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어서 파리 백작 이야기를 꺼내며, 그가 스완의 벗 가운데 하나가 아닌지 물었으니, 화제가 스완에게서 멀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 그렇소!” 하고 드 노르푸아 씨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마치 제 생명의 원소 속을 헤엄치듯 그 방대한 일솜씨와 흡수력이 떠도는 그 하늘빛 눈길을 나의 하찮은 몸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거 참,” 하고 다시 내 아버지를 향해 덧붙였다, “내가 늘 그 대공께 표해 온 존경의 선을 넘는 일은 아니라 여기며 (물론 그분과 어떤 사사로운 관계도 맺지 않고서 말이오, 그랬다간 미미하나마 나의 처지가 필연코 위태로워질 테니), 요점이 없지 않은 작은 일화 하나를 말씀드리리다. 사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인데, 중부 유럽 어느 나라의 작은 기차역에서 대공께서 우연히 스완 부인에게 눈길이 가 닿으셨소. 물론 그분 측근 가운데 누구도 감히 전하께 그녀를 어떻게 보셨는지 여쭙지는 못했지요. 그건 온당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어쩌다 대화 중에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어떤 기미로, 원하신다면 알아채기 어려운 것일지언정 결코 오해할 수 없는 어떤 기미로, 대공께서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 한마디로 결코 나쁘지 않았음을 넌지시 드러내기를 마다치 않으시는 듯했소.”
“하지만 그녀가 파리 백작께 소개될 가능성은 설마 없었겠지요?” 하고 내 아버지가 물었다.
“글쎄요, 그건 모를 일이오. 대공들의 일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법이지요.” 하고 드 노르푸아 씨가 대답했다. “가장 존귀한 분들, 자기에게 마땅히 돌아올 것을 얻어 내는 데 가장 밝은 분들이야말로, 여론의 명령에, 심지어 가장 정당한 명령에마저 스스로 얽매이기를 마다하는 일이 다반사요. 더구나 자기에게 바쳐진 개인적 충심에 보답하는 문제라면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파리 백작께서 스완의 헌신을,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조 있는 사내인 그의 헌신을 늘 더없이 너그러이 인정해 오셨음은 분명하오.”
“그래서 각하께서는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부디 말씀해 주세요!” 하고 내 어머니가, 예의에서만큼이나 호기심에서 물었다.
이 노(老)감식가의 온 기운이 그의 몸에 밴 절제된 말투를 뚫고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훌륭했소!”
그리고 한 여자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고백이, 장난스러운 어조로만 한다면, 크게 높이 사는 대화 기술의 어떤 범주에 든다는 것을 아는 터라, 그는 몇 초간 이어지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으니, 그 웃음은 늙은 외교관의 푸른 두 눈을 촉촉이 적시고 자잘한 진홍빛 실핏줄이 그물처럼 얽힌 그의 콧방울을 파르르 떨리게 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매력덩어리요!”
“이 만찬에 베르고트라는 이름의 작가가 있었습니까, 선생님?” 하고 나는, 여전히 화제를 스완 부부에게 붙들어 두려 애쓰며 머뭇머뭇 물었다.
“그렇소, 베르고트가 거기 있었소.” 하고 드 노르푸아 씨는, 마치 내 아버지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와 얽힌 것이라면 무엇에나, 이런 정중함을 받아 보는 데 익숙지 않은 내 또래 소년의 물음에마저 진정한 무게를 둔다는 듯, 내 쪽으로 공손히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를 아시오?” 하고 그는, 비스마르크의 칭찬을 받은 바 있는 그 맑은 눈길을 내게 붙박은 채 말을 이었다.
“제 아들은 그분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분의 작품을 무척 흠모한답니다.” 하고 내 어머니가 설명했다.
