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녀가 나에게 죽은 것처럼 보일 수 있었겠는가, 이제 그녀를 떠올리려 해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이런저런 것을 떠올리곤 하던 바로 그 이미지들뿐이고, 그 하나하나가 저마다 어떤 특정한 순간과 결부되어 있는데? 자전거의 신비로운 바퀴 위로 재빠르게 몸을 숙인 채, 비 오는 날이면 가슴이 도드라지게 하는 방수복의 아마존 여전사 같은 흉갑을 꽉 조여 입고, 터번처럼 감아올린 머리칼 속에서 뱀들이 꿈틀거리는 가운데, 그녀는 발베크 거리에 공포를 흩뿌리고 다녔다. 우리가 샴페인을 챙겨 샹트피 숲으로 가던 저녁이면, 그녀의 목소리는 도발적으로 달떠 있었고, 그녀는 얼굴에, 오직 광대뼈 위에만 물드는 그 창백한 온기를 드러냈으므로, 마차의 어둠 속에서 그녀를 겨우 알아볼까 말까 한 나는 그녀를 더 잘 보려고 그 얼굴을 달빛 속으로 끌어당겼는데, 이제 나는 그것을, 결코 끝나지 않을 어둠 속에서 다시 보려고 부질없이 붙잡으려 애썼다. 섬으로 마차를 몰고 갈 때는 자그마한 조각상, 자동 피아노 위로는 크고 고요하며 결이 거친 얼굴, 그렇게 그녀는 번갈아 가며 비에 젖어 재빠르고, 도발적이면서도 투명하고, 미동도 없이 미소 짓는, 음악의 천사였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지워 없애야 할 것은 하나의 알베르틴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알베르틴이었다. 이 하나하나는 그렇게 어떤 순간에, 그 날짜에 매여 있어서, 나는 그 특정한 알베르틴을 다시 볼 때마다 그 날짜로 도로 실려 가곤 했다. 그리고 과거의 순간들은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기억 속에, 자신을 미래로, 그 자체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미래로 이끌던 그 운동을 간직한 채, 우리를 그 뒤꽁무니에 매달아 끌고 간다. 비 오는 날의 방수복 입은 알베르틴을 나는 한 번도 어루만져 본 적이 없었으니, 나는 그녀에게 그 갑옷을 벗어 달라고 청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와 더불어, 야영지의 사랑을, 여정의 동지애를 아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더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었으니까. 또한 그녀를 타락시킬까 두려워, 그녀가 나에게 어떤 쾌락을 내주는 듯하던 저녁이면 나는 한 번도 알아챈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는데, 내가 자제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어쩌면 그 쾌락을 다른 이들에게서 구하려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 쾌락은 이제 내 안에 미칠 듯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나는 다른 어떤 여자에게서도 똑같이 찾아내지 못했을 터인데, 그것을 기꺼이 나에게 내주었을 그녀를, 이제 나는 온 세상을 뒤진들 만나지 못할 것이었으니, 알베르틴은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갈래의 사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어느 쪽이 진실인지 정해야 하는 듯했으니, 알베르틴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내가 알지 못하던 현실에서, 곧 투렌에서의 그녀의 삶에서 나에게 비롯된 것으로서, 그녀에 대한 나의 온갖 생각과, 나의 욕망과 회한과 다정함과 격분과 질투와 그토록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이라는 보고에서 빌려 온 그토록 풍성한 기억, 그녀의 삶을 불러내고 거기 얽어드는 그토록 넘쳐 나는 감정은,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듯했다. 그토록 넘쳐 나는 감정은, 내 기억으로서는, 내 애정을 고이 간직하면서도 그 애정에 온갖 다양함을 고스란히 남겨 두었다. 한낱 순간들의 연속이었던 것은 알베르틴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은 단순하지 않았다.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 어린 관심에 관능적 욕망이 더해졌고, 거의 부부와도 같은 온화한 정에, 어느 순간에는 무관심이, 또 어느 순간에는 질투에 찬 광란이 더해졌다. 나는 한 사람의 남자에 그치지 않고, 밀집 대형을 이룬 채 시시각각 꾸준히 나아가는 한 무리 군대였으니, 그 안에는 순간에 따라 정열에 사로잡힌 사내들, 무심한 사내들, 질투하는 사내들이 나타났고, 질투하는 사내들은 어느 둘도 같은 여자를 질투하지 않았다. 그리고 틀림없이, 언젠가 내가 기대하지 않을 치유가 찾아온다면 바로 여기에서 올 터였다. 복합적인 덩어리 속에서 이 요소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다른 요소들로 바뀔 수 있고, 그 다른 요소들을 또 다른 요소들이 없애거나 강화하며, 그리하여 끝내는, 우리가 단일한 한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변화가 일어나고 만다. 내 사랑의, 내 자아의 복잡함은 내 고통을 늘려 놓고 다채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 고통들은 언제나 두 갈래로 나뉠 수 있었으니, 그 둘 사이의 선택이야말로 신뢰와 질투 어린 의심에 번갈아 휘둘리던 알베르틴을 향한 내 사랑의 온 생애를 이루었던 것이다.
