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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부인 댁에서 (20)

2권 제1부 · 스완 부인 댁에서

나는 만 프랑을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러나 그 돈은 이제 나에게 아무 쓸모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질베르트에게 날마다 꽃을 보냈을 경우보다도 더 빨리 그 돈을 다 써 버렸으니, 저녁이 오면 나는 늘 너무 비참해서 집에 머물지 못하고 나가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들의 품에 내 슬픔을 쏟아 놓곤 했기 때문이다. 질베르트에게 무슨 기쁨이든 주려고 애쓰는 일은, 이제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녀의 집을 다시 찾는 것은 내 괴로움을 더할 뿐이었을 것이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토록 더없는 기쁨이었을 질베르트를 보는 일조차, 이제는 나에게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와 함께 있지 않은 내내 나는 비참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렇게 하여 한 여자는, 우리에게 새로이 안기는 저마다의 고문으로, 흔히 자기도 전혀 모르는 새에, 우리에 대한 자기 힘을 키우는 동시에 그녀에 대한 우리 요구도 키운다. 그녀가 우리에게 입히는 상처 하나하나로, 그녀는 우리를 점점 더 완전히 옭아매어 우리의 사슬을 갑절로 늘리되, 우리가 마음의 평온을 지키려고 그녀를 묶기에 넉넉하다 여겨 온 그 사슬의 힘은 절반으로 줄인다. 바로 어제만 해도, 내가 질베르트를 성가시게 할까 두려워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이따금의 만남 이상을 바라지 않고도 흡족했을 텐데, 이제 그런 만남은 더 이상 나를 흡족게 하지 못했을 테고, 나는 이제 그것을 아주 다른 조건들로 바꿔 놓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사랑은 전쟁과 같지 않으니, 전투가 끝난 뒤에 우리는 더 날카로운 열정으로 싸움을 다시 시작하고, 우리가 완패할수록 그 열정을 더욱 끌어올리기를 그치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아직 싸울 수 있는 처지에 있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질베르트에 대해 나는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 또한 나는 처음에는 그녀의 어머니도 다시 보지 않는 편을 택했다. 과연 나는 질베르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를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고, 마음먹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녀를 잊게 되리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어떤 병에는 아무 효험도 없는 약처럼, 내가 자꾸만 다시 보게 되는 그 두 평행선, 곧 질베르트와 그 젊은 남자가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천천히 사라지며 그려 내던 그 두 평행선을 지워 버릴 힘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불행이었으니 다른 불행들과 마찬가지로 차츰 그 힘을 잃어 갈 것이었고, 새로운 심상이었으니 언젠가는 지금 그것이 품은 해로운 요소를 죄다 씻어 낸 채 내 마음의 눈앞에 떠오를 것이었다. 마치 위험 없이 다룰 수 있는 그 치명적인 독처럼, 또는 폭발을 겁내지 않고 담뱃불을 붙이는 데 쓸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 부스러기처럼. 그러는 동안 내 안에는 또 다른 힘이 있어, 아직도 변함없이 어스름 속을 걷는 질베르트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 주던 그 해로운 힘을 온 힘을 다해 눌러 이기려 애쓰고 있었으니, 되살아나는 기억의 습격이 주는 충격을 맞아 부수기 위해, 나는 다른 편에서 알차게 애쓰는 상상을 가지고 있었다. 앞의 힘은 과연 샹젤리제를 걷던 그 두 사람을 나에게 계속 보여 주었고, 지난날에서 끌어낸 다른 언짢은 그림들도 나에게 들이밀었으니, 이를테면 어머니가 남아서 나를 대접하라고 이르자 어깨를 으쓱하던 질베르트의 모습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힘은, 내 희망의 화폭 위에서 일하며, 결국 그토록 옹색한 이 초라한 과거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펼쳐진 미래를 그려 냈다. 질베르트의 뾰로통한 얼굴을 본 1분에 대하여, 그녀가 우리의 화해를 향해, 어쩌면 우리의 약혼을 향해서까지 밟아 갈 온갖 단계를 흐뭇하게 그려 본 시간은 얼마나 많았던가. 과연 내 상상이 미래에 쏟아붓던 이 힘은, 그럼에도 지난날에서 길어 온 것이었다. 