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여기에는 다소 씁쓸한 대목이 있었다. 지극히 열린 마음을 지닌 마르상트 씨라면 자기와 그토록 다른 아들을 높이 샀을 텐데, 정작 로베르 드 생루는 오직 특정한 형식의 예술과 삶에만 가치가 깃든다고 믿는 부류의 하나였던 탓에, 사냥과 경마로 세월을 다 보내고 바그너에는 하품을 하며 오펜바흐에 열광하던 아버지를 애정 어리면서도 조금은 얕잡아 보는 마음으로 기억했다. 생루는 지적인 가치가 어떤 하나의 미학적 공식을 받아들이는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헤아릴 만큼 영민하지 못했고, 그래서 마르상트 씨의 지성에 대해, 가장 상징주의적인 문학과 가장 복잡한 음악의 대가가 된 부아엘디외나 라비슈의 아들이 제 아버지에게 품었을 법한 것과 꼭 같은 경멸을 품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거의 알지 못했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매력적인 분이었던 모양이야. 그분의 비극은 그분이 살았던 그 개탄스러운 시대였지. 포부르 생제르맹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엘렌」이 판치던 시절을 살아야 했다니, 그것만으로도 어떤 삶이든 망치기에 충분하거든. 어쩌면 그분이 「반지」에 미친 어느 자그마한 가게 주인이었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 하기야 문학을 좋아하셨다고들 하더군. 하지만 그건 결코 증명될 수 없어. 그분에게 문학이란 하나같이 형편없이 버림받은 책들을 뜻했으니까.” 그리고 내 경우로 말하자면, 내가 생루를 다소 진지하다고 여겼다면, 그는 어째서 내가 더 진지하지 못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그 안에 담긴 지성의 무게로만 재고, 그가 하찮다고 깎아내리는 것들 속에서 내가 발견하던 상상력을 향한 마법 같은 부름은 결코 알아채지 못한 채, 그는 자기가 나보다 한없이 못하다고 여기던 내가 그런 것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둘 수 있다는 데에 놀라워했다.
생루는 처음부터 할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 두 사람에게 애써 베푼 끊임없는 친절만으로가 아니라, 그가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친절에도 담아낸 자연스러움으로 그리한 것이다.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아마도 사람의 기교를 통해서 자연의 느낌이 배어들게 해 주기 때문이겠지만, 할머니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던 자질이었다. 정원에서든, 콩브레의 우리 정원이 그러했듯 지나치게 반듯한 화단이 있는 것을 할머니는 싫어했고, 식탁에서든, 무엇으로 만들었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잔뜩 꾸며 놓은 요리를 질색했으며, 피아노 연주에서든, 너무 깐깐하고 너무 공들인 연주를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루빈스타인의 불협화음과 틀린 음을 각별히 아꼈다. 이 자연스러움을 할머니는 생루가 입은 옷에서까지 찾아내며 즐거워했으니, 그 옷은 유연하게 우아하고 뽐내는 구석도 격식을 차린 구석도, 뻣뻣하거나 풀 먹인 데도 없었다. 할머니는 이 부유한 젊은이를 한층 더 높이 평가했는데, 그가 ‘돈 냄새를 풍기지’ 않고 잘난 체하지도 않으면서 호사스럽게 살아가는 그 거리낌 없고 무심한 태도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심지어, 대개 유년기가 지나면 그 시기의 어떤 생리적 특징들과 함께 사라지기 마련인데도 생루가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한 가지 무능, 곧 얼굴에 온갖 감정이 곧바로 드러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그 무능에서마저 이 자연스러움의 매력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그가 바라긴 했으나 기대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것이 겨우 칭찬 한마디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의 안에서 어찌나 빠르고 뜨겁고 걷잡을 수 없이 확 번지는 기쁨으로 터져 나오는지, 도저히 억누르거나 감출 수가 없었다. 환희에 겨운 미소가 거스를 수 없이 그의 얼굴을 사로잡았고, 너무 여린 두 뺨의 살갗은 선연한 홍조가 비쳐 오르게 했으며, 두 눈은 당혹과 기쁨으로 반짝였다. 할머니는 이 순진함과 진솔함의 사랑스러운 표출에 한없이 마음이 움직였는데, 사실 생루에게 있어서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처음 벗이 된 무렵에는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사람을, 그런 이가 숱하게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런 사람에게서는 그 스쳐 가는 홍조의 생리적 진실함이 도덕적 이중성을 조금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 홍조는 흔히 기쁨이 느껴지는 생생함을 드러낼 뿐이어서, 가장 비열한 배신을 저지를 수 있는 천성의 사람들조차 그 홍조 앞에 무장 해제되어 남들 앞에서 그 기쁨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할머니가 생루의 자연스러움을 정말로 흠모한 대목은, 그가 나를 향한 애정을 조금의 에두름도 없이 털어놓는 그 태도에 있었다. 