내 안에 그토록 생생히 살아 있는 (나로서는 현재와 과거의 이중 멍에를 지고 있었으니)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면, 어쩌면 그에 못지않게 역설적이었던 것은, 죽은 줄로 아는 알베르틴이 여전히 내 질투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 악행을 즐기던 육신도, 그것을 욕망할 수 있던 마음도 벗어 버려 더는 그럴 능력도 책임도 없는 알베르틴의 그 악행에 대한 의심이, 내 안에 그토록 날카로운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으니, 만약 내가 그 악행 속에서, 물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의 정신적 실재를 담보하는 증표를, 지난날 그녀가 나에게 남긴 인상들의, 그 자체도 스러질 운명인 반영 대신에 볼 수만 있었다면, 나는 도리어 그 악행을 축복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는 아무 쾌락도 맛볼 수 없는 여자라면, 내 애정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만 있었던들, 더는 내 질투를 부추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불가능했으니, 내 애정은 그 대상인 알베르틴을, 그녀가 여전히 살아 있는 기억들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그녀를 되살려 냈으므로, 그녀의 부정(不貞)은 결코 죽은 여자의 것일 수 없었다. 그녀가 그 부정을 저지른 순간들은, 알베르틴에게만이 아니라 그녀를 떠올리고 있는 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에게도 현재의 순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어떤 시대착오도 그 떼어 낼 수 없는 한 쌍을 갈라놓지 못했으니, 그 안에서는 새로운 죄인이 나타날 때마다, 가엾고 언제나 동시대에 속한 질투하는 연인이 곧바로 짝을 이루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그녀를 내 집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이제 내 상상 속에서 알베르틴은 자유로웠고, 그 자유를 함부로 휘두르며,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몸을 팔고 있었다. 예전에 나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불확실한 미래를 끊임없이 꿈꾸며, 그 전언을 읽어 내려 애쓰곤 했다. 그리고 이제 내 앞에 놓인 것은, 미래의 짝패처럼, 똑같이 불확실하기에 미래만큼이나 사람을 사로잡고, 해독하기 어렵고 신비로우며, 미래와 달리 그것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환상도 나에게는 없기에 한층 더 잔인하고, 게다가 그것이 나에게 안기는 괴로움을 달래 줄 내 동반자가 곁에 없는 채로 내 삶 전체에 걸쳐 펼쳐지기에 한층 더 잔인한, 더는 알베르틴의 미래가 아니라 그녀의 과거였다. 그녀의 과거라고? 그것은 잘못된 말이니, 질투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있을 수 없고, 그것이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어김없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대기의 변화는, 내면의 인간에게 다른 변화들을 일으켜, 잊혔던 그의 변종들을 일깨우고, 습관의 나른한 흐름을 뒤흔들며, 어떤 기억들에, 어떤 고통들에 그 옛 힘을 되돌려준다. 이런 날씨의 변화가, 발베크에서 알베르틴이, 어쩌면 비가 쏟아질 듯한 날씨에도,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몸에 착 달라붙는 방수복의 사슬 갑옷 차림으로 긴 자전거 나들이를 떠나곤 하던 그 날씨를 나에게 떠올려 준다면, 나에게는 그 정도가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오늘 이토록 비슷한 날씨에, 틀림없이 그녀는 투렌에서 그에 걸맞은 나들이를 떠나고 있었으리라. 그녀가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나는 그 생각에 아파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팔다리를 잘린 불구자가 그러하듯, 날씨의 아주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이제는 내 것이기를 그친 그 지체에 나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별안간, 오랫동안 내가 느끼지 못하던 하나의 인상이 (그것은 내 기억의 유동하는 보이지 않는 드넓음 속에 녹아든 채로 있었던 것이다) 결정을 이루었다. 여러 해 전, 누군가가 그녀의 목욕 가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알베르틴은 얼굴을 붉혔다. 그때 나는 그녀를 질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나는 그녀에게, 그 대화를 기억하는지, 왜 얼굴을 붉혔는지 물어보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 일이 나를 한층 더 근심케 한 것은, 레아의 친구인 그 두 처녀가 호텔의 목욕장을 드나든다는 말을, 게다가 그저 목욕만 하러 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내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베르틴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서, 아니면 좀 더 적당한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서, 나는 늘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꺼내기를 삼갔고, 이윽고 