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그는 자신의 꽃들에 마지막 붓질을 마쳤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는 데 잠시를 바쳤다. 그 행동으로 내가 무슨 공을 세운 것은 아니었으니, 이제 우리가 해변에서 그 소녀들을 찾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직 거기 있으리라고, 그리고 이 헛되이 보낸 순간들 탓에 그들을 놓치게 되리라고 믿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래도 멈추어 바라보았을 것이다. 엘스티르는 내가 그 소녀들을 만나는 일보다 제 꽃들에 더 관심이 있다고 스스로 되뇌었을 테니까. 나의 완전한 이기심과 정반대되는 성품인 할머니의 성품은, 그럼에도 내 성품의 어떤 면들에 비쳐 있었다. 내가 무관심하면서도 늘 애정이나 존경을 겉으로 꾸며 온 어떤 사람이 고작 얼마간의 불쾌함을 겪을 위험에 놓이고 정작 나는 진짜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나는 그의 성가심을 무슨 대단한 일이기라도 한 듯 딱하게 여기고 내 자신의 위험은 아무것도 아닌 양 취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그것이 그가 사물을 보아야 마땅한 비례라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한술 더 떠서, 내 자신이 처한 위험을 불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위험을 마중하러 반쯤 나아갔으며, 다른 사람들이 얽힌 위험에 대해서는 반대로, 설령 내가 붙잡힐 위험을 키우게 되더라도, 그것을 그들에게서 돌려놓으려 애썼을 것이다. 그 까닭은 여럿인데, 어느 하나도 내게 조금도 명예로운 것이 못 된다. 하나는 이러하다. 오직 내 이성만이 작동할 때에는 나는 늘 자기보존을 믿어 왔으나, 내 삶의 어느 대목에서든 도덕적 불안에, 아니면 그저 신경질적인 자책에, 흔히 여기 늘어놓기 부끄러울 만큼 유치한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 있던 차에, 뜻밖의 사정이 벌어져 내게 죽임을 당할 위험이 닥치면, 이 새로운 근심은 다른 근심들에 견주어 너무나 하찮았던 나머지 나는 그것을 안도의, 거의 즐거움에 가까운 심정으로 반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용기 없는 축이면서도, 이성적인 기분일 때면 내게 늘 내 본성과 그토록 낯설고 그토록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보였던 그 감정, 곧 위험의 도취를 알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설령 어떤 위험이, 심지어 목숨을 앗을 위험이 나를 위협할 때 내가 더없이 고요하고 행복한 국면을 지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한 나는 그를 내 뒤에 감싸 두고 위험한 자리를 내 몫으로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분히 쌓인 경험이, 내가 언제나 그렇게 행동했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를 즐겼음을 일러 주었을 때, 나는 발견했으며, 그 발견에 깊이 부끄러웠다. 그것이, 내가 늘 믿고 주장해 온 바와는 반대로, 내가 남들의 의견에 극도로 예민했기 때문임을. 이런 종류의,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자존심이 어떤 의미로든 허영이나 자만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두 결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채워 줄 만한 것도 내게는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며, 나는 늘 그것들에 빠지기를 삼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나면 그들이 나를 덜 깎아내려 여겼을지도 모를 사소한 장점들을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가 가장 감쪽같이 숨기는 데 성공한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나 자신의 길에서보다 그들의 길에서 죽음의 위험을 물리치는 데 더 애를 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즐거움만은 결코 스스로에게서 앗을 수 없었다. 그럴 때 나의 동기는 용기가 아니라 자존심이므로, 나는 어떤 위기에서든 그들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나는 그 일로 그들을 나무랄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만일 내가 의무감에 이끌렸다면, 그리고 그 경우 그 의무가 내게 지워진 만큼 그들에게도 지워졌다고 여겨졌다면 아마 나무랐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나는 그들이 제 목숨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분별 있는 일이라고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내 자신의 안전이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데, 이는 유난히 어리석고 탓할 만한 일이다. 