그 애정을 나타내려고 그가 찾아낸 말들은, 할머니 자신도 그보다 더 알맞고 더 진심으로 다정한 말은 떠올릴 수 없었으리라고 내게 말한 그런 말들, 세비녜와 보세르장이 서명했을 법한 말들이었다. 그는 나의 약점들을, 할머니를 미소 짓게 할 만큼 예리하게 알아채고서 놀리기를 서슴지 않았지만, 할머니 자신이 그러했을 법하게 다정히 놀렸고, 동시에 나의 좋은 점들을 따스하게, 제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흔히 그것으로 제 무게를 잡는다고 여기는 그 조심스러움이나 냉담함의 기색이라곤 없이 충동적이고 거리낌 없이 추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사소한 불편도 미리 막아 주는 데서, 날이 추워진 것을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때 내 다리를 덮어 주는 데서, 내가 우울해하거나 몸이 편치 않아 보이면 (내게는 말하지 않고) 저녁에 나와 더 늦게까지 있어 주기로 하는 데서 그런 마음을 드러냈으니, 그 세심한 배려를 할머니는 내 건강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좀 더 단련시키는 규율이 나았을지도 모르는 터라, 지나치다 싶을 만큼으로 여기면서도, 나를 향한 그의 애정의 증거로서는 깊이 감동했다.
우리 사이에서는 그와 내가 영원히 둘도 없는 벗이 되리라는 것이 이내 정해졌고, 그는 ‘우리의 우정’을 말할 때면 마치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어떤 중요하고 기쁜 것을 이야기하듯 했으며, 이윽고 그것을, 정부를 향한 사랑을 빼고는, 자기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라 불렀다. 이런 말들은 나를 다소 거북하게 했고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으니, 그와 함께 있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아마 다른 누구와 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혼자 있을 때라면 맛볼 수 있었던 그런 행복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따금 홀로 있을 때 나는 내 존재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나에게 감미로운 안온함을 안겨 주던 그런 인상들 가운데 하나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있게 되자마자, 벗과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내 마음은 이내 ‘방향을 틀어’, 그 생각을 나 자신이 아니라 듣는 이에게로 돌렸고, 그렇게 바깥으로 향한 생각들은 내게 아무 기쁨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일단 생루와 헤어지고 나면 나는 말의 도움을 빌려, 그와 함께 보낸 그 어수선한 시간들을 그럭저럭 정리해 보았다. 내게 좋은 벗이 있다고, 좋은 벗이란 드문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일렀고, 얻기 힘든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낄 때면, 바로 나에게 자연스러운 기쁨과는 정반대의 것을, 곧 내 안의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를 나 자신에게서 끄집어내어 빛으로 드러내는 기쁨과는 정반대의 것을 맛보았다. 생루와 두세 시간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가 내 말에 감탄을 표하고 나면, 나는 홀로 남겨져 마침내 내 일을 시작할 채비를 갖추지 못한 것에 일종의 자책이나 아쉬움, 혹은 피로를 느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지성이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인정받기를 갈망했다고, 벗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드높은 상(像)을 쌓아 올린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고 여길 수는 없다고. 나는 그 결과로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고 어렵지 않게 스스로를 설득했고, 그 행복을 아직 의식하지 못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것이 결코 내게서 사라지지 않기를 그만큼 더 애타게 바랐다. 우리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남아 있는 ‘좋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다른 무엇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데, 우리 마음이 아직 그것을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개의 사람들보다 우정의 미덕을 더 잘 본보기 삼을 수 있다고 느꼈지만(다른 사람들은 개인적 이익에 매달리나 내게는 그것이 아무 값어치도 없어서, 나는 언제나 그런 이익보다 벗들의 이로움을 앞세우곤 했으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 사이에 그러하듯 나의 천성과 다른 이들의 천성 사이에 놓인 차이들을 늘려 주기는커녕 지워 버리는 그런 감정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고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은 생루에게서 그 자신보다 더 집합적인 인격을, 곧 ‘귀족’의 인격을 가려내고 있었으니, 그것은 마치 깃들어 있는 정령처럼 그의 사지를 움직이고 그의 몸짓과 행동을 부렸다. 