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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부인 댁에서 ①

2권 제1부 · 스완 부인 댁에서

노르푸아 를 처음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어머니는 코타르 교수가 집을 비운 것과 당신 자신은 스완과 왕래를 완전히 끊은 것을 아쉬워하셨는데, 두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늙은 대사를 대접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코타르처럼 저명한 손님이자 뛰어난 과학자라면 어떤 식탁에서도 어색할 리 없지만, 스완은 그 허세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의 이름이면 누구든 지붕 위에서 외치듯 떠벌리는 버릇 탓에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는 속물이어서, 노르푸아 후작이라면 틀림없이 자기 표현대로 ‘골칫덩어리’ 같은 자라고 일축해 버릴 거라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런 태도에는 몇 마디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법도 하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분명 지극히 범속한 코타르와, 온갖 사교 관계에서 겸손과 신중함을 더없이 세련된 섬세함의 경지로까지 밀고 나갔던 스완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일어난 일이란, 애초의 ‘젊은 스완’에게, 또 자키 클럽의 스완에게, 이 오랜 벗이 새로운 인격을(그것이 마지막도 아니었지만) 하나 더 보탰다는 것이었으니, 바로 오데트의 남편이라는 인격이었다. 그는 늘 지녀 온 본능과 욕망과 근면을 그 부인의 소박한 야심에 맞추어, 예전 지위보다 훨씬 아래쪽에, 그것을 함께 나눌 반려에게 더 어울리는 새로운 지위를 애써 쌓아 올렸다. 이 점에서 그는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오데트를 소개해 달라고 딱히 청하지 않는 한 친구들에게 그녀를 떠안기고 싶지 않아, 자기 친구들의 집에는 여전히 혼자서 드나들었지만) 아내와 더불어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 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으므로, 이 새 친구들의 중요성을, 나아가 그들을 대접함으로써 얻을 즐거움과 자부심을 가늠하는 데 있어, 결혼 전 자신이 몸담았던 화려한 사교계가 아니라 오데트의 예전 환경을 비교의 잣대로 삼았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가 이제 사귀고 싶어 안달하는 상대가 한물간 관리들과 그 빛바랜 아내들, 곧 각 부처 무도회의 벽꽃 같은 여인들임을 알고 나서도, 옛날에도, 아니 지금까지도 트위크넘이나 말버러 하우스의 초대는 그토록 우아하게 입에 담지 않던 그가, 무슨 무슨 차관보의 아내가 스완 부인의 방문에 답방을 왔다고 전혀 불필요할 만큼 힘주어 떠벌리는 것을 듣는 일은 여전히 놀라웠다. 여기서 아마 이런 반론이 나올 법하다. 그것이 실은, 사교계 인사이던 시절 스완의 소박함이란 허영의 극치에 이른 세련됨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다른 몇몇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부모님의 이 오랜 벗이 가장 거칠고 조야한 속물근성에서부터 더없이 높은 경지의 예법에 이르기까지, 자기 민족이 거쳐 온 온갖 단계를 차례로 몸소 보여 주었음을 뜻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이는 인류 전체에 두루 들어맞는 것인데, 우리의 미덕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늘 통제하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자유로이 떠도는 성질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미덕은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의무로 삼는 행위들과 우리 마음속에서 너무도 긴밀히 얽혀 버려서, 문득 그와는 다른 종류의 행위를 하도록 요구받으면 우리는 당황하고 말며, 그 행위가 바로 그 똑같은 미덕을 발휘하는 일과 관계될 수 있으리라고는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한다. 스완이 자신의 새로운 사교 환경을 그토록 예민하게 의식하고 또 그것을 자랑스레 입에 올린 모습은, 저 위대한 예술가들과도 같았다. 천성이 겸손하거나 너그러운 그들은, 만년에 요리나 정원 가꾸기에 손을 대면 자기 요리나 꽃밭 화단을 칭찬받고 어린애처럼 흐뭇해하면서도, 정작 자기 진짜 업적을 두고 나온 비평은 태연히 흘려듣던 이들이면서도 이번에는 어떤 비판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또 그림 한 점은 선뜻 내주고서도 도미노 놀이에서 몇 프랑을 잃으면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코타르 교수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야기가 훨씬 뒤로 나아간 자리에서, ‘마님’ 베르뒤랭 부인의 시골 별장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그를 다시 만나 느긋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다음 몇 가지 언급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스완의 경우, 그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일 수 있었다. 