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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알베르틴의 도주 ⑤

5권 제2부 · 제3장: 알베르틴의 도주

알베르틴의 목적이 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면, 그녀는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게다가 내 이성은, 어쩌면 그녀의 사악한 본능에 대해 잘못 생각했듯이 그녀의 교활한 계략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했음을 내게 증명해 주기를 무엇보다 바라고 있었다. 물론 내 이성이 내게 마련해 준 논거의 값어치에,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싶어 하는 내 욕망까지 보태졌으리라. 그러나 내가 공정하고자 하고 진실을 알아볼 기회를 가지려 한다면, 진실이란 오직 예감으로, 텔레파시 같은 발산으로만 알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이성이 나를 회복시키려 애쓰면서 내 욕망에 이끌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다른 한편으로 뱅퇴유 에 관한 한, 알베르틴의 악덕, 다른 삶을 살려는 그녀의 의도, 그 악덕의 필연적 귀결인 이별의 계획에 대해서는, 내 본능이 나를 병들게 하려는 시도 속에서 내 질투에 이끌려 길을 잘못 들 수도 있었다고. 게다가 알베르틴 자신이 그토록 교묘하게 완벽에 이르도록 꾸며 낸 그 칩거는, 내 고통을 없애 줌으로써 내 의심마저 차츰 없애 주었고, 밤이 내 불안을 되살릴 때면 나는 다시금 알베르틴이 곁에 있다는 데서 지난날의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침대 곁에 앉아 그녀는, 그녀 삶의 안락과 그녀 감옥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려는 노력으로 내가 끊임없이 주던 그 드레스들이나 선물들 가운데 하나를 두고 이야기했다. 알베르틴은 처음에는 드레스와 가구만을 생각했다. 이제는 은세공품이 그녀의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샤를뤼스 에게 옛 프랑스 은세공품에 대해 물었는데, 이는 우리가 요트를 가지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알베르틴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계획으로, 나 역시 그녀의 정숙함을 믿기 시작할 때면 언제나 그렇게 판단했으니, 그리하여 내 질투가 수그러들면서 더는 그녀와 무관한 다른 욕망들을, 그것들 또한 채우려면 돈이 필요한 욕망들을 억누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다) 만일을 위해, 그녀가 우리가 요트를 갖게 되리라 여겨서가 아니라, 엘스티르에게 조언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의 옷차림에 관해서와 꼭 마찬가지로, 그 화가는 요트를 꾸미는 데에도 세련되고 예민한 감식가였다. 그는 영국식 가구와 옛 은식기만을 허락했다. 이 때문에 알베르틴은 발베크에서 돌아온 뒤로 은세공술에 관한 책들을, 옛 조금장이들의 솜씨에 관한 책들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은식기는 두 차례에 걸쳐 녹여졌으니, 위트레흐트 조약 무렵 왕 자신이 대귀족들에게 본을 보이며 자신의 식기를 바쳤을 때와, 다시 1789년에 그러했으므로, 지금은 극히 드물다. 다른 한편 근대의 은세공인들이 르 퐁토슈의 도안을 본떠 이 옛 식기를 모두 베껴 내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엘스티르는 이 근대의 골동품을 취향 있는 여인의 집에, 비록 물 위에 뜬 집일지라도 들여놓을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나는 알베르틴이 뢸리에 가문이 뒤바리 부인을 위해 만든 경이로운 물건들에 대한 묘사를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물건들 가운데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그녀는 그것을 보고 싶어 안달이었고, 나는 그것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녀는 심지어 아담한 수집품을 이루기 시작해, 유리 진열장 속에 매혹적인 취향으로 그것들을 배치해 두었는데, 나는 그것을 감동과 불안 없이는 바라볼 수 없었으니, 그녀가 그것들을 배열한 그 솜씨야말로 인내와 재간, 향수, 잊고자 하는 욕구에서 태어난 것, 죄수들이 능한 그 솜씨였기 때문이다. 옷차림에 관해서는, 이 무렵 그녀의 마음을 가장 끈 것은 포르투니가 만든 모든 것이었다. 