그럴 때면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도, 내가 그 조화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풍경을 바라볼 때만큼이나 혼자였다. 그때 그는 내가 사색에 잠긴 관조 속에서 그 속성을 탐구하려 하는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안에서, 로베르가 되지 않으려 애쓰던 바로 그것인 이 선재(先在)하는, 이 영겁의 피조물, 이 귀족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일은 내게 예리한 기쁨을 주었으나, 그것은 지적인 기쁨이지 사교적인 기쁨은 아니었다. 그의 친절에 그토록 우아함을 더해 주던 도덕적·육체적 민첩함에서, 할머니에게 선뜻 마차를 내어 주고 부축해 태우던 그 수월함에서, 내가 추울까 봐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려 제 외투를 내 어깨에 둘러 주던 그 재빠름에서, 나는 오로지 지성만을 자처하던 이 젊은이의 조상으로 대대로 이어져 온 저 위대한 사냥꾼들에게서 물려받은 날렵함만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녔던 재물에 대한 경멸, 그러면서도 그저 벗들을 더 후하게 대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유로 그가 그 재물을 누리는 것과 나란히 그의 안에 남아 있어, 그가 그토록 무심히 제 재산을 벗들의 발치에 뿌리게 하던 그 경멸까지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안에서, 저 대귀족들이 품는,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는 확신 혹은 착각을 느꼈으니, 그 덕분에 그들은 자신이 ‘남들 못지않다’는 것을 보이려는 그 조바심, 남보다 못해 보일까 하는 그 두려움을 생루에게 물려주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평민의 가장 진솔한 다가섬조차 그토록 많은 추함과 그토록 많은 어색함으로 망쳐 놓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이렇게 벗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즐기는 것을, 다시 말해 그 존재의 모든 부분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놀음을, 그것들이 거기에 매여 있으나 정작 그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일반적 관념에 의해 조화롭게 질서 잡힌 것으로 바라보는 것을 스스로 나무랐다. 그렇게 보면 그것은 그가 그토록 높은 값을 매기던 그 자신의 좋은 자질에도, 그 개인적 가치, 곧 지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에도 아무것도 보태 주지 못하는 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관념은 어느 정도 그것들을 낳은 원인이었다. 그가 신사였기에, 그로 하여금 오만하고 허름한 차림의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게 한 그 지적 활동, 그 사회주의적 열망은, 그의 안에서 정작 그 학생들에게는 없는 무언가 참으로 순수하고 사심 없는 것을 함의했다. 스스로를 무지하고 이기적인 계급의 상속자로 여긴 그는, 그들이 자기의 그 귀족 출신을 용서해 주기를 진심으로 애타게 바랐으나, 오히려 그들은 그 출신에 거스를 수 없이 끌려 바로 그 때문에 그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겉으로는 냉담함을, 아니 심지어 무례함을 그에게 내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콩브레의 사회학적 이론에 충실한 나의 부모라면 그가 넌더리를 내며 등을 돌리지 않는 것에 어안이 벙벙했을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서게 되었다. 어느 날 우리가, 생루와 내가 모래밭에 앉아 있는데, 우리가 기대고 있던 천막 안에서 발베크에 들끓는 이스라엘 사람들 무리를 향한 욕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들었다. “한 발짝도 못 떼겠어, 저들과 마주치지 않고서는.” 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원칙적으로 유대 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이 적대적인 건 아니지만, 여기는 너무 넘쳐나. 온통 들리느니, ‘아이 테이, 아프라함, 나 방금 차코프를 봤데이.’ 하는 소리뿐이라니까. 아부키르 거리에 와 있는 줄 알겠어.” 이렇게 이스라엘을 향해 열을 올리던 사내가 마침내 천막에서 나왔다. 우리는 이 반유대주의자를 보려고 눈을 들었다. 다름 아닌 나의 옛 벗 블로크였다. 생루는 이내, 블로크가 우등상을 타 갔던 그 심사위원회 앞에서, 또 그 뒤로 어느 시민 대학 강좌에서 자기들이 이미 만난 적이 있음을 그에게 상기시켜 달라고 내게 청했다.
