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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③

2권 제2부 · 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아니, 아냐."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어쩌면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병들까 하는 두려움도, 죽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일의 중요성도 더는 알지 못했다. 나는 외투를 내주었다. 우리는 집시들이 연주하는 어떤 군가(軍歌) 소리에 맞춰 식당으로 들어섰고, 저녁 식탁이 차려진 두 줄의 탁자 사이를 마치 손쉬운 영광의 길을 걷듯 나아갔다. 우리에게 군대식 경례를 올리며 이 분에 넘치는 개선(凱旋)을 안겨주던 관현악의 리듬이 우리 몸에 행복한 열기를 불어넣는 것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근엄하고 얼어붙은 낯빛 아래, 나른하고 무심한 걸음걸이 아래 감추었으니, 상스러운 노랫말을 애국적인 가락에 갖다 붙이고서 승리한 장군의 늠름한 얼굴로 무대로 뛰어나오는 저 뮤직홀의 '멋쟁이들'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할머니의 손자가 아닌, 일어나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할머니를 떠올릴, 그러나 당분간은 우리에게 저녁을 날라다 줄 급사들의 형제인 새사람이 되어 있었다.

발베크에서라면 일주일에 걸쳐서도 감히 마시지 못했을 맥주의 분량을, 하물며 샴페인의 분량을, 내 차분하고 맑은 의식에는 그 음료들의 맛이 분명히 느낄 만한 즐거움이었음에도, 바로 그렇기에 손쉽게 단념할 수도 있는 즐거움이었음에도, 나는 이제 한자리에서 들이켰고, 거기에 포트와인 몇 방울을 더 보탰으나 너무 산만해 그 맛을 음미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연주를 마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무엇을 살 셈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 무언가를 사려고 지난 한 달 동안 모아둔 2루이를 주었다. 탁자들 사이로 내달리게 된 급사 여럿이 저마다 활짝 편 손바닥 위에 접시 하나씩을 받쳐 든 채 전속력으로 날아다녔으니, 그 접시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이 경주 같은 것의 목적인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초콜릿 수플레는 쏟아지지 않고 제 목적지에 이르렀고, 영국식 감자 à l’anglaise도, 그 빠른 걸음이라면 응당 사방으로 튕겨 나갔어야 마땅했건만, 포이야크 양고기 둘레에 처음 놓였던 그대로 가지런히 도착했다. 나는 그 하인들 가운데 하나를 눈여겨보았으니, 키가 아주 크고 훌륭한 검은 곱슬머리를 깃털처럼 얹은, 얼굴빛이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희귀한 새의 종류를 떠올리게 하는 색으로 물든 자로, 쉴 새 없이(게다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아무 목적도 없이) 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내달리는 그 모습은, 동물원의 큰 새장을 그 화려한 빛깔과 알 수 없는 부산함으로 채우는 저 마코앵무 가운데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이윽고 그 광경은, 적어도 내 눈에는, 한결 고귀하면서도 한결 고요해지며 어떤 질서를 갖추어 갔다. 이 모든 어지러운 활동이 잔잔한 조화 속에 자리 잡았다. 나는 그 수많은 무리가 옛 우의화(寓意畫) 속에 그려진 행성들처럼 식당을 가득 메운 둥근 탁자들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이 갖가지 별들 사이에는 무언가 거스를 수 없이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는 듯했으니, 탁자마다 식사하는 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앉지 않은 탁자에만 눈길을 두었다. 다만 어쩌면, 이름난 작가 하나를 용케 붙들어 앉힌 어느 부유한 초대자만은, 돌아가는 탁자의 마법 같은 성질 덕분에 그에게서 부인들이 경탄해 마지않을 대수롭지 않은 몇 마디를 끌어내려 애쓰고 있었을 것이다. 이 별자리 같은 탁자들의 조화도, 앉아 있는 식객들과 달리 서 있었기에 한층 드높은 천구(天球)에서 제 운행을 펼치던 저 무수한 하인들의 끊임없는 회전을 막지는 못했다. 