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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어서) ⑬

5권 제2부 · 제2장 (이어서)

샤를뤼스 가 모렐의 말과 마님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 채, 판(Pan)의 공포에 사로잡힌 요정 같은 자세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동안, 베르뒤랭 부인은 외교적 결렬의 표시로 바깥 응접실로 물러가 샤를뤼스 를 홀로 남겨 두었고, 단상 위에서는 모렐이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있었다. “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봐요.” 베르뒤랭 부인이 남편에게 탐욕스레 졸랐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 아주 상심한 얼굴이던데요.” 스키가 말했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어요.” 알아듣지 못한 척하며, “설마, 내가 한 말이 저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베르뒤랭 부인은 누구나 속아 넘어가지는 않을 그런 술책의 하나를 써서, 샤를리가 울고 있더라는 말을 조각가가 다시 하도록 몰아갔다. 그 눈물은 마님을 몹시도 우쭐하게 만들어서, 그 말을 미처 듣지 못한 단골 한둘이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남아 있을 위험을 그녀로서는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에요, 상관이 있고말고요. 저 사람 눈에 큰 눈물방울이 반짝이는 걸 봤는걸요.” 조각가는 짓궂은 공모의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모렐이 아직 단상에 있어 이 대화를 엿듣지 못하는지 확인하려고 곁눈질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엿들은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 존재는 사람들이 알아채자마자 모렐에게 잃어버린 줄로 알았던 희망 하나를 되돌려 줄 참이었다. 바로 나폴리 왕비였다. 부채를 두고 간 그녀는, 이어서 갔던 다른 모임에서 나오는 길에 몸소 들러 그것을 찾아가는 편이 더 예의 바르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듯 아주 조용히 방에 들어와, 자신이 온 것을 사과하고 다른 손님이 다 떠난 지금 안주인에게 잠깐 인사나 하려고 채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열기 속에서 아무도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그녀는 그 사건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챘고 그것이 그녀를 분노로 불타오르게 했다. “스키 말로는 저 사람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는데, 당신도 봤어요? 나는 눈물 같은 건 못 봤는데. 아, 그래요, 이제 생각나네요.” 그녀는 자신의 부인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말을 바로잡았다. “샤를뤼스로 말하자면, 저 사람도 눈물이 멀지 않았어요. 의자에라도 앉는 게 좋겠어요, 다리가 휘청거리는 게 조금만 있으면 바닥에 쓰러지겠어요.” 그녀는 가차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순간 모렐이 그녀에게 급히 다가갔다. “저 부인이 나폴리 왕비 아닙니까?” 그가 물었다(그러면서도 그녀가 왕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샤를뤼스 쪽으로 걸어가는 왕비를 가리키면서였다. “방금 벌어진 일 뒤라, 유감이지만 이제 남작께 저를 소개해 달라고 청할 수는 없겠지요.” “기다려요, 내가 직접 데려가 줄 테니.” 베르뒤랭 부인이 말했고, 단골 몇 사람을 거느리고서, 그러나 서둘러 모자와 외투를 찾으러 간 나와 브리쇼는 빼고, 샤를뤼스 와 이야기하고 있는 왕비에게로 나아갔다. 그는 모렐을 나폴리 왕비에게 소개하겠다는 자신의 큰 소망이 그 부인의 있을 법하지 않은 서거로써만 좌절될 수 있으리라 여겨 왔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텅 빈 공간에 투사된 현재의 반영으로 그려 보지만, 실은 미래란 대개 우리 눈길을 벗어나는 여러 원인이 낳는, 흔히 거의 즉각적인 결과인 것이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샤를뤼스 는 모렐이 왕비에게 소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가진 것을 다 내놓았으리라. 베르뒤랭 부인은 왕비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하자, “저는 베르뒤랭 부인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잘 기억하고 있어요.” 왕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찌나 태연하게 샤를뤼스 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지, 게다가 어찌나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였는지, 베르뒤랭 부인은 그 “잘 기억하고 있어요”가 과연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초연한 억양으로 발화되어, 마음이 무너진 샤를뤼스 에게서조차 무례의 기예를 알아보는 노련하고도 흐뭇한 미소를 자아냈다. 