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알베르틴과 함께 보낸 순간들은 나에게 어찌나 소중했던지,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때때로, 탕진한 재산의 남은 부스러기를 되찾듯, 나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순간들 몇을 되찾았다. 목도리를 앞이 아니라 목 뒤로 매다가, 나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떠올린 적 없던 어느 마차 나들이를 기억해 냈으니, 그 나들이에 앞서 알베르틴은 찬 공기가 내 목에 닿지 않도록 먼저 내게 입을 맞추고는 이렇게 목도리를 매어 주었던 것이다. 이토록 하찮은 몸짓이 내 기억에 되살려 준 이 소박한 나들이는, 우리에게 소중했던 어느 죽은 여인이 생전에 지녔던 정든 물건들, 그 늙은 하녀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래서 우리에게 그토록 귀한 그 물건들과 똑같은 기쁨을 나에게 주었다. 나의 슬픔은 그로써 한결 풍요로워졌으니, 문제의 그 목도리를 나는 여태 두 번 다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번 풀려난 알베르틴은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남자들이, 여자들이 그녀를 뒤쫓았다. 그녀는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이 오래 이어진 알베르틴 숭배가, 내가 그녀에게 품었던 감정의 유령과도 같아서, 그 여러 요소를 되풀이하고, 죽음 저편에서 그것이 비추어 내던 감정의 실체와 똑같은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확신했으니, 만일 알베르틴을 생각하는 사이사이에 어떤 간격을 둘 수 있다면, 또는 반대로 너무 긴 간격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를 그쳤으리라는 것을. 말끔한 단절은, 지금 내가 할머니에 대해 그러하듯, 나를 그녀에게 무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 보낸 어느 정도 긴 기간은, 내 기억 속에서 삶의 바로 그 원리인 연속성을 끊어 놓았을 테지만, 그 연속성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을 적 알베르틴을 향한 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보낸 꽤 긴 간격이 지난 뒤에도 되살아날 수 있었던 그 사랑이? 그러니 내 기억도 같은 법칙에 따랐을 것이고, 더 긴 간격은 견디지 못했을 터이니, 그것이 한 일이라곤 오로라처럼, 알베르틴이 죽은 뒤에 내가 그녀에게 품었던 감정을 비추어 내는 것뿐이었고, 그것은 내 사랑의 허깨비와도 같았다.
또 어떤 때는 나의 슬픔이 어찌나 많은 형태를 띠던지, 이따금 나는 그것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진심으로 사랑받기를 갈망했고, 나와 함께 살아 줄 사람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내게 내가 더 이상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징으로 보였으나, 실은 내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진심으로 사랑받고 싶은 그 욕구는, 알베르틴의 통통한 볼에 입 맞추고 싶은 욕망과 꼭 마찬가지로, 내 아쉬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랑 없이 사는 편이 더 현명하고 더 행복하리라 느낄 법한 것은, 내가 그녀를 잊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알베르틴을 향한 나의 아쉬움은, 바로 그것이 내 안에 누이 같은 사람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이었으므로, 그 욕구를 채울 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알베르틴을 향한 나의 아쉬움이 희미해져 가는 만큼, 그 아쉬움의 무의식적 형태에 지나지 않던 누이에 대한 욕구도 덜 절박해져 갈 터였다. 그런데도 내 사랑의 이 두 잔재는 같은 속도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시간들도 있었으니, 앞의 것은 그토록 완전히 빛을 잃은 반면, 뒤의 것은 도리어 온전히 제 힘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훗날, 질투에 얽힌 기억들이 스러지고 나면, 이따금 알베르틴을 향한 애정의 감정이 불쑥 내 마음에 솟아올랐고, 그러면 다른 여자들과의 내 연애를 떠올리며, 그녀라면 이해해 주었을 것이고 함께 나누어 주었으리라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으니, 그리하여 그녀의 악덕은 거의 그녀를 사랑할 이유가 되어 버렸다. 때로는 내가 더 이상 알베르틴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에도 내 질투가 되살아났으니, 정작 내가 질투하는 대상은 그녀였는데도 그러했다. 