물론 그들은 내달리고 있었으니, 하나는 오르되브르를 가지러, 또 하나는 포도주를 바꾸거나 깨끗한 잔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둥근 탁자들 사이를 도는 그들의 끝없는 운행은 얼마쯤 지나자 지켜보는 이에게 그 어지럽되 질서 정연한 순환의 법칙을 내주었다. 꽃 무더기 뒤에 앉아 끝없는 계산에 바쁜 무시무시한 계산대 여인 둘은, 중세의 과학적 관념에 따라 빚어진 이 천상의 궁륭(穹窿)에서 이따금 일어날 법한 재난을 점성술의 징표로 점치는 두 마녀 같았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모든 식객을 딱하게 여겼으니, 그들에게는 그 둥근 탁자들이 행성이 아니었고, 우리를 겉모습의 예속에서 풀어주어 유사(類似)를 알아보게 해주는 저 단면들 가운데 하나를 그들은 사물의 짜임에서 잘라내지 못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과 저녁을 먹는 중이라고, 저녁값이 대략 얼마쯤 들리라고, 내일이면 또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하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젊은 조수들의 행렬에도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했으니, 그 조수들은 아마 그 순간 급한 일이 없어, 바구니에 담은 빵 두루마리를 받쳐 든 채 행렬처럼 나아가고 있었다. 그중 몇몇, 가장 어린 아이들은 지나는 길에 수석 급사들이 먹이는 꿀밤에 얼이 빠져, 우울한 눈길을 아득한 꿈에 붙박고 있다가, 예전에 자기가 일했던 발베크 호텔에서 온 어떤 손님이 그들을 알아보고 몇 마디 건네며, 마실 수 없는 샴페인을 몸소 물리라고 이를 때에야 비로소 위로를 받았으니, 그 분부는 그들을 자랑으로 부풀게 했다.

나는 내 신경이 저릿저릿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으니, 거기에는 그것을 자아냈을 법한 외부의 사물과는 무관한 안락감이, 내 몸이나 주의를 아주 조금만 옮겨도 느끼기에 충분한 안락감이 있었다, 마치 감은 눈에 살짝 힘을 주면 빛깔의 감각이 이는 것처럼. 나는 이미 포트와인을 꽤 마신 터였고, 지금 더 청한다면 그것은 잔을 더 마셔 얻을 안락 때문이라기보다 앞서 마신 잔들이 자아낸 안락의 한 효과였다. 나는 음악 자체가 내 즐거움을 그 음 하나하나로 이끌게 두었고, 즐거움은 얌전히 따라와 차례로 그 음마다에 머물렀다. 자연 상태에서는 오직 우연히, 아주 드물게만 함께 모이는 물질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저 화학 공업처럼, 리브벨의 이 식당이 산책이나 마차 나들이의 우연이라면 일 년 걸려 만나게 해주었을 것보다 더 많은 여인들을, 행복의 손짓하는 전경(前景)으로 나를 꾀는 여인들을 같은 한순간에 한데 모았다면, 다른 한편 우리 귀를 맞이한 이 음악은, 왈츠며 독일 오페레타며 뮤직홀 노래를 편곡한, 죄다 내게는 처음인 이 음악은, 그 자체로 앞의 것 위에 겹쳐진, 게다가 한층 더 취하게 하는 즐거움의 영묘한 안식처 같았다. 저마다 한 여인만큼이나 개성 있는 이 가락들은, 여인이라면 그리했을 법하게 어떤 특별한 사람을 위해 제가 품은 관능의 비밀을 아껴두지 않았다. 가락들은 내게 제 비밀을 내어주고, 나에게 추파를 던지고, 꾸민 듯하거나 상스러운 몸짓으로 내게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고, 내가 별안간 더 매혹적이고 더 힘 있고 더 부유해지기라도 한 듯 나를 어루만졌다. 나는 정말이지 이 가락들에서 잔혹함의 요소를 발견했으니, 아름다움에 대한 사심 없는 감정이라든가 지성의 빛 따위는 그것들에게 낯선 것이었고, 그것들에게는 오직 육체의 즐거움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가장 무자비한 지옥, 질투에 사로잡힌 가련한 자에게 가장 문이 없고 가장 가두는 지옥이니, 그자에게 그 가락들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누리고 있는 그 즐거움을, 그에게는 온 세상인 그녀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으로서 들이민다. 하지만 내가 이 가락의 음들을 나직이 흥얼거리며 그 입맞춤에 응하는 동안, 그것이 내게 느끼게 한, 그것에만 고유한 즐거움이 어찌나 소중해졌던지, 나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속에, 나른함과 생기가 번갈아 깃든 선(線)들 속에 지어 올린 저 기묘한 세계로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서라면 아버지와 어머니라도 버렸을 것이다. 