지, 저마다 그 부피를 두 배로 부풀리고 부질없이 눈을 멀게 하는 짝을 하나씩 덧지니는 탓에, 우리는 깨어남의 어리둥절함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나에게 온 것이 프랑수아즈였던가, 아니면 기다리다 지친 내가 그녀에게 갔던가? 그 순간 침묵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유일한 방도였으니, 우리를 향한 모든 혐의를 훤히 아는 판사 앞에 끌려 나온 순간, 정작 우리 자신은 그 혐의를 통고받지 못한 그런 순간과도 같았다. 온 것이 프랑수아즈였던가, 그녀를 부른 것이 나였던가? 아니, 실은 잠들어 있던 것이 프랑수아즈이고 그녀를 방금 깨운 것이 나였던 게 아닐까. 아니 그뿐이랴, 프랑수아즈가 내 가슴속에 갇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저 흐릿한 어둠 속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구별도, 그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작용도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현실은 호저(豪猪)의 몸속만큼이나 투명하지 못하고,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의 지각은 어쩌면 어떤 동물들의 지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깊은 잠에 앞서는 맑은 비이성의 상태에서, 지혜의 조각들이 그곳에 환히 떠돈다 해도, 텐이나 조지 엘리엇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해도, 깨어 있는 삶은 여전히 우월함을 간직하는데, 그것은 아침마다 이어 갈 수 있는 반면 꿈의 삶은 밤마다 이어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깨어 있는 세계보다 더 실재하는 다른 세계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깨어 있는 세계조차도 우리는 예술의 온갖 혁명에 따라, 나아가 그와 동시에 예술가를 무지한 바보와 갈라놓는 숙련과 교양의 정도에 따라 탈바꿈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흔히 한 시간 더 자는 잠은 뇌졸중과도 같아서, 그 뒤에 우리는 팔다리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고 말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 이 일에는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래 잤고,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깨어남은 수도관이 수도꼭지가 잠기는 것을 느끼듯, 기계적으로 의식 없이 겨우 느껴질 따름이다. 해파리의 삶보다 더 생기 없는 삶이 뒤따르니, 그 속에서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기라도 하다면, 우리가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졌다고도, 감옥에서 풀려났다고도 똑같이 믿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때 가장 높은 하늘에서 기억술의 여신 므네모테크니아가 몸을 굽혀, “커피를 청하려 벨을 누르는 습관”이라는 주문에 담아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내밀어 준다. 그렇지만 기억이 순식간에 베푸는 이 선물이 늘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로 미끄러져 들도록 스스로를 내맡기는 그 첫 몇 분 동안, 우리 앞에는 여러 다른 현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진실이 놓여 있어서, 우리는 한 벌의 카드 가운데서 고르듯 그 가운데서 골라잡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지금은 금요일 아침이고 우리는 방금 산책에서 돌아왔거나, 아니면 바닷가에서 차를 마실 시간이다. 잠들어 있다는 생각, 우리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는 생각은 흔히 맨 마지막에야 떠오른다.