나는 내가 앙드레를 질투한다고 여겼는데, 마침 그녀의 최근 정사 가운데 하나를 막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러나 앙드레는 나에게 그저 대체물이요, 샛길이요, 나를 에둘러 알베르틴에게 데려다주는 통로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꿈속에서, 그 밑바탕의 정체에 대해서는 착각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사람에게 다른 얼굴,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다. 결국 이런 개별적인 경우에 일반적인 법칙을 뒤흔들어 놓던 그 밀물과 썰물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틴이 내게 남기고 간 감정들은 그 본래 원인의 기억보다 지우기가 더 어려웠다. 감정뿐 아니라 감각도 그러했다. 이 점에서 나는, 오데트를 사랑하기를 그치기 시작했을 때 자기 안에 그 사랑의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키지조차 못했던 스완과는 달리,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된 과거를 여전히 다시 살고 있음을 느꼈다. 말하자면 내 자아는 둘로 쪼개져, 그 윗부분은 이미 딱딱하게 식어 버렸는데도, 어떤 불꽃이 그 옛 전류를 통과시킬 때면, 내 정신이 알베르틴을 떠올리기를 그친 지 오래인 뒤에도, 그 밑동은 여전히 타올랐다. 그리고 발베크에서처럼 이미 분홍 꽃망울이 맺힌 사과나무 위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내 눈에 자아내던 그 잔인한 두근거림에도, 그 눈물에도 그녀의 이미지가 따라붙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 슬픔의 재발이 순전히 병적인 원인 탓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어떤 기억의 되살아남이자 사랑이라는 상태의 마지막 국면으로 여기던 것이 실은 심장병의 첫 단계는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어떤 질환에는, 앓는 이가 병 자체와 혼동하기 십상인 부차적 증상들이 있다. 그것들이 그치면, 그는 자기가 짐작했던 것보다 회복에 더 가까이 와 있음을 알고 놀란다. 그 목욕장과 젊은 세탁부에 관한 에메의 편지가 나에게 안긴 괴로움, 곧 그것이 빚어낸 합병증도 이런 부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상한 마음을 고치는 치유자가, 만일 그런 사람이 나를 찾아왔더라면, 다른 점들에서는 내 슬픔 자체가 회복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물론 나로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실재에 동시에 잠겨 있는 그런 양서류 같은 존재의 하나인 인간이었던 만큼, 내 안에는 알베르틴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그녀의 죽음에 대한 자각 사이의 모순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순은 말하자면 예전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관념, 처음에는 그녀가 살아 있다는 관념과 어찌나 사납게 다투던지 아이들이 부서지는 파도를 피해 달아나듯 내가 그것을 피해 달아나야만 했던 이 관념, 그녀의 죽음이라는 이 관념은, 끊임없는 그 공세의 힘 그 자체로써, 마침내 얼마 전까지도 그녀가 살아 있다는 관념이 차지하고 있던 내 마음속 그 자리를 빼앗고야 말았다. 내가 그것을 뚜렷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제는 그녀의 삶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 아니라 바로 이 알베르틴의 죽음이라는 관념이 내 무의식적 몽상의 주된 주제를 이루었으니, 그리하여 내가 그 몽상을 문득 멈추고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지난날처럼 내 안에 그토록 생생히 살아 있는 알베르틴이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수, 죽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제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죽어 버린 알베르틴이 내 안에는 그토록 생생히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잇따라 이어지는 기억들이 맞닿아 쌓아 올린 그 검은 터널, 내 생각이 어찌나 오래 헤매었던지 그것을 헤매고 있다는 자각마저 그친 그 검은 터널이, 문득 한 줄기 햇살의 틈으로 깨어져, 저 멀리 푸르고 웃음 짓는 우주를, 알베르틴이 하찮으면서도 매력 가득한 한낱 기억에 지나지 않는 그 우주를 내가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이 참된 알베르틴인가, 아니면 내가 그토록 오래 굴러 온 그 어둠 속에서 나에게 유일한 실재로 보이던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알베르틴인가,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얼마 전까지 나였던 그 사람, 알베르틴이 들어와 잘 자라 인사하며 입 맞춰 줄 순간만을 끝없이 기다리며 살던 그 사람은,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 불어난 탓에 이제 나에게 한낱 미약한 한 부분, 이미 나 자신에게서 반쯤 떨어져 나간 부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시들어 가는 꽃처럼 나는 