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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알베르틴의 도주 ⑥

5권 제2부 · 제3장: 알베르틴의 도주

Si le viol, le poison, le poignard, l’incendie
N’ont pas encor brodé de leurs plaisants dessins
Le canevas banal de nos piteux destins,
C’est que notre âme, hélas! n’est pas assez hardie.

그러나 나는 적어도 보들레르가 진심이 아니라고 가정할 수는 있어.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종류의 것은 죄다 나 자신과는 더할 나위 없이 동떨어져 보여, 내가 전혀 모르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들이 있지 않은 한 말이야. 우리는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깨닫게 되니까.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나는 가장 깊은 통찰을 발견하지만, 그건 인간 영혼의 어떤 외따로 떨어진 영역들 속으로일 뿐이야. 하지만 그는 위대한 창조자야. 우선, 그가 그리는 세계는 정말로 그가 창조한 것처럼 보이거든. 레베데프며 카라마조프며 이볼긴이며 세그레프처럼 자꾸만 되풀이해 나타나는 그 모든 어릿광대들, 그 믿기 힘든 행렬은, 렘브란트의 야경에 깃든 무리보다 더 환상적인 하나의 인간 군상이야.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오직 같은 방식으로, 곧 조명과 의상의 효과로 환상적일 뿐, 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것은 동시에, 오직 도스토옙스키에게만 속하는 심오하고 유일무이한 진실들로 가득 차 있어. 그 어릿광대들은 옛 연극의 어떤 인물들처럼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생업이나 소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인간 영혼의 참된 면모들을 얼마나 잘 드러내는지! 나를 놀라게 하는 건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그 엄숙한 태도야. 너는 그의 인물들 속에서 자존심과 자만이 하는 역할을 눈여겨본 적이 있니? 그에게는 사랑과 가장 격렬한 증오, 선량함과 배신, 소심함과 오만이 한낱 하나의 동일한 본성의 두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그들의 자존심과 자만이, 아글라야를, 나스타샤를, 미탸가 그 수염을 잡아당기는 그 대위를, 크라소트킨을, 알료샤의 원수 같은 벗을 그들의 참모습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가로막는 거지. 하지만 그 밖에도 훌륭한 대목이 많아. 나는 그의 책을 아주 조금밖에 몰라. 그렇지만 그것은 가장 고전적인 예술에 값하는, 조각처럼 단순한 하나의 주제, 복수와 속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프리즈 같은 것이 아닐까. 늙은 카라마조프가 그 가엾은 백치 여자에게 아이를 배게 하는 죄, 스스로도 모르게 복수하는 운명의 도구가 된 그 어미가, 어렴풋이 제 모성 본능에도 따르면서, 어쩌면 자기를 유혹한 자에 대한 육체적 원한과 감사가 뒤섞인 감정을 느끼며, 그 신비롭고 짐승 같고 설명할 길 없는 충동에 이끌려 늙은 카라마조프의 땅에 와서 아이를 낳는 그 죄 말이야. 이것이 첫 번째 삽화야, 오르비에토의 조각들 가운데 ‘여자의 창조’처럼 신비롭고 웅장하며 장엄한. 그리고 그 짝을 이루는 두 번째 삽화는 스무 해도 더 지난 뒤의 일로, 늙은 카라마조프의 살해, 그 백치의 아들 스메르댜코프가 카라마조프 집안에 안긴 치욕, 그리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이어지는 또 하나의 행위, 늙은 카라마조프의 정원에서 있었던 그 출산만큼이나 어둡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그만큼이나 신비롭게 조각 같고 설명할 길 없는 행위, 곧 스메르댜코프가 제 죄를 이루고 나서 목을 매는 그 행위야. 도스토옙스키로 말하자면, 그를 바싹 흉내 낸 톨스토이를 내가 언급했을 때, 나는 네가 생각한 것만큼 그에게서 멀리 벗어난 게 아니었어. 도스토옙스키에게는, 뒤에 톨스토이에게서 꽃피게 될 많은 것이 응축된 채 안달하며 들어 있거든. 도스토옙스키에게는 그 원시 화가들 특유의, 그 제자들이 밝게 걷어 낼 그 예시적인 어둠이 있어.” “여보, 당신이 그렇게 게으르다니 정말 큰일이에요. 문학을 보는 당신의 관점 좀 봐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던 방식보다 훨씬 더 흥미롭잖아요. 에스테르를 두고 우리에게 쓰게 하던 그 작문들 말이에요. ‘나리,’ 기억하죠.” 