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로베르와 함께 리브벨에서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갔는데, 할머니는 그런 날 저녁이면 나가기 전에 반드시 한 시간쯤 침대에 누워 쉬라고 고집했으니, 발베크의 의사도 이내 그 휴식을 다른 저녁에도 늘리라고 일렀다.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갈 때 굳이 ‘산책로’를 벗어나 현관으로, 다시 말해 뒤쪽으로 해서 호텔에 들어설 필요는 없었다. 콩브레에서 토요일이면 여느 때보다 한 시간 일찍 점심을 먹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시각의 조정 덕분에, 이제 한여름이 무르익어 날이 어찌나 길어졌던지, 그랑 호텔에서 저녁 식탁을 차릴 무렵에도 마치 다과 시간밖에 안 된 듯 해가 아직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래서 커다란 미닫이창들은 바닥까지 열어 두었다. 나는 나지막한 나무 문턱 하나만 넘으면 식당 안에 들어섰고, 그곳을 가로질러 곧장 엘리베이터로 갔다.
사무실 앞을 지나며 나는 지배인에게 미소를 건넸고, 아무런 역겨움의 몸서리도 없이 그의 얼굴에서 나도 하나 거두어들였다. 발베크에 온 이래로 내가 그 얼굴을 두루 뜯어본 덕에, 그것은 마치 박물 표본을 만들 듯 조금씩 물이 배어들며 달라져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내게 익숙해져, 대수롭지는 않으나 그래도 알아들을 만한 의미를 띠게 되었으니, 읽을 수 있는 글자 같았고, 첫날 그의 얼굴이 내게 내밀었던 그 괴상하고 견딜 수 없는 문자들과는 어느 모로도 더는 닮지 않게 되었다. 그날 나는 내 앞에서 이제는 잊힌, 혹 떠올린다 한들 알아볼 수 없는, 이 별것 아니고 예의 바른 인물과 좀처럼 하나로 겹칠 수 없는 한 인물을 보았던 것인데, 그 인물이란 실은 이쪽의 흉하고 성급한 밑그림, 한낱 희화에 지나지 않았다. 도착하던 날 저녁의 수줍음도 서글픔도 없이 나는 안내원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그는 이제 내가 그의 곁에서, 오르는 기둥을 따라 위로 밀려 올라가는 움직이는 흉곽 같은 엘리베이터에 실려 오르는 동안 잠자코 서 있지 않고 이렇게 되뇌었다.
“이젠 한 달 전만큼 손님이 없습니다요. 이제들 떠나기 시작하니까요. 해가 점점 짧아지고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무슨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곧 더 따뜻한 해안 어딘가에 일자리가 정해져 있던 터라, 우리 모두가 떠나 주어 호텔이 문을 닫고 자기가 새 자리에 ‘재입대’하기 전에 며칠 짬을 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입대’와 ‘새’ 자리는 서로 어긋나는 말이 아니었으니, 이 엘리베이터 소년에게 ‘재입대하다’란 그저 ‘입대하다’라는 동사의 예사로운 꼴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이라고는 그가 ‘자리’라는 말을 굳이 쓴 것뿐이었는데, 그가 우리말에서 종살이의 지배가 남긴 온갖 자취를 지우려 드는 그 현대 무산계급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뒤 그는 자기가 곧 ‘재입대’할 그 ‘근무처’에서는 더 맵시 있는 ‘제복’과 더 나은 ‘봉급’을 받게 될 거라고 일러 주었으니, 그에게는 ‘하인 옷’이니 ‘삯’이니 하는 말이 케케묵고 상스럽게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모순으로, 어휘는 어찌 되었든 우리 ‘주인’들 사이에서 불평등이라는 관념보다 오래 살아남았기에, 나는 늘 이 엘리베이터 소년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곤 했다. 이를테면 내 유일한 관심사는 할머니가 호텔 안에 계신지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물음을 앞질러 엘리베이터 소년이 내게 말하곤 했다. “그 부인께서 방금 손님 방에서 나가셨습니다요.” 나는 번번이 속아 넘어가, 그가 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아니요, 그 부인 말입니다. 손님네 고용인인 것 같던데요.” 지난날 중산층의 옛말에서는, 마땅히 없애 버려야 할 그 말투에서는, 부엌데기를 고용인이라 부르지 않았기에, 나는 한순간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 사람이 잘못 안 게 틀림없어. 