“맙소사!” 하고 드 노르푸아 씨가 외쳤으니, 내가 나 자신보다 천 배는 더 값지게 여기던 것, 세상에서 가장 드높다고 여기던 것이 그에게는 흠모의 저울에서 맨 밑바닥에 놓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여느 때 나를 괴롭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내 지성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자제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소. 베르고트로 말하자면 나는 피리 부는 사람이라 부르는 부류요. 그가 그것을 아주 듣기 좋게 분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으나, 다만 무척이나 겉멋과 꾸밈이 많지요. 하지만 다 말하고 나면 그뿐, 그리 대단한 것은 못 되오. 그의 맥 빠진 글 어디에서도 구성이라 할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소. 줄거리랄 게 없거나, 있어도 아주 미미하고, 무엇보다 폭이 없소. 그의 책들은 토대에서부터 무너지오, 아니 애당초 토대라는 게 없지요. 삶의 복잡함이 갈수록 더해져 읽을 겨를조차 좀처럼 나지 않는 요즘 같은 때, 유럽의 지도가 근본부터 뒤바뀌었고 십중팔구 머잖아 한층 더 격렬한 변동을 겪을 참인 이때, 새롭고 위협적인 문제가 사방에서 이토록 숱하게 일어나는 이때, 작가라면 순수한 형식의 미덕을 두고 부질없고 비잔틴풍인 논의를 벌이는 통에 우리가 언제라도 안팎의 두 겹 야만인 물결에, 곧 국경 밖에서 밀려오는 자들과 국경 안에서 이는 자들에게 휩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한낱 빼어난 지성 이상의 무엇이기를 요구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고, 내가 감히 말하는 것을 그대는 허락해 주시겠지요. 이것이 저 신사분들이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부르는 그 거룩한 유파에 대한 불경임을 나도 아오. 허나 역사의 이 시기에는 말을 조화롭게 매만지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업들이 있소. 베르고트의 솜씨가 이따금 자못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니오. 그 점을 두고 나는 트집 잡지 않소. 다만 통틀어 보면 죄다 너무 값진 척하고, 너무 얄팍하며, 사내다운 기운이랄 게 거의 없소. 자제분에 대한 그대의 저 지나친 애정을 헤아리고 보니, 아까 그대가 내게 보여 준 그 몇 줄이 이제 더 쉽게 이해가 되오. 그것을 눈감아 주지 않는 것은 그대에게 온당치 못한 일이었겠지요. 그대 자신이 더없이 소탈하게, 그저 어린애다운 끄적임일 뿐이라 일러 주었으니 말이오.” (과연 나는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조금도 그렇게 여기지는 않았다.) “어떤 죄든 용서받는 법이오, 더구나 젊은 날의 죄라면. 결국 그대 말고도 남들도 그런 죄를 양심에 지고 있고, 한때 자기를 시인이라 믿어 본 사람이 그대만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대가 내게 보여 준 것에서는 베르고트의 나쁜 영향이 보이오. 물론 거기에 그의 좋은 자질이라곤 없었다고 내가 말해도 그대는 놀라지 않을 것이오. 그는 그 나름의 문체를 다루는, 하기야 지극히 피상적인 그 기예의 노련한 대가이고, 그대 나이에는 그 초보조차 익혔을 리 없으니 말이오. 그럼에도 벌써 똑같은 결함이, 곧 그럴싸하게 울리는 말들을 죽 꿰어 놓고 그것들이 무슨 뜻인지는 그런 뒤에야 걱정하는 저 역설이 있소. 그건 소를 수레 앞에 매는 격이지요, 베르고트의 책에서마저 말이오. 형식을 두고 부린 그 온갖 중국식 퍼즐이며, 녹아내릴 듯한 그 관리(官吏)투의 세세한 기교란 내게는 죄다 부질없어 보이오. 작가가 제법 예쁘장하게 불꽃 몇 방을 쏘아 올리면, 천재라는 함성이 터져 나오지요. 천재의 작품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오! 베르고트는 그 착상이 조금이라도 드높은 소설 한 편을,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제 봇짐 속에 지녀 자기 몫으로 꼽을 만한 것을, 사람이 제 서재의 특별한 구석에 간직해 두는 그런 책 한 권을 내놓지 못하오. 그의 작품을 통틀어도 나는 그런 것을 하나도 찾지 못하겠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있어 작품이 작가보다 한없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오. 아! 작가란 오직 그 책을 통해서만 알아야 한다고 우겼던 그 재사(才士)의 말이 옳음을 그가 입증해 주는구려. 자기 책에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그보다 더 젠체하고, 더 거들먹거리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에 더 맞지 않는 사람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것이오. 어떤 순간엔 천박하고, 또 어떤 순간엔 책처럼, 그것도 제 책 같지도 않고 따분한 책처럼 지껄이는데, 그의 책은 공정히 말하자면 따분하지는 않으니, 그런 것이 바로 그대들의 베르고트요. 그는 더없이 뒤죽박죽인 정신의 소유자, 증류라도 한 듯한 정신의 소유자, 우리 조상들이 diseur de phébus라 부르던 부류라, 하는 말을 그 말하는 투로 한층 더 거북하게 만드오. 비니가 바로 그런 별난 버릇으로 사람들을 물리쳤다고 로메니가 전하는지 생트뵈브가 전하는지는 지금 잘 모르겠소. 그러나 베르고트는 우리에게 생마르도, 어떤 대목은 그대로 명문선(名文選)에 오를 만한 붉은 봉인도 결코 내놓은 적이 없소.”
