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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어서) ⑤

5권 제2부 · 제2장 (이어서)

그렇지만 샤를뤼스 를 위해 공정하게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베르뒤랭 부인을 까맣게 잊고, 자기가 초대한 “자기 세계” 사람들이 그녀를 낯 뜨거울 만큼 무시하도록 내버려 두기는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이 “교향악 연주” 도중까지 마님에게 보이던 그 무례를 드러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렐은 이미 단상에 올라 있었고 연주자들도 모여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화 소리가, 웃음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걸 알아들으려면 입문자가 되어야 한다는군요.” 따위의 말들이 들려왔다. 즉시 샤를뤼스 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아까 베르뒤랭 부인의 문을 향해 굽실굽실 기어가던 그 몸과는 다른 몸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꼿꼿이 몸을 세우고는, 예언자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제는 웃을 때가 아님을 알리는 진지함으로 좌중을 둘러보았고, 그러자 이렇게 공공연히 질책당한 한 사람 이상의 부인이, 온 반 앞에서 선생에게 꾸중 듣는 여학생처럼, 뺨에 순식간에 홍조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보기에 샤를뤼스 의 태도는, 고귀하기는 했으나 어딘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어느 순간에는 이글거리는 눈길로 손님들을 짓뭉개는가 하면, 또 어느 순간에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경건한 침묵과 온갖 세속적 관심으로부터의 초연함을 마치 편람으로 일러 주듯 그들에게 알리려고, 흰 장갑을 낀 두 손을 자신의 준수한 이마로 들어 올리며, 그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로서 근엄함, 이미 거의 황홀경에 다다른 근엄함을 몸소 내보였고, 이제는 고귀한 예술의 시간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몰지각한 지각생들의 인사에는 응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최면에 걸린 듯했다. 누구도 감히 소리를 내거나 의자를 움직이지 못했다. 팔라메드의 위세 덕분에, 음악에 대한 존중이 배타적인 만큼이나 무례한 무리에게 순식간에 주입되었던 것이다.

작은 단상에 모렐과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나는 연주회가 뱅퇴유가 아닌 다른 작곡가들의 곡으로 시작되려나 보다 여겼다. 나는 그의 작품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뒤랭 부인은 따로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창백하고 살짝 발그레한 이마의 두 반구가 웅장하게 굽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져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18세기 초상화를 흉내 낸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겸양 때문에 제 상태를 드러내지 못하는 열병 환자가 서늘함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녀는 초연한 자태로, 음악 의식을 주재하는 여신, 바그너주의와 편두통의 수호성인, 이 온갖 따분한 자들 한복판에서 천재의 주술로 불려 나온 일종의 거의 비극적인 노른과도 같았고, 이들 앞에서 그녀는 그들보다 자기가 더 잘 아는 곡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를 여느 때보다 더 경멸했다. 연주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그들이 무엇을 연주하는지 알지 못했고, 낯선 고장에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곳을 어디쯤으로 놓아야 할까? 나는 어느 작곡가의 나라에 들어선 것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었으나 물어볼 만한 사람이 곁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아무리 읽어도 물리지 않던 저 천일야화 속의 한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 이야기에서는 막막한 순간마다 정령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나,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되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공의 눈에만은 보이며, 그가 알고자 하는 바를 그에게 고스란히 일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나는 꼭 그런 마법 같은 환영의 은총을 입었다. 