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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부인 댁에서 ⑫

2권 제1부 · 스완 부인 댁에서

때로 그 겨울의 막바지 나날이면 우리는, 나들이에 나서기 전에, 그 무렵 열리던 자그마한 그림 전시회 가운데 하나에 들르곤 했는데, 거기서 스완은 이름난 수집가로서, 그 전시가 열린 화랑의 화상들에게서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아직 겨울 같은 그 날씨 속에서, 이미 무르익은 봄과 이글거리는 햇살이 장밋빛 알피유에 보랏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대운하에 에메랄드처럼 짙은 투명함을 부여하던 그 전시실들은, 프랑스 남부와 베네치아로 떠나고 싶은 오랜 갈망을 내 안에 되살려 놓곤 했다. 날씨가 궂으면 우리는 음악회나 극장에 갔다가, 그다음엔 이름난 찻집 가운데 하나로 갔다. 거기서 스완 부인은, 옆 탁자의 사람들은 물론 우리에게 차를 내오는 종업원들조차 알아듣지 않기를 바라는 말을 내게 할 때면, 마치 그것이 우리 둘만 아는 은밀한 언어이기라도 한 듯 영어로 말하곤 했다. 공교롭게도 그곳의 모든 사람이 영어를 알았고, 그 언어를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나 하나뿐이어서, 나는 스완 부인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차를 마시거나 우리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두고 그녀가 늘어놓는, 나는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험담이려니 짐작하던 말을 그녀가 더는 늘어놓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말이란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이에, 정작 그 대상이 된 사람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는 그런 말이었다.

한번은 어느 날 오후의 극장 관람 일로 질베르트가 나를 크게 놀라게 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그녀가 내게 말했던, 그녀 할아버지의 기일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그녀와 나는, 그녀의 가정교사와 함께 어느 오페라의 발췌곡을 들으러 가기로 되어 있었고, 질베르트는 이 공연에 갈 요량으로 옷을 차려입고서, 우리가 무엇을 하러 가든 으레 짓곤 하던 그 무심한 태도를 띠고 있었으니, 나를 즐겁게 하고 제 부모의 허락만 받는다면 세상 그 무엇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점심 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우리를 한쪽으로 데려가, 그런 날 우리가 극장에 간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언짢아한다고 일러 주었다. 내게는 그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질베르트는 무표정을 지켰으나, 감추지 못한 노여움으로 얼굴이 하얘졌다. 그래도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완 가 우리와 합류하자 그의 아내가 그를 방 저편으로 데려가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그는 질베르트를 불렀고, 둘은 함께 옆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들의 높아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그토록 다정하며 그토록 사려 깊은 질베르트가, 그런 날 그토록 하찮은 일로 아버지의 청을 거스르리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마침내 스완이 그녀와 함께 다시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말 들었지. 이제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질베르트의 얼굴은 점심 내내 찌푸린 채 굳어 있었고,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그녀의 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마치 제 할 일을 두고 한순간도 망설인 적 없었다는 듯이, “두 시네!” 그녀가 소리쳤다, “음악회가 두 시 반에 시작하는 거 알잖아.” 그러고는 가정교사에게 서두르라고 일렀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일깨웠다, “아버님이 너한테 화내지 않으실까?”

“눈곱만큼도 안 그러셔!”

“그래도 기일이라서, 남 보기에 이상할까 봐 걱정하셨잖아.”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 나한테 무슨 상관이야? 마음의 일을 두고 남들을 신경 쓰는 건 참 우스운 짓이라고 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느끼는 거지, 남들 보라고 느끼는 게 아니잖아. 마드무아젤은 낙이 거의 없는 분이야. 이 음악회에 가는 걸 손꼽아 기다려 오셨고. 나는 그저 세상의 이목을 채우자고 그 낙을 빼앗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질베르트,” 내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항변했다, “그건 세상의 이목을 채우자는 게 아니라, 네 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거잖아.”

“설마 내 행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가 팔을 홱 빼며 쌀쌀맞게 말했다.