그것을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별안간, 알베르틴이 죽고 얼마 지난 뒤, 나는 이 기억을 떠올렸으니, 그것에는, 그것을 풀어 줄 수 있었을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 영영 풀리지 않게 된 수수께끼 특유의, 애타면서도 엄숙한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적어도 알베르틴이 그 목욕장에서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적이 결코 없음을 확인해 보려고 애쓸 수는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발베크로 보낸다면 어쩌면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면 나는 틀림없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원한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때, 사람들의 혀는 이상하게 풀려, 남의 잘못을 기꺼이 일러바치기 마련이다. 우리 상상력의 구조는 여전히 초보적이고 단순한 채로 남아 (기압계든 기구든 전화든 그 무엇이든, 인간이 만든 발명의 원시적 원형을 갈고닦아 끝내는 처음 모습을 알아보기조차 힘들 만큼 개량한 그 숱한 변형을 상상력은 거치지 못했다) 우리로 하여금 한 번에 아주 적은 것밖에 보지 못하게 하므로, 그 목욕장의 기억이 내 내면 시야의 온 벌판을 차지했다.
이따금 나는 잠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런 나쁜 꿈들 가운데 하나와 부딪히곤 했는데, 그 꿈들은 몇 가지 이유로 그리 심각하지는 않으니, 그 하나는 그것들이 자아내는 슬픔이, 인공 수면제가 일으키는 나른함처럼, 깨어난 뒤 한 시간도 채 못 가서 스러진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으니, 곧 우리가 그런 꿈들을 아주 드물게, 이삼 년에 한 번꼴로밖에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그 꿈들을 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것들이, 하나의 착각이, 하나의 세분(細分)이 그 위에 덧씌운, 처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그 모습을 띠고 있을 뿐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채로 남는다 (겹침이라는 말로는 성에 차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알베르틴의 삶에 대해, 그 죽음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으니, 나는 진작 알아보기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곁에 있을 때 내가 그녀에게 굽히게 만들던 바로 그 나른함, 바로 그 비겁함이, 그녀를 더는 보지 않게 된 뒤로도 내가 무슨 일이든 벌이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여러 해를 두고 질질 끌어온 그 나약함에서, 이따금 한 줄기 기운이 번쩍 솟아나곤 했다. 나는 이 조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알베르틴의 온 생애에 그 밖의 다른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현지 발베크로 내려가 알아보게 하려면 누구를 보내는 것이 가장 나을지 자문했다. 에메가 나에게는 적임자로 여겨졌다. 그곳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는 제 잇속에는 눈이 밝고, 섬기는 이에게는 충직하며, 도덕이라는 생각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서민 부류에 속했으니, 우리는 그런 이들을 두고 (돈을 두둑이 쥐여 주기만 하면, 우리 뜻에 복종하여 그 뜻에 이러저러하게 어긋날 만한 것은 죄다 눌러 없애고,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만큼이나 경솔함도 나약함도 부정직함도 부릴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이므로) “참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라면 우리는 절대적인 신뢰를 맡길 수 있다. 에메가 떠나고 나자, 나는 그를 그곳으로 내려보내 무언가를 알아내게 하는 대신, 이제 알베르틴 본인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요긴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곧, 내가 던지고 싶었던, 막 그녀에게 던지려는 듯싶던 이 물음에 대한 생각이 알베르틴을 내 눈앞으로 데려왔으니, 그것은 부활의 노력 덕분이 아니라, 자세를 잡지 않은 사진, 곧 스냅 사진의 경우처럼 언제나 그 사람을 더 살아 있게 보이게 하는 그 뜻밖의 마주침 가운데 하나에 의한 것 같았고, 우리의 대화를 상상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절감했다. 나는 방금,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생각의 새로운 한 면에 다가섰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아도 미화된 이미지가 바로잡히지 않는 부재자에게 우리가 품는 그런 애정을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알베르틴, 그리고 이 부재가 영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가엾은 아이가 삶의 기쁨을 영영 빼앗기고 말리라는 슬픔마저 불러일으키는 알베르틴에게 말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급작스러운 기분의 변화로, 나는 질투의 괴로움에서 이별의 절망으로 옮겨 갔다.