우리가 낯선 곳이라 여기지만 실은 새로운 방향에서 다가간 어떤 지역에서, 한 길을 벗어나 돌아서다가 문득 다른 길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 길의 구석구석이 눈에 익되 다만 그쪽 끝에서 들어서 본 적이 없을 뿐일 때, 우리는 대뜸 이렇게 되뇌게 된다. “아니, 이건 우리 친구 X 씨 댁 정원 문으로 이어지는 그 오솔길이잖아, 곧 다다르겠군.” 그리고 과연 그 문 앞에는 그 집 딸이 나와 지나가는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게, 별안간 나는 나에게 생소한 이 음악 한복판에서 뱅퇴유 소나타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떤 처녀보다도 경이롭게, 은빛에 감싸이고 은빛으로 채비를 갖춘 채 눈부신 음향의 효과로 반짝이며 비단 스카프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작은 악절이, 이 새로운 모습으로도 알아볼 수 있게, 내게로 다가왔다. 그것을 되찾은 기쁨은, 그것이 내게 말을 건네며 취한 어조, 그토록 정답게 낯익고 그토록 설득력 있으며 그토록 소박하면서도, 그것이 눈부시게 빛나던 어른거리는 아름다움을 조금도 흐리지 않는 그 어조 덕분에 한결 커졌다. 그러나 이번에 그것의 의도는 그저 내게 길을 가리켜 주려는 것이었으니, 그 길은 소나타의 길이 아니었다. 이것은 뱅퇴유의 미발표 작품으로, 그는 이 대목에서 마땅히 동시에 읽고 있어야 할 프로그램의 한 문장으로 설명되는 어떤 암시를 통해, 작은 악절을 잠깐 다시 나타나게 하며 그저 유희를 즐겼을 뿐이다. 그것은 그렇게 불려 나오기가 무섭게 사라졌고, 나는 다시금 알 수 없는 세계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알았고, 뒤이어 나온 모든 것이 내 앎을 확인해 주었으니, 이 세계는 뱅퇴유가 창조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내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그런 세계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속속들이 탐사된 우주였던 소나타에 싫증이 나서,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되 다른 우주들을 상상해 보려 했을 때, 나는 그저 저 시인들이 하는 짓, 곧 자기네 인공 낙원을 이미 지상에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본뜬 초원과 꽃과 시내로 채우는 짓을 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 앞에 있는 것은, 소나타를 아직 몰랐더라면 그것이 내게 주었을 만큼이나 예리한 기쁨을 느끼게 했고, 따라서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우면서도 다른 것이었다. 소나타가 백합 핀 초원의 새벽을 열어젖히며 그 가녀린 흰빛을 갈라, 인동덩굴과 흰 제라늄이 어우러진 시골 정자의 연약하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뒤섞임 위에 자신을 매달아 두었던 데 반해, 이 새로운 걸작은 바다의 표면처럼 이어지고 평평한 표면 위에서, 이미 검붉은 하늘 아래 폭풍우 치는 아침 한복판에서, 으스스한 침묵 속, 무한한 허공 속에서 시작되었고, 이 미지의 우주는 내 앞에서 차츰 스스로를 지어 올리기 위해 장밋빛 새벽을 향해 침묵과 밤으로부터 이끌려 나왔다. 부드럽고 소박하고 창백한 소나타에는 그토록 없던 이 새로운 붉은빛이, 새벽이 그러하듯 온 하늘을 신비로운 희망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이미 하나의 노래가 대기를 떨게 하고 있었으니, 일곱 음으로 된 노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여태껏 상상해 본 그 무엇, 내가 상상해 낼 수 있었을 그 무엇과도 더없이 낯설고 더없이 다른 노래였고, 이루 말할 수 없으면서도 꿰뚫는 듯했으며, 소나타에서처럼 비둘기의 구구거림이 아니라 대기를 찢으며, 첫 소절들이 잠겨 있던 진홍빛만큼이나 선연하게, 무언가 수탉의 신비로운 울음 같은 것, 영원한 아침의 이루 말할 수 없되 지나치게 날카로운 부름 같은 것이었다. 차갑고 비에 흠뻑 젖은, 전기가 감도는 대기는, 그 질이 너무나 달라 전혀 다른 압력들을 느끼게 하고, 오직 식물의 생명만을 지닌 순결한 소나타의 세계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진 세계에 있었는데, 순간순간 변하며 새벽의 자줏빛 약속을 지워 갔다. 그러나 정오가 되자, 이글거리되 덧없는 태양 아래에서 그것은 어떤 둔중하고 거의 시골스러운 지복 속에서 스스로를 이루어 내는 듯했으니, 그 안에서는 요란하게 울리며 다투어 내달리는 종소리(콩브레 성당 밖 광장을 눈부시게 타오르게 하던 그 종소리 같은 것으로, 그것을 자주 들었을 뱅퇴유가 어쩌면 그 순간 화가의 손이 팔레트로 옮겨 놓은 하나의 색깔처럼 자기 기억 속에서 찾아냈을 것이다)가 가장 거친 기쁨을 실체화하는 듯했다. 솔직히 말해 미학적 관점에서 이 흥겨운 동기는 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거의 추하다고 느꼈다. 그 리듬이 어찌나 힘겹게 땅바닥을 끌며 나아가던지, 그저 소음을, 소리를, 북채로 탁자를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그 핵심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을 흉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보기에 뱅퇴유는 여기서 영감이 부족했던 듯했고, 따라서 나 또한 주의력이 조금 부족해졌다.

