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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알베르틴과의 생활 ⑮

5권 제1부 · 제1장: 알베르틴과의 생활

게다가, 그녀가 레아와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분장실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으리라고 내 어찌 장담할 수 있었으랴. 또 설령 레아가 그녀를 모른다 한들, 발베크에서 분명히 그녀를 본 적 있는 레아가 그녀를 알아보고 무대에서 신호를 보내, 알베르틴이 무대 뒤로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해 주겠는가. 위험이란 물리치고 나면 피하기 쉬워 보이는 법이다. 이 위험은 아직 물리쳐지지 않았고, 나는 영영 물리치지 못할까 봐 두려웠으며, 그래서 그것이 한결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런데도, 붙잡아 실감하려 하면 거의 사라져 버리는 이 알베르틴을 향한 사랑이, 이 순간 내 비탄의 격렬함에서 제 존재의 증거 같은 것을 얼마간 얻는 듯했다. 나는 이제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 쓰지 않았고, 오직 어떻게 그녀가 트로카데로에 머무는 것을 막을까만 생각했으며, 레아가 거기 가지 않도록 설득할 수만 있다면 세상 어떤 액수라도 그녀에게 내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선택을 품는 생각이 아니라 행하는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면, 나는 알베르틴을 사랑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게 되살아난 내 고통도, 내가 마음에 그리던 알베르틴의 상(像)에 더 이상의 실질을 보태 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채로 있는 어떤 신처럼 내 재앙을 자아냈다. 끝없이 억측을 거듭하며, 나는 내 사랑을 실감하는 일 없이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키려 애썼다. 무엇보다 먼저, 레아가 정말로 트로카데로에서 공연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우유 배달 아가씨를 내보낸 뒤, 나는 레아와 가까운 사이로 알던 블로크에게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런 일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을 수 있는지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당장 일에 착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프랑수아즈는 나갈 채비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 아님을 떠올리고는, 일어나 옷을 입으며 그녀에게 자동차를 잡게 했다. 그녀는 트로카데로에 가서 좌석을 하나 잡고, 샅샅이 뒤져 알베르틴을 찾아내어 내 쪽지를 전하기로 했다. 그 쪽지에서 나는, 언젠가 발베크에서 하룻밤 나를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부인에게서 방금 받은 편지 때문에 내가 몹시 심란하다고 그녀에게 적었다. 그녀는 그 부인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기억할 터였다. 나는 그 이튿날 그녀가, 왜 자기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나를 나무랐던 일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낮 공연을 포기하고 집으로 나와 함께 와 달라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는 데 도움이 되게끔 둘이서 바람이나 좀 쐬자고 청한다고 적었다. 다만 나는 채비하는 데 한참 걸릴 터이니, 프랑수아즈가 동행으로 붙었으니 겸사겸사 트루아카르티에에 들러 (이 가게는 더 작아서 봉 마르셰보다 덜 위험해 보였다) 그녀에게 필요한 흰 튈 스카프를 사 오면 고맙겠다고 했다. 내 쪽지는 아마 쓸데없지는 않았으리라. 솔직히 나는 알베르틴을 알게 된 뒤로, 아니 그 전에,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 속에는 (내가 그 점을 짚었더라면 그녀는 내가 잘못 알아들었다고 대꾸했을 법도 하지만) 어떤 모순들이, 현행범으로 붙잡는 것만큼이나 결정적으로 내게 여겨지던 어떤 윤색들이 있었으나, 알베르틴을 상대로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나쁜 짓을 하다 곧잘 들켜도, 번번이 느닷없는 전술적 방향 전환으로 나의 잔인한 공세를 무력하게 만들고 제 처지를 다시 다져 놓았으니까. 