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스완 부인 댁에서 (18)

2권 제1부 · 스완 부인 댁에서

한 집안의 지적 품격과 그 세련됨이 대체로 정비례보다는 반비례한다고 치면, 스완이 봉탕 부인을 매력적으로 여겼다는 사실로 미루어, 일단 지위의 실추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 결과로, 우리가 체념하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한 사람들에 대해 덜 까다로워지고, 그들의 다른 모든 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 지성에 대해서도 덜 까다로워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도 나라와 마찬가지로 그 독립과 더불어 자기의 교양은 물론 언어마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마련이다. 이런 관용이 낳는 결과 가운데 하나는, 어느 나이가 지나면 우리에게 생기는 어떤 성향, 곧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과 약점에 바치는 찬사이자 거기에 굴복하라는 부추김인 말들에서 즐거움을 찾는 성향을 더 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가가 독창적인 정신들과 어울리기보다, 자기 교리의 껍데기 말고는 자기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이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향을 피워 올리는 제자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하게 되는 나이요, 오로지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뛰어난 남자나 여자가, 어느 모임에서 가장 지성 있는 사람이란 어쩌면 이렇다 할 명망은 없어도 무슨 말 한마디로, 연애에 바쳐진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고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을 내보이고, 그리하여 그 연인의 관능적 본능을 흐뭇하게 자극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나이다. 그것은 또한, 오데트의 남편이 된 한에서 스완이, 봉탕 부인이 자기 집에 공작부인들밖에 두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말하는 것을 즐겨 듣던 나이이기도 했다(그리고 그 말로부터, 예전 베르뒤랭네 시절이라면 내렸을 판단과는 정반대로, 그녀가 착하고 지극히 분별 있으며 속물이라곤 조금도 아닌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 그녀가 전에 들어 본 적이 없어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들려주기를, 비록 그녀가 늘 대번에 ‘요점을 알아챘’음에도, 제 재미 삼아 그녀를 치켜세우기를 즐기던 나이였다. “그럼 박사님은 당신처럼 꽃에 푹 빠지시진 않았나 봐요?” 스완 부인이 코타르 부인에게 물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우리 남편은 현자거든요. 매사에 절제를 지키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이한테도 열정이 하나 있긴 하답니다, 인정할게요.” 짓궂음과 기쁨과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봉탕 부인이 물었다. “그게 대체 뭔데요?” 코타르 부인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독서예요.” “어머, 남편한테 그건 참 마음 놓이는 열정이네요!” 봉탕 부인이 짓궂은 웃음을 억누르며 외쳤다. “박사님이 책을 손에 드셨다 하면, 어휴, 말도 마세요!” “뭐, 그거야 그리 걱정할 것 없지 않아요…” “아니에요, 걱정이 되죠, 그이 눈 때문에요. 이제 그만 가 봐서 그이를 돌봐야겠어요, 오데트, 틈나는 대로 곧장 다시 와서 당신 집 문을 두드릴게요. 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베르뒤랭 부인이 방금 사들인 새집을 전기로 밝힌다는 소식 들으셨어요? 내 개인 정보망에서 알아낸 게 아니라, 아주 다른 데서 들은 거예요. 다름 아닌 전기공 밀데가 직접 얘기해 줬거든요. 보세요, 나는 출처를 밝힌다니까요! 침실까지도, 그이 말로는, 빛을 은은하게 거르는 갓을 씌운 전등을 단다지 뭐예요. 형편이 되는 사람들한테야 그거야 물론 근사한 사치죠.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세상에 하나뿐인 것이라면 무조건 최신 물건을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에요. 글쎄, 세상에, 내 친구의 올케가 집에 전화를 놓았다지 뭐예요! 문밖에 나갈 것도 없이 단골 가게에 물건을 주문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실은 나도 언젠가 한 번 그 집에 가서 그 기계에 대고 말이나 좀 해 보겠다고 낯 두꺼운 술수란 술수는 다 부렸다니까요. 참 솔깃한 물건이긴 한데, 내 집보다는 남의 집에 있을 때 얘기예요. 우리 집에 전화를 두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아요. 처음의 신기함이 가시고 나면, 온종일 그야말로 시끄럽게 울려 댈 게 뻔하거든요. 자, 오데트, 나 이만 가 봐야겠어요. 봉탕 부인을 더 붙잡으면 안 돼요, 이분은 나를 챙겨 데려다주실 분이니까요. 정말이지 떨쳐 일어나야겠어요. 당신 때문에 내 꼴이 우습게 됐지 뭐예요, 남편보다 늦게 집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말이에요!”