내가 그에게 보여 준 단편에 관해 노르푸아 씨가 방금 한 말에 나는 마비된 듯했고, 동시에 논설을 써 보려 하거나 그저 진지한 사색에 몰두하려 할 때마다 겪던 어려움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번 내 지적 무능을, 그리고 내가 문학적 삶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님을 절감했다. 물론 지난날 콩브레에서 아주 소박한 부류의 어떤 인상들, 또는 베르고트의 몇 페이지가 나를 대단한 가치가 있어 보이던 몽상의 상태로 빠뜨리곤 했다. 그러나 이 상태야말로 내 산문시가 반영하던 것이었으니, 노르푸아 씨가 대번에 그것을 간파하고, 내가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 오로지 신기루의 소산일 뿐, 대사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은 이상 전적으로 거짓일 수밖에 없음을 꿰뚫어 보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반면 그는,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가장 호의적이고 가장 총명한 전문가에게 판단받을 때 내 자리가 얼마나 한없이 하찮은 것인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압도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 정신은, 저에게 마련된 그릇의 크기 말고는 아무런 치수도 갖지 않는 유체처럼, 방금 전까지 천재의 그 광대한 용량을 채우도록 부풀어 있다가, 이제는 오그라들어, 노르푸아 씨가 별안간 그것을 가두고 봉인해 버린 그 옹색한 범속함 속에 고스란히 담기고 말았다.
“우리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은, 베르고트와 나 말입니다,” 그가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소 가시밭길이었지요(하기야 이건 결국 그 만남에 재치가 없지 않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만). 베르고트는, 벌써 몇 해 전 일입니다만, 내가 대사로 있던 빈을 방문했지요. 메테르니히 대공비의 소개로 나를 찾아와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는, 대사관에 초대받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국땅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어쨌든 그가 제 저작으로 프랑스에 어느 정도(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미미한 정도) 명예를 안겨 준 터라, 나는 그의 사생활에 대해 품고 있던 좋지 못한 견해를 접어 둘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 여행하는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제 동반자 없이는 초대받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나 역시 여느 사내들보다 더 고지식한 축은 아니라고 자부하며, 독신인 만큼 아내와 자식을 둔 몸이었을 때보다는 대사관 문을 조금 더 넓게 열어 둘 처지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려서기를 주저할 만한 타락의 심연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심연은 베르고트가 그 책들에서 취하는 어조, 도덕적이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해 도덕가연하는 그 어조 탓에 한층 더 역겨워집니다. 그의 책에서는 오로지 끝없는, 그리고 우리끼리 얘기지만 다소 지루한 분석, 스스로를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 병적인 회한만이, 그것도 지극히 사소한 잘못, 아주 하찮은 장난(누구나 제 경험으로 아는) 때문에 늘어놓이는데, 정작 그 자신은 사생활에서 그토록 철저히 양심이 없고 그토록 냉소적이니 말입니다. 요컨대 짧게 줄이자면, 나는 그 책임을 회피했고, 대공비가 다시 청을 넣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 신사에게 딱히 성인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으로 비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스완이 그와 나를 같은 저녁에 초대해 준 호의를 그가 얼마나 고맙게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초대를 청한 것이 그 자신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정말이지 그는 정상이 아니니,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실은 그것만이 그의 유일한 변명이겠지요.”