그 잔인함은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녀는, 문체를 다듬으려는 것이 아니라 제 경솔함을 바로잡으려고, 문법가들이 아나콜루톤이라거나 뭐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그 어법과 다르지 않은, 느닷없는 구문 파격을 썼다. 여자들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나는데, 요전 날 내가……” 하고 말해 버린 그녀는, 이내 숨을 삼켰고, 그러고 나면 “내가”는 “그 여자”로 바뀌었다. 그것은 그녀가 죄 없는 구경꾼으로서 목격한 일이지, 그녀 자신이 한 짓이 아니었다. 그 일화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문장이 정확히 어떻게 시작했는지 떠올려, 그녀가 중간에 뚝 끊어 버렸으니 그것이 어떻게 끝났을지 나 혼자서 헤아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끝을 들었던 터라, 시작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내가 관심을 보이는 기색에 그녀가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렸는지도 몰랐고, 그리하여 나는 그녀가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로 무엇을 기억하는지 여전히 알고 싶어 안달하는 채로 남았다. 우리 애인 쪽의 거짓말의 첫 단계는 우리 자신의 사랑이나 소명(召命)의 첫 단계와 같다. 그것들은 우리가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사이에 모양을 갖추고, 쌓이고, 지나간다. 우리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한 경위를 떠올리려 할 때면, 우리는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사랑에 빠지기 전 그녀를 꿈꾸던 때, 우리는 속으로 ‘이것은 사랑의 서막이니 주의를 기울여야 해!’ 하고 말하지 않았고, 우리 꿈은 우리를 불시에 덮쳤으며, 우리는 그것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드문 경우를 빼면, 이 지면에서 내가 알베르틴의 거짓 진술 하나를 같은 주제에 관한 그녀의 이전 단언과 곧잘 맞대어 놓은 것은 순전히 내 서술의 편의를 위해서일 뿐이다. 이 이전 단언은, 나로서는 미래를 읽을 수 없었고 그때는 어떤 모순된 확언이 그것과 짝을 이루게 될지 짐작조차 못 했으므로, 흔히 그러하듯 알아채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갔다. 과연 내 귀로 듣기는 했으되, 알베르틴의 끊임없는 말의 흐름에서 그것만 따로 떼어 내지는 못한 채로. 나중에, 뻔한 거짓말 앞에서, 혹은 불안한 의심에 사로잡혀, 나는 그것을 기꺼이 떠올리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내 기억은 제때 언질을 받지 못했던 터라, 사본을 남겨 둘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나는 프랑수아즈에게, 알베르틴을 로비에서 데리고 나오거든 전화로 알려 달라고, 그리고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집으로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주인 나리를 뵈러 오기 싫다니,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될 노릇이지요.” 프랑수아즈가 대꾸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그렇게까지 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어.” “그렇다면 은혜도 모르는 몹쓸 것이지요.” 프랑수아즈가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알베르틴은, 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지난날 고모의 병실에서 욀라리가 그녀에게 불러일으키곤 하던 바로 그 시샘의 괴로움을 되살려 놓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알베르틴의 위치가 그녀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나에 의해 정해진 것임을 (자존심 때문에, 또 프랑수아즈를 약 올리려고 나는 그 사실을 그녀에게 감추는 편이 좋았다) 알지 못한 채, 프랑수아즈는 그 아가씨의 수완을 감탄하면서도 저주했고, 다른 하인들에게 그녀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를 “연극쟁이”, 나를 손가락 하나로 휘어잡는 아첨꾼이라 불렀다. 프랑수아즈는 아직 그녀에게 드러내 놓고 싸움을 걸지는 못했고, 웃는 낯을 지어 보였으며, 나와의 관계에서 그녀를 위해 해 주는 시중으로 내 눈에 들려 애썼다. 내게 무슨 말을 해 봤자 소용없고 그래 봐야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가 오기만 하면, 알베르틴의 갑옷에 틈이라도 발견하면, 그 틈을 넓혀 우리를 아주 영영 갈라놓으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은혜를 모른다니? 