그리고 나 역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으니, 국화가 내게는 그 눈부신 껍데기처럼 보이던 그 겨울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이었다. 그 기쁨들은 나타나지 않았건만, 스완 부인은 더 이상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인들이 찻그릇을 치우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마치 “자, 시간 다 됐습니다, 여러분!” 하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내게 말했다. “정말 가야만 하나요? 좋아요, 잘 가요!” 나는 그 미지의 기쁨들과 마주치지 못한 채 그곳에 더 머무를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단념해야 했던 까닭이 내 불행 탓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 기쁨들은, 언제나 사람을 떠나는 순간으로 이끌어 가는 그 뻔한 시간의 길목이 아니라, 내가 마땅히 벗어나 들어섰어야 할, 내게 알려지지 않은 어느 갈림길 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적어도 내 방문의 목적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질베르트는 자기가 집에 없을 때 내가 그녀의 부모를 보러 왔다는 것을, 그리고 코타르 부인이 내게 쉴 새 없이 장담했듯 내가 ‘단번에 베르뒤랭 부인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코타르 부인은 부인이 누구에게도 그토록 ‘살갑게 구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당신하고 그분은 서로 통하는 원자가 척 맞물린 게 틀림없어요.”) 그녀는 내가 자기 얘기를 온당하게, 애정을 담아 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가 서로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그런 무능력, 곧 지난 몇 번의 만남에서 그녀가 내비친 권태의 뿌리라고 내가 여기던 그 무능력만은 내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나는 스완 부인에게 질베르트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해 두었다. 마치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기로 마침내 마음을 굳힌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질베르트에게 보내려는 편지도 그런 투로 쓰일 참이었다. 다만 나 자신에게는, 용기를 북돋우려고, 고작 며칠만 이어질 최고도로 집중된 노력밖에 제안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를 만나기를 거절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 초대는 받아들이겠다.” 이별을 실감하기 덜 어렵게 하려고, 나는 그것을 마지막이라고는 그려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해 겨울, 1월 1일은 내게 유난히 고통스러웠다. 하기야 우리가 불행할 때에는 날짜와 기념일을 알리는 모든 것이 다 그러하리라. 하지만 우리의 불행이 어느 소중한 벗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의 괴로움이란 그저 현재를 과거와 유난히 생생하게 견주어 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여기에, 입 밖에 내지 않은 희망 하나가 더해져 있었다. 곧 질베르트가, 화해를 향한 첫걸음을 내게 떼게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가, 내가 그 걸음을 떼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는, 그저 새해 첫날이라는 구실만을 기다렸다가 내게 이렇게 써 보내리라는 희망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어서 와요, 우리 제대로 이야기해 봐요. 나는 당신을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요.” 묵은해의 마지막 며칠이 지나가는 동안, 그런 편지가 올 법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런 건 전혀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런 일이 있음 직하다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데는 우리가 그것을 바라는 욕망, 그것을 필요로 하는 마음만으로 족한 법이다. 