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할머니는 내 눈이 감겼다고 여겼을 때, 이따금, 그녀의 베일에 박힌 커다란 검은 점들 사이로 나를 슬쩍 훔쳐보고는 눈길을 거두었다가 다시 슬며시 훔쳐보곤 하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마치 습관을 들이려고 제게 아픈 어떤 운동을 억지로 해내려는 사람처럼.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으나, 그것 또한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도 나 자신에게는 내 목소리의 울림이, 내 몸의 더없이 감지되지 않는, 더없이 내밀한 움직임들과 마찬가지로 유쾌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길게 늘이려 애썼다. 나는 억양 하나하나가 그 낱말 위에 나른히 매달리게 두었고, 내 눈길 하나하나가 겨눈 바로 그 자리에 가닿아 여느 때보다 오래 거기 머무는 것을 느꼈다. “자, 자, 가만히 앉아 쉬려무나” 하고 할머니가 말했다. “잠을 못 자겠거든 뭐라도 읽으렴.” 그러면서 그녀는 나에게 마담 드 세비녜의 책 한 권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펼쳤다. 그동안 그녀는 Mémoires de Madame de Beausergent에 파묻혀 있었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이 두 권을 한 권씩 빼놓고는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가장 아끼는 두 저자였다. 나는 고개를 조금도 의식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채, 한번 취한 자세를 그대로 지키는 데서 짜릿한 즐거움을 느끼며, 펼쳤다 다시 덮이도록 내버려 둔 마담 드 세비녜의 책을 손에 든 채 몸을 기댔다. 눈길을 그리로 내리지도, 아니 실은 파란 창 차양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은 채로. 그러나 이 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나에게는 감탄스러운 일로 여겨졌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데서 나를 떼어 놓으려는 누구에게도 굳이 대꾸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차양의 파란빛은, 어쩌면 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 강렬한 생기 때문에, 내가 태어난 날부터 마지막 한 모금 술을 들이켜 그것이 효험을 내기 시작한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 눈앞을 스쳐 간 온갖 빛깔을 어찌나 말끔히 지워 버리는 듯했던지, 그 파란빛에 견주면 그 빛깔들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훗날의 수술로 마침내 보게 되어 빛깔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여태 살아온 어둠이 돌이켜 그러할 것이 틀림없듯, 그처럼 칙칙하고 그처럼 공허했다. 늙은 검표원이 우리 표를 보자고 다가왔다. 그의 웃옷 금속 단추에서 반짝이는 은빛 광택이 나의 몰입에도 아랑곳없이 나를 매혹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곁에 앉으라고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칸으로 지나가 버렸고, 나는 철도원들이 사는 삶을, 그들은 온종일 선로 위에서 지내니 이 늙은 검표원을 보지 않고 지나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으리라는 것을 애틋이 그려 보았다. 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데서, 그리고 내 입이 반쯤 벌어져 있음을 느끼는 데서 얻던 즐거움이 마침내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몸이 좀 더 근질거렸고, 자리에서 뒤척이기까지 했다. 나는 할머니가 준 책을 펼쳐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며 눈에 띄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읽어 나갈수록 마담 드 세비녜에 대한 나의 감탄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순전히 형식적인 세부, 그 시대의 관용어구나 사교적 관습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것들 탓에 어떤 이들은 “얘야, 말해 보렴”이라거나 “그 백작은 나에게 재능 있는 사람으로 보이더구나”라거나 “건초 만들기는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일이지”라고 말하고는 세비녜의 어투를 붙잡았다고 믿는다. 