이 포르투니 가운들은, 그 가운데 하나를 나는 게르망트 부인이 입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엘스티르가 카르파초와 티치아노 시대 여인들의 화려한 의상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 그 재로부터 되살아나 호화롭게 머잖아 되돌아오리라 예언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성 마르코 성당의 둥근 천장 아래 새겨져 있고, 비잔틴 주두의 대리석과 벽옥 항아리에서 물을 마시며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상징하는 새들이 알리듯이,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되돌아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그것을 입기 시작하자마자, 알베르틴은 엘스티르의 예언을 떠올렸고, 하나 갖기를 바랐으며, 우리는 그것을 고르러 갈 참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들은, 설령 오늘날의 여인이 걸치면 조금 지나치게 ‘분장’한 것처럼 보이고 차라리 수집품으로 간직해 두는 편이 나은 그 진짜 골동품들은 아닐지라도(마침 나는 알베르틴을 위해 그런 것들도 찾고 있었다), 인공적인 것, 가짜 골동품 특유의 서늘한 느낌을 준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러시아 발레에서 가장 아끼는 예술의 시대들을, 그 정신이 스민 예술작품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독창적으로 되살려 내던 세르트와 박스트와 브누아의 무대 장치처럼, 이 포르투니 가운들은 충실하게 옛것이면서도 뚜렷이 독창적이어서, 무대 장치처럼, 아니 무대 장치보다 한층 더 암시적으로(장치는 상상에 맡겨졌으니) 눈앞에 불러왔다. 그 가운들이 취해 온 화려한 동방을 잔뜩 실은 베네치아를, 성 마르코 성소 속 유물이 태양과 터번 두른 머리들의 무리를 암시하는 것보다 한층 더, 그 단편적이고 신비로우며 서로를 보완하는 빛깔이었던 그 베네치아를. 그 시절의 모든 것은 스러졌으나, 도제의 부인들이 걸치던 직물들이 세세하게 되살아나 남아 다시 나타남으로써, 그 사이의 공간을 그 장면의 광채와 삶의 웅성거림으로 채우려는 듯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났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한두 번 게르망트 부인에게 조언을 얻으려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의상’을 이루는 옷차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 자신은 그런 것을 여러 벌 지녔으면서도, 다이아몬드를 곁들인 검은 벨벳 차림일 때만큼 돋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포르투니의 것 같은 가운에 관해서라면 그녀의 조언은 그리 값진 것이 못 되었다. 게다가 만약 내가 그런 것을 청한다면, 오래전부터 그녀의 주간 초대를 여러 차례 거절해 왔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그녀를 찾는다고 그녀가 여길까 봐 나는 꺼려졌다. 더구나 내가 그토록 넘치게 초대를 받은 것은 비단 그녀에게서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도, 다른 많은 여인들도 늘 내게 지극히 다정했다. 그러나 나의 칩거가 틀림없이 그들의 환대를 열 배로 불려 놓았던 것이다. 사랑에서 일어나는 일의 작은 메아리인 우리 사교 생활에서도, 사람이 자신을 남들이 찾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감추는 것인 듯하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의 환심을 사려고 자기 신용에 보탬이 될 만한 온갖 것을 셈하고, 온종일 옷을 갈아입고, 제 외모에 신경을 쓰지만, 그 여인은 그가 다른 여인에게서 받는 관심 가운데 단 하나도 그에게 베풀지 않는다. 그가 그 다른 여인을 배신하면서, 옷차림도 허술하고 마음을 끌 아무런 꾸밈도 없이 그녀 앞에 나타나는데도, 그는 그녀에게 영원히 사랑받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남자가 사교계에서 충분히 대접받지 못한다고 한탄한다면, 나는 그에게 방문을 더 많이 다니라거나 더 훌륭한 마차를 갖추라고 권하지 않고,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말고,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며,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면 그의 문 밖에 사람들이 줄을 서리라고 말해 주겠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말해 주지 않으련다. 