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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부인 댁에서 ⑩

2권 제1부 · 스완 부인 댁에서

방문을 돌고 온 날이면 스완은 흔히 저녁 식사 전 얼마 남지 않은 시각에 집에 닿곤 했다. 지난날 그토록 비참하게 느끼던 저녁 그 시각, 여섯 시가 되어도 그는 이제 오데트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문하지 않았고, 그녀가 아직 손님을 맞고 있다거나 외출했다는 말을 들어도 거의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따금, 몇 해 전 오데트가 포르슈빌에게 보내는 편지를 봉투 너머로 읽어 보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기억은 그에게 즐겁지 않았고, 거기서 느끼는 수치의 깊이를 헤아리느니 그는 차라리 입가를 살짝 비틀어 얼굴을 찡그리고, 필요하다면 “그게 다 무슨 대수인가?”라는 뜻의 고갯짓을 곁들이는 편을 택했다. 사실 그는 이제 이렇게 여겼다. 지난날 그를 번번이 멈춰 세우던 가설, 곧 실은 결백했던 오데트의 삶을 어둡게 물들인 것은 오로지 질투에 사로잡힌 자기 상상일 뿐이라던 그 가설이, 진실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어차피 그 가설은 이로운 것이기는 했다. 사랑의 병이 이어지는 동안 그것은 그의 고통을 상상의 산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덜어 주었으니까. 그러나 사물을 올바른 빛 아래에서 본 것은 오히려 그의 질투였으며, 오데트가 그가 짐작하던 것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면, 그만큼 그를 더 속이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지난날, 고통이 아직 생생하던 시절 그는 이렇게 다짐했었다. 오데트를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되어, 그녀를 언짢게 하거나 자기가 실제보다 그녀를 더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그때가 오면, 오로지 진실을 아끼는 마음에서 또 역사적 사실을 밝히듯 그녀와 더불어 한 가지를 규명하는 만족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리라고. 그가 초인종을 울리고 창을 두드려도 안으로 들지 못했던 그날, 그리고 그녀가 포르슈빌에게 자기를 찾아온 것은 삼촌이었다고 편지를 써 보냈던 그날, 과연 그녀가 포르슈빌을 방에 들였는지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나 질투가 가라앉기만 하면 풀어 보려고 미뤄 두었던 이 자못 흥미로운 문제는, 그가 질투를 멈춘 바로 그때 스완의 눈에 흥미를 몽땅 잃고 말았다. 그렇다고 곧바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가 오데트를 두고 느끼는 질투라고는, 라 페루즈 거리의 그 작은 집 문을 부질없이 두드리며 보낸 그날, 그 오후의 기억이 그의 안에서 여전히 불러일으키는 것뿐이었다. 마치 그의 질투가, 그 병소와 전염의 중심이 특정 사람들보다는 특정 장소, 특정 집에 있는 듯한 저 질병들과 그 점에서 다르지 않아, 오데트 자신보다는 오히려 그날, 스완이 그녀 집의 온갖 출입구를 차례로 두드려 대던 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그 시각을 겨냥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 그 시각만이 한때 스완의 것이던 사랑에 빠진 인격의 마지막 파편 몇을 붙들어 간직했으며, 이제 그가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은 오직 거기뿐이라고 할 만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오데트가 그를 속였다는 것도, 여전히 속이고 있다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몇 해에 걸쳐 오데트의 옛 하인들을 계속 수소문했으니, 그토록 오래전의 그날 여섯 시에 오데트가 포르슈빌과 잠자리에 있었는지를 알고 싶은 괴로운 호기심이 그의 안에 그만큼 완강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그 호기심마저 사라졌으나, 그렇다고 그가 캐묻기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더는 흥미롭지도 않은 것을 알아내려는 시도를 이어 갔으니, 그의 낡은 자아가 노쇠의 극한까지 쪼그라들었으면서도 여전히 기계처럼 움직이며, 이제는 까맣게 버려진 온갖 집착의 궤도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완은 이제 그 고뇌가 어떤 것이었는지 떠올려 보는 일조차 해내지 못했다. 한때 그토록 절박하여, 자기가 언젠가 거기서 벗어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오직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만이(그 죽음이란, 이 이야기의 뒷부분에서 어느 잔혹한 본보기로 드러나듯, 질투가 낳은 고통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때 넘을 수 없이 가로막혀 있던 제 삶의 길을 평탄하게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고뇌를 말이다.