멀찍이서 자신의 소개를 위한 채비를 지켜보던 모렐이 이제 다가왔다. 왕비는 샤를뤼스 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에게도 화가 나 있었으나, 그것은 다만 그가 비열한 비방자들에 맞서 좀 더 힘차게 버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베르뒤랭 부부가 감히 이런 식으로 대하는 그 사람을 위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몇 시간 전 그들에게 보였던 더없이 소박한 정중함과, 이제 그들과 맞서며 보이는 오만한 긍지는, 그녀 마음속 같은 자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왕비는 선량함으로 가득한 여인으로서, 선량함을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 자신의 가문, 자기 혈통의 모든 대공들에 대한 흔들림 없는 애착의 형태로 여겼고, 샤를뤼스 도 그 대공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다음으로는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존중할 줄 알고 그들에게 호의를 품는 중산층이나 가장 미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애착을 넓혔다. 베르뒤랭 부인에게 친절을 베푼 것도 이런 건전한 본능을 지닌 여인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선량함에 대한 편협하고 다소 토리당풍이며 갈수록 낡아 가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선량함이 조금이라도 덜 진실하거나 덜 뜨거웠던 것은 아니다. 옛사람들이 자신을 바치던 인간 집단에 대한 애착이 그 집단이 자기 도시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해서 결코 약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사람들이 자기 조국에 대해 품는 애착도 훗날 세계 합중국을 사랑하게 될 이들의 애착에 못지않을 것이다. 나 자신의 가까운 주변에서도 나는 그런 예를 어머니에게서 보았으니, 캉브르메르 부인과 게르망트 부인도 어머니를 그 어떤 자선 사업에 참여하게 하거나, 그 어떤 애국적 작업장에 가담하게 하거나, 어떤 바자회에서 물건을 팔거나 후원자가 되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오직 먼저 마음이 움직였을 때에만 선을 베풀고, 자신의 사랑과 너그러움의 보물을 자신의 가족과 하인들, 우연히 앞길에 나타난 불운한 이들에게만 남겨 두었던 것이 옳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그 보물이 할머니의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어서 게르망트 부인이나 캉브르메르 부인이 여태 할 수 있었거나 실제로 한 그 무엇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만은 안다. 나폴리 왕비의 경우는 전혀 달랐지만, 여기서도 그녀가 생각하는 덕 있는 사람이란 알베르틴이 내 서가에서 꺼내 탐독하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에 그려진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소설들 속 덕 있는 사람이란 다름 아니라 아첨하는 식객, 도둑, 술꾼, 한순간은 어리석다가 다음 순간엔 뻔뻔한 자, 방탕아, 궁지에 몰리면 살인자이기까지 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극단은 서로 통하는 법이니, 왕비가 지키려 한 그 고귀한 사람, 그 형제, 모욕당한 그 혈족이란 바로 샤를뤼스 였고, 다시 말해 그 출생과 왕비와 그를 잇는 모든 가문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그 미덕이 숱한 악덕으로 둘러싸인 사람이었다. “안색이 아주 좋지 않네요, 사촌.” 그녀가 샤를뤼스 에게 말했다. “내 팔에 기대세요. 아직도 당신을 넉넉히 받쳐 줄 거예요. 그만한 힘은 있으니까요.” 그러고서 자신의 적수들을 향해 당당히 눈을 치켜뜨며(그 순간 그녀 앞에는 베르뒤랭 부인과 모렐이 있었다고 스키가 내게 말해 주었다), “아시겠지만 지난날 가에타에서 이 팔은 폭도를 물리쳤답니다. 당신에게 성벽 노릇을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리하여 엘리자베트 황후의 훌륭한 언니는, 남작을 자기 팔에 부축하고 모렐을 자신에게 소개받도록 허락하지 않은 채로 그 집을 떠났다. 샤를뤼스 의 무서운 성정과, 자기 가족조차 벌벌 떨게 하던 그 박해를 생각하면, 그가 이날 저녁의 사건 뒤에 분노를 터뜨려 베르뒤랭 부부에게 보복을 가하리라 짐작할 만도 했다. 우리는 처음에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까닭을 이미 보았다. 그 뒤 남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기에 걸렸고, 그해 겨울에 크게 번지던 패혈성 폐렴에 걸려, 오랫동안 의사들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임종에 이른 것으로 여겨졌으며, 여러 달을 죽음과 삶 사이에 매달린 채 누워 있었다. 단지 육체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고, 예전에 그를 분노의 발작 속에서 온갖 자제력을 잃게 만들던 신경증을 다른 병이 대신한 것뿐이었을까? 