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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알베르틴과의 생활 (18)

5권 제1부 · 제1장: 알베르틴과의 생활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실은 어느 정도까지는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야누스와 같아서, 그 사람이 우리를 떠나면 우리가 좋아하는 얼굴을, 그 사람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대임을 우리가 알면 혐오스러운 얼굴을 우리에게 내민다. 알베르틴의 경우, 그녀와 계속 함께 지내리라는 전망은 이 이야기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게 고통스러웠다. 다른 사람의 삶이 우리 손에 쥔 폭탄처럼 우리 자신의 삶에 매여 있어서, 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그것을 떼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견줄 만한 것으로, 미치광이와 가까이 어울려 살 때 겪게 되는 감정들을, 곧 그 오르내림과 위험과 불안을, 그리고 앞으로 언젠가 자기로서는 해명할 수 없게 될 거짓되면서도 그럴듯한 것들이 남에게 믿기게 되는 광경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들어 보자. 이를테면 나는 샤를뤼스 가 모렐과 함께 사는 것을 가엾게 여겼다 (그 순간 그날 오후의 장면에 대한 기억이 내 왼쪽 가슴을 다른 쪽보다 더 무겁게 느끼게 했다). 그 둘 사이에 있었을 수도, 없었을 수도 있는 관계는 제쳐 두더라도, 샤를뤼스 는 처음에는 모렐이 미쳤다는 것을 알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모렐의 아름다움과 어리석음과 오만함은 남작이 그토록 깊이 파고드는 것을 막았을 터인데, 마침내 우울의 나날이 찾아와 모렐이 아무런 해명도 내놓지 못한 채 샤를뤼스 에게 제 슬픔의 책임을 씌우고, 거짓되지만 지극히 교묘한 논리를 빌려 그가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다고 몰아세우며, 자포자기의 결심으로 그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 내내 제 눈앞의 이익에 대한 더없이 약삭빠른 계산만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알베르틴은 미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낮에 어떤 죽음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를 몹시 슬프게 했으니, 바로 베르고트의 죽음이었다. 그가 오래전부터 앓아 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물론 그가 애초에 앓았던, 자연스러운 그 병으로써는 아니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아주 짧은 병 말고는 좀처럼 안겨 주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의학은 그 병을 길게 끄는 기술을 제 것으로 삼아 버렸다. 약과, 그 약이 마련해 주는 잠깐의 차도와, 그 약을 일시 끊음으로써 도지는 재발이 어우러져 하나의 가짜 병을 이루는데, 환자는 그 병에 어찌나 길들여지는지 결국 그것을 영구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니, 아이들이 백일해가 나은 지 한참 뒤에도 계속 기침 발작에 내맡겨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 약은 효험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복용량은 늘어나며, 약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되지만, 그 오래 끄는 병 탓에 도리어 해를 끼치기 시작한다. 자연이었다면 그 병에 그토록 긴 수명을 내주지 않았으리라. 의학이, 사람을 침상에 붙들어 두고,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어떤 약을 계속 쓰게 만드는 데 있어 자연에 거의 필적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기적이다. 그 순간부터 인위적으로 접붙인 병은 뿌리를 내려, 부차적이지만 진짜인 병이 되고 마니, 다만 이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연의 병은 낫지만, 의학이 만들어 낸 병은 결코 낫지 않는데, 의학이 그것을 고칠 비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부터 베르고트는 문밖으로 나가기를 그만두었다. 어쨌든 그는 사교계를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나, 있어도 단 하루뿐이었으니, 그것을 그가 다른 모든 것을 경멸하듯, 그리고 그만의 방식으로, 곧 어떤 것을 손에 닿지 않는다고 해서가 아니라 손에 넣자마자 경멸하는 그 방식으로 경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찌나 검소하게 살았던지 아무도 그가 얼마나 부유한지 짐작하지 못했고, 설령 알았다 한들 여전히 잘못 짚었을 터이니, 그를 구두쇠로 여겼겠지만, 실은 그보다 더 후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 여자들에게, 아니 차라리 계집아이들이라 해야 옳을 이들에게 후했는데, 그들은 그토록 하찮은 것을 주고 그토록 많은 것을 받는 데 부끄러워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신을 변명했으니, 사랑의 감정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토록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강하다. 