그것은 오직 사랑에 이르는 길처럼만 성공하는 확실한 성공의 길이기 때문이니, 곧 그 목적을 염두에 두고 그 길을 택하지 않았을 때에만, 이를테면 당신이 정말로 중병을 앓고 있거나 앓는다고 여겨져서, 혹은 사교계보다 더 좋아하는 정부를 함께 가두어 두고 있어서(또는 이 모든 이유가 한꺼번에 겹쳐서)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에만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여인의 존재를 모르는 다른 사람은, 단지 당신이 자기를 만나 주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온갖 사람들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고 당신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곧 당신의 포르투니 가운들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어.” 어느 날 저녁 나는 알베르틴에게 말했다. 오래전부터 그것을 바라 왔고, 나와 함께 신중히 그것을 골랐으며, 옷장 속뿐 아니라 상상 속에서도 미리 그것들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던 그녀에게, 그토록 많은 것들 가운데서 결정하기에 앞서 그 하나하나의 세부를 꼼꼼히 살피던 그 가운들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어찌할 바를 모를 만큼 드레스가 많으면서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지나치게 부유한 여인에게 그것이 지녔을 의미 이상의 무엇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알베르틴이 “당신은 너무 다정해요” 하고 말하며 내게 고마워하던 그 미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얼마나 지쳐 보이는지, 심지어 얼마나 초췌해 보이는지를 알아차렸다.

이 가운들이 마련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같은 종류의 다른 가운들을, 때로는 그저 옷감만을 빌려다가 알베르틴에게 입혀 보고 그녀 몸에 둘러 보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도제 부인의 위엄과 마네킹의 우아함으로 내 방 안을 거닐었다. 다만 베네치아를 떠올리게 하는 이 의상들을 보노라니, 파리에 갇힌 내 처지가 한결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사실 알베르틴은 나보다 훨씬 더 갇힌 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탈바꿈시키는 운명이 어떻게 그녀 감옥의 벽을 뚫고 들어와 그녀를 그 본질에서부터 바꾸어 놓고, 발베크에서 내가 알던 처녀를 지루하고 고분고분한 포로로 만들어 놓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렇다, 그녀 감옥의 벽도 그 영향이 그녀에게 미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어쩌면 바로 그 벽이 그 영향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알베르틴이 아니었으니, 발베크에서처럼 자전거를 타고 끊임없이 달아나며, 여자 친구들과 밤을 지새우러 가던 그 숱한 작은 해수욕장들 때문에, 게다가 그녀의 거짓말이 그녀를 붙잡기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드는 통에 도무지 찾아낼 수 없던 그런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집에 갇혀 고분고분하고 홀로 있는 그녀는, 발베크에서 내가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을 때 바닷가에서 보이던 그 모습, 곧 달아나기 잘하고 조심스럽고 교활한 그 존재, 그녀가 감출 줄 알던 온갖 밀회의 상상으로 그 존재가 부풀어 오르던, 그리하여 우리를 괴롭히기에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던, 남들에 대한 그녀의 냉담함과 무심한 대답 밑에서 어제의 밀회와 내일의 밀회가, 그리고 나를 향한 경멸에 찬 기만적인 속셈이 느껴지던 그 존재조차 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이 더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후려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내가 그녀의 날개를 잘라 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더는 승리의 여신이 아니라, 내가 벗어나고만 싶어지는 성가신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내 생각의 흐름을 돌리려고, 나는 알베르틴과 카드놀이나 체커를 시작하기보다는 그녀에게 음악을 조금 들려 달라고 청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그녀는 방 안쪽 끝의 두 책장 사이에 놓인 자동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그녀는 아주 새롭거나 내게 겨우 한두 번 들려준 적밖에 없는 곡들을 골랐다. 