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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의 이름: 고장 ⑤

2권 제1부 · 고장의 이름: 고장

아,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는 딱하게도, 나는 이 모든 사람이 보이던 초연함이라고는 조금도 갖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를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는 이마가 벗어지고 두 눈이 제 편견과 교육의 눈가리개 사이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한 사내, 그 고장의 대귀족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지나치고 싶지 않았으니, 그는 다름 아닌 르그랑댕의 처남으로, 이따금 발베크에 누군가를 만나러 오곤 했고, 일요일이면 아내와 함께 여는 주간 원유회 때문에 호텔의 투숙객 상당수를 앗아 갔다. 그 가운데 한둘이 이 연회에 초대받았고, 나머지는 초대받지 못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그날을 골라 어딘가 먼 곳으로 소풍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 철이 시작되던 첫날, 리비에라에서 갓 옮겨 온 종업원들이 아직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던 때에, 호텔에서 지독히도 홀대를 받았다. 그는 흰 플란넬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스러운 프랑스식 예의로, 그리고 세련된 호텔의 관습에 어두운 탓에, 부인들이 앉아 있는 홀로 들어서며 문간에서 모자를 벗었으니, 그 바람에 지배인은 그것이 그가 “여느 사람에게서 태어난” 축이라 부르는, 지극히 미천한 태생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고는, 답례로 자기 모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직 사무 변호사의 아내만이 그 낯선 이에게 끌렸으니, 그는 참으로 점잖은 사람 특유의 빳빳한 속됨을 온통 풍기고 있었고, 그녀는 르망 최상류 사회의 어떤 비밀도 숨김없이 아는 사람다운 어김없는 안목과 흔들림 없는 권위로써, 한눈에 보아도 지체 높고 나무랄 데 없는 교양을 갖춘 신사, 발베크에서 흔히 보는 부류와는 뚜렷이 대비되는 신사 앞에 있음을 알 수 있노라 단언했다. 그 부류를 그녀는, 자기가 알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 하여 사귈 수 없는 이들로 못 박았다. 르그랑댕의 처남에게 그녀가 내린 이 호의적인 판단은, 아마도 아무도 주눅 들게 할 구석이 없는, 활기 없는 그 사내의 겉모습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성물지기 같은 걸음걸이의 이 시골 지주에게서, 자기 자신의 골수 성직자 편애와 통하는 프리메이슨의 표징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른다.