조금이라도 살에 깊이 뿌리내린 쾌락은 문학 작업에 도움이 되니, 그것이 다른 모든 쾌락을, 이를테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교계의 쾌락을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이 사랑이 환멸로 이어진다 해도, 그렇게 함으로써나마 그것은 적어도, 그러지 않았다면 고여 썩을 위험에 놓였을 영혼의 표면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므로 욕망은 작가에게 값어치가 없지 않으니, 먼저 그를 동료 인간들에게서, 또 그들의 기준에 순응하는 데에서 떼어 놓고, 그다음에는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마비되기 쉬운 정신의 기계에 얼마간의 움직임을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해지는 데는 이르지 못하지만, 우리가 행복해지지 못하게 막는 이유들을, 실망이 열어 준 이 틈이 아니었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그 이유들을 관찰하게는 된다. 꿈은 현실로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어쩌면 욕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꿈을 하나도 짓지 않았을 터인데, 꿈을 짓는 것은 그것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그 좌절에서 배우기에 우리에게 쓸모가 있다. 그리하여 베르고트는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계집아이들에게 억만장자가 쓸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지만, 그들이 내게 주는 쾌락이나 실망이 나로 하여금 돈을 벌어다 주는 책을 쓰게 한다.” 경제적으로 이 논리는 터무니없었지만, 필시 그는 이렇게 황금을 애무로, 애무를 황금으로 바꾸는 데서 어떤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무렵, 지친 노년이 얼마나 휴식을 사랑하는지 보았다. 그런데 사교계에는 대화밖에 없다. 그것은 어리석을지언정, 물음과 대답에 지나지 않는 여자들을 지워 버리는 능력이 있다. 사교계에서 벗어나면 여자들은 다시금, 지친 노인에게 그토록 안식이 되는 것, 곧 관조의 대상이 된다. 어쨌거나 이제는 그런 종류의 무엇이 문제 될 계제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베르고트는 결코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방 안에서 한 시간쯤 자리에서 일어나 있을 때면, 숄이며 격자무늬 무릎덮개며, 사람이 매서운 추위에 몸을 드러내거나 기차에 오르기 전에 두르는 온갖 것에 파묻히곤 했다. 그는 자기 성역에 발을 들이도록 허락한 몇 안 되는 벗들에게 미안해하며, 자기 타탄 무늬 무릎덮개와 여행용 담요를 가리키면서 유쾌하게 말하곤 했다. “여보게, 결국 인생이란, 아낙사고라스가 말했듯이, 하나의 여행이라네.” 이렇게 그는 점점 더 차가워져 갔으니, 머지않아 지구에서 열이, 이어 생명 그 자체가 서서히 물러갈 그 더 큰 별의 예언적 형상을 내보이는 하나의 작은 행성이었다. 그때가 되면 부활은 끝나 있을 것이니, 훗날의 세대들 가운데서 인간의 작품이 빛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류의 동물들이 밀려드는 냉기에 더 오래 버텨 낸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더는 인간이 남지 않았을 때, 그리고 베르고트의 명성이 그때까지 이어져 왔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명성은 별안간 영원히 꺼져 버릴 것이다. 그를 읽을 이들은 그 마지막 동물들이 아닐 터이니, 그들이 오순절의 사도들처럼, 배우지도 않고서 온갖 인류 종족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그럴 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에 앞선 몇 달 동안 베르고트는 불면에 시달렸고, 더 나쁘게는, 어쩌다 잠이 들 때면, 잠에서 깨고 나면 다시 잠들기를 꺼리게 만드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오래도록 꿈을, 심지어 나쁜 꿈까지도 사랑해 온 사람이었으니, 꿈은, 그리고 꿈이 우리가 깨어 있을 때 눈앞에 두는 현실에 맞세우는 그 모순은, 그 덕분에, 깨어나기 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깨어나는 순간에, 우리가 잤다는 깊은 실감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고트의 악몽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악몽을 말할 때, 예전에는 자기 머릿속을 스쳐 가는 불쾌한 것들을 뜻했다. 근래에는, 마치 자기 바깥 어딘가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어떤 사악한 여자가 젖은 천을 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문질러 대며 그를 잠에서 억지로 깨우는 것을, 넓적다리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그리고 (베르고트가 잠결에 마차를 서투르게 몬다고 중얼거렸다는 이유로) 미쳐 날뛰는 삯마차꾼이 격분하여 작가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갉아 대는 것을 보곤 했다. 