나를 더 잘 알게 되면서 그녀는, 내가 아직 내게 어렴풋한 것에만 생각을 붙들어 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게 거듭 연주되는 동안 내 지성의 점점 밝아지는, 그러나 아아, 일그러뜨리고 낯설게 만드는 빛 덕분에, 처음에는 안개 속에 거의 감추어져 있던 그 구조의 조각나고 끊긴 선들을 이어 붙일 수 있음을 기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첫 연주들에서 내 정신이 아직 형태 없는 성운을 빚어내는 그 일로부터 얻는 기쁨을 알았고, 내 생각에는 이해하고도 있었다. 그녀는 세 번째나 네 번째 되풀이에 이르면 내 지성이 모든 부분에 다다라, 따라서 그것들을 같은 거리에 놓아두고, 더는 그것들에 쏟을 활동이 남지 않게 되어, 그것들을 서로 늘여 놓고 한결같은 평면 위에 붙박아 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그 과정을 뚜렷이 알지는 못했을지라도, 내 지성의 노력이 한 작품의 신비를 걷어 내는 데 성공한 그 순간이면, 그 파괴의 작업 도중에 그 보상으로 무언가 이로운 성찰 하나쯤은 거의 반드시 주워 담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윽고 알베르틴이 “이 롤은 프랑수아즈에게 주고 다른 것으로 바꿔 오라고 할까요” 하고 말할 때면, 내게는 흔히 세상에 음악 한 곡이 줄어드는 셈이었으나, 어쩌면 진실 하나가 늘어나는 셈이기도 했다. 그녀가 연주하는 동안, 알베르틴의 그 숱한 머리채 가운데 내게 보이는 것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의 리본처럼 귀 옆에 하트 모양으로 매만져진 검은 머리 한 가닥의 고리뿐이었다. 그 천사 악사의 실체가,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내 안에서 차지하던 지난 시간의 여러 지점 사이를 오간 그 숱한 왕래로써, 그리고 내 시선에서부터 내 존재의 가장 깊숙한 감각에 이르기까지 그 기억이 머물던 여러 거처로써 이루어졌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녀의 내밀함 속으로 내려가도록 도와주었듯이,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 또한 하나의 부피를 지녔으니, 내가 그 여러 악구에 얼마나 빛을 던져 넣는 데, 그리고 처음에는 안개 속에 거의 온전히 감추어진 듯싶던 어떤 구조의 선들을 이어 붙이는 데 다소나마 성공했느냐에 따라 그 악구들이 들쭉날쭉 보였다 안 보였다 함으로써 생겨나는 부피였다.

나는 뱅퇴유 과 그 여자친구를 질투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알베르틴은 고백한 뒤로 그들을 만나려 든 적이 없었고, 우리가 세운 시골 휴가 계획들 가운데서도 몽주뱅에 그토록 가까운 콩브레를 스스로 물리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내가 알베르틴에게 연주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그것이 내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 뱅퇴유의 어떤 음악이곤 했다. 이 음악이 내 질투의 간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은, 내가 베르뒤랭 부인 댁에서 모렐이 그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알던 알베르틴이, 어느 날 저녁 그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의 연주를 들으러 가서 그와 사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냈을 때였다. 그런데 마침 그것은, 샤를뤼스 가 뜻하지 않게 가로챈, 레아가 모렐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내가 알게 된 직후의 일이었다. 나는 레아가 알베르틴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자문했다. ‘이 못된 것아, 이 심술궂은 계집애야’ 하는 말이 소름 끼치는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뱅퇴유의 음악이(더는 뱅퇴유 과 그 여자친구가 아니라) 레아와 괴롭게 얽혀 있었던 까닭에, 레아가 내게 준 슬픔이 가라앉자 나는 이 음악을 고통 없이 들을 수 있었으니, 하나의 병이 나로 하여금 다른 병들에 걸릴 온갖 가능성에 면역이 되게 해 준 것이다. 