한 겹 껍질이 벗겨지는 데서 오는 젊음의 상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짧은 빛의 순간들은 어쩌면 내가 알베르틴을 향한 사랑을 한층 더 또렷이 의식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했을 뿐이니, 이는 지나치게 한결같아서 스스로를 확립하려면 반대가 있어야 하는 온갖 관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테면 1870년 전쟁 때를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관념이 마침내 자기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전쟁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얼마나 기이하고 중대한 사실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것이 그들을 그 끊임없는 강박에서 떼어 내어, 그들이 잠시나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고, 평화로운 상태에 있던 예전의 자기 모습을 되찾아야만 했으니, 그러다 문득 그 찰나의 공백 위로, 달리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탓에 그들이 오래도록 보지 못하게 된 그 괴물 같은 실재가 마침내 또렷이 떠올랐던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알베르틴에 대한 내 갖가지 인상의 이 물러남이 적어도 층층이 잇따라서가 아니라 동시에, 고르게, 내 기억의 온 전선을 따라 전면적으로 후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더라면, 곧 그녀의 부정에 대한 인상이 그녀의 다정함에 대한 인상과 동시에 물러나 주었더라면, 망각은 나에게 위안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렇지가 않았다. 썰물이 고르지 않게 빠져나가는 바닷가에서처럼, 그녀의 다정한 존재의 이미지가 그 처방을 내게 가져다주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물러나 버렸을 때, 나는 내 의심들 가운데 하나가 밀려드는 데 습격당하곤 했다. 부정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나를 괴롭혔으니, 그것들이 일어난 해가 아무리 멀다 해도 나에게는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멀어질 때, 다시 말해 내가 그것들을 마음속에 덜 생생히 그릴 때는, 나는 덜 괴로웠으니, 어떤 것의 멂이란 사이에 낀 날들의 실제 간격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는 기억의 시각적 힘에 비례하는 법이어서, 마치 지난밤 꿈의 기억이 그 흐릿함과 지워짐 탓에 여러 해 묵은 사건보다 더 아득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관념이 내 안에서 진전을 이루기는 했어도, 그녀가 살아 있다는 감각의 썰물은, 그 진전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그것을 가로막아 고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깨닫는다. 이 시기 동안 (아마도 그녀가 내 집에 갇혀 지내던 시간들, 곧 그녀가 그런 못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았기에 그런 짓이 거의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 어떤 고통도 덜어 주었던 그 시간들, 그리하여 거의 그녀의 결백에 대한 숱한 증거나 다름없어진 그 시간들을 내가 잊어버린 탓이겠지만) 나는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관념 못지않게 새로운 어떤 관념과 (예전에는 나는 늘 그녀가 살아 있다는 관념에서 출발했다) 끊임없이 함께 살아가는 순교를 겪었다는 것을. 그것은 견뎌 내기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리라 여겼을 관념이자, 나도 모르는 새 차츰 내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며 알베르틴이 결백하다는 관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던 관념, 곧 그녀가 죄를 지었다는 관념이었다. 내가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고 믿었을 때, 나는 도리어 그녀를 믿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다른 생각들의 출발점으로 그녀의 유죄에 대한 확신을, 곧 그 반대 관념이 그러했듯 거짓으로 판명되기 일쑤이던 그 확신을 삼으면서도, 내가 여전히 의심을 느낀다고 계속 상상했다. 이 시기 동안 나는 몹시 괴로웠을 것이나,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나는 깨닫는다. 우리는 어떤 괴로움을 온전히 끝까지 겪음으로써만 그것에서 낫는다. 