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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슬픔과 망각 ⑨

6권 · 제1장: 슬픔과 망각

그 무엇도 내게 다시는 되돌려 주지 못할 이 모든 더없이 감미로운 순간들, 그것들을 잃었다는 느낌을 내게 안긴 것이 절망이었다고는 사실 말할 수 없다. 절망을 느끼려면 우리는 여전히 그 삶에 매여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삶은 파국으로밖에는 끝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발베크에서, 동이 트는 것을 보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 가운데 그 어느 날도 결코 내게 행복한 날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꽤 이기적인 채로 남아 있었지만, 이제 내가 매달려 있던 자아, 자기 보존의 본능이 작동시키던 그 생명의 비축분을 이루던 자아, 그 자아는 이제 더는 살아 있지 않았다. 내 힘을, 내 생명력을, 내 안의 가장 좋은 요소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내가 소유했던 어떤 보물을 떠올렸다. (그것은 나 혼자만 소유했던 것이었는데, 내 안에 감춰진 채 그것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을 다른 이들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더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 누구도 다시는 내게서 그것을 앗아 갈 수 없는 그런 보물이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언제고 그것을 소유했던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오로지 내가 스스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눈길을 던지고 그녀를 내 마음에 들여앉히면서 그녀를 내 안에 살게 하는 경솔함만을, 또 가정의 정과 관능의 쾌락을 뒤섞는 또 다른 경솔함만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또한 우리 사이가 사랑이라고, 내가 건네는 입맞춤을 그녀가 고분고분 되돌려 준다는 이유로 우리가 서로 사랑이라 불리는 관계를 나누고 있다고 나 자신에게 믿게 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믿게 되었기에, 나는 내가 사랑하던 여자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던 여자, 내 누이이자 내 아이이며 다정한 연인이던 여자마저 잃어버린 것이었다. 요컨대 나는 스완이 알지 못했던 축복이자 저주를 받았던 셈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가 오데트를 사랑하며 그토록 질투하던 그 오랜 세월 내내, 그는 그녀를 거의 보지 못했고, 그녀가 막판에 그를 따돌리던 날이면 그녀에게 다가가기조차 그토록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그녀를 아내로서 오롯이 자기 것으로 삼았고, 죽는 날까지 그러했다. 반면에 나는, 알베르틴을 그토록 질투하면서도, 스완보다 운이 좋아, 그녀를 내 집에서 내 곁에 두었다. 스완이 그토록 자주 꿈꾸었으나 그 꿈이 더는 그의 관심을 끌지 않게 되고서야 비로소 실제로 이룬 그 상태를, 나는 사실로서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가 오데트를 붙들어 두었던 것처럼 알베르틴을 붙들어 두지는 못했다. 그녀는 내게서 달아났고, 죽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 무엇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법은 없으며, 인물들의 유사함과 정황의 닮음 덕분에 우리가 대칭을 이루는 것처럼 골라 놓을 수 있는 지극히 비슷한 삶들도, 여러 점에서 서로 정반대인 채로 남기 때문이다.

내 목숨을 잃는다 해도 나는 그리 많은 것을 잃지는 않을 터였다. 이제 내가 잃을 것이라고는 텅 빈 형식, 예술 작품의 텅 빈 틀뿐이리라. 앞으로 그 안에 무엇을 채워 넣게 될지에는 무심했으나,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을 떠올리면 기쁘고 자랑스러웠기에, 나는 그 더없이 감미로웠던 시간들의 기억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음의 버팀은, 죽음이 다가온다 한들 흐트러뜨리지 못했을 위안의 느낌을 내게 주었다.

