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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의 이름: 고장 (계속) ③

2권 제2부 · 고장의 이름: 고장 (계속)

“이제 저희 때문에 진력이 나셨을 텐데요.” 할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천만에요! 아니, 저야 즐겁기 그지없답니다, 이보다 더 좋을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녀의 벗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길게 늘여 거의 읊조리다시피 대답했으니, 그것은 그녀의 여느 소탈한 말씨와는 사뭇 대조를 이루었다.

과연 이런 순간이면 그녀는 자연스럽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어릴 적 몸에 밴 소양으로, 곧 지체 높은 부인이라면 미천한 사람들에게 그들을 만나 반갑다는 것을, 조금도 뻣뻣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야 마땅하다는 그 귀족적 몸가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참된 예의에서 그녀가 저지르는 단 하나의 실수는 바로 이 지나친 예의였으니, 그것은 포부르 생제르맹 부인네의 직업적 “버릇” 가운데 하나임을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부인은 신분 낮은 벗들에게서 언젠가 자기가 불러일으키고야 말 잠재된 불만을 늘 내다보기에, 그들과의 사교 장부에서, 이쪽 면에 흑자를 적어 두면 나중에 반대쪽 면에 그들을 초대하지 않을 만찬이나 연회를 적어 넣을 수 있게 해 줄 그 흑자를, 기회란 기회는 탐욕스레 붙잡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성정이 이미 오래전 그녀 안에 단번에 굳어져 버린 터라, 이제는 처지도 사람도 달라졌다는 것을, 파리에서는 우리가 자주 자기 집을 찾아 주기를 그녀가 바란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계급의 정신이 빌파리지 부인을 열에 들뜬 듯한 열성으로 몰아세워, 마치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도록 허락된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라도 한 양, 우리가 아직 발베크에 머무는 동안 장미와 멜론 선물이며 책 빌려주기, 마차 태워 주기, 입에 발린 다정한 말들을 자꾸만 쏟아 내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눈부신 해변의 영화(榮華)에 못지않게, 방마다 어리던 갖가지 빛깔의 현란함과 물속 같은 광선에 못지않게, 아니 장사치의 아들들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처럼 떠받들어지던 그 승마 강습에 못지않게, 빌파리지 부인이 날마다 우리에게 베푼 친절이며, 또 할머니가 그것을 받아들이던 그 낯설고도 한때뿐인, 휴가 특유의 스스럼없음이, 바닷가 휴양지 생활의 전형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저분들에게 외투를 맡겨 위층으로 올려 보내시구려.”