시미안 부인은 이런 것을 쓸 수 있다는 이유로 벌써 제 할머니를 닮았다고 상상한다. “라 불리 씨는 놀랍도록 잘 견디고 계시며, 자기 부고를 들어도 끄떡없을 만큼 정정하십니다”라거나, “오, 나의 친애하는 후작이여, 당신의 편지가 나를 얼마나 황홀케 했는지요! 답장을 쓰는 것 말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거나, “내 생각에, 당신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빚졌고 나는 당신에게 베르가모트 상자 몇 개를 빚진 듯합니다. 나는 여덟 개로 빚을 갚으며, 나머지는 뒤따라 보내겠습니다… 이토록 많이 열린 적이 없었지요. 아마도 당신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그런가 봅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투로 사혈에 관한, 레몬 따위에 관한 편지도 써 놓고는, 그것이 마담 드 세비녜의 편지의 전형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세비녜 그 부인을 안으로부터 다가가, 혈육과 자연에 대한 그녀 자신의 사랑에 이끌려 그리했던 나의 할머니는, 그와는 사뭇 다른 그녀 서한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즐기도록 나를 가르쳐 주었다. 그 아름다움은 이윽고 나를 한층 강하게 사로잡게 되었으니, 마담 드 세비녜는 내가 발베크에서 만나게 될, 그리고 그곳에서 사물을 보는 나의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어느 화가와 같은 유파의 위대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나는 발베크에서, 그녀가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독자에게 내어놓는다는 것을, 곧 사물을 먼저 그 여러 원인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대신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는 순서 그대로 내어놓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그날 오후 기찻간에서, 달빛이 비쳐 드는 그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가며,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필요도 없건만 나는 온갖 보닛과 베일을 다 걸치고, 공기가 내 방 안처럼 감미로운 이 산책로를 거닌다. 나는 수천 가지 환영을 본다. 희고 검은 수도사들, 잿빛과 흰빛의 수녀들, 여기저기 땅바닥에 던져진 아마포, 나무둥치에 기대어 똑바로 선 채 수의에 감싸인 사내들을” 하는 그 대목에서, 나는 조금 뒤에 (그녀가 그가 인물을 그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풍경을 그리지 않는가?) 마담 드 세비녜의 서한집의 도스토옙스키적인 면모라 일컫게 될 그것에 황홀히 사로잡혔다.
그날 저녁, 할머니를 목적지까지 바래다드리고 그 친구 집에서 몇 시간을 보낸 뒤 나 혼자 기차로 돌아왔을 때, 어쨌든 뒤이은 밤에는 나를 괴롭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그 밤을, 그 나른한 정적이 도리어 나를 뜬눈으로 지새우게 했을 방 안에서 보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벗해 주는 그 온갖 기차의 움직임이 자아내는 다독이는 활기에 감싸여 있었으니, 그 움직임은 내가 잠들지 못하면 곁에 머물러 이야기를 나누자 청했고, 그 소리로 나를 어르며 재웠다. 나는 그 소리를, 콩브레의 종소리를 곧잘 그리했듯, 이제는 이 가락에 이제는 저 가락에 짝지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처음에는 고르고 같은 값의 열여섯분음표 넷을, 다음에는 사분음표 하나에 사납게 내리꽂히는 열여섯분음표 하나를 들으면서.) 그 움직임들은 나의 불면의 원심력을, 그와 반대되는 압력을 가해 상쇄해 주었고, 그 압력이 나를 균형 속에 붙들어 주었으며, 그 균형 위로 나의 부동 상태와 이윽고 찾아든 나른함이 실려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막강한 힘들의 지켜 주는 보살핌 아래 자연과 삶의 품에 안겨 쉬고 있었더라면, 바다에서 잠자며 물결과 조수에 무심히 떠밀려 가는 물고기로, 혹은 폭풍 말고는 아무런 받침도 없이 허공에 활짝 펼쳐진 독수리로 한순간 몸을 바꿀 수 있었더라면 누렸을 것과 똑같은 상쾌함이었다.