우리는 공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고용인이라곤 없으니까.” 문득 나는 ‘고용인’이라는 호칭이, 급사들 사이에서 콧수염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인들의 자존심을 달래려고 주는 위안임을 떠올리고는, 방금 나간 이 부인이 프랑수아즈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아마도 커피 끓이는 여자를 보러 갔거나, 벨기에 부인의 어린 하녀가 바느질하는 것을 구경하러 갔으리라) 깨달았다. 그렇지만 이런 위안조차 엘리베이터 소년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으니, 그는 제 계급을 딱하게 여기며 아주 자연스럽게 ‘노동자’라느니 ‘소인’이라느니 하는 말을, 라신이 ‘가난한 자들’을 이야기할 때 쓰는 것과 똑같은 단수형으로 쓰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는, 첫날 저녁의 내 열성과 수줍음도 이제는 지난 일이 되었기에, 나는 더는 엘리베이터 소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제는 그가 그 자리에 서서, 장난감처럼 속이 텅 비어 우리 둘레로 층층이 복도의 갈래들을 뻗치고 있는 호텔 안을 헤쳐 나가는 그 짧은 여정 동안, 아무런 대꾸도 받지 못했다. 그 복도 깊은 곳에서 빛은 부드러운 우단처럼 되어 제 빛깔을 잃고, 이어진 문들과 급사용 층계의 계단들을 흐릿하게 지워, 그것을 마치 렘브란트가 여기저기서 창턱이나 우물가를 도드라지게 그려 내는, 실체 없고 황혼처럼 신비로운 그 호박빛 안개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층계참마다 양탄자에 반사된 금빛이 지는 해와 화장실 창을 알려 주었다.
나는 방금 본 처녀들이 발베크에 사는지, 그들이 대체 누구일지 자문했다. 우리의 욕망이 이렇게 나머지에서 골라낸 인류의 작은 부족 하나에 쏠릴 때면, 그 부족과 이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감동의, 그리고 이어서 사색의 샘이 된다. 나는 ‘산책로’에서 한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저 아이는 어린 시모네 양의 친구예요.” 마치 “저 사람은 젊은 라로슈푸코와 떨어질 수 없는 동무지요.” 하고 말하기라도 하듯, 속사정을 잘 안다는 그 잘난 체하는 투로 말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들려준 상대의 얼굴에서, ‘어린 시모네의 친구’인 그 특별한 이를 좀 더 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알아챘다. 분명 세상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 특권이었다. 귀족성이란 상대적인 상태이니 말이다. 그리고 값싼 자그마한 구석들이 얼마든지 있어, 그곳에서는 실내장식업자의 아들이 유행의 심판자가 되어, 웨일스 공 못지않게 한 궁정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여러 번, 그 이름 시모네가 바닷가 그곳에서 내 귀에 처음 어떻게 울렸는지 떠올려 보려 했다. 그 형태로 보나, 그 뜻으로 보나, 곧 그것이 이런저런 사람을,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를 가리킨다는 점으로 보나, 나는 미처 분간해 내지 못했기에, 그것은 아직 아주 어렴풋했다. 실로 그것은 그 아련함을, 그 새로움을 머금고 있었으니, 그것은 훗날 우리가 그토록 뭉클하게 여기게 되는 것으로, 그 낱말의 글자들이 우리가 그것을 끊임없이 생각함으로써 순간순간 우리 가슴에 더 깊이 새겨질 때, 그 낱말은 (하기야 ‘어린 시모네’의 이름이 내게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야 했지만) 잠에서 깨어날 때든 혼절에서 되살아날 때든, 지금이 몇 시인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하는 생각보다도 먼저, 거의 ‘나’라는 낱말보다도 먼저, 우리 입술에 떠오르는 첫 번째의 또렷한 소리가 되는 것이니, 마치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이 우리 자신보다도 더 ‘우리’이기라도 한 듯, 그리고 잠깐의 무의식 뒤에 가장 먼저 녹아 사라지는 국면이 우리가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 있던 그 국면이기라도 한 듯 말이다. 