발베크에서 내가 부르러 보내면 그녀는 얼마나 서둘러 나를 보러 오곤 했던가, 나를 기쁘게 하려고 머리칼에 향수를 뿌리느라 잠깐 지체할 뿐이었다. 내가 다시 보기를 좋아하던 발베크와 파리의 이 영상들은, 그녀의 짧은 생애에서 아직도 그토록 생생하고 또 그토록 빨리 넘어가 버린 책장들이었다. 내게는 그저 기억일 뿐인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행동이었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향해 치닫는 비극처럼 성급한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는 한 방향으로 자라나지만 우리 바깥에서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자라난다. (알베르틴에게서 내 기억 탓만은 아닌 자질의 풍요로움을 알아차리던 그 저녁들에 나는 실로 이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두 방향은 서로에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베르틴을 알려 하고, 이어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려 하면서 따랐던 것은, 온갖 타인의 신비를 우리 자신의 그것과 하잘것없이 비슷한 요소들로 실험을 통해 환원하려는 욕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면서 이번에는 내 쪽에서 알베르틴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내 재산이, 눈부신 결혼의 전망이 그녀를 끌어당겼고, 내 질투가 그녀를 붙들어 두었으며, 그녀의 착함이나 지성이, 혹은 죄책감이나 꾀바름이 그녀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게 했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오직 내 정신적 노고의 내적 과정만으로 벼려 낸 사슬로 그녀를 점점 더 가혹하게 가두어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사슬은 알베르틴의 삶에 반작용을 일으켰고, 그 반작용은 진자의 자연스러운 흔들림에 따라 내 심리에 새롭고 더욱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던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 감옥에서 달아나, 나만 아니었다면 결코 갖지 않았을 말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으러 갔고, 죽은 뒤에도 내게 의혹을 남겼는데, 만약 그 의혹이 확인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발베크에서 알베르틴이 뱅퇴유 을 알고 지냈음을 알아냈을 때보다 어쩌면 내게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베르틴이 곁에서 나를 달래 줄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자기 안에 틀어박혀 살아간다고 여기는 영혼의 그 기나긴 하소연은 겉보기에만 독백일 뿐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메아리가 그 흐름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며, 그런 삶이란 저 스스로 밀고 나가는 주관적 심리학의 시론과도 같아서, 멀리서 그 “행동”을 또 다른 현실, 또 다른 존재의 순전히 사실주의적인 소설에 공급하는데, 그 존재의 곡절들은 다시금 이 심리학적 시론의 곡선을 굽히고 그 방향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우리 사랑의 기계 장치는 얼마나 빠르게 맞물려 돌아갔던가, 그 전개는 얼마나 급격했던가. 그리고 발자크의 몇몇 이야기나 슈만의 발라드에서처럼, 출발할 무렵의 갖가지 지체와 중단과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국은 얼마나 돌연했던가! 내게는 한 세기만큼이나 길었던 이 마지막 한 해, 발베크에서부터 그녀가 파리를 떠나기까지 알베르틴이 내 마음속에서 그토록 여러 번 모습을 바꾸었고, 또한 나와는 무관하게, 흔히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 자신 속에서도 바뀌어 간 그 한 해 동안에, 그토록 짧게밖에 이어지지 않았으면서도 내게는 광대함, 거의 무한함을 띠고 나타나던, 이제는 영영 불가능해졌으나 그럼에도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그 애정 어린 행복한 삶 전부를 나는 자리매김해야 한다.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으나, 어쩌면 그 자체로서 또 애초에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왜냐하면 내가 어느 고고학 논문에서 발베크 교회에 관한 묘사를 읽지 않았더라면, 스완이 그 교회가 거의 페르시아풍이라고 내게 일러 주어 내 취향을 비잔틴 노르만 양식으로 이끌어 주지 않았더라면, 어느 금융 조합이 발베크에 위생적이고 안락한 호텔을 세워 내 부모가 내 간청을 들어주어 나를 발베크로 보내기로 마음먹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알베르틴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토록 오래 갈망하던 그 발베크에서 나는 꿈꾸던 페르시아풍 교회도, 영원한 안개도 찾지 못했다. 