마침내, 그의 잠 속이 충분히 어두워지자마자, 자연은 그를 데려갈 뇌졸중의 일종의 예행연습을 마련했다. 베르고트는 마차를 타고 스완의 새 집 현관 아래에 이르러 내리려 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그를 자리에 붙박아 놓았고, 문지기가 그를 마차에서 내려 주려고 다가왔지만, 그는 앉은 채로 일어설 수, 다리를 펼 수 없었다. 그는 곁에 있던 돌기둥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 안에서 몸을 세울 만한 충분한 버팀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의사들을 찾았는데, 그들은 그에게 불려 온 것을 우쭐해하며, 그가 쉼 없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미덕에서 (그가 무언가를 쓴 지 이미 이십 년이 지났건만), 그의 과로에서 그의 병의 원인을 보았다. 그들은 그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를 읽지 말라고 (그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햇빛을 더 쬐라고 (그가 그나마 몇 해의 견줄 만한 건강을 누린 것은 오로지 집 안에서의 엄격한 칩거 덕분이었건만), 자양분을 섭취하라고 (그것은 그를 더 야위게 했고, 그의 악몽 말고는 아무것도 자라게 하지 못했다) 권했다. 그의 의사들 가운데 하나는 반박의 정신을 타고난 자여서, 베르고트가 다른 의사들이 없을 때 그를 찾아,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다른 의사들이 권한 것을 제 생각인 양 그에게 넌지시 내놓을 때마다, 이 의사는 베르고트가 자기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처방받으려 든다고 여겨 즉각 그것을 금했는데, 그 이유란 흔히 임기응변으로 어찌나 급히 지어낸 것인지, 베르고트가 실질적인 반론을 제기하면 이 따지기 좋아하는 의사는 같은 문장 안에서 스스로 모순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이유를 들어 애초의 금지를 되풀이했다. 베르고트는 이 의사들 가운데 처음의 한 사람에게 다시 갔는데, 그는 자기 영리함을 뽐내는 자로, 특히 문단의 이름난 인사 앞에서 더욱 그러했고, 만일 베르고트가 “그런데 아무래도 기억하기로는, 물론 오래전 일이지만, X박사가 그것이 제 콩팥과 뇌를 충혈시킬 수 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라고 넌지시 말하면, 비웃듯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치켜들고 이렇게 선언하곤 했다. “나는 쓰라고 했지, 남용하라고는 하지 않았소. 물론 어떤 약이든 지나치게 쓰면 양날의 칼이 되는 법이지요.” 인간의 몸에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에 대한 어떤 본능이, 마음속에 우리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본능이 있듯이 있으니, 그것은 의학 박사나 신학 박사의 그 어떤 승인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본능이다. 우리는 냉수욕이 우리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할지언정 그것을 권해 줄 의사는 언제든 찾아낼 수 있다. 이 의사들 각각에게서 베르고트는, 제 나름의 지혜로 여러 해 동안 스스로에게 금해 왔던 무언가를 얻어 냈다. 몇 주 뒤, 그의 오랜 병증이 다시 나타났고, 새로운 병증은 더 나빠졌다. 끊임없는 고통에, 게다가 짧은 악몽의 발작으로나 겨우 끊기는 불면까지 더해져 미칠 지경이 된 베르고트는 더는 의사를 부르지 않고, 여러 가지 마취제를, 효과는 보았으나 지나칠 만큼 시험해 보면서, 저마다에 딸린 설명서를 희망에 차 읽었는데, 그 설명서란 잠의 필요성을 내세우면서도 잠을 부르는 모든 조제약이 (그 설명서가 감싸고 있는 병 속에 든 것, 곧 결코 아무런 독성 효과도 내지 않는다는 그것만은 빼고) 독성을 지녔으며, 그리하여 병보다 약이 더 나쁘다는 것을 넌지시 내비쳤다. 베르고트는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험해 보았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과는 다른 계통에 속했으니, 이를테면 아밀과 에틸의 조제약이었다. 구성이 전혀 다른 새 약을 삼킬 때면, 우리는 언제나 미지의 것에 대한 감미로운 기대를 품는다. 우리 심장은 첫 밀회에서처럼 두근거린다. 이 새로 온 자는 우리를 어떤 미지의 잠과 꿈의 형태로 데려갈 것인가? 그는 이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생각을 좌우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잠들게 될 것인가? 그리고 일단 잠들고 나면, 그는 우리를 어떤 기이한 길들을 지나, 어떤 봉우리까지, 어떤 헤아릴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데려갈 것인가? 이 여행에서 우리는 감각들의 어떤 새로운 무리와 만나게 될 것인가? 그것은 마침내 우리를 병으로 데려갈 것인가? 더없는 행복으로? 죽음으로? 베르고트의 죽음은 하룻밤 사이에 그에게 찾아왔으니, 그가 이렇게 이 벗들 가운데 하나에게 (벗이라고? 아니, 차라리 적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내맡겼을 때, 그 벗이 그에게는 너무나 강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의 정황은 다음과 같았다. 