나는 왜 처음부터 시모네라는 이름이 그 처녀 무리 가운데 하나의 이름임에 틀림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순간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시모네 집안과 알고 지낼 수 있을지, 게다가 그들이 자기들보다 윗길로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 (그 처녀들이 그저 흔해 빠진 어린 ‘건방진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일이었다) 알고 지내, 그들이 나를 업신여기는 생각을 품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자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업신여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업신여김을 이겨 내지 못하는 한, 완전한 앎을 가질 수도, 그 사람을 온전히 빨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와 그토록 다른 여자들에 대한 관념이 우리 감각 속으로 파고들 때면,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다른 관념들의 경합이 그것을 없애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이방의 것들을 우리 자신과 어우러질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어 놓기 전에는 쉴 줄을 모르는데, 이 점에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육체와 똑같은 종류의 반응과 활동을 지녔으니, 육체는 어떤 이물질이 제 혈관에 스며드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즉시 그것을 소화하고 동화하려 애쓴다. 그러니 어린 시모네는 그들 가운데 가장 예쁜 처녀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내가 느끼기에 언젠가 내 정부가 될 수도 있을 그 처녀 말이니, 그도 그럴 것이 그녀야말로 두세 번 고개를 반쯤 돌려 내 붙박인 응시를 알아챈 듯 보인 유일한 처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엘리베이터 소년에게 발베크에 시모네라는 사람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는 인정하기 싫었던 그는,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어 본 것 같다고 대답했다. 맨 위 층계참에 다다르자 나는 그에게 가장 최근의 투숙객 명부를 내 방으로 올려 보내라고 일렀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으나, 내 방으로 가는 대신 복도를 따라 좀 더 멀리 걸어갔다. 내가 오기 전에, 그 층을 맡은 하인이 바람이라면 질색을 하면서도 끝쪽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데, 그 창은 바다 쪽이 아니라 안쪽의 언덕과 골짜기를 마주하고 있었으나 결코 그것들을 내다보게 해 주지는 않았으니, 그 창유리가 뿌연 흐림유리로 되어 있어 대개는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춤’을 했는데, 그것이 이번만은 드러내 보이는 그 풍경에 경배를 드릴 만큼의 시간이었다. 호텔 뒤편이 기대선 언덕 너머로 펼쳐진, 외딴집 한 채밖에 담기지 않은 풍경이었으나, 그 집이 중경에 자리 잡은 원근과 내가 그것을 바라본 저녁 빛이, 그 덩어리는 고스란히 지키면서도 거기에 어떤 조각 같은 아름다움과 우단 같은 바탕을 입혀, 마치 금과 에나멜로 빚어 성물함으로 쓰이며 드물고 엄숙한 날에만 신도들의 경배를 위해 내보이는 그 자그마한 건축물들, 조그마한 신전이나 예배당 가운데 하나 같았다. 그러나 이 경배의 순간은 이미 너무 오래 끌었으니, 한 손에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성당지기의 챙 없는 모자에 손을 대어, 다만 맑고 서늘한 저녁 공기 탓에 벗지는 않은 채 내게 인사한 그 하인이, 다가와 그 창의 두 짝을, 마치 성물함의 문짝인 양 맞닫아, 그 조그마한 건물을, 그 반짝이는 성물을 내 흠모하는 눈길에서 가려 버렸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철이 깊어 감에 따라 어김없이, 창 속에서 내가 마주하는 그림은 바뀌어 갔다. 처음에는 훤한 대낮이었고, 날씨가 궂을 때에만 어두웠다. 