이런 즐거움이 그것을 받는 사람의 값어치를 높여주지는 못하는 법이고, 오직 그 사람에게만 지각되는 것이며, 우리 삶에서 우리를 언뜻 본 어떤 여인의 마음을 끄는 데 실패했을 때, 그 순간 우리가 이 내밀하고 주관적인 지복을 지녔는지 어떤지 그녀는 알 길이 없으므로 그것이 그녀가 우리에게 내린 판단을 조금도 바꿔놓지 못했을 것임에도, 나는 나 자신이 더 힘 있고 거의 거스를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내 사랑이 이제는 사람들이 비웃을 법한 볼품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이 음악의 애틋한 아름다움, 그 매혹을 지닌 것처럼 여겨졌으니, 그 음악은 그 자체로, 내가 사랑하는 그녀와 내가 별안간 가까워져 만나기로 되어 있는 정다운 분위기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이 식당은 화류계 여인들만의 소굴이 아니었다. 오후의 차를 들거나 큰 만찬을 여는, 더없이 상류에 속한 사람들도 이곳을 드나들었다. 다과회는 길고 좁은, 깔때기 모양의 유리 회랑에서 열렸는데, 그 회랑은 현관홀에서 식당으로 이어졌고 한쪽은 정원과 접해, (돌기둥 몇을 빼면) 오직 유리 벽으로만 정원과 갈려 있었으며, 그 유리창은 여기저기 열리곤 했다. 그 결과로, 사방에서 새어드는 외풍 말고도, 갑작스럽고 간간이 터지는 햇살이, 차 마시는 이들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하는 눈부신 빛이 들이쳤으니, 그들이 좁은 골짜기 같은 그곳을 따라 짝을 지어 빽빽이 놓인 탁자에 자리 잡고서, 차를 마시거나 서로 인사를 나누며 움직일 때마다 빛깔로 물들 때면, 그곳은 마치 저수지, 어부가 반짝이는 어획물을 죄다 모아둔 양어장 같아서, 물 밖으로 반쯤 나와 햇빛에 잠긴 물고기들이 끊임없이 변하는 무지갯빛을 되비치며 눈을 부시게 하는 듯했다.

몇 시간 뒤 저녁 식사 때면, 그 식사는 물론 식당에서 차려졌는데, 바깥은 아직 제법 환한데도 불을 켜곤 했으니, 그래서 정원에는, 저녁의 창백한 유령처럼 어스름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정자들 사이로, 잿빛 도는 초목이 지는 해의 마지막 햇살에 꿰뚫린 오솔길들이 눈앞에 보였고, 그것들은 우리가 저녁을 들던 등불 밝힌 방에서 유리 너머로, 이제는 오후에 그곳에서 차를 마시던 부인들을 두고 그리 말했을 법하게 파랗고 금빛인 복도를 따라 반짝이며 물방울 듣는 그물에 걸린 모습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빛으로 비친 거대한 크기의 창백하고 푸른 수족관의 초목처럼 나타났다. 사람들이 식탁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무리는 저녁을 먹는 동안 내내 옆 탁자의 무리를 살피고 알아보고 이름 대는 데 시간을 다 보냈으면서도 저마다 자기 무리를 중심으로 완벽한 결속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날 저녁의 주인을 중심으로 그들을 맴돌게 하던 그 끌어당기는 힘은, 커피를 들러 그들이 다과회에 쓰였던 바로 그 복도로 물러가는 순간 그 힘을 잃었다. 자리를 옮기는 도중에, 행진하던 어떤 무리가 사람이라는 미립자를 하나둘 떨구는 일이 흔히 있었으니, 그 미립자들은 맞은편 무리의 거스를 수 없는 인력에 이끌려 잠시 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 빈자리는 벗들에게 말을 건네러 건너왔다가 "이만 가봐야겠어요, 아무개 와 저녁 약속이 있어서"라며 서둘러 떠나는 부인이나 신사들이 채웠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을 바라보노라면, 몇 송이 꽃을 서로 주고받은 두 개의 꽃다발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윽고 복도마저 비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바깥에는 아직 빛이 조금 남아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 긴 복도를 불 켜지 않은 채 두는 일이 많았고, 유리 저편에서 복도를 덮은 나무들에 가장자리가 둘린 그곳은 우거지고 그늘진 정원의 얽힌 나뭇가지 오솔길을 떠올리게 했다. 어스름 속 여기저기에 아리따운 여자 식객 하나가 뒤에 남아 서성이곤 했다. 어느 저녁 나가는 길에 이 복도를 지나다가, 나는 낯선 무리 가운데 앉은 아름다운 뤽상부르 대공비를 보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모자를 들어 인사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숙인 머리 위 저 높은 공중에, 그러나 그 몸짓에서 우러난 듯, 나에게 건네는 몇 마디가 가락처럼 피어올랐으니, 그것은 나를 멈춰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몸짓을 온전히 하려는, 말로 하는 인사로 만들려는, 얼마쯤 부풀린 저녁 인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어찌나 또렷하지 않던지, 내가 들은 것이라곤 소리뿐이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감미롭게 늘어지고 어찌나 음악처럼 들리던지, 마치 나무의 어스레한 가지들 사이에서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노래하기 시작한 듯했다. 