결코 위중하지 않은 요독증 발작으로 그는 안정을 취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비평가가 어딘가에,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거리에서 (네덜란드 회화 전시를 위해 헤이그 미술관에서 대여해 온 그림으로, 그가 몹시 사랑하여 속속들이 안다고 여기던 작품이었다) 작은 노란 담벼락 한 조각이 (그로서는 기억나지 않던 것이었다) 어찌나 잘 그려졌던지 그것만 따로 떼어 보면 그 자체로 넉넉한 아름다움을 지닌, 어떤 값을 매길 수 없는 중국 예술품 같다고 써 놓은 터라, 베르고트는 감자를 몇 알 먹고 집을 나서 전시회로 갔다. 그가 올라야 했던 첫 몇 계단에서 현기증이 그를 덮쳤다. 그는 여러 그림 앞을 지나면서, 그토록 인위적인 화파의 뻣뻣함과 부질없음에 충격을 받았으니, 그 어느 것도 베네치아 궁전이나 바닷가 예사로운 집의 신선한 공기와 햇빛에는 견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페르메이르 앞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그는 더 강렬하고, 그가 아는 다른 무엇과도 더 다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그림에서, 그 비평가의 글 덕분에, 그는 처음으로 파란색의 작은 인물 몇을, 바탕이 분홍빛인 것을, 그리고 끝내 그 조그마한 노란 담벼락 조각의 값진 실체를 알아보았다. 그의 현기증은 심해졌다. 그는, 잡으려 애쓰는 노란 나비에 눈을 붙박은 아이처럼, 그 값진 담벼락의 작은 조각에 눈을 붙박았다. “나는 저렇게 썼어야 했다.” 그가 말했다. “내 마지막 책들은 너무 메말랐다, 나는 그것들에 물감을 여러 겹 덧발라, 이 작은 노란 담벼락 조각처럼 내 언어를 그 자체로 정묘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자기 상태의 위중함을 의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천상의 저울, 그 한쪽 접시에는 그의 목숨이, 다른 쪽에는 그토록 아름답게 노랗게 그려진 그 작은 담벼락 조각이 얹혀 있는 것이 그에게 보였다. 그는 자기가 후자를 위해 전자를 경솔하게 내주고 말았음을 느꼈다. “그래도.” 그는 속으로 말했다. “석간신문에 이 전시회의 ‘화젯거리’를 제공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노란 담벼락의 작은 조각, 비스듬한 지붕이 달린, 노란 담벼락의 작은 조각.” 그러다 그는 둥근 긴 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이내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생각을 멈추고, 타고난 낙천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저 그 감자 때문에 체한 것뿐이야, 제대로 익지 않았던 거지, 아무것도 아니야.” 새로운 발작이 그를 쓰러뜨렸다. 관람객들과 안내원들이 그를 도우러 달려오는 가운데, 그는 긴 의자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죽어 있었다. 영원히 죽은 것일까? 누가 말할 수 있으랴? 분명 우리의 심령술 실험은 종교의 교리 이상으로 영혼이 죽음 뒤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삶에서는 모든 것이, 마치 우리가 전생에서 맺은 의무의 짐을 지고 이 삶에 들어온 듯이 짜여 있다는 것뿐이다. 이 땅의 삶의 조건 자체에는,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고, 까다로울 만큼 세심하고, 예의를 지키기까지 해야 한다고 여기게 만들 그 어떤 이유도 깃들어 있지 않으며, 재능 있는 예술가로 하여금, 그로 인해 불러일으켜진 감탄이 벌레들에게 파먹힐 제 육신에는 하찮을 뿐인 어떤 작품을 스무 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여기게 만들 그 어떤 이유도 깃들어 있지 않으니, 그 작품이란, 영원히 무명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페르메이르라는 이름으로나 겨우 알아볼 수 있는 한 예술가가 그토록 많은 지식과 솜씨로 그려 낸 저 노란 담벼락 조각과 같은 것이다. 현재의 우리 삶 속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 모든 의무는, 친절과 세심함과 자기희생 위에 세워진 다른 세계에,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듯이 보이는데, 우리는 이 세계에 태어나기 위해 그 다른 세계를 떠나왔고, 어쩌면 다시 그 다른 세계로 돌아가, 우리가 그 계율을 마음속에 지녔던 까닭에, 누구의 손이 그것을 거기 새겨 넣었는지도 모른 채 따라 왔던 그 미지의 법칙들의 지배 아래 다시 한번 살게 될지도 모른다. 지성의 깊은 작품이라면 무엇이나 우리를 그 법칙들에 더 가까이 데려가며, 그 법칙들은 오직 어리석은 자들에게만, 게다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베르고트가 온전히, 영영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결코 그럴 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를 묻었지만, 애도의 밤이 새도록, 불 밝힌 진열창마다 세 권씩 짝지어 놓인 그의 책들은 날개를 활짝 편 천사들처럼 밤을 지켰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를 위한 그의 부활의 상징으로 보였다.