스완 부부가 나를 아클리마타시옹 정원에 데려가 준 것보다도 더 값진 은혜로, 그들은 베르고트와의 우정에서마저 나를 따돌리지 않았다. 바로 그 우정이야말로, 내가 아직 질베르트를 보기도 전에 그들에게 끌렸던 매력의 뿌리였으니, 그 신과도 같은 노대가와 질베르트가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내게 더없이 열렬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벗이 되었을 터였다. 다만 내가 그녀에게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으리라 여긴 그 경멸이, 언젠가 그녀가 나를 그의 곁에 데리고 그가 사랑하는 고을들을 찾아가리라는 희망마저 내게 금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런데 보라, 어느 날 스완 부인에게서 큰 오찬 모임에 와 달라는 초대가 왔다. 다른 손님으로 누가 오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도착해서 현관을 가로지르던 나는 어떤 당혹스러운 사건에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스완 부인은 한철 유행으로 통하다가 이내 호응을 얻지 못해 재빨리 버려지는 그런 관습이라면 무엇 하나 받아들일 기회를 좀처럼 놓치지 않았다(이를테면 여러 해 전에는 자기만의 “자가용 핸섬”을 두었고, 지금은 오찬 초대장 카드에 영어로 “To meet”이라는 말을 찍고 그 뒤에 그럭저럭 중요한 인물의 이름을 붙이곤 했다). 이런 관용은 흔히 무슨 신비를 담은 것도 아니어서 따로 입문 절차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그 무렵 영국에서 들여온 사소한 새 유행이 하나 있었다. 오데트는 남편을 시켜 명함을 찍게 했는데, 거기에는 샤를 스완이라는 이름 앞에 “Mr.”가 붙어 있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찾아간 뒤, 스완 부인은 자기가 “판지”라 부르던 그 명함 한 장을 우리 집 문 앞에 두고 갔다. 내게 명함을 두고 간 사람은 그때껏 아무도 없었으니, 나는 대번에 자부심과 감격과 고마움에 벅차올라, 가진 돈을 죄다 긁어모아 훌륭한 동백꽃 바구니 하나를 주문해 스완 부인에게 보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녀 집에 가서 명함을 두고 오시라고, 다만 그에 앞서 어서 이름 앞에 “Mr.”라는 머리말이 붙은 명함을 찍어 두시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내 두 간청 어느 것도 들어주지 않으셨다. 나는 며칠 동안 절망에 빠졌다가, 이윽고 아버지 말씀이 결국 옳았던 것은 아닐까 자문했다. 그렇지만 이 “Mr.”의 쓰임은, 설령 아무 뜻이 없다 해도 적어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이 오찬 모임 자리에서 내게 드러난 또 다른 관습은 그렇지가 않아서, 그 속뜻이 무엇인지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드러났다. 현관에서 응접실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집사가 내 이름이 적힌 얇고 길쭉한 봉투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놀라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미심쩍은 눈길로 그 봉투를 바라보았다. 중국식 연회에서 자리마다 놓아 주는 그 자그마한 도구를 외국인이 어찌 써야 할지 모르듯, 나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봉투가 풀로 봉해져 있는 것을 알아챈 나는, 그 자리에서 뜯어보았다간 눈치 없어 보일까 두려워, 다 아는 척하는 낯빛으로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스완 부인은 며칠 전 내게 편지를 보내, “단출하게 몇 사람”과 함께하는 오찬에 와 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열여섯 명이나 되었고, 그 가운데 베르고트가 있으리라고는 나는 한순간도 짐작하지 못했다. 스완 부인은, 자기 말마따나 이미 여러 손님에게 나를 “소개”해 둔 터였는데, 느닷없이 내 이름에 이어, 방금 내 이름을 부를 때와 똑같은 어조로(사실 우리 둘이 그저 그녀의 모임에 온 손님 둘일 뿐이어서, 서로 만난 것을 저마다 똑같이 영광으로 여겨야 마땅하다는 듯이), 백발의 그 감미로운 가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베르고트라는 이름은 코앞에서 쏘아 대는 권총 소리처럼 나를 펄쩍 뛰게 했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겉치레를 위해서라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바로 내 눈앞에서, 마치 방금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른 권총 연기 속에 프록코트를 입은 채 멀쩡하고 무사히 서 있는 요술쟁이처럼, 젊고 천박하며 자그마하고 다부진, 눈을 가늘게 뜬 사내가 내 인사에 답례했다. 