아니야, 프랑수아즈, 은혜를 모르는 건 나인 것 같아. 그녀가 내게 얼마나 잘해 주는지 자넨 몰라.”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달래 주는 일이었다.) “되도록 서둘러 줘.” “알았어요, 얼른 다녀오지요.” 딸의 물이 프랑수아즈의 어휘를 물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듯 모든 언어는 새 낱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순수함을 잃는다. 내가 그 전성기를 알던 프랑수아즈의 말씨가 이렇게 타락한 데에는, 나 자신도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프랑수아즈의 딸이, 어머니와 사투리로만 이야기하는 데 만족했더라면, 어머니의 고전적인 언어를 그토록 상스러운 속어로 전락시키지는 않았으리라. 딸은 사투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고, 둘이 한꺼번에 내 방에 있을 때, 무슨 은밀한 이야기가 있으면, 부엌에 틀어박히는 대신 바로 내 방 한복판에서, 아무리 꼭 닫은 문보다도 뚫기 어려운 가림막으로, 곧 사투리로 대화함으로써 저희를 무장했다. 나는 그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낱말 m’esasperate(나를 부아나게 한다)를 저희가 얼마나 자주 쓰는지로 미루어, 모녀 사이가 늘 좋지만은 않으려니 짐작했을 따름이다 (하기야 저희를 부아나게 하는 대상이 나였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딱하게도, 가장 낯선 말도 늘 들으면 이윽고 알아듣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투리라는 점이 나는 아쉬웠으니, 내가 그것을 익히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가 페르시아어로 제 뜻을 밝히는 버릇이 있었던들 나는 그 못지않게 익혔으리라. 프랑수아즈가, 그리고 그녀의 딸이, 내가 알아듣는 눈치를 채고 아무리 말의 속도를 높인들 소용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저희 사투리를 알아듣는다는 데 크게 언짢아하다가, 이내 내가 그것을 말하는 걸 듣고는 좋아했다. 다만 인정하건대 그 기꺼움은 조롱 섞인 기꺼움이었으니, 내가 이윽고 낱말을 그녀 자신과 얼추 비슷하게 발음하게 되었어도, 그녀는 우리 둘의 발음 사이에서 그녀에게 한없는 즐거움을 주는 천양지차를 찾아냈고, 여러 해 생각조차 않던 사람들, 그러나 내가 저희 사투리를 그토록 서툴게 말하는 걸 들었더라면 배꼽을 잡고 웃었을 사람들, 그 웃음소리를 들었더라면 그녀에게 참 좋았을 그 사람들을 이제 더는 만나지 못함을 아쉬워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가 아무리 서툴게 발음한들 잘 알아듣는다는 그녀의 서운함을 덜어 줄 기쁨은 오지 않았다. 우리가 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이 곁쇠나 쇠지레를 쓸 수 있게 되면 열쇠는 쓸모가 없어진다. 방어 수단으로서 사투리가 쓸모없어지자, 그녀는 딸과, 더없이 타락한 시대의 것으로 급속히 변해 가는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제 나는 채비를 마쳤으나, 프랑수아즈는 아직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쩌면 소식을 기다리지 말고 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가 알베르틴을 찾아내리라고, 알베르틴이 무대 뒤로 가 버리지 않았으리라고, 설령 프랑수아즈가 그녀를 찾아낸들 순순히 끌려 나오리라고 내 어찌 장담할 수 있었으랴. 반 시간 뒤 전화벨이 딸랑거리기 시작했고, 내 심장은 희망과 두려움으로 요란하게 뛰었다. 교환수의 지시에 따라, 한 무리의 소리들이 나는 듯이 날아와 순식간에 전화 교환원의 말을 내게 실어 왔다. 프랑수아즈의 말이 아니었으니,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소심함과 우울함이, 제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물건 앞에 서면, 전염병 앓는 사람은 선뜻 찾아가면서도, 전화 수화기에는 다가가지 못하게 그녀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프랑수아즈는 알베르틴이 로비에 혼자 있는 것을 찾아냈고, 알베르틴은 그저 앙드레에게 더 이상 있지 않겠다고 알리러 갔다가 이내 프랑수아즈에게로 서둘러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화내지 않던가요? 아, 실례합니다. 그분에게 아가씨가 화내지 않았는지 좀 여쭤봐 주시겠어요?” “그분 말씀이, 조금도 화내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네요. 아무튼 기뻐하지 않았더라도 내색은 하지 않았고요. 