병사는 총알이 자기를 찾아내기 전에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어떤 시간의 여유가 자기에게 허락되어 있다고 믿고, 도둑은 붙잡히기 전에, 사람들은 대개 죽어야 하기 전에 그렇게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을, 때로는 민족을, 위험으로부터가 아니라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실은 위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지켜 주는 부적이며, 그 덕분에 어떤 경우에는 굳이 용감해질 필요도 없이 위험에 맞서게 된다. 화해를, 편지 한 통을 기대하는 연인을 지탱해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종류의, 그만큼이나 근거 없는 확신이다. 내가 편지를 기다리기를 그만두는 데는, 내가 그것을 바라기를 그만두기만 하면 족했을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는 여자의 눈에 자기가 아무리 하찮은 존재임을 안다 해도, 우리는 그녀에게 일련의 생각들을(그 총합이 무관심일지언정) 부여하고, 그 생각들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가 어쩌면 그녀의 반감의, 그러나 적어도 그녀의 관심의 변함없는 대상이 되는, 그런 복잡한 내면생활을 부여한다. 하지만 질베르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상상하려면, 나는 그저 그 새해 첫날에, 앞으로 다가올 어느 해든 그 첫날에 내가 무엇을 느끼게 될지를 미리 내다보는 힘만 있으면 되었을 터인데, 그날이 오면 질베르트의 관심이든 침묵이든 애정이든 냉담이든 거의 내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나는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된 문제들의 해답을 구하기를 꿈꾸지도, 심지어 꿈꿀 수조차 없게 될 터였다.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그것을 온전히 우리 안에 담아 둘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뻗어 나가, 그녀에게서 자기를 가로막는 표면을 만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떠밀리는데, 우리 자신의 애정이 되튀어 오며 일으키는 이 충격을 우리는 상대가 우리에게 품는 마음이라 부르며, 그 마음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까닭에, 뻗어 나갈 때보다 돌아올 때 우리를 더 기쁘게 한다. 새해 첫날은 그 온 시간을 다 울려 보냈건만, 질베르트에게서 그 편지는 내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철에 우편물이 넘쳐나는 통에 늦어지거나 지체된 인사말이 담긴 다른 편지 몇 통을 받으면서, 1월 3일과 4일에도 나는 여전히 희망을 품었으나, 그 희망은 시간마다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 뒤로 이어진 날들을 나는 눈물의 안개 너머로 바라보았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내가 질베르트를 단념하면서 스스로 생각한 만큼 진심이지 못했던 탓에, 새해에 그녀에게서 편지가 오리라는 희망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음을 뜻했다. 그리고 미처 또 다른 희망 뒤로 몸을 숨길 겨를도 없이 그 희망이 바닥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손닿는 곳에 다른 약병 하나 없이 모르핀 병을 다 비워 버린 환자처럼 괴로워했다. 하지만 어쩌면 내 경우에는, 게다가 이 두 가지 설명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니 하나의 감정이란 흔히 상반된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법이거니와, 끝내는 편지를 받으리라 품었던 그 희망이 질베르트의 모습을 내 마음의 눈앞에 다시 한번 불러왔고, 그녀 앞에 서게 되리라는 기대며 그녀를 보는 일이며 그녀가 나를 대하던 방식이 예전에 내 안에 불러일으켰던 감정들을 되살려 놓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화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내 안에서, 우리가 그 엄청난 중요성을 흔히 간과하곤 하는 어떤 능력, 곧 체념의 능력을 억눌러 버렸던 것이다. 신경쇠약자들은, 자리에 누워 편지도 받지 않고 신문도 읽지 않으면 차차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리라 장담하는 벗들의 말을 도무지 믿지 못한다. 그들은 그런 처방이 그저 자기의 곤두선 신경을 더 자극할 뿐이라고 여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인들도, 정반대의 심경에 갇힌 채 그것을 바라보며 아직 그것을 시험해 보기 시작조차 하지 않은 터라, 단념이 지닌 치유의 힘을 믿지 못한다.