알베르틴을 바깥세상과의 어떤 접촉에서도 지켜 냄으로써, 그녀가 결백하다는 환상을 지어냄으로써, 마치 훗날 내가 그녀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내 추론의 밑바탕으로 삼았을 때처럼, 나는 그저 내 회복의 시간을 미루고 있었을 뿐이니, 반드시 겪어야 할 괴로움이 끝나기에 앞서 지나가야만 하는 그 긴 시간을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알베르틴의 유죄에 대한 이 관념들로 말하자면, 습관이 작동하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이미 살아오는 동안 겪어 온 것과 똑같은 법칙에 따라 그리할 터였다. 게르망트라는 이름이, 자줏빛과 불그레한 송이송이 꽃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길과 악인 질베르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지니던 의미와 매력을 잃어버렸듯, 알베르틴의 존재도, 바다의 푸른 물결의 존재도, 스완이라는 이름도, 승강기 소년의 이름도, 게르망트 대공비의 이름도, 그 밖의 숱한 이름도 나에게 지녀 온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니, 그 매력과 그 의미는 내 안에 한낱 낱말 하나만을 남겼고, 그 낱말들은 저 혼자 살아갈 만큼은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기러 와서 지시를 내리고는 몇 주 뒤에 물러나듯이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알베르틴의 유죄에 대한 그 괴로운 앎도 습관에 의해 내게서 쫓겨날 터였다. 게다가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마치 양쪽 측면에서 동시에 감행되는 공격에서처럼, 이 습관의 작용에서 두 동맹군이 서로 손을 빌려줄 터였다. 알베르틴의 유죄라는 이 관념이 나에게 더 그럴듯하고 더 익숙한 관념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덜 괴로운 것이 될 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이 덜 괴로워지기 때문에, 오로지 너무 지독하게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는 내 바람에서만 비롯되던, 그녀의 유죄에 대한 내 확신에 맞서던 반론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릴 것이고, 한 작용이 다음 작용을 앞당기듯, 나는 알베르틴의 결백에 대한 확신에서 그녀의 유죄에 대한 확신으로 제법 빠르게 넘어가게 될 터였다. 이 관념들이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내가 이 관념들을 잊을 수 있고 끝내는 알베르틴 자신마저 잊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알베르틴의 죽음이라는 관념과, 그녀의 못된 짓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어느 때는 책을 읽는 따위의 어떤 지적 흥분으로 한결 또렷해진 내 기억이 내 슬픔을 되살렸고, 또 어느 때는 반대로, 이를테면 한바탕 사나운 날씨의 고뇌에 자극받아 일깨워진 내 슬픔이, 우리 사랑의 어떤 기억을 더 높이 끌어올려 빛에 더 가까이 데려왔다.
게다가 알베르틴을 향한 이러한 사랑의 되살아남은, 다른 호기심들이 사이사이 끼어든 무심함의 간격 뒤에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 발베크에서 그녀가 나에게 입맞춤을 허락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그 긴 간격, 그동안 내가 게르망트 부인을, 앙드레를, 스테르마리아 부인을 훨씬 더 많이 생각했던 그 간격 뒤에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 사랑은 내가 그녀를 다시 자주 보기 시작했을 때 되살아났었다. 그러나 이제조차 갖가지 근심거리가 하나의 이별을, 이번에는 죽은 여인과의 이별을 불러올 수 있었으니, 그 이별 속에서 그녀는 나를 한결 무심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훗날 내가 그녀를 덜 사랑하게 되었을 때조차, 이것은 그래도 나에게 그런 욕망들 가운데 하나로 남았으니, 곧 우리가 이내 싫증을 내지만 얼마 동안 잠잠히 놓아두면 다시 우리를 사로잡는 그런 욕망 말이다. 나는 살아 있는 한 여자를, 다음엔 또 다른 여자를 뒤쫓았고, 그러고는 내 죽은 여인에게로 돌아왔다. 흔히 그것은 내 안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내가 더 이상 알베르틴에 대한 어떤 또렷한 상도 그려 낼 수 없을 때, 어떤 이름 하나가 우연히 찾아와,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괴로운 반응들을 자극하는 식이었으니, 마치 뇌가 더 이상 사고할 수 없게 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바늘에 찔려 근육을 오그라뜨리게 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자극은 어찌나 드물게 찾아오던지, 나는 과거에 나 자신을 다시 붙들어 매려는, 그녀를 더 잘 기억하려는 시도로, 슬픔의 계기를, 질투의 발작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만 했다. 한 여자에 대한 아쉬움이란 사랑의 재발에 지나지 않으며 여전히 똑같은 법칙에 매여 있으므로, 내 아쉬움의 절실함은, 알베르틴이 살아 있을 적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을 키워 놓던, 그 맨 앞줄에는 언제나 질투와 슬픔이 나서 있던 바로 그 원인들로 인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대개 이러한 계기들은, 병이든 전쟁이든 언제나 가장 예언에 밝은 지혜가 헤아린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법이어서, 불시에 나를 덮쳐 어찌나 격렬한 충격을 주던지, 나는 그것들에 기대어 어떤 기억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괴로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을 훨씬 더 많이 생각했다.