두 분은 지금 트루아카르티에로 떠나서 두 시까지는 댁에 도착할 거랍니다.” 나는 두 시란 세 시를 뜻하려니 짐작했으니, 이미 두 시가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수아즈는 우리가 병이라 부르는, 그 유별나고 고질적이며 고칠 수 없는 결함 가운데 하나를 앓고 있었다. 그녀는 시각을 제대로 읽거나 제대로 알리는 법이 도무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프랑수아즈가 시계를 들여다본 뒤, 두 시면 “한 시예요” 또는 “세 시예요” 하고 말할 때, 그 일어나는 현상이 그녀의 시각에 있는지, 생각에 있는지, 말에 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하나는, 그 현상이 어김없이 일어난다는 것뿐이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오래된 제도다. 유전과 이종교배가 나쁜 습성에, 못된 반사작용에 거스를 수 없는 힘을 실어 주었다. 어떤 이는 장미 덤불 곁을 지나기만 해도 재채기하며 숨을 헐떡이고, 또 어떤 이는 갓 칠한 페인트 냄새에 발진이 돋으며, 여행을 떠나야 하면 걸핏하면 배앓이를 하고, 도둑의 손자들은 저 자신은 백만장자에 후한 사람이면서도 당신에게서 50프랑을 훔치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프랑수아즈가 시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에서 비롯하는지로 말하자면, 그녀 자신은 그 수수께끼에 아무런 실마리도 던져 준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틀린 대답에 내가 으레 성을 내는데도, 프랑수아즈는 제 잘못을 사과하려 하지도, 그것을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못 들은 척 잠자코 있었고, 그리하여 나를 아주 화통 터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옆구리와 넓적다리라도 후려칠 수 있게, 변명 한마디쯤 듣고 싶었으나, 한마디도 없이 무심한 침묵뿐이었다. 아무튼 오늘의 일정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알베르틴은 세 시에 프랑수아즈와 함께 집으로 오는 길이었고, 알베르틴은 레아도 그 친구들도 만나지 않을 터였다. 그리하여 그녀가 그들과 관계를 되살릴 위험은, 막아졌으니, 이내 내 눈에 그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이 얼마나 쉽게 막아졌는지를 보며, 내가 그것을 막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사무치는 고마움을 느꼈다. 보아하니 그녀는 레아의 친구들을 만나러 트로카데로에 간 것이 아니었고, 내 말 한마디에 공연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녀가 내가 짐작하던 것보다 더 나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 주었으니까. 한 자전거 배달원이 그녀에게서 온 몇 줄을, 참고 기다려 달라는, 그리고 그녀가 즐겨 쓰던 정겨운 표현들로 가득한 쪽지를 내게 가져왔을 때, 내 고마움은 한층 더 커졌다. “내 사랑, 사랑하는 마르셀, 나는 이 자전거보다 느리게 돌아가요. 당신 곁에 더 빨리 가려면 이 사람 자전거라도 빌리고 싶어요. 내가 화가 났으리라고, 혹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으리라고 어떻게 상상할 수가 있어요? 우리 둘이서만 나가면 좋겠어요. 언제나 둘이서만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당신은 별생각을 다 하는군요! 어쩜 이런 마르셀이! 어쩜 이런 마르셀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당신의 알베르틴.”

내가 그녀에게 사 준 드레스들,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했던 요트, 포르튀니의 실내복들, 알베르틴 편의 이 순종에서 그 보상이 아니라 보완물을 얻게 된 이 모든 것이, 이제 내게는 내가 누리는 그만큼 많은 특권으로 여겨졌다. 주인의 의무와 지출은 그 지배권의 일부이며, 그 권리 못지않게 그것을 규정하고 입증하고 온전히 증명하니까. 그리고 그녀가 내게 있음을 인정한 이 권리야말로, 바로 내 지출에 그 참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여자를 두고 있었으니, 내가 불쑥 보낸 첫마디 말에 그녀는, 지금 가고 있다고, 곧장 집으로 데려가도록 순순히 맡기겠다고 내 심부름꾼을 시켜 겸손하게 전화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짐작하던 것보다 더 주인이었다. 