그러나 언젠가 자기 고통의 빚을 진 오데트의 삶의 그 대목들을 환히 밝혀내는 것만이 스완의 유일한 야심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야심이 남아 있었으니, 오데트를 더는 사랑하지 않아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제 고통에 앙갚음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야심을 채울 기회가 마침 찾아왔다. 스완이 다른 여자를, 질투할 빌미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를 질투하게 만드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오데트에게 써먹던 그 방식을 이번에는 다른 여자에게 써야만 했던 것이다. 스완의 질투를 되살리는 데 이 여자가 부정을 저질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어떤 까닭에서든 그녀가 그와 떨어져 있기만 하면, 이를테면 아마도 즐기고 있을 어느 연회에 가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안에서 저 옛 고뇌가, 사랑에 돋아난 저 딱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군더더기가 다시 깨어나기에 충분했으니, 그 고뇌는 스완을 그녀의 참모습으로부터 늘 멀찍이 떼어 놓았다. 마치 불가능한 것에 이르려는 갈망처럼 말이다(이 젊은 여자가 그에게 실제로 품은 감정, 그녀의 나날을 사로잡은 숨은 열망, 그 마음의 은밀한 구석들에 이르려는 갈망처럼). 스완과 그가 사랑하는 여자 사이에서 이 고뇌는 이미 존재하던 의심들을 완강한 덩어리로 쌓아 올렸으니, 그 의심들은 오데트에게, 어쩌면 오데트에 앞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원인을 두고 있었으며, 이제 늙어 가는 이 연인으로 하여금 지금의 정부를 오로지 ‘자기를 질투하게 만드는 여자’라는, 대대로 이어지고 뭉뚱그려진 환영 속에서만 알게 하였고, 그는 그 환영 속에 제 새로운 사랑을 제멋대로 육화해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완은 흔히 제 질투를, 있지도 않은 부정을 믿게 만든 죄로 몰아세우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그는 오데트에게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해 주었다가 바로 그 점에서 틀렸었음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그가 사랑하는 젊은 여자가 그와 함께 있지 않은 그 시간에 하는 모든 일이 그의 눈에는 그 결백을 잃은 것처럼 비쳤다. 그러나 그때, 그 다른 시절에 그는 이런 다짐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장차 아내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던 그녀를 언젠가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토록 오래 그녀에게 짓밟혀 온 제 자존심을 앙갚음하고자, 마침내 진심에서 우러난 무관심을 그녀에게 가차 없이 내보이리라고. 이제 그는 아무 위험 없이 그런 보복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건만(그가 자기 말대로 받아들여져 한때 그토록 절실하던 오데트와의 그 은밀한 순간들을 빼앗긴들 그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런 보복 따위는 이제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랑이 사라지면서 더는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음을 내보이려는 욕망도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오데트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절이라면 언젠가 자기가 딴 여자에게 빠졌음을 그녀에게 보여 주기를 그토록 간절히 고대했을 그가, 정작 그럴 수 있는 처지가 되자 이번에는 아내가 이 새로운 사랑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없이 조심을 기울였다.