그의 코는 달팽이 껍데기처럼 말려 붉었고 턱에는 검은 수염 뭉치가 나 있었다. 나는 무참히 실망했다. 폭발의 먼지 속으로 방금 사라져 버린 것은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 쇠약한 노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방대한 작품의 아름다움도 함께 사라졌으니, 나는 그 아름다움을,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신전처럼 지어 올린 연약하고도 거룩한 몸속에 고이 모셔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깃들 자리는, 눈앞에 선, 들창코에 검은 수염을 기른 그 자그마한 사내의, 핏줄과 뼈와 근육과 힘줄로 빽빽이 들어찬 땅딸막한 몸뚱이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그의 책들의 투명한 아름다움에서 종유석처럼 한 방울 한 방울 천천히 섬세하게 빚어 온 그 온전한 베르고트는, 그에게 달팽이 껍데기 같은 코를 끼워 넣고 그 자그마한 검은 수염을 써먹어야 하는 순간, (나는 대번에 알아챘거니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고 말았다. 합계가 반드시 정해진 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미처 살피지 못한 채 문제의 조건을 끝까지 읽지 않고서 내놓은 풀이를 쓸모없다며 물리쳐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였다. 그 코와 수염도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요소였는데, 나로 하여금 베르고트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다시 짜 맞추게 하면서도, 나아가 그림에는 없던 어떤 정신의 성질, 곧 기민하고 자기만족에 찬 성질을 끊임없이 함축하고 빚어내며 배어 나오게 하는 듯하여 한층 더 부아를 돋우었다. 그런 정신은, 온화하고 신과도 같은 예지가 스며 있어 내게 더없이 친근한 그 책들에 두루 퍼져 있던 지성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책들에서 출발했다면 나는 결코 그 달팽이 껍데기 코에 다다르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그 코, 조금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얼굴에 붙은 괴상한 장식처럼 홀로 우뚝 솟은 그 코에서 출발한다면, 나는 베르고트의 작품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아무래도 바쁘고 골몰한 어떤 기사의 심성에 이르게 될 성싶었다. 길에서 말을 걸면 미처 안부를 묻기도 전에 “고맙습니다, 댁은요?” 하고 대꾸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거나, 만나 뵈어 반가웠다고 인사하면, 부질없는 격식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 효율적이고 영리하며 시대에 앞선다고 스스로 여기는 약식 대답으로 “저도요!” 하고 응하는, 그런 부류의 기사 말이다. 이름이란 아마도 제멋대로인 소묘가에 지나지 않아서, 사람에 대해서든 장소에 대해서든 실제와 너무도 닮지 않은 밑그림을 우리에게 건네주니, 상상하던 것 대신 눈에 보이는 세계가 눈앞에 놓일 때 우리는 흔히 일종의 망연함을 느낀다(하기야 그 눈에 보이는 세계도 참된 세계는 아니다. 우리의 감각도 초상 그리는 재주로 치면 상상력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어서, 우리가 실제에 대해 겨우 얻어 내는 마지막의, 그런대로 실물에 가까운 그림조차, 그 눈에 보이는 세계가 상상하던 것과 달랐던 만큼이나 눈에 보이는 세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베르고트의 경우, 이름에서 비롯된 그에 대한 선입견보다 나를 훨씬 더 괴롭힌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나의 친숙함이었다. 나는 그 작품에다, 마치 기구의 밧줄에 매달듯 그 자그마한 수염의 사내를 붙들어 매야 했으니, 그 작품이 아직도 그를 땅에서 들어 올릴 힘을 지녔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채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토록 즐겨 읽던 책들을 정말로 쓴 사람이 바로 그라는 것만은 아주 분명해 보였다. 