그가 사교적 관점에서 베르뒤랭 부부를 한 번도 진지하게 여긴 적이 없다가 마침내 그들이 한 역할을 이해하게 되었기에 자기 대등한 이에게라면 느꼈을 원한을 느낄 수 없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너무 뻔한 일이고, 또 신경증자들이란 사소한 자극에도 상상 속의 무해한 적들에게 화를 내다가도, 정작 누가 자신을 공격해 오면 오히려 무해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불평이 부질없음을 애써 증명하려 드는 것보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편이 그들을 더 쉽게 진정시킨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도 너무 뻔한 일이다. 이 원한의 부재를 설명할 실마리는 아마 육체의 변화에서가 아니라, 훨씬 더 그 병 자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병은 남작을 완전히 지치게 만들어 베르뒤랭 부부를 생각할 겨를조차 거의 남겨 두지 않았다. 그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공세를 이야기했거니와, 사후에야 효력을 내는 공세조차도 제대로 ‘무대에 올리려면’ 우리 힘의 일부를 희생해야 한다. 샤를뤼스 에게는 그 준비의 활동에 쓸 힘이 너무도 적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불구대천의 원수들이 죽음의 시각에 눈을 떠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행복해했다는 이야기를 곧잘 듣는다. 이런 일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이 우리를 덮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드문 일임이 틀림없다. 오히려 우리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순간이야말로, 생기가 넘칠 때라면 선뜻 무릅썼을 위험에 우리가 개의치 않게 되는 때이다. 복수심은 삶의 일부여서, 대개는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를 떠난다(같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 앞으로 보게 되듯 인간적 모순을 이루는 어떤 예외들이 있기는 하지만). 잠시 베르뒤랭 부부를 생각하고 나서, 샤를뤼스 는 자신이 너무 쇠약함을 느끼고 벽 쪽으로 얼굴을 돌려 그 무엇도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자주 말없이 누워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웅변을 잃어서가 아니었다. 웅변은 여전히 그 샘에서 흘러나왔으나, 다만 변해 있었다. 그것이 그토록 자주 꾸며 주던 격렬함에서 벗어나, 이제는 온유한 말들, 복음서의 말씀들, 죽음에 대한 겉으로의 체념으로 장식된, 거의 신비주의적인 웅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나리라 여기는 날이면 특히 말을 많이 했다. 병세가 도지면 그는 말이 없어졌다. 그의 훌륭한 격렬함이 옮겨 앉은 이 그리스도교적 온유함은(에스테르에서 앙드로마크의 그토록 다른 천재성이 그러하듯) 그의 머리맡을 찾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것은 베르뒤랭 부부 자신의 감탄조차 자아냈으리니, 그들도 자신들이 미워하게 만든 그 나약한 사람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겉으로만 그리스도교적인 생각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예언자에게 그러했듯 메시아가 자신에게 언제 오실지 알려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다 달콤하고도 애처로운 미소와 함께 말을 멈추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대천사가 다니엘에게 그랬듯 나더러 ‘일곱 이레, 그리고 예순두 이레’를 참으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까지라면 나는 이미 죽었을 테니까요.” 그가 이렇게 기다린 사람은 모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천사 라파엘이 젊은 토비아를 데려왔듯 그를 자기에게 데려와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좀 더 인간적인 방법을 끌어들여(미사를 올리라 명하면서도 의사 부르기를 잊지 않는 병든 교황들처럼), 그는 방문객들에게, 만일 브리쇼가 지체 없이 자신의 젊은 토비아를 데려와 준다면 대천사 라파엘이 토비아의 아버지에게 그러했듯, 또는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브리쇼의 시력을 되찾아 주는 데 어쩌면 응해 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비쳤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일탈에도 불구하고, 샤를뤼스 의 대화가 지닌 도덕적 순수함은 그럼에도 불안을 자아낼 만큼 깊어져 있었다. 허영, 비방, 악의와 오만의 광기가 하나같이 사라졌다. 도덕적으로 샤를뤼스 는 지난날 그가 살아온 수준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올라 있었다. 그러나 이 도덕적 완성은, 그 실재에 대해서라면 그의 웅변술이 실은 그를 가엾이 여기는 청중 여럿을 능히 속일 수도 있었거니와, 그것을 위해 애써 온 병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샤를뤼스 는 내리막길을 되짚어 내려왔고, 그 속도는 앞으로 보게 되듯 꾸준히 빨라져만 갔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그에 대한 베르뒤랭 부부의 태도란, 좀 더 가까운 다른 격발들이 되살아나지 못하게 막는 다소 아득한 기억에 지나지 않았다.