이제 내가 끼게 된 것은, 지난날 질베르트가 나를 두고 여느 때보다 일찍 집에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해야 했던 그 다과회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산책이나 어느 오후 모임에 가기로 한 약속들, 그래서 그녀가 샹젤리제에 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내가 잔디밭에서 홀로 서성이거나 목마 앞에 서 있던 그런 날들에 나에게서 그녀를 앗아 가던 그 약속들에도, 이제 스완 부인은 나를 끼워 주었다. 나는 그들의 사륜마차에 자리를 얻었고, 게다가 극장에 갈지, 질베르트의 어느 벗의 집에서 열리는 무용 수업에 갈지, 그녀 부모의 벗들이 여는 어느 사교 모임(오데트가 ‘작은 모임’이라 부르던 것)에 갈지, 아니면 생드니의 무덤들을 보러 갈지를 그들이 물어 오는 상대는 다름 아닌 나였다.

스완 부부와 어디든 함께 가기로 한 날이면, 나는 스완 부인이 ‘르 런치’라 부르던 점심 식사 시각에 맞춰 그 집에 닿곤 했다. 열두 시 반 전에는 손님을 기다리지 않았는데, 그 무렵 우리 부모님은 열한 시 십오 분에 식사를 하셨으므로, 그분들이 식탁에서 일어난 뒤에야 나는 그 호사스러운 동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어느 시각에나 제법 한산했지만, 다들 집 안에 들어가 있는 바로 그때는 유난히 더 그러했다. 서리 내린 겨울날에도, 날씨만 버텨 준다면 나는 몇 분마다 샤르베에서 산 화려한 넥타이의 매듭을 조이고 에나멜 구두가 더러워지지 않았나 살피면서, 스물일곱 분이 될 때까지 큰길들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멀리서도 나는 스완가의 작은 뜰에서 잎 진 나무들 위로 햇빛이 서리처럼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기야 그 뜰이 자랑하는 나무라야 두 그루뿐이었지만. 여느 때와 다른 시각은 그 풍경을 새로운 빛 속에 내보였다. 이런 자연의 즐거움 속으로(습관이 걷힌 데다 육신의 허기까지 더해져 한층 짙어진 즐거움 속으로) 스완 부인과 마주 앉아 점심을 들리라는 설레는 기대가 스며들었다. 그 기대는 그 즐거움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휘어잡아 제 시중을 들도록 길들였다. 그리하여 평소라면 알아채지도 못했을 이 시각에, 내가 이제 좋은 날씨와 추위와 겨울 햇살을 새로 발견하는 듯싶었다면, 그 모든 것은 크림을 얹은 달걀 요리로 들어가는 일종의 서문 같은 것이었고, 스완 부인의 거처인 저 신비로운 예배당의 장식 위에 입혀진 하나의 고색(古色), 서늘하고 빛깔 고운 유약 같은 것이었으니, 그 예배당의 한복판에는 대조적으로 그토록 많은 온기와, 그토록 많은 향기와 꽃이 있었다.

열두 시 반이 되면 나는 마침내 그 집으로 들어서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집은 거대한 크리스마스 양말처럼 나에게 초자연적인 기쁨을 안겨 줄 채비가 된 듯 보였다. (그런데 프랑스식 이름 ‘노엘’을 스완 부인과 질베르트는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 대신 영어 ‘크리스마스’를 갖다 썼으며, 오로지 ‘크리스마스 푸딩’ 이야기만, 사람들이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 이야기만,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쇠러’ 어디론가 떠난다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는데, 그 떠난다는 생각은 나를 슬픔으로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다. 집에서조차 나는 ‘노엘’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천하게 여겨 늘 ‘크리스마스’라고 했으니, 아버지는 그것을 몹시 유치한 짓으로 여기셨다.)