그 유명한 1시 22분 기차조차 내가 마음속에 그려 오던 모습과는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이 우리에게 못내 아쉬움을 남기고, 또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려 그토록 쓸데없는 애를 쓰는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삶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 콩브레에서, 그토록 무거운 마음으로 어머니의 잘 자라는 인사를 기다리며 누워 있던 그때, 그 불안이 낫게 되리라고, 그러다 어느 날 다시 도지되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한 소녀 때문이리라고, 누가 내게 일러 주었겠는가. 그 소녀는 처음에는 바다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내 눈길이 날마다 바라보도록 이끌리던 한 송이 꽃에 지나지 않을 터였으나, 생각할 줄 아는 꽃이었고, 나는 그 마음속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기를 어찌나 어린애처럼 애타게 바랐던지, 그녀가 내가 빌파리지 부인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속을 태우게 될 터였다. 그렇다, 세월이 흐른 뒤에 나로 하여금, 어릴 적 어머니가 내 방으로 올라오지 않던 때 겪었던 것만큼이나 사무치게 괴로워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런 낯선 이의 잘 자라는 인사, 낯선 이의 입맞춤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없어서는 안 될 알베르틴, 이제 내 영혼이 거의 온전히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알베르틴을, 만약 스완이 내게 발베크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삶은 더 길었을 것이고, 내 삶은 이제 그것을 순교로 만들고 있는 그것을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내게는, 내가 할머니를 죽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의 온통 이기적인 애정으로 알베르틴을 죽게 내버려 둔 것처럼 여겨졌다. 훗날에도, 이미 발베크에서 그녀를 알게 된 뒤에도, 나는 나중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그런 식으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내가 질베르트를 단념하고, 언젠가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단지 지난날만을 놓고 보아 질베르트가 내가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자였는지 감히 의심조차 품기 어려웠다. 그런데 알베르틴의 경우에는 나는 이제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 내가 사랑한 것이 반드시 그녀 자신일 필요는 없었으며, 다른 누구였을 수도 있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를 증명하기에는, 내가 불로뉴 숲 섬으로 스테르마리아 을 저녁 식사에 데려가려던 그 저녁에 그녀가 나를 따돌리지만 않았더라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나는, 한 여자에게서 그토록 특별한 개별성의 관념을 끌어내어 그녀가 그 자체로 유일하고 우리에게 예정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그 상상의 활동을, 스테르마리아 에게 쏟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거의 생리학적인 관점을 취하여, 나는 다른 여자에게도 이 똑같은 배타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 테지만 아무 여자에게나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통통하고 가무잡잡한 알베르틴은 키 크고 혈색 좋은 질베르트를 닮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둘은 똑같이 건강한 재질로 빚어져 있었고, 똑같이 관능적인 두 뺨 위로 두 사람 모두의 눈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눈빛이 반짝였다. 그들은, 정작 자기들 쪽에서는 내게 아무런 끌림도 주지 못하는 다른 여자들을 위해서라면 더없이 무모한 짓도 마다하지 않을 그런 남자들의 눈길은 결코 끌지 못할 부류의 여자들이었다. 한 남자는 감기에 걸리는 방식 따위가 거의 언제나 똑같다. 다시 말해 그 일이 일어나려면 그에게는 어떤 정황들의 특정한 조합이 필요하다. 그러니 그가 사랑에 빠질 때 어떤 한 부류의 여자를, 게다가 매우 수가 많은 그런 부류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를 꿈꾸게 만들었던 알베르틴의 첫 두 눈길은 질베르트의 첫 눈길과 아주 다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질베르트의 그 알 수 없는 인품과 관능, 앞으로 나서는 꾀바른 천성이, 이번에는 사뭇 다르면서도 닮은 데가 없지 않은 알베르틴의 몸에 깃들어, 나를 유혹하러 되돌아온 것이라고 거의 믿을 뻔했다. 알베르틴의 경우에는, 나와 함께한 전혀 다른 삶 덕분에, 곧 고통스러운 강박이 영구적인 응집을 유지하던 그 생각의 덩어리 속으로, 딴 데 정신을 파는 것이나 망각의 그 어떤 틈도 파고들 수 없었기에, 그녀의 살아 있는 몸은, 질베르트의 몸과는 달리, 어느 날 문득, 내가 나중에 내게 (다른 남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여성적 매력이라고 알아차린 그것을 찾아내던 그 몸이기를 그치는 일이 실로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다. 나는 언젠가는 그녀를 잊게 되리라. 