해돋이는 긴 기차 여행에 으레 따르는 것이니, 삶은 달걀이며 그림 잡지며 카드 한 벌이며 배들이 안간힘을 쓰되 나아가지 못하는 강물이 그러하듯이. 어느 순간, 내가 방금 잠들었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려고 앞선 몇 분 동안 내 마음을 채웠던 생각들을 헤아려 보던 그때 (그리고 그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 바로 그 불확실함이 나에게 그렇다는 대답을 안겨 주려던 참이었는데), 창의 희읍스름한 네모 안, 자그마한 검은 숲 위로 나는 너덜너덜한 구름 몇 조각을 보았다. 그 솜털 같은 가장자리는, 그것을 입도록 자라난 날개를 물들이는 빛깔처럼, 혹은 화가의 변덕이 위에 슥 칠해 놓은 밑그림처럼, 변할 리 없는, 고정된, 죽은 듯한 분홍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느꼈다, 그것들과는 달리 이 빛깔은 타성에서도 변덕에서도 아니라 필연과 생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내 그 뒤로 빛의 예비군이 모여들었다. 그것이 환해졌다. 하늘은 진홍빛으로 물들었고, 나는 창에 눈을 딱 붙인 채 그것을 더 또렷이 보려 애썼는데, 그것이 어쩐지 자연의 가장 내밀한 생명과 이어져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로의 흐름이 바뀌어 기차가 방향을 틀자, 아침 풍경은 창의 틀 안에서 밤의 마을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 지붕들은 여전히 달빛에 푸르렀고, 그 연못은 밤의 유백색 진주층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그 위 창공은 아직 온갖 별로 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분홍빛 하늘 자락을 잃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이내 그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붉은빛으로, 선로의 두 번째 굽이에서 기차가 떠나온 맞은편 창에서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 창에서 저 창으로 오가며, 곱고 진홍빛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아침을, 그 띄엄띄엄 흩어진, 서로 정반대 편에 놓인 조각들을 한 폭의 화폭 위에 다시 모아 그러모으고, 그것을 아우르는 전망과 이어지는 그림 하나를 얻으려 애쓰며 시간을 보냈다.
풍경이 험하게 끊기고 가팔라지더니, 기차가 두 산 사이의 작은 역에 멈췄다. 협곡 저 아래, 세차게 흐르는 시냇가에는 물이 창문과 같은 높이로 스쳐 흐르는, 물속에 깊이 박힌 외딴 초소 하나만이 보였다. 어떤 사람이 한 토양의 산물이어서 그 토양 특유의 매력을 그 사람에게서 알아볼 수 있다면, 내가 혼자 메제글리즈 쪽을 거닐며 루생빌 숲에서 그토록 애타게 나타나기를 바랐던 시골 처녀보다도 더, 그런 사람에 값하는 이는 지금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내가 본 큰 처녀, 첫 비스듬한 햇살에 밝아진 오솔길을 올라 우유 단지를 들고 역 쪽으로 다가오는 그 처녀임에 틀림없었다. 모여 선 봉우리들이 바깥세상을 가려 버린 그녀의 골짜기에서, 그녀는 잠깐만 멈추는 이 기차들에서 말고는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창문들이 늘어선 열을 따라 지나가며, 잠에서 깬 몇몇 승객에게 커피와 우유를 권했다. 아침노을에 자줏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은 하늘보다 더 발그레했다. 그녀 앞에서 나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새삼 의식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되살아나는 그 삶에의 욕망을 느꼈다. 