그러다가, 제 둥근 물결의 굽이로 불룩해진 그 푸르스름한 유리 속에서, 바다는 창의 쇠살 사이에 마치 납테 안에 끼운 색유리 조각처럼 박혀, 만의 깊은 바위 가장자리를 온통 뒤덮으며 깃털 하나나 보드라운 가슴털 하나의 섬세함으로, 피사넬로의 붓끝으로 그려 낸 듯한, 미동도 없는 물보라의 자그마한 깃 돋친 삼각형들을 흩뜨려 놓았고, 그것들은 갈레의 유리에서 내려앉은 눈을 그려 내는 데 쓰이는 그 희고 변함없는 크림빛 에나멜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낮이 짧아졌고, 내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이면 보랏빛 하늘에는 태양의 뻣뻣하고 기하학적이며 이동하는 눈부신 형상이(무슨 기적의 표징이나 신비로운 현현의 재현처럼) 찍혀 있는 듯했으니, 성화(聖畫)가 높은 제단 위로 기울듯 태양은 지평선의 돌쩌귀에서 바다 위로 기울어 있었고, 한편 벽을 따라 늘어선 낮은 마호가니 책장의 유리문에 비친 서쪽 하늘의 갖가지 부분은, 내가 마음속에서 그것들이 떼어져 나온 저 경이로운 그림으로 되돌려놓곤 하던 터라, 어느 옛 거장이 오래전 어느 신도회를 위해 성궤 위에 그린 여러 장면들, 지금은 미술관 전시실 벽에 나란히 걸려 있어 관람객의 상상만이 그것들을 제단 뒤 장식 밑단(段)의 제자리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그런 장면들 같았다. 몇 주 뒤, 내가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는 해가 이미 져 있었다. 콩브레에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며 저녁 전에 부엌으로 내려갈 일을 고대하던 무렵 십자가상 뒤로 보곤 하던 그 노을처럼, 고기 위에 덮인 애스픽 젤리 층처럼 촘촘하고 또렷한 붉은 하늘의 띠가 바다 위에 걸렸고, 조금 뒤에는 이미 숭어처럼 차갑고 푸른 바다 위로, 곧 리브벨에서 주문하게 될 연어와 똑같은 분홍빛 하늘이 펼쳐져,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 옷을 차려입는 행위에서 내가 얻게 될 즐거움을 되살려냈다. 바다 위 물가 아주 가까이에서는, 서로 더 넓고 넓은 간격을 두고 잇달아, 역청처럼 새까맣지만 마노처럼 윤이 나고 단단한, 눈에 보일 만큼 무게가 실린 수증기들이 피어오르려 애쓰고 있었으니, 그중 가장 높은 것들은 뒤틀린 줄기 끝에 얹혀 여태 저를 떠받쳐온 무더기의 무게중심을 넘어서서, 이미 하늘 높이의 절반에 이른 이 우뚝한 구조물을 폐허처럼 무너뜨려 바다로 곤두박질치게 할 듯 보였다. 밤길 나그네처럼 멀어져 가는 배 한 척을 바라보노라니, 기차 안에서 잠의 의무와 침실의 감금에서 풀려난 듯 느꼈던 것과 같은 인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있는 방에서 내가 스스로 갇힌 몸이라 느꼈다는 것은 아니다. 한 시간만 지나면 방을 나서 마차에 오를 터였으니까.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마치, 내가 아주 가까이 볼 수 있던, 밤이 오면 그림자 같고 고요하나 잠들지 않는 백조들처럼 어둠 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나가는 광경이 기이하게 느껴지던 저 증기선들 가운데 하나의 침상에 누워 있기라도 한 듯, 나는 사방에서 바다 그림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흔히 정말로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 채색된 넓이 아래에 해변의 쓸쓸한 황량함이, 내가 발베크에 도착했을 때 그토록 불안하게 그 숨결을 느꼈던 저 안절부절못하는 저녁 바람이 지나다니는 그 황량함이 파여 있음을 잊고 있었다. 게다가 방 안에서도 나는 지나가는 것을 본 소녀들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정말로 깊은 아름다움의 인상이 맺힐 만큼 차분하거나 초연한 마음 상태가 더는 아니었다. 리브벨의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는 내 기분을 한층 더 들뜨게 했고, 그런 순간이면 내 마음은, 환하게 불 밝힌 식당에서 나를 뜯어볼 여인들의 눈에 되도록 마음에 들게 보이려고 치장할 이 몸뚱이의 표면에만 머물러, 사물의 빛깔 뒤에 어떤 깊이도 놓지 못했다. 