더 주인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더 노예라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알베르틴을 보고 싶은 조바심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 프랑수아즈와 함께 장을 보고 있다는, 혹은 내가 기꺼이 미루고 싶은 머지않은 어느 순간에 그녀와 함께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이제 나로서는 차라리 혼자 보내는 편이 훨씬 좋았을 시간을, 고요하고 눈부신 별처럼 환히 비추었다. 알베르틴을 향한 내 사랑이 나를 일으켜 나갈 채비를 하게 했으나, 바로 그 사랑이 내가 외출을 즐기지 못하도록 막을 터였다. 나는 이런 일요일 오후에는 어린 여점원들이며 midinettes들이며 매춘부들이 불로뉴 숲을 거닐고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리고 midinettes, 어린 여점원이라는 말과 더불어 (무도회 기사에서 읽은 어느 아가씨의 이름 같은, 고유명사를 두고 내게 곧잘 일어나던 일처럼), 흰 보디스와 짧은 치마의 이미지와 더불어, 그 아래에 어쩌면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를 낯선 여자를 놓았기에, 나는 무(無)에서 탐나는 여자들을 지어내고는 속으로 “얼마나 매력적일까!” 하고 말했다. 그러나 나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녀들이 매력적인들 내게 무슨 소용이랴. 아직 혼자라는 사실을 틈타, 햇빛이 악보를 읽는 데 방해되지 않게 커튼을 맞당겨 치고,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마침 거기 놓여 있던 뱅퇴유 소나타의 페이지를 넘기며 치기 시작했다. 알베르틴이 오려면 아직 얼마간 걸리되 한편으로는 오는 것이 확실했으므로, 내게는 남는 시간과 마음의 평온이 한꺼번에 있었다. 프랑수아즈의 호위를 받은 그녀의 귀가를 기다리는 기대 속에, 안전으로 부풀어, 그리고 그녀의 고분고분함에 대한 내 확신 속에,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내면의 빛의 축복 속에 떠 있었기에, 나는 내 생각들을 마음대로 부려, 한순간 알베르틴에게서 떼어 내어 소나타에 쏟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소나타에서, 관능적인 동기와 불안한 동기의 결합이 이제 알베르틴을 향한 내 사랑에 한결 더 가깝게 상응한다는 것을 나는 굳이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 사랑에서 질투가 워낙 오래 자취를 감추었던 터라, 나는 스완에게 그런 감정을 알지 못한다고 털어놓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아니, 나는 소나타를 다른 관점에서 취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 한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으로 바라보며, 그 음향의 물결에 실려 콩브레의 나날로 돌아갔다. 몽주뱅이나 메제글리즈 쪽이 아니라, 게르망트 쪽으로 거닐던 산책, 나 자신이 예술가가 되기를 갈망하던 그 시절로. 그 야망을 아주 접음으로써, 나는 무언가 참된 것을 잃은 것일까? 삶이 예술의 상실을 내게 보상해 줄 수 있을까, 예술 속에는, 삶의 활동이 우리에게 내주지 못하는 표현을 우리의 참된 인격이 찾아내는, 더 깊은 실재가 있는 것일까? 과연 위대한 예술가는 저마다 다른 모든 이와 그토록 달라 보이며,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는 헛되이 찾아 헤매는 그 개성의 감각을 그토록 강렬하게 우리에게 준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던 참에, 나는 소나타의 한 대목에, 익히 알던 대목에 문득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주의는 우리가 오래 알아 온 것들에 색다른 빛을 던지고, 그리하여 우리는 그 안에서 여태 본 적 없던 것을 알아본다. 그 대목을 치면서, 거기서 뱅퇴유가 바그너와는 전혀 무관했을 어떤 착상을 표현하려 애썼음에도, 나는 “트리스탄” 하고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손자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그 손자의 억양이나 몸짓에서 찾아내는 집안 오랜 벗의 미소를 띠고서. 그리고 그 벗이 이윽고 닮음을 가늠하게 해 주는 사진을 들여다보듯, 뱅퇴유 소나타를 앞에 두고 나는 보면대에 트리스탄의 악보를 세웠다. 마침 그날 오후 라무뢰 연주회에서 그 발췌곡이 연주되고 있던 참이었다. 