이따금, 우리가 마주쳤던 벗들 무리와 어울려 저녁을 마무리하려고 생루가 이웃 마을의 카지노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고 그들을 데려가면서 나를 마차에 혼자 태우면, 나는 마부에게 되도록 빨리 달려달라고 재촉했으니, 리브벨에 온 이래로 내가 남들에게서 받아온 저 변조(變調)를, 곧 기관차를 거꾸로 돌려 기계의 이빨에 물린 듯 사로잡혀 붙들려 있던 수동성에서 빠져나와 내 감수성에 손수 공급하는 일을 면해줄 이가 곁에 없이 홀로 보내야 할 그 분(分)들이 덜 더디게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한 데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 좁은 길에서 맞은편에서 오는 마차와 부딪칠 위험도, 여러 군데 무너져 내리는 벼랑 끝 땅의 위태로움도,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수직 낭떠러지가 코앞에 있다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위험에 대한 상(像)과 두려움을 내 이성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필요했을 그 미미한 자극조차 내게 미치지 못했다. 유명해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는 습관이 우리로 하여금 완성된 작품을 낳게 하듯, 지금 이 순간의 활동이 아니라 지난날의 현명한 성찰이 우리로 하여금 앞날을 지키게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 이르기도 전에, 리브벨에 다다르면서 이미 나는 우리 병약함이 바른길을 가도록 돕는 저 이성과 자제(自制)의 목발을 돌이킬 수 없이 내던져버린 터라, 이제 내가 일종의 도덕적 운동실조(運動失調)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내가 마신 술이 내 신경을 지나치게 곤두세워, 다가오는 매 순간에 하나의 성질을, 하나의 매력을 주었으되, 그것이 내가 그 순간들을 더 선뜻 억누르거나 그것들이 오는 것을 더 단호히 막을 수 있게 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 순간들을 내 삶의 다른 무엇보다 천 배나 더 좋아하게 만든 반면, 나의 고양(高揚)은 그 순간들을 다른 모든 것에서 떼어놓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영웅이나 취객이 그러하듯 현재에 갇혀 있었다. 한동안 가려진 내 과거는 우리가 미래라 부르는 제 그림자를 더는 내 앞에 드리우지 않았다. 내 삶의 목표를 이제 그 과거의 꿈을 이루는 데 두지 않고 현재 순간의 지복에 두었기에, 나는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겉보기에만 그럴 뿐인 어떤 모순으로, 내가 낯선 즐거움을 맛보며 내 삶이 아직 행복할 수 있으리라 느끼던, 그래서 삶이 내 눈에 더 소중해졌어야 마땅한 바로 그 순간에, 여태 내 삶이 내게 넌지시 일러온 온갖 근심에서 풀려난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주저 없이 삶을 사고(事故)의 우연에 내맡겨버렸다. 결국 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들의 온 생애에 걸쳐 묽게 풀려 있는 저 부주의를, 곧 그들이 날마다 불필요하게 뱃길 여행이나 비행기, 자동차 여행의 위험에 맞서면서도 집에는 그들이 죽으면 삶이 산산조각 날 이가 기다리고 있거나, 임박한 출간이 이제 그들 삶의 유일한 목표인 그 책이 아직 그들 뇌수의 깨지기 쉬운 그릇 속에 담겨 있는, 그런 부주의를 하룻저녁에 응축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리브벨 식당에서도, 저녁을 먹은 뒤에도 우리가 그저 그곳에 남아 있던 저녁이면, 누군가 나를 죽일 작정으로 들어왔다 한들, 나는 이제 할머니도, 다가올 내 삶도, 내가 쓰려던 책들도 너무 아득해 아무런 실감도 없는 먼 전망 속에서밖에는 보지 못했고, 이제 몸과 마음을 통째로 옆 탁자 부인의 향내에, 급사들의 정중함에, 악단이 연주하는 왈츠의 윤곽에 붙들어 매고, 내 당장의 감각에 들러붙어 그 한계 너머로는 뻗지 못한 채,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 감각 속에서 그 감각과 더불어 죽었을 것이고,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목 졸려 죽게 두었을 것이니, 담배 연기에 취해 제 노동의 축적과 제 벌집의 희망을 지킬 생각을 더는 하지 않게 된 한 마리 벌처럼.