이 뱅퇴유의 음악 속에서, 내가 베르뒤랭 부인 댁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악구들, 그때는 흐릿하던 어렴풋한 유령들이 눈부신 건축 구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몇몇은 벗이 되었으니, 처음에는 겨우 알아보았을 뿐이고 기껏해야 못생겨 보이던 터라, 그것들이 첫눈에는 매력 없어 보이다가 잘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참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들과 같으리라고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는 그야말로 완전한 변모였다. 다른 한편, 내가 베르뒤랭 부인 댁에서 들은 음악에서 단번에 구별해 냈으나 그때는 알아보지 못했던 악구들을, 나는 이제 다른 작품들의 악구와 같은 것으로 알아보았으니, 이를테면 오르간을 위한 성스러운 변주곡의 그 악구가 그러했다. 그 악구는 베르뒤랭 부인 댁에서는 7중주 속에서 내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갔으나, 거기서도 성소에서 내려온 한 성인처럼 작곡가의 낯익은 요정들과 어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내게 너무 덜 선율적이고 그 리듬이 너무 기계적으로, 정오를 알리는 종들의 흔들리는 기쁨처럼 여겨지던 그 악구가, 이제는 내가 그 못생김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인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처음에 불러일으키는 실망에 뒤따르는 이런 반작용은, 사실 첫인상의 약화 탓으로 돌릴 수도 있고, 진실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노력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이는 모든 중요한 물음에서, 예술의 진실이라는 물음에서, 영혼 불멸의 진실이라는 물음에서 저마다 떠오르는 두 가설이다.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골라야 하는데, 뱅퇴유 음악의 경우 이 선택은 매 순간 갖가지 모습으로 스스로를 들이밀었다. 이를테면 이 음악은 내가 아는 모든 책보다 더 참된 무엇으로 여겨졌다. 때로 나는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것이 관념의 형태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문학으로(곧 지적으로) 옮겨 놓으면 그것을 설명하고 분석해 줄 뿐 음악처럼 다시 짜 맞추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에서는 소리들이 사물 자체의 억양을 띠는 듯하여, 우리 감각의 그 내밀하고 극단적인 지점을, 곧 우리에게 그 독특한 도취를 안겨 주는 그 부분을 재현해 낸다. 그 도취를 우리는 이따금 되찾곤 하지만, ‘날씨 참 좋다! 햇살이 얼마나 눈부신가!’ 하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옆 사람에게 조금도 전하지 못하니, 그 사람에게는 같은 태양과 같은 날씨가 전혀 다른 떨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뱅퇴유의 음악 속에는 표현할 수 없고 기록하는 것이 거의 금지된 그런 환영들이 있었으니, 잠들려는 순간 우리가 그 비현실적인 마법의 어루만짐을 받을 때, 바로 그 순간 이성은 이미 우리를 저버렸고 두 눈은 이미 감겨,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우리는 잠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술이 실재할 수도 있다는 이 가설에 나를 내맡길 때면, 음악이 줄 수 있는 것은 맑은 날의 그저 신경적인 기쁨이나 아편에 취한 밤 이상의 무엇이라는 생각이 정말로 들었다. 적어도 내가 느낀 바로 판단하건대, 더 실재하고 더 풍요로운 도취였다. 우리가 더 고양되고 더 순수하며 더 참되다고 느끼는 어떤 감정을 안겨 주는 조각이나 음악이, 어떤 확고한 정신적 실재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그러한 깊이와 진실의 인상을 주는 이상, 그것은 분명 그 실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뱅퇴유의 그런 어떤 악구만큼, 내 삶의 어떤 순간들에, 이를테면 마르탱빌의 종탑들을 바라볼 때, 혹은 발베크 근처 길가의 어떤 나무들을 바라볼 때, 아니 더 단순하게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어떤 홍찻잔을 맛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그 독특한 기쁨을 그토록 가까이 닮은 것은 없었다.

