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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⑥

2권 제2부 · 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그가 내게 이야기한 이 광대한 천상의 환영, 돌에 새겨져 있다고 내가 이해한 이 거대한 신학적 시, 그러나 열망으로 부푼 내 눈이 발베크 성당의 정면을 바라보려 열렸을 때 정작 내가 본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발판 위에 세워져 양편으로 일종의 회랑을 이루던 그 커다란 성인상들 이야기를 했다.

“그건 아득한 옛날의 안개에서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로 끝나지요.” 그가 설명했다. “한쪽에는 영으로 이은 그분의 조상들이, 다른 쪽에는 육으로 이은 그분의 조상 유다의 왕들이 보입니다. 온갖 시대가 거기 다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발판으로 여긴 것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면, 그 위에 서 있는 형상들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겁니다. 모세의 발치에서는 금송아지를, 아브라함의 발치에서는 숫양을, 요셉의 발치에서는 보디발의 아내를 꾀는 악마를 알아보았을 테지요.”

나는 또 그에게, 거기 가면 거의 페르시아풍 건물을 보리라 기대했고, 이것이 아마 내 실망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으리라고 말했다. “천만에요,” 그가 내게 장담했다. “그건 정말 맞는 말입니다. 어떤 부분들은 자못 동방풍이에요. 주두 가운데 하나는 페르시아의 한 주제를 어찌나 똑같이 옮겨 놓았는지, 동방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 조각가는 탐험가들이 동방에서 가져온 어떤 함을 베낀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 그는 과연 뒷날 내게, 거의 중국풍이라 할 용들이 서로를 집어삼키는 것이 보이는 어느 주두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발베크에서는 이 자그마한 조각이, “거의 페르시아풍 성당”이라는 말이 내 마음에 그려 놓은 틀에 들어맞지 않던 건물의 전체 인상 속에 묻혀 내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갔던 것이다.

이 화실에서 내가 누린 지적 즐거움은, 우리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감싸긴 했으나, 이곳 자체의 따스한 윤기와 반짝이는 어스름을, 그리고 인동덩굴에 둘린 작은 창 너머 자못 시골스러운 큰길에서, 다만 거리와 나무 그림자가 자아낸 하늘하늘한 사(紗)로만 가려진 채 햇볕에 마른 땅이 버티는 그 메마름을 내가 느끼는 것을 조금도 막지 못했다. 어쩌면 이 여름날이 내게 준 그 알 수 없는 안온함은, 엘스티르의 카르크튀이 항구를 보았을 때 내 안에 솟구쳤던 기쁨의 물결을 불리는 지류처럼 흘러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엘스티르가 겸손한 사람이라 여겼으나, 감사의 짤막한 말 가운데 내가 ‘명성’이라는 낱말을 입에 올렸을 때 그의 얼굴이 우울로 흐려지는 것을 보고 내 짐작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제 작품이 오래 남으리라 믿는 사람들은, (엘스티르가 그러했듯) 그 작품을 저 자신은 이미 티끌로 부스러졌을 시기에 놓아 보는 버릇이 든다. 그리하여 명성이라는 생각은, 그들로 하여금 제 소멸을 곱씹게 함으로써, 죽음이라는 생각과 떼려야 뗄 수 없기에 그들을 슬프게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엘스티르의 이마에 지워 놓은 야심 어린 우울의 구름을 걷어 내고자 화제를 돌렸다. “언젠가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나는 콩브레에서 르그랑댕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이에 대한 엘스티르의 견해를 들을 기회가 반가워 이렇게 운을 뗐다. “브르타뉴에는 가지 말라고요, 타고나기를 몽상에 기우는 정신에는 이롭지 않을 테니까요.” “천만에요.” 그가 대답했다. “정신이 몽상에 기우는 성향이 있을 때, 몽상을 멀리하고 몽상을 배급하듯 아끼는 것은 잘못입니다. 당신이 정신을 그 몽상에서 딴 데로 돌리는 한, 정신은 그 몽상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늘 사물의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고 말 텐데, 그 참된 본성을 붙잡지 못했을 테니까요. 약간의 몽상이 위험하다면, 그 처방은 덜 꿈꾸는 것이 아니라 더 꿈꾸는 것, 내내 꿈꾸는 것입니다. 제 몽상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그것을 속속들이 이해해야 해요. 제 몽상을 제 삶에서 떼어 놓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어찌나 자주 좋은 결과를 내는지,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저 예방책으로라도 그것을 시도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 묻곤 합니다. 마치 어떤 외과의들이, 훗날 맹장염에 걸릴 위험을 피하려면 우리가 어릴 때 맹장을 죄다 떼어 내야 한다고 우기듯이 말이죠.”