우리의 부활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벨을 눌렀다고 여기지만 실은 누르지 않았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는다. 오직 움직임만이 우리의 사고를 되돌려 놓으며, 실제로 전기 단추를 누르고 나서야 우리는 느리게나마 또렷이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열 시는 됐겠지, 프랑수아즈, 커피 좀 가져다주게.” 오, 기적이여! 프랑수아즈는 내가 여전히 온전히 잠겨 있던, 그리고 그것을 뚫고 내 이상한 물음을 밀어낼 기력을 짜냈던 저 비현실의 바다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열 시 십 분입니다.” 그 덕에 내 말은 자못 그럴듯해 보였고, 존재하지 않음의 산더미가 내게서 온 생명을 짓눌러 버린 날이 아닐 때면 나를 하염없이 홀리던 저 환상적인 대화들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의지의 힘으로 나는 나 자신을 삶 속에 다시 세워 놓았던 것이다. 나는 아직 잠의 마지막 조각들을, 다시 말해 이야기 짓기에 존재하는 유일한 창의성, 유일한 참신함을 누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깨어 있는 상태의 우리 이야기는, 아무리 문학적 우아함으로 꾸며진다 한들, 아름다움이 비롯되는 저 신비로운 차이들을 하나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편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말하기란 쉽다. 그러나 약의 도움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 뜻밖에 찾아든 한 시간의 자연스러운 잠은 그만큼 신비로우면서도 한결 더 상쾌한, 어느 나라의 드넓은 새벽 벌판을 펼쳐 보여 줄 것이다. 잠드는 시각과 장소를 바꾸어 가며, 인공적인 방식으로 잠을 꾀어 들이거나, 반대로 한 번쯤 자연스러운 잠으로, 곧 수면제로 잠을 청하는 데 버릇 든 이에게는 무엇보다도 기이한 그 잠으로 돌아옴으로써, 우리는 정원사가 카네이션이나 장미로 길러 낼 수 있는 것보다 천 배나 많은 갖가지 잠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정원사들은 감미로운 꿈과도 같은 꽃을 길러 내는가 하면, 악몽과도 같은 꽃 또한 길러 낸다. 어떤 방식으로 잠들면 나는 몸을 떨며 깨어나, 홍역에 걸렸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훨씬 더 가슴 아프게도, 할머니가 (이제는 통 생각조차 하지 않던 그 할머니가) 발베크에서 당신이 곧 돌아가시리라 여기고 내게 당신의 사진을 한 장 갖게 하고 싶어 하시던 그날 내가 당신을 비웃었다 하여 마음 상하셨다고 여기곤 했다. 그러면 이내, 깨어 있으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나를 오해하신 것이라고 가서 해명해 드려야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어느새 내 몸의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홍역이라는 진단은 접히고, 할머니는 어찌나 아득해지시는지 더는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다. 때로는 이런 갖가지 잠 위로 별안간 어둠이 내렸다. 나는 불빛 하나 없는 큰길을 따라 계속 걷기가 두려웠는데, 그곳에서는 어슬렁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순경 하나와, 삯마차를 모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고 멀리서는 젊은 사내로 잘못 보이곤 하는 그런 여자들 가운데 하나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어둠 속 마부석에 앉은 그녀를 나는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말을 했고, 그 목소리에서 나는 그녀 얼굴의 완벽함과 몸의 젊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마차를 몰고 떠나기 전에 올라타려고 어둠 속에서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먼 거리였다. 다행히 순경과의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아직 멈춰 서 있는 마차를 따라잡았다. 큰길의 이 부분은 가로등이 밝히고 있었다. 마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과연 여자이기는 했으나, 늙고 뚱뚱했으며, 모자 밑으로 흰머리가 흘러내리고 얼굴에는 붉은 반점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 걸으며 생각했다. 여자들의 젊음이란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지난날 우리가 만났던 이들을 문득 다시 보고 싶어질 때면, 그들은 이미 늙어 버린 것일까? 우리가 욕망하는 젊은 여인이란, 그 배역을 처음 맡았던 여배우를 붙잡지 못한 극장이 하는 수 없이 새 스타에게 그 역을 맡길 때의 무대 위 인물과도 같은 것일까? 그러나 그럴 때 그것은 이미 같은 것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우수의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 이렇듯 우리는 잠 속에서 여러 ‘연민’을 지니게 되는데, 르네상스의 피에타와도 같으나, 그것들처럼 대리석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에게도 나름의 쓸모가 있으니, 곧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의 냉랭하고 때로는 적의로 가득한 상식 속에서 너무나 쉽사리 잊어버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더 다정하고 더 인간적인 어떤 시선을 우리로 하여금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발베크에서 프랑수아즈를 언제나 가엾이 여겨 대하리라 다짐했던 맹세를 떠올렸다. 