게다가 어떤 말이 그 의심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쇼몽’ 같은 식으로 어떤 의심과 이어져 있어야 할 필요조차 없었다 (서로 다른 이름에 공통된 음절 하나만으로도, 마치 좋은 도체라면 어떤 물질이든 기꺼이 쓰는 전기공에게 그러하듯, 내 기억은 알베르틴과 내 마음 사이의 접촉을 되살리기에 넉넉했으니). 그 말은 암호였고, 이미 헤아리기를 그친 과거의, 그 과거를 넘칠 만큼 보아 온 탓에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된 과거의 문을 여는 의기양양한 ‘열려라 참깨’였다. 우리는 그 과거를 빼앗겼고, 이 뺄셈으로 인해 제 인격이 그 형태를 바꾸었으리라 여겼으니, 마치 한 각을 없애면 한 변을 잃는 기하학의 도형처럼 말이다. 이를테면 알베르틴이 가 있었을 법한 어느 거리, 어느 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어떤 구절들만으로도, 하나의 잠재적인, 존재하지 않는 질투가, 하나의 몸을, 하나의 거처를, 어떤 물질적 장소를, 어떤 개별적 실현을 찾아 육신을 얻기에 넉넉했다. 흔히 그것은 그저 잠자는 동안이었으니, 우리 기억의 여러 페이지를, 달력의 여러 장을 한순간에 되넘기는 우리 꿈의 이 ‘되풀이’, 이 ‘다 카포’가 나를 도로 데려가, 오래전에 이미 다른 인상들에게 제자리를 내주었으나 이제 다시 한번 눈앞에 되살아난 어느 괴롭지만 아득한 인상으로 나를 되돌려 놓았다. 대개 그것에는, 서투르지만 마음을 끄는 온갖 무대 장치가 딸려 있어서, 나에게 현실이라는 착각을 안기며, 그때부터 그 밤에서 비롯되는 것을 내 눈앞에 펼쳐 보이고 내 귀에 울려 주었다. 게다가 한 연애의, 그리고 망각에 맞선 그 싸움의 역사에서, 우리 꿈은 깨어 있는 상태보다 오히려 더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가. 시간의 무한히 잘게 쪼갠 구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행의 과정을 지워 버리고, 날카로운 대조를 들이대고, 낮 동안 그토록 더디게 짜 놓은 위안의 거미줄을 한순간에 풀어헤치며, 다만 우리가 그녀를 다시 보지만 않는다면 끝내 잊어버렸을 그 여인과의 만남을 밤이면 우리에게 마련해 주는 우리 꿈이 말이다. 누가 뭐라 하든, 우리는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실제라는 인상을 얼마든지 온전히 가질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우리 경험에서 끌어낸 이유들 때문일 텐데, 그 경험은 그 순간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 있음직하지 않은 삶이 우리에게 참된 것으로 여겨진다. 때로는 연극의 성공을 망쳐 놓는 내부 조명의 결함으로 인해, 무대 위에 나타난 내 기억들이 나에게 실제 삶이라는 착각을 안겨서, 나는 정말로 알베르틴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그녀를 다시 보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러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갈 수도, 그녀에게 하려던 말을 내뱉을 수도, 그녀를 보기 위해 이미 꺼져 버린 횃불을 다시 지필 수도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으니, 이 불가능함이란 내 꿈속에서 그저 잠든 이의 옴짝달싹 못 함이요, 말 못 함이요, 보지 못함이었다. 마치 환등기의 잘못된 영사에서 문득, 보여서는 안 될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슬라이드 위의 형상들을 지워 버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으니, 그 그림자란 환등기 자체의 그림자이거나 조작하는 사람의 그림자다. 또 어떤 때는 알베르틴이 내 꿈에 나타나, 다시 한번 나를 떠나겠노라 했지만, 나는 그녀의 결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내 기억에서 한 줄기 경고의 빛이 내 꿈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기 때문이니, 알베르틴에게 깃든 그 빛은 그녀가 나에게 알린 그 떠남을 비롯한 그녀의 앞날의 행동에서 온갖 중요성을 앗아 갔으며, 그 빛이란 곧 그녀가 죽었다는 앎이었다. 흔히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이 기억은, 그것을 허물지 않은 채, 그녀가 살아 있다는 감각과 뒤섞였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가 말하는 동안 할머니는 방 저편 끝에서 오락가락하셨다. 