내 심장 두근거림이 하도 심했던 탓에, 내 카페인 복용량이 줄었고, 두근거림은 멎었다. 그러자 나는, 질베르트와 하마터면 다툴 뻔했을 때 느낀 그 고뇌, 되풀이될 때마다 다시는 내 벗을 보지 못하리라는, 혹은 그녀가 또다시 그 언짢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만 그녀를 보게 될지 모른다는 괴로운 전망 탓으로 돌리던 그 고뇌에, 그 약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문했다. 하지만 만일 이 약이 그 괴로움의 뿌리였다면, 그렇다면 내 상상력은 그 괴로움을 잘못 해석했던 셈이 되겠지만(그렇다고 별스러울 것은 없으니, 연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격심한 마음의 고통이 흔히 함께 사는 여자라는 육체적 형상을 띠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마신 지 한참 뒤에도 트리스탄을 이졸데에게 계속 묶어 두던 그 미약(媚藥)과도 같았던 셈이다. 왜냐하면 카페인을 줄이자 거의 즉시 나타난 육체의 호전은, 그 독소의 섭취가 어쩌면, 그 슬픔을 만들어 낸 것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한결 격심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을 그 슬픔의 진행을 멈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1월 중순이 가까워지면서, 새해 첫날에 편지가 오리라던 내 희망이 어그러지고 나자, 그 어긋남과 더불어 찾아왔던 여분의 동요마저 가라앉고 나자, 다시 시작된 것은 내 오랜 슬픔, 곧 ‘명절 전’의 그 슬픔이었다. 그 슬픔에서 어쩌면 가장 잔인했던 점은, 그것을 지은 이가 다름 아닌 나 자신, 그것도 무의식적이면서도 고의적이고, 무자비하면서도 끈질긴 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단 하나 중요한 것, 곧 질베르트와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이가 바로 나였으니, 내 벗과의 이 길어진 이별로부터 서서히 빚어내고 있던 것은 그녀의 무관심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결과에 이르고 말, 나 자신의 무관심이었다. 내가 지칠 줄 모르는 기세로 나 자신을 몰아가고 있던 것은, 내 안에서 질베르트를 사랑하던 그 부분의 더디고 고통스러운 자살이었으며, 그것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뿐 아니라 그것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지까지 또렷이 자각하면서였다. 나는 얼마 뒤면 내가 질베르트를 사랑하기를 그만두게 되리라는 것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그것을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도, 그리고 그때 그녀가 나를 만나려고 기울일 시도들이 지금 그녀가 기울이는 시도들만큼이나 헛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그것은 이제 내가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틀림없이 어떤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서, 그 여자를 계속 갈망하고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의 단 한순간도 그때 내게 아무것도 아닐 질베르트에게로 돌리기를 감히 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말할 것 없이, 바로 그 순간에, 곧 (그녀 쪽에서 정식으로 해명을 청하거나 사랑을 온전히 고백해 오지 않는 한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기로 나는 작정하고 있었는데, 그 둘 중 어느 것도 이제 내게 올 성싶지가 조금도 않았으므로) 나는 이미 질베르트를 잃어버렸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사랑했고, 오후를 온통 그녀 곁에서, 그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 실컷 함께 보내며 우리의 우정을 위협하는 위험 따위는 없다고 믿던 지난해보다 그녀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를 더 잘 느낄 수 있던 그 순간에, 두말할 것 없이 언젠가 내가 다른 여자에게 똑같은 감정을 품게 되리라는 생각은 내게 몹시도 끔찍했으니, 그 생각이 나를 질베르트와 내 사랑과 내 괴로움의 테두리 너머로 데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 사랑, 눈물 너머로 질베르트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가려내려 애쓰던 내 괴로움,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오로지 그녀에게만 매인 것이 아니라 머잖아 어떤 다른 여자의 몫이 되고 말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적어도 그때 내 사고방식으로는,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웃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니, 사람이 그중 하나를 사랑할 때 그는 자기 사랑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딱지 붙여진 것이 아니라 앞날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이미 지난날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태어났던 것일 수도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시기에, 사랑에서 무엇이 그리 일관되지 못한가를 두고 철학자처럼 마음을 정리해 보면, 그는 자기가 아무 동요 없이 말할 수 있는 그 사랑을, 말하는 그 순간에는 느끼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알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이런 일에 대한 앎이란 이따금 끊겼다 이어지는 것이어서 그 감정이 실제로 자리하는 동안밖에는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질베르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그 미래, 내 상상력이 아직 또렷한 그림을 그려 내지는 못했어도 내 괴로움이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 주던 그 미래를 두고, 그것이 서서히 모습을 갖춰 가고 있다는 것을, 그것의 도래가 임박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만일 질베르트 그녀 자신이 나를 구하러 와서 갓 싹튼 내 무관심을 그 싹에서부터 짓밟아 버리지 않는다면, 질베르트에게 일러 줄 시간은 분명 아직 있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나는, 질베르트에게 편지를 쓰려고, 혹은 그녀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하려고 했던가. “조심해. 내 마음은 정해졌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내 마지막 안간힘이야. 나는 지금 너를 마지막으로 보는 거야. 아주 곧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하지만 무엇 하러? 무슨 권리로 내가 질베르트의 무관심을 나무랄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 점에서 스스로 죄가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니라 해도, 그녀가 아닌 모든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런 무관심을 내보이고 있었으면서. 마지막이라니! 내게는 그것이 엄청난 의미를 지닌 무언가로 보였으니, 내가 질베르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그 말은, 벗들이 마침내 이 나라를 아주 떠나기 전에 우리를 한번 찾아와도 되겠느냐고 묻는 그런 편지들만큼의 인상밖에 주지 못했으리니, 그런 제의란 우리를 사랑하는 성가신 여자들이 하는 제의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앞으로 누릴 우리 자신의 즐거움이 있는지라 사양하고 마는 법이다. 우리가 날마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란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어서, 우리가 느끼는 열정은 그것을 늘리고, 우리가 남에게 불러일으키는 열정은 그것을 오그라들게 하며, 그러고 남은 것은 습관이 채운다.