바이로이트의 거장을 흠모하는 데 있어, 나는 니체 같은 이들처럼, 예술에서도 삶에서도 자기를 유혹하는 아름다움을 의무감에서 멀리하라는 사람들, 파르지팔을 단념하듯 트리스탄에서 제 몸을 뜯어내고, 영혼의 금욕 속에 이 고행에서 저 고행으로 나아가, 더없이 피비린내 나는 viae Crucis를 좇은 끝에, 스스로를 Le Postillon de Longjumeau의 순수한 인식과 완전한 흠모에까지 드높이는 그런 사람들의 가책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한 막을 찾아들었다가 물러갔다 다시 돌아오고, 때로는 멀찍이 나른하게 거의 동떨어진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여전히 아련한 채로 그토록 절박하고 그토록 가깝고, 그토록 내밀하고 그토록 유기적이며 그토록 오장육부에 사무쳐, 음악적 동기의 재개라기보다 신경통 발작의 재발이라 부를 만한, 그 집요하고 덧없는 주제들을 마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바그너의 작품 속에 얼마나 많은 실재가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이 점에서 알베르틴과 함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음악은, 내가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 거기서 새로운 발견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곧 내가 삶에서도 여행에서도 헛되이 찾아 헤매던 그 차이의 발견이었으되, 그럼에도 그 갈망만은, 햇빛 어린 물결을 내 발치에 밀려와 스러지게 하던 이 낭랑한 물결이 내게 안겨 준 것이었다. 이중의 차이였다. 스펙트럼이 우리에게 빛의 조성을 보이듯이, 바그너의 화성(和聲)이, 엘스티르의 색채가, 남을 향한 사랑으로는 우리가 파고들지 못하는 그 다른 사람의 감각의 본질적 자질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 준다. 다음으로, 작품 그 자체 안의 다양성이 있으니, 그것이 실제로 다양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편, 곧 다양한 개성들을 결합함으로써다. 어느 범속한 작곡가라면 종자(從者)를 그린다거나 기사(騎士)를 그린다고 자처하면서 둘 다에게 같은 음악을 부르게 하겠지만, 바그너는 도리어 명칭마다 저마다 다른 실재를 부여하여, 종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하나의 개별적 형상으로서, 복잡하면서도 단순화된 채로, 전쟁하는 소리들의 기껍고 봉건적인 충돌과 더불어, 광대하고 낭랑한 덩어리 속에 제 모습을 새겨 넣는다. 그리하여, 저마다 하나의 사람인 그토록 많은 서로 다른 음악들로 참으로 가득 찬 음악의 그 완결성이 나온다. 하나의 사람, 또는 자연의 한순간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 그것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정서에서 가장 독립적인 것조차 그 외적이고 온전히 명확한 실재를 간직한다. 새의 노래, 사냥꾼의 뿔피리 소리, 목동이 제 피리로 부는 가락은, 지평선을 배경으로 소리의 윤곽을 오려 낸다. 물론 바그너는 이것들을 한데 모으고, 활용하고, 관현악의 전체 속에 끌어들여, 더없이 높은 음악적 이상에 복무하게 해야 했으나, 목수가 제가 깎는 나무의 결을, 그 나무 고유의 본질을 존중하듯, 언제나 그것들의 본래 성질을 존중하면서 그리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관조가 행동 곁에, 한낱 고유명사 이상의 무언가인 인물들 곁에 자리를 차지하는 이 작품들이 그토록 풍요로움에도, 나는 이 작품들이 그럼에도 얼마나 두드러지게 언제나, 비록 경이로운 방식으로일망정, 미완인 채로 있다는 그 성질을 나누어 지니는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19세기의 모든 위대한 작품에 공통된 특징으로, 그 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은 자기 책에 이 성질의 낙인을 찍었으나, 마치 저자이자 비평가를 겸하듯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자기 관조로부터 작품 자체의 바깥에 있고 그보다 우월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끌어냈으며, 그리하여 작품에 소급하여 그것이 지니지 못한 통일성과 위대함을 부여했다. 자기 소설들이 발표된 뒤에 그 안에서 하나의 인간극을 본 사람이나, 잡다한 시편이나 산문을 여러 세기의 전설이라거나 인류의 성서라 이름 붙인 이들을 굳이 따로 살펴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들 가운데 마지막 사람에 대해서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19세기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화신인 나머지, 미슐레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그의 작품 자체보다도 그가 자기 작품을 바라볼 때 취하는 태도에서, 곧 그의 프랑스사프랑스 혁명사가 아니라 그가 자기 책에 붙인 서문들에서 찾아야 한다고. 서문, 다시 말해 책 자체보다 나중에 씌어져 그 책들을 되돌아보는 글들, 그리고 여기에는 흔히 ‘이렇게 말해도 될까?’로 시작하는 어떤 구절들도 군데군데 포함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학자의 신중함이 아니라 음악가의 종지(終止)다. 