이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은, 가증스러운 의혹 대신에, 죽음이 정말로 내게서 앗아가 버린 누이와 함께 보낸 허물없는 다정함의 시간들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었다. 왜냐하면 내 슬픔은 알베르틴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가가 아니라, 사랑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에 동참하기를 갈망하던 내 마음이 차츰 그녀를 어떠한 존재라고 나 스스로에게 믿게 만든 그것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토록 나를 지루하게 했다고, 적어도 그렇게 여겼던 그 삶이 오히려 감미로운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극히 하찮은 일들을 그녀와 이야기하며 보낸 아주 짧은 순간들에, 당시에는 사실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으나 이미 다른 어떤 순간도 제쳐 두고 그토록 끈질기게 그 순간들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어떤 기쁨이 더해지고 녹아들어 있었음을 이제 나는 느꼈다. 내가 떠올리는 가장 사소한 일들, 이를테면 내 곁의 마차 안에서 그녀가 취했던 몸짓이라든가, 내 방에서 나와 마주 앉으려던 동작 같은 것이, 내 마음속에 감미로움과 슬픔의 소용돌이를 흩뿌렸고, 그것이 조금씩 내 마음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우리가 함께 저녁을 들던 이 방은 한 번도 내게 매력적으로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알베르틴에게 이 방이 매력적이라고 말한 것은 오로지 내 연인이 이곳에서 사는 데 만족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그 커튼도, 의자도, 책들도 더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게 되었다. 지극히 하찮은 것들에 매력과 신비를 부여하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그것들을 우리 자신과 은밀히 이어 주는 그 같은 힘은 슬픔에게도 맡겨져 있다. 그때 나는 우리가 불로뉴 숲에서 돌아온 뒤, 내가 베르뒤랭가로 가기 전에 함께 든 저녁 식사에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엄숙한 감미로움 쪽으로 돌아섰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사랑의 인상은 삶의 다른 인상들과 견주면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크지만, 우리가 그것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인상들 한복판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다. 대성당의 높이를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거리의 소란 속, 다닥다닥 붙은 집들 틈에서 그 발치에 서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멀찍이 떨어져, 온 도시가 사라져 버렸거나 땅 위에 어렴풋한 덩어리로만 보일 만큼 먼 이웃 언덕의 비탈에서, 고독과 땅거미의 고요한 초연함 속에서 바라볼 때, 오직 그때에야 유일하고 한결같고 순수한 그 높이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날 저녁 그녀가 했던 진지하고 분별 있는 온갖 말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통해 알베르틴의 모습을 끌어안으려 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안개에 감싸인 언덕의 길쭉한 윤곽이 보이는 듯했고, 한 잔의 초콜릿의 온기가 혀에 감도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은, 알베르틴이 나를 보러 와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입 맞추었던 그 오후의 기억으로 끔찍하게 짓눌렸다. 실은 방금 난방로에 불이 지펴져 온수 파이프가 딸꾹질하듯 내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프랑수아즈가 베르뒤랭 부인에게서 받아 온 초대를 성난 몸짓으로 내던졌다. 내가 처음으로 라 라스플리에르에 저녁을 들러 갔을 때 느꼈던 그 인상, 곧 죽음이 우리 모두를 같은 나이에 덮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인상이, 알베르틴이 그토록 젊은 나이에 죽어 버린 지금, 한층 더 큰 힘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는 동안 브리쇼는 여전히 손님을 맞고 있으며 앞으로도 여러 해 동안 계속 손님을 맞을 베르뒤랭 부인과 함께 계속 저녁을 들고 있었다. 