할머니의 턱 한쪽은 삭은 대리석처럼 부스러져 있었지만, 나는 그것에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발베크의 그 목욕장과 투렌의 어느 세탁부에 관해 물어볼 것이 여러 가지 있다고 말했지만, 시간은 넉넉하고 더 이상 급할 것도 없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녀는 자기가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는다고, 그저 어제 뱅퇴유 양의 입술에 입을 맞췄을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뭐라고? 그 여자가 여기 있다고?” “그래요, 실은 이제 당신을 두고 가야 할 때예요, 곧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이제 알베르틴이 죽어, 나는 그녀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처럼 그녀를 내 집에 가두어 두지 않았던 만큼, 그녀가 뱅퇴유 양을 찾아간다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알베르틴이 그 여자를 만나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알베르틴은 자기가 그저 입을 맞췄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부인하던 시절처럼 또다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머지않아 그녀는 아마 뱅퇴유 양에게 입 맞추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터였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불안에 사로잡힌 나는 잘못이었으니, 우리가 듣는 바에 따르면 죽은 이는 아무것도 느낄 수도, 아무 짓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죽은 할머니가 그런데도 여러 해 동안 계속 살아 계셨고 그 순간에도 내 방을 오락가락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물론 일단 잠에서 깨고 나면, 계속 살아 있는 죽은 여인이라는 이 관념은, 설명하기가 그러하듯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불가능해졌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꿈이라는 그 덧없는 광기의 시기 동안 이미 그 관념을 하도 여러 번 지어냈던 터라, 어느새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꿈에 대한 우리 기억도, 그 꿈이 충분히 자주 되풀이되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내 꿈이 끝나고도 한참 뒤까지, 나는 알베르틴이 자기가 해 주었다고 나에게 말하던 그 입맞춤에, 내가 아직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말에 시달렸다. 그리고 정말이지 그 말은 내 귓가를 아주 가까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니, 다름 아닌 나 자신이 그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나는 알베르틴과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고, 그녀에게 묻고,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늘 해주고 싶었으나 잊고 있던 말들을 이제야 채워 넣었다. 그러다 문득, 기억이 불러낸 그 존재, 이 모든 말들이 향하던 그 존재에게는 이제 어떤 현실도 대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소스라쳤으니, 이제는 사라져버린 살려는 의지의 끊임없는 충동만이 하나의 인격이라는 통일을 부여하던 그 얼굴의 여러 부분들을 죽음이 파괴해버린 것이다. 또 어떤 때에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내 안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느꼈다. 그 바람은 다른 쪽에서 차갑고 한결같이 불어왔고, 아득한 과거로부터 흘러나와, 먼 시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와,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떠나는 기차들의 기적 소리를 내게 실어다 주었다. 어느 날 나는 한 권의 책에, 내가 특히 좋아하던 베르고트의 소설에 마음을 붙여보려 했다. 마음에 드는 인물들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고, 이내 책의 매력에 다시 정복당한 나는, 마치 나 자신의 즐거움을 바라듯 그 못된 여자가 벌을 받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젊은 연인들의 행복이 확실해지자 내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절망하여 외쳤다, “알베르틴이 했을지도 모를 일에 내가 이토록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인격이란 파괴될 수 없는 어떤 현실적인 것이며, 그토록 많은 기도로 간구하고,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며, 그토록 눈물을 쏟으며 알게 되는 것이 베르고트의 상상 속에서밖에 존재한 적 없고,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으며, 그 모습을 내 멋대로 그려도 좋은 어떤 인물의 성공이라면, 언젠가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 천국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고 결론지어야 하리라!” 