기껏해야 나는 이따금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로베르에게서 그의 예수회 학교 교육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지적인 벗들 가운데 하나가 사교적 실수를 저지르거나, 생루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누가 알아챘다면 그 벗이 얼굴을 붉혔으리라 여긴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할 때마다,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하는 두려움이 그의 안에 곧바로 자아내던 어색함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마치 잘못한 사람이 자기라는 듯 얼굴을 붉히는 쪽은 로베르였으니, 이를테면 블로크가 호텔로 그를 찾아오겠노라 약속해 놓고는 이렇게 말을 이은 날이 그랬다.
“나는 이런 거대한 여인숙의 그 허울뿐인 화려함 속에서 기다리게 되는 걸 도무지 견딜 수가 없고, 헝가리 악단은 나를 병나게 할 테니, 자네가 ‘라이프트 보이’한테 일러서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 자네한테 곧바로 알리게 해 주게.”
개인적으로 나는 블로크가 호텔로 오기를 딱히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불행히도 발베크에 혼자가 아니라 누이들과 함께 와 있었고, 그 누이들에게는 또 거기 머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친척과 벗이 있었다. 그런데 이 유대인 무리는 유쾌하다기보다 그림처럼 별났다. 이 점에서 발베크는 러시아나 루마니아 같은 나라들과 비슷했으니, 지리책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듯 그런 곳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를테면 파리에서만큼의 존중을 누리지도, 같은 정도의 동화 단계에 이르지도 못했다. 언제나 자기들끼리, 다른 어떤 요소도 섞이지 않은 채 뭉쳐서, 블로크의 사촌과 삼촌들 혹은 그들과 같은 신앙을 지닌 남녀가 카지노로 향할 때면, 부인들은 춤추러, 신사들은 바카라 테이블 쪽으로 갈라져 가면서, 그들은 저희끼리 한결같고 단단한 한 무리를 이루었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해마다 다시 마주치면서도 결코 한마디 말이나 눈짓 하나 나누지 않던 사람들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다. 그 사람들이 캉브르메르가의 명단에 든 이들이든, 재판장을 중심으로 한 작은 무리든, 전문직이나 ‘사업’하는 이들이든, 아니면 그저 파리에서 온 평범한 곡물상들이든 마찬가지였다. 랭스의 조각상들처럼 아름답고 오만하고 냉소적이며 프랑스풍인 그 곡물상들의 딸들은, ‘해변 유행’에 대한 열의가 지나쳐 늘 새우잡이에서 돌아오는 길이거나 탱고를 추러 나가는 길인 듯 보이는 그 버릇없는 말괄량이 떼거리와는 섞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내들로 말하자면, 디너 재킷과 에나멜 구두의 광택에도 불구하고 그 인상이 너무 과장된 탓에, 사람들이 이른바 화가들의 ‘지적 탐구’라 부르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화가들은 복음서나 아라비안 나이트를 그림으로 옮겨야 할 때, 그 장면들이 펼쳐지는 고장을 헤아려서는 성 베드로나 알리바바에게 발베크 도박판에서 가장 판돈이 큰 ‘노름꾼’과 똑같은 이목구비를 부여하는 법이다. 블로크는 누이들을 소개했는데, 그는 더없이 무례하게 그들의 재잘거림을 잠재우면서도, 정작 그들은 저희가 눈멀도록 떠받드는 우상인 이 오라비의 가장 시시한 농담에도 자지러지게 웃어 댔다. 그러니 이 무리에도, 다른 어느 무리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다른 어느 무리보다도 더, 온갖 매력과 장점과 미덕이 그득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겪어 보려면 우선 그 울타리 안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 무리는 인기가 없었고, 스스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무리는 자신의 인기 없음에서 반유대주의의 표지를 보았고, 그에 맞서 단단히 닫아건 밀집 대형으로 당당히 맞섰으나, 정작 그 대형 안으로 파고들려는 생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라이프트’라는 말을 쓴 데 대해 내가 놀랄 까닭이 그만큼 적었던 것은, 며칠 전 블로크가 나에게 왜 발베크에 왔는지를(정작 자기가 거기 있는 것은 더없이 당연하게 여기면서) 묻고는, 그것이 ‘대단한 벗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에서’였느냐고 물었을 때, 이 방문이 베네치아를 보고 싶은 갈망만큼 깊지는 않아도 나의 가장 오래된 갈망 가운데 하나를 이룬 것이라고 그에게 설명하자, 그가 이렇게 대꾸했기 때문이다. “그래, 물론이지, 예쁜 부인네들이랑 얼음 넣은 음료나 홀짝이면서, 겉으로는 존 러스킨 경의 베나이스의 돌을 읽는 척하는 거겠지. 