폭탄이 터질 때 내가 그 앞을 가로막고 서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내 목숨보다도 오히려 하찮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엘스티르를 처음 찾아간 이날에는, 내가 이 가치의 차이를 의식하게 될 때가 아직 멀었고, 위험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저, 이는 저 해로운 자존심의 전조였는데,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그 즐거움을 화가가 아직 끝내야 할 작업보다 더 중히 여기는 듯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것은 마침내 끝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 나는, 이 계절에는 아직 낮이 그토록 길었던 터라, 내가 짐작했던 것만큼 늦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바닷가 산책로’로 어슬렁어슬렁 내려갔다. 소녀들이 아직 지나갈지도 모른다고 여긴 그 자리에 엘스티르를 붙들어 두려고 나는 온갖 술책을 부렸다. 우리 곁에 우뚝 솟은 절벽들을 가리키며, 나는 그가 시간을 잊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거기 머물도록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고 자꾸만 청했다. 해변 끝 쪽으로 옮겨 가면 그 작은 무리를 붙잡을 가망이 더 크리라고 나는 느꼈다. “저 절벽들을 당신과 함께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군요.” 소녀들 가운데 하나가 그 방향으로 가곤 한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카르크튀이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카르크튀이를 정말이지 꼭 보고 싶어요.” 나는, 엘스티르의 카르크튀이 항구에서 그토록 강렬하게 드러나던 그 새로운 성격이 어쩌면 그 장소 자체의 어떤 특별한 성질보다는 화가의 시각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당신 그림을 본 뒤로, 제가 가장 가 보고 싶은 곳이 바로 거기, 거기와 라즈 곶인 것 같아요. 물론 여기서는 꽤 먼 여행이 되겠지만요.” “그래요, 게다가 설령 더 가깝지 않더라도, 그래도 나는 아마 당신에게 카르크튀이에 가 보라고 권하겠어요.” 그가 대답했다. “라즈 곶은 웅장하지요, 하지만 결국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노르망디나 브르타뉴의 높은 절벽일 뿐이에요. 카르크튀이는 아주 달라요, 평평한 물가에서 불쑥 솟구친 그 바위들이 있으니까요. 프랑스에서 그와 같은 곳은 나도 아는 게 없어요, 오히려 플로리다의 어떤 지방에서 보는 것을 떠올리게 하지요. 몹시 흥미롭고, 그런 점에서 지극히 거칠기도 하답니다. 클리투르프와 네옴 사이에 있어요. 그 일대가 얼마나 황량한지는 당신도 알잖아요. 해안선의 굽이가 기막히지요. 이곳 해안선은 여느 데와 다를 게 없지요. 하지만 그쪽을 따라가면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얼마나 부드러운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밤이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발길을 돌릴 때였다. 내가 엘스티르를 그의 별장 쪽으로 배웅하고 있는데, 문득, 마치 파우스트 앞에 불쑥 솟아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큰길 끝에, 내 자신과 정반대되는 기질을, 내가 나의 나약함과 지나치게 시달리는 예민함과 지성 탓에 그토록 결여하고 있던 저 반쯤 야만적이고 잔혹한 생명력을 그저 형상으로 옮겨 놓은 듯, 비현실적이고 악마 같은 무언가가 나타났으니, 세상 다른 무엇으로도 착각할 수 없는 그 본질의 몇 점, 저 식충류 같은 소녀들 무리의 몇 낱 홀씨였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한 듯한 기색이었으나, 그럼에도 틀림없이, 다가오면서 그들 특유의 빈정대는 투로 나를 품평하려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우리의 충돌이 이제 피할 수 없으며 엘스티르가 틀림없이 나를 부르리라 느낀 나는, 파도의 충격을 맞을 채비를 하는 해수욕객처럼 등을 돌렸다. 나는 우뚝 멈춰 서서, 나의 저명한 동행이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둔 채, 마침 우리가 그때 지나치던 골동품 가게의 진열창 쪽으로, 문득 거기에 온 정신이 팔리기라도 한 듯 허리를 숙이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나는 이 소녀들 말고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척 보이는 것이 싫지 않았고, 엘스티르가 정말로 나를 불러 그들에게 소개할 때면 내가, 놀라움이 아니라 놀란 듯 보이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그런 도전적인 표정을 짓게 되리라는 것을, 이토록이나 우리는 저마다 서투른 배우이거나 남들이 저마다 능숙한 독심술사인 것이니,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나란 말인가요?” 