날마다 말을 타고 호텔 앞을 지나가는 그 젊은이들이, 내 아버지라면 말을 섞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지불 능력이 의심스러운 어느 포목상의 아들들임을 내가 안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닷가 생활”의 후광은 그들을 내 눈에 반신(半神)들의 기마상으로까지 드높였고, 내가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는, 그들이 그 오만한 눈길을, 호텔 식당에서 나와서는 그저 모래밭에 초라하게 앉아 있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가엾은 소년, 곧 나에게 결코 떨어뜨리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남태평양 무인도의 왕이었던 그 모험가에게서든, 그 젊은 폐병 환자에게서든, 어떤 응답이라도 이끌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 폐병 환자가 그 거만한 겉모습 아래, 수줍고 다정한 마음을, 어쩌면 나에게, 오직 나에게만 그 애정의 보물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을 그런 마음을 감추고 있으리라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게다가(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흔히들 하는 말과는 달리) 어떤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이 눈에 띄면, 이듬해에 다시 찾을 어느 휴양지에서, 우리의 참된 사교 생활에는 견줄 것이 없는 어떤 계수(係數)를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듯이, 파리로 돌아온 뒤에 우리가 그토록 매정하게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토록 정성껏 가꾸는 것으로, 바닷가에서 맺은 우정만 한 것이 없다. 나는 이 모든 한때의, 혹은 그 고장의 명사들이 나에 대해 품을지 모를 생각이 마음에 걸렸으니, 남의 처지에 나를 놓아보고 그들의 마음속에 든 것을 재구성해보려는 나의 성향은, 그들을 그들의 참된 지위, 이를테면 파리에서라면 차지했을, 그리고 사뭇 낮았을 그 지위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그러하리라 상상하는, 실은 발베크에서 그들이 실제로 차지한 그 지위에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발베크에서는 공통의 분모가 없다는 사정이 그들에게 일종의 상대적 우월함과 개별적인 흥미로움을 부여했다. 아, 이 사람들 가운데 누구의 경멸도 M. 드 스테르마리아의 경멸만큼 견디기 힘든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딸을, 그녀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여겨보았으니, 그 고운 이목구비, 창백하다 못해 거의 푸르스름한 안색, 그 훤칠한 몸매의 자태와 걸음걸이에 깃든 무언가 특별한 것이, 나에게, 그것도 옳게, 그녀의 유구한 가계와 귀족적인 자라남을 일러주었기 때문인데,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그 인상은 한층 더 생생했다. 마치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지은 저 표현력 넘치는 주제들이, 먼저 프로그램에 눈길을 훑어 상상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길들인 청중에게, 불의 이글거림이며 물의 내달림이며 들판과 숲의 평화를 찬란한 빛깔로 그려내듯이. “여러 세기에 걸친 혈통”이라는 딱지는, Mlle. 드 스테르마리아의 매력에 그 유래라는 관념을 더함으로써 그 매력을 한층 더 탐나는 것으로 만들었으니, 높은 값이 이미 우리 마음을 사로잡은 물건의 가치를 돋우듯, 그 희소함을 광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유전의 축적은, 그토록 많은 정선된 즙이 뒤섞인 그녀의 안색에, 이국 과일이나 이름난 포도주의 그윽한 풍미를 부여했다.

그러다 순전한 우연이, 할머니와 나의 손에, 호텔의 다른 모든 투숙객의 눈앞에서 우리 자신에게 대번에 위엄을 부여할 방편을 쥐여주었다. 그 첫날 오후, 그 늙은 귀부인이 자기 방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앞장선 시종과, 두고 온 책 한 권과 무릎덮개를 들고 뒤따라 달려오는 하녀 덕분에,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뚜렷한 인상을 자아내고 저마다의 마음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던 그 순간, 그 호기심에서 M. 드 스테르마리아만큼 자유롭지 못한 이가 없음이 분명해 보이던 그때, 지배인이 할머니 쪽으로 몸을 기울여, 순전한 마음씨의 착함에서(마치 그토록 위세 당당한 군주와 아무 연고도 있을 리 없으나 그럼에도 그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음을 알면 흥미로워할지 모를 무명의 구경꾼에게, 샤나 라나발로 여왕을 가리켜 보이듯) 그녀의 귀에 대고 “빌파리지 후작부인이십니다!” 하고 속삭였고, 바로 그 순간 그 늙은 귀부인은 할머니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놀라움의 몸짓을 억누르지 못했다.