나는, 미워한다고 믿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내가 안색이 좋다거나 옷을 잘 차려입었다고 말할 때면, 나는 그녀가 거기 있어 나를 보아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 무렵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이 나는 성가셨고, 그들의 초대를 모두 물리쳤다. 봉탕 부부가 조카딸 알베르틴을 데리고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공식 만찬에 내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아 집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는데, 알베르틴은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는 소녀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삶의 서로 다른 시기들은 겹쳐진다. 우리는, 언젠가 그토록 하찮아질 사랑하는 한 사람 때문에, 오늘은 하찮으나 내일이면 우리가 사랑하게 될 또 한 사람을, 어쩌면 지금 그녀를 만나기로 했더라면 조금 더 일찍 사랑에 빠져 지금의 괴로움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을, 물론 그 자리에 다른 괴로움을 가져다 놓았겠지만, 그런 사람을 보기를 업신여기며 마다한다. 나의 괴로움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어느 날은 이 감정을, 이튿날은 저 감정을 발견하는 놀라움을 맛보았는데, 그 감정들은 대개 질베르트와 관련된 어떤 희망이나 어떤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 안에 간직한 그 질베르트와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다른 쪽의 진짜 질베르트는 어쩌면 내 것과는 아주 딴판이어서, 내가 그녀 탓으로 돌린 회한 따위는 전혀 모르며, 나를 생각하는 정도가,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정도보다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지어낸 질베르트와 홀로 틀어박혀 그녀가 나를 두고 정말 어떤 마음인지 궁리하며 그녀의 주의가 늘 나에게로 쏠려 있다고 상상할 때 내가 그녀로 하여금 나를 생각하게 만든 그 정도보다도 아마 덜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일깨웠어야 했다.

우리 마음의 쓰라림이, 꾸준히 잦아들면서도 아직 가시지 않는 그 시기 동안에는, 그 사람 자체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데서 오는 쓰라림과, 어떤 기억들이며 어떤 매정한 말이며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 속 어떤 구절이 되살려 내는 쓰라림을 구별해야 한다. 그 쓰라림이 띨 수 있는 갖가지 형태는 뒤에 또 다른, 더 나중의 연애를 다룰 때 살펴보기로 하고, 지금으로서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앞의 것이 한없이 덜 모질다는 말로 족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늘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까닭에, 머지않아 우리가 그녀에게 씌우고야 말 후광으로 거기서 꾸며지고, 희망의 잦은 위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결같은 슬픔의 고요함의 자국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짚어 둘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의 심상이, 사랑의 불행을 악화시키고 그것을 길게 끌며 우리의 회복을 막는 그 갖가지 얽힘 속에서 차지하는 몫은 있으나 마나 하다는 점이니, 마치 어떤 병에서는 그 원인이, 뒤따르는 열이며 우리가 낫기까지 흘러야 하는 시간에 견주면 비할 바 없이 대수롭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대체로 낙관적인 마음에서 나온 한 줄기 빛을 붙들어 되비춘다면, 그 각별한 기억들, 그 매정한 말들, 그 적의에 찬 편지(질베르트에게서 그렇게 부를 만한 것은 단 한 통밖에 받지 못했다)에는 그렇지가 않으니, 그 사람 자체가 그 얼마 안 되고 흩어진 조각들 속에 깃들어 있고, 우리가 그녀를 하나의 전체로 그려 내는 데 익숙해진 그 생각 속에서라면 도저히 미치지 못할 크기로 불어난 채 거기 깃들어 있다고 말할 법하다. 왜냐하면 그 편지는, 사랑하는 존재의 심상과는 달리, 회한의 우수 어린 고요 속에서 우리에게 음미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우리는 그것을, 뜻밖의 불행이 우리를 쥐어짜던 그 무서운 번민 속에서 읽고 또 삼켜 버린 것이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다른 길로, 밖에서 우리에게 오며, 가장 모진 고통의 길을 따라 우리 마음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우리가 오래되고 본래대로이며 참되다고 믿는, 우리 마음속 벗의 그림은, 실은 그녀에 의해 몇 번이고 거듭 새로 빚어진 것이다. 