할머니가 자기 외투를 지배인에게 건네자, 그가 내게 그토록 살갑게 대해 주었던 터라, 나는 이 배려 없는 처사에 마음이 언짢았으니, 그것이 그를 언짢게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이오.” 후작부인이 말했다. “아마 제깟에는 너무 지체 높은 몸이라 남의 외투 따위는 못 나른다고 여기는 게지. 나는 아직 아주 어렸을 적에 느무르 공작이, 그때 부용가(家) 저택 맨 위층에 살던 우리 아버지를 뵈러, 편지며 신문 뭉치를 옆구리에 두툼이 끼고 오시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오. 그 파란 외투 차림의 공작께서 우리 집 문간에 서 계시던 모습이 지금도 보이는 듯한데, 그 문간에는 어찌나 고운 목조 장식이 둘려 있었던지, 아마 바가르가 만든 것이지 싶소, 그 왜 그이들이 켜던 얇은 나뭇살들 있잖소, 어찌나 낭창낭창한지 소목장이가 이따금 그것을 비틀어 작은 조개며 꽃 모양을, 마치 꽃다발을 두른 리본처럼 만들어 놓곤 하던 그것 말이오. ‘자, 여기 있소, 키루스.’ 공작께서 우리 아버지께 이르시길, ‘당신네 문지기가 나더러 갖다 드리라고 준 걸 좀 보시오. 그자가 내게 이럽디다. 백작님을 뵈러 올라가시는 길이라니, 제가 그 계단을 죄다 오를 것까진 없겠지요. 하나 노끈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자, 이제 짐을 다 내려놓으셨으니, 앉으시지요. 자, 이 자리에 앉으세요.” 그녀가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머, 괜찮으시다면, 그 자리는 말고요! 둘이 앉기엔 자리가 모자라고, 저 혼자 앉기엔 너무 커서,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요, 꼭 이와 똑같았거든요, 여러 해 동안 내가 지니고 있다가 끝내 더는 간직할 수 없어 내놓은 의자가 하나 있었다오, 딱한 프랄랭 공작부인이 우리 어머니께 준 것이었기에 말이오. 우리 어머니는 세상에 둘도 없이 소탈한 분이었으나, 정말이지 지난 세대에 속한 관념들을 지니고 계셔서, 그때만 해도 나조차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소. 처음에 어머니는 프랄랭 부인께 소개받기를 도무지 내키지 않아 하셨는데, 그 부인은 본디 세바스티아니 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 그 부인은 자기가 공작부인이니 우리 어머니께 소개받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오. 그런데 정말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빌파리지 부인은 정작 자신도 이런 미묘한 등급의 구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잊은 채 말을 이었다. “설령 그 부인이 한낱 슈아죌 부인에 지나지 않았더라도, 그 주장에는 자못 일리가 있었지요. 슈아죌 집안이야 나무랄 데 없으니, 뚱보 루이의 누이에게서 뻗어 나왔고, 바시니 지방에서는 군림하던 제후였다오. 우리가 혼인과 지체에서 그들을 앞선다는 것은 인정하나, 서열이야 엇비슷하지요. 이 자잘한 골칫거리 탓에 몇 가지 우스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를테면 이 두 부인 중 한쪽이 다른 쪽에게 소개받기로 마음먹기까지, 한 시간 남짓이나 오찬 손님들을 기다리게 한 일도 있었다오. 그럼에도 그들은 둘도 없는 벗이 되었고, 그 부인은 우리 어머니께 꼭 그런 의자를 하나 주었으니, 자네가 그러듯 사람들이 늘 앉기를 마다하던 그런 의자였소.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마차 한 대가 안뜰로 들어서는 소리를 들으셨소. 우리 집에 있던 젊은 하인에게 누구냐고 물으셨지. ‘라 로슈푸코 공작부인이십니다, 마님.’ ‘그래, 그럼 안에 있다고 여쭈어라.’ 십오 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소. ‘라 로슈푸코 공작부인은 어찌 되었느냐?’ 어머니가 물으셨소, ‘어디 계시냐?’ ‘계단에 계십니다, 마님, 숨을 고르고 계세요.’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그 젊은 하인이 대답했는데, 우리 어머니는 하인이란 하인은 죄다 시골에서 데려오는 훌륭한 버릇이 있으셨소. 흔히 그들이 태어나는 것까지 지켜보셨지. 정말 좋은 하인을 얻는 길은 그것뿐이라오. 그리고 그런 하인이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호사거리지. 아닌 게 아니라 라 로슈푸코 공작부인은 계단을 오르는 데 여간 애를 먹지 않았으니,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난 거구여서, 어찌나 컸던지 막상 방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한동안 그이를 어디에 앉혀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셨소. 그러다 프랄랭 부인이 준 그 의자가 눈에 띈 거요. ‘앉으시지요?’ 어머니가 그것을 앞으로 내밀며 말씀하셨소. 그러자 공작부인은 그 의자를 가장자리까지 꽉 채워 앉으셨다오. 그 육중함에도 불구하고 퍽 유쾌한 분이었소. ‘저이는 들어올 때도 여전히 좌중을 압도하는군요.’ 언젠가 우리 벗 하나가 그랬소. ‘나갈 때야말로 좌중을 압도하고말고요.’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요즘 같으면 점잖지 못하다 할 만큼 입담이 걸걸한 분이었소. 라 로슈푸코 부인 자신의 응접실에서조차 사람들은 그 넉넉한 몸집을 두고 면전에 대고 농을 던지기를 겁내지 않았고 (그럴 때면 그이가 늘 맨 먼저 웃었소). ‘한데 혼자 계십니까?’ 언젠가 우리 할머니가 공작부인을 뵈러 갔을 때, 문간에서 그의 마중을 받고는, 방 저쪽 끝에 있던 부인을 미처 보지 못하고 라 로슈푸코 에게 물었소. ‘라 로슈푸코 부인은 안 계신가요? 안 보이는군요.’ ‘아, 이거 반갑기도 하셔라!’ 공작이 대답했는데, 내가 아는 사내들 중 판단력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축이었으나, 익살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오.”