그러는 사이 엘스티르와 나는 화실 안을 거닐다가, 정원 너머 좁은 큰길로, 거의 시골 오솔길이나 다름없는 샛길로 난 창가에 이르렀다. 우리는 늦은 오후의 한결 시원한 공기를 쐬려고 그리로 간 것이었다. 나는 작은 무리의 처녀들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는 줄로 여겼고, 이번만은 그들을 볼 희망을 저버림으로써 할머니의 간청에 못 이겨 엘스티르를 보러 온 것이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며, 흔히 우리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모두가 우리더러 가 보라 권하던 바로 그곳을 오래도록 한결같이 피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거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다. 나는 화실 밖으로 그 곁을 아주 가까이 지나되 엘스티르의 것은 아니던 시골길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문득 그 길 위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작은 무리의 그 젊은 자전거 타는 처녀가 나타났으니, 검은 머리 위로 폴로 모자를 통통한 두 뺨 쪽으로 눌러쓰고, 눈은 즐겁고 거의 조를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온갖 기쁨의 약속으로 가득한 그 상서로운 오솔길 위에서, 나는 그녀가 나무 아래에서 엘스티르에게 벗의 웃음 어린 인사를 던지는 것을 보았으니, 그것은 우리의 이 물뭍의 세계와, 여태껏 내가 다다를 수 없다 여기던 영역들 사이의 심연에 걸린 무지개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화가에게 손을 내밀려고 다가오기까지 했고, 나는 그녀의 턱에 자그마한 애교점이 하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처녀를 아십니까, 선생님?” 나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그녀에게 알려 줄 수 있고 우리 둘을 그 집으로 초대할 수도 있음을 깨닫고 엘스티르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골 지평선을 두른 이 고요한 화실은, 이미 즐겁게 놀고 있던 집에서, 게다가 사랑스러운 것들과 너그러운 주인들이 제 선물을 한량없이 늘리게 하는 그 후함에서 우러나, 자기를 위해 성대한 잔칫상이 차려지고 있음을 알게 된 아이가 느낄 법한 그런 넘치는 기쁨으로 대뜸 가득 찼다. 엘스티르는 그녀의 이름이 알베르틴 시모네라고 내게 일러 주었고, 그 벗들의 이름도 알려 주었는데, 내가 그들을 제법 정확히 묘사해 준 덕에 그는 거의 망설임 없이 그들을 알아보았다. 나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관해 착각을 하긴 했으나, 발베크에서 내가 곧잘 저지르던 그런 착각은 아니었다. 나는 늘 가게 주인의 아들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면 대공쯤으로 여길 채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 나는 존경할 만한, 몹시 부유한, 공업과 상업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딸들을 엉뚱한 계층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그것은, 얼핏 생각하면 내 흥미를 가장 덜 끄는 계층이었으니, 내게 하층민의 신비도, 게르망트가 사람들이 드나드는 그런 사교계의 신비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을 둘러싼 바닷가 생활의 그 눈부신 공허가, 넋 잃은 내 눈에, 그들에게 결코 잃을 수 없는 타고난 자질을, 신분을 부여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들이 잘나가는 상인들의 딸이라는 생각을 이겨 내고 뿌리치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나는 프랑스 중산계급이 얼마나 온갖 고귀하고 다채로운 조각으로 가득 찬 놀라운 화실인지를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뜻밖의 유형들이며, 그 얼굴 생김에 깃든 얼마나 풍부한 창의이며, 그 이목구비의 얼마나 굳건함이며, 얼마나 싱그러움이며, 얼마나 소박함인가. 이 디아나들과 이 님프들이 그 허리에서 태어난, 약삭빠른 늙은 환전상들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위대한 조각가들이었던 듯싶었다. 