이미 변화가 이루어졌는데도, 내가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의 아버지를 보곤 하던 시절에는 그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그는 내게 말을 건 적이 없었으니,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과시할 수도 딱히 없었다. 하기야 설령 그가 그랬다 한들 나는 그의 허영을 대번에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오래도록 품어 온 관념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리기 십상이니까. 어머니는 꼬박 삼 년 동안이나, 당신 조카딸 하나가 입술에 바르던 연지를, 마치 그것이 어떤 맑은 액체에 남김없이 녹아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셨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줄이 지나치게 짙었던 탓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이른바 과포화라 불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가던 연지가 죄다 결정으로 맺혀 드러나자, 어머니는 이 느닷없는 색채의 난장판 앞에서, 더없이 콩브레다운 투로, 이건 완전히 망측한 일이라 선언하시며 조카딸과 거의 의절할 뻔하셨다. 코타르의 경우는 반대로, 우리가 스완이 베르뒤랭 부부에게 처음 소개되던 자리에 그가 배석해 있던 것을 본 그 시절은 이제 과거 속에 묻혀 버렸다. 반면에 명예와 관직과 직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따라붙는 법이다. 게다가 어떤 사람은 무식하고 시시한 말장난이나 늘어놓으면서도, 아무리 교양을 쌓아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을, 이를테면 위대한 전략가나 의사의 재능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동업자들이 코타르를 보는 눈은, 세월이 흘러 유럽에서 명성을 얻게 된 한낱 이름 없는 개업의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젊은 의사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이들은, 한두 해 동안은, 다시 말해 유행이란 변화를 향한 욕망에서 태어난 만큼 그 자신도 이내 변하기 마련이므로 한두 해 동안은, 만약 자기가 병에 걸린다면 대가들 가운데 목숨을 맡길 사람은 오직 코타르뿐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물론 그들도 교제로 치자면, 더 박식하고 더 예술적이며 니체나 바그너를 논할 수 있는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하기는 했다. 코타르 부인 댁에서 음악회가 열려, 언젠가 남편이 의학부 학장이 되기를 바라며 그녀가 남편의 동료들과 제자들을 대접하는 저녁이면, 그는 연주를 듣는 대신 다른 방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한눈에 병을 짚어 내는 그 민첩함과 통찰, 한 치 어긋남 없는 자신감을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했다. 셋째로, 코타르 교수가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대체로 어떤 인상을 주었을지 헤아릴 때, 우리는 한 사람이 생애의 후반부에 드러내는 성격이란, 흔히 본래의 성격이 자라났거나 시들었거나, 여위었거나 부풀려진 것이긴 해도, 늘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때로는 안팎을 뒤집어 지은 옷처럼 정반대인 경우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에게 홀딱 반해 있던 베르뒤랭 부부만 빼면, 젊은 시절 코타르의 우물쭈물하는 태도와 지나친 소심함과 붙임성은 그에게 끝없는 조롱과 비웃음을 불러왔다. 대체 어느 인정 많은 친구가 그 얼음장 같은 태도를 일러 주었던 걸까? 그의 높아진 직업적 위상 덕분에 그런 태도를 취하기는 한결 쉬워졌다. 본능적으로 다시 제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베르뒤랭 부부의 집을 빼면, 그는 어디를 가든 사람을 밀쳐 내는 듯한 냉랭함을 꾸미고, 되도록 오래 입을 다물며, 말을 해야 할 때는 딱 잘라 단정 짓고, 더없이 신랄한 말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새로운 태도를 환자들 앞에서 마음껏 연습할 수 있었으니, 그를 처음 보는 환자들로서는 견주어 볼 도리가 없었고, 그가 천성으로는 조금도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몹시 놀랐을 것이다. 