“그런데 그 만찬에 스완 부인의 따님도 있었나요?” 나는 노르푸아 씨에게 물었다. 우리 모두가 응접실 쪽으로 옮겨 가던 참이라, 식탁에 앉아 램프 불빛에 붙들려 있을 때보다 내 감정을 더 쉽게 감출 수 있는 순간을 틈타 이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노르푸아 씨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그렇지, 열네댓 살쯤 된 젊은 아가씨 말이로군? 그래, 이제 생각나는데, 만찬 전에 우리를 초대한 주인의 따님이라고 내게 소개되었지. 한데 나는 그 아가씨를 거의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해 두어야겠네. 일찍 잠자리에 들었거든. 아니면 친구를 만나러 나갔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군. 하지만 자네가 스완 댁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건 알겠네.”
“저는 샹젤리제에서 스완 양과 함께 놀아요, 그 애는 정말 사랑스럽고요.”
“오! 그런 거였군, 그렇지? 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 아가씨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네. 그렇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 아가씨가 언젠가 제 어머니만 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네, 자네의 급소를 찌르는 말이 아니어야 할 텐데.”
“저는 스완 양의 얼굴이 더 좋지만, 그 어머니도 무척 흠모해요. 그저 그분이 지나가는 걸 볼까 하는 마음에 불로뉴 숲으로 산책을 나가는걸요.”
“아! 그렇다면 그 말을 꼭 전해 줘야겠군. 두 사람 다 무척 우쭐해할 걸세.”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 그리고 그 말을 마친 뒤 몇 초 동안, 노르푸아 씨는, 내가 스완을 총명한 사람이라 하고 그의 집안을 존경할 만한 주식중개인이라 하며 그의 저택을 훌륭한 저택이라 말하는 것을 듣고서, 내가 똑같이 총명한 다른 사람, 똑같이 존경할 만한 다른 주식중개인, 똑같이 훌륭한 다른 저택에 대해서도 그만큼 선뜻 말하리라 상상하는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 그것은 미치광이와 이야기하는 멀쩡한 사람이 아직 제 상대가 실성했음을 알아채지 못한 순간이었다. 노르푸아 씨는 예쁜 여인을 바라보는 데서 얻는 즐거움에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전혀 없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어떤 예쁜 여인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면 그가 그 여인을 사랑한다고 여기는 체하고 그의 뜻을 거들어 주겠노라 약속하는 것이 하나의 사교적 관례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질베르트와 그 어머니에게 이야기해 주겠다고 말하자(그것은, 마치 한 줄기 바람의 유동성을 띤 올림포스의 신처럼, 아니 오히려 미네르바가 그 형상을 빌리는 늙은 백발 노인의 모습을 하고서, 나 자신이 남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스완 부인의 응접실로 스며들어, 그녀의 주의를 끌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나의 흠모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고, 어느 중요한 인물의 벗으로서 그녀 앞에 나타나, 앞으로 그녀에게 초대받아 그 집안의 은밀한 삶에 들어설 만한 사람으로 그녀 눈에 비치게 해 줄 터였다), 나의 이익을 위해 스완 부인에게 틀림없이 지녔을 그 큰 영향력을 써 줄 이 중요한 인물은, 문득 내 안에 억누르기 힘든 애정을, 물속에 너무 오래 담가 둔 듯 희고 쭈글쭈글한 그의 부드러운 두 손에 입 맞추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강렬한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실제로 그 충동적인 몸짓의 윤곽을 허공에 어렴풋이 그리기까지 했으나,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나 혼자뿐이리라 여겼다. 우리 각자가 제 말이나 몸짓이 남에게 어느 정도의 크기로 드러나는지를 정확히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중요성을 과장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또한 남들이 살아가는 동안 형성하는 인상들이 미쳐야 하는 범위를 우리가 엄청나게 부풀려 잡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말과 태도에 딸린 부수적인 것들이 상대의 의식에는 좀처럼 파고들지 못하며 하물며 그 기억에는 더더욱 남지 않으리라 상상한다. 