그때 가서, 뜨거운 피와 불안한 골똘함의 그 똑같은 자질들이 어느 날 다시 돌아와 내 삶을 뒤흔들어 놓을지,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미리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여성의 모습으로 깃들어 그럴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질베르트라는 선례가 내게 알베르틴을 머릿속에 그려 보게 하고 내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리라 짐작하게 해 준 정도는, 뱅퇴유 소나타의 기억이 그의 7중주곡을 상상하게 해 주었을 정도만큼이나 하잘것없었을 것이다. 실로 그뿐 아니라, 알베르틴을 처음 만나던 무렵에 나는 내가 사랑에 빠질 상대가 다른 소녀들이리라고 여겼을 법도 했다. 게다가 내가 그녀를 한 해 먼저 만났더라면, 그녀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잿빛 하늘처럼 따분하게 내게 비쳤을 수도 충분히 있었다. 내가 그녀와의 관계에서 달라졌다면, 그녀 자신도 달라졌던 것이니, 내가 스테르마리아 에게 편지를 쓰던 날 내 침대에 와 앉았던 그 소녀는, 사춘기에 일어나는 여인다움의 한낱 폭발 때문이든, 아니면 내가 끝내 알아내지 못한 어떤 사건 때문이든, 내가 발베크에서 알던 바로 그 소녀가 이미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언젠가 사랑하게 될 여자가 어느 정도 이 다른 여자를 닮아야만 한다면, 다시 말해 여자에 대한 내 선택이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면, 그럼에도 그것이 뜻하는 바는, 어쩌면 피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길들여지긴 했으되 그 선택이 한 사람보다 더 대수로운 것, 곧 어떤 여성의 유형을 향해 길들여졌다는 것이었고, 이는 알베르틴을 향한 내 사랑에서 온갖 필연성을 걷어 내 주었다. 그 얼굴을 우리가 빛 그 자체보다 더 한결같이 눈앞에 두고 있는 여자, 눈을 감고 있을 때조차 우리는 한순간도 그녀의 아름다운 눈과 아름다운 코를 흠모하기를, 그것들을 다시 볼 기회를 마련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이 유일한 여자,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녀와 알게 된 도시가 아닌 다른 도시에 있었더라면, 그 도시의 다른 구역들을 돌아다녔더라면, 다른 안주인의 집을 드나들었더라면, 지금 우리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이는 또 다른 여자였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그녀가 유일하다고 여기지만, 그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진 우리 눈에 그녀는 오롯하고 허물어지지 않으며, 오래도록 다른 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 여자는 다만 일종의 마법 주문으로, 이미 우리 안에 조각난 상태로 존재하던 수천 가지 애정의 요소들을 되살려 냈을 뿐이며, 그것들을 그러모으고 이어 붙여 그 사이의 온갖 틈을 메웠을 뿐이다. 그녀에게 그 이목구비를 부여함으로써 사랑하는 대상의 온갖 단단한 실질을 채워 넣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그리하여, 비록 그녀에게 우리가 수천 명 가운데 한 남자, 어쩌면 그 가운데 가장 하찮은 남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 그녀는 유일한 여자, 우리의 온 삶이 향해 가는 그 여자인 것이다. 이 사랑이 필연이 아니었음을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은 실로 사실이니, 그것은 스테르마리아 과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며,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 사랑이 내가 다른 여자들과 겪어 알던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또한 그 사랑이 알베르틴보다 더 광대하여, 조그만 바위를 휘감아 도는 밀물처럼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감싸고 있음을 느꼈을 때, 나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한 내 앎으로부터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알베르틴과 함께 사는 사이에, 나 스스로 벼려 낸 사슬을 나는 떨쳐 낼 수 없게 되었고, 그녀가 불러일으킨 것도 아닌 감정을 알베르틴이라는 사람과 결부 짓는 버릇은 그럼에도 그 감정이 그녀에게만 고유한 것이라고 나로 하여금 믿게 만들었다. 마치 어느 철학 학파에 따르면, 두 현상 사이의 단순한 관념 연합에 버릇이 인과법칙의 힘과 필연이라는 착각을 부여하는 것처럼. 나는 내 사교적 인맥과 재산이 나를 고통에서 면하게 해 주리라 여겼는데, 어쩌면 지나치게 잘 그렇게 해 주는 바람에, 그것이 나를 느끼고 사랑하고 상상하는 일에서마저 면하게 해 주는 듯싶었다. 나는 어느 가난한 시골 처녀를 부러워했으니, 전보로조차 이어질 사교 관계가 없는 덕분에 그녀는 인위적으로 잠재울 수 없는 슬픔을 몇 달이고 곱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 사이의 간극을 한없이 벌려 놓을 만한 온갖 것을 다 갖춘 게르망트 부인의 경우, 사교적 이점이란 활기 없고 변형될 수 있는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로 그 간극이 문득 메워지는 것을 내가 보았듯이, 그와 비슷하되 반대되는 방식으로, 내 사교적 인맥과 재산, 곧 내 처지뿐 아니라 내 시대의 문명이 내게 누리게 해 준 온갖 물질적 수단은, 어떤 압력에도 끄떡없던 알베르틴의 거스르는 완강한 의지에 맞선 내 싸움의 결말을 미루어 놓은 것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을. 