이 처녀들의 사회적 변형을 미처 새겨 둘 겨를도 없이, 착각을 깨닫는 이런 일들, 어떤 사람에 대해 품은 관념을 이렇게 뜯어고치는 일들은 화학적 결합만큼이나 순식간이므로, 이미 그들의 얼굴 뒤에는, 내가 그들을 경주용 자전거 선수나 권투 챔피언의 정부쯤으로 여겼을 만큼 거리의 부랑아 같던 그 얼굴 뒤에는, 그들이 어쩌면 우리가 알던 어느 변호사나 하는 집안과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알베르틴 시모네가 무엇을 뜻하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자기가 언젠가 내게 무엇을 뜻하게 될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시모네라는 그 이름조차, 이미 바닷가에서 누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만약 그것을 받아 적으라 했다면 나는 n을 겹쳐 두 개로 적었을 터, 이 집안이 제 이름에 n이 하나뿐이라는 데 얼마나 큰 중요성을 두는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의 사다리를 내려갈수록 우리의 속물근성은 하찮기 그지없는 것들에 매달리는데, 그것들은 어쩌면 귀족들이 지키는 구별보다 더 공허하달 것도 없으나, 더 어둑하고 더 개인에게만 특유한 까닭에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어쩌면 장사를 그르친,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짓을 저지른 시모네들도 있었으리라. 아무튼 시모네가 사람들은, 누가 제 이름의 n을 겹으로 쓰면 어김없이 언짢아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n이 둘 아닌 하나뿐인 유일한 시모네가라는 태를 냈고, 어쩌면 몽모랑시 집안이 프랑스 제일의 남작가라는 데 자부하듯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엘스티르에게 이 처녀들이 발베크에 사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적어도 몇몇은 그렇다고 그가 말해 주었다. 그중 한 처녀가 사는 별장은 바로 그 자리, 바닷가 끝, 카나프빌의 절벽이 시작되는 곳에 있었다. 이 처녀가 알베르틴 시모네와 아주 가까운 벗이었으므로, 이 또한 그날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 내가 마주친 이가 바로 그 알베르틴이라 믿을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물론 바닷가로 내려가는, 모두 같은 각도로 난 그 작은 길들이 하도 많아, 나는 그것이 정확히 어느 길이었는지 짚어 낼 수 없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정확히 기억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때에는 눈이 흐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알베르틴과, 벗의 집으로 가던 내가 본 그 처녀가 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상 확실했다. 그런데도, 그 뒤로 검은 머리의 젊은 골프 치는 처녀가 내게 안겨 준 무수한 영상들은, 서로 아무리 다를지언정, 서로 겹쳐 쌓여 왔으며 (그것들이 모두 그녀의 것임을 이제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의 실을 되짚어 올라가면, 그 동일함을 방패 삼아, 마치 굴처럼 뚫린 통로를 지나듯, 그 모든 영상을 차례로 지나면서도 그 뒤에 있는 같은 사람에 대한 의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할머니와 함께 있던 그날 내가 스쳐 지난 그 처녀에게로 되돌아가고자 하면, 나는 먼저 더 트인 공기 속으로 빠져나가야만 한다. 거기서 내가 찾아내는 이가 알베르틴, 곧잘 움직이는 동무들 사이에서 우뚝 멈춰 서곤 하던, 바다를 앞에 두고 그 앞자락을 따라 거닐던 바로 그 처녀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그 더 나중의 영상들은 모두 그 앞선 영상과 따로 남아 있는데, 그녀가 내 눈길을 사로잡던 그 순간에는 그녀가 내게 지니지 않았던 정체성을, 나는 되돌아보며 그녀에게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연성의 법칙에서 아무리 확신을 끌어낸다 한들, 작은 길과 바닷가 모퉁이에서 그토록 대담하게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사랑받았을 수도 있으리라 믿는 그 통통한 뺨의 처녀를, 나는 말 그대로 엄밀한 뜻에서는 다시는 본 적이 없다.