베르뒤랭 부부의 야회로 되돌아가면, 주인 내외만 남았을 때 베르뒤랭 가 아내에게 말했다. “코타르가 어디 갔는지 알아? 사니에트한테 가 있어. 형편을 펴 보려고 투기를 하다가 아주 폭삭 망했거든. 방금 우리와 헤어진 뒤 집에 돌아가서, 한 푼도 남지 않은 데다 빚이 백만 프랑 가까이 된다는 걸 알고는, 사니에트가 발작을 일으켰다지 뭐야.” “그런데 대체 왜 도박을 한 거예요, 어리석기도 하지, 세상에서 그 노름에 성공할 리 가장 없는 사람이잖아요. 저이보다 영리한 사람도 거기서 털리는데, 저이야말로 어중이떠중이 누구에게든 사기당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요.” “그야 물론, 우리는 늘 저이가 바보라는 걸 알고 있었지.” 베르뒤랭 가 말했다. “아무튼 결과가 이래. 여기 한 사람이 있어. 내일이면 집주인에게 살던 집에서 쫓겨날 사람이고, 완전히 무일푼 신세가 될 사람이야. 가족은 저이를 좋아하지 않고, 포르슈빌은 저이를 위해 뭐라도 해 줄 마지막 사람이지. 그래서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무엇도 하고 싶지 않지만, 저이가 제 파멸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지 않도록, 머리 위에 지붕이라도 지킬 수 있도록, 어쩌면 우리가 저이에게 소액의 연금을 마련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 생각을 해 주다니 참 착하네요. 하지만 당신이 ‘지붕’이라고 했는데, 그 얼간이는 분수에 넘치는 아파트를 계속 붙들고 있으니 거기 그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어디 방 두어 칸을 구해 줘야 할 거예요. 지금도 아파트 값으로 육칠천 프랑을 내고 있는 걸로 알아요.” “육천오백. 하지만 저이는 제 집에 무척 애착이 있어. 요컨대 첫 발작을 일으켰으니, 이삼 년 넘게 살기는 어려울 거야. 삼 년 동안 저이에게 만 프랑씩 준다고 쳐 봐. 우리가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를테면 올해는 라 라스플리에르를 다시 빌리는 대신 좀 더 검소한 데를 하나 잡을 수도 있고. 우리 수입으로 삼 년 동안 해마다 만 프랑을 희생하는 것쯤은 못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좋아요, 다만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골치 아프다는 게 문제죠. 다른 이들에게도 또 해 주기를 바랄 테니까요.” “내 말 믿어, 나도 그 점은 생각해 뒀어. 아무도 이 일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조건에서만 할 거야. 고맙지만 사양이야, 우리가 인류의 은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자선 따위는 안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저이에게 그 돈을 셰르바토프 대공비가 남겨 준 것이라고 말해 주는 거지.” “하지만 저이가 그 말을 믿을까요? 대공비는 유언 문제로 코타르와 상의했잖아요.” “정 안 되면 코타르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돼. 직업상 비밀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고, 돈도 엄청나게 벌어들이니, 어쩔 수 없이 입막음해야 하는 그런 참견꾼들과는 다를 거야. 어쩌면 대공비가 자기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명했다고 말해 줄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하면 우리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아도 돼. 그러면 온갖 소동과 감사 인사와 장광설의 성가심을 다 피할 수 있지.” 베르뒤랭 는 그들이 피하고자 하는 그 감동적인 소동과 장광설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표현 하나를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정확히 전해지지는 못했으니, 그것은 프랑스어 표현이 아니라, 어떤 집안들에서 어떤 것들, 특히 성가신 것들을 가리킬 때 쓰는 그런 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사자들이 듣는 데서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그것을 가리키고 싶어 하는 까닭에 생긴 것이리라! 이런 종류의 표현이란 대개 그 집안의 옛 처지에서 살아남은 잔재이다. 이를테면 어떤 유대인 집안이라면, 그것은 본뜻에서 비껴 난 어떤 의례 용어일 것이고, 어쩌면 이제 완전히 프랑스화된 그 집안이 아직 아는 유일한 히브리어 낱말일 것이다. 지방색이 짙은 어떤 집안이라면, 그것은 그 집안이 더는 그 사투리를 쓰지도, 알아듣지도 못한다 해도 지방 사투리의 한 낱말일 것이다. 