저녁 식사 뒤 할머니와 함께 위층으로 물러났을 때, 나는 할머니에게, 빌파리지 부인에게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 자질들, 곧 재치며 명민함, 신중함, 제 이야기를 삼가는 겸손 같은 것들이 어쩌면 그리 대단한 값어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 자질을 더없이 높은 정도로 지닌 이들이란 고작 몰레나 로메니 같은 사람들이요, 그런 자질이 모자라면 우리 사교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야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샤토브리앙이나 비니, 위고, 발자크가 되지 못할 것은 없으니, 이들은 판단력이라곤 없어 블로크처럼 놀려 먹기 십상인 어리석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로크의 이름이 나오자 할머니는 항의하듯 소리쳤다. 그러고는 빌파리지 부인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사랑에서 우리 개개인의 취향을 이끄는 것은 종(種)의 보존이며, 아이가 더없이 정상적으로 태어나도록 뚱뚱한 남자는 마른 여자를, 그 반대는 그 반대를 좇게 한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듣듯이, 그렇게 어떤 어렴풋한 방식으로, 무질서한 신경과 우수와 고독으로 기우는 병적인 성향에 위협받는 내 행복의 요구가, 할머니로 하여금 균형과 판단의 자질에 가장 높은 자리를 매기게 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비단 빌파리지 부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두당이며 레뮈자 , 나아가 보세르장, 주베르, 세비녜 같은 이들의 정신이 피어나는 것을 지켜본 어떤 사회의 자질이기도 했다. 그것은 보들레르나 포, 베를렌, 랭보를 고통으로, 또 할머니가 제 딸의 자식에게는 바라지 않던 그런 오명으로 몰아넣은 저 정반대의 세련됨보다, 삶에 더 많은 행복과 더 큰 품위를 안겨 주는 부류의 정신이었다. 나는 입맞춤으로 할머니의 말을 끊고, 빌파리지 부인이 썼던 어떤 표현, 곧 스스로 인정하려는 것보다 제 고귀한 가문을 더 대수로이 여기는 여인을 가리키는 듯한 그 표현을 눈치챘느냐고 물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삶에 대한 내 인상들을 할머니에게 아뢰곤 했으니, 누군가에게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바쳐야 마땅한지는 할머니가 일러 주기 전에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마다 나는, 낮 동안 할머니 아닌 그 모든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두고 마음속에 그려 둔 소묘들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갔다. 언젠가 나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없이는 저는 못 살 것 같아요.” “그런 말을 하면 못써.” 할머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우리는 그보다는 마음을 더 굳게 먹어야 한단다, 알겠니. 안 그러면 내가 여행이라도 떠나면 넌 어찌 되겠니? 하지만 넌 아주 의젓하고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리라 믿는다.”

“할머니가 며칠쯤 떠나 계신다면야 의젓하게 견딜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시간을 세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몇 달을 떠나 있게 된다면…” (그런 말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내 가슴은 미어졌다.) “…몇 해를… 몇….”