물론 나는 생루와 전보와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투르의 사무소와 끊임없이 연락을 이어 갈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기다리던 지체가 헛된 것으로, 그 결과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사교적 이점도 인맥도 없는 시골 처녀들이나, 문명의 완벽함을 누리는 사람들이나, 덜 괴로워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가 덜 욕망하기 때문에, 늘 닿을 수 없다고 알아 온 것, 그렇기에 줄곧 비현실적으로 여겨져 온 것을 덜 아쉬워하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이제 막 자신을 우리에게 내주려는 사람을 더 간절히 욕망한다. 희망은 소유를 앞질러 간다. 그러나 아쉬움 또한 욕망을 키우는 증폭기이다. 불로뉴 숲 섬으로 나와 함께 저녁을 들러 오기를 스테르마리아 부인이 거절한 것이야말로 그녀가 내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막은 것이었다. 만약 그 뒤 너무 늦기 전에 내가 그녀를 다시 보았더라면, 그것은 도리어 내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하기에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녀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순간,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녀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지 못하게 막는 질투심 많은 애인이 있어, 나는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있을 법하지 않은 가정을, 그것이 옳았음이 뒤에 드러났지만, 나는 품게 되었고, 어찌나 사무치게 괴로웠던지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세상 무엇이라도 내주었을 것이며, 생루의 도착이 달래 준 것은 내가 여태껏 느껴 본 가장 날카로운 고뇌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가 어떤 나이에 이르고 나면,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연인들도 우리의 고뇌에서 태어난다. 우리의 지난날, 그리고 그것이 새겨진 육체의 상흔이 우리의 미래를 정한다. 알베르틴의 경우, 내가 사랑해야 할 이가 반드시 그녀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은, 저 앞선 사랑들의 선례가 없더라도, 그녀를 향한, 다시 말해 그녀 자신과 그녀의 친구들을 향한 내 사랑의 내력 속에 새겨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베르트를 향한 내 사랑처럼 하나의 사랑이 아니라, 여러 소녀들 사이로 나뉘어 생겨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의 친구들과 어울려 즐긴 것이 그녀 때문이었고 또 그들이 그녀와 얼마쯤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었다. 어쨌든 오랫동안 그들 모두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내 선택은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헤매었고, 내가 어느 한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 여길 때면, 다른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게 만들거나 나를 만나 주기를 거절하기만 해도, 그 여자를 향한 사랑의 첫 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 발베크에서 앙드레가 나를 보러 오곤 하던 때, 앙드레가 오기로 한 조금 전에 알베르틴이 약속을 지키지 않기라도 하면, 내 심장은 쉬지 않고 두근거렸고, 나는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는 바로 그녀라고 느꼈다. 그리고 앙드레가 오면,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알베르틴이 뱅퇴유 을 알고 지냈음을 알게 된 뒤 파리에서 그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렇게 말했는데, 정작 그녀는 내가 어떤 속셈을 품고 진심 없이 말하는 것이라 여겼으나, 실은 전날 알베르틴과 즐겁게 지냈더라도 나는 똑같은 말로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아아! 그대가 좀 더 일찍 오기만 했더라면. 이제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다시, 알베르틴이 뱅퇴유 을 알고 지냈음을 알게 된 뒤 앙드레가 알베르틴으로 대체된 이 경우에도, 내 사랑은 두 사람 사이를 오갔으니, 결국 한 번에 하나의 사랑만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내가 두 소녀와 얼마쯤 다투었던 경우가 있었다. 먼저 화해의 첫걸음을 내딛는 쪽은 내 마음의 평온을 되돌려 주었고, 여전히 내게 토라진 채로 있는 쪽이 있다면 내가 사랑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다른 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확실한 연을 맺게 되는 것이 먼저의 쪽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니, 그녀는 비록 신통치는 않아도 다른 쪽의 매정함을 내게 위로해 주었고, 다른 쪽은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끝내 잊어버리게 될 터였다. 