가장 강력한 요정이 작은 노파의 모습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한들, 그것이 내게 그만한 기쁨을 주지는 못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나는 스테르마리아 에게 다가갈 아무런 방도도 갖지 못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미학적으로 보면 인간 유형의 수란 몹시 한정되어 있어서, 우리는 어디에 있든 늘, 스완처럼 옛 거장들의 작품 속에서 굳이 찾지 않더라도, 아는 사람을 보는 기쁨을 누리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발베크에 머문 첫 며칠 사이에 나는 르그랑댕과 스완네 문지기, 그리고 스완 부인 자신을, 웨이터로, 다시는 보지 못한 어느 외국인 손님으로, 또 해수욕장 관리인으로 탈바꿈한 모습으로 찾아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자기력이 어떤 얼굴과 정신의 특징들을 차례차례 떼어놓을 수 없이 끌어당겨 붙들어 두기에, 자연이 이렇게 한 사람을 새로운 몸으로 옮겨 넣을 때에도 그를 지나치게 훼손하지는 않는다. 웨이터가 된 르그랑댕은 제 키와 코의 윤곽, 턱의 일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남성으로, 그것도 해수욕장 관리인의 직분으로 나타난 스완 부인에게는 낯익은 이목구비뿐 아니라 말하는 버릇까지 따라와 있었다. 다만, 직분의 붉은 띠를 두르고 저 해변에 서서, 바람이 처음 불어오자마자 목욕을 금하는 깃발을 올리는 그녀는(이런 관리인들이란 신중한 사람들이어서 헤엄칠 줄 아는 이가 드물다), 스완이 오래전 이드로의 딸의 초상에서 그녀를 알아보았던 저 모세의 생애 벽화 속에서만큼이나 내게 거의, 아니 조금도 쓸모가 없었으리라. 반면에 이 빌파리지 부인은 참된 제 모습 그대로였으니, 그녀는 자신의 힘을 앗아 간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힘을 백 배로 불려 줄 마법을 그 힘에 실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마치 신비로운 새의 날개에 실려 허공을 가로지르기라도 한 듯, 몇 순간 만에 나와 스테르마리아 을 갈라놓던 (적어도 발베크에서는) 한없이 넓은 사교계의 심연을 건너뛰게 될 참이었다.

불행히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제 작은 세계 속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할머니였다. 할머니라면 나를 경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내가 그 존재조차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고 발베크를 떠날 무렵이면 그 이름조차 아무 인상도 남기지 못할 사람들의 견해를 내가 중히 여기고,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다고 누가 일러 주었더라도, 할머니는 그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감히 할머니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만약 바로 그 사람들이 할머니가 빌파리지 부인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나는 더없이 흡족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 후작부인이 호텔에서 대단한 비중을 지녔으며, 그녀와의 친분이 스테르마리아 의 눈에 우리를 어떤 위치에 올려놓았으리라 느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그 친구가 내게 어떤 의미로든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이름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으니, 그 이름은 내가 그것을 헤아려 보기도 전에, 어린 시절 집안의 대화 속에서 들려오던 무렵부터 이미 내 귀에 낯익은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 덧붙은 작위란 그저 얼마간 예스러운 정취를 더해 줄 뿐이었다. 마치 흔치 않은 세례명이 그러하듯, 혹은 거리 이름들 가운데 로르 바이런 거리나, 서민적이다 못해 누추하기까지 한 로슈슈아르 거리, 그라몽 거리에서, 레옹스 레노 거리나 이폴리트 르바 거리에서보다 더 고귀한 무엇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빌파리지 부인은 그녀의 사촌 마크마옹이 내게 그러했듯, 어떤 특별한 세계에 속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마크마옹을, 마찬가지로 공화국 대통령이던 카르노 와도, 또는 프랑수아즈가 피우스 9세의 사진과 함께 사 두었던 라스파유와도 뚜렷이 구별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집을 떠나 있을 때에는 일체의 사교를 끊어야 한다는 것, 바닷가에는 사람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일이라면 파리에서도 얼마든지 할 시간이 있다는 것, 그런 사람들 탓에 한낱 예의를 차리느라 부질없는 대화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데 그 소중한 시간은 마땅히 저 파도 곁 탁 트인 바깥에서 온전히 보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할머니의 신조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이 견해를 누구나 다 함께 지닌 것으로 여기는 편이 편리하다고 보아, 우연히 같은 호텔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오랜 벗들 사이에서는 서로 모르는 척하는 허구가 그로써 허락된다고 여겼기에, 지배인에게서 그 친구의 이름을 듣고도 할머니는 그저 딴 데로 눈길을 돌리며 빌파리지 부인을 못 본 척했고, 부인 또한 할머니가 알아봐 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역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대로 지나쳐 갔고, 나는 마치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듯하던 배가 끝내 보트 한 척 내리지 않은 채 수평선 아래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지켜본 난파선의 뱃사람처럼 홀로 남겨졌다.