우리는 둘 다 말이 없었다. 우리는 감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내 고통보다 할머니의 고통이 더 사무치게 아팠다. 그리하여 나는 창가로 걸어가, 애써 또렷한 어조로, 그러나 눈길은 딴 데로 돌린 채 할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얼마나 버릇에 매인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서 처음 며칠은 비참하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이들을 똑같이 사랑하면서도, 저는 그 부재에 익숙해지고, 삶은 잔잔하고 견딜 만하고 즐거워져요. 저는 몇 달이든, 몇 해든 그이들과 떨어져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어, 곧장 창밖을 내다보았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가지러 방을 나갔다. 그러나 이튿날 나는 할머니에게 철학 이야기를 꺼내, 짐짓 아주 무심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내 말에 귀 기울이도록 마음을 쓰며,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에 따르면 유물론의 입지가 무너져 가는 듯하고, 다시금 영혼의 불멸과 영생 속에서의 재회야말로 가장 그럴 법한 일로 여겨진다니 참으로 묘한 노릇이 아니냐고 말했다.

빌파리지 부인은 이제 곧 우리를 그리 자주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미리 일러 주었다. 소뮈르 입학을 준비 중인, 그동안 인근 동시에르에 주둔해 있던 젊은 조카가 몇 주간의 휴가를 그녀와 함께 보내러 오는데,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에게 쏟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함께 마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 그녀는 그 조카의 유별난 명민함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착한 마음씨를 우리에게 자랑하곤 했다. 나는 벌써 그가 나에게 본능적인 호감을 느끼리라고, 내가 그의 가장 절친한 벗이 되리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오기 전, 그의 고모가 할머니에게, 안타깝게도 그가 어떤 끔찍한 여자의 손아귀에 걸려들어 그 여자에게 홀딱 빠진 나머지 그 여자가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 주었을 때,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란 정신 착란과 범죄와 자살로 끝나게 마련이라 믿었기에, 아직 그를 본 적조차 없건만 이미 내 마음속에서 그토록 커진 우리의 우정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생각하며, 그 우정을 위해, 또 그 우정을 기다리는 불행을 위해 눈물지었으니,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방금 들었을 때 그를 위해 우는 것과도 같았다.