스완 부인이 그 책들 가운데 하나에 대한 나의 감탄을 그에게 전하는 것을 자기 도리로 여겼을 때, 그는 그녀가 하필 다른 손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그 말을 꺼냈다는 데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고, 그녀의 그런 처사를 무슨 착각 탓이라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이 쟁쟁한 손님들에 대한 경의로 차려입은 프록코트를 곧 있을 식사를 미리 내다보고 불룩해진 몸으로 부풀리면서, 마음은 온통 다른, 더 실질적이고 더 중요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그저 자기 젊은 날의 어느 끝나 버린 일화를 대하듯, 이를테면 예전 어느 철 가장무도회에서 자기가 걸쳤던 기즈 공작 복장을 누가 넌지시 들먹이기라도 한 듯이, 자기 책들 쪽으로 마음을 돌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그 책들은 대번에 내 눈에서 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아름다움과 세계와 삶 그 자체의 온갖 값어치까지 함께 끌어내리면서), 마침내 자그마한 수염을 기른 한 사내의 대수롭잖은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았던 듯 보이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가 틀림없이 그 책들에 큰 공을 들였겠지만, 만일 진주조개밭에 둘러싸인 섬에 살았더라면 대신 진주잡이에 매달려 그것으로 한재산 모았으리라고 혼잣말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내게 그리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서 나는 자문했다. 독창성이란 과연 위대한 작가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왕국을 다스리는 신임을 증명해 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 모두가 그저 꾸며 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지, 한 사람의 책과 다른 사람의 책 사이의 차이란 서로 대비되는 두 개성 사이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저마다 들인 수고의 결과가 아닌지.

그러는 사이 우리는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내 접시 옆에는 줄기를 은종이로 감싼 카네이션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현관에서 건네받은, 그러나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봉투보다는 덜 나를 난처하게 했다. 내게는 낯설기만 하던 이 관습도, 남자 손님들이 저마다 접시 옆에 놓인 같은 카네이션을 집어 웃옷 단춧구멍에 꽂는 것을 보고 나니 좀 더 알 만해졌다. 나는 그들이 한 대로 따라 했으니, 예배 순서에 서투른 자유사상가가 성당에서 남들이 일어설 때 따라 일어나고 남들이 무릎 꿇고 조금 지나 무릎을 꿇으면서 짐짓 꾸며 보이는 그 자연스러운 태를 지어 보이며 그랬다. 내게 똑같이 낯설되 좀 더 오래갈 또 다른 관습 하나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내 접시 반대편에는 더 작은 접시가 하나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그때만 해도 캐비아인 줄 몰랐던 거무스름한 것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결코 입에 넣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베르고트는 내게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어서,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죄다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노르푸아 가 그에 대해 품었던 인상을 이해했다. 과연 그는 독특한 “목청”을 지니고 있었다. 하는 말 뒤에 사유가 깃들어 있는 것만큼 목소리의 물질적 성질을 크게 바꿔 놓는 것은 없다. 이중모음의 울림도, 순음의 세기도 깊이 영향을 받으니, 요컨대 말하는 방식 전체가 그러하다. 그의 말투는 내가 보기에 그의 글투와는 아주 딴판이었고, 그가 하는 말조차 그가 책에 채워 넣은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목소리란 가면 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서, 그 가면을 뚫고 나와 우리가 화자의 문체 속에서 맨얼굴로 보아 온 그 얼굴을 첫눈에 알아보게 할 만큼 힘차지는 못하다. 대화의 어느 대목에서 베르고트가 버릇대로, 노르푸아 말고는 아무도 짐짓 꾸민다거나 거슬린다고 여기지 않을 그런 투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그의 책에서 그 형식이 그토록 시적이고 음악적으로 되던 대목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 대목에서 그는 자기가 하는 말 속에서, 문장이 무엇을 뜻하든 그와는 무관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말은 문체가 그러하듯 영혼을 표현하지는 못해도 인간의 영혼을 비추는 법이어서, 베르고트는 마치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낱말들을 읊조리듯 발음하고, 그 밑으로 남몰래 하나의 이미지를 좇고 있을 때면, 그 낱말들을 하나의 이어지는 가락 위에 끊김 없이 꿰어, 지루하도록 단조롭게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잘난 체하고 힘주며 단조로운 말머리야말로 그가 하는 말의 드문 미적 가치를 알리는 표시였고, 그의 책에서 그 조화로운 이미지의 흐름을 빚어내던 바로 그 힘이 대화에서 드러난 결과였다. 