처음에 내가 마주친 것은 하인 하나뿐이었는데, 그는 큼직한 응접실을 몇 개나 지나 나를 이끌더니 아주 작고 텅 빈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의 창들은 벌써 오후의 푸른 빛 속에서 꿈꾸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 난초와 장미와 제비꽃과 더불어 홀로 남겨졌으니, 그 꽃들은 그대 곁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나 그대를 알지는 못하는 사람들처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그 개성 덕에 한층 인상 깊어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수정 가리개 뒤에 귀하게 놓인 채 이글거리는 숯불의 온기를 쌀쌀맞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불은 흰 대리석 화반(火盤) 속에서 타오르며 이따금 그 위태로운 루비를 화반 너머로 흘려 내곤 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일어섰다. 하지만 또 다른 하인일 뿐이었고, 이어 세 번째 하인이었으며, 공연히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들의 드나듦이 이뤄 낸 자잘한 결과라야 불에 숯을 조금 더 얹거나 꽃병에 물을 조금 더 붓는 것이었다. 그들이 물러가고, 스완 부인이 머잖아 틀림없이 열고 들어올 그 문이 닫히자, 나는 다시 홀로 남았다. 솔직히 나는 마법사의 동굴에 있었더라도, 클링조르의 실험실에서처럼 불이 연금술의 변성을 행하는 듯 보이던 이 작은 대기실에 있을 때만큼 마음이 편치 않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소리가 새로 들렸으나 나는 일어서지 않았으니, 또 다른 하인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완 였다. “아니! 혼자 있었나? 어쩌겠나, 딱한 내 아내는 도무지 시간이 뭔지 기억하는 법이 없다네! 한 시 십 분 전이야. 날마다 점점 늦어지는군. 두고 보게, 그 사람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유유히 들어와서는 시간이 넘치도록 남았다고 여길 걸세.” 그리고 그는 여전히 신경염을 앓고 있었고 또 조금은 우스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던 터라, 이토록 시간을 안 지키는 아내를, 불로뉴 숲에서 그토록 늦게 돌아오고 재봉사네 집에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며 점심때에 제시간을 맞추는 법이 없는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이 스완을 제 소화를 걱정하게 만들면서도 그 자존심은 우쭐하게 했다.

그는 나에게 최근에 사들인 것들을 보여 주며 그 흥미로운 점을 설명해 주었으나, 나의 흥분은, 이 시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낯섦까지 더해져 내 마음속을 휩쓸고 지나가며 그것을 텅 비게 했으니, 그리하여 나는 말은 할 수 있었으되 들을 수는 없는 지경이었다. 어쨌든 스완이 지닌 예술품들로 말하자면, 그것들이 그의 집 안에 있다는 것, 거기서 점심에 앞선 그 감미로운 한때의 일부를 이룬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충분했다. 조콘다 그 자체가 거기 나타났다 한들, 스완 부인의 실내복 한 벌이나 향수병 하나가 주는 것 이상의 기쁨을 나에게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홀로, 혹은 스완과 더불어, 또 흔히는 우리와 함께 있어 주려고 들어온 질베르트와 더불어 계속 기다렸다. 그 모든 위엄 있는 출현이 나를 위해 미리 마련해 놓은 스완 부인의 등장은, 적어도 나에게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무엇일 것만 같았다. 나는 아주 작은 소리라도 놓칠세라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대성당도, 폭풍 속의 파도도, 허공을 가르는 무용수의 도약도, 기대했던 만큼 높다고 느껴지는 법은 결코 없다. 무대 위로 줄지어 등장해 여왕의 마지막 출현으로 이끌면서 동시에 그 출현을 김빠지게 하는 합창대를 떠올리게 하던 저 제복 입은 하인들 뒤에, 자그마한 수달피 외투를 걸치고 추위에 코끝이 발그레해진 것을 가리려 베일을 내린 채 살그머니 숨어들 듯 들어오는 스완 부인은, 내가 기다리는 동안 내 상상에 아낌없이 쏟아졌던 그 약속들을 채워 주지 못했다.

그러나 오전 내내 집에 머물러 있던 날이면, 그녀가 응접실에 들어설 때 걸친 것은 화사한 빛깔의 크레프드신 실내복이었으니, 그것은 나에게 그녀의 어떤 드레스보다도 더 우아해 보였다.