이 비교를 더 밀고 나가지 않더라도, 나는 뱅퇴유가 자신이 작곡한 세계에서 우리에게 보내온 그 맑은 소리들과 타오르는 빛깔들이, 집요하게, 그러나 내가 붙잡기에는 너무 빠르게 내 상상 앞에서 행진하는 것을, 제라늄의 향기로운 보드라움에 견줄 만한 무엇을 느꼈다. 다만, 기억 속에서라면 이 어렴풋함은, 어떤 향미가 어째서 우리에게 빛나는 감각들을 떠올려 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정황의 안내선 덕분에, 탐구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정확히 붙박일 수는 있지만, 뱅퇴유가 주는 어렴풋한 감각들은(마르탱빌의 종탑들이 주던 것처럼) 기억이 아니라 인상에서 오는 것이어서, 그의 음악의 그 제라늄 향기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설명이 아니라 그 깊은 등가물을, 곧 그의 작품들이 그 흩어진 조각들, 진홍빛으로 번득이는 균열들인 듯싶은 그 미지의 현란한 축제를, 그가 우주를 ‘듣고’ 그것을 저 자신 너머 멀리 던져 보내던 그 방식을 찾아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다른 작곡가도 우리에게 결코 보여 준 적 없는 유일무이한 한 세계의 이 미지의 특질,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작품 자체의 내용에서보다 한층 더, 천재의 가장 진정한 증거가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알베르틴에게 말했다. “문학에서도요?” 알베르틴이 물었다. “문학에서도.” 그리고 뱅퇴유 작품들의 단조로움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알베르틴에게 위대한 문인들이란 언제나 단 하나의 작품밖에 지어내지 못했다고, 아니 차라리 그들이 세상에 가져오는 하나의 동일한 아름다움을 여러 매체를 통해 굴절시켜 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늦지만 않았다면, 얘야,”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잠든 사이 네가 읽는 모든 작가들에게서 이 특질을 보여 주고, 뱅퇴유에게서와 똑같은 그 동일성을 보여 줄 텐데. 네가 나처럼 알아보기 시작한 이 전형적인 악구들은, 나의 작은 알베르틴아, 소나타에서든 7중주에서든 다른 작품들에서든 똑같은 그것들은, 이를테면 네가 좋아한다면, 바르베 도르비이에게서는 물질적 흔적으로 드러나는 숨은 실재일 테니, l’Ensorcelée의, Aimée de Spens의, la Clotte의 생리적 홍조, Rideau Cramoisi의 그 손, 옛 풍습과 관습, 옛말들, 그 뒤에 과거가 도사린 옛 특유의 생업들, 장원의 촌사람들이 엮어 낸 구전 역사, 잉글랜드의 향내가 배어 있고 스코틀랜드 마을처럼 매혹적인 그 고귀한 노르망디의 도시들, 어찌해 볼 도리 없는 저주의 근원, 벨리니, 그 양치기, 어떤 대목에서 느껴지는 비슷한 불안의 감각, 그것이 Une Vieille Maîtresse에서 남편을 찾는 아내에게서든, 아니면 l’Ensorcelée에서 벌판을 헤매는 남편과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앙소르셀레’ 자신에게서든 말이야. 뱅퇴유에게도 토머스 하디의 소설들에 나오는 그 석공의 기하학 같은 전형적인 악구들이 따로 있단다.”