그녀 역시 식당에서 식사를 했으나, 그 반대편 끝에서였다. 그녀는 호텔에 묵고 있거나 그곳으로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캉브르메르 조차 알지 못했다. 실제로 나는, 어느 날 그가 아내와 함께 그 변호사의 오찬 초대에 응했을 때, 그에게 아무런 인사도 건네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 귀족을 제 식탁에 앉히는 영광에 취한 변호사는 여느 날의 벗들을 피한 채, 이 역사적인 사건에 그들의 주의를 끌려는 듯 멀찍이서 눈꺼풀을 씰룩여 보이는 데 그쳤는데, 어찌나 은근하던지 그 신호를 벗들이 자리에 합석하라는 초대로 해석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이런,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으셨겠지요. 제법 대단하신 기분이시겠어요.” 그날 저녁 판사 부인이 그에게 건넨 인사였다.

“대단하다니요? 제가 왜요?” 변호사가 지나친 놀라움 뒤에 제 환희를 감추며 물었다. “제 손님들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는 더 이상 이 익살을 이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한데 친구 몇을 오찬에 부른 게 뭐 그리 대단하답니까? 어차피 사람이란 어디선가 밥은 먹어야 하는 법 아닙니까!”

“하지만 대단한 일이고말고요! 그분들, 캉브르메르가 사람들 아니에요? 저는 한눈에 알아봤어요. 그 부인은 후작부인이잖아요. 그것도 진짜배기 말이에요. 여자 쪽 혈통으로 이어받은 게 아니고요.”

“오, 그분은 아주 소탈한 분이에요, 매력적이고 거만한 구석이라곤 없지요. 저는 당신도 합석하러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께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요… 소개해 드렸을 텐데!” 그는 그 제안의 엄청난 관대함에 얼마간 반어의 기색을 곁들이며 단언했으니, 마치 아하수에로스가 에스테르에게 이렇게 말할 때와 같았다.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어야 하리!

“아니요, 아니요, 아니에요! 저희는 수줍은 제비꽃처럼 숨어 지낸답니다.”

“하지만 정말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장담하지요.” 위기의 고비가 지나가자 대담해진 변호사가 대꾸했다. “그분들이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 그건 그렇고, 우리 베지크나 한 판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렴요! 이제 후작부인들을 접대하고 다니시는 분께 감히 그런 걸 청하기가 겁이 났지 뭐예요.”

“원, 그런 말씀 마세요. 그분들이라고 뭐 그리 대단할 게 있다고요. 실은 저도 내일 그 댁에 저녁을 먹으러 갑니다. 저 대신 가시겠습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저야 여기 남는 편이 차라리 낫거든요.”

“아니, 아니에요! 그랬다간 저는 반동분자로 몰려 법관 자리에서 쫓겨날 겁니다.” 재판장이 제 농담에 눈물이 고이도록 웃어 대며 소리쳤다. “한데 당신도 페테른에 가시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는 사무 변호사 쪽으로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오, 저야 일요일에나 들르지요. 한쪽 문으로 들어갔다 다른 쪽 문으로 나오는 정도랍니다. 하지만 저는 저 두목처럼 그분들을 여기 오찬에 불러들이거나 하지는 않아요.”

스테르마리아 는 그날 발베크에 있지 않았고, 변호사로서는 그것이 몹시 아쉬웠다. 그래도 그는 수석 급사장에게 때맞춰 한마디 건네는 데 성공했다.

“에메, 스테르마리아 한테 이렇게 전해도 좋네. 여기 드나든 귀족이 그분 혼자만은 아니라고 말이야. 오늘 오찬 때 나와 함께 있던 신사분을 봤겠지? 응? 콧수염을 조금 기르고, 군인 같은 풍모였잖나. 그분이 바로 캉브르메르 후작이었다네!”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해도 놀랍지 않은데요.”