이따금 스완 부부는 오후 내내 집에 머물기로 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점심을 워낙 늦게 든 터라, 나는 이내 담장 너머로 그날의 해가, 다른 날들과는 사뭇 다르리라 여겨졌던 그날의 해가 저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럴 때면 하인들이 온갖 크기와 모양의 등불을 들여와, 마치 무슨 기이하고 은밀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콘솔이며 카드놀이 탁자며 구석 찬장이며 벽 받침대 저마다의 성별된 제단 위에 그것들을 밝혀 놓아도 부질없었다. 대화에서는 별다른 일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자정 미사를 마친 뒤 어린 시절에 흔히 그러하듯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의 실망은 머릿속의 것에 지나지 않다시피 했다. 나는 이 집에서 행복으로 빛나고 있었으니, 여기서는 아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던 질베르트가 곧 나타나, 이내 그리고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내가 콩브레에서 그 첫 순간에 붙잡았던 그대로의 그 말과, 미소 띤 채 살뜰히 바라보는 그 눈길을 나에게 베풀어 줄 참이었다. 기껏해야 나는 그녀가 전용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위층의 널찍한 방들 속으로 그토록 자주 사라지는 것을 볼 때 조금 질투가 났을 뿐이다. 나 자신은 응접실에 남아 있어야 했으니, 마치 여배우에게 반한 사내가 ‘앞쪽’ 자기 좌석에 붙박인 채 무대 뒤, 분장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애가 타서 궁금해하듯, 나는 집의 그 다른 구역에 관해 스완에게 교묘히 에두른 물음들을 던졌으나, 그 말투에서 불안의 기색만은 끝내 다 몰아내지 못했다. 그는 질베르트가 간 곳이 리넨 방이라고 설명해 주었고, 몸소 그곳을 보여 주겠다고 나섰으며, 앞으로 질베르트가 다시 그리로 갈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그녀에게 나를 데려가라 이르겠노라 약속했다. 이 마지막 말과 그것이 나에게 안겨 준 안도로써, 스완은 그 끝에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이 그토록 아득히 보이는 저 무시무시한 내면의 원근법 하나를 단번에 없애 주었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질베르트를 향한 애정보다 더 깊으리라 여겨지는 애정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딸을 다스리는 주인인 그는 그녀를 나에게 내어 주고 있었던 반면, 그녀는 이따금 스스로를 아꼈으니, 나는 스완을 통해 간접적으로 누리던 것과 같은 직접적인 지배력을 그녀에게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였으니, 그런 까닭에 나는 그 설렘 없이는, 무언가 더를 바라는 그 욕망 없이는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고, 그 욕망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이 앞에서 사랑한다는 감각 자체를 우리 안에서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집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이따금 스완 부인은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 전에 피아노 앞에 앉곤 했다. 그녀의 어여쁜 두 손은 크레프드신 실내복의 분홍빛, 혹은 흰빛, 흔히는 선명한 빛깔의 소매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눈에는 어려 있으되 마음에는 없던 바로 그 우수를 띤 채 건반 위로 드리워졌다. 그런 어느 날, 그녀는 마침 뱅퇴유 소나타에서 스완이 그토록 아끼던 작은 악절이 담긴 부분을 나에게 들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듣는, 조금이라도 복잡한 곡이라면, 사람은 흔히 귀를 기울이고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런데도 훗날 이 소나타를 두세 번 거듭 들려주고 나니, 나는 그것을 꽤 잘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무언가를 ‘처음 듣는다’고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짐작하듯 첫 청취에서 아무 인상도 받지 못한 것이 참이라면,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똑같이 ‘첫 청취’일 터이고, 열 번째라 해서 그것을 더 잘 이해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모자라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기억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곡을 듣는 동안 마주해야 하는 인상들의 복잡함에 견주면 우리의 기억은 무한히 작아, 잠결에 수천 가지를 생각했다가 이내 잊어버리는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혹은 방금 들은 말을 일 분 뒤에도 떠올리지 못하는 노망든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짧다. 