죄인들이 이미 해 놓은 진술의 문구를 “손질할” 때 굴복하는 것도 바로 이런 부류의 부추김이려니, 새로 꾸민 이본이 기존의 어떤 판본과도 대질될 리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천 년에 걸친 존속에 관해서조차, 모든 것이 망각으로 향하게 마련이라는 신문기자의 철학보다는, 모든 것의 보존을 예언하는 그 반대의 철학이 어쩌면 덜 그르다 할 수 있다. “파리 소식”란의 도덕가가 어떤 사건에 대해, 어떤 예술 작품에 대해, 하물며 제 “전성의 한때”를 누린 어느 여가수에 대해 “이 일을 십 년 뒤에 누가 기억하겠는가?”라고 말하는 바로 그 신문에서, 그 뒷장에는, 그 자체로는 덜 중요한 사실, 별 가치 없는 어느 시, 파라오 시대에서 유래해 이제 온전히 다시 알려진 그 시에 관한 비문학사원의 보고가 종종 실리지 않던가? 우리의 짧은 지상의 삶에서도 어쩌면 사정은 똑같지 않을까? 그런데도, 몇 해 뒤, 마침 그 집에도 찾아와 있던 노르푸아 씨가, 아버지의 벗이자, 너그럽고, 우리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녔으며, 게다가 그 직업과 교양으로 신중함이 몸에 밴 터라 내가 바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여겨지던 그 집에서, 대사가 떠난 뒤 나는, 그가 오래전 어느 저녁, 내가 막 그의 손에 입 맞추려던 순간을 목격했노라 넌지시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머리끝까지 얼굴이 붉어졌을 뿐 아니라, 노르푸아 씨가 나에 대해 말한 방식뿐 아니라 그 기억의 구성 요소들마저 내가 믿어 온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고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 뒷공론은 인간의 지성을 이루는, 정신의 부재와 현존, 회상과 망각의 헤아릴 수 없는 비율에 관해 나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나는, 마스페로의 어느 책에서, 그리스도 탄생보다 천 년이나 앞선 시절에 아슈르바니팔이 자기 사냥에 초대하곤 하던 사냥꾼들의 정확한 명단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을 처음 읽던 날처럼, 경이롭게 놀라고 말았다.
“오, 어르신,” 노르푸아 씨가 내가 그들을 얼마나 흠모하는지 질베르트와 그 어머니에게 알려 주겠노라 말하자 나는 그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스완 부인께 저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제 평생을 다 바쳐도 그 고마움을 증명하기에 모자랄 것이고, 그 삶은 온전히 어르신을 위한 것이 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은, 저는 스완 부인을 알지 못하며, 그분께 소개된 적도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마지막 말을 양심의 가책에서, 그리고 내가 갖지도 못한 친분을 뽐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는 동안 나는 그것이 이미 부질없음을 느꼈으니, 서늘한 열의가 밴 나의 감사 인사가 시작되자마자, 대사의 얼굴 위로 망설임과 못마땅함의 기색이 스치는 것을, 그리고 그의 눈 속에 그 수직의, 좁고, 비스듬한 시선이(원근법으로 입체를 그릴 때 한 면이 뒤로 물러나는 선처럼) 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자신이 지금껏 말을 건네 온 또 다른 청중, 이 경우엔 바로 나에게는 들려서는 안 될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사람이 제 안에 지닌 보이지 않는 청중에게 던지는 그런 시선이었다. 나는, 내가 내뱉은 이 말들이, 내 안을 흐르던 감사의 격류에 견주면 보잘것없었으나 노르푸아 씨의 마음을 움직여, 그에게는 그토록 수고가 적고 내게는 그토록 큰 기쁨을 안겨 줄 그 주선의 결심을 굳혀 주리라 여겼던 이 말들이, 어쩌면(나를 해치려 애쓰는 자들이 악마 같은 심술로 고를 수 있었을 온갖 말 가운데) 그로 하여금 그 뜻을 접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실제로 그가 내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낯선 사람과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한 인상을, 우리와 비슷하리라 여겨지는 그 인상을 서로 흐뭇하게 주고받으며 그들을 다 같이 천박하다 여기던 참에, 그가 무심코 제 주머니 위로 손을 쓸며 “이거 아쉽군, 여기 권총이 없다니. 있었으면 저것들을 몽땅 쏘아 넘겼을 텐데!” 하고 덧붙여, 우리와 그를 갈라놓는 병적인 심연을 대뜸 드러내는 순간과도 같았다. 