이 점을 처음에 알아채기가 그토록 더 어려웠던 까닭은, 그런 순간에 그가 한 말이야말로 바로 베르고트의 진짜 발화였기에 도리어 베르고트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렷이 다듬어진 생각들이 풍성하게 여문 수확이었고, 그토록 많은 이야기꾼이 제 것인 양 가로챘던 그 “베르고트풍”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아마도, 그을린 유리로 일식을 보듯 대화의 흐름 속에서는 힘겹게야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사실의 또 다른 한 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란, 베르고트의 한 쪽을 읽었을 때 그것이, 그럼에도 신문이며 책에서 제 산문을 그토록 많은 “베르고트풍” 이미지와 착상으로 치장하던 저 생기 없는 모방자들 누구라도 썼을 법한 것과는 결코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체의 차이는, “베르고트주의”라 이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만물의 한복판에 숨어 있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진실의 한 요소였고, 그것을 저 위대한 작가가 자기 천재의 힘으로 캐낸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단지 “베르고트풍 표현”을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캐냄이야말로 나의 감미로운 가인이 글을 쓰며 노린 바였다. 덧붙이자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또 자기가 베르고트인 까닭에 그런 표현을 저지르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어떤 뜻에서는 그의 작품 속 새로운 아름다움 하나하나가 그가 어떤 사물의 한복판에서 걸러 낸, 그 속에 묻혀 있던 베르고트의 작은 한 방울이었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그 아름다움들 하나하나가 서로 이어져 “집안 내림 같은 닮음”을 지녔다 해도, 그것들은 저마다, 그것을 세상 빛으로 이끌어 낸 발견의 행위가 그러했듯, 따로따로 하나하나로 남아 있었다. 새롭고, 따라서 이른바 베르고트풍과는 달랐다. 베르고트풍이란 그가 이미 고안해 글로 펼쳐 보인 온갖 “베르고트식 표현”을 헐겁게 뭉뚱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고, 천재가 없는 이들이 그의 다음 발견이 무엇일지 미리 점칠 만한 아무런 실마리도 담고 있지 않았다. 위대한 작가란 모두 그러해서, 그들 언어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인의 아름다움만큼이나 미리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창조적이니,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 표현을 부여하지 않은 어떤 외부의 대상에 그 언어가 쓰이기 때문이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 언어나 그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회고록을 쓰는 어떤 작가가, 너무 대놓고 생시몽처럼 쓰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하면서도, 이따금 빌라르의 초상을 이렇게 첫 줄로 그려 보일 수는 있으리라. “그는 키가 좀 큰 편이고 가무잡잡했으며 … 기민하고 트여 있으며 표정이 풍부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어떤 결정론의 법칙이 그를,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조금 미친 데가 있었다”로 시작되는 생시몽의 다음 줄을 발견하는 데까지 데려갈 수 있겠는가? 참된 다양함은 이렇듯 실제의, 뜻밖의 요소가 풍성한 데에 있으니, 이미 꽃이 흐드러진 듯하던 봄 울타리에서, 온갖 이치를 거스르며 앞으로 불쑥 뻗어 나온, 푸른 꽃이 잔뜩 달린 그 가지에 있다. 반면 다양함을 오로지 형식으로만 흉내 낸 것은(문체의 다른 온갖 성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 메마른 획일에 지나지 않으니, 곧 다양함의 정반대이며, 모방자들의 작품에서는 다양함의 환상을 주거나 다양함의 다른 본보기를 떠올리게 하지 못한다. 스승들 자신에게서 다양함의 감각을 배우지 못한 독자에게라면 몰라도.