“그러면 작위를 지닌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걸 그분도 알게 되겠지. 따끔한 교훈이 될 거야! 저런 귀족 나리들 콧대를 한두 눈금쯤 꺾어 놓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거든. 아 참, 에메, 자네가 내키지 않으면 아무 말 안 해도 되네. 내 말은, 나야 상관할 바 아니라는 거지. 게다가 그분들끼리는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이튿날 스테르마리아 는, 그 변호사가 언젠가 제 친구 하나의 사건을 맡아 변호한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내고는, 다가와 스스로를 소개했다.

“우리 두 사람 다 아는 벗인 캉브르메르가 사람들이 우리가 만나기를 몹시 바랐지요. 한데 날이 맞질 않아서, 무엇이 어긋났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변호사가 말을 더듬었다. 그는 대개의 거짓말쟁이가 그러하듯, 남들이란 하찮은 세부 하나를 굳이 캐 보려 들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사소한 세부야말로, (우연히 그 사건의 초라한 사실들을 손에 넣게 되고 그것이 거짓말과 어긋나기라도 하면) 거짓말쟁이의 본색을 드러내고 오래도록 이어질 불신을 심어 놓기에 충분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만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 곁을 떠나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한결 수월하게, 나는 스테르마리아 을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앞으로 내민 두 팔 위로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올릴 때처럼 언제나 우아하면서도 대담한 그녀의 몸가짐의 독창성 못지않게, 이내 꺼져 버리는 눈빛의 메마른 불꽃, 그녀 자신의 개성적 억양으로도 어설프게밖에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저 뿌리 깊은 타고난 냉혹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 할머니를 언짢게 했던 것이었다. 눈짓으로든 말로든 제 나름의 생각 하나를 표현해 내는 데 성공할 때마다 그녀가 되돌아가 움츠러들던 일종의 격세유전적 출발점 같은 것 말이다. 이 모든 자질들은 그녀를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그녀에게 저 인간적 공감의 결핍과 감수성의 그 빈틈들, 시시각각 바닥나 가는 그 부족한 인간미를 물려준 조상들의 계보로 거슬러 데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의 우물을 한순간 채웠다가 이내 다시 말라 버리는 어떤 눈빛에서, 관능적 쾌락에 대한 취향이 우위를 점할 때 가장 오만한 여인들에게조차 깃드는 저 거의 비굴하다 할 만한 순종을 나는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런 여인은 머잖아 오직 한 가지 형태의 개인적 탁월함만을 인정하게 되리니, 곧 그녀에게 그 쾌락을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배우든 심지어 곡예사든 지니게 되는 그 탁월함이요, 어쩌면 그녀는 언젠가 그런 남자를 위해 남편을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창백한 두 뺨을 물들이던, 따스하고 관능적인 어떤 장밋빛 기운에서, 마치 비본 강의 하얀 수련들의 심장을 물들이던 그 빛깔처럼, 나는 그녀가 브르타뉴에서 영위하는 저 시와 낭만의 삶의 정취를 내가 그녀에게서 찾으러 오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리라는 것을 읽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삶을 그녀는,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타고난 우월감 탓인지, 아니면 제 집안의 궁핍이나 인색함에 대한 혐오 탓인지,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으나, 그럼에도 제 몸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전해진 그 빈약한 의지력의 밑천으로는, 그녀의 표정에 나약함의 기색을 더해 주던 그 밑천으로는, 어쩌면 그녀도 저항할 힘을 찾아내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식사 때마다 그녀가 어김없이 쓰던, 조금은 예스럽고 젠체하는 깃털을 얹은 그 회색 펠트 모자는 그녀를 내게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그녀의 