스완 부인에게 천거되어 그 집에 드나드는 것만큼 값싸고 손쉬운 일도 없음을 아는 노르푸아 씨는, 반대로 나에게는 그런 호의가 그토록 비싼 값이 매겨지며 따라서 필경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보고서, 겉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인 내 소망이 무언가 다른 속셈을, 무언가 미심쩍은 의도를, 무언가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감추고 있음이 틀림없으며, 그 탓에 스완 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 뻔하니 여태껏 아무도 나의 전언을 그녀에게 전하는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나는, 이 소임을 그가 결코 맡지 않으리라는 것을, 앞으로 몇 해가 지나도록 날마다 스완 부인을 만난다 한들 내 이름 한 번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과연 그는 며칠 뒤 그녀에게 내가 필요로 하던 어떤 정보를 물어보고, 그것을 내게 전하도록 아버지에게 부탁하기는 했다. 그러나 자기가 누구의 부탁으로 물어보는 것인지는 그녀에게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는 내가 노르푸아 씨를 알고 있으며 그 집에 초대받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만큼 큰 불행은 아니었다. 이 두 번째 사실이 밝혀진들, 어차피 불확실한 첫 번째 사실의 효험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데트에게는 제 삶과 제 집에 대한 관념이 아무런 신비로운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이, 그녀에게는, 내가 노르푸아 씨를 안다고 돌에 적을 수만 있다면 스완의 유리창에 그 돌을 던졌을 나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던 것과 같은, 그런 전설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전언이라면, 설령 그토록 난폭한 방식으로 전해진다 해도, 그 안주인의 눈에 나를 깎아내리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드높여 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령 내가, 노르푸아 씨가 이행하지 않은 그 심부름이 부질없었을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스완네 사람들에게서 내 신용을 오히려 떨어뜨렸을 수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들, 나는, 그가 승낙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더라도, 대사를 그 소임에서 놓아주고, 내 이름과 내 사람됨이 그렇게 잠시나마 질베르트가 있는 자리에,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삶과 집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는 그 기쁨을, 아무리 그 결과가 파멸적일지언정, 단념할 용기는 없었을 것이다.
노르푸아 씨가 떠난 뒤 아버지는 석간신문을 훑어보았고, 나는 다시 한번 라 베르마를 떠올렸다. 그녀의 연기를 들으며 느낀 기쁨은,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것에 한참 못 미쳤던 만큼 더욱더 온전해지기를 갈구했다. 그리하여 그 기쁨은, 이를테면 노르푸아 씨가 라 베르마에게 있다고 인정한 그 장점들처럼, 그 기쁨에 자양분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뜸 빨아들였으니, 내 마음은 그것을, 물을 부어 주면 마른 잔디밭이 그러하듯, 단숨에 흡수해 버렸다. 이윽고 아버지는 신문을 내게 건네며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 대목을 가리켜 보였다.
오늘 오후 열광적인 관객 앞에서 상연된 페드르 공연은, 사교계와 예술계의 으뜸가는 인사들은 물론 주요 비평가들까지 아우른 그 관객 앞에서, 주역을 맡은 라 베르마 부인에게, 그 눈부신 이력의 어느 순간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찬란한 승리의 자리가 되었다. 극예술사에 하나의 사건이라 할 이 공연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더 상세히 논하기로 하고, 지금으로서는 다만 이것만 덧붙여 두려 한다. 가장 안목 있는 심사자들이 입을 모아 이르기를, 이러한 해석은 라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빼어나고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배역의 하나인 페드르 역에 전혀 새로운 빛을 던지며, 우리 세대가 목격하는 특권을 누린 극예술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드높은 발현을 이룬다는 것이다.