그러니, 베르고트의 말투도, 만일 그 자신이 그저 베르고트의 흉내를 되풀이하는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들렸을 테지만, 실은 귀로는 대번에 가려낼 수 없는 본질적인 끈으로 일하며 움직이는 베르고트의 정신에 붙들려 있었기에, 바로 그렇게, 베르고트가 자기 마음에 드는 실제에다 그 정신을 정확히 적용했기에 그의 언어에는 무언가 확실한 것, 무언가 지나치게 풍부한 것이 담겨 있었고, 그가 오로지 “형상의 영원한 급류”니 “아름다움의 신비로운 전율”이니 하는 것만 말해 주기를 바라던 이들을 실망시켰다. 게다가 그가 쓴 것의, 언제나 드물고 새로운 그 성질은, 그의 대화에서, 어떤 문제에 다가가는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는 이미 낯익은 온갖 면은 다 제쳐 두었기에, 대수롭지 않은 세부를 붙들고 늘어지는 듯, 그것에 대해 아주 잘못 알고 있는 듯, 역설을 늘어놓는 듯 보였으며, 그리하여 그의 생각은 흔히 뒤죽박죽인 것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생각과 똑같이 뒤죽박죽인 생각에서만 명료함을 찾아내는 법이니 말이다. 게다가 모든 새로움이란 먼저, 우리가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실제 그 자체로 여기게 된 그 상투적 태도를 없애는 데 달려 있으므로, 온갖 독창적인 그림이나 음악이 그러하듯 새로운 대화도 언제나 힘들여 짜낸 듯, 따분하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낯선 비유 표현 위에 세워져 있어서, 우리에게 화자는 온통 은유로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진실이 모자란다는 인상을 준다. (하기야 낡은 말투들도 저마다 그 시절에는, 듣는 이가 그것이 그려 보이는 세계를 아직 알지 못하던 때에는 따라가기 어려운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래전에 이것이 바로 진짜 세계임에 틀림없다고 못박아 두었기에, 이제 그것에 마음 놓고 기댄다.) 그러니 베르고트가, 그의 비유란 오늘날 보면 제법 단순해 보이지만, 코타르를 두고 늘 수면 위로 떠오르려 애쓰는 병 속의 난쟁이 인형 같다고 말하고, 브리쇼를 두고 “그에게는 스완 부인에게보다도 더 머리 매만지는 일이 근심스러운 궁리거리였으니, 자기 옆얼굴과 자기 명성을 아울러 걱정하는 이중의 염려 속에서, 사자의 풍모와 철학자의 풍모를 한꺼번에 풍기도록 늘 머리가 그렇게 빗질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대번에 긴장을 느끼고는, 좀 더 구체적이라 부르는 것, 그러니까 좀 더 평범한 것에서 발 디딜 데를 찾으려 했다. 내 눈앞의 가면에서 흘러나온 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과연 내가 흠모하던 그 작가에게 돌려야 마땅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책들 사이에, 여러 다른 수수께끼가 늘어선 가운데 놓인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끼워 넣을 수는 없었다. 그 말들은 또 다른 차원에 놓여 있어 옮겨 놓기가 필요했으니, 그 옮겨 놓음을 통해 나는 어느 날, 베르고트가 쓰던 어떤 어구들을 혼자 되뇌다가, 그 속에서 그의 문체의 온갖 장치를 발견했고, 그토록 다르게만 여겨지던 이 입말 속에서 그 문체를 이루는 여러 요소를 알아보고 이름 붙일 수 있었다.