그 러스킨이란 자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인데, 실은 세상에서 둘도 없이 수다스러운 늙은 이발사 같은 작자야.” 그러니까 블로크는 영국에서는 남자란 남자는 죄다 ‘경’이라 불릴 뿐 아니라, 글자 이가 언제나 아이로 발음된다고 여긴 것이 분명했다. 생루로 말하자면, 이 발음의 잘못이 그에게는 그만큼 덜 심각해 보였으니, 그는 그 잘못에서 무엇보다도, 내 새 벗이 정통한 만큼이나 경멸하던 저 이른바 ‘사교계’식 상식의 결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로크가 언젠가 ‘베네치아’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또 러스킨이 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로베르가 자기를 비웃었던 것이라고 되돌아 짐작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로베르는 마치 자신이, 앞서 보았듯 넘치도록 지녔던 그 너그러움에서 모자람이 드러난 것처럼 죄스러워했다. 그래서 블로크가 언젠가 제 잘못을 깨닫는 날 틀림없이 그의 뺨을 물들일 그 홍조를, 로베르는 벌써 미리, 반사적으로 자기 뺨에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블로크가 이 잘못에 자기보다 더 큰 의미를 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블로크는 내가 ‘리프트’라는 말을 발음하는 것을 듣고서 이렇게 끼어들며, 그것이 사실임을 드러냈다.
“아, 자넨 ‘리프트’라고 하는군?” 그러고는 무뚝뚝하고 거만한 어조로, “뭐, 조금도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이는 몸의 반사 작용 같은 말로, 자존심이 강한 모든 사람에게서 한결같이 나타나며, 가장 엄중한 상황에서든 가장 하찮은 상황에서든,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문제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해 보이는지를 또렷이 드러낸다. 때로는 비극적인 말이기도 하니, 우리가 방금, 아직 매달려 있던 마지막 희망을 그에게 어떤 도움을 베풀기를 거절함으로써 앗아 버렸을 때, 조금이라도 자존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입에서 가장 먼저 새어 나오는 (그리고 그때 얼마나 가슴 아픈지) 말이 그것이다. “아, 뭐, 조금도 대수로운 일은 아닐세. 다른 수를 찾아보지.” 그가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그 ‘다른 수’라는 것이 조금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지만, 그것이 흔히 자살일 때가 있다.
이런 것 말고는 블로크는 나에게 더없이 곱살스러운 말들을 건넸다. 그는 분명 나와 더없이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가 드 생루앙브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 귀족 반열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동했기 때문인가? 자네 지금 제대로 속물근성의 발작을 겪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말해 보게, 자넨 속물인가? 내 보기엔 그런데, 안 그래?” 그의 다정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리 점잖지 못한 말로 이른바 ‘배운 데 없음’이라 하는 것이 그의 결점이었고, 따라서 그가 눈감고 넘길 수밖에 없는 결점이었으니, 더구나 그것으로 남들이 언짢아할 수 있으리라고는 그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인간이라는 종에게서,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있는 미덕들이 잦다는 것은, 저마다에게 고유한 결점들이 가지가지라는 것만큼이나 놀랍지 않다. 두말할 것 없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은 양식(良識)이 아니라 인간의 선의다. 세상에서 가장 멀고 가장 황량한 끝자락에서도 우리는 그 선의가 저 홀로 피어나는 것을 보고 경탄하니, 마치 외딴 골짜기에 저 너머 세상의 양귀비들과 똑같은 양귀비 한 송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양귀비들과 닮은 채로, 이따금 제 진홍빛 외투 자락을 흔들어 그 고독을 흩뜨리는 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피어 있듯 말이다. 설령 이 인간의 선의가 사욕에 마비되어 발휘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며, 변덕스러운 이기주의자라도 그 작용을 억누르지만 않으면, 이를테면 그가 소설이나 신문을 읽고 있을 때면, 그 선의는 싹트고 피어나 자라날 것이니, 실생활에서는 냉혹하면서도 허구를 사랑하는 이로서는 약한 이들, 올바른 이들, 박해받는 이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간직해 온 사람의 가슴속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 결점들의 다양함은 우리 미덕들의 닮음 못지않게 두드러진다. 