게다가 이 소설에는 매혹적인 처녀들, 연애편지, 연인들이 만나는 인적 없는 오솔길이 있었고, 이는 사람이 남몰래 사랑할 수 있음을 내게 일깨워, 마치 알베르틴이 아직도 인적 없는 오솔길을 거닐 수 있기라도 한 듯 내 질투를 되살렸다. 또한 오십 년 만에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을 다시 만나고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녀 곁에서 지루해하는 한 남자의 삽화도 있었다. 그리고 이는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일깨우며, 마치 내가 알베르틴과 헤어졌다가 늙어서 무관심하게 그녀를 다시 만나도록 정해지기라도 한 듯 나를 짓눌렀다. 프랑스 지도가 눈에 띄면, 겁 많은 내 눈은 질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투렌 지방에 가닿지 않도록 조심했고, 비참해지지 않으려 노르망디에도 가닿지 않도록 조심했으니, 그 지도에는 적어도 발베크와 동시에르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 우리가 그토록 여러 번 함께 지나다녔던 온갖 길들을 나는 자리매김하곤 했다. 그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릴 뿐인 프랑스의 다른 도시나 마을 이름들 가운데서, 이를테면 투르라는 이름은 다르게 이루어진 듯했으니, 이제는 비물질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내 심장에 즉각적으로 작용해 그 고동을 빠르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독성 물질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리고 이 힘이 어떤 이름들에까지 뻗어 그것들을 나머지와 그토록 다르게 만들었다면, 내가 나 자신 속에 더 깊이 틀어박혀 알베르틴 자신에게만 매달렸을 때, 아마도 여느 처녀와 다를 바 없었을 한 처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이 힘, 내가 거부할 수 없다고 느낀 이 힘, 다른 어떤 여자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을 이 힘이, 꿈과 욕망과 습관과 애정이 뒤섞이고 서로 맞닿은 데서, 번갈아 오는 고통과 쾌락의 불가결한 간섭과 더불어 생겨난 결과라고 해서 어찌 놀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는 그녀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니, 기억만으로도 정신적인 것인 참된 삶을 이어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알베르틴이 기차에서 내리며 생마르르베튀에 가고 싶다고 내게 말하던 모습을 떠올렸고, 뺨까지 눌러쓴 “폴로” 모자를 쓴 그녀의 모습도 다시 보았으며, 다시금 쾌락의 가능성들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뛰어들며 혼잣말했다. “우리는 함께 앵카르빌까지, 동시에르까지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발베크 근방에는 내가 그녀를 보지 않은 해수욕장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리하여 그 고장은 마치 고스란히 보존된 신화의 땅처럼,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매혹적인 전설들, 내 사랑의 뒷이야기에 가장 많이 지워졌던 그 전설들을 생생하고 잔혹하게 내게 되돌려주었다. 아! 발베크의 그 침대에 다시 누워야 한다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움직이지 않는 축, 고정된 막대를 두고 돌 듯 그 놋쇠 틀을 둘레로 내 삶은 움직이고 펼쳐졌으니, 할머니와의 즐거운 대화, 그녀의 죽음이라는 악몽, 알베르틴의 다독이는 애무, 그녀의 악덕의 발견을, 그리고 이제는 바다가 비치던 유리 낀 책장을 바라보며 알베르틴이 다시는 이 방에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 새로운 삶을, 그 둘레 안으로 차례차례 끌어들이면서. 그 발베크 호텔은, 여러 해 전부터 온갖 가지각색의 연극이 상연되어온, 어떤 희극에도, 어떤 비극에도, 또 다른 비극에도, 순전히 시적인 극에도 쓰였던 지방 극장의 유일한 실내 무대장치 같은 것, 이미 내 과거 속으로 꽤 멀리 물러가버린 그 호텔이 아니었던가? 내 삶의 새로운 시대들이 흘러가는 내내 오직 이 무대장치만이, 그 벽과 책장과 유리창과 더불어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전체에서 변한 것은 나머지였고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더욱 또렷이 깨닫게 했으며, 그리하여 아이들이 낙천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삶과 사랑과 죽음의 신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자신의 삶 속에 몸을 이루었음을 우리가 서글픈 자부심으로 깨닫는다는, 그런 인상을 내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