그녀는 웃으며 말했는데, 자기 선생들과 자신을 놀리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자기 기억 속에서, 우리 공통의 기억 속에서 이미 거의 정겨워진 유물 하나를 찾아내는 기쁨에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동안, 그리고 내가 계속 뱅퇴유를 생각하는 동안, 이번에는 다른 가설, 유물론적 가설, 곧 아무것도 없다는 가설이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고, 어쩌면 결국, 뱅퇴유의 악구들이 홍찻잔에 적신 마들렌을 맛보았을 때 내가 겪은 것과 비슷한 어떤 영혼의 상태들의 표현인 듯 보인다 해도, 그런 상태들의 어렴풋함이 그 깊이의 표시라기보다는 우리가 아직 그것들을 분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표시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들 속에 다른 상태들보다 더 실재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런데도 홍찻잔을 마시던 동안, 혹은 샹젤리제에서 썩어 가는 나무 냄새를 맡던 동안 느낀 그 행복, 그 행복 속의 확신의 감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어쨌든, 하고 의심의 정령이 속삭였다. 설령 이런 상태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다른 상태들보다 더 깊고, 우리가 아직 헤아리지 못한 너무 많은 힘을 끌어들이는 바로 그 까닭에 분석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뱅퇴유 음악의 어떤 악구들의 매력이 우리에게 그런 상태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 매력 또한 분석을 거부하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그것이 같은 깊이를 지녔음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음악의 한 악구의 아름다움이 우리가 받은 어떤 지적 인상의 이미지처럼, 적어도 그것과 비슷한 것처럼 쉬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다만 그 아름다움이 비지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이 뱅퇴유의 7중주를 비롯해 어떤 작품들에 깃들어 떠나지 않는 그 신비로운 악구들을 유독 심오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러나 알베르틴이 내게 들려준 것은 그의 음악만이 아니었다. 자동피아노는 이따금 우리에게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학술 환등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콩브레 시절의 것보다 더 근대적인 발명으로 채워진 이 파리의 방 벽 위로, 알베르틴이 라모를 쳐 주느냐 보로딘을 쳐 주느냐에 따라, 어느 때는 큐피드와 장미가 흩뿌려진 18세기의 태피스트리가, 또 어느 때는 소리가 가없는 거리와 눈의 부드러운 양탄자에 잠겨 잦아드는 동방의 초원이 내 앞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덧없는 장식들이야말로 마침 내 방의 유일한 장식이었으니, 레오니 고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무렵 나는 스완처럼 수집가가 되어 그림이며 조각상을 사들이리라 다짐했건만, 내 돈은 죄다 말과 자동차와 알베르틴의 옷을 마련하는 데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방에는 이 모든 것보다 더 값진 예술품이 있지 않았던가, 바로 알베르틴 자신이.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알기조차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바로 그 여인이, 이제는 길들여진 야수처럼, 내가 조련사 노릇을 하고 그 삶의 틀이자 격자 지지대 노릇을 해 준 장미 덤불처럼, 날마다 이렇게 집 안에서, 내 곁에서, 자동피아노 앞에, 내 책장을 등지고 앉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야릇한 심정이 되었다. 골프채를 메고 다닐 때는 구부정하니 뿌루퉁하게 보이던 그의 어깨가, 이제는 내 책들에 기대어 있었다. 처음에 나는 소녀 시절 내내 자전거 페달을 밟았으리라고 지극히 그럴듯하게 상상했던 그의 맵시 있는 두 다리가, 이제는 자동피아노의 페달 위에서 번갈아 오르내렸으니, 그 위에서 알베르틴은 금실로 짠 천으로 지은 신을 눌렀는데, 그가 몸에 익힌 그 기품은 바로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오히려 그를 더욱 내 것으로 느끼게 했다. 한때는 손잡이를 잡도록 단련되었던 그의 손가락은, 이제 성녀 세실리아의 손가락처럼 건반 위에 놓여 있었다. 