우리 저마다 제 나름의 결점이 있어서, 그를 계속 사랑하려면 우리는 그 결점들을 셈에 넣지 않고 눈감아 버린 채 그 사람 성품의 나머지만을 보아야 할 지경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에게도 우리를 언짢게 하거나 성나게 하는 어떤 결점이 있다. 어떤 이는 보기 드물게 총명하여 무엇이든 드높은 각도에서 바라보고 누구도 험담하는 법이 없으나, 정작 자기가 부쳐 달라 부탁해 놓고 받아 든 더없이 중요한 편지들을 주머니에 넣고는 잊어버리고, 그러고는 아무 변명도 없이 사활이 걸린 약속을 어기고 만다. 시간 따위 도무지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지라 빙그레 웃으면서 말이다. 또 어떤 이는 어찌나 세련되고 상냥하며 처신이 섬세한지, 자네 면전에서는 자네가 듣기 좋을 말밖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네는 느낀다, 그가 입 밖에 내기를 삼가고 제 가슴속 깊이 묻어 두어 거기서 쓰디쓰게 삭히는, 사뭇 다른 속내가 있음을. 게다가 그는 자네를 보는 데서 얻는 기쁨이 어찌나 소중한지, 자네를 홀로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자네가 기진하여 쓰러지도록 붙들어 둘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더 진솔하되 그것을 어찌나 밀어붙이는지, 자네가 몸이 편치 않다는 핑계로 그를 찾아가지 못했노라 둘러댔을 때, 자네가 극장으로 가는 것을 누가 보았고 안색이 좋아 보였다더라, 하는 말을 굳이 자네에게 알려야 직성이 풀린다. 아니면 자네가 자기를 위해 나서 준 일에서 자기가 온전히 덕을 보지는 못했는데, 하기야 그 일은 이미 다른 벗 셋이 나서 주겠노라 했던 터라 자네에게 진 빚이라야 그저 그만하다고 말이다. 같은 처지에서라면 앞서 말한 벗은 자네가 극장에 간 것을 모르는 척했거나, 남들도 자기에게 똑같은 도움을 베풀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척했으리라. 그러나 이 마지막 벗은 무엇보다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 십상인 바로 그것을 누군가에게 되뇌거나 털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며, 제 솔직함에 흐뭇해하며 자네에게 힘주어 말한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야.” 한편 어떤 이들은 지나친 호기심으로 자네를 골나게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어찌나 철저히 호기심이 없는지 자네가 아무리 놀라운 일을 이야기해도 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네 편지가 그들이 아니라 자네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면 답장하는 데 몇 달이 걸리고, 아니면 자네에게 뭔가 청하러 오겠다고 써 놓고서는, 자네가 그들을 놓칠까 봐 감히 집을 나서지도 못하는데 정작 나타나지 않고, 몇 주씩 자네를 애태우게 내버려 둔다. 자기들 편지가 조금도 ‘기대하지’ 않은 답장을 자네에게서 받지 못했으니, 자네가 자기들에게 골이 난 게 틀림없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네가 아니라 제 마음만 헤아려, 기분이 좋고 자네를 보고 싶을 때면 자네가 아무리 급한 일을 손에 쥐고 있어도 한마디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이야기하지만, 날씨에 지치거나 심사가 뒤틀렸다 싶으면 자네는 그들에게서 한마디도 끌어내지 못하고, 그들은 나른하니 굼뜬 몸짓으로 자네의 애씀을 받아넘길 뿐, 자네 말에 외마디 대꾸조차 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 것이, 마치 자네 말을 듣지도 못한 듯하다. 우리 벗들 저마다 결점이 어찌나 뚜렷한지, 그를 계속 사랑하려면 우리는 그 결점들에 대한 위안을 그의 재능이며 착함이며 우리를 향한 애정에 대한 생각에서 찾거나, 아니면 아예 그것들을 셈에서 빼 버려야 하며, 그러려면 우리의 온갖 선의를 다 짜내야 한다. 안타깝게도 벗의 결점을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고집스러운 너그러움은, 그가 그 결점을 고집하는 완고함, 스스로 그것을 보지 못하거나 남들이 보지 못하리라 여기는 데서 나오는 그 완고함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리라 상상하기 때문이다. 남의 비위를 거스를 위험은 무엇이 남의 눈에 띄고 무엇이 띄지 않는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데서 주로 비롯되므로, 우리는 적어도 신중을 위해서라도 결코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남들의 생각이 결코 우리 생각과 일치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수수하나 안으로는 숨은 보물과 고문실과 해골로 가득한 집을 찾아갔을 때만큼이나, 우리가 남들의 참된 삶을, 겉보기 세계 뒤에 있는 실재를 알게 될 때 그토록 많은 놀라움을 마주친다면, 남들이 우리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에서,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준 온갖 말의 도움으로 스스로에 대해 지어낸 상(像) 대신, 그들이 우리와 우리 삶에 대해 제 마음속에 품어 온 전혀 다른 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에도 그에 못지않게 놀란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할 때면 언제나, 겉으로 정중하게 위선적인 찬동과 더불어 들어 주던 우리의 악의 없고 신중한 말이, 그 뒤에 더없이 격앙되거나 더없이 비웃음 섞인, 어느 쪽이든 하나같이 가장 못마땅한 평을 낳았으리라 확신해도 좋다. 