뱅퇴유의 악구들은 내게 ‘작은 악절’을 떠올리게 했고, 나는 알베르틴에게 그것이 이를테면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의 국가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네가 아는 질베르트의 부모 말이야. 너는 그 애가 나쁜 애는 아니라고 했지. 그런데 그 애가 너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니? 그 애가 내게 네 이야기를 하더구나.” “네, 있잖아요, 날씨가 나쁘면 그 애 부모가 수업 끝난 그 애를 데려가라고 마차를 보내곤 했는데, 한번은 그 애가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입을 맞춘 것 같아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웃으며, 마치 재미난 고백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그 애가 대뜸 제게 여자를 좋아하느냐고 묻더군요.”(그러나 그녀가 질베르트가 자기를 집까지 데려다준 것을 기억한다고 겨우 믿는 정도라면, 어떻게 질베르트가 그런 야릇한 질문을 했다고 그토록 또렷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무슨 엉뚱한 생각이 들었는지 그 애를 놀려 주려고, 저는 그렇다고 했어요.”(알베르틴이 마치 질베르트가 이것을 내게 말했을까 봐, 그리고 내가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결론짓기를 바라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둘이 그런 속내를 주고받았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구나 알베르틴 말로는 그전에 입까지 맞추었다면서, 기이한 일이었다.) “그 애가 그런 식으로 저를 네댓 번, 어쩌면 그 이상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그게 다예요.” 나는 그녀에게 더 캐묻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지만, 이 모든 일에 아무런 중요성도 두지 않는 듯 보이려고 나 자신을 억누르며 다시 토머스 하디로 돌아갔다. “무명의 주드사랑받는 여인에 나오는 석공들, 아버지가 섬에서 캐낸 돌덩이들이 배에 실려 와 아들의 작업실에 쌓여 조각상으로 바뀌는 그 대목을 기억하니. 한 쌍의 푸른 눈에서는 무덤들의 평행, 그리고 배의 평행선, 연인들과 죽은 여인을 실은 기차 객차들의 평행. 남자가 세 여자를 사랑하는 사랑받는 여인과 여자가 세 남자를 사랑하는 한 쌍의 푸른 눈 사이의 평행, 요컨대 그 섬의 바위투성이 땅 위에 층층이 쌓아 올린 집들처럼 하나 위에 다른 하나를 포갤 수 있는 그 모든 소설들 말이야. 이렇게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 가장 위대한 작가들을 요약할 수는 없지만, 스탕달에게서는 어떤 높이의 감각이 정신의 삶과 결합하는 것을 너는 보게 될 거야. 쥘리앵 소렐이 갇히는 그 드높은 곳, 파브리스가 갇히는 그 꼭대기의 탑, 블라네스 신부가 점성술에 골몰하고 파브리스가 그토록 장엄한 조감을 얻는 그 종루 말이야. 너는 페르메이르의 그림 몇 점을 본 적이 있다고 했지. 그것들이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조각들이라는 것을, 그것들을 되살려 낸 천재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언제나 똑같은 탁자, 똑같은 양탄자, 똑같은 여인, 그 새롭고 유일무이한 아름다움, 소재에서 닮은 점을 찾으려 하지 않고 빛깔이 자아내는 그 독특한 인상을 따로 떼어 내려 한다면, 어떤 것도 그것을 닮지도 설명하지도 않는 그 시대의 한 수수께끼임을 너는 알아차렸을 거야. 자, 그런데 이 새로운 아름다움은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에서 한결같으니, 그 신비로운 얼굴을 한 도스토옙스키의 여인은(렘브란트의 여인만큼이나 특징적인)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마치 그 겉보기의 선량함이 한낱 가장이었던 양, 느닷없이 무시무시한 오만으로 돌변하고(그럼에도 속마음은 악하다기보다 선한 듯 보이지만),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아글라야에게 연애편지를 써서 자기가 그녀를 미워한다고 말하는 경우든, 아니면 이와 완전히 똑같은 방문에서(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바냐의 가족을 모욕하는 그 방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에서 그 다른 여자가 무섭다고 여겼던 만큼이나 매혹적인 그루셴카가, 그러다 별안간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를 모욕함으로써 자신의 악의를 드러내는 경우든(그루셴카도 속은 착한데 말이야), 언제나 똑같지 않으냐. 그루셴카며 나스타샤는 카르파초의 창부들만큼이나, 아니 렘브란트의 밧세바만큼이나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인물들이야. 