내 침대에서 바라보면 억세고 도톰하던 그 목의 곡선이, 그 거리에서 등불빛을 받으니 더 발그레해 보였는데, 그러나 옆얼굴로 드러난 그의 얼굴만큼 발그레하지는 않았으니, 나 자신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나 기억으로 가득 차고 욕망으로 타오르는 내 시선이 그 얼굴에 그토록 눈부신 광채와 그토록 강렬한 생명감을 더한 나머지, 그 윤곽이 발베크의 호텔에서 그에게 입 맞추고 싶은 압도적인 욕망에 내 시야가 흐려지던 그날과 거의 똑같은 마법의 힘으로 도드라지고 회전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의 표면 하나하나를 내가 볼 수 있는 데 너머로, 그리고 그것을 내게서 감추면서 도리어 그 도드라짐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 아래로, 곧 두 눈을 반쯤 가린 눈꺼풀과 두 볼의 위쪽을 덮은 머리카락 너머로 길게 이어 나갔으니, 겹겹이 포개진 그 평면들의 부조를 느꼈다. 그의 눈은, 오팔이 아직 박혀 있는 모암(母巖) 속에서 오로지 두 면만이 아직 갈려, 금속보다 더 반짝이게 되어, 그것을 에워싼 눈먼 물질 한복판에서 유리 밑에 놓인 나비의 연보랏빛 비단 날개를 드러내 보이듯 빛났다. 그가 다음에 무엇을 칠지 물으려 돌아설 때마다 다른 모습을 띠던 그의 검고 곱슬한 머리카락은, 어느 때는 끝이 뾰족하고 밑동이 넓으며 깃털 돋친 삼각형의 눈부신 날개 같았고, 어느 때는 그 곱슬거림의 굴곡을 억세고 다채로운 사슬로, 마루와 분수령과 벼랑이 겹친 덩어리로 엮어 냈으니, 그토록 풍부하고 그토록 다양한 결을 지녀 자연이 흔히 이루어 내는 다양함을 넘어서는 듯했고, 오히려 자기 솜씨의 유연함과 열정과 조형과 생명을 더 두드러지게 하려고 일부러 난제를 쌓아 올리는 조각가의 소망에 응답하는 듯했으며, 매끈하고 발그레한 그 얼굴의, 색칠한 나뭇조각의 반들반들한 무광의 그 얼굴의, 생동하는 곡선과 이를테면 회전을, 한 번 끊었다가 다시 이음으로써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이 모든 부조와 대비되어, 또한 그것들을 그와 하나로 묶고 그의 자태를 그 형태와 쓰임에 맞추어 준 조화에 힘입어, 오르간의 건반처럼 그를 반쯤 가린 자동피아노도, 책장도, 방의 그 구석 전체가, 이 천사 악사를 모신, 불 밝혀진 성소요 성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잦아든 듯 보였으니, 그 예술품은 머지않아 매혹적인 마법으로 제 벽감에서 떨어져 나와 그 값지고 발그레한 살결을 내 입맞춤에 내밀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알베르틴은 결코 나에게 예술품이 아니었다. 여인을 예술적으로 감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으니, 스완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로 말하자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으니, 초연히 관찰하는 힘이라곤 조금도 없어서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결코 알지 못했으며, 스완이 하나도 흥미로울 것 없어 보이던 여인에게 뒤늦게 예술적 품위를 더해 주었을 때, 곧 그 얼굴을 두고 짐짓 정중하게 즐겨 하던 대로 그를 루이니의 어떤 초상에 견주고, 그의 옷차림에서 조르조네 그림 속 가운이나 보석을 찾아내던 것을 보고 나는 놀라워했었다. 나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알베르틴에게서 얻는 기쁨과 고통은, 나에게 이르기 위해 결코 취향이나 지성의 경로를 밟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알베르틴을 놀라운 고색이 감도는 천사 악사로 여기며 그를 소유한 것을 스스로 대견해하기 시작하자, 오래지 않아 그가 시시하게 느껴졌으니, 이내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지루해졌으나 그런 순간은 짧았다. 우리는 다다를 수 없는 무언가를 좇을 때에만 사랑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만을 사랑하니, 아주 곧 나는 내가 알베르틴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눈 속에서 나는, 어느 때는 희망이, 어느 때는 기억이, 어쩌면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기쁨에 대한, 그렇다면 그가 내게 말하느니 차라리 단념하는 편을 택했을 그 기쁨에 대한 회한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 눈동자 속의 어떤 번득임 말고는 더 아무것도 거두어들이지 못한 나는, 극장 입장을 거절당한 채 문의 유리판에 얼굴을 붙이고서도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도 알아채지 못하는 구경꾼이나 다름없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경우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를 속이는 자들이 하나같이 보이는 이 거짓말에의 집요함은, 기이한 일이며, 말하자면 더없이 의심 많은 자들이 선(善)에 대한 자기 믿음을 내보이는 증거이다. 