그런데 마침, 둘 중 적어도 하나는 내게 돌아오리라고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동안, 한동안 둘 다 그러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내 고뇌는 이중이었고 내 사랑도 이중이었으며, 나는 돌아오는 쪽을 사랑하기를 그칠 권리를 나 자신에게 남겨 두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두 사람 모두 때문에 계속 괴로워했다. 우리를 더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 한 사람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저버림이며,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끝내 오직 한 가지만을 알게 되는, 곧 그 얼굴은 희미해지고 그 마음은 존재하기를 그쳤으며 그 사람을 향한 우리의 편애는 아주 최근의 것이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그런 시기가 있어 어쩌면 우리에게 꽤 이르게 찾아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시기의 몫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에게서 오는 한마디 전갈, “제가 당신을 보러 가도 될까요?”인 것이다. 프랑수아즈가 내게 “알베르틴 아가씨가 떠나셨어요”라고 알려 주던 날의 알베르틴과의 이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이별들의 우의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음을 깨닫기 위해,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조차, 흔히 이별의 날이 먼저 와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나 글로 쓰인 거절이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경우, 괴로움에 채찍질당한 우리의 상상은 어찌나 재빨리 제 일에 착수하는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아무런 특색도 없어 몇 달째 밑그림인 채로 남을 운명이던 사랑을 어찌나 미친 듯 빠르게 빚어내는지, 이따금 우리의 심장을 따라잡지 못한 우리의 지성이 놀라 소리치는 것이다. “아니, 자네 미쳤군, 자네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이 괴상한 생각들은 다 뭐란 말인가? 그건 진짜 삶이 아니야.” 그리고 실로 그 순간, 우리를 배신한 이가 우리를 부추겨 행동에 나서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의 심장을 몸으로 가라앉혀 줄 몇 가지 건전한 기분 전환만으로도 우리의 사랑을 끝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어쨌든 알베르틴과의 이 삶이 그 본질에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것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어 있었다. 나는 게르망트 부인을 사랑하던 때 몸을 떨었는데, 그녀에게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지위와 재산까지 매력의 수단이 너무나 넘쳐 나서, 그녀가 아무에게나 자신을 내주기에 너무 자유로우리라고, 그리하여 내가 그녀를 붙들 힘이 너무 미약하리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곤 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틴은 무일푼에 이름 없는 처지였으니, 나와 결혼하기를 몹시 바랐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오롯이 소유할 수 없었다. 우리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우리의 조심이 아무리 슬기롭든, 진실을 털어놓고 말하자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붙들 힘이 없다. 어째서 그녀는 내게 “나는 그런 취향을 갖고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나는 물러섰을 것이고, 그녀가 그것을 채우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내가 읽던 어느 소설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어떤 질책으로도 입을 열게 할 수 없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상황이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여자를 다그쳐 말하게 했을 것이고, 그런 다음 우리는 서로 이해에 이를 수 있었으리라고 나는 스스로 장담했다. 이 온갖 쓸데없는 비참함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비참함의 사슬을 벼리기를 삼갈 자유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를 아무리 잘 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지배하면서도 우리가 눈멀어 보지 못하던 저 고통스럽고 피할 수 없는 진리들, 우리 감정의 진리, 우리 운명의 진리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알지도 못한 채, 그럴 뜻도 없이, 정작 우리 자신은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던 말들로 표현해 왔던가. 