찌는 듯이 무덥던 어느 오후, 나는 호텔 식당에 있었는데, 눈부신 햇빛을 가리려고 해가 금빛으로 물들이던 커튼을 쳐서 식당을 어스름 속에 잠겨 두었으나, 그 틈새로는 바다의 번쩍이는 푸른 자락이 언뜻언뜻 들여다보였다. 그때 해변에서 내륙의 큰길로 이어지는 한복판 통로를 따라, 큰 키에 호리호리하고, 탄력 있는 목 위에 머리를 꼿꼿이 세운 한 젊은이가, 무언가 찾는 듯한 눈길로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는데, 그 살결은 희고 머리칼은 금빛이어서 마치 햇살을 죄다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했다. 그는 몸에 착 감기는, 거의 흰빛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었으니, 어떤 사내가 감히 걸치리라고는 나로선 도무지 믿기 어려운 그런 옷이었고, 그 얇디얇음은 식당의 서늘함 못지않게 밖의 그 찬란한 날의 열기와 눈부심을 생생히 일깨웠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 두 눈은, 한쪽에서는 외알 안경이 자꾸만 떨어지곤 했는데, 바다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저마다 흥미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으니, 이 젊은 생루앙브레 후작이 옷차림의 멋으로 이름났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신문이 그가 얼마 전 젊은 위제스 공작의 결투에서 입회인으로 나섰을 때 입었던 그 옷을 앞다투어 묘사했었다. 그 머리칼, 두 눈, 살결, 몸매의 이토록 남다른 품격은, 더 거친 물질의 덩어리 속에 박힌, 하늘빛이 어리어 영롱하게 빛나는 값진 오팔의 결처럼 그를 뭇사람 속에서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어서, 여느 사내들이 사는 것과는 다른 어떤 삶에 응당 걸맞으리라 여겨졌다. 그리하여 빌파리지 부인이 개탄하던 그 연애에 빠지기 전, 사교계의 가장 어여쁜 여인들이 그를 차지하려 다투었을 때, 이를테면 어느 휴양지에서 그가 그 철의 미인에게 구애하며 함께 있노라면, 그것은 그 여인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뭇 시선을 온통 그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 “품위”와, 젊은 “사자”에게 어울리는 그 오만함과, 무엇보다 그 놀라운 미모 때문에, 더러는 그를 여자 같다고까지 여겼으나, 그렇다고 거기에 무슨 흠을 씌우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가 얼마나 사내다운지, 또 얼마나 열렬한 “여자 밝히는 사내”인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바로 빌파리지 부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던 그 조카였다. 나는 그를 알게 되고 여러 주 내내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에, 또 그가 내게 온갖 애정을 쏟으리라는 확신에 기쁨으로 벅찼다. 그는 마치 나비처럼 자꾸만 앞으로 튀어 달아나는 제 외알 안경을 좇기라도 하는 양, 호텔을 빠르게 가로질러 갔다. 그는 해변에서 오는 길이었고, 홀의 유리 정면 아래쪽 절반을 채운 바다는 그에게 하나의 배경이 되어, 그를 전신으로 그려 냈으니, 그것은 마치 어떤 초상화에서 화가가, 당대 삶에 대한 더없이 정확한 관찰을 조금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폴로 경기장이며 골프장, 경마장, 요트의 갑판 같은 걸맞은 배경을 골라 앉힘으로써, 옛 거장들이 풍경 앞에 인물을 내세우던 저 화폭의 현대판을 빚어내는 것과도 같았다. 문 앞에는 쌍두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외알 안경이 햇살 어린 거리의 대기 속에서 다시 깡충거리며 노니는 동안, 빌파리지 부인의 조카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이류 연주자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이던 가장 단순한 대목의 연주에서마저 부려 보이는 그 우아함과 능란함으로, 마부가 건네는 고삐를 받아 쥐고 그 곁의 마부석으로 훌쩍 뛰어올랐으며, 호텔 지배인이 뒤따라 내보낸 편지 한 통을 뜯으면서 말들을 출발시켰다.

그 뒤 며칠 동안 내가 맛본 실망이란 어떠했던가. 밖에서든 호텔 안에서든 그와 마주칠 때마다, 곧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제 무게 중심인 양 이리저리 달아나며 춤추는 외알 안경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팔다리의 움직임을 맞추어 가던 그를 볼 때마다, 나는 그가 우리와 사귈 생각이 조금도 없음이 분명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제 고모의 벗임을 틀림없이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빌파리지 부인이, 또 그에 앞서 노르푸아 가 내게 보여 주었던 살가움을 떠올리며, 나는 어쩌면 그들이 한낱 가짜 귀족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또 귀족 사회를 다스리는 법에는 어떤 은밀한 조항이 있어서, 아마도 여인들과 몇몇 외교관들에게는,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까닭에서, 평민들과의 관계에서 그 뻣뻣함을 벗어던지도록 허락하되, 젊은 후작이라면 반대로 가차 없이 지켜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지성은 그와 정반대되는 것을 일러 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지나던 그 어리석은 시기, 결코 무감한 시기가 아니라 도리어 지극히 풍요로운 그 시기의 특징이란, 우리가 우리 지성에 물어보지 않고, 남들의 더없이 하찮은 속성마저 그때는 그 사람됨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여긴다는 데 있다. 괴물과 신들로 붐비는 세계에서 우리는 좀처럼 평온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 시기에 우리가 저지른 행동 가운데, 훗날 무엇을 치르고서라도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으랴. 정작 우리가 아쉬워해야 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했던 그 자발성을 이제는 더 이상 지니지 못한다는 점이건만. 훗날 우리는 사물을 더 실리적으로, 나머지 세상과 온전히 발맞추어 바라보게 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 것은 오직 젊은 시절뿐이었다.