그가 이루려 애쓴 것은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병원 병동을 회진하는 동안에도, 수련의부터 갓 들어온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웃음에 겨워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그 말장난을 한마디 던질 때조차, 그는 언제나 얼굴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렇게 했으며, 이제 수염과 콧수염을 밀어 버린 그 얼굴은 예전 얼굴이라고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독자는 줄곧 묻고 있었겠지만, 노르푸아 후작이란 대체 누구인가. 그는 전쟁 전에 전권공사를 지냈고, 5월 16일 정변 당시에는 실제로 대사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들 놀랍게도, 그는 그 뒤로 여러 차례 프랑스를 대표하는 특별 사절로 뽑혔으니, 심지어 이집트의 공채 관리관을 맡아 그곳에서 재정가로서의 탁월한 수완 덕에 중요한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를 뽑은 것은 중산층 출신의 보수반동파라면 섬기기를 마다했을 급진파 내각들이었고, 그들 눈에는 노르푸아 야말로 그 과거와 인맥과 소신으로 미루어 응당 의심스러운 인물이었을 법한데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진보적인 각료들은, 그런 임명을 함으로써, 프랑스의 지고한 이익이 걸려 있을 때 자신들의 도량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주고, 여느 정치가들 위로 스스로를 끌어올리며, 다름 아닌 Journal des Débats로부터 ‘경세가’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고, 귀족 이름에 실린 무게와 뜻밖의 임명이 언제나 불러일으키는 극적인 흥미에서 직접 이득을 거두어들인다고 여기는 듯했다. 또한 그들은, 노르푸아 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이런 이득을 거둘 수 있으면서도 그가 정치적 충성심을 저버릴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런 결함으로 말하자면 그의 고귀한 출신이 그들을 경계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확실한 보증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계산에서 공화국 정부는 틀리지 않았다. 우선, 어떤 부류의 귀족은 요람에서부터 자기 이름을, 어떤 우연으로도 빼앗길 수 없는 자기 자신의 한 부분으로(그 값어치는 동류의 귀족들이나 그보다 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꽤 정확히 어림잡을 수 있는 자산이다) 여기도록 길러졌기에, 중산층 출신의 숱한 공인들이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스스로를 소진하는 그 노력, 곧 오로지 ‘옳은’ 의견만을 표방하고 오로지 ‘건전한’ 사람들과만 어울리려는 노력(그런 노력은 그의 지위를 조금도 높여 줄 수 없으므로)을 자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됨을 안다. 한편 그는, 자기 가문보다 바로 윗자리를 차지하는 대공가나 공작가의 눈에 자신의 비중을 높이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자기 이름에 이제껏 없던 보탬을, 곧 문장(紋章)으로는 대등한 다른 이름들보다 앞자리를 차지하게 해 줄 것을, 이를테면 정치권력이나 문학적·예술적 명성, 또는 막대한 재산 같은 것을 더하면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그는, 전문직 집안이라면 다들 앞다투어 좇는, 그러나 자기가 그들과의 친분을 내세운들 대공쯤은 대수롭잖게 여길, 별 볼 일 없는 시골 지주들과의 교제를 피함으로써 아낀 것을, (설령 프리메이슨이거나 그보다 못한 자들일지라도) 외교에서 자기를 밀어 올려 주거나 선거에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치가들에게, 또 그 후원이 자기를 각자의 뛰어난 분야에서 ‘출세’하도록 도와줄 예술가나 학자들에게, 요컨대 새로운 영예를 안겨 주거나 부유한 혼인을 ‘성사’시켜 줄 처지에 있는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그러나 노르푸아 의 성격에는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특징이 있었으니, 오랜 외교관 생활을 거치는 동안 그는 이른바 ‘관료적’이라 불리는 저 부정적이고 꼼꼼하며 보수적인 정신에 흠뻑 젖어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정부에 공통된 정신이요, 어떤 정부 아래서든 특히 그 외무부에 깃드는 정신이었다. 그는 그 생활을 하는 동안, 다소 혁명적이고 어쨌거나 지극히 온당치 못한 야당의 방식들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과 경멸을 몸에 배게 했다. 신분이 높든 낮든 상관없이, 질적인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몇몇 무식쟁이의 경우를 빼면, 사람과 사람을 서로 끌어당기는 것은 공통된 견해가 아니라 정신의 혈연 관계이다. 