페르메이르에게 어떤 영혼의, 어떤 직물과 장소의 빛깔의 창조가 있듯이,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의 집의 창조가 있으니, 죄와 벌에 나오는 그 살인의 집이, 문지기가 딸린 그 집이, 도스토옙스키가 그린 살인의 집의 걸작, 곧 로고진이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를 죽이는 그 어둡고 길고 높고 거대한 집만큼이나 경이롭지 않으냐. 한 집의 그 새롭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 한 여인의 얼굴과 뒤섞인 그 새로운 아름다움, 그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에 준 유일무이한 것이며, 문학 비평가들이 그와 고골 사이에, 혹은 그와 폴 드 코크 사이에 할 법한 비교란 이 은밀한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겉도는 것이어서 아무런 흥미도 없어. 게다가 내가 네게 이 소설에서 저 소설로 똑같은 장면이라고 말했다면, 하나의 소설 안에서도, 그 소설이 조금이라도 길다면, 똑같은 장면들과 똑같은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는 법이야. 전쟁과 평화에서, 마차 안의 어떤 장면에서 이것을 네게 쉽게 보여 줄 수 있을 텐데…”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이제 당신이 도스토옙스키를 떠나려는 걸 보니 잊어버릴까 봐 걱정돼요. 여보, 요전 날 당신이 ‘그건 말하자면 세비녜 부인의 도스토옙스키적인 면이지’라고 했을 때 그게 무슨 뜻이었어요? 솔직히 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제겐 너무 다르게 여겨지거든요.” “이리 오렴, 얘야, 내가 하는 말을 그렇게 잘 기억해 준 데 고마워서 입을 맞춰 줄 테니, 그다음에 다시 자동피아노로 가렴. 그리고 내가 한 말이 좀 어리석었다는 건 인정해야겠구나.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그 말을 했어. 첫째는 특별한 이유야. 내가 말하려던 건, 세비녜 부인이 엘스티르처럼, 도스토옙스키처럼, 사물을 논리적 순서대로, 곧 원인에서부터 제시하는 대신, 우리에게 먼저 결과를, 우리를 사로잡는 착각을 보여 준다는 거야. 도스토옙스키가 자기 인물들을 제시하는 방식이 바로 그렇지. 그들의 행동은 바다가 하늘에 걸려 있는 듯 보이는 엘스티르의 그림 속 저 효과들만큼이나 우리를 헷갈리게 해. 우리는 어떤 뚱한 사람이 실은 더없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혹은 그 반대라는 것을 알고는 사뭇 놀라지.” “네, 하지만 세비녜 부인에게서 예를 하나 들어 봐요.” “인정하마.”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지나치게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예를 찾아낼 수는 있어.”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누구를 죽인 적이 있나요? 제가 아는 그의 소설들은 죄다 어느 범죄 이야기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그건 그에게 하나의 강박이에요, 늘 그 이야기만 하다니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알베르틴, 나는 그의 삶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다만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도 이런저런 형태로 죄를 알았던 것은 확실하고, 아마 법이 단죄하는 어떤 형태로도 그랬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상 참작으로 유죄가 되는 자기 주인공들처럼(하기야 그들이 온전히 주인공인 것도 아니지만) 다소간 범죄자였을 게 틀림없어. 그리고 그 자신이 반드시 범죄자였어야 하는 건 아닐 테지. 나는 소설가가 아니야. 창작하는 작가들이 몸소 겪어 보지 못한 어떤 형태의 삶에 이끌리는 일도 있을 법하지. 우리가 약속한 대로 내가 너와 함께 베르사유에 가게 되면, 나는 네게 더없이 점잖은 사내, 둘도 없는 좋은 남편이면서 소름 끼치도록 타락한 책을 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초상을 보여 주고, 그 맞은편에는 교훈담을 쓰면서도 오를레앙 공작부인을 배신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녀의 자식들을 그녀에게 등 돌리게 하여 그녀를 괴롭힌 장리스 부인의 초상을 보여 주마. 그래도 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이 살인에 대한 집착이 나를 그에게서 몹시 멀어지게 하는 어떤 예사롭지 않은 것임은 인정해. 나는 보들레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야.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