게다가, 내가 질베르트에게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면 언제나, 듣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귀요, 우리 자신의 정신이라고 상상한다. 내 말은 오직 일그러진 꼴로만 그녀에게 가닿았을 터이니, 마치 내 벗에게 이르기 전에 폭포수의 일렁이는 장막을 지나야 했던 것처럼,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어리석은 소리를 내며, 이제는 아무런 뜻도 지니지 못한 채로였다. 사람이 자기 말 속에 담는 진실은 스스로 곧은 길을 내지도 못하고, 거스를 수 없는 증거의 뒷받침을 받지도 못한다. 같은 종류의 진실이 그 말들 자체 속에서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제야, 온갖 논변과, 반대 교리의 신봉자를 배신자로 몰아붙이려고 자기가 내세운 온갖 증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논적은 자기도 어느새 그 미워하던 신념을 함께 품게 되는데, 한때 그 신념을 헛되이 퍼뜨리려 애쓰던 이는 이제 더는 거기에 매여 있지 않다. 그제야, 소리 내어 읽던 예찬자들에게는 그 탁월함의 증거를 자명하게 드러내는 듯 보였으나 귀 기울여 듣던 이들에게는 그저 무의미하거나 진부한 형상밖에 보여 주지 못하던 문학의 걸작이, 그 듣던 이들에게서도 걸작이라 선언되겠지만, 지은이가 그들의 그 발견을 알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애를 써 본들, 그 장벽은 그것에 미칠 듯이 가로막힌 사내가 밖에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더는 그 장벽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문득, 다른 데서 비롯되어 그를 사랑하지 않던 여자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어떤 노력의 결과로, 그가 헛되이 돌격하던 그 장벽이 아무 소용도 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질베르트에게 찾아가 앞으로 다가올 내 무관심과 그것을 막을 방도를 일러 주었다면, 그녀는 내 그 행동으로부터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그녀를 필요로 하는 마음이 내가 헤아리던 것보다 한층 더 크다고 지레짐작했을 터이고, 그리하여 나를 보기 싫어하는 마음은 오히려 더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로 하여금 그 사랑의 끝을 그녀 자신보다 더 또렷이 내다보게 도와준 것이 바로 그녀를 향한 그 사랑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니, 그 사랑이 내 안에 잇달아 빚어낸 그 어긋난 마음의 상태들을 통해서였다. 그럼에도 그런 경고쯤은, 어쩌면, 편지로든 내 입으로든,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나서 질베르트에게 건넬 수도 있었을 터이니, 그 시간은 과연 그녀를 내게 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 놓겠지만,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었음을 그녀에게 증명해 보였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사람들이,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내 얘기를 그녀에게 하되 그들이 내 부탁을 받아 그러는 것이라고 그녀가 여기게 될 만한 투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코타르나, 내 어머니, 심지어 드 노르푸아 마저 몇 마디 잘못 고른 말로 내가 방금 치르고 있던 온갖 희생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고, 내가 그 자제(自制)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잘못된 겉모습을 나에게 씌워 그 자제가 주던 온갖 이점을 헛되이 날려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갑절로 화가 났다. 우선 나는, 이 성가신 사람들이 나도 모르는 새 중단시켜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나의 그 고생스럽고도 보람 있던 자제를, 이제 현재 말고는 그 어느 날짜로부터도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질베르트를 보는 것이 덜 즐거워질 터였으니, 이제 그녀는 나를, 의연한 체념 속에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내주기를 마다한 만남을 몰래 획책하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해칠 뜻도 도울 뜻도 전혀 없이, 아무 까닭도 없이, 그저 말하기 위해, 흔히는 우리 자신이 그들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던 탓에, 그리고 그들이 (우리 자신이 그러하듯) 입이 가벼운 탓에,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에게 그토록 큰 해를 끼치는 사람들의 그 모든 부질없는 수다를 저주했다. 