이 여러 겹의 인상을 두고 우리의 기억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그림을 마련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 그림은 차츰 형태를 갖추어 가니, 두 번 넘게 들은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들기 전 몰랐다고 여기던 과제를 여러 번 되풀이해 읽고는 이튿날 아침 그것을 줄줄 외울 수 있음을 깨닫는 학생과 같다. 다만 그때까지 나는 그 소나타의 한 음도 듣지 못했을 뿐이었고, 스완 부부가 또렷한 악절 하나를 알아들을 수 있던 그 대목은, 떠올리려 애써도 그 자리에서 그저 텅 빔만이 발견되는 어떤 이름만큼이나 내 지각의 범위 밖에 있었다. 그 텅 빔에서, 한 시간 뒤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헛되이 불러 대던 음절들이 저절로, 하나로 이어져 날아오르듯 솟아나는 그런 이름 말이다.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작품일수록 그 인상을 대번에 붙잡아 간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작품의 내용 안에서도(뱅퇴유 소나타를 두고 내게 일어난 일이 그러했듯) 사람이 처음 알아채는 것은 가장 값어치 없는 부분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완 부인이 그 가장 유명한 대목을 나에게 들려준 그 순간부터 이 작품이 나를 위해 더 간직해 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그래서 오랫동안 그것을 다시 들으려 애쓰지 않은) 잘못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나는, 사진으로 이미 그 둥근 지붕들의 윤곽을 익힌 탓에 베네치아에서 성 마르코 성당의 정면 앞에 서서도 아무런 놀라움을 느끼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어리석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소나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뒤에도, 그것은 나에게 거의 온통 보이지 않는 채로 남아 있었으니, 그 거리 탓에, 혹은 대기 속의 안개 탓에 희미하고 조각난 언뜻거림밖에는 붙잡을 수 없는 기념비와도 같았다. 바로 여기서, 이런 작품들을, 나아가 시간 속에서 실재를 얻는 모든 것을 알아 가는 데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우울이 온다. 뱅퇴유 소나타에서 가장 잘 드러나지 않던 아름다움들이 나에게 모습을 드러낼 무렵, 어느새 습관의 힘에 실려 내 감수성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밀려간 채, 내가 처음부터 그 안에서 가려내어 좋아하던 것들은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나를 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소나타가 나에게 주는 온갖 즐거움을 나는 오직 잇따르는 순간들 속에서만 누릴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온전히 통째로 지녀 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와 같았다. 그러나 삶보다는 덜 실망스럽게도, 위대한 예술 작품은 그 가장 좋은 것을 처음부터 죄다 내어 주지는 않는다. 뱅퇴유 소나타에서 대번에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또한 가장 빨리 싫증나는 아름다움이기도 한데, 그 까닭은 필시, 그것들이 이미 아는 것과 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첫 출현들이 물러가고 나면,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어떤 대목이 남는다. 그 짜임새가 너무 새롭고 낯설어 우리 마음에 혼란밖에 안겨 주지 못한 탓에 분간되지 않은 채로, 그래서 고스란히 간직되어 온 대목이다. 