작은 무리의 여러 처녀들, 저마다 처음에 나를 어지럽히던 그 무리 전체의 매력을 얼마간 간직하고 있던 그들 사이에서 내가 망설였다는 것은, 앞서 든 이유들과 어우러져, 뒷날, 알베르틴을 향한 나의 더 큰, 나의 두 번째 열정의 시기에조차,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일종의 간헐적이고 아주 짧은 자유를 내게 허락해 주었다. 마침내 그녀에게로 오롯이 모이기까지 그 모든 벗들 사이를 헤맨 탓에, 나의 사랑은, 이따금, 저 자신과 알베르틴의 영상 사이에 어떤 빛과 그림자의 ‘유격’을 두었고, 그리하여 잘못 끼워진 등불처럼, 그 초점을 그녀에게 맞추기 전에 다른 처녀들 저마다의 표면 위로 나풀거릴 수 있었다. 내 가슴에 느끼는 아픔과 알베르틴의 기억 사이의 연관이 내게는 필연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나는 어쩌면 그것을 다른 사람의 영상과 맞추어 낼 수도 있었으리라. 이 덕분에 나는, 한순간의 섬광 속에서, 현실을 통째로 몰아낼 수 있었으니, 질베르트를 향한 나의 사랑에서처럼 외부의 현실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한 자질과 남다른 성격을, 그녀를 내 행복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드는 그 모든 것을,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길어 올리는 내면의 상태임을 이미 알아차린 터였다), 그 다른 현실, 내면적이고 순전히 주관적인 현실마저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처녀들 가운데 하나둘이 여기를 지나며 잠깐씩 들여다보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지요.” 엘스티르가 내게 말했고, 이 말은 나를 절망에 빠뜨렸으니, 할머니가 가 보라 졸랐을 때 곧장 그를 보러 갔더라면 나는 십중팔구 진작 알베르틴과 알고 지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나가 버렸고, 화실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해안가’로 벗들과 어울리러 갔으려니 여겼다. 만약 내가 엘스티르와 함께 거기 불쑥 나타날 수 있었다면, 나는 그들 모두와 알고 지냈으리라. 나는 그를 꾀어 바닷가로 함께 한 바퀴 돌게 할 갖은 핑계를 궁리했다. 작은 창의 틀 속에 그 처녀가 나타나기 전과 같은 마음의 평온을 나는 이제 잃어버렸으니, 그때까지 인동덩굴 술을 두르고 그토록 매력적이던 그 창이 이제는 그토록 스산하게 텅 비어 버렸다. 엘스티르가 나와 함께 조금 걸어 주겠으나 다만 지금 붙들고 있는 작업부터 마쳐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게 괴롭기도 한 기쁨을 안겼다. 그것은 꽃 습작이었으되, 내가 그 초상을 그려 달라고 청하고 싶던, 어떤 사람의 초상보다도 차라리 그 꽃들의 초상을 청하고 싶던 그런 꽃들 가운데 하나는 아니었으니, 그것은 내가 그토록 자주 꽃 자체에서 헛되이 구하던 것을 그의 천재의 계시에서 배우려 함이었다. 하얀 산사나무 꽃과 분홍 산사나무 꽃, 수레국화, 사과나무 꽃 같은 것들 말이다. 엘스티르는 작업하며 내게 식물학 이야기를 했으나 나는 거의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 자체로는 내게 충분하지 못했고, 이제 그저 이 처녀들과 나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될 중개자일 뿐이었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그의 재능이 내 눈에 그에게 부여하던 그 남다름은, 이제 그가 나를 소개해 줄 그 작은 무리의 눈에 그 남다름을 나에게도 조금 나누어 줄 수 있는 한에서만 값어치가 있었다.