나는 마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뚱한 부동자세는 음악에 맞추어 까딱거리는 포부르 귀부인들의 텅 빈 머리에 항의하는 듯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나는 이 음악에 대해 좀 알아요, 그것도 조금이 아니랍니다! 내가 느끼는 걸 다 말하려 든다면 당신들은 그 끝을 결코 못 들을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꼿꼿하고 미동도 없는 몸이, 무표정한 두 눈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녀를 대신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녀의 용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으니, 연주자들은 계속해도 좋다고, 그녀의 신경을 아껴 줄 필요는 없다고, 그녀는 안단테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알레그로에서도 소리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나는 연주자들을 바라보았다. 첼로 연주자는 두 무릎 사이에 꽉 낀 악기를 지배하고 있었고, 고개를 숙인 그 얼굴에는 투박한 이목구비가 짐짓 꾸미는 순간마다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혐오의 표정을 드리웠다. 그는 악기 위로 몸을 숙여, 마치 양배추라도 뽑을 때와 같은 집안일하듯 참을성 있는 손길로 그것을 짚어 나갔고, 그 곁에서는 짧은 치마를 입은 하프 연주자가(한낱 소녀였다), 무녀의 마법 방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임의로 창공을 나타내던 그런 선들처럼 좌우로 자신의 황금빛 사각형의 선에 둘러싸인 채, 필요한 지점 여기저기서 절묘한 소리 하나를 찾아 나서는 듯했으니, 마치 하나의 작은 우의적 여신이 하늘 궁륭의 황금 격자 앞에 놓여 그 별들을 하나하나 거두어들이는 듯했다. 모렐로 말하자면, 여태 보이지 않고 나머지 머리카락에 묻혀 있던 한 가닥이 풀려 내려 그의 이마 위에 곱슬거리는 타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 곱슬머리를 보고 샤를뤼스 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 알아내려고 청중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나 내 눈에 마주친 것은 오직 베르뒤랭 부인의 얼굴, 아니 그보다는 두 손이었으니, 얼굴이 두 손에 온전히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종소리의 승리에 찬 동기(動機)가 다른 동기들에 밀려나 흩어져 버리자, 나는 다시 한번 그 음악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7중주곡의 몸통 안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이 차례로 나타나 마침내 끝에 가서 결합하듯이, 뱅퇴유의 소나타 역시, 그리고 훗날 알게 되었듯 그의 다른 작품들 역시, 바로 이 순간 내게 드러난 저 승리에 차고 완결된 걸작을 향한, 더없이 정교하되 아주 미약한 소심한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또한, 뱅퇴유가 창조해 냈을 다른 세계들을 마치 내 사랑 하나하나처럼 저마다 밀폐된 무수한 우주로 상상했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가장 최근의 사랑, 곧 알베르틴을 향한 사랑의 부피 안에서 보자면, 그녀를 향한 사랑의 첫 조짐들(발베크에서 맨 처음, 이어 족제비 놀이가 끝난 뒤, 이어 그녀가 호텔에서 잠들던 밤, 이어 파리의 안개 낀 오후, 이어 게르망트가의 야회가 있던 밤, 이어 다시 발베크, 그리고 마침내 내 삶이 이제 그녀의 삶과 촘촘히 얽혀 버린 파리에서)은 여러 실험에 지나지 않았음을. 아닌 게 아니라, 알베르틴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헤아려 본다면, 그보다 앞선 나의 사랑들 자체가 이 더 광대한 사랑, 곧 알베르틴을 향한 사랑으로 가는 길을 닦아 준 미약하고 소심한 시도이자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음악을 좇던 것을 멈추고, 지난 며칠 사이 알베르틴이 뱅퇴유 을 만났는지 어떤지를 다시 한번 자문했다. 마치 잠시 잊고 있던 내면의 통증을 새삼 다시 헤집어 보듯이. 알베르틴이 저질렀을지 모를 행동들이 벌어지는 무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내부였으니까. 