우리는 이것들이 개별적인 성질임을 늘 잊고서, 마음속에서 그것들 대신 하나의 판에 박힌 유형을, 곧 우리 마음을 끌었던 여러 얼굴과 우리가 알았던 여러 기쁨 사이에서 일종의 평균을 내어 얻은 그 유형을 갖다 놓는 탓에,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생기 없고 흐릿한 추상적 이미지뿐인데, 그것이 그러한 까닭은 바로 거기에 새로움의 요소, 우리가 아는 그 무엇과도 다른, 아름다움과 행복에 고유한 그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삶에 대해 공정하다고 여기는 비관적 판단을 내리는데, 그 판단을 내릴 때 행복과 아름다움을 고려에 넣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그 둘을 빼놓고서, 그 어느 것의 원자 하나 들어 있지 않은 종합물로 대신했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식한 사람은 누가 새로운 “좋은 책” 이야기를 꺼내면 대뜸 지루하여 하품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미 읽어 알고 있는 온갖 좋은 책을 뒤섞은 어떤 합성물을 머릿속에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책이란 특별한 것,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앞선 걸작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를 아무리 철저히 소화한들 발견해 낼 수 없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그 총합 속이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새 작품을 접하고 나면, 그때까지 무심하던 박식한 사람도 그 작품이 그려 내는 현실에 관심이 깨어남을 느낀다. 그렇게, 내가 혼자 있을 때 상상이 곧잘 그려 내던 아름다움의 본보기와는 동떨어진 이 다부진 처녀는, 대뜸 나에게 어떤 행복의 감각을(우리가 행복의 감각을 알게 되는 유일한 형태, 언제나 다른 그 형태를), 그녀 곁에 머물러 그곳에서 살아감으로써 실현될 행복의 감각을 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습관이 일시적으로 멈춘 것이 큰 몫을 했다. 나는 우유 파는 처녀에게, 실은 나 자신의 온 존재를, 가장 강렬한 기쁨을 맛볼 채비를 갖추고 이제 그녀와 마주한 그 존재를 고스란히 내주고 있었다. 대개 우리는 존재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살아가며, 우리 능력의 대부분은 잠들어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그것들의 봉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습관에 기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길의 이 아침에는, 내 삶의 판에 박힌 일과가 끊기고 장소와 시간이 바뀐 탓에 그 능력들의 참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어 있었다. 붙박이 같고 아침형이 못 되는 내 습관들이 나를 저버리자, 내 모든 능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러 부랴부랴 몰려와, 서로 열심을 다투며, 저마다 폭풍 속 물결처럼,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드높은 것까지, 호흡과 식욕과 혈액의 순환에서 수용력과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익숙지 않은 같은 높이로 솟구쳤다. 이 처녀가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나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이 황량한 벌판의 거친 매력이 그녀 자신의 매력에 보태졌던 것인지 나는 말할 수 없으나,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그것을 벌판에 되돌려 주고 있었다. 오로지 내가 그녀와 더불어 한 시간 또 한 시간을 자유로이 보낼 수만 있다면, 그녀와 함께 시내로, 암소에게로, 기차로 가고, 늘 그녀 곁에 있으며, 그녀가 나를 알아본다고, 그녀의 생각 속에 내 자리가 있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삶은 나에게 더없이 감미로운 것으로 보였으리라. 그녀는 나에게 시골 생활과 하루의 첫 시간이 주는 기쁨을 일깨워 주었으리라. 나는 그녀에게 커피를 좀 달라고 손짓했다. 나는 그녀 눈에 띄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 우람하게 다부진 그녀의 몸 위로, 그 얼굴빛이 어찌나 윤이 나고 발그레한지, 마치 불 켜진 창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돌아서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나는 다가올수록 커지는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으니, 그 얼굴은 어떻게든 궤도를 멈춰 세워 제 곁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태양, 가까이서 제 모습을 보여 주며 붉고 금빛인 광채로 눈을 멀게 하는 태양 같았다. 