그리고 만약 내 창 아래에서 바다제비와 제비들의 지칠 줄 모르는 부드러운 비상이, 마치 물을 뿜는 분수처럼, 살아 있는 불꽃놀이처럼 솟아오르며, 치솟는 로켓들 사이의 간격을 길게 수평으로 뻗은 물거품 자국의 움직이지 않는 하얀 선들로 이어주지 않았더라면, 눈앞의 장면들을 현실과 맞닿게 해준 이 자연스럽고 지역적인 현상의 매혹적인 기적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것들이 그저 날마다 새로 골라낸 그림들의 한 선집(選集), 마침 내가 있게 된 장소에 아주 제멋대로 걸려 있을 뿐 그 장소와 아무런 필연적 연관도 없는 그림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쉽게 믿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때는 일본 채색 판화의 전시였다. 달처럼 붉고 둥근 말끔한 원반 같은 태양 옆으로, 노란 구름 하나가 호수처럼 보였고 그 호숫가의 나무들인 양 검은 칼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내 첫 물감통 이후로 다시는 본 적 없던 여린 분홍빛 띠 하나가 강물로 부풀어 올랐고, 그 양쪽 기슭에는 누군가 밀어 물에 띄워주기를 기다리는 듯 배들이 바싹 마른 채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사교 모임 사이에 화랑을 서둘러 지나가는 애호가나 여인의 경멸스럽고 지루하고 경박한 눈길로, 나는 속으로 말하곤 했다. "묘한 노을이군. 여느 것과는 다르지만, 결국 이만큼 고운, 이만큼 볼만한 것들을 나는 전에도 보았지." 배 한 척이 저와 빛깔이 어찌나 똑같은지 지평선에 흡수되고 녹아들어(이번에는 인상파 전시였다) 마치 같은 물질로 되어 있는 듯 보이다가, 누군가 가위로 뱃머리와 삭구(索具)를 단번에 오려내어 하늘의 아련한 푸른빛에서 가느다란 세공(細工)으로 여며 놓기라도 한 듯 나타나던 저녁이면, 나는 더 큰 즐거움을 느꼈다. 이따금 바다는 내 창을 거의 다 채웠으니, 꼭대기에만 바다와 똑같은 푸른빛의 선 하나로 가장자리가 그어진 하늘의 띠가 바다를 넓히고 늘여놓을 때면, 나는 그 전부가 여전히 바다이고 빛깔의 변화란 오직 어떤 빛과 그늘의 효과 탓이라 여겼다. 또 어느 날은 바다가 창의 아래쪽에만 그려져 있었고, 나머지는 온통 수평의 띠를 이루며 서로 겹겹이 들어찬 무수한 구름으로 채워져, 그 유리창은 무슨 특별한 목적에서인지 화가의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구름 습작'을 내놓으려는 듯했다. 한편 여러 책장의 유리문은 비슷한 구름을 보이되 지평선의 다른 부분에서 빛에 따라 다르게 물들어, 우리 동시대인 몇몇이 그토록 좋아하는 것, 곧 언제나 다른 시각에 관찰되나 이제 예술의 부동성 속에서 한 방에 다 함께 파스텔로 그려져 유리 밑에 끼워진 채 볼 수 있는, 하나의 똑같은 효과의 반복이라 할 만한 것을 내놓는 듯했다. 그리고 이따금 한결같이 잿빛인 하늘과 바다에 더없이 섬세하게 장밋빛 한 점이 더해지면, 창가 발치에서 잠든 작은 나비 한 마리가 그 날개로, 휘슬러풍의 이 '회색과 분홍의 조화' 한 귀퉁이에 첼시 거장의 즐겨 쓰는 서명을 붙이고 있는 듯했다. 분홍빛이 사라졌다. 이제 더 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잠시 일어나, 다시 눕기 전에 안쪽 커튼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침대에서 그 위로, 여전히 남아 조금씩 더 희미하고 가늘어져 가는 빛줄기를 볼 수 있었으나, 여느 때 같으면 내가 식탁에 앉아 있을 그 시각을 커튼 위에서 그렇게 스러지게 두면서도 아무런 슬픔도, 그것이 지나감에 대한 아무런 아쉬움도 없었으니, 나는 이 날이 여느 날과는 다른 부류의, 밤이 몇 분만 끊어놓는 저 북극의 낮처럼 더 긴 날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황혼의 번데기에서 눈부신 변신을 거쳐 리브벨 식당의 현란한 불빛이 막 나오려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때가 됐다."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뻗었다가 일어나 옷차림을 마쳤다. 그리고 온갖 물질적 짐을 벗은 이 한가로운 순간들에서 나는 매력을 느꼈으니, 아래층에서 다른 이들이 저녁을 드는 동안 나는 이 하루의 마지막 한 시간 동안 무위(無爲) 속에 쌓아둔 힘을, 오직 씻은 몸을 말리고, 디너 재킷을 걸치고, 넥타이를 매고, 지난번 리브벨에서 나를 지켜보는 듯했고 어쩌면 내가 따라오기를 바라 잠깐 자리를 떴을지도 모를, 눈여겨본 어떤 여인을 다시 볼 기대에 이미 좌우되던 그 모든 몸짓을 하는 데에만 쓰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매력으로 나 자신을 기쁘게 채워, 온전하고 기민하고 선뜻한 나를, 근심 없이 자유로운 새 삶에 통째로 내맡기려 했으니, 그 삶에서 나는 내 망설임을 생루의 차분한 힘에 기대고, 살아 있는 자연의 갖가지 종(種)과 각 고장의 산물 가운데, 내 벗이 곧 주문할 낯선 요리를 이루며 내 식욕이나 상상을 돋우었을 법한 것들을 고르곤 했다. 