브리쇼라는 이름은 이내 내게, 그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던 그 야회의 끝 무렵, 내가 거리에서 알베르틴의 등불 빛을 바라보았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그 일을 떠올린 적이 있었으나, 이번처럼 같은 각도에서 이 기억에 다가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집에 돌아가면 마주하게 될 공허, 다시는 거리에서 알베르틴의 방을, 이제 영영 꺼져 버린 그 방의 불빛을 바라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자, 나는 그날 저녁 브리쇼와 헤어지면서 내가 지루하다고 여겼던 것을,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다른 데서 사랑을 나눌 수 없음을 아쉬워했던 것을 떠올렸고, 그때 내가 얼마나 크게 착각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거리에서 내게까지 그 빛의 반영이 내려오던 그 보물이 온전히 내 손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기에, 나는 그 가치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이 아무리 하찮을지언정 다른 기쁨들보다 반드시 못한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정작 그 다른 기쁨들은, 그것들을 상상하려 애쓰는 사이에 내가 그 값을 부풀려 놓은 것이었건만. 감옥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던 그 불빛이 실은 내게 얼마나 많은 충만함과 생명과 감미로움을 담고 있었는지를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한때 나를 취하게 했다가 이내 영영 불가능해 보였던 것의 실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이기도 했던 파리의 그 집에서 내가 꾸려 온 이 삶이야말로, 발베크에서 알베르틴이 나와 같은 지붕 아래 잠들던 그 밤에 내가 꿈꾸었던 그 깊은 평화의 실현 바로 그것이었음을. 불로뉴 숲에서 돌아온 뒤, 베르뒤랭가의 그 야회에 앞서 내가 알베르틴과 나누었던 그 대화, 만약 그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위안을 얻지 못했을 그 대화, 알베르틴을 어느 정도 내 지적 삶 안으로 끌어들였고 어떤 점에서는 우리 둘을 하나로 만들어 주었던 그 대화. 내가 그녀의 지성으로, 나를 향한 그녀의 다정함으로 애틋한 마음을 안고 되돌아간 것은, 분명 그것들이 내가 알아 온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발베크에서 캉브르메르 부인이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저런! 천재인 엘스티르와 함께 나날을 보낼 수도 있을 텐데, 사촌과 함께 보내다니요!” 알베르틴의 지성이 나를 즐겁게 한 것은, 그것이 연상을 통해, 내가 그 감미로움이라 부르던 것을 내 안에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어떤 과일의 감미로움이라 부르는 것이 실은 우리 입천장에만 존재하는 어떤 감각인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알베르틴의 지성을 떠올릴 때면 내 입술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내밀어져 어떤 기억을 맛보았는데, 나는 그 기억의 실체가 내 바깥에 머물러 있기를,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우월함으로 이루어져 있기를 바랐다. 내가 더 뛰어난 지성을 지닌 사람들을 알아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무한함, 혹은 그 이기심이 빚어내는 결과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지적·도덕적 면모가 우리 눈에 객관적으로 가장 덜 규정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에 맞추어 끊임없이 바꾸어 놓으며, 그들을 우리 자신과 떼어 놓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우리의 애정이 뿌리내리는 광막하고 어렴풋한 자리일 뿐이다. 끊임없이 그토록 많은 불편과 쾌락이 흘러드는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 우리는 한 그루 나무나 한 채의 집, 혹은 지나가는 행인에 대해 갖는 것만큼 또렷한 윤곽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은 어쩌면 알베르틴을 그녀 자체로 알려는 노력을 더 기울이지 않은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매력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오랫동안 세월의 행렬 속에서 그녀가 내 기억 안에서 차지하던 갖가지 위치만을 헤아려 왔고, 단지 시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변모로 그녀가 저절로 풍요로워지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곤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의 성격을 여느 평범한 사람의 성격을 대하듯 이해하려 애썼어야 했다. 그리했더라면 어쩌면 그녀가 내게 자기 비밀을 끝내 감추려 했던 까닭을 밝혀내어, 그 기이한 절망과 더불어 우리 사이에서 이어지던, 끝내 알베르틴의 죽음으로 이어진 그 갈등이 계속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때 나는 그녀를 향한 사무치는 연민과 더불어, 그녀보다 살아남았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가장 덜 괴로워하던 시간에는, 실로 내가 그녀의 죽음에서 어떤 이득을 얻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한 여자가 우리 삶에 더 큰 쓸모가 있는 것은, 그녀가 우리 삶 속에서 행복의 요소이기보다 슬픔의 도구일 때이며, 이 세상에 그녀를 소유하는 것이 그녀가 우리를 괴롭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진리를 소유하는 것만큼 값진 여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이면, 할머니의 죽음과 알베르틴의 죽음을 한꺼번에 떠올리며, 나는 내 삶이 이중의 살인으로 얼룩져 있는 듯 여겨졌고, 오직 세상의 비겁함만이 나를 그 죄에서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이해받기를, 그녀에게 멸시당하지 않기를 꿈꾸어 왔다. 