앞서 말했듯, 나는 그날 베르고트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신문들의 부주의함에 놀랐으니, 그것들은 저마다 똑같은 기사를 그대로 옮겨 실으며 그가 그 전날 죽었다고 적어 놓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날 알베르틴이 그를 만났다고, 바로 그날 저녁 내게 알렸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녀는 집에 조금 늦게 돌아왔으니,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까닭이다. 그녀는 필시 그가 말을 건넨 마지막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를 만나지 않게 된 나를 통해 그를 알았지만, 그와 알고 지내기를 몹시 바랐던 터라, 나는 한 해 전에 그 노대가에게 편지를 써서 그녀를 데려가 뵈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청을 들어주었지만, 내가 오로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자기를 찾는다는 데, 그것이 그 자신에 대한 나의 무관심의 증거라는 데 다소 서운해했던 듯싶다. 이런 경우는 흔하다. 때로는 우리가 그와 다시 이야기 나누는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삼자를 위해 만나 달라고 간청하는 남자나 여자가 어찌나 완강히 거절하는지, 우리가 돌보는 사람은 우리가 가지지도 않은 영향력을 뽐냈다고 결론짓는다. 더 흔하게는, 천재적인 남자나 소문난 미인이 승낙은 하되, 제 영광 속에서 모욕당하고 제 애정에 상처받아, 그 뒤로 우리에게는 줄어들고 서글프고 거의 경멸에 가까운 애착밖에 느끼지 않는다. 나는 이 일이 있은 지 한참 뒤에야, 내가 신문들에게 부정확하다는 누명을 씌웠음을 알게 되었으니, 문제의 그날 알베르틴은 베르고트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이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으니, 그녀가 어찌나 자연스럽게 그 일을 내게 이야기했던지, 그녀가 소박하게 거짓말하는 그 사랑스러운 재주를 내가 알아차린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 그녀가 털어놓는 것들은 어찌나 정식 증거의 성격을, 곧 우리가 직접 보는 것, 의심할 수 없는 출처에서 얻는 것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지, 그녀는 그렇게 자기 삶의 빈자리에 또 다른 삶의 삽화들을 뿌려 놓았고, 그 거짓됨을 그때 나는 의심하지 못했으며 훨씬 뒤에야 비로소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내가 “털어놓는다”는 말을 쓴 데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다. 때때로 어떤 우연한 만남이 내게 질투 어린 의심을 안겼는데, 그 의심 속에서는 그녀 곁에, 과거에, 아니 슬프게도 미래에, 또 다른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사실을 확신하는 척하려고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 알베르틴은 이렇게 말했다. “네, 만났어요, 일주일 전에, 바로 집 앞에서요. 그 여자가 말을 걸어오니 예의상 대꾸를 해야 했죠. 조금 같이 걸었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거예요.” 그런데 알베르틴은 이 사람을 만나지조차 않았으니, 그 사람이 지난 열 달 동안 파리에 있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내 애인은 전면적인 부인은 도무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으리라 느꼈다. 그리하여 이 상상 속의 짧은 만남이 생겨났으니, 어찌나 소박하게 이야기되었던지 나는 그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녀와 조금 같이 걷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만일 내가 그 순간 거리에 있었더라면, 내 감각의 증거가 어쩌면 그 여자가 알베르틴과 함께 있지 않았다고 내게 알려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는 사람들의 말이 튼튼한 고리를 끼워 넣는 그러한 추론의 사슬 가운데 하나에 의해서였지, 내 감각의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이 감각의 증거를 끌어대려면 나는 바로 그 순간 거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나는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가정이 그럴 법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 저녁에 알베르틴이 (내가 거기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그 여자와 조금 같이 걸었다고 내게 말하게 될 바로 그 시각에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나는 알베르틴이 거짓말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인들 그것이 과연 확실할까? 