우리가 무릅쓰는 가장 작은 위험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품은 생각과 우리가 쓰는 말 사이의 어긋남으로 남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인데, 그 어긋남은 대개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곡조를 흥얼거리고 싶어질 때면 제 웅얼거림의 어눌함을 요란한 흉내와 감탄 어린 표정으로 메우려 드는 저 자칭 음악 애호가들의 놀음만큼이나, 그 표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소리로는 도무지 정당화되지 않을 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와 제 결점을 늘어놓는 이 나쁜 버릇에는, 같은 것의 한 부분으로서, 제 것과 꼭 닮은 결점을 남에게서 들추어 규탄하는 저 버릇이 더해진다. 사람들이 언제나 입에 올리는 것은 바로 그런 결점들이니, 그것이 마치 에둘러 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기라도 한 듯, 고백의 즐거움에 사면의 즐거움까지 더해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늘 자기에게 고유한 것에 이끌리는 우리의 주의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남에게서 그것을 알아채는 듯하다. 어떤 근시는 다른 근시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눈도 제대로 못 뜨잖아!” 폐병 환자는 더없이 튼튼한 사람의 폐가 성한지를 의심하고, 씻지 않는 사람은 남들이 목욕하지 않는 것만 이야기하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남들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우기고, 오쟁이 진 남자는 어디서나 오쟁이 진 남자를 보며, 바람난 여자는 바람난 여자를, 속물은 속물을 본다. 그런가 하면 온갖 악덕은 온갖 직업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지식을 요구하고 길러 내는데, 우리는 그 지식을 기꺼이 뽐낸다. 성도착자는 성도착자를 알아보고 들추어내며,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재단사는 자네에게 말을 붙이기도 전에 벌써 자네 저고리 옷감을 두고 판정을 내리니 손가락이 그것을 만져 보고 싶어 근질거리고, 몇 마디 나눈 뒤에 자네가 치과 의사에게 자기를 정말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자네 이 가운데 몇 개가 때워야 할지를 일러 줄 것이다. 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이 없고, 정작 그의 이를 눈여겨본 자네에게는 그보다 더 어이없어 보이는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남을 눈멀었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할 때뿐이 아니다. 우리는 남이 아예 눈먼 것처럼 군다. 우리 저마다에게는 남들에게서 제 결점을 감춰 주거나 감춰 주겠노라 약속하는 특별한 신이 하나씩 붙어 있어, 마치 씻지 않는 사람에게는 제 귓속에 낀 때 자국과 겨드랑이에서 풍기는 땀내에 그 눈과 콧구멍을 막아 주고,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할 세상에 그 두 가지를 아무 탈 없이 지니고 다닐 수 있노라 장담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인조 진주를 걸치거나 그것을 선물하는 이들은, 남들이 그것을 진짜로 알아주리라 여긴다. 블로크는 배운 데 없고 신경질적이고 속물인 데다, 대수롭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던지라, 바닷속 밑바닥에서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압력을 견뎌야 했으니, 그 압력은 겉면의 기독교도들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켜켜이 낀, 제 것보다 위에 있는 온갖 유대인 계층에서, 그 하나하나가 바로 아래에 있는 층을 제 경멸로 짓누르며 그에게 가해지는 것이었다. 유대인 집안에서 유대인 집안으로 자신을 끌어올려 바깥 공기 속으로 길을 뚫어 나가려면 블로크에게는 수천 년이 걸렸으리라. 다른 방향에서 활로를 찾는 편이 더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