그리고 적어도 그날 아침 내내 나는 프랑수아즈가 집사와 벌이는 말다툼에 짜증 내지 않도록, 다른 이들이 그토록 매정하게 대하는 프랑수아즈에게 다정하게 굴도록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었다. 그저 그날 아침만이었으니, 나는 좀 더 오래가는 규범을 세우려 애써야 했으리라. 왜냐하면 나라들이 순전한 감정의 정책만으로는 오래 다스려지지 않듯이, 사람들도 자기 꿈의 기억으로 다스려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벌써 이 꿈은 스러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그려 내려고 되새기려 애쓸수록 나는 그것을 그만큼 더 빨리 스러지게 했다. 내 눈꺼풀은 이제 그리 단단히 눈을 덮고 있지 않았다. 내가 꿈을 되짚어 세우려 하면 눈꺼풀은 활짝 열려 버렸다. 우리는 순간마다 한편의 건강과 온전한 정신, 다른 한편의 영적인 즐거움 사이에서 골라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전자를 택하는 비겁한 편에 섰다. 더욱이 내가 단념하던 그 위험한 힘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한층 더 위험한 것이었다. 연민이며 꿈은 저 혼자만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잠드는 조건을 바꾸어 놓으면, 스러지는 것은 우리 꿈만이 아니라, 여러 날에 걸쳐, 어쩌면 여러 해에 걸쳐, 꿈꾸는 능력뿐 아니라 잠드는 능력까지도 스러진다. 잠은 신성하나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어서, 아주 작은 충격에도 날아가 버린다. 잠은 습관을 좋아하는 것이어서, 습관은 잠 자신보다 더 붙박여 있는지라 밤마다 잠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잠을 붙들어 두고 온갖 상함으로부터 지켜 주지만, 우리가 그것을 옮겨 놓으면, 그것이 더는 습관에 매이지 않으면, 잠은 수증기처럼 녹아 사라진다. 그것은 젊음이며 사랑과도 같아서, 결코 다시 붙잡을 수 없다.

이런 갖가지 형태의 잠에서도,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것은 간격을 늘이거나 줄이는 일이었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누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짧은 잠이었다 해도 그 잠 속에서, 파리의 장사꾼들, 식료품 행상들의 떠도는 삶을 우리가 알아차리게 해 주는 저 외침 소리를 제법 많이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습관처럼 (아아, 이 늦은 깨어남과 라신적 아쉬에뤼스의 가혹한 메디아·페르시아식 율법이 머지않아 나를 얽어 넣을 그 파란을 미처 내다보지 못한 채) 나는 이 외침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일찍 깨어나려 애썼다.

그리고 알베르틴이 그 소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안다는 즐거움, 침대를 떠나지 않고도 내가 바깥 공기를 쐰다는 즐거움 이상으로, 나는 그 소리에서 이를테면 바깥세상의 대기의 상징을, 내가 그녀로 하여금 내 보살핌 아래서가 아니고서는 그 혈관 속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내가 고른 시각에 그 삶으로부터 그녀를 거두어들여 내 곁 집으로 돌아오게 하던, 저 위험하게 술렁이는 삶의 상징을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없이 완전한 진심으로 알베르틴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천만에, 나는 네가 그 소리를 좋아하는 걸 아니까 오히려 즐거운걸.” “A la barque, les huîtres, à la barque.” “어머, 굴이네! 정말 굴이 먹고 싶었는데!” 다행히 알베르틴은 한편으로는 변덕에서, 한편으로는 고분고분함에서, 자기가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것들을 이내 잊어버렸고, 프뤼니에네 가면 더 나은 굴을 구할 수 있다고 내가 일러 줄 새도 없이, 생선 장수가 외치는 소리에 들리는 것들을 잇달아 죄다 먹고 싶어 했다. “A la crevette, à la bonne crevette, j’ai de la raie toute en vie, toute en vie.” “Merlans à frire, à frire.” “Il arrive le maquereau, maquereau frais, maquereau nouveau.” “Voilà le maquereau, mesdames, il est beau le maquereau.” “A la moule fraîche et bonne, à la moule!” 나도 모르게, “Il arrive le maquereau”라는 그 외침 소리에 나는 몸서리쳤다. 그러나 이 외침이 우리 운전기사를 두고 하는 말일 리는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나는 그저 내가 질색하던 그 이름의 생선만을 떠올렸고, 내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 홍합.” 알베르틴이 말했다. “홍합이 어찌나 먹고 싶은지.” “내 사랑! 발베크에서야 좋았지만 여기 것은 먹을 만한 게 못 돼. 게다가, 제발 부탁이니, 홍합에 대해 코타르가 네게 한 말을 잊지 마.” 그러나 내 말은 더더욱 잘못 고른 것이었으니, 뒤이어 온 채소 장수 여인이 코타르가 한층 더 엄격히 금한 것을 외쳐 알렸기 때문이다.