하고 묻는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키기까지 하고는, 순순하고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숙인 채,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소개되려고 옛 도자기 연구에서 억지로 떼어내진 데 대한 짜증을 얼굴에 차갑게 감추고서 그에게 달려가 합류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진열창을 살피며, 엘스티르가 외친 내 이름이 예상된 무해한 총알처럼 내게 날아와 박힐 그 순간을 기다렸다. 이 소녀들에게 소개되리라는 확실함은, 내가 그들에게 완전한 무관심을 꾸며 낼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 순간부터 피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을 알게 되는 즐거움은 이내 오그라들기 시작해, 내게는 생루와 이야기 나누는 즐거움보다도, 할머니와 저녁을 드는 즐거움보다도, 발베크 근방에서 나들이를 하는 즐거움보다도 못한 것이 되었으니, 그 나들이란, 옛 건물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탓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단념하게 될 공산이 크다고 아쉬워하던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막 느끼려던 즐거움을 줄어들게 한 것은 그 실현의 임박함만이 아니라 그 어긋남이기도 했다. 유체정역학의 법칙만큼이나 정확한 법칙들이, 우리가 정해진 순서로 빚어내는 이미지들의 상대적 위치를 지켜 주는데, 다가오는 사건은 그것을 단숨에 뒤엎는다. 엘스티르가 막 나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이것은 내가 해변에서, 내 침실에서, 그토록 자주 이 소녀들과 인사를 트는 나를 상상하던 그 방식과는 조금도 같지 않았다. 막 벌어지려는 일은 다른 사건, 내가 채비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나는 내 욕망도 그 대상도 알아보지 못했고, 엘스티르와 함께 나온 것을 거의 후회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느끼리라 기대한 즐거움이 오그라든 것은, 이제 그 무엇도 그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 갈 수 없다는 확실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저 자신 안의 어떤 잠재된 탄력에 의한 듯, 그 확실함의 압력에서 벗어나자마자 제 온 크기를 되찾았으니, 내가 고개를 돌리기로 마음먹고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채 소녀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엘스티르를 본 그 순간이었다. 그에게 가장 가까이 선 소녀의 얼굴은, 둥글고 통통하며 두 눈의 빛으로 반짝여, 꼭대기에 파란 하늘 한 조각을 얹을 자리를 남겨 둔 케이크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두 눈은, 어떤 대상에 고정되어 있을 때조차 움직임의 인상을 주었으니, 마치 바람 센 날 공기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와 변함없는 창공 사이를 내닫는 그 속도를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듯이. 한순간 그녀의 시선이 내 시선과 엇갈렸으니, 마치 폭풍우 치는 날 흘러가는 하늘이, 저희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비구름을 뒤쫓아 따라잡고, 스치고, 뒤덮고, 지나쳐 사라지듯이.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고, 이내 멀리 떠밀려 흩어진다. 그렇게 우리 두 눈은 한순간 마주하였으나, 어느 쪽도 저희 시선 앞에 펼쳐진 그 하늘의 대륙이 앞날의 축복을 품었는지 재앙을 품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시선이 내 시선과 곧바로 겹친 순간에, 그것은 움직임을 늦추지 않은 채로 눈에 띄게 흐릿해졌다. 그렇게 별 총총한 밤에 바람에 밀린 달이 구름 뒤로 지나며 한순간 제 빛을 가리지만, 이내 다시 빛나리라. 그러나 엘스티르는 이미 소녀들에게 작별을 고했고, 나를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어느 골목길로 사라졌고, 그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의 온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그날 알베르틴이 내게 지난날들과 같아 보이지 않았으며, 그 뒤로도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가 다르게 보이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한 사람의 겉모습과 비중과 크기에 일어나는 어떤 변화들이, 그 사람과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어떤 의식 상태들의 가변성 탓일 수도 있음을 느꼈다. 그러한 변모에서 중요한 몫을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믿음이다. (그날 저녁 내가 곧 알베르틴을 알게 되리라는 나의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의 소멸은, 단 몇 초의 간격을 두고, 그녀를 내 눈에 거의 하찮은 존재로, 그다음에는 한없이 소중한 존재로 만들었다. 몇 해 뒤에는, 알베르틴이 내게 충실하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의 사라짐이 비슷한 변화를 불러왔다.)