여기서 나는 덧붙여야겠다, 내 고양의 격렬함에 견주어 가장 심각한 일들마저 가라앉아 버린 이 하찮음이, 마침내 시모네 과 그 벗들까지 아우르게 되었음을. 이제 그들을 알게 되는 일은 내게 쉬워 보였으나 좀처럼 수고할 값어치가 없어 보였으니, 오직 내 당장의 감각만이, 그 유별난 강렬함 덕에, 그 아주 사소한 변조와 한낱 이어짐이 자아내는 기쁨 덕에 내게 어떤 중요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것, 곧 부모도, 일도, 즐거움도, 발베크의 소녀들도, 내게는 거센 바람 속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는 물거품 한 조각만큼의 무게도 없었고, 오직 이 내면의 힘에 관계해서만 존재했다. 취기는 한두 시간 동안 주관적 관념론을, 순수한 현상주의를 실재하게 만든다. 이제 남는 것은 겉모습뿐, 우리의 숭고한 자아의 한 함수로서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이,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다면, 그런 조건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새로운 대기 속에 있기라도 한 듯, 알 수 없는 압력들이 그 감정의 크기를 바꿔놓았음을 너무나 또렷이 느껴, 더는 그것을 예전처럼 헤아릴 수 없게 된다. 사랑은 분명 여전히 거기 있고 우리는 그것을 되찾겠지만, 다른 자리에서, 더는 우리를 짓누르지 않은 채, 현재가 내주는 감각에 만족한 채 되찾을 것이니, 실제로 눈앞에 없는 것을 우리는 개의치 않으므로 그 감각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우리의 값을 바꿔놓는 그 계수(係數)는 오직 취기의 시간에만 그것들을 바꿔놓는다. 온 중요성을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가 비눗방울처럼 입김으로 흩어버린 그 사람들은 내일이면 제 밀도를 되찾을 것이고, 우리는 오늘 저녁 아무런 의미도 없어져 버린 일에 다시 붙어 앉으려 새삼 애써야 할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어제의 것과 똑같은 이 내일의 셈법, 그 문제들 속에 우리가 가차 없이 얽혀들게 될 이 셈법이, 바로 이 시간에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다만 우리만이 그 지배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 곁에, 정숙하거나 우리에게 적의를 품은 여인 하나가 있다면, 한 시간 전만 해도 그토록 어렵던 그 물음, 곧 우리가 그녀의 호감을 얻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그 물음이, 이제 우리에게는 백만 배는 더 쉽게 풀릴 듯 보이지만, 어느 모로도 실제로 더 쉬워진 것은 아니니, 오직 우리 자신의 눈에, 우리 자신의 내면의 눈에 우리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순간 우리에게 그만큼 짜증이 나 있으니, 마치 우리가 다음 날 심부름꾼에게 백 프랑을 주었다는 생각에 짜증이 날 것과 같고, 그것도 우리 경우에는 그저 그 작용이 늦춰졌을 뿐인 같은 이유, 곧 취기의 부재 때문이다.