그녀는 나에게 꿰뚫는 듯한 시선을 박았으나, 짐꾼들이 승강장을 따라 뛰어다니며 문을 닫는 사이에 기차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역을 떠나 언덕을 내려 제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훤한 대낮이었다. 나는 새벽에서 멀어지며 내달리고 있었다. 내 들뜬 마음이 이 처녀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도리어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곁에 있다고 느끼며 내가 맛본 기쁨의 대부분이 그 들뜬 마음 덕분이었는지, 어느 쪽이든 그녀는 그것과 너무도 밀접히 얽혀 있어서,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내 욕망은 실은 육체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신적인 것이었으니, 이 열광의 상태가 아주 스러지도록 두지 않으려는, 비록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이나마 거기에 함께했던 그 사람과 영영 갈라서지 않으려는 욕망이었다. 그것은 단지 이 상태가 즐거운 것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현을 팽팽히 당기거나 신경의 진동을 빠르게 하면 다른 소리나 빛깔이 나오듯) 그 상태가 내가 보는 모든 것에 다른 음조를 입히고, 알 수 없고 한없이 더 흥미로운 우주의 무대 위로 나를 배우로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기차가 속력을 내는 동안에도 아직 눈에 보이던 그 어여쁜 처녀는, 내가 알던 삶과는 다른 어떤 삶의 한 부분 같았으니, 그 삶은 뚜렷한 경계로 내 삶과 갈라져 있었고, 거기에서는 사물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각이 더는 예전과 같지 않았으며, 이제 거기에서 옛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거의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이 새 삶에 적어도 얽매인 데가 있다고 느끼는 기쁨을 스스로에게 마련해 주려면, 그 작은 역에서 아침마다 그 처녀에게 커피 한 잔을 마시러 올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사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러나 아, 그녀는 내가 점점 더 빠르게 실려 가고 있는 그 다른 삶에서는 영영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 삶을 내다보며 나는 언젠가 다시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역에 멈출 수 있게 해 줄 계획들을 짜 봄으로써만 스스로를 그 삶에 내맡길 수 있었다. 그런 계획은 또 하나의 이점이 있었으니, 이기적이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이고 기계적이며 게으르고 원심적인, 곧 인간 정신의 성향에 재료를 대 준다는 것이었다. 우리 정신은 받은 즐거운 인상을 일반적이고 사심 없는 태도로 제 안에서 분석하는 데 드는 수고에서 곧잘 비켜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는 그 인상을 계속 떠올리고 싶어 하므로, 정신은 그것을 미래 시제로 그려 보기를 즐기는데, 그렇게 하면 사물의 참된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도 주지 못하는 대신, 그것을 우리 의식 속에서 다시 만들어 내는 수고를 덜어 주고, 그것을 바깥으로부터 새로이 받게 되리라고 바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어떤 도시의 이름들, 베즐레나 샤르트르, 부르주나 보베 같은 이름은 줄임말처럼 그 도시들의 으뜸가는 성당을 가리키는 구실을 한다. 우리가 그 낱말을 받아들이는 데 아주 익숙해진 이 부분적인 뜻은, 문제의 이름들이 아직 우리가 모르는 곳의 이름일 경우, 마침내 그 이름을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로 빚어내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우리가 그 이름으로 그 도시의, 곧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도시의 관념을 나타내려 할 때마다, 그 이름은 주형에 부은 듯 그 도시에 똑같이 새겨진 윤곽을, 똑같은 예술 양식을 강요하여, 그 도시를 일종의 거대한 대성당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내가 발베크라는 이름을, 거의 페르시아풍인 그 이름을 읽은 것은 철도역에서, 식당 문 위에서였다. 