물론 오래전 콩브레에서, 나는 어머니가 곁에 없다는 나의 슬픔이, 하루의 어느 때인가에 따라, 내 감수성을 번갈아 지배하던 두 우세한 기분 가운데 어느 하나로 내가 접어드느냐에 따라, 오그라들거나 늘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슬픔은 오후 내내 해가 비칠 때의 달빛만큼이나 감지되지 않다가, 밤이 오면, 이제 지워져 버린 최근의 기억들을 대신하여 내 불안한 마음속에 홀로 군림하곤 했다. 그러나 발베크에서의 그날, 엘스티르가 소녀들과 헤어지면서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배웠다. 어떤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우리 눈에 지니는 비중의 변화가, 단지 이 두 기분의 교대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들의 이동에도 달려 있을 수 있음을. 이를테면 죽음을 비현실의 광채로 적셔 우리에게 대수롭지 않게 보이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느 야회에 참석하는 일에 비중을 두게 하는 그런 믿음들 말이니, 만일 우리가 단두대에서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통고에 그 야회를 따스한 광채로 적셔 주던 믿음이 단박에 깨진다면, 그 야회는 매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하는 이 몫을, 내 안의 무언가가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나의 의지였다. 그러나 정신과 마음이 여전히 모르는 채 있다면 그 앎은 헛되다. 이 정신과 마음은, 우리가 어떤 정부(情婦)를 버리고 싶어 안달한다고 믿을 때 선의로 그리하는 것인데, 실은 우리가 아직 그녀에게 매여 있다는 것을 오직 우리의 의지만이 안다. 이는 그것들이, 우리가 언제라도 그녀를 다시 보리라는 믿음으로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음이 깨지고, 이 정부가 우리에게서 영영 떠났음을 그것들이 문득 깨닫게 되면, 그때 정신과 마음은 초점을 잃고 미친 것들처럼 내몰리며, 아무리 하찮은 즐거움도 한없이 커진다.
믿음의 변화는 사랑의 소멸이기도 하니, 이 사랑이란, 미리 존재하며 옮겨 다니다가, 그 여인이 거의 얻을 수 없으리라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어느 한 여인의 이미지에 가서 머무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정확한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그 여인 자체보다는, 그녀를 알게 될 방도를 더 많이 생각한다. 온갖 고뇌가 잇달아 자라나, 그 사랑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대상인 그녀에게 우리의 사랑을 확고히 붙들어 매기에 충분해진다. 우리의 사랑은 거대해지고, 그 안에서 실제 여인이 얼마나 작은 자리를 차지하는지 우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엘스티르가 걸음을 멈추고 소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내가 본 그 순간처럼, 우리가 문득 불안해하기를, 괴로워하기를 그친다면, 이 괴로움이야말로 우리 사랑의 전부인 까닭에, 마침내 그 값어치를 미처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던 먹이를 우리가 움켜쥐는 그 순간에 사랑이 별안간 사라져 버린 듯이 여겨진다. 내가 알베르틴에 대해 무엇을 알았던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옆모습을 한두 번 언뜻 본 것뿐, 그것은 분명, 내가 순전히 미적인 이유에 이끌렸더라면 그녀보다 더 좋아했어야 마땅할 베로네세의 여인들의 옆모습보다 덜 아름다웠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유에 내가 이끌릴 수 있었으랴, 불안이 가라앉고 나자 나는 그 말 없는 옆모습들밖에 되살릴 수 없었으니. 그 밖에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알베르틴을 처음 본 이래로 나는 날마다, 천 번씩이나 그녀를 곱씹었고, 내가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던 것과 더불어 끝없는 말 없는 대화를 이어 갔으니, 그 안에서 나는 그녀로 하여금 내게 묻고 답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공상 속에서 시시각각 잇달아 뒤따르던 상상의 알베르틴들의 무한한 행렬 속에서, 해변에서 언뜻 본 실제 알베르틴은 오직 맨 앞에만 나타났으니, 마치 어느 배역을 창조한 여배우, 그 주연배우가 긴 공연들의 행렬 가운데 처음 몇 번에만 나서듯이. 