우리가 아는 사람 하나하나에 대해 우리는 그 분신을 지니고 있지만, 그 분신은 대개 우리 상상과 기억의 지평선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우리 바깥에 머물러 있어서, 그것이 한 일이나 했을 법한 일이 우리에게 안겨 주는 고통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놓인 사물, 곧 우리에게 고통 없는 시각의 감각만을 건네는 사물이 주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닥치는 일을 우리는 관조하듯 받아들이고, 남들에게 우리의 마음씨가 곱다는 인상을 주는 알맞은 말로 그 일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정작 그것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발베크에서 입은 상처 이후로, 알베르틴의 분신은 내 마음속, 뽑아내기 어려운 아주 깊은 곳에 박혀 있었다. 그녀에 관해 내가 본 것은 나를 아프게 했다. 감각이 몹시 뒤틀려, 어떤 빛깔을 보기만 해도 그것이 산 살에 칼이 꽂히듯 속으로 느껴지는 병자가 아파하듯이. 알베르틴과 헤어지고 싶다는 유혹에 아직 굴복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이따가 집에 돌아가면 그녀를 다시 봐야 한다는 지겨운 생각도, 그녀가 내게 아무래도 좋은 존재가 될 겨를도 없이 그녀에게 의심을 품은 이 순간에, 만약 그 이별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더라면 느꼈을 불안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녀를, 기다림의 시간을 길게 느끼다 어쩌면 제 방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 사랑하는 아내처럼 그려 보던 그 순간, 7중주곡의 정답고 가정적인 어느 부드러운 악구가 지나가며 나를 어루만졌다. 어쩌면(우리 내면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이토록 서로 얽히고 겹쳐 있으니) 그것은 뱅퇴유가 딸의 잠결에서 얻은 영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그 딸이, 고요한 저녁이면 그 정적으로 작곡가의 작업을 감쌀 때 말이다. 나를 그토록 달래 주던 이 악구는, 슈만의 어떤 몽상을 잠재우는 것과 똑같이 부드러운 침묵의 배경으로 나를 진정시켰다. 그 몽상에서는 “시인이 말하는” 대목에서조차 “아이가 잠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잠들었든 깨어 있든, 내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 오늘 저녁이면 나는 그녀를, 나의 어린아이 알베르틴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저 새벽의 첫 외침들 속에서 약속된 것은 알베르틴의 사랑보다 더 신비로운 무엇인 듯했다. 나는 오직 작곡가만을 생각하려고 내 연인에 대한 상념을 몰아내려 애썼다. 정말이지 그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되살아난 작곡가가 제 음악 속에서 영원토록 살고 있다고 할 만했다. 그가 어떤 음의 빛깔을 골라 나머지와 어울리게 하며 느끼던 기쁨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뱅퇴유는 더 심오한 여러 재능에 더하여, 몇 안 되는 작곡가, 실은 몇 안 되는 화가만이 지녔던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으니, 곧 지속적일 뿐 아니라 지극히 개성적인 빛깔을 쓰는 능력이었다. 그 빛깔은 세월도 바래게 하지 못했거니와, 그것을 발견한 그를 흉내 내는 제자들도, 심지어 그를 능가하는 대가들조차 그 독창성을 퇴색시키지 못했다. 그런 빛깔의 출현이 일으킨 혁명은, 그 성과가 후대의 작품 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이름조차 잊히는 꼴을 보며 명맥을 잇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해방되어, 앞으로 언제든 그 혁신가의 작품이 연주될 때마다 홀로 다시 터져 나온다. 음 하나하나가 세상의 어떤 규칙으로도 가장 학식 높은 작곡가들에게 흉내 내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어떤 빛깔로 제 자신을 부각시켰다. 그리하여 뱅퇴유는, 비록 제 시대에 나타나 음악의 진화 속 제자리에 붙박여 있었음에도, 제 작품이 연주될 때마다 늘 그 자리를 떠나 맨 앞에 나서곤 했다. 겉보기에는 역설적이나 실은 사람을 속이는, 영원한 새로움이라는 이 성질 덕분에 그의 작품은 마치 더 근래의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 뒤에 피어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미 피아노로 귀에 익은 뱅퇴유의 교향악 한 페이지를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어두운 식당으로 들기 전 창문의 프리즘이 산산이 흩어 놓는 여름 햇살처럼, 뜻밖의 천 가지 빛깔을 품은 보물인 양 아라비안나이트의 온갖 보석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저 움직임 없는 빛의 광휘에, 끊임없고 더없이 행복한 움직임이던 생명을 어찌 견줄 수 있으랴? 