그러다 철이 끝날 무렵이면, 더는 '바닷가 쪽' 산책로에서 식당을 거쳐 실내로 들어갈 수 없는 날들이 왔다. 식당 창문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았으니, 밖은 이제 밤이었고, 닿을 수 없는 눈부신 불빛에 이끌린 가난한 이들과 호기심 많은 한량들의 무리가, 북풍에 얼어붙은 채 검은 송이를 이루며, 저 웅웅거리는 유리 벌집의 빛나는 미끄럼 벽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최근 투숙객 명단을 손수 들고 위층으로 올라온 에메였다.
에메는 드레퓌스가 천번만번 유죄라는 말을 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했다. "다 밝혀질 겁니다." 그가 장담했다. "올해는 아니어도 내년에는요. 참모본부와 아주 가까운 어느 신사분이 저한테 일러줬죠. 제가 그분께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일을 죄다 한꺼번에 밝히기로 하지는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담배를 내려놓으셨죠." 에메는 나를 위해 그 장면을 재연하며, 자기에게 일러준 이가 그랬던 대로 고개와 집게손가락을 내저었으니, 마치 '너무 기대해선 안 됩니다!'라고 말하려는 듯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올해는 아니오, 에메.' 그분이 제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하신 말씀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오. 하지만 내년 부활절이면, 그렇소!' 하고요." 그러고서 에메는 내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그분이 말씀하신 그대로 전해드리는 겁니다." 지체 높은 분의 이런 친근한 처사에 우쭐해서였는지, 아니면 내가 사정을 온전히 알고서 그 논거의 값어치와 우리가 희망을 걸 근거를 더 잘 헤아리게 하려는 것이었는지.
명단 첫 장에서 '시모네 일가'라는 글자를 언뜻 보았을 때 가슴이 가볍게 두근거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안에는 유년기로 거슬러 오르는 오래된 꿈같은 기억들이 쌓여 있었고, 그 안에서 온갖 다정함이(내 마음속에 있던 다정함이되, 내 마음이 그것을 느낄 때는 다른 무엇과도 구별되지 않던 다정함이) 나와 되도록 다른 어떤 사람을 통해 내게 실려 왔다. 이 사람을 나는 다시 한번 빚어냈으니, 그러기 위해 시모네라는 이름과, 그리스 예술이나 조토에 어울릴 발랄한 행렬을 이루며 해변에서 제 몸을 뽐내던 저 젊은 육체들 사이에 감돌던 조화의 기억을 이용했다. 나는 그 소녀들 가운데 누가 시모네 양인지, 아니 정말로 그들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있기나 한지 알지 못했으나, 내가 시모네 양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생루의 도움으로 그녀를 알아보려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 조건으로만 휴가 연장을 얻은 터라 날마다 동시에르로 복귀 신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군무(軍務)를 저버리게 하는 데에는, 나에 대한 그의 우정보다도 오히려, 내가 스스로 그토록 자주 느껴온 저 인간 박물학자로서의 호기심, 곧 언급된 사람을 본 적조차 없이 그저 어느 과일가게에 예쁜 계산대 아가씨가 있다는 말을 듣기만 해도 새로운 종류의 여성미를 알아보고 싶어지던 그런 호기심에 기댈 수 있으리라 나는 여겼다. 그러나 내 소녀들의 무리 이야기를 그에게 함으로써 생루의 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리라 바란 것은 잘못이었다. 그 호기심은 그가 정부(情婦)로 둔 저 여배우를 향한 사랑에 마비되어 있었고 오래도록 그러할 터였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가볍게 그를 흔드는 것을 느꼈더라도 그는 그것을 억눌렀을 텐데, 자기 자신의 정절에 정부의 정절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한 거의 미신에 가까운 믿음에서였다. 그리하여 내 소녀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아무런 약속도 그에게서 받지 못한 채 우리는 리브벨로 저녁을 먹으러 떠났다.