좀 더 멀찍이서 보자면, 그가 어떤 낱말들, 그의 대화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어떤 형용사들을 발음하던, 조금은 지나치게 꼼꼼하고 지나치게 열띤 그 독특한 방식은, 그는 그 낱말들을 언제나 어떤 힘줌 없이는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아 음절마다 따로 힘을 주고 마지막 음절을 읊조리듯 늘였는데(이를테면 그는 figure 대신 언제나 즐겨 쓰던 “visage”라는 낱말을, 군더더기 v 소리와 s 소리와 g 소리로 잔뜩 부풀렸으니, 그 소리들은 그런 순간마다 그가 내민 손바닥에서 죄다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의 산문에서 그가 그 즐겨 쓰는 낱말들을 일종의 여백을 앞세워 빛 가운데로 끌어내던 저 아름다운 대목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 낱말들은 어구의 운율 전체 속에 그렇게 짜여 있어서, 독자는 음량을 그르치지 않으려면 그것들 하나하나에 온전한 값을 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베르고트의 말에서는, 그의 책에서, 또 다른 몇몇 작가의 책에서처럼 글로 적힌 어구 속 낱말들의 겉모습을 흔히 바꿔 놓던 어떤 광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아마도 그 빛이 너무나 깊은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까닭에, 대화라는 행위로 남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나머지 우리가 얼마간 우리 자신에게는 닫혀 있는 그런 시간에는, 그 빛살이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에까지는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이 점에서 그의 책에는 그의 말보다 더 많은 억양이, 더 많은 어조가 담겨 있었다. 문체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어조, 아마 작가 자신도 알아채지 못했을 어조, 그의 가장 은밀한 개성과 떼어 낼 수 없는 어조 말이다. 바로 이 어조가, 그의 책에서 베르고트가 온전히 자연스러웠던 순간마다, 그가 써 내려간 낱말들에, 그런 때면 흔히 대수롭지 않기 짝이 없던 그 낱말들에 가락을 실어 주었다. 이 어조는 인쇄된 지면에는 표시되지 않고, 그것을 일러 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어구에는 저절로 찾아든다. 사람들은 그 어구를 달리 발음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작가에게 가장 덧없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은 것이요, 그의 참된 본성을 증언해 줄 것, 그가 표현한 온갖 준엄함에도 불구하고 실은 온화했는지, 그의 온갖 관능에도 불구하고 실은 감상적이었는지를 말해 줄 것이었다.

베르고트의 대화에서 그 희미한 자취를 찾아볼 수 있던 어떤 발음의 버릇들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뒷날 내가 그의 형제자매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버릇들이 그들의 말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볍고 활기찬 말의 끝맺음에는 어딘가 툭 끊기는 거친 데가 있었고, 슬픈 말의 끝에는 어딘가 아스라이 잦아드는 데가 있었다. 이 거장을 소년 시절부터 알아 온 스완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 시절에는 그의 형제자매 입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그의 입에서도, 거의 집안 내림이라 할 그 억양, 곧 격렬한 환희의 외침과 길게 끄는 우울의 웅얼거림이 뒤섞인 그 억양을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이 다 함께 놀던 방에서 그는, 귀청이 떨어질 듯 요란하다가 다시 잦아드는 그들의 교향곡 속에서 누구보다도 제 몫을 잘 해냈다고. 아무리 특징적이라 한들, 사람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소리는 덧없어서 말한 이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베르고트 집안의 발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이스터징거에서조차 한 예술가가 어떻게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음악을 지어낼 수 있는지 끝내 이해하기란 어렵다 해도, 베르고트는 기쁨의 외침 속에서 저 스스로 되풀이되거나 우울한 한숨 속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낱말들에 머무는 그 방식을 자기 글말 속에 옮겨 붙박아 두었다. 그의 책에는 꼭 그런 끝맺음 어구들이 있어, 거기서는 쌓인 소리들이 길게 늘어진다(끝날 줄 모르는 어느 오페라 서곡의 마지막 화음들이, 지휘자가 마침내 지휘봉을 내려놓기 전에 그 최고의 종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듯이). 뒷날 나는 그 어구들 속에서 베르고트 집안의 저 음성적 “금관 소리”에 해당하는 음악을 찾아내게 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것들을 자기 책으로 옮겨 놓은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자기 말에서는 그것들을 쓰기를 그쳤다. 글을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따라서 내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그 뒷날에는 더욱 뚜렷이, 그의 목소리는 이 관현악 편성을 영영 잃어버린 뒤였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