생루 에게서 내가 짐작한 이 오만함과, 거기 배어 있는 온갖 뿌리 깊은 매몰참은, 그가 우리 곁을 지날 때마다의 그 태도로 확인되었으니, 그 몸은 여전히 꼿꼿이 곧추서 있었고, 머리는 언제나 높이 쳐들려 있었으며, 그 눈길은 무심한, 아니 차라리 냉혹하다 해야 할, 남의 권리에 대한 그 어렴풋한 존중조차 없는 것이어서, 설령 남이 제 고모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존중의 한 예로, 나 자신은 늙은 부인을 가스등 바라보듯 하지는 않는 것을 들 수 있으리라. 이 쌀쌀맞은 태도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가 나를 향한 호의를 알리려고 써 보내리라 내가 상상하던 그 살가운 편지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으니, 그것은 마치 어떤 이가 불멸의 연설로 의회와 군중의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자신을 그려 보다가, 혼자서, 자신을 위해, 소리 내어 그렇게 곱씹은 끝에, 상상 속의 갈채가 잦아들고 나면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는 그저 그런 아무개로 돌아와 있는, 그 몽상가의 초라하고 답답하며 하잘것없는 처지가 그 열광과 동떨어진 것과도 같았다. 빌파리지 부인이, 오만하고 사악한 성정을 드러내는 그 겉모습이 우리에게 남긴 나쁜 인상을 아마도 지우려는 듯, 종손의 그 다함없는 착한 마음씨를 다시금 우리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그녀의 조카딸 중 하나의 아들로, 나보다 조금 손위였다), 나는 세상이, 진실이라곤 아랑곳없이, 실은 그토록 모질고 메마른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오직 제 무리의 빛나는 축들에게만은 여느 예의를 갖추어 대한다는 이유로, 어찌 그리 마음이 따뜻하다고 갖다 붙이는지 새삼 놀라웠다. 빌파리지 부인 자신도, 비록 에둘러서이긴 하나, 그 조카의 성격의 핵심에 대한 내 진단, 이미 확신으로 굳어진 그 진단을 확증해 준 일이 있었으니, 어느 날 내가 두 사람과 마주쳤을 때 길이 어찌나 좁던지 나를 그에게 소개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제게 누군가의 이름이 거듭 일러지는 것을 듣지 못하는 듯 얼굴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인간적 공감의 빛이라곤 조금도 어리지 않은 그 두 눈은, 그 무감함과 그 멍한 눈길 속에, 그것이 없었다면 생명 없는 거울과 구별될 것이 하나도 없었을 그런 과장을 드러내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그 매몰찬 눈을 나에게 붙박고, 마치 내 인사에 답하기 전에 나를 확인해 두려는 듯하더니, 의지의 발동이라기보다는 근육의 반사작용에서 비롯된 듯한 어떤 불쑥한 풀림으로, 자기와 나 사이에 될 수 있는 한 가장 먼 간격을 둔 채, 팔을 한껏 뻗어 그 끝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적어도 결투쯤은 되는 줄 알았는데, 이튿날 그가 내게 자기 명함을 보내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게 오직 문학 이야기만 했고, 오랜 담소 끝에 날마다 나와 몇 시간씩 함께 보내고 싶어 못 견디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 만남에서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드러내 보였을 뿐 아니라, 바로 전날 나에게 건넨 그 인사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호의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누군가 그에게 소개될 때마다 그가 똑같은 절차를 되풀이하는 것을 본 뒤에야, 나는 그것이 그저 그 집안 계통 특유의 한 사교적 관습이며, 그를 나무랄 데 없이 기르는 데 마음을 쏟은 그의 어머니가 그의 팔다리에 배게 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의 고운 옷차림이나 머리칼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생각하지 않듯,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동작들을 해 보였던 것이니, 그것은 내가 처음에 갖다 붙였던 그 도덕적 의미라곤 없는 것, 순전히 몸에 밴 것이어서, 그가 아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그 가족에게 소개해 달라고 대뜸 청하던 저 또 다른 버릇과도 같았다. 그 버릇이 어찌나 몸에 배었던지, 우리의 담소 이튿날 나를 다시 보자 그는 나에게 달려들어 안부도 묻지 않고, 곁에 있던 내 할머니에게 자기를 소개해 달라고, 마치 그 청이 어떤 자기 보존의 본능에서 비롯되기라도 한 양, 이를테면 날아오는 주먹을 막아 내거나, 끓는 물줄기를 피하려 눈을 질끈 감는 것과 같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순간이라도 그 자리에 더 머무는 것이 위험하기라도 한 양, 그토록 열에 들뜬 조급함으로 졸라 댔다.