내가 그토록 소심하고 슬픈 사람으로 알던 이 뱅퇴유가, 어떤 음을 고르고 거기에 다른 음을 섞어야 할 때면 대담무쌍한 짓을 해낼 줄 알았고, 말 그대로의 뜻에서 행운을 누렸으니, 그의 어느 작품을 들어 보든 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화음들이 그에게 불러일으킨 기쁨과, 다른 화음들을 발견하게 해 준 힘의 증대는 듣는 이까지 하나의 발견에서 또 다른 발견으로 이끌었다. 아니, 실은 작곡가 자신이 듣는 이를 이끌었으니, 그는 스스로 만들어 낸 빛깔들에서 격렬한 기쁨을 길어 올려, 그 빛깔들이 불러내는 듯한 다른 빛깔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몸을 던질 힘을 얻었다. 금관악기가 쨍 울리며 숭고함이 절로 살아날 때면, 그는 감전의 충격을 받은 듯 황홀에 젖어 떨면서, 헐떡이고 취하고 미치고 어질어질한 채로 제 거대한 음악의 프레스코를 그려 나갔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발판에 몸을 묶고 누운 자세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격정에 찬 붓질을 퍼붓듯이. 뱅퇴유는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생명을 불어넣은 이 악기들의 소리 속에서, 적어도 그의 삶의 한 부분만은 무한한 시간 동안 이어 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던 것이다. 한낱 인간으로서의 그의 삶만을 두고 하는 말일까? 예술이 정녕 삶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엇인가를 바칠 가치가 있을까, 그것도 삶 자체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이 7중주곡을 제대로 들으려면 나는 그 물음을 붙들고 멈춰 설 수가 없었다. 물론 이글거리는 7중주곡은 순박한 소나타와는 유난히 달랐다. 작은 악절이 응답하던 소심한 물음은, 그토록 거칠고 그토록 초자연적이며 그토록 짧게 울려 퍼져, 바다 위 아침 하늘의 아직 잠든 진홍빛을 두근거리게 하던 저 기이한 약속의 실현을 찾으려는 숨 가쁜 간청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토록 크게 다른 이 악구들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인의 저택이나 공공 미술관에 여기저기 흩어진 저 단편들 속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우주, 곧 엘스티르의 우주, 그가 보았고 그 안에서 살았던 우주가 있었듯이, 뱅퇴유의 음악에도 음 하나하나, 조(調) 하나하나로 값을 매길 수 없고 짐작조차 못 할 어떤 우주의 알려지지 않은 빛깔들이 펼쳐져 있었으니, 그 우주는 그의 작품을 연주로 듣는 서로 다른 기회들 사이에 생긴 틈들 탓에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다. 소나타와 7중주곡의 그토록 다른 악장들을 지배하던 저 서로 닮지 않은 두 물음, 곧 하나는 연속되고 순수한 선율의 선을 짤막한 호소들로 끊어 놓았고, 다른 하나는 흩어진 단편들의 뒤섞임을 나눌 수 없는 구조로 용접해 붙였던 이 두 물음은, 하나는 그토록 차분하고 소심하여 거의 초연하고 사색적이며, 다른 하나는 그토록 불안하고 절박하며 애원하는 것이었음에도, 그럼에도 같은 하나의 기도였다. 내면의 태양이 저마다 다르게 떠오를 때마다 쏟아져 나와, 다른 상념들, 곧 그가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려 애쓰던 세월 내내 이어 온 예술적 탐구라는 서로 다른 매질을 통과하며 굴절되었을 뿐인 기도였던 것이다. 본질에서는 같은 하나의 기도, 하나의 희망, 뱅퇴유의 여러 작품 속에서 이런 변장 아래에서도 알아볼 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 말고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기도이자 희망이었다. 음악사가들이라면 이 악구들에 대해 다른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어떤 친연성, 어떤 계보를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이유에서, 겉보기의 닮음에서, 직접적인 인상으로 느껴진 것이 아니라 추론으로 교묘하게 발견된 유비(類比)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뱅퇴유의 이 악구들이 안겨 주는 인상은 다른 어떤 인상과도 달랐다. 