또 다른 음악가, 이 순간 나를 매혹하던 그 사람, 바그너는, 글쓰기 책상 서랍에서 어떤 정묘한 단편을 꺼내어, 그것을 작곡할 당시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어떤 작품 속에서 소급하여 필연적인 주제인 양 나타나게 하고서, 이어 첫 번째 신화 오페라를, 그리고 두 번째를, 그다음에도 또 다른 것들을 작곡한 끝에, 문득 자신이 4부작을 써냈음을 깨달았을 때, 발자크가 느꼈을 것과 같은 종류의 도취를 얼마간 느꼈으리라. 발자크는 자기 작품들에 낯선 이의 눈과 아버지의 눈을 동시에 던지며, 어떤 작품에서는 라파엘로의 순수함을, 다른 작품에서는 복음서의 소박함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소급하는 빛을 비추며 문득 결심했으니, 같은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는 하나의 연작으로 묶는 편이 더 낫겠다고, 그리하여 그것들을 하나로 잇는 이 행위 속에서 자기 작품에 붓질 한 번을, 마지막이자 가장 숭고한 붓질을 더한 것이다. 나중에 온 통일성, 인위적이지 않은 통일성이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목과 부제의 공들인 도움을 빌려 마치 단 하나의 초월적 구상을 좇아온 듯한 외양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여느 범속한 작가들의 온갖 체계화처럼 먼지가 되어 무너져 내렸으리라. 허구가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나중에 온 것이기에, 그저 이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단편들 사이에 그것이 존재함이 발견되는 열광의 한순간에 태어난 것이기에 더욱 실재하는 통일성이었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했던 통일성, 그러므로 논리적이지 않고 생명력 있는 통일성, 다양성을 금하지도 실행을 얼어붙게 하지도 않은 통일성이었다. 그것은 (이번에는 다만 작품 전체에 스스로를 적용하면서) 따로 작곡된 한 단편처럼, 어떤 영감에서 태어나 주제의 인위적 전개가 요구하지 않은 채 들어와 나머지 전체의 필수적 일부를 이루는 그 단편처럼 떠오른다. 이졸데의 귀환에 앞서는 그 거대한 관현악 악장 앞에서, 목동의 피리가 부는 반쯤 잊힌 가락을 스스로에게 끌어당긴 것은 바로 작품 자체다. 그리고 배가 다가올 때 부풀어 오르는 관현악이 피리의 그 음들을 붙잡아 변형하고, 제 도취로 물들이고, 그 리듬을 깨뜨리고, 그 음색을 맑게 하고, 그 움직임을 재촉하고, 그 악기 편성을 몇 곱절로 불리듯, 바그너 자신도 자기 기억 속에서 목동의 가락을 발견하여 그것을 작품 속에 편입하고 온전한 의미의 풍요로움을 부여했을 때, 필시 기쁨으로 가득 찼으리라. 게다가 이 기쁨은 결코 그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의 안에서는, 시인의 우수가 아무리 깊어도, 그것은 장인의 환희로 위로되고 능가되며, 다시 말해 아, 너무도 이르게 파괴되고 만다. 그러나 그때 나는, 방금 뱅퇴유의 악절과 바그너의 악절 사이에서 알아차린 유사성에 못지않게, 이 불카누스와도 같은 장인적 솜씨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근원적 독창성이라는, 인간을 넘어선 실재의 반영이라는 허깨비 같은 외양을 부여한 것이, 실은 부지런한 노고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삶보다 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나로서는 아쉬워할 이유가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었다. 나는 트리스탄을 계속 연주했다. 소리의 벽으로 바그너와 갈라져 있으면서도, 나는 그가 환희에 젖어 자기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나를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지크프리트의 불멸하도록 젊은 웃음과 망치질 소리가 그만큼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안에서는 그 악구들이 한층 경이롭게 두들겨졌으니, 장인의 기교적 숙련은 다만 그것들이 대지를 떠나기 쉽게 만들어 줄 따름이었고, 그 악구들은 로엔그린의 백조가 아니라, 발베크에서 제 힘을 수직의 운동으로 바꾸어 바다 위로 떠올라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내가 보았던 저 비행기와 닮은 새들이었다. 어쩌면, 가장 높이 솟아 가장 빠르게 나는 새들이 더 튼튼한 날개를 지니듯, 무한을 탐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질적인 탈것 하나가, ‘신비’라는 이름이 붙은 이 120마력짜리 기계 하나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리 높이 난다 한들, 엔진의 압도적인 굉음 탓에 공간의 침묵을 누리는 것이 어느 정도 가로막히고 마는 것이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