나는 리브벨에 있던 여인들을 아무도 알지 못했고, 그들은 거울의 반영이 거울의 일부이듯 내 취기의 일부를 이루었기에, 점점 더 존재가 희미해지는 시모네 보다 이제 천 배는 더 탐낼 만한 존재로 내게 보였다. 그중 하나, 젊고 살결이 흰, 홀로 앉아, 들꽃으로 장식한 밀짚모자에 감싸인 얼굴에 슬픈 빛을 띤 여인이, 잠시 꿈꾸는 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가 매력적이라 여겼다. 그다음엔 또 다른 여인의 차례였고, 세 번째 여인의 차례였다. 마침내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한 거무스름한 여인의 차례였다. 그들 거의 모두가, 나에게는 아니더라도 생루에게는 아는 사이였다.

사실 그는 지금의 정부를 알기 전에 오랫동안 연애 모험이라는 그 비좁은 세계에서 살아왔던 터라, 그날 저녁 리브벨에서 저녁을 들 여자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순전히 우연으로 이곳에 흘러든 여자들, 더러는 정부를 만나러, 더러는 새 정부를 찾을 요량으로 이 해안에 온 여자들 가운데, 그가 하룻밤이라도 함께 보내(그 자신이 아니면 그의 친구 누군가가) 알지 못하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그는 그녀들이 남자와 함께 있을 때는 인사하지 않았고, 그녀들 또한 누구보다도 그를 자주 쳐다보면서도, 그가 자기 여배우가 아닌 모든 여자에게 무관심하다는 소문 때문에 그녀들 눈에는 그가 각별한 흥밋거리로 비쳤음에도, 그를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젊은 생루야. 아직도 자기 여자한테 홀딱 빠져 있다더군. 단단히 걸렸지. 얼마나 귀여운 청년인지! 정말 근사한 사람 같아. 게다가 저 멋이라니! 어떤 여자들은 복도 많지, 안 그래? 게다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어. 내가 오를레앙 곁에 있을 적에 저이를 자주 봤지. 그 둘은 늘 붙어 다녔어. 그땐 아주 신나게 놀았지. 하지만 지금은 다 손 씻었으니, 그 여자도 불평할 게 없어. 그 여자야말로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지. 그런데 정말이지, 도대체 저이가 그 여자한테서 무얼 보는 건지 모르겠어. 결국 저이도 좀 얼뜬 데가 있는 게지. 그 여자는 발이 배만 하고, 미국 여자처럼 구레나룻이 났고, 속옷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정말이지 조그만 점원 아가씨도 그런 속바지 차림을 남한테 들키면 부끄러워할 걸. 저 사람 눈 좀 봐, 잠깐만. 저런 남자를 위해서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겠어. 쉿, 아무 말 마. 나를 봤어. 봐, 웃고 있잖아. 오, 저이는 나를 잘 기억하고 있어. 저이한테 내 이름을 대 봐, 뭐라고 하는지 좀 보게!” 이 여자들과 그 사이에서 나는 서로 통하는 눈짓을 엿보았다. 나는 그가 나를 그녀들에게 소개해 주어, 내가 그녀들에게 밀회를 청하고 그녀들이 그것을 허락해 주기를 바랐다. 설령 내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들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토록 그 한 부분을 잃은 채로 남으리라, 마치 너울에 가려진 것처럼. 그 부분이란 여자마다 제각기 다르며, 실제로 어떤 여자에게서 보기 전에는 그 여자에게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 오직 그녀가 우리에게 던지는 눈길에서만 드러나는 것, 우리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채워지리라 약속하는 그 눈길에서만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축소된 채로나마 그녀들의 모습은 내게, 정숙하다고 알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보다 훨씬 더한 무엇이었으니, 그것은 정숙한 여자들의 모습처럼 밋밋하지도, 뒤가 텅 빈 것도, 두께 없이 한 겹으로 빚어진 것도 아닌 듯싶었다. 물론 그것은 생루에게 그러하듯 내게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억의 작용으로, 그를 모르는 척하는 미동 없는 이목구비의, 그에게는 훤히 비쳐 보이는 무관심 밑에서, 혹은 아무에게나 똑같이 건넸을 법한 심드렁하고 형식적인 인사 밑에서, 헝클어진 머리채 사이로 넋을 잃은 입술, 반쯤 감긴 두 눈, 화가들이 관람자의 감각을 속이려고 점잖은 가리개로 덮어 두는 그런 그림 같은, 소리 없는 온전한 정경 하나를 떠올리고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내게는, 이 여자든 저 여자든 그 표면을 뚫고 내 인격의 무엇 하나 스며든 적이 없으며, 그녀가 인생을 밟아 갈 미지의 길로 그것을 지니고 가지도 않으리라 여기던 내게는, 그 얼굴들이 봉인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열린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그것들은 내게 값진 무엇으로 비쳤으니, 만약 그것들이 사랑의 추억이 감춰진 로켓이 아니라 그저 귀한 메달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값을 매기지 않았으리라. 로베르로 말하자면, 그는 식탁에 앉아 좀처럼 가만있지 못하고, 궁정인의 미소 밑에 행동을 갈구하는 전사의 목마름을 감추고 있었는데, 내가 그를 유심히 뜯어보니, 그의 삼각형 얼굴의 억센 골격이 그의 조상들 얼굴을 얼마나 빼닮았는지, 그 얼굴이 섬세한 학도보다는 열렬한 궁수에게 어울리게 빚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고운 살갗 밑으로 대담한 구조와 봉건적 건축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머리를 보노라면, 안쪽은 도서관으로 개조되었으나 못 쓰게 된 성가퀴가 아직 남아 있는 저 옛 성채의 아성이 떠올랐다.