A la romaine, à la romaine!
On ne le vend pas, on la promène.

그렇지만 알베르틴은 며칠 뒤에 이렇게 외치는 여인에게서 사 주겠다고 내가 약속한다는 조건으로 상추를 단념하는 데 동의했다. “J’ai de la belle asperge d’Argenteuil, j’ai de la belle asperge.” 무언가 더 낯선 말을 기대했을 법한 어떤 신비로운 목소리가 넌지시 흘렸다. “Tonneaux, tonneaux!” 우리에게 내놓이는 것이 통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실망 속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으니, 그 말이 다음 외침에 거의 온전히 파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Vitri, vitri‑er, carreaux cassés, voilà le vitrier, vitri‑er,” 이는 그레고리오풍의 가락 나눔이었으나, 내게 전례를 떠올리게 하기로는 넝마 장수의 외침만 못했으니, 넝마 장수의 외침은 교회 의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 도중에 소리가 문득 뚝 끊기는 저런 대목 가운데 하나를 저도 모르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Praeceptis salutaribus moniti et divina institutione formait audemus dicere,” 하고 사제가 말하고는 “dicere.”에서 날카롭게 맺는다. 불경함 없이 말하건대, 중세의 민중이 교회의 성스러운 땅 안에서 연극이며 소극(笑劇)을 벌이곤 했듯이, 이 넝마 장수가 다른 말들을 느릿느릿 끌고 나서 7세기의 위대한 교황이 정해 놓은 억양에 걸맞은 날카로움으로 마지막 음절을 내뱉을 때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그 “dicere”이다. “Chiffons, ferrailles à vendre” (이 모두가 느리게, 뒤따르는 두 음절도 느리게 읊조려지는 반면, 마지막은 “dicere”보다 더 활기차게 맺는다) “peaux d’la-pins.” “La Valence, la belle Valence, la fraîche orange.” 하다못해 변변찮은 부추마저, “Voilà d’beaux poireaux,” 양파마저, “Huit sous mon oignon,” 하는 소리가 내게는, 저 혼자 내버려졌더라면 알베르틴이 빠져 죽었을지도 모를 넘실대는 물결의 메아리인 양 들렸고, 그리하여 “Suave mari magno.”의 감미로움을 띠었다. “Voilà des carrottes à deux ronds la botte.” “어머!” 알베르틴이 소리쳤다. “양배추, 당근, 오렌지. 죄다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이야. 프랑수아즈를 내보내서 좀 사 오게 해요. 우리한테 크림 당근 요리를 해 줄 거예요. 게다가 이걸 다 같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듣는 저 소리가 죄다 근사한 저녁밥으로 바뀌는 거잖아요… 아, 제발, 그 대신 프랑수아즈한테 가오리 검은버터 구이를 해 달라고 해요. 정말 맛있거든요!” “내 아가, 물론 그러마, 하지만 꾸물대지 마. 그러다간 채소 수레에 실린 걸 죄다 달라고 하겠구나.” “좋아요, 그럼 가 볼게요. 하지만 앞으로 우리 저녁밥으로는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로 들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래요. 정말 재미있잖아요. 그리고 이 소리를 들으려면 꼬박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니. ‘Haricots verts et tendres, haricots, v’la l’haricot vert.’ 정말 맞는 말이에요, 연한 강낭콩이라니. 알잖아요, 나는 그걸 더없이 부드럽게, 식초 소스가 뚝뚝 흐르게 해서 먹는 걸 좋아해요. 먹고 있다는 느낌도 안 들 만큼, 이슬방울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거든요. 어머, 크림치즈의 작은 심들도 마찬가지예요, 어찌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Bon fromage à la cré, à la cré, bon fromage.’ 그리고 퐁텐블로산 물포도도요. ‘J’ai du bon chasselas.’ ” 그러자 나는 물포도가 제철이 되기까지 그녀와 함께 보내야 할 그 모든 시간을 떠올리고 낙담했다. “저기, 우리가 외치는 소리로 들은 것만 바란다고 했지만, 당연히 예외는 두죠. 그러니까 내가 르바테네에 들러 우리 둘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시키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지금은 철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나 정말 먹고 싶은걸요!” 나는 르바테네에 가겠다는 이 계획에 마음이 어지러웠는데,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라는 말이 내 눈에는 그 계획을 한층 확실하고 한층 수상쩍게 만들었다. 그날은 베르뒤랭 부부가 손님을 맞는 날이었고, 스완이 르바테네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그들에게 일러 준 뒤로, 그들이 아이스크림과 페이스트리를 주문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이스크림이야 반대할 것 없지, 내 사랑 알베르틴, 하지만 내가 시켜 주게 해 줘. 푸아레블랑슈네에서 살지, 르바테네에서 살지, 리츠에서 살지 나도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아볼게.” “그럼 나가는 거예요?” 그녀가 미심쩍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녀는 내가 더 자주 나다니면 기쁘겠다고 늘 우겼지만, 내가 하는 어떤 말이라도 내가 집에 붙어 있지 않으리라고 그녀에게 짐작하게 하면, 그 불안한 기색은 내가 날마다 나다니는 것을 보며 그녀가 느낄 기쁨이 어쩌면 온전히 진심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게 하게 했다. “나갈 수도 있고, 안 나갈 수도 있어. 내가 미리 계획 세우는 법이 없는 걸 잘 알잖아. 어쨌든 아이스크림은 거리에서 외치며 파는 것도, 행상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걸 먹고 싶어 하는 거지?” 그러자 그녀는 발베크 이후 그녀 안에 얼마나 큰 지성과 숨은 취향이 자라났는지를 내게 보여 주는 말로, 그녀가 오로지 내 영향 덕분이라고, 늘 내 곁에서 지낸 덕분이라고 짐짓 내세우던 그런 말과 비슷한 말로 대답했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그 말은 내가 결코 입에 담지 않았을 말이었으니, 마치 내 대화를 문학적인 형식으로 꾸미는 일을 어떤 알 수 없는 권위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금해 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쩌면 미래는 알베르틴에게는 나와 같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글로 쓰인” 이미지들을, 내게는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더 성스러운 쓰임을 위해 남겨진 듯 여겨지던 그런 이미지들을, 그녀가 말 속에 열심히 쓰려 드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를 거의 예감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무엇에도 불구하고 깊이 감동했는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나라면 그녀처럼 말하지는 않으리라,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없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깊이 내 영향 아래 들어왔으니, 그러니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녀는 내가 빚어낸 작품이다). “외치며 파는 이 먹을거리들에서 내가 좋아하는 건, 우리가 광시곡처럼 듣던 것이 우리 식탁에 올라 내 입맛에 말을 걸어올 때 그 본성을 바꾼다는 점이에요. 아이스크림으로 말하자면 (부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건축 모양을 다 갖춘 그 옛날식 틀에 부어 만든 게 아닌 건 시키지 말아 주세요), 하나 먹을 때마다, 신전이며 교회며 오벨리스크며 바위며, 그건 마치 그림이 든 지리책 같아서, 나는 먼저 그걸 들여다보고 나서 그 산딸기나 바닐라로 된 기념물들을 목구멍 속 시원함으로 바꾸어 놓는 거예요.” 