진줏빛이거나 장밋빛인 얼굴빛과 어울려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녀를 가난한 사람이라 짐작하게 함으로써 그녀를 내게 더 가까이 데려다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곁에 있는 탓에 판에 박힌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제 눈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각하고 분류하는 데에는 이미 아버지와는 다른 원칙을 들이대고 있던 터라, 어쩌면 그녀는 내게서 나의 보잘것없는 신분이 아니라 걸맞은 성(性)과 나이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만약 어느 날 스테르마리아 가 그녀를 남겨 둔 채 밖으로 나가 준다면, 무엇보다도 빌파리지 부인이 우리 식탁에 와서 앉음으로써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그녀에게 심어 주어 내가 감히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게 된다면, 그때는 어쩌면 우리도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만남을 약속하고, 더 가까운 사이를 맺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부모도 없이 홀로, 낭만적인 브르타뉴의 성에 남겨질 한 달 내내, 우리는 어쩌면 저녁이면 단둘이서, 그녀와 내가 함께, 어스름 속을 거닐 수 있었으리라. 그 어스름은 어두워져 가는 물 위로, 파도의 두드림에 시달려 왜소하게 뒤틀린 떡갈나무들 아래 분홍빛 들장미를 한결 부드러운 빛으로 비추어 주었으리라. 우리는 함께 그 섬을 헤매고 다녔으리라. 그 섬은 스테르마리아 의 나날의 삶을 품어 안았고 그녀의 추억 어린 두 눈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기에, 내게는 그토록 강렬한 매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토록 많은 추억으로 그녀를 감싸던 그 고장들을 두루 지나온 다음에라야 오직 그곳에서만 정말로 그녀를 소유하게 되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추억은 하나의 베일이었으니, 나의 욕망이 찢어발기려 애쓰던 그 베일은, 자연이 여인과 그녀를 뒤쫓는 자들 사이에 (우리 모두를 위해 생식 행위를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장 강렬한 쾌락 사이에 끼워 넣고, 곤충들을 위해서는 꿀 앞에 그들이 지니고 가야 할 꽃가루를 놓아두는 것과 똑같은 의도로) 드리워 놓은 베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그 뒤쫓는 자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를 더 온전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환상에 속아, 먼저 그녀가 사는 무대들부터 차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무대들이란, 그들의 상상력에는 관능적 쾌락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이바지하면서도, 정작 그 쾌락 없이는 그들을 끌어당길 힘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테르마리아 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아버지가, 중요한 인물과 안면을 트는 일이란 그 자체로 충분한, 짧고 호기심 어린 행위이며, 그 안에 잠재된 온갖 관심을 끌어내는 데에는 악수 한 번과 꿰뚫는 듯한 응시 한 번이면 족할 뿐, 당장의 대화도 그 뒤의 어떤 교류도 필요치 않다고 여긴 게 분명했으니, 그는 변호사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와 그녀를 마주 보고 앉으며, 방금 값진 물건이라도 손에 넣은 사람처럼 두 손을 비벼 댔던 것이다. 변호사로 말하자면, 이 만남의 첫 감격이 가라앉고 나자,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가 매 순간 수석 급사장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나는 임금이 아니라네, 에메. 어서 가서 임금님이나 모시게! 그건 그렇고, 재판장님, 저 조그만 송어들이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에메한테 좀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어요. 에메, 저기 자네가 가진 그 작은 생선이 내 보기엔 아주 훌륭해 보이는군. 우리한테 좀 가져다주겠나, 에메, 그리고 아끼지 말고 넉넉히 말이야.”