나는 그가 하던 일을 끝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고, 벽에 잔뜩 기대어 세워진 온갖 스케치를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그러다 나는 엘스티르의 생애에서 훨씬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이 분명한 수채화 한 점을 우연히 찾아냈는데, 그것은 솜씨 있게 그려졌을 뿐 아니라 아주 유별나고 아주 매혹적인 대상을 담고 있어서, 그 매력의 상당 부분을 우리가 바로 그 대상에 돌리게 되는, 예술 작품이 퍼뜨리는 그 특유의 황홀감을 내게 안겨 주었다. 마치 그 매력이란 화가가 그저 드러내고 관찰하기만 하면 되는 것, 이미 자연에 의해 물질적 형태로 실현되어 있어 예술로 옮겨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 양. 화가의 해석과는 아주 별개로 아름다운 그런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안의 어떤 타고난 유물론을 만족시키는데, 우리의 이성은 이 유물론에 맞서 미학의 추상들에 대한 평형추 노릇을 한다. 그것은, 이 수채화는, 결코 미인은 아니지만 묘한 유형의 젊은 여인을 그린 초상이었다. 여인은 '빌리콕' 중산모와 그리 다르지 않은, 앵두빛 비단 리본으로 장식된 몸에 딱 붙는 실내모를 쓰고 있었다. 벙어리장갑을 낀 한 손에는 불붙은 담배가 들려 있고, 다른 손은 무릎 높이에서 챙 넓은 정원용 모자 같은 것을, 햇빛을 가리는 짚으로 엮은 가리개에 지나지 않는 것을 쥐고 있었다. 곁의 탁자에는 분홍 카네이션을 가득 꽂은 키 큰 꽃병이 놓여 있었다. 흔히 (여기서도 그러했다) 그런 작품의 유별남은 주로, 우리가 첫눈에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특수한 조건에서 그려졌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여성 모델의 기묘한 차림이 실은 가장무도회 의상이라든가, 반대로 어느 노인이 화가의 어떤 변덕을 맞춰 주려고 걸친 듯 보이는 진홍색 망토가 실은 교수나 시의원의 예복이거나 추기경의 수단인 경우처럼. 지금 내 앞에 놓인 초상의 인물이 지닌 그 모호한 성격은, 내가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한 시대 앞선 젊은 여배우로서 어떤 배역을 위해 반쯤 분장을 한 상태였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로 머리카락이 삐져나왔으되 짧게 잘린 그 모자, 그리고 흰 셔츠 앞자락 위로 옷깃 없이 벌어진 벨벳 코트 때문에 나는 옷의 시대와 모델의 성별을 두고 망설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내가 눈앞에 들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 그림 조각들 가운데 가장 빛깔이 선명한 것이라는 사실 말고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내게 주는 즐거움을 어지럽히는 것은 오직, 엘스티르가 더 꾸물거리다가는 내가 그 소녀들을 놓치게 되리라는 두려움뿐이었으니, 해는 이제 기울어 작은 창 안에 나직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 수채화에서는 그 무엇도 단지 사실로서 진술되어 구도에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으니, 젊은 여인이 무언가는 걸쳐야 하니까 그린 의상도, 꽃을 담아야 하니까 그린 꽃병도 그렇지 않았다. 그 자체로 소중히 다루어진 꽃병의 유리는, 카네이션 줄기가 담긴 물을 저 자신만큼이나 투명한, 거의 저 자신만큼이나 유동적인 무언가 속에 머금고 있는 듯 보였다. 여인의 드레스는 독자적이고 형제 같은 매력을 지닌 방식으로 그녀를 감싸고 있었으며, 사람의 작품이 자연의 경이와 매력을 겨룰 수 있다면, 고양이의 털이나 꽃의 꽃잎이나 비둘기의 깃털처럼 그렇게 섬세하고, 그렇게 눈의 감촉에 즐겁고, 그렇게 갓 칠한 듯 싱그러웠다. 흩날리는 빗줄기처럼 고운 셔츠 앞자락의 흰빛은, 은방울꽃 같은 작은 종 모양으로 잡힌 명랑한 주름과 더불어, 방에서 비쳐 든 환한 빛의 반짝임으로 별처럼 수놓여 있었고, 그 빛들은 마치 얇은 무명천에 수놓은 꽃묶음이기라도 한 듯 가장자리가 또렷하고 음영이 곱게 졌다. 그리고 젖빛 광택으로 빛나는 코트의 벨벳은 표면 여기저기에 거칠음과 긁힌 자국과 보풀이 있어, 꽃병 속 카네이션의 구겨진 화사함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느껴지는 것은, 엘스티르가, 무대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재능보다는 관객 가운데 몇몇의 물리거나 타락한 감각에 안겨 줄 자극적인 매력이 아마도 더 중요했을 이 젊은 여배우의 변장에 어떤 부도덕한 암시가 깃들어 있든 거기에 초연하게 무심했으며, 오히려 그 모호한 지점들을 두드러지게 할 만한 미적 요소로 붙들어 온 힘을 다해 강조했다는 사실이었다. 얼굴의 선을 따라, 감추어진 성(性)은 다소 소년 같은 소녀의 것이라고 막 고백하려는 듯하다가, 사라졌다가, 좀 더 나아가서는 계집애 같은, 방탕하고 생각에 잠긴 젊은이라는 암시와 더불어 다시 나타났다가, 다시 한번 달아나 붙잡을 수 없는 채로 남았다. 