나는 이것이 좀 지나치게 잘 다듬어진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내가 그것을 잘된 표현이라 여긴다는 것을 느꼈고, 말을 이어 가다가 그 비유를 멋지게 마무리했을 때 잠시 멈추어 그 아름다운 웃음을, 너무나 관능적이어서 내게는 너무나 괴로웠던 그 웃음을 웃었다. “어머, 리츠에서라면 아이스크림으로 된 방돔 원기둥을,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나 산딸기 아이스크림으로 된 걸 보게 될까 봐 걱정이에요. 그러면 그것들이 시원함의 영광을 기려 큰길을 따라 세운 봉헌 기둥이나 탑문처럼 보이도록 아주 많이 필요할 테니까요. 산딸기 오벨리스크도 만드는데, 그건 내 갈증의 불타는 사막 여기저기에 우뚝 솟아오를 테고, 나는 그 분홍빛 화강암을 어느 오아시스보다도 더 시원하게 적셔 줄 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바스러뜨려 녹일 거예요” (그러고는 여기서 그 깊은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토록 말을 잘한다는 만족에서였는지, 그토록 진부한 이미지를 쓴 자신을 비웃음에서였는지, 아니면 아아, 관능적 만족에 맞먹는, 그토록 좋고 그토록 시원한 무언가를 제 안에서 느끼는 육체적 쾌감에서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리츠의 저 아이스크림 산들은 이따금 몬테로사를 떠올리게 하는데, 사실 레몬 아이스크림이라면 그게 기념물 같은 모양을 하지 않고 엘스티르의 산들 중 하나처럼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것도 나는 반대하지 않아요. 그럴 땐 너무 희어서는 안 되고 살짝 누르스름해야죠, 엘스티르의 산들이 지닌 저 흐릿하고 지저분한 눈 같은 빛깔로요. 아이스크림이 클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원한다면 반 개만이라도 좋죠, 그 레몬 아이스크림은 아주 작은 크기로 줄여 놓았어도 여전히 산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상상이 그 크기를 되돌려 놓죠, 일본의 저 작은 난쟁이나무들처럼요, 그게 여전히 삼나무며 떡갈나무며 만치닐나무라는 걸 뻔히 알잖아요. 어찌나 그런지, 내 방 안 자그마한 물줄기 옆에 그런 나무 몇 그루를 늘어놓으면, 아이들이 길을 잃을 만큼 강까지 뻗어 내려가는 드넓은 숲을 갖게 될 거예요. 마찬가지로, 내 누르스름한 레몬 아이스크림 기슭에서 나는 역마차 마부며 나그네며 역마차를 또렷이 볼 수 있어요, 그것들 위로 내 혀가 그것들을 집어삼킬 얼어붙은 눈사태를 굴려 내리기 시작하죠” (그녀가 이 말을 하며 내비친 잔혹한 희열이 내 질투를 자극했다). “꼭 그처럼,”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는 딸기로 만든 반암(斑巖)으로 된 저 베네치아의 교회들을 기둥 하나하나 허물어뜨리려고 입술을 놀리기 시작하고, 남겨 둔 것은 예배 드리는 이들 위로 와르르 무너뜨려 내리는 거예요. 그래요, 그 모든 기념물이 돌의 상태에서 벗어나, 벌써 그것들의 녹아드는 시원함으로 두근대는 내 뱃속으로 옮겨 오는 거죠. 하지만 있잖아요, 아이스크림이 없어도, 광천 광고만큼 사람을 설레게 하고 목마르게 하는 건 없어요. 몽주뱅에서는, 뱅퇴유 댁에서는, 근처에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변변한 과자 장수가 없었지만, 우리는 날마다 다른 탄산수를 마시며 정원에서 우리만의 프랑스 일주를 하곤 했어요, 비시 광천수 같은 거요, 그건 따라 내자마자 잔 바닥에서 흰 구름을 피워 올리는데, 곧바로 마시지 않으면 그 구름이 흐려지다 사라져 버리죠.” 그러나 그녀가 몽주뱅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기란 너무나 괴로워서,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가 당신을 지루하게 하네요, 잘 있어요, 내 사랑.” 발베크 시절과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 시절이라면 나는 엘스티르 그 자신인들 알베르틴에게서 이런 시심(詩心)의 풍요를, 이를테면 셀레스트 알바레의 그것보다는 덜 기이하고 덜 독특한 시심을 알아볼 수 있었으랴 하고 감히 장담했으리라. 알베르틴이라면 셀레스트가 내게 하곤 하던 그런 말을 결코 떠올리지 못했겠지만, 사랑이란 끝나 가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편파적인 법이다. 나는 그녀의 아이스크림이 펼쳐 보인 그림 든 지리책 쪽을 더 좋아했으니, 그 다소 손쉬운 매력이 내게는 알베르틴을 사랑할 이유로,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