나는 들뜬 걸음으로 역을 지나 그 앞을 지나는 큰길을 가로질렀고, 그 고장에서 성당과 바다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해변으로 가는 길을 물었으나, 사람들은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다다른 옛 발베크, 곧 발베크앙테르에는 해변도 항구도 없었다. 전설에 따르면 어부들이 기적의 그리스도상을 찾아낸 것은 분명 바다에서였고,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성당의 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그 발견을 기록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성당의 본당과 탑들을 이루는 돌은 파도에 얻어맞은 절벽에서 떠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내가 그 창 밑까지 밀려와 스러지리라 상상했던 이 바다는, 십이 마일도 넘게 떨어진 발베크플라주에 있었고, 그 둥근 지붕 곁에 솟은 저 종탑은, 그것이 바람에 씨앗이 날아와 싹트고 바닷새들이 둘레를 맴도는 험한 노르망디 절벽 그 자체라고 읽었던 탓에, 내가 늘 그 밑동에 치솟은 파도의 마지막 마르는 물거품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 오던 그 종탑은, 두 갈래의 전차선이 갈라져 나가는 광장 위에, 금빛 글자로 “당구”라 적힌 카페 맞은편에 서 있었으며, 곧추선 돛대 하나 섞이지 않은 지붕들의 집을 배경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그리고 그 성당은, 카페와 더불어, 길을 물어야 했던 지나가던 낯선 이와 더불어, 이윽고 되돌아가야 할 역과 더불어 내 머릿속에 들어오면서, 전체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고, 하나의 우연처럼, 이 여름 오후의 부산물처럼 보였으니, 그 오후에 하늘을 배경으로 한 성당의 부드럽고 불룩한 둥근 지붕은, 집들의 굴뚝을 적시는 것과 똑같은 빛이 그 껍질을 발그레하고 이글거리며 녹아들듯 무르게 익혀 가는 한 알의 과일 같았다. 그러나 내가 사도상들을, 트로카데로 박물관에서 석고 본으로 본 적 있는 그 사도상들을 알아보았을 때, 나는 오직 그 조각들의 영원한 뜻만을 헤아리고자 했으니, 그것들은 성모상 양옆에서, 현관의 깊은 감실 앞에서, 마치 나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듯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애롭고 뭉툭하며 온화한 얼굴에 어깨를 숙인 그들은, 반기는 기색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화창한 날의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표정이 죽은 이의 얼굴처럼 변함없다는 것은, 내가 자리를 옮겨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드디어 왔다. 이것이 발베크 성당이다. 제 영광을 의식하는 듯 보이는 이 광장은, 발베크 성당을 지닌 세상에 하나뿐인 곳이다. 지금껏 내가 본 것은 모두 이 성당의 사진, 그리고 이 이름난 사도상들, 이 현관의 성모상을 뜬 한낱 석고 본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성당 그 자체, 조각상 그 자체다. 바로 이것들이다. 이것들, 둘도 없는 것들, 이것은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이다.”
그것은 어쩌면 또한 더 못한 무엇이기도 했다. 시험을 치르거나 결투를 하는 날의 젊은이가, 자기가 지녔고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지식과 용기의 비축을 떠올릴 때, 자기가 받은 물음이나 자기가 쏜 총알을 참으로 하찮은 것으로 느끼듯, 내 마음도 그러했다. 눈앞에 놓였던 복제품들 위로 현관의 성모상을 아득히 높이 떠받들어, 그것을 위협할 힘을 지닌 온갖 부침에도 범접할 수 없고, 부수어져도 온전하며, 이상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만들어 왔던 내 마음은, 제가 천 번이나 새겨 냈던 그 조각상이 이제 돌 속의 제 겉모습으로 오그라들어, 내가 팔을 뻗은 거리 안에서 선거 벽보와 내 지팡이 끝을 경쟁 상대로 삼는 자리를 차지하고, 광장에 얽매여, 큰길 어귀와 떼려야 뗄 수 없이 붙어, 카페와 합승마차 사무소의 시선에서 몸을 숨길 힘도 없이, 그 얼굴에 지는 해의 광선 절반을(몇 시간 뒤면 곧 가로등 불빛의 절반을) 받고 나머지 절반은 은행 건물이 받으며, 그 대금업소 지점과 나란히 제과점 화덕에서 풍기는 냄새에 함께 절어, ‘개별자’의 폭정에 어찌나 내맡겨져 있는지, 만약 내가 그 돌 위에 내 이름을 끄적여 놓기로 마음먹었더라면, 그때까지 내가 두루 미치는 존재와 만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부여해 왔던 그 이름난 성모, 발베크의 성모, 둘도 없는(아, 그러니 딱 하나뿐인) 그 성모가, 이웃 집들을 더럽힌 것과 똑같은 검댕을 뒤집어쓴 제 몸 위에, 그것을 떨쳐 낼 힘도 없이, 그녀를 우러러보러 온 온갖 낯선 이들에게 내 분필 자국과 내 이름의 글자들을 드러내 보였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소스라쳤다. 