어떤 종교적인 어스름이 내 마음을 흐려 놓았을 터이고, 나는 그녀를 혼자 보았는지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며, 어떤 착시로 내가 그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이해해 보려 애쓰지도 거의 않은 채, 내가 잘못 본 것임을 깨닫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니, 별들의 우주가, 다른 사람들의,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실제 행동만큼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기 때문인데, 그 행동들은 저를 지키려 지어낸 꾸며 낸 이야기들로 우리의 의심에 맞서 단단히 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몇 해고 잇달아, 우리의 무기력한 사랑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어느 낯선 나라에, 실은 존재한 적도 없는 누이나 형제나 올케가 있다고 믿게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감각이 주는 증거 역시 정신의 한 작용이며, 거기서는 확신이 그 증거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프랑수아즈의 청각이 실제로 발음된 낱말이 아니라 그녀가 옳다고 여기는 형태를 그녀에게 전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더 나은 발음에 담긴 교정을 그녀가 끝내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아 왔다. 우리 집 집사도 같은 틀에서 빚어진 사람이었다. 샤를뤼스 남작은 이 무렵 워낙 옷차림을 자주 바꾸는 사람이라 아주 밝은 색 바지를 즐겨 입었는데, 그 바지는 멀찍이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집사는 pissotière라는 낱말(랑뷔토 가 게르망트 공작이 그것을 랑뷔토식 변소칸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 그토록 언짢아했던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낱말)이 실은 pistière라고 여겼던 터라, 그 낱말이 그의 귀에 그렇게 자주 발음되었건만 평생에 단 한 번도 누군가가 pissotière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류는 믿음보다 더 완고하여, 제가 믿는 바의 근거를 따져 보지 않는다. 집사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샤를뤼스 남작님이 pistière에 저렇게 오래 서 계신 걸 보면 필시 무슨 병에 걸리신 게 틀림없어. 그 연세에 계집애들 꽁무니나 쫓아다니면 저리 되는 거지. 그 양반이 어떤 사람인지는 바지만 봐도 알 수 있어. 오늘 아침엔 마님이 뇌이로 심부름을 보내셨는데, 부르고뉴 거리의 pistière를 지나다가 샤를뤼스 남작님이 들어가시는 걸 봤단 말이야. 뇌이에서 꼬박 한 시간이나 지나 돌아오는 길에도, 그 노란 바지가 똑같은 pistière, 똑같은 자리, 남들 눈에 안 띄려고 늘 들어가시는 한가운데 칸에 그대로 있는 걸 봤다니까.” 게르망트 부인의 어느 조카딸보다 더 아름답고 더 기품 있고 더 젊어 보이는 사람을 나는 달리 떠올릴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이따금 저녁을 들던 어느 식당의 문지기가 그녀가 지나갈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저 늙은 갈보 좀 보게, 저 꼴이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여든은 됐을걸.” 나이에 관한 한, 나는 그가 정말로 그렇게 여겨 한 말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둘레에 모여 있던 보이들은, 그녀가 근처에 사는 매력적인 이모할머니들, 곧 페장사크와 벨르리 부인들을 찾아가려고 호텔 앞을 지날 때마다 킬킬거렸는데, 그 젊은 미인의 얼굴에서, 문지기가 진담으로든 농담으로든 그 “늙은 갈보”에게 씌워 준 여든 살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호텔의 두 여자 회계원 가운데 하나보다 더 기품 있다고 그들에게 말했더라면 그들은 자지러지게 웃었으리라. 습진에 뒤덮이고 우스꽝스러울 만큼 뚱뚱한 그 회계원이야말로 그들 눈에는 미인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성적 욕망만이 그들의 오류가 자리 잡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욕망이 이른바 늙은 갈보가 지나가는 순간에 작용하여, 보이들이 문득 그 젊은 여신을 탐내기 시작했더라면 말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필경 사회적 성질의 이유로, 그 욕망은 발동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에는 따져 볼 여지가 넉넉히 있다. 우주는 우리 모두에게 참이면서도 저마다에게 서로 다르다. 만일 이야기의 연속성을 지키기 위해 하찮은 이유들에만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진지한 이유들이, 내가 침대에 누운 채 세상이 어떤 날씨로, 또 어떤 날씨로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 이 책 첫머리 몇 쪽이 얼마나 거짓되고 허술한지를 우리에게 밝히도록 허락했으리라. 그렇다, 나는 사실을 깎아내고 거짓말쟁이가 되기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깨어나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아니라 수백만의 우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눈과 두뇌의 수와 거의 맞먹는 수효의 우주다.