하기야 우리 사랑을 뿌리 뽑기 위해 치러지는 그 참혹한 수술에서, 그들이 맡은 몫은, 하나는 지나친 선의에서, 다른 하나는 악의에서, 모든 것이 막 매듭지어지려는 순간에 모든 것을 도로 헝클어 놓는 버릇이 있는 두 사람이 맡은 몫에는 어림도 없이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그 눈치 없는 코타르 같은 자들에게 품는 만큼의 원한을 품지 않으니, 둘 중 뒤엣사람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요, 앞엣사람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그녀를 찾아갈 때면 거의 매번 스완 부인은 다른 날 딸과 함께 차를 마시러 오라고 나를 초대하며 자기에게 곧장 답을 보내라고 일렀으므로, 나는 끊임없이 질베르트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에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으리라 느껴지는 표현을 고르지 않고, 그저 내 눈물의 급류가 흘러갈 가장 손쉬운 물길을 파내려 했을 뿐이다. 욕망과 마찬가지로 회한도 분석되기를 바라지 않고 채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랑을 시작할 때 사람은 자기 사랑이 정말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시간을 쓰지 않고, 이튿날 만날 수 있게 하는 데 시간을 쓴다. 사랑을 버릴 때 사람은 자기 슬픔을 알려 하지 않고, 그 슬픔을 일으키는 여인에게 가장 감동적으로 보일 슬픔의 표현을 바치려 한다. 사람은 말할 필요를 느끼는 것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말하며,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말한다. 나는 이렇게 썼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 보니 그리 어렵지 않군요.” 또 이렇게 썼다. “아마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할 겁니다.” 그녀가 꾸민 것이라 여길지 모를 냉담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이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쓰는 동안 나는 눈물이 났으니, 그 말이 내가 믿고 싶었던 바가 아니라 아마 일어나고 말 일을 나타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전해 올 다음번 만남의 청에도 나는 지금처럼 굽히지 않을 용기를 낼 테고, 이 거절 저 거절이 쌓이는 사이 나는 차츰, 그녀를 다시 보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녀를 보고 싶지 않게 되는 순간에 이를 것이었다. 나는 울었으나, 희생할 만큼의 용기는 있어서, 언젠가 그녀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가망을 위해 그녀와 함께 있는 행복을 희생하는 달콤함을 맛보았는데, 아, 그날이 오면 내가 그녀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든 말든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다. 설령 있을 법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짐짓 꾸며 보였듯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가정, 그리고 내가 싫증 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권태로 여겼던 것이 실은 질투 어린 예민함, 나 자신의 것과 비슷한 무관심의 가장 때문이었으리라는 가정조차, 내 결심을 덜 괴롭게 해 줄 뿐이었다. 훗날 우리가 서로를 잊었을 때, 내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가 한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녀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여겨졌다. “어머, 당신 정말 나를 사랑했던 거예요? 내가 그 편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당신이 나를 보러 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걸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당신이 알기만 했다면.” 그녀 어머니의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편지를 쓰면서, 어쩌면 내가 바로 그 오해를 불러오는 데 한몫하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은 나를 빠뜨린 슬픔으로, 또 질베르트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상상하는 즐거움으로, 편지를 계속 쓸 충동을 불어넣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