마치 과학이 가리키는 듯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개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그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되려 힘차게 애쓸 때야말로, 겉으로 드러난 차이 아래 깊숙이 자리한 유사성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작품의 몸통 안에 존재하던 의도적인 닮음, 곧 뱅퇴유가 하나의 악구를 거듭 되풀이하고 변주하며, 그 리듬을 바꾸고 본디 모습 그대로 되살려 놓으며 즐기던 그 의도적인 닮음, 지성의 소산이라 필연코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그 닮음은, 두 개의 별개 걸작 사이에서 서로 다른 빛깔로 터져 나오던 저 감추어진, 저 무의지적인 닮음만큼 강렬해지지는 결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때 뱅퇴유는, 새로운 무엇을 하려 애쓰면서 창조적 노력의 온 힘을 다해 스스로에게 물었고, 어떤 물음을 던지든 늘 같은 어조, 곧 제 자신의 어조로 대답이 돌아오는 저 깊은 곳에서 제 본질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런 어조, 뱅퇴유의 어조는 다른 작곡가들의 어조와, 우리가 두 사람의 목소리 사이에서, 아니 두 종(種)의 동물이 내는 울음소리 사이에서 감지하는 차이보다 훨씬 큰 차이로 갈라져 있다. 곧 그 다른 작곡가들의 사유와, 뱅퇴유의 영원한 탐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만큼. 그가 그토록 여러 형태로 스스로에게 던지던 물음, 그의 습관적 사색은, 마치 천사들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양 추론의 분석적 공식에서 벗어나 있어서, 우리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는 있으되, 영매가 불러낸 육신 없는 영들에게 누군가 죽음의 신비를 캐물어도 그들이 그러하듯, 그것을 인간의 말로 옮기지는 도무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를 사로잡았던 저 후천적 독창성, 음악 비평가들이 그것들 사이에서 찾아낼 법한 저 친연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조차, 독창적인 작곡가라는 저 위대한 가객들이 저도 모르게 솟아올랐다가 되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유일무이한 하나의 어조였으니, 이는 영혼이 환원할 수 없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뱅퇴유가 청중의 마음속에 비친 것을 더 장엄하고 더 웅대하게, 또는 더 발랄하고 흥겹게 만들려 했을지라도, 그는 저도 모르게 그 모든 것을, 제 노래를 영원하고 단박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저류 아래로 가라앉혔다. 다른 가객들의 노래와는 다르고 제 자신의 모든 노래와는 닮은 이 노래를, 뱅퇴유는 어디서 배웠으며 어디서 들었던 것일까? 이렇듯 예술가는 저마다, 자신조차 잊어버린 어떤 미지의 나라에서 온 사람인 듯싶다. 또 다른 위대한 예술가가 이 땅을 향해 떠나오게 될 그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서. 무엇보다도, 뱅퇴유는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서 그 미지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간 듯했다. 분위기는 더 이상 소나타에서와 같지 않았다. 물음을 던지는 악구들은 더 절박하고 더 불안해졌으며, 대답들은 더 신비로워졌다. 아침저녁의 말갛게 씻긴 대기가 악기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모렐의 연주는 훌륭했을지언정, 그의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소리는 내게 유난히 날카롭게, 거의 요란하게 들렸다. 이 거친 느낌은 오히려 듣기 좋았고, 어떤 목소리들에서처럼 거기서 일종의 도덕적 미덕과 지적 우월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거슬릴 수도 있었다. 우주에 대한 어떤 이의 시각이 바뀌고 정화되어 제 마음속 나라에 대한 기억에 더 잘 들어맞게 될 때, 그것이 화가에게서 빛깔의 전반적 변화로 나타나듯 음악가에게서 소리의 전반적 변화로 표현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청중 가운데 더 총명한 부류는 속지 않았으니, 훗날 사람들은 뱅퇴유의 마지막 작품들이야말로 가장 심오하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표제도, 어떤 주제도 그 판단에 지적인 근거를 대 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이 전위(轉位)의 문제, 곧 소리의 깊이가 점점 더해 가는 문제임을 짐작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