알베르틴 이야기로 돌아가면, 생기 넘치고 삶과 똑같은 빛깔로 물든 거짓말을 지어내는 그 행복한 재주를 그녀만큼 넉넉히 타고난 여자를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그녀의 친구 하나를 빼면 그렇다. 그 친구 역시 내 꽃핀 소녀들 가운데 하나로, 알베르틴처럼 장밋빛으로 발그레했으나, 한쪽은 옴폭 들어가고 또 한쪽은 도로 볼록 솟은 그 고르지 않은 옆얼굴이,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길고 구불구불한 옴폭한 굴곡을 지닌 어떤 분홍 꽃송이들과 꼭 닮아 있었다. 이 소녀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간으로 치면 알베르틴보다 나았으니, 내 연인에게는 잦았던 그 괴로운 순간들, 그 격한 빈정거림을 결코 끼워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알베르틴도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이야기를 지어낼 때면 매력적이었다고 나는 말한 바 있다. 그럴 때면 그녀가 말하는 그 대상이, 비록 상상 속의 것일지언정, 마치 자기 말을 예증하는 그림처럼 그녀 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알베르틴을 이끈 것은 오직 그럴듯함일 뿐, 나를 질투하게 만들려는 욕심은 결코 아니었다. 알베르틴은, 어쩌면 아무런 실리적 속셈 없이도, 사람들이 자기에게 상냥히 대해 주기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틀어 질투가 어떻게 사랑을 격화시키는지를 내가 여러 차례 보여 주었고 또 앞으로도 보여 주겠지만,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의 관점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이가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설령 이별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신이라 짐작되는 일에 정중한 말로 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등을 돌리거나, 떠나지 않고서도 스스로에게 냉담한 가면을 쓰라고 명할 것이다. 그러니 그의 연인이 그를 그토록 모질게 괴롭히는 것은 오롯이 그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그녀가 재치 있는 한마디와 사랑 어린 애무로, 그가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속으로 시달리던 의혹을 걷어 준다면, 물론 그 사랑하는 이는 질투가 몰아가는 그 절망적인 사랑의 격증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한순간에 괴로움을 멈추고, 행복하고 다정하며, 폭풍이 지나간 뒤 비가 그치고 키 큰 마로니에에서 아직도 긴 간격을 두고 뚝뚝 떨어지는, 다시 나타난 해가 벌써 빛깔로 물들여 놓은 그 매달린 물방울들이 튀는 소리가 겨우 들릴 뿐인 그때처럼 긴장이 풀린 채, 자기를 낫게 해 준 그녀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알베르틴은 내가 그녀의 다정함에 보답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내가 그 진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 이야기들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고백들을 지어내곤 했던 것이리라. 그 가운데 하나가 이미 죽은 베르고트를 만났다는 이야기였다. 그 전까지 나는, 이를테면 발베크에서 프랑수아즈가 내게 일러바치곤 하던 것들 말고는 알베르틴의 거짓말을 하나도 알지 못했는데, 그것들은 나를 그토록 아프게 했으면서도 이 책장에서는 빼놓았다. “아가씨가 오기 싫어서 저한테 이러시더군요. ‘나리께 나를 못 찾았다고, 내가 나가고 없더라고 여쭤 줄 수 없겠어요?’” 그러나 프랑수아즈가 나를 사랑하던 식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우리의 “아랫사람들”은,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