발베크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소개해 준 그 아름다운 낯선 여자들을 두고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게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참으로 매력적인 여자야!” 하고 되뇌었으니, 마치 노래의 후렴에 맞장구치듯 했다. 이 말이 지속적인 판단이라기보다 내 신경 상태에서 나온 것임은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만약 내게 천 프랑이 있었고 그 시각에 아직 문을 연 보석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여자에게 반지를 하나 사 주었으리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삶의 연이은 시간들이 이처럼 서로 너무나 동떨어진 배경 앞에 펼쳐질 때, 우리는 이튿날이면 조금도 흥미롭지 않을 온갖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내주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간밤에 그들에게 한 말에 대해 여전히 책임이 있으며, 우리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느낀다.

이런 저녁이면 나는 여느 때보다 늦게 호텔로 돌아왔는데,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된 방에서 그 침대를 알아보는 것이 기뻤다. 도착한 날에는 결코 그 위에서 편히 쉴 수 없으리라 여겼던 침대였건만, 이제 나의 지친 사지는 그것에 몸을 기댔다. 그리하여 넓적다리며 엉덩이며 어깨가 차례로, 매트리스를 덮은 시트에 모서리마다 밀착하려 애쓰며 파고들었으니, 마치 나의 피로가 조각가처럼 온 인체의 본을 뜨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아침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의 평화도, 몸의 건강도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괴로움 속에서 나는 그것들을 결코 되찾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것들을 따라잡으려면 오래도록 잠을 자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설령 내가 선잠에 들었다 한들, 어차피 두 시간쯤 뒤면 해변의 교향악 연주회에 깨어나고 말 터였다. 문득 나는 잠들어 있었다. 유년으로의 회귀, 지나간 세월과 잃어버린 감정의 되찾음, 육체를 벗어남, 영혼의 윤회, 죽은 자들의 불러냄, 광기의 환각, 자연계의 가장 원초적인 단계로의 퇴행 따위가 우리에게 열리는 저 깊은 잠에 나는 빠져들었던 것이다(우리는 흔히 꿈속에서 짐승을 본다고 말하지만, 그때 우리 자신이 사물 위에 확실성의 빛을 던지는 그 추론의 능력을 잃은 한 마리 짐승임은 거의 늘 잊고 있다. 도리어 우리는 삶의 광경 앞에 아리송한 환영 하나만을 내놓을 뿐이며, 그것은 순간순간 망각에 의해 새로이 부서지고, 앞선 실재는 뒤따르는 실재 앞에서 흐려지니, 마치 우리가 슬라이드를 바꿀 때 환등기의 한 영상이 다음 영상 앞에서 사라지듯 한다). 우리가 스스로 알지 못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거의 매일 밤 그 속으로 이끌려 드는 그 온갖 신비, 소멸과 부활이라는 또 하나의 큰 신비로 이끌려 드는 것처럼 말이다. 리브벨의 저녁을 소화하기 어려운 탓에 한결 방랑벽이 도진 채로, 나의 과거의 어스름한 지대들이 잇달아 가물거리며 밝혀졌으니, 그것이 나를, 방금 꿈속에서 이야기를 나눈 르그랑댕을 만나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 될 그런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