그들의 거짓말이 고백보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고 말해 봤자 소용없고, 그들 스스로 그것을 깨닫는대도 소용없으니, 그들은 잠시 뒤면 다시 거짓말을 시작하여, 우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에 관한 애초의 말과 앞뒤를 맞추려 든다. 마찬가지로 제 목숨을 아끼는 무신론자도 자기 용기에 대한 세간의 관념이 반박당하도록 두느니 차라리 산 채로 불에 타는 편을 택한다. 그런 시간 동안 나는 이따금 그의 얼굴에, 그의 눈길에, 그의 뾰로통한 입술에, 그의 미소에, 그 저녁마다 그를 여느 때의 그와 달라 보이게 하고, 그런 환영을 누리지 못하는 나에게서 멀어지게 하던 그 내면의 환영들을 응시하는 빛이 어리는 것을 보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내 사랑?” “아니, 아무것도.” 이따금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다는 이 나무람에 대꾸하여, 그는 어느 순간에는 내가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음을 그도 모르지 않는 것들을 (마치 결코 손톱만 한 소식도 주지 않으면서 그 대신 어제 신문에서 스스로 읽을 수 있었을 이야기나 늘어놓는 정치가들처럼) 들려주었고, 또 어느 순간에는 조금의 정확함도 없이, 일종의 거짓 속내를 털어놓듯, 우리가 처음 만나기 전해에 발베크에서 다녔던 자전거 나들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내가 그것으로 미루어, 그가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먼 나들이를 다니는 처녀임에 틀림없다고 추론했을 때 이미 옳게 짐작했다는 듯이, 그 나들이 이야기는 발베크의 바닷가 산책로에서 처음 나를 사로잡았던 것과 똑같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알베르틴의 입술 사이로 살며시 밀어 넣었다. 그는 또한 몇몇 여자친구와 함께 네덜란드 시골을 두루 돌던 소풍 이야기며, 저녁 늦은 시각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무렵 그가 거의 다 아는 빽빽하고 흥겨운 인파가 거리와 운하 예선로를 메우고 있었으니, 나는 빠르게 달리는 마차의 번뜩이는 창유리에 비치듯 알베르틴의 반짝이는 눈에 그 무수히 가물거리는 불빛들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는 듯했다. 이른바 미적 호기심이라는 것은, 알베르틴이 머물렀던 곳들에 대해, 어느 특정한 저녁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에 대해, 그의 미소들에 대해, 그의 눈빛에 대해, 그가 내뱉은 말들에 대해, 그가 받은 입맞춤에 대해 내가 느끼는 그 괴롭고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에 견주면 차라리 무관심이라 불려 마땅할 터였다. 아니, 언젠가 내가 생루를 두고 느꼈던 그 질투가, 설령 계속되었다 한들, 나에게 이토록 어마어마한 불안을 안겨 주지는 못했으리라. 여자가 여자를 향해 품는 이 사랑은 너무나 낯선 것이었으니, 그 무엇으로도 나는 그 쾌락과 그 성질에 대해 확실하고 정확한 관념을 세울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얼마나 많은 장소를 (그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곳들, 그가 어떤 즐거움을 누렸을지도 모를 어렴풋한 유흥지들까지도), 얼마나 많은 장면을 (사람이 붐비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람들이 그의 몸을 스칠 수 있는 곳이라면), 알베르틴은, 제 앞의 울짱 앞으로 제 수행원 일행 전부를 몰고 가 그들을 극장에 들여보내는 사람처럼, 내가 그것들에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던 내 상상 혹은 내 기억의 문턱에서, 내 마음속으로 들여보냈던가! 이제 내가 그것들에 대해 지닌 앎은 내면적이고, 즉각적이며, 발작적이고, 고통스러웠다. 사랑, 그것은 마음으로 감지되는 공간과 시간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지만 어쩌면 내가 나 자신 온전히 정숙했더라면,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온갖 부정 때문에 괴로워했을 터인데, 알베르틴에게서 상상하며 나를 괴롭히던 것은 새로운 여인들의 환심을 사고 새로운 연애를 꾸미려는 나 자신의 끊임없는 욕망이었으니, 곧 요전 날 그의 곁에 있으면서도 불로뉴 숲의 탁자에 앉은 젊은 여자 자전거꾼들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눈길을 두고 그를 죄인으로 여기는 짓이었다.