참으로 그녀야말로, 그토록 오래 갈망해 온 불멸의 예술품이건만, 나는 그녀가 성당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내가 키를 재고 주름을 셀 수 있는 돌로 된 조그마한 노파로 변해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역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거기서 할머니와 프랑수아즈를 기다렸다가 다 함께 발베크플라주에 닿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발베크에 관해 읽은 것을, 스완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곳은 더없이 아름답다네. 시에나 못지않게 훌륭하지.” 그리고 내 실망의 탓을 여러 우연한 원인들, 곧 내 건강 상태, 여행 뒤의 피로, 사물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무능 따위로 돌리면서, 나는 다른 도시들은 아직 나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려 했다. 어쩌면 곧, 진주가 쏟아지는 소나기 속으로 들듯, 캉페를레에서 뚝뚝 듣는 서늘한 물방울 소리 속으로 들어가고, 퐁타방이 잠긴 발그레한 빛에 물든 그 초록빛 물을 건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발베크로 말하자면,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마치 밀폐된 채로 지켜졌어야 할 이름 하나를 깨뜨려 연 것만 같았으니, 그때까지 그 안에 살아 있던 온갖 이미지를 내가 몰아낸 순간 내가 경솔하게 내준 기회를 대뜸 붙잡아, 전차 한 대, 카페 하나, 광장을 건너는 사람들, 어느 은행 지점이, 어떤 바깥의 압력에, 공기의 힘에 거스를 수 없이 떠밀려, 그 두 음절의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고, 그것들 위로 닫힌 그 두 음절은 이제 그것들이 페르시아풍 성당의 현관을 두르는 테두리 구실을 하게 두었으며, 앞으로 영영 그것들을 품기를 그치지 않으리라.
우리를 발베크플라주로 데려다줄 지방 철도 회사의 작은 기차 안에서 나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할머니는 혼자였다. 우리가 닿기 전에 모든 것을 채비해 두려고 프랑수아즈를 먼저 앞서 보낸다고 여겼으나 지시를 뒤죽박죽 만든 탓에, 할머니는 그저 프랑수아즈를 엉뚱한 방향으로 실어 보내는 데만 성공했던 것이다. 그 순간 프랑수아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전속력으로 낭트로 실려 내려가고 있었고, 아마 이튿날 아침이면 보르도에서 잠을 깨게 될 참이었다. 저물녘의 스러지는 빛과 오후의 가시지 않은 열기로 가득한 객차에(그 빛 덕분에 나는, 아, 그 열기가 할머니를 얼마나 지치게 했는지 그 얼굴에 또렷이 쓰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할머니는 입을 열었다. “그래, 발베크는 어땠니?” 내가 큰 기쁨을 누렸으리라 여기는 기대로 어찌나 환히 빛나는 미소였는지, 나는 차마 내 실망을 그 자리에서 털어놓지 못했다. 게다가 내 마음이 좇던 그 인상은, 내 몸이 익숙해져야 할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마음을 덜 차지했다. 이 여정의 끝에서,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은 그 끝에서, 나는 발베크 호텔 지배인의 모습을 그려 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에게 나는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는 할머니보다 더 그럴싸한 일행과 함께 그 앞에 나서고 싶었으니, 할머니는 틀림없이 그의 숙박료를 깎아 달라고 할 터였다. 그에 관해 확실한 것이라고는 거만하게 생색내는 태도뿐이었고, 그 이목구비는 아직 흐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