그 모진 기억은 그 새로 빚어진 그림과 같은 시대의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의 것이며, 어떤 끔찍한 과거의 몇 안 되는 증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과거가, 그것 대신 기적 같은 황금시대를, 온 인류가 화해할 낙원을 갖다 놓기를 기꺼워한 우리 자신 안을 빼고는 여전히 존재하는 만큼, 그 기억들, 그 편지들은 우리를 현실로 도로 데려가, 그것들이 안기는 돌연한 아픔으로, 무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날마다 지어낸 근거 없는 희망이 우리를 그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실어 갔는지를 절로 느끼게 하고 만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언제나 한결같이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이따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삶에는 우리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여자들이 수없이 많고, 그들은 아무 속셈 없는 우리의 침묵에 그에 못지않게 깊은 침묵으로 아주 자연스레 응답해 왔다. 다만 그들의 경우 우리가 그들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들과 떨어져 보낸 세월을 헤아려 본 적이 없으니, 우리의 논지 전체를 뒤엎을 이 사례를, 우리는 홀로 있음의 치유 효과를 헤아릴 때면 잊어버리기 쉬운데, 이는 예감을 믿는 사람들이 자기 예감이 ‘들어맞지’ 않은 온갖 경우를 잊어버리는 것과 꼭 같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부재가 효험을 나타낼 수도 있다. 우리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욕망, 그 갈망은 지금은 우리를 멸시하는 그 마음속에서 결국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시간에 대해 내거는 요구는, 변해 가는 과정에 있는 마음의 요구 못지않게 지나치다. 우선,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내주기 싫어하는 것인데, 우리 자신의 고통이 날카로워서 그것이 끝나는 것을 애타게 보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의 마음이 그 변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우리 자신의 마음 역시 스스로 변하는 데 그 시간을 다 써 버려서, 마침내 우리가 스스로 세웠던 그 목표가 도달할 수 있게 될 즈음이면 그것은 이미 목표이기를, 도달할 가치가 있어 보이기를 그쳐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도달 가능하리라는 이 생각, 즉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런 행운도 뜻하지 않게 될 때 마침내 손에 넣게 될 그것이 행운이 아니라는 이 생각은, 진실의 한 부분을, 그러나 오직 한 부분만을 담고 있다. 우리의 행운은 우리가 그것에 무관심해졌을 때 우리에게 굴러든다. 그러나 우리가 무관심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를 덜 까다롭게 만들어, 돌이켜 볼 때 그 행운이 아마도 우리에게 형편없이 모자라 보였을 시절에 찾아왔더라면 우리는 그 행운에 도취했으리라고 확신하게 만든다. 사람은 만족시키기가 그리 어렵지 않으며, 자기가 관심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판관도 못 된다. 우리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건네는 다정한 손길, 그녀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지나치다 싶게 느껴지는 그 손길은, 아마도 우리의 사랑을 만족시키기에는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그 다정한 말들, 그 초대나 응낙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었을 기쁨만을 생각할 뿐, 그 뒤에 곧바로 이어지기를 바랐을 그 모든 다른 말들과 만남들, 실은 우리 자신이 그것들을 갈망한 나머지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가로막았을 법한 그것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더 이상 사랑하고 있지 않을 때 너무 늦게 찾아온 그 행운이, 한때 그 결핍이 우리를 그토록 불행하게 만들었던 그 행운과 온전히 같은 것인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을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니, 그 시절의 우리의 자아다. 그는 이미 우리 곁에 없으며, 설령 그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행운은, 같은 것이든 아니든, 틀림없이 사라져 버리기에 넉넉할 것이다.