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 말고는 직접적인 앎이 없으니, 우리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질투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관찰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앎과 슬픔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 몸소 느낀 쾌락으로부터일 뿐이다.

이따금 알베르틴의 눈 속에서, 그 두 볼의 갑작스러운 상기 속에서, 나는 하늘보다도 더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으로, 곧 나로선 알 수 없는 알베르틴의 기억들이 살아 움직이는 그곳으로 한 줄기 온기가 슬며시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면, 발베크의 바닷가에서든 파리에서든 알베르틴을 알아 온 여러 해를 떠올릴 때, 내가 그에게서 요즈음에야 발견했음을 깨달은 이 아름다움, 곧 내 애인이 그토록 여러 평면 위에서 자라나고 그토록 여러 지난날을 제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에 있던 이 아름다움이, 거의 가슴을 저미도록 사무쳤다. 그러면 그 발그레해진 얼굴 아래로, 내가 알베르틴을 알지 못하던 그 저녁들의 다함 없는 넓이가 심연처럼 입을 벌리는 것을 나는 느꼈다. 마음만 먹으면 나는 알베르틴을 무릎 위에 앉히고,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쌀 수도 있었다. 그를 어루만지고, 두 손을 천천히 그의 몸 위로 미끄러뜨릴 수도 있었으나, 마치 태고의 대양의 소금이나 어느 별의 빛을 그 안에 가둔 돌을 만지듯, 나는 안으로는 무한에 가닿는 한 사람의 봉인된 겉껍질밖에는 만지고 있지 못함을 느꼈다. 몸을 나누어 놓기로 정하면서 정작 영혼끼리 서로 스며드는 일은 가능하게 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자연의 무심함이 우리를 몰아넣은 그 처지에서, 나는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의 몸은 내 몸의 권력 아래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내 마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기에). 그리고 나는 깨달았으니, 알베르틴은 나에게조차, 내가 내 집을 풍요롭게 하려고 맞아들였다고 여긴 그 놀라운 포로가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그의 존재를 완전히 감추어, 나를 찾아온 벗들조차 그가 복도 끝, 내 방 옆방에 있으리라곤 결코 의심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 마치 중국의 공주를 병 속에 봉인해 두고서도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그 사내처럼 했건마는 소용없었다는 것을. 잔인하되 헛된 압박으로 나를 지난날의 기억으로 몰아붙이면서, 그는 무엇보다 시간의 힘센 여신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를 위해 세월을, 재산을 잃어야만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아, 결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자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노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만 있다면, 나로선 아쉬울 것이 없다. 물론 고독이 더 나았을 테고, 더 결실 있고, 덜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러나 만일 내가 스완이 권한 수집가의 삶을 (그 기쁨을 두고 샤를뤼스 남작은 내가 모른다고 나무랐으니, 그는 재치와 오만과 좋은 취향을 뒤섞어 “자네 방은 어쩌면 이리도 흉하나!” 하고 내게 말했다) 살았더라면, 오래 좇은 끝에 마침내 손에 넣은, 혹은 좋게 보아 초연히 관조한 그 조각상들이며 그림들이, 곧잘 이내 아물었으나 알베르틴의, 또 사람들 일반의, 또 내 생각들 자체의 무심한 서투름이 오래잖아 다시 헤집어 놓곤 하던 그 작은 상처처럼, 내 경계 너머로, 곧 사사로운 것이긴 해도 우리가 오직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게 된 날부터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곧 다른 사람들의 삶이 지나다니는 큰길로 트여 나가는 그 오솔길 위로 나를 이끌어 주었을 것인가?