그 눈빛에 어린 몽상적인 슬픔은, 연애와 연극의 세계에 속하는 그 장신구들과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림에서 결코 덜 어지러운 요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것은 꾸며 낸 것이 분명하며, 이 도발적인 의상을 걸치고 애무에 몸을 맡길 채비가 된 듯 보이는 이 젊은이가 아마도, 은밀한 갈망과 말없는 슬픔이 어린 이 낭만적인 표정으로 그 도발을 한층 돋우는 것이 효과적이라 여겼으리라고 상상하게 되었다. 그림 아래쪽에는 “미스 사크리팡: 1872년 10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감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젊었을 때 그린 거친 습작일 뿐이지요. 어느 버라이어티 쇼의 의상이었어요. 다 아득한 옛날 일이랍니다.” “그런데 그 모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 말이 불러일으킨 당혹감이, 잠시 뒤 그가 얼굴에 띤 무심하고 얼빠진 표정에 앞서 엘스티르의 얼굴을 스쳤다. “어서, 그걸 이리 주세요!” 그가 외쳤다. “엘스티르 부인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장담하건대 저 중산모를 쓴 젊은이는 내 인생에서 아무런 역할도 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아내가 들어와 그것이 제 눈앞에 버티고 있는 걸 보아서 좋을 게 없지요. 나는 그저 그 시절 연극계의 흥미로운 곁가지로 간직해 왔을 뿐이랍니다.” 그리고 그 더미 뒤에 치워 두기 전에, 아마도 여러 해 동안 그 습작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을 엘스티르는 그것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머리만은 간직해 둬야겠어요.” 그가 중얼거렸다. “아래쪽은 정말이지 너무 형편없고, 손은 초보자의 솜씨로군요.” 나는 엘스티르 부인의 등장에 비참한 심정이 되었으니, 그녀는 우리를 더 붙들어 둘 뿐일 터였다. 창턱은 이미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의 나들이는 순전한 시간 낭비가 될 터였다. 이제 그 소녀들을 볼 가능성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고, 따라서 엘스티르 부인이 얼마나 빨리 우리를 떠나든 얼마나 오래 머물든 이제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그녀가 오래 머문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몹시 따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때, 스무 살 무렵 로마 캄파냐에서 소를 몰던 시절에는 아름다웠을지도 모르나, 검은 머리에는 잿빛이 섞여 있었고, 소박하지도 않으면서 범속했으니, 이는 그녀가 조각상 같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거드름 피우는 태도와 위엄 있는 자세가 걸맞는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나이가 들면서 매력을 죄다 앗아 가 버린 뒤였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수수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엘스티르가 입을 열 때마다, 그 말을 그저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다정함과 경외에 젖는 듯 공손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나의 아름다운 가브리엘!”이라고 되뇌는 것을 듣는 일은 뭉클하면서도 동시에 놀라웠다. 훗날 내가 엘스티르의 신화적 그림들에 익숙해지자, 엘스티르 부인은 내 눈에도 아름다움을 얻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그의 작품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어떤 선들, 어떤 아라베스크 무늬로 예시되는 어떤 이상적 전형에, 어떤 예술의 규범에 그가 거의 신적인 성격을 부여했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온 시간, 그가 낼 수 있는 온 정신의 노력, 한마디로 온 생애를 그 선들을 되도록 또렷이 가려내고 되도록 충실히 재현하는 일에 바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상이 엘스티르 안에 불러일으킨 것은 참으로 엄숙하고 까다로운 숭배여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이룬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은 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초연한 자리에서 바라보며 거기서 감동을 길어 낼 수가 없었으니, 마침내 그것이 자신 밖에서, 자신과 떨어져, 한 여인의 몸속에, 이윽고 엘스티르 부인이 된 여인의 몸속에 실현되어 있는 것과 마주친 그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고 그 여인 안에서 (자신이 아닌 무언가에 대해서만 그럴 수 있듯이) 그것을 값지고 뭉클하고 신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된 그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게다가 그때껏 그토록 큰 수고를 들여 제 안에서 끄집어내야만 했던 그 아름다움에 이제 입술을 대는 일은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 것인가. 