르구베 같은 부류의 아카데미 회원, 따라서 고전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클로델이 부알로를 기리는 찬사보다 막심 뒤캉이나 메지에르가 빅토르 위고를 기리는 찬사에 더 뜨겁게 갈채를 보낼 것이다. 공통된 국가주의만으로도 바레스는 그를 조르주 베리 와 거의 구별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에게는 사랑받기에 충분하지만, 정치관은 비슷해도 정신의 결이 다른 동료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니, 그들은 리보 나 데샤넬 처럼 대놓고 적수인 이들조차 그보다 더 좋아하며, 다시 그 리보 씨나 데샤넬 씨에 대해서는, 모라스나 레옹 도데도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왕정복고를 꿈꾸며 살고 있건만, 더없이 충실한 왕당파마저 모라스나 레옹 도데보다 그들과 더 가까운 사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말을 아끼는 것도, 그것은 신중과 절제라는 직업적 조심성 때문만이 아니라, 말이라는 것 자체가, 두 나라를 화해로 이끌려는 십 년에 걸친 노력이 연설이나 의정서 속에서 겉보기엔 아무 빛깔도 없으나 그들에게는 온 세계의 의미를 머금은 단 하나의 형용사로 압축되고 옮겨지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더 큰 값어치를 지니고 더 미묘한 정의(定義)의 결들을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노르푸아 는 위원회에서 매우 뻣뻣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 곁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늙은 대사가 아버지에게만은 놀랍도록 마음을 여는 것을 두고 아버지에게 축하를 건넸다. 아버지 자신이 누구보다 더 놀라워하셨다. 평소 그리 붙임성 있는 편이 아니었던 까닭에, 가까운 벗들의 테두리 밖에서는 아버지와 어울리려는 이가 드물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한계를 겸손하고 솔직하게 곧잘 인정하셨다. 아버지는 이 외교관의 이런 호의가, 누구나 벗을 고를 때 스스로 취하게 되는 그 관점에서 비롯한 것임을 아셨다. 그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온갖 지적 자질과 세련됨과 다정함도, 그가 동시에 사람을 지루하게 하거나 짜증나게 한다면, 대개는 경박하다거나 심지어 멍청하다고까지 여겨질 다른 사람의 그저 단순 솔직함과 쾌활함보다 훨씬 못한 추천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노르푸아가 또 나를 저녁에 초대했어. 참 별일이야. 위원회 사람들이 다들 놀라워한다니까. 그 사람은 우리 가운데 누구와도 사사로이 지내는 법이 없거든. 이번에도 틀림없이 1870년 전쟁 이야기로 흥미진진한 뭔가를 들려줄 게야.” 아버지는, 노르푸아 가 날로 커 가는 프로이센의 국력과 그 호전적인 속셈을 두고 황제에게 경고했으며, 어쩌면 그렇게 경고한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그의 지력을 더없이 높이 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오페라 극장에서 테오도시우스 왕을 위해 열린 특별 공연 때, 신문마다 그 군주가 노르푸아 와 오래도록 나눈 대화에 이목을 쏠리게 했다. “그 임금의 방문에 정말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물어봐야겠어.” 아버지는 말을 이으셨다. 아버지는 외국 정치에 유난히 관심이 많으셨던 것이다. “노르푸아 영감이 평소엔 입이 아주 무거운 걸 나도 알지만, 나하고 있을 때는 아주 상냥하게 속을 털어놓거든.”

어머니로 말하자면, 아마 그 대사는 어머니가 가장 마음이 끌리는 부류의 지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의 대화는 어떤 직업과 계급과 시대에 특유한 낡아빠진 말투들의 더없이 완벽한 용어집을 이루고 있어서, 그 직업과 계급에 관한 한 그 시대는 아직 온전히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니라고 할 만했는데, 그래서 나는 때때로 그가 하는 말을 그저 글자 그대로 받아 적어 두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곤 한다. 그리했더라면 나는, 그 놀라운 모자들을 대체 어디서 구해 오느냐는 물음에 “저는 모자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간직해 두는 거지요”라고 대답한 팔레 루아얄 극장의 그 배우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만큼이나 적은 밑천으로 고풍스러운 예법의 효과를 얻어 냈을 것이다. 한마디로, 어머니는 노르푸아 를 조금 ‘시대에 뒤진’ 사람으로 여기셨던 듯한데, 그것은 예법에 관한 한 어머니 눈에 결코 흠이 아니었으나, 어법이라는 영역에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덜 끌었다. 이 경우 사상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았으니, 노르푸아 의 사상은 지극히 현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남편에게 그토록 각별한 호의를 보인 그 외교관을 감탄 어린 투로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남편에게 은근한 찬사를 바치는 일이라고 느끼셨다. 