이따금 달이 어찌나 밝던지, 알베르틴이 잠자리에 든 지 한 시간쯤 지나서 나는 그의 머리맡으로 가 창 너머로 그것을 보라고 이르곤 했다. 내가 그의 방으로 간 것이 그가 정말 거기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때문이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설령 그가 원했다 한들, 달아날 수 있을 가망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려면 프랑수아즈와의 있을 성싶지 않은 공모가 필요했으리라. 어둑한 방에서 나는 베개의 흰빛 위에 얹힌 검은 머리카락의 가느다란 관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알베르틴의 숨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잠은 어찌나 깊던지 처음엔 침대까지 다가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다 나는 그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의 잠은 여전히 똑같은 속삭임과 함께 흘러갔다. 내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그의 깨어남이 얼마나 명랑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를 껴안고 흔들었다. 대번에 그는 잠에서 깨었으나, 한순간의 틈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두 팔로 내 목을 감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오려나 어쩌려나 막 궁금해하던 참이었어.” 그러고는 다정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웃었다. 잠들었을 때 그의 사랑스러운 머릿속은 명랑함과 애정과 웃음 말고는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다고 말할 법했다. 그리고 그를 깨우면서 나는, 마치 과일을 자를 때처럼, 갈증을 풀어 주는 넘쳐흐르는 즙을 터뜨렸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저물었다. 화창한 날씨가 돌아왔고, 알베르틴이 방금 내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면, 내 방도, 커튼도, 커튼 위의 벽도 아직 아주 캄캄한데, 이웃 수녀원 뜰에서, 성당의 하모늄처럼 정적 속에 풍요롭고 값진, 어느 낯선 새의 가락이 들려왔으니, 그 새는 리디아 선법으로 벌써 아침 기도를 노래하며, 제 눈에는 보이는 태양의 풍요롭고 눈부신 음을 내 어둠 한복판으로 던져 넣곤 했다. 한번은 정말이지 우리가 문득, 애처로운 부름의 규칙적인 가락을 들었다. 비둘기들이 구구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건 벌써 날이 밝았다는 증거야.” 하고 알베르틴이 말했다. 그러고는 나와 함께 지내느라 화창한 날씨의 기쁨을 놓쳐 아쉽다는 듯, 눈썹을 거의 찌푸린 채, “비둘기가 돌아왔으니 봄이 시작됐네.” 그 구구 소리와 수탉의 울음소리 사이의 닮음은, 뱅퇴유 7중주곡에서 아다지오의 주제와 마지막 악장의 주제 사이의 닮음만큼이나 깊고도 아리송했으니, 마지막 악장의 주제는 다른 것과 똑같은 중심 주제에 바탕을 두었으되 조성과 박자의 차이로 하도 변형된 나머지, 문외한이 뱅퇴유에 관한 책을 펼치면 그 셋이 모두 똑같은 네 음에 바탕을 두었음을 알고는 놀라게 되는데, 그 네 음은 그렇더라도 피아노에서 손가락 하나로 짚어 낼 수는 있으나 세 단편 어느 것의 무엇도 되살려 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비둘기들이 연주한 이 우울한 단편은 일종의 단조(短調)의 수탉 울음이어서, 하늘로 솟구치지도, 수직으로 오르지도 않고, 나귀의 울음처럼 규칙적이며 부드러움에 감싸여, 이 비둘기에서 저 비둘기로 하나의 수평선을 따라 이어질 뿐, 결코 제 몸을 일으키지도, 그 옆으로 퍼지는 하소연을 도입부의 알레그로와 종악장에서 그토록 자주 터져 나오던 그 환희에 찬 부름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