그는 온종일 “에메”라는 이름을 되뇌곤 했는데, 그 한 가지 결과로, 그가 누군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면 그 손님은 “보아하니 당신은 이곳에서 아주 단골이신 모양이군요” 하고 한마디 하고는, 자신도 “에메”라고 따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소심함과 속됨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많은 이들이 지닌 저 성향, 곧 어쩌다 함께 있게 된 자리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글자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 세련되고 재치 있는 일이라 믿는 그 성향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변호사는 그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으나 다만 미소를 띤 채였으니, 그로써 그는 자신이 수석 급사장과 좋은 사이임과 동시에 제 자신의 높은 신분을 함께 과시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석 급사장은 제 이름이 불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역시 미소를 지었는데, 감동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우쭐한 그 미소는, 그가 그 영광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 익살을 알아들을 줄 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나 두렵게 여기던 이 식사들은, 대개는 만원인 그 거대한 호텔의 드넓은 식당에서 치러졌는데, 이 “호화 호텔” 하나뿐 아니라 프랑스 방방곡곡 네 귀퉁이에 자리한 예닐곱 곳을 더 소유한(어쩌면 그는 이사회가 임명한 총지배인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소유주가 며칠간 머무르러 오면 한층 더 두려운 것이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호텔들마다 이따금 한 주씩을 보내곤 했다. 그러면 저녁 식사가 막 시작된 참에, 매일 저녁 식당 문간에, 흰머리에 붉은 코를 한 이 자그마한 사내가 나타났으니, 놀랍도록 말끔하고 무표정한 그는, 듣자 하니 몬테카를로에서만큼이나 런던에서도 잘 알려진, 유럽 굴지의 호텔 경영자 가운데 하나였다. 한번은 내가 저녁 식사가 시작될 무렵 잠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그의 곁을 바짝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목례를 했으나 그 쌀쌀함이 제 신분을 결코 잊지 못하는 사람 특유의 조심스러움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보잘것없는 손님에 대한 경멸에서 온 것인지 나로서는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 비중이 상당한 이들에게라면 총지배인은, 꼭 그만큼 쌀쌀하되 한층 더 깊이 허리를 숙여, 거의 무안해하는 겸양이라 할 만큼 경건하게 눈꺼풀을 내리깔며 인사했으니, 마치 장례식에서 고인의 아버지와, 또는 성체와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했다. 이 얼음장 같고 드물게나 오는 인사를 빼면 그는 아주 미미한 몸짓조차 하지 않았으니, 머리에서 튀어나올 듯한 그 번득이는 눈이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관장하며, 이 “호텔 정찬”의 낱낱의 세부까지 완벽함을, 아울러 전체의 조화를 우리에게 보장한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만 같았다. 그는 분명, 자신이 한낱 연극의 연출자나 관현악단의 지휘자 이상이며, 다름 아닌 최고 지휘권을 쥔 장군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극도의 강도에까지 밀어붙인 응시 하나면 모든 것이 채비되었음을, 어떤 실수도 저질러져 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없음을 확인하기에 족하다고, 한마디로 그 응시가 그에게 온전한 책임을 지운다고 마음먹은 그는, 어떤 몸짓도 삼갈 뿐 아니라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조차 삼갔으니, 그 응시의 강도로 굳어져 버린 두 눈은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빨아들이며 지휘하고 있었다. 나는 내 숟가락의 움직임조차 그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느꼈으며, 설령 그가 수프가 끝난 뒤에 사라져 버린다 해도, 그가 벌인 그 사열은 저녁 식사 내내 내 식욕을 앗아 가 버렸을 것이다. 정작 그 자신의 식욕은 대단히 좋았으니, 오찬 때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여느 호텔 손님과 마찬가지로, 공용 식당에서 다른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을 법한 탁자에서 오찬을 들었다. 그의 탁자에는 다만 이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식사하는 동안 그 곁에 다른 지배인, 곧 상주하는 지배인이 내내 선 채로 말동무를 서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총지배인의 아랫사람인 그로서는, 늘 두려움 속에 모시고 사는 이 사내의 비위를 맞추고 싶었던 것이다. 이 오찬들 동안에는 그에 대한 내 두려움도 잦아들었으니, 그때만큼은 손님들 무리 속에 파묻힌 그가, 사병들도 함께 있는 식당에 앉은 장군이 그들을 짐짓 못 본 척하는 것과 같은 신중함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지기가 사환들 무리 속에서 내게 “그분은 내일 아침 디나르로 떠나십니다. 그다음엔 비아리츠로 내려가셨다가, 그러고 나선 칸으로 가시지요” 하고 알려 왔을 때, 나는 한결 마음 놓고 숨을 쉬기 시작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