이런 꿈의 사후 실현들, 정작 그때가 되면 내가 별로 관심 두지 않을 그 실현들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아직 질베르트를 거의 알지 못하던 시절처럼 그녀가 내게 용서를 빌고, 나 말고는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맹세하며, 나와 결혼해 달라고 애원하는 말과 편지를 자꾸만 지어내는 사이에,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일련의 유쾌한 심상들이 차츰, 이제는 아무것도 그 양분이 될 것이 없어진 질베르트와 그 젊은 남자의 환영보다 내 마음속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아마 스완 부인을 다시 찾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나, 어떤 꿈이 내게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러했을 것이다. 그 꿈에서 내 친구 하나가, 그렇지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친구가, 나를 향해 더할 나위 없는 배신을 저지르면서 도리어 내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믿는 듯했다. 이 꿈이 안겨 준 아픔에 문득 잠에서 깨어, 깨어난 뒤에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는 것을 느끼고, 나는 다시 그 꿈으로 생각을 돌려, 잠 속에서 본 그 친구가 누구였을지 알아내려 머리를 쥐어짰으나, 그 이름의 울림은, 에스파냐식 이름이었는데, 이제 내 귀에 또렷하지 않았다. 요셉의 역할과 파라오의 역할을 겸하여, 나는 내 꿈을 해석하는 일에 착수했다. 꿈을 해석할 때, 그 안에서 본 사람들의 겉모습에 너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흔히 잘못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니, 그 사람들은 어쩌면 변장을 했거나 서로 얼굴을 바꾸었을 수도 있어서, 마치 무지한 고고학자들이 복원해 놓은, 대성당 벽면의 훼손된 성인상들이 한 사람의 몸에 다른 사람의 머리를 붙여 그 속성과 이름을 죄다 뒤섞어 놓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사람들이 지니는 이름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기 쉽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우리가 겪는 고통의 강렬함으로만 알아볼 수 있다. 내 고통으로부터 나는, 잠든 사이에 젊은 남자로 변해 있긴 했으나 그 최근의 배신이 여전히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사람이 질베르트임을 알아차렸다. 그때 나는 떠올렸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 그녀의 어머니가 무용 수업에 나가는 것을 금하던 그날, 그녀가 진심에서였는지 짐짓 꾸며서였는지, 야릇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향한 내 감정이 진실하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했던 일을. 그리고 연상 작용으로 이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내게 되불러왔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내 진심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내가 질베르트에게 어울리는 친구라는 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이 스완이었다. 내가 그에게 편지를 써 보았자 헛일이었으니, 질베르트는 내 편지를 도로 가져와서는 그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웃음과 함께 내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곧바로 돌려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월계수 덤불 뒤에서 벌어졌던 그 장면 전체를 떠올렸다. 불행해지자마자 사람은 도덕적이 된다. 나에 대한 질베르트의 최근의 반감은, 그날 오후 내 행실에 대해 삶이 내게 내린 판결처럼 여겨졌다. 그런 판결이야 길을 건널 때 마차를 조심하고 뻔한 위험을 피하니 면할 수 있으리라 사람은 여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다른 판결들도 있다. 사고는 우리가 살피지 않던 쪽에서, 안에서, 마음에서 온다. 질베르트의 말, “원한다면, 우리 계속 몸싸움하고 놀아도 돼,”가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나는 그녀가 그런 식으로, 어쩌면 집 안, 세탁실에서, 내가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그녀를 배웅하는 것을 본 그 젊은 남자와 함께 그러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하여, 얼마 전 내가 스스로 행복한 상태 속에 평온히 자리 잡았다고 믿었을 때가 그러했듯이, 이제 행복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린 마당에 적어도 나는 자라났으며 앞으로도 평온을 유지하리라고 당연시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영구히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복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행복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고통을 겪었을 때,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그 고통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을 때, 그때 우리의 행복이 늘 그러했던 것만큼이나 붙잡기 어렵고 위태로운 것은 바로 우리의 평온이다. 내 평온은 결국 내게 돌아왔으니, 우리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욕망을 가라앉히면서 꿈을 뒤따라 우리 정신의 울타리 안으로 스며든 그 구름은,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에도, 슬픔에조차 영속과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까닭에,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흩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고통이 사랑에서 비롯된 사람들은, 어떤 병자들을 두고 하는 말처럼, 자기 자신의 의사다. 