내 정신이 “극예술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드높은 발현”이라는 이 새로운 관념을 떠올리자마자, 그 관념은 내가 극장에서 느꼈던 불완전한 기쁨에게로 달려가 거기에 모자라던 것을 조금 보태었고, 그 둘의 결합은 무언가 그토록 마음을 드높이는 것을 이루어, 나는 속으로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인가!” 하고 외쳤다. 물론 내가 온전히 진심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차라리 이런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방금 써 놓은 페이지에 만족하지 못한 수많은 작가들이, 샤토브리앙의 천재성을 기리는 어떤 찬사를 읽거나, 자기가 필적하기를 열망하는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혼을 불러내려, 이를테면 베토벤의 한 악구를 흥얼거리며 그 우수를 자기가 산문으로 표현하려 애써 온 것과 견주어 볼 때, 그들은 그 천재의 관념에 그토록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을 자기 작품에 보태어, 그 작품을 다시금 떠올릴 때 더는 처음 비쳤던 빛으로 보지 않으며, 제 작품의 가치를 감히 믿어 보고서 “어쨌든 대단하지 않은가!” 하고 스스로에게 이르는데, 정작 그들의 궁극적 만족을 결정짓는 총합 속에, 자기 것과 동일시하지만 실은 냉정히 따지면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닌 샤토브리앙의 그 경이로운 페이지들에 대한 기억을 끌어들였음은 헤아리지 못한다. 정부의 배신만을 증거로 삼아 그 사랑을 믿는 수많은 사내들을 떠올려 보자. 또한, 위로받을 길 없는 남편으로서, 잃었으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은 아내를 생각할 때 죽음 너머의 알 수 없는 존속을 바라는 희망, 혹은 예술가로서 그리하여 누릴지 모를 사후의 영광을 바라는 희망, 그 갈마드는 희망에 기대어 버티는 이들 모두를 떠올려 보자. 아니면, 그러지 않고서는 감내해야 할 제 악행으로 생각이 돌아설 때 그들을 달래 주는 완전한 소멸의 희망을 떠올려 보자.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 내지 못하는 탓에 그에게 그다지 값져 보이지 않는 그 자신의 사색이, 출판업자로 하여금 어떤 종이를 고르게 하고, 어쩌면 받아 마땅한 것보다 더 고운 활자체를 쓰도록 만들 때, 나는 글을 쓰려는 내 욕망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토록 큰 아량을 베풀게 할 만큼 충분히 중요한 것인지 자문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아버지가 내 성향을 더는 변할 리 없는 것으로 말했을 때, 그는 내 안에 두 가지 끔찍한 의혹을 일깨웠다. 첫 번째는, (날마다 나는 아직 온전히 남아 있어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흘러가기 시작할 삶의 문턱에 서 있다고 스스로 여기던 그 시절에) 내 삶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게다가 앞으로 이어질 것도 이미 지나간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의혹은, 실은 첫 번째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시간의 영역 바깥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콩브레에서 내 버들가지 초소의 후미진 구석에 틀어박혀 그들의 삶을 읽을 때면 나는 그토록 깊은 우울에 잠기곤 했던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가 밟고 선 땅은 움직이지 않는 듯하며, 우리는 아무 동요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삶 속의 시간도 그와 같다. 그리하여 그 흐름을 감지시키기 위해 소설가들은, 시계추의 박자를 무섭게 몰아쳐, 독자를 단 몇 분 만에 십 년, 이십 년, 아니 삼십 년 너머로 실어 나르지 않을 수 없다. 한 페이지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희망에 부푼 연인을 떠나보내고, 다음 페이지의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나는데, 이제 그는 여든 살의 허리 굽은 노인이 되어, 양로원 안뜰을 도는 날마다의 산책길을 힘겹게 끌고 가며, 누가 말을 걸어도 겨우 대꾸하고, 지난날을 까맣게 잊고 있다. 나에 대해 “이 아이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이 아이 취향은 이제 바뀌지 않을 거야” 따위의 말을 함으로써, 아버지는 문득 나를, 시간 속에 놓인 내 자리에서 나 자신에게 드러나 보이게 했고, 아직 그 쇠약한 늙은 연금 수급자는 아닐지언정, 작가가 책 끄트머리에서 유난히 사람 속을 뒤집는 무심한 어조로 “그는 이제 시골에서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마음먹었다”고 우리에게 일러 주는 그런 주인공들 가운데 하나이기라도 한 듯한, 똑같은 우울에 나를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