처음 그곳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막 진 참이었으나 아직 밝았다. 식당 바깥 정원에는 등불이 아직 켜지지 않았고, 한낮의 열기가 내려앉아 고여 있었으니, 마치 화병 속에서 공기의 투명하고 어스레한 젤리가 어찌나 걸쭉해 보이던지, 어스름한 벽에 매여 그 벽을 분홍빛 실핏줄로 그어놓은 키 큰 장미나무 한 그루가 마노(瑪瑙) 속에서 볼 수 있는 나무 모양 결정처럼 보였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릴 무렵이면 어느새 밤이 내려 있곤 했고, 저녁에 비가 와서 날이 개기를 바라며 마차 부르기를 미루었을 때는 발베크를 떠나기도 전에 이미 밤이 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날에도 나는 아무런 슬픔 없이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것이 내 계획의 포기를, 침실에의 감금을 뜻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었으니, 집시 악단의 음악 소리에 맞춰 우리가 들어설 식당의 커다란 홀에서, 무수한 등불이 녹은 금의 넓은 인두를 어둠과 냉기에 갖다 대어 그것들을 손쉽게 이겨내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빗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지붕 덮인 마차에 생루를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뛰어올랐다. 얼마 전부터 베르고트의 말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무엇보다도 정신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태어났다고 그가 단언했을 때의 그 말이, 내가 훗날 이룰 수 있을 것에 관하여, 비평이든 소설이든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날마다 새로 느끼는 권태로 무너지곤 하던 희망을 내게 되돌려주었다. '결국,'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저자가 글을 쓰며 느낀 즐거움이 한 페이지의 문학적 가치를 재는 어김없는 잣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 그 가치에 흔히 덧붙는 것일 뿐, 그것이 없다 해서 가치를 해칠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걸작들 가운데 몇몇은 하품을 하며 쓰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내 건강이 나아지는 대로 나도 일할 수 있고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되리라 일러주어 내 의심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리고 우리 의사가 내 건강 상태가 나를 노출시킬지도 모를 중대한 위험을 미리 일러두는 것이 신중하리라 여겨, 어떤 사고도 피하기 위해 내가 취해야 할 위생상의 온갖 주의를 낱낱이 일러준 터라, 나는 내 모든 즐거움을, 그것들보다 무한히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하나의 목표, 곧 어쩌면 내 안에 품고 있을 작품을 낳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해진다는 목표에 종속시켰다. 발베크에 온 이래로 나는 나 자신에게 세심하고 한결같은 통제를 가해왔다. 그곳에서라면 다음 날 지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밤잠을 앗아갈 커피 한 잔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브벨에 다다르자마자, 새로운 즐거움의 흥분과, 우리를 지혜로 이끌던, 그토록 여러 날에 걸쳐 참을성 있게 자아온 실을 끊고서 삶의 규칙에 대한 예외가 우리를 데려가는 저 다른 지대에 있게 됨으로써, 마치 내일이라는 것도, 이뤄야 할 어떤 높은 목표도 결코 없기라도 한 듯, 그것들을 지키려 작동하던 신중한 위생 조치의 그 정교한 기계장치가 죄다 사라져버렸다. 급사 하나가 내 외투를 받아 가려 하자 생루가 물었다. "춥지 않겠나? 그냥 걸치고 있는 게 낫겠어. 여긴 그리 따뜻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