위안이 그들에게 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슬픔의 원인인 그 사람에게서뿐이고, 그들의 슬픔은 그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이므로, 그들이 끝내 치유책을 찾아내야 하는 곳은 바로 거기, 그들의 슬픔 자체 안이다. 그리고 그 치유책은 어느 순간엔가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터인데, 그들이 이 슬픔을 마음속에서 오래 되씹을수록 그 슬픔은 사랑하는, 아쉬워하는 그 존재의 새로운 면모들을 계속 그들에게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니, 어느 순간에는 그 존재가 너무나 격렬하게 밉살스러워 더 이상 그녀를 볼 마음이 조금도 없어지고 마는데, 그녀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먼저 그녀를 괴롭혀야 할 것이기 때문이고, 또 어느 순간에는 그 존재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우리가 그녀에게 부여했던 그 사랑스러움을 그녀 자신의 미덕 목록에 보태고는 거기서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서 되살아났던 그 번민이 마침내 가라앉았음에도, 나는 이제, 어쩌다 한 번씩을 빼고는, 스완 부인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선은, 사랑하다가 버림받은 이들에게서는, 그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끊임없는, 설령 입 밖에 내지 않더라도, 기다림의 상태가 저절로 변형을 겪어서, 겉보기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그 본래의 요소들을 바로 그 정반대의 것들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앞의 것들은 우리를 뒤흔들어 놓았던 그 괴로운 사건들의 결과, 곧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기다리는 그 긴장에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는데, 그런 순간에 우리는,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아무 기별도 오지 않을 경우, 스스로 나서서 행동하고 싶어지지만, 일단 한 걸음을 내디디고 나면 그 뒤를 잇는 것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를 그 걸음의 성공을 그다지 자신하지 못하는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윽고, 우리가 아무런 변화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여전히 지속되는 이 긴장은, 알고 보니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상상 속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그 순간부터 그것은 거의 즐거운 것이 된다. 게다가, 앞의 상태가 얼마 동안 이어지면서 우리를 기다림 속에서 사는 데 익숙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마지막 만남들에서 느꼈던 고통이 아직 우리 안에 살아남아 있으나, 이미 잠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서둘러 깨우려 하지 않으니, 더구나 이제 무엇을 청해야 할지 그리 또렷이 보이지도 않는 터다.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을 조금 더 차지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아직 차지하지 못한 그 부분을 우리에게 한층 더 절실하게 만들 뿐인데, 그 부분은, 우리의 요구가 우리의 만족에서 생겨나는 까닭에, 무슨 일이 있어도, 줄일 수 없는 양으로 남게 마련이다.

또 하나의, 마지막 이유가 나중에 와서 이를 강화하고 스완 부인에게 드나드는 일을 아예 그만두게 만들었다. 더디게 제 모습을 드러낸 이 이유는, 내가 이제 질베르트를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빨리 그녀를 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이제 내 고통의 날카로운 날이 무디어진 터라, 스완 부인에게 드나드는 일은, 내 안에 남은 슬픔에 대해, 처음에 내게 그토록 소중했던 그 진정제이자 기분 전환거리가 다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진정제를 효험 있게 만든 바로 그것이 기분 전환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니, 곧 이 방문들에 질베르트의 기억이 은밀히 뒤섞여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이 기분 전환은, 질베르트의 존재가 더 이상 키워 주지 않는 어떤 감정에 맞서 싸우는 데, 곧 질베르트가 아무런 몫도 차지하지 않을 생각과 관심과 열정에 쓰이지 않는 한, 내게 아무 소용이 없을 터였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낯선 이로 남아 있는 이런 의식 상태들은, 처음에는 그 자리가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의 온 영혼을 아무 도전도 없이 차지하고 있던 그 사랑으로부터 그만큼 도로 빼앗아 온 자리를 언제나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북돋우고 자라나게 하려 애써야 하며, 그러는 동안 이제 한낱 기억에 지나지 않는 그 감정은 시들어 가고, 그리하여 우리 정신에 새로 들어온 요소들이 그 감정과 겨루어 우리 영혼의 점점 더 큰 부분을 그것에게서 빼앗아, 마침내 승리가 온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내 사랑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고, 그 시도에 나설 만큼, 아무리 오랜 시간을 그 노력에 바치더라도 결국에는 성공하고 말리라는 확신에서 솟아나는 그 더없이 잔인한 슬픔에 나 자신을 내맡길 만큼, 나는 아직 젊었고 아직 용감했다. 이제 질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녀를 만나기를 거부하는 구실로 내가 댄 것은, 그녀와 나 사이에 생겼다는, 전적으로 꾸며 낸 어떤 알 수 없는 오해에 대한 넌지시 하는 말이었는데, 나는 처음에 질베르트가 그 오해에 대해 내게 설명을 요구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실은, 삶의 가장 하찮은 관계에서조차, 애매하고 진실이 아니며 트집 잡는 문장이 일부러 쓰였다는 것을, 그것도 자기더러 항의하라고 쓰였다는 것을 아는 편지 상대가, 그것을 읽으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다고, 그리고 그 주도권을 제 손에 계속 쥐고 있게 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그저 반가워할 뿐, 해명을 요구해 오는 일은 결코 없다. 