아버지가 이미 노르푸아 에게 품고 있던 좋은 평가를 마음속에서 굳혀 드리고, 그리하여 아버지 자신에 대해서도 좋게 여기도록 이끎으로써, 어머니는 남편의 저녁 식사가 흠 없이 조리되어 조용히 차려지도록 살피실 때와 꼭 마찬가지로, 남편의 삶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 드린다는 아내의 소임 가운데 하나를 다하고 있음을 아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속일 줄 모르는 분이었기에, 그 늙은 대사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도록 스스로 그를 감탄하려 애쓰셨다. 하기야 어머니는 자연스레 그의 친절함을, 조금 예스러운 그 정중함을(어찌나 격식을 차리는지, 큰 키를 꼿꼿이 세우고 길을 걷다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어머니를 알아보면, 그는 모자를 들어 인사하기에 앞서 방금 불붙인 여송연을 내던지곤 했다) 마땅히 높이 사셨고 실제로도 그리하셨다. 또 어찌나 공들여 조심스러운지 자기 이야기는 되도록 삼가고 늘 상대방이 무엇에 관심을 둘지를 헤아리는 그의 대화도, 편지에 답하는 그 신속함도 그러했으니, 그 신속함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아버지는 노르푸아 에게 편지를 부치자마자 봉투 위에서 그의 필체를 볼 때면 언제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편지가 우편 도중에 엇갈리고 말았구나 하는 언짢은 생각부터 드셨는데, 그렇다면 그에게는 밤낮없이 아무 때나 특별히 편지를 받고 부칠 수 있는, 남다르고 호사스러운 특권이 주어져 있는 셈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그토록 바쁜데도 그토록 꼼꼼하고, 그토록 여기저기서 청함을 받는데도 그토록 다정한 것에 경탄하셨으나,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데도’란 언제나 알아채지 못한 ‘그렇기 때문에’라는 것을, 그리고 (노인이란 늘 나이에 비해 정정하고, 임금이란 유별나게 소탈하며, 시골 친척이란 놀랍도록 사정에 밝은 법이듯이) 노르푸아 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소임을 떠맡으면서도 편지 답장에 그토록 빈틈이 없게 하고, 어디든 다 드나들면서도 우리 집에 오면 그토록 다정하게 굴게 한 것이 바로 그 한결같은 습관의 체계였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하셨다. 게다가 어머니는,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지르는 잘못을 범하셨으니, 당신 자신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 낮잡아, 따라서 남들의 소임이나 볼일의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여기셨다. 하루 동안 써야 할 편지가 그토록 많았을 텐데도 아버지의 친구가 우리에게 서둘러 답장을 써 준 것이 어머니 보기에 그토록 갸륵한 일로 여겨졌던 그 편지를, 어머니는 정작 그것이 실은 그 숱한 편지 가운데 한 통이었건만 그 많은 편지의 수에서 따로 떼어 놓으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우리와 저녁을 드는 일이 노르푸아 에게는 그의 사교 생활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활동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셨고, 그 대사가 오래전부터 밖에서 저녁을 드는 일을 자신의 외교적 직무 가운데 하나로 여기도록, 또 식탁에서 몸에 밴 매력을 발휘하도록 스스로를 길들여 왔다는 것도, 그러니 그가 우리 집에 저녁을 들러 올 때만 유독 그 매력을 내려놓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이리라는 것도 짐작조차 못하셨다.

노르푸아 가 우리 식탁에 처음 나타난 그 저녁은, 내가 아직 샹젤리제로 놀러 다니던 어느 해의 일인데,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박혀 있다. 바로 그날 오후에 나는 마침내 낮 공연으로 페드르 속의 라 베르마를 보러 갔던 데다, 노르푸아 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새롭고도 색다른 방식으로, 질베르트 스완과 그 부모에 얽힌 온갖 것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그 똑같은 가족이 다른 누구에게 불러일으킬 법한 감정과 얼마나 철저히 다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질베르트를 통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고 그녀 자신이 내게 일러 준 신년 연휴가 다가오면서 내가 빠져든 그 침울함을 보다 못해, 어느 날 어머니는 내 마음을 딴 데로 돌려 보려는 마음에 이렇게 넌지시 이르셨을 것이다. “네가 아직도 그렇게 라 베르마를 보고 싶어 하니, 아버지가 어쩌면 보러 가도록 허락하실 것 같구나. 할머니가 데려다주실 수 있을 게다.”