이해받는다는 것, 멸시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크나큰 행복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면서. 실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더 잘 이해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이해받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우리가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이해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며, 그들의 사랑은 성가실 뿐이다. 알베르틴의 지성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내 기쁨은, 그것들의 본래 값어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소유가 알베르틴을 온전히 소유하는 데로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온전한 소유야말로, 그녀를 처음 눈에 담은 날부터 내 목표이자 헛된 망상이었다. 우리가 한 여자의 “다정함”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쩌면 그녀를 바라보며 느끼는 기쁨을 우리 바깥으로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아이들이 “내 사랑스러운 작은 침대, 내 사랑스러운 작은 베개, 내 사랑스러운 작은 산사나무들”이라고 말할 때처럼. 이는 어째서 남자들이 자기를 배신하지 않는 여자를 두고는 “그 여자는 참 다정해”라고 결코 말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배신하는 여자를 두고는 그토록 자주 그렇게 말하는지를 지나는 김에 설명해 준다. 엘스티르의 지적 매력이 더 크다고 생각한 점에서 캉브르메르 부인은 옳았다. 그러나 우리는 두 사람의 매력을 같은 방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 한 사람은 다른 모든 이들처럼 우리 바깥에 있으면서 우리 마음의 지평선 위에 그려져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어떤 우연한 사고들 탓에 생겨났으나 돌이킬 수 없게 된 자리 잘못 잡기의 결과로, 우리 자신의 몸속에 어찌나 단단히 깃들어 버렸는지, 그녀가 어느 날 바닷가 작은 협궤 전차의 복도에서 어떤 여자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돌이켜 자문하는 것만으로도, 외과의가 우리 심장에 박힌 총알을 더듬어 찾을 때와 똑같은 고통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이라면 한낱 초승달 모양 빵 한 조각이, 루이 15세 앞에 차려졌던 온갖 멧새와 새끼 토끼와 바르바벨보다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 그리고 산비탈에 누워 있을 때 우리 눈앞에서 몇 치 떨어진 곳에 떨리는 풀잎 하나가, 몇 마일 밖에 있다면, 다른 봉우리의 깎아지른 정상을 우리에게서 가려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잘못은,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의 지성과 다정함이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그것을 값지게 여기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의 잘못은 다른 이들의 다정함과 지성에 무심한 채로 있는 데 있다. 거짓은 언제나 우리 안에 불러일으켜야 마땅할 분노를, 다정함은 마땅히 불러일으켜야 할 고마움을, 오직 그것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비롯될 때에만 비로소 자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육체의 욕망은 지성에 그 값어치를 되돌려 주고 도덕적 삶에 든든한 토대를 되돌려 주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 신성한 것을, 나는 다시는 찾지 못하리라. 속마음을 털어놓는다고? 그러나 다른 이들이 알베르틴보다 더 큰 신뢰를 내게 주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과 더 거침없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사실 신뢰나 대화란 그 자체로는 하찮은 것이어서, 그것들이 얼마쯤 불완전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직 홀로 신성한 것인 사랑이 그 안에 깃들기만 한다면. 이제 나는 자기 피아놀라 앞에 앉아, 검은 머리칼 아래 발그레한 알베르틴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벌리려 애쓰는 내 입술에 닿는 그녀의 혀를, 어머니 같고, 먹을 수 없으며, 자양분이 되고, 거룩한 그 혀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혀의 은밀한 불꽃과 이슬은, 알베르틴이 그것을 내 목이나 배의 살갗 위로 미끄러뜨릴 때조차, 겉으로는 얕은 것이면서도 어떤 의미로는 그녀의 가장 깊은 살에서 우러난 그 애무를, 안감을 보이려 뒤집은 천처럼 바깥으로 뒤집어, 지극히 겉핥는 스침 속에서도 마치 어떤 관통의 신비로운 희열을 띠게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