날마다 마주치면서도 그런 줄 알아채지 못한 이 대목, 그렇게 우리를 위해 아껴져 온 이 대목, 그 아름다움의 순전한 힘 때문에 도리어 보이지 않게 되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이 대목이야말로 맨 마지막에 우리에게 온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우리가 맨 나중에야 놓아주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더 오래 걸린 만큼, 나머지보다 더 오래 이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어떤 깊이를 지닌 작품을 꿰뚫는 데 사람이 필요로 하는 시간은, 내가 이 소나타를 두고 필요로 했던 그 시간은, 참으로 새로운 걸작을 대중이 아끼기 시작하기까지 흘러야 하는 세월, 아니 몇 세기의 축약, 이를테면 그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재는 세상의 무지한 멸시로부터 자기를 지키고자, 동시대인은 그 필요한 거리 두기를 해내지 못하므로 후세를 위해 쓰인 작품은 오직 후세에게만 읽혀야 마땅하다고, 마치 너무 가까이 서면 감상할 수 없는 어떤 그림들처럼 그러하다고 스스로에게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그릇된 판단을 피하려는 그런 비겁한 조심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그릇된 판단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천재의 작품이 처음부터 쉽사리 찬탄받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을 지어낸 사람이 비범하여 그를 닮은 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4중주곡을 위한 청중을 빚어내고 다듬고 넓히는 데 반세기를 바친 것은 바로 그 베토벤의 4중주곡들(제12번, 제13번, 제14번, 제15번) 자신이었으니, 그것들은 그렇게, 여느 위대한 예술 작품이 다 그러하듯, 예술적 가치에서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지적 사회에서의 진전을 이룩했다. 오늘날 그 사회는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는 찾아볼 수 없던 것들로, 다시 말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태반이 이루어져 있다. 예술가들이 후세라 부르는 것은 곧 예술 작품의 후세다. 작품이 제 후세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간결함을 위해, 여러 천재가 동시에 나란한 길을 걸으며 장차 더 식견 있는 대중을, 그리하여 다른 천재들이 그 덕을 거두게 될 대중을 빚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제쳐 두기로 하자).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이 아껴 감춰진 채 오직 후세에게만 드러난다면, 그 특정 작품에게 그 청중이란 후세가 아니라 그저 반세기 뒤의 시간을 살고 있을 뿐인 한 무리의 동시대인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가가(뱅퇴유가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제 작품이 제 갈 길을 자유로이 따라가기를 바란다면, 충분한 깊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것을 미래를 향해 당당히 띄워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이 시간의 간격, 곧 예술 작품을 바라볼 참된 원근법을 두고, 그것을 셈에서 빼놓는 것이 서투른 심판자들의 잘못이라면, 그것을 셈에 넣는 것은 때로 훌륭한 심판자들의 위험한 조심이다. 지평선 위의 모든 것이 같은 거리에 있는 듯 보이게 하는 착각과 비슷한 착각으로, 우리는 회화나 음악에서 이제껏 일어난 온갖 혁명은 적어도 어떤 규칙만은 존중했던 반면, 지금 우리 눈앞에 당장 맞선 것은, 그것이 인상주의든, 불협화음의 추구든, 중국 음계만의 사용이든, 입체파든, 미래파든, 그 무엇이든 간에, 앞서 일어난 모든 것과는 터무니없이 다르다고 손쉽게 상상해 버린다. 이는 그저, 앞서 일어난 것들을 우리가 하나의 전체로 여기는 버릇이 있어, 오랜 동화의 과정이 그것들을 하나의 이어진 실체로, 물론 갖가지이지만 전체로 보면 균질한, 위고가 몰리에르와 뒤섞이는 그런 실체로 녹여 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젊은 시절에 그려져 우리에게 내밀어진, 무르익은 훗날의 우리 자신에 관한 별점을 두고, 만일 우리가 미래를, 그리고 미래가 반드시 가져올 변화들을 셈에 넣지 않는다면 거기서 마주하게 될 그 충격적인 앞뒤 안 맞음을 한번 상상해 보자. 다만 별점이 늘 들어맞는 것은 아니며, 예술 작품을 판단할 때 그 아름다움의 총합 속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넣어야 한다는 그 필요는, 우리 생각에, 무언가 그만큼 미덥지 못한 것을, 따라서 그만큼 흥미가 메마른 것을 끌어들인다. 이뤄지지 않더라도 예언자의 무능을 조금도 뜻하지 않을 온갖 예언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가능성들을 불러내어 존재케 하거나 존재에서 배제하는 힘이 반드시 천재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를 지녔으면서도 철도나 비행의 미래를 믿지 않았을 수 있고, 혹은 빼어난 심리학자이면서도, 자기보다 훨씬 재능이 모자란 사람들이라면 미리 내다보았을 정부(情婦)나 벗의 배신을, 그 부정을 믿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