그러나 그 말들의 예언적 가치는 뒤이은 사건들로 입증되었다. 나는, 우리 각자가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그때는 알지 못한 채 내뱉었던 숱한 말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실로 우리는 서로가 상대를 속이고 있다고 여기며 그 말들을 했으나, 그 거짓됨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던 그 안에 담긴 것에 견주면, 아주 미미하고 도무지 대수롭지 않으며 우리의 가련한 불성실 안에 온전히 갇혀 있는 것이었다. 거짓들, 잘못들, 우리 둘 다 알아채지 못한 현실에 못 미치던 것들, 그 현실 너머로 뻗어 가던 진리, 그 본질적인 법칙이 우리를 비껴가며 드러나기까지 시간을 요구하는 우리 본성의 진리, 그리고 또한 우리 운명의 진리. 발베크에서 그녀에게 “그대를 볼수록 나는 그대를 더 사랑하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을 때 (그런데도 순간순간의 바로 그 친밀함이야말로 질투라는 통로를 거쳐 나를 그토록 강하게 그녀에게 붙들어 매어 놓았던 것이다), 또 “나는 지적으로도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아요”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파리에서 “부디 조심해요. 그대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긴다면 내 가슴이 찢어지리라는 걸 잊지 말아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 그녀는 “하지만 저도 사고를 당할 수 있는걸요”라고 했고,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 싶은 척하던 그날 저녁 파리에서 나는 “이제 곧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테니, 그것도 영영 그러할 테니, 한 번만 더 그대를 바라보게 해 줘요!”라고 했으며, 바로 그날 저녁 그녀가 방 안을 둘러보며 “이 방을, 저 책들을, 저 피아놀라를, 이 온 집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니, 믿기지 않지만 그래도 사실이네요”라고 했던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들에서도 그러했다. 그녀가 아마도 속으로 “이런 말을 그이에게 해 두어야지”라고 되뇌며 “제 가장 좋은 부분을 당신께 남겨 둡니다”라고 썼을 때 (그리고 이제 그녀의 지성과 착함과 아름다움이 맡겨진 것은, 이 또한 아아 허약하기 짝이 없는 내 기억의 충실함과 힘에가 아니었던가?), 또 “그 이중의 황혼은 (밤이 내리고 있었고 우리가 막 헤어지려던 참이었으니) 어둠이 온전해질 때에야 비로소 제 생각에서 지워질 거예요”라고 썼을 때 말이다. 이 구절은 그녀의 정신이 실로 완전한 어둠 속에 잠기게 될 그 하루의 전날에 쓰인 것이었고, 어쩌면 그녀는, 그 순간의 불안으로 그토록 짧으면서도 무한히 늘어난 마지막 희미한 빛 속에서, 실로 우리의 마지막 마차 나들이를 다시 보았을지도 모르며, 모든 것이 우리를 저버리고 우리가 스스로 하나의 믿음을 지어내는 그 찰나에, 마치 무신론자가 전쟁터에서 그리스도교도로 돌아서듯, 어쩌면 그토록 자주 저주했으면서도 그토록 깊이 존경하던 그 벗을 도움 청하러 불러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벗 자신은, 모든 종교가 다 한가지인지라, 그녀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겨를이, 마지막 생각을 그에게 바칠 겨를이, 그에게 자기 죄를 낱낱이 고백할 겨를이, 그의 품에서 죽을 겨를이 있었기를 바랄 만큼 잔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설령 그 순간 그녀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겨를이 있었다 한들, 우리 둘 다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 행복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되고서야, 그 행복을 더는 이룰 수 없게 되고서야 비로소, 그러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떤 것들이 가능한 동안 우리는 그것들을 미룬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상의 이상적인 허공 위로 투사되어 삶이라는 매질 속에 짐스럽게, 하찮게 잠겨 있던 상태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그 끌어당기는 힘과 겉보기의 손쉬운 실현 가능성을 띠게 된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죽는 행위보다 더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보다는 덜 고통스럽다. 그 생각은, 한 사람을 삼켜 버린 뒤 다시 하나의 평평한 수면이 되어, 사라진 그 지점에 잔물결 하나 일지 않은 채 뻗어 가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배제된 현실, 이제 그 어떤 의지도 그 어떤 앎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며, 그로부터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생각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란, 아직도 생생한 그녀의 삶의 기억을 안고, 그녀가 이제 우리가 읽어 오던 어느 소설 속 인물들이 우리에게 남긴 실체 없는 영상들, 그 기억들과 견줄 만한 것이 되었다고 여기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