이제 그것은 신비롭게 육신을 입고서, 구원의 은총으로 가득한 일련의 성찬처럼 그에게 스스로를 내주었으니. 이 무렵의 엘스티르는, 우리가 오로지 제 정신의 힘에만 기대어 이상을 실현하려는 그 이른 청춘에 더는 있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두뇌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육체의 만족에 기대게 되는 나이, 우리를 유물론으로 기울게 하는 두뇌의 소진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영향의 가능성으로 기울게 하는 활동력의 감퇴가, 어떤 육체들, 어떤 소명들, 어떤 리듬들은 실로 특권을 지녀서, 천재가 아니고서도 그저 어깨의 움직임이나 목의 긴장을 베끼기만 해도 걸작을 이룰 만큼 그토록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고 인정하게 만들기 시작하는 나이에 다가서고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우리 밖에서 눈으로 어루만지기를, 그것을 우리 곁에, 어느 태피스트리 속에, 헌 가게에서 주워 온 티치아노의 어여쁜 소묘 속에, 티치아노의 소묘만큼 어여쁜 정부(情婦) 속에 두기를 즐기게 되는 나이였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자 나는 더는 즐거움 없이 엘스티르 부인을 바라볼 수 없었고, 그녀의 몸은 무게를 잃기 시작했으니, 내가 거기에 하나의 관념을, 곧 그녀가 비물질적인 존재이며 엘스티르가 그린 초상이라는 관념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게 하나의 초상이었고, 감히 말하건대 그에게도 그러했다. 삶의 사실들은 예술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에게는 그저 제 천재의 벌거벗은 불꽃을 드러낼 기회일 뿐이다. 엘스티르가 그린 서로 다른 사람들의 초상 열 점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것들이 무엇보다 먼저 하나같이 ‘엘스티르’라는 것을 틀림없이 느끼게 된다. 다만, 한 사람의 삶을 휩쓸어 잠기게 하는 이 천재의 밀물이 지나간 뒤, 두뇌가 지치기 시작하면 균형은 차츰 무너지고, 사리 때의 역류가 지난 뒤 다시 제 물길을 되찾는 강처럼, 이번에는 삶이 다시 우위를 차지한다. 첫 시기가 이어지는 동안 예술가는 자신의 무의식적 재능의 법칙을, 그 공식을 차츰 빚어낸다. 그는 소설가라면 어떤 상황들이, 화가라면 어떤 장면들이 자신에게 소재를 대 주는지 안다. 그 소재란 세상 무엇이든 될 수 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실험실이나 작업장이 그러하듯 그의 탐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걸작을 옅어진 빛의 효과에서, 죄의식에 미치는 회한의 작용에서, 나무 아래 자세를 취하거나 조각상처럼 물에 반쯤 잠긴 여인들에게서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다 어느 날이 오면, 두뇌의 소진 탓에 그는 제 천재가 곧잘 쓰던 그 소재들을 앞에 두고도, 오직 그것만이 그의 작품을 낳을 수 있는 지적 노력을 기울일 힘을 더는 갖지 못할 것이나, 그럼에도 그것들을 계속 찾아 나서서, 그것들이 제 안에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즐거움과 창작에의 유혹 때문에 그 앞에 있게 되는 것만으로 행복해할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그는, 그것들이 다른 무엇보다 우월하기라도 한 듯, 마치 그것들이 이미 그 안에 다 만들어진 채 품고 있다 할 만한 예술 작품의 큰 부분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라도 한 듯, 그것들을 일종의 미신의 울타리로 에워싸며, 제 모델들과 함께 있는 일에, 그것들을 숭배하는 일에 스스로를 가두게 될 것이다. 그는 뉘우치는 죄인들과 끝없는 대화를 나눌 것이니, 그들의 회한과 갱생은 그가 아직 글을 쓰던 시절 그의 소설의 소재였다. 그는 안개가 빛을 옅게 만드는 고장에 시골집을 사들일 것이고, 목욕하는 여인들의 팔다리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긴 시간을 보낼 것이며, 호사스러운 천을 모아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아름다움이란,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잃어버린 국면이자, 내가 이미 스완이 멈추어 서는 것을 보았던, 예술의 경계 너머의 한 단계로서, 창조의 열정이 느슨해지고 그 열정을 불러일으켰던 형식들을 우상처럼 떠받들며 노력을 피하려는 욕구로 말미암아, 끝내는 한 엘스티르의 나아감을 멈춰 세우고야 마는 그것이기도 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