액막이의 첫 의식이 한번 치러지고 나자, 마치 심술궂은 요정이 제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더없이 매혹적인 온갖 우아함을 두르듯, 나는 이 오만하던 인물이 내가 여태껏 만나 본 가장 다정하고 가장 자상한 젊은이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좋아.” 나는 속으로 뇌었다. “나는 벌써 한 번 그를 잘못 보았지. 신기루에 속았던 거야. 하지만 첫 번째 착각을 바로잡자마자 두 번째 착각에 빠지고 마는구나, 저이는 필경 제 귀족 신분에 넌더리가 나서 그것을 감추려 애쓰는 지체 높은 양반임에 틀림없으니.” 사실인즉 오래지 않아 생루의 그 빼어난 교양과 다정함은, 과연 내게 또 다른 인물을, 그러나 내가 짐작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인물을 보여 주게 된다.

경멸하는 듯한 스포츠맨풍 귀족의 분위기를 풍기던 이 젊은이는, 사실 정신적인 것들 말고는 아무것도 존중하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특히 그의 이모가 그토록 우스꽝스럽게 여기던 문학과 예술의 그 현대적 표현들에만 마음을 쏟았다. 게다가 그는 이모가 ‘사회주의 나발’이라 부르던 것에 흠뻑 젖어 있었고, 자기 계급을 향한 더없이 깊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으며, 니체와 프루동을 파고들며 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좋은 것을 재빨리 알아보고 감탄하는, 책 속에 틀어박혀 순수한 사유에만 관심을 두는 그런 지식인 부류의 하나였다. 실제로 생루에게서 이 지극히 추상적인 성향의 표출은, 나를 나의 익숙한 관심사에서 그토록 멀리 떼어놓는 것이어서, 한편으로는 뭉클하게 다가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적잖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고백하건대,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이미 아득히 먼 세대의 특별한 우아함을 한 몸에 구현한 저 유명한 마르상트 백작에 관한 일화가 풍부한 회고록을 읽으며 온갖 상상에 잠기던 날들에, 마르상트 가 살아온 삶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애가 타던 나로서는, 로베르 드 생루가 제 아버지의 아들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아버지의 삶이었던 저 구식 로맨스로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을 텐데도 그러지 않고, 니체와 프루동을 즐기도록 자신을 길들여 놓았다는 것이 못내 화가 났다. 그의 아버지라면 나의 이런 아쉬움을 함께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그 자신이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사교계 인사로서의 비좁은 테두리를 넘어선 이였다. 그는 아들을 알 시간이 거의 없었으나, 아들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는 정말이지, 집안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라면 아들을 찬탄했으리라 믿는다. 아들이 제 아버지의 자잘한 소일거리를 버리고 준엄한 사색으로 돌아선 것을 기뻐했을 것이며, 지성을 갖춘 대귀족다운 겸손으로 한마디도 내색하지 않은 채, 로베르가 자기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헤아려 보려고 아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남몰래 읽었으리라.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