우리의 더 다정한 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러한데, 그런 관계에서 사랑에는 그토록 많은 웅변이, 무관심에는 그토록 적은 호기심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질베르트가 이 오해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더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으므로, 그 오해는 내게 실재하는 것이 되어, 편지마다 나는 그것을 새로이 들먹였다. 그리고 이런 근거 없는 상황들에는, 냉담을 꾸며 내는 그 태도에는, 그것들을 고집하도록 부추기는 어떤 매혹이 있다. 질베르트가 “하지만 그렇지 않아.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줘,”라고 답하게 하려고 “이제 우리 마음이 갈라졌으니,”라고 자꾸 써 대다 보니, 나는 차츰 정말로 우리 마음이 갈라졌다고 믿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하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어, 그 감정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에게 삶이 달라졌을지언정,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을 결코 없애지는 못할 거야,”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다가, 나는 정말로 삶이 달라졌다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감정의 기억만을 간직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품고 살게 되었으니, 마치 어떤 신경증 환자들이 처음에 아픈 척하다가 끝내 만성 병자가 되고 마는 것과 같았다. 이제, 질베르트에게 편지를 써야 할 때마다, 나는 이 상상된 변화로 마음을 돌렸는데, 그 변화는 이제 그녀가 답장에서 그것에 대해 지키는 침묵으로써 은연중에 인정된 터라, 앞으로 우리 사이에 계속 존속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다 질베르트도 굳이 그것을 모르는 체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녀 역시 내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공식 만찬의 축사에서 접대받는 외국 군주가 바로 앞서 접대하는 군주가 쓴 것과 거의 똑같은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것처럼, 내가 질베르트에게 “삶이 우리를 갈라놓았을지언정, 우리가 서로를 알던 그 나날의 기억은 남으리라,”라고 쓸 때마다 그녀는 어김없이 “삶이 우리를 갈라놓았을지언정, 그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언제나 소중할 그 행복한 시간들을 잊게 만들 수는 없어,”라고 답하곤 했다(비록 어째서, 어떻게 ‘삶’이 우리를 갈라놓았는지,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는 말하기 어려웠겠지만). 내 고통은 이제 지나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느 날 편지로 그녀에게 샹젤리제의 그 늙은 보리사탕 파는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하면서, “이 소식이 너를 슬프게 하리라는 것을 나는 대번에 느꼈어, 내 안에서는 그것이 숱한 기억을 불러일으켰어,”라는 말을 쓰는데, 내가 마치 이제는 거의 잊힌 어느 죽은 벗을 두고 말하듯 과거 시제로 말하고 있음을, 그것도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적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를 결코 멈춘 적 없는 이 사랑을 두고 그러고 있음을 깨닫자, 나는 왈칵 눈물을 쏟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서로 만나기를 바라지 않는 벗들 사이의 이런 편지 왕래보다 더 다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질베르트가 내게 보낸 편지들은, 내가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에게 쓰곤 하던 편지들이 지닌 그 섬세한 세련됨을 죄다 갖추고 있었고, 내게 그와 똑같은 겉치레의 애정 표시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을 그녀에게서 받는 것이 내게는 그토록 즐거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만나기를 거부하는 일은 그때마다 나를 덜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덜 소중해짐에 따라, 내 괴로운 기억들은 끊임없이 되돌아옴으로써 내가 피렌체나 베네치아를 생각하며 느끼는 점점 커지는 즐거움을 무너뜨릴 만큼 이제 강하지 못했다. 그런 순간에 나는, 다시 볼 일도 없고 이미 거의 잊어버린 한 소녀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외교관의 길을 단념하고 나 자신을 붙박이 생활에 처넣은 것을 후회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 우리 삶의 집을 짓지만, 마침내 그 집이 그녀를 맞이할 채비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오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는 우리에게 죽은 사람이 되고, 우리는 오직 그녀만을 위해 지어진 벽 안에 갇힌 죄수로 계속 살아간다. 베네치아가 내 부모에게는 아주 먼 곳으로, 그 기후가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치지 않고 발베크로 가서 자리 잡는 것쯤은 내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나는 파리를 떠나야 했고, 비록 드물었을망정 그 덕분에 이따금 스완 부인이 자기 딸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그 방문들을 단념해야 했다. 게다가 나는 그 방문들에서 질베르트가 아무런 몫도 차지하지 않는 갖가지 즐거움을 찾아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