남아메리카에서 건너와 이제 프랑스어밖에 쓰지 않는 어떤 집안이라면, 그것은 스페인어 낱말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이르면, 그 낱말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식탁에서 시중드는 하인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어떤 그런 낱말을 써서 그들을 넌지시 가리키던 것은 아이들도 능히 기억하겠지만, 정작 그 낱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스페인어였는지 히브리어였는지 독일어였는지 사투리였는지, 아니 애초에 그것이 어느 언어에 속하기라도 했는지, 고유 명사가 아니었는지, 아예 통째로 지어낸 낱말은 아니었는지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이 불확실함은, 같은 표현을 썼음이 분명한 종조부나 아직 살아 있는 사촌이 있어야만 풀릴 수 있다. 나는 베르뒤랭가의 친척이라곤 하나도 알지 못했으므로, 그 낱말을 끝내 되살려 낼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베르뒤랭 부인에게서 미소를 자아냈다는 것만은 아는데, 일상의 말보다 덜 보편적이고 더 개인적이며 더 은밀한 이런 말을 쓰는 이들에게는, 저희끼리 그것을 쓰는 데서 언제나 어떤 만족감을 동반하는 자부심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이 즐거운 한때가 지난 뒤, “하지만 코타르가 입을 놀리면요.” 베르뒤랭 부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입을 놀리지 않을 거야.” 그는 그 일을 이야기했다, 적어도 내게는. 몇 해 뒤, 바로 사니에트의 장례식에서 이 일을 알게 된 것이 그에게서였으니까. 나는 그것을 좀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우선 그 앎은, 우리가 남들에게 결코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되며, 어떤 매정한 행동의 기억으로 그들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를 더 빨리 이끌어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다른 순간들에 진심으로 바라고 이룬 온갖 선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번 확정지어 버린 그 악한 형태가 물론 되풀이되겠지만, 마음이란 그보다 훨씬 풍부하여, 우리가 그들이 못되게 굴었던 그 순간을 이유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그 선량함의 다른 여러 형태 또한 그들에게 되풀이될 것이다. 게다가 코타르의 이 폭로는 틀림없이 내게 영향을 미쳤을 터인데, 그것이 베르뒤랭 부부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꿈으로써, 만일 좀 더 일찍 내게 전해졌더라면, 알베르틴과 나 사이에서 베르뒤랭 부부가 맡고 있을지 모른다고 내가 품었던 의혹들을 걷어 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잘못이었을지도 모르나 그 의혹들을 걷어 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갈수록 확신을 더해 가며 세상에서 가장 악의에 찬 인간이라 여긴 베르뒤랭 가 어떤 미덕들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그는 그럼에도 가장 잔혹한 박해에 이를 만큼 남을 괴롭히는 자였고, 작은 패거리를 지배하려는 욕심이 어찌나 강했던지, 단골들 사이에 오직 그 작은 집단을 굳건히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은 어떤 유대라도 있으면 그것을 끊어 내려고 더없이 비열한 거짓말도, 더없이 부당한 증오를 부추기는 짓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심 없는 행동, 내세우지 않는 너그러움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반드시 정 많은 사람도, 유쾌한 사람도, 조심스러운 사람도, 정직한 사람도, 늘 선한 사람도 아니었다. 부분적인 선량함은, 어쩌면 그 안에 내 대고모가 알고 지내던 그 집안의 흔적이 얼마쯤 남아 있어서, 내가 그것을 발견하기 전부터 이 행동에 비추어 그 안에 이미 존재했을 것이니, 마치 콜럼버스나 피어리 이전에 아메리카나 북극이 존재했던 것과 같다. 그렇더라도 내가 그것을 발견한 순간, 베르뒤랭 의 성정은 새롭고 상상하지 못한 면모를 내게 내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한 인물의, 나아가 여러 사회와 정념의 항구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인물이란 그것들 못지않게 변하는 것이어서, 그 안에서 비교적 변하지 않는 것을 그려 내려 해도, 우리는 그것이 잇달아 서로 다른 면모들을 내보이는 것을(그것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어리둥절한 예술가 앞에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