그러나 그것은 노르푸아 가, 나에게 라 베르마를 보게 해 주어야 하며 그것은 젊은이가 훗날 두고두고 되새길 만한 경험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해 준 덕분이었다. 그때껏 아버지는, 할머니를 질겁하게 하며 ‘부질없는 짓’이라 부르던 일에 내가 시간을 허비하고 게다가 다시 병까지 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그토록 단호히 반대해 오셨건만, 이제는 이렇게 오후를 보내는 방식을 어렴풋하게나마 눈부신 앞길을 여는 데 소중한 비결들의 목록에 든 것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할머니로 말하자면, 당신 생각에 내가 라 베르마를 봄으로써 얻었을 이로움을 나를 위해 포기하면서까지 내 건강을 위해 적잖은 희생을 치르셨던 분인데, 그 건강이 노르푸아 의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 놀라워하셨다. 내게 처방된 신선한 공기와 이른 취침이라는 엄격한 섭생에 당신의 합리주의 정신이 품은 꺾이지 않는 희망을 걸어 두셨던 할머니는, 이제 내가 그 규칙을 어기게 된 것을 큰일이라도 난 듯 개탄하시며, 절망 어린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 “당신도 참 귀가 얇으시네요!” 하고 항의하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화가 나서 대꾸하셨다. “아니! 그럼 이번엔 당신이 애를 못 가게 하겠다는 거요. 온종일, 날이면 날마다 그게 애한테 그렇게 좋을 거라고 우리한테 말해 놓고선, 정말 너무하는구려.”

노르푸아 는 또한, 나에게 훨씬 더 중대한 문제에서 아버지의 계획에 변화를 가져왔다. 아버지는 늘 내가 외교관이 되기를 바라셨는데, 나는 설령 처음 몇 해는 외무부에 머문다 해도 나중에는 대사로서 질베르트가 살지 않는 어느 수도로 보내질 위험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지난날 스스로 세웠다가, 몇 해 전 게르망트 쪽을 거닐던 무렵에 접어 버린 그 문학의 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문학에 몸 바치는 것을 줄곧 반대하셨으니, 문학을 외교보다 한참 못한 것으로 여겨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높여 부르기조차 마다하셨는데, 그러다 마침내, 근래의 젊은 외교관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노르푸아 가, 글을 씀으로써도 얼마든지 그만큼의 이목을 끌고 그만큼의 대우를 받으며 그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대사관에서보다 더 큰 독립을 지킬 수 있다고 아버지에게 장담해 준 날이 왔던 것이다.

“허, 참, 나로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야. 노르푸아 영감이 네가 글쓰기를 하겠다는 생각을 조금도 나쁘게 보지 않더구나.” 아버지는 이렇게 전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자신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지닌 터라,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라면 ‘주선’하지 못할 것이 없고, 그럴듯한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할 문제도 없으리라 여기셨다. “조만간 위원회에서 그이를 저녁 식사에 데려오마. 너도 그이와 얘기를 좀 나누고, 너를 어떻게 보는지 살피게 해 드려라. 그이에게 보여 줄 만한 좋은 글을 하나 써 두려무나. 그이는 Deux-Mondes 편집장과 아주 가까운 사이니, 너를 거기 넣어 줄 게다. 그 능구렁이 영감이 죄다 주선해 줄 거야. 그리고, 정말이지, 그이는 요즘 세상에 외교라는 게 이젠 영…! 하는 눈치더구나.”

질베르트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리라는 전망에 겨워 나는 노르푸아 에게 보여 줄 만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졌으나, 그럴 능력은 없었다. 몇 장을 끙끙대며 써 내려간 끝에 나른함에 펜이 손가락에서 떨어졌다. 나는 나에게는 끝내 아무런 재능도 없으리라는, 나는 ‘타고나지’ 못했다는, 노르푸아 의 이번 방문이 내게 안겨 줄, 파리에서 여생을 보낼 그 기회조차 살리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분해서 울었다. 라 베르마를 보러 데려가 주기로 했다는 기억만이 그 슬픔에서 나를 잠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폭풍우라면 그것이 가장 사납게 몰아치는 해안에서가 아니면 보고 싶지 않았듯이, 이 위대한 여배우 또한, 스완이 그녀가 숭고의 경지에 이른다고 일러 준 저 고전 배역들 가운데 하나에서가 아니면 굳이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발견을 하리라는 희망에서 자연이나 예술 작품으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고자 할 때, 우리는 그 대신 다른, 못한 인상들을, 곧 아름다움의 값어치를 그릇되게 가늠하게 만들기 쉬운 인상들을 우리 영혼이 거두어들이도록 내버려 두기를 어딘가 꺼리게 되는 법이다. 안드로마크의, 마리안의 변덕의, 페드르의 라 베르마는 내 상상이 그토록 오래 갈망해 온 저 이름난 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만일 라 베르마가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시구를 읊는 것을 듣게 된다면, 곤돌라를 타고 프라리 성당의 티치아노나 산조르조 데이 스키아보니의 카르파초 그림들 발치까지 미끄러져 갔던 그날과 똑같은 황홀경을 맛보리라.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