그 알베르틴은 하나의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고, 그 위에 겹쳐진 모든 것은 내 자신에게서 자라난 것이었으니,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에는, 오직 분량만 헤아리더라도, 우리 자신이 보태는 몫이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우리에게 오는 몫을 그토록이나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온전히 이루어진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핵심을 중심으로 맺어질 뿐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존속하기까지 하는 사랑들이 있으니, 육체로써 그 기도가 이루어진 사랑들 가운데서도 그러하다. 할머니를 가르친 적이 있는 어느 늙은 소묘 선생은, 어느 이름 없는 정부(情婦)에게서 딸 하나를 얻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소묘 선생은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그녀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소묘 선생 앞에서 그 여자를 입에 올리기를 한 번도 달가워하지 않았던 할머니와 콩브레의 몇몇 부인들은, 하기야 그는 그 여자와 공식적으로 ‘살림을 차린’ 적도 없고 비교적 얕은 관계였지만, 힘을 모아 그 어린 딸에게 연금을 사 주어 그 아이의 앞날을 보장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제안한 것은 할머니였다. 여러 벗들이 난색을 표했으니, 따지고 보면 그 아이가 정말 그토록 흥미로운 경우인지, 심지어 그 아이가 아비로 알려진 사람의 자식이기나 한지, 그런 여자들의 일이란 결코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매듭지어졌다. 아이가 부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러 왔다. 아이는 못생겼고, 늙은 소묘 선생과 우스울 만큼 닮아 온갖 의심의 그림자를 걷어 냈다. 머리카락만이 그 아이에게서 유일하게 고운 것이었기에, 부인들 가운데 하나가 아이와 함께 온 그 아버지에게 말했다. “머리카락이 참 곱기도 하네요.” 그리고 이제 죄지은 여자는 죽었고 노인도 반쯤밖에 살아 있지 않으니, 자신들이 늘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 온 그 과거를 조심스레 넌지시 비쳐도 해될 것이 없으리라 여긴 할머니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건 집안 내림이지요. 아이 어머니도 그렇게 고운 머리카락을 지녔던가요?” “모르겠습니다.” 노인의 별난 대답이었다. “나는 그이가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러나 나는 엘스티르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언뜻 보았다. 소녀들에게 소개받지 못한 낭패에 더하여, 나는 넥타이가 온통 비뚤어져 있고 모자 밖으로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삐져나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이런 꼴을 하고서나마 그들이 엘스티르와 함께 있는 나를 보았고 그리하여 나를 잊을 수 없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또한 그날 아침 할머니의 권유로, 자칫하면 그저 흉하기만 한 조끼를 입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맵시 있는 조끼를 걸치고, 게다가 가장 좋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우리가 애타게 바라던 사건이란 결코 우리가 기대해 온 그대로 일어나는 법이 없어서, 우리가 기대어도 되리라 여겼던 이점들은 어그러지지만, 우리가 바란 적도 없는 다른 이점들이 나타나 우리의 실망을 메워 준다. 게다가 우리는 최악을 어찌나 두려워했던지, 끝내는, 이것저것 두루 헤아려 보면, 우연이 전체로 보아 우리에게 꽤 너그러웠던 셈이라고 느끼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저는 정말이지 그들을 알고 싶었어요.” 엘스티르에게 다가서며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나요?” 이것이 그가 실제로 한 말이었으나, 그 말이 그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으니, 만일 그가 내 바람을 들어줄 마음이었다면 나를 제 곁으로 부르는 일쯤은 아주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마도, 그가 이런 투의 말을, 잘못을 저지른 서민들이 흔히 쓰는 그런 말을 들어 온 탓이었고, 위대한 사람도 어떤 점에서는 서민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날마다 먹는 빵을 같은 빵집에서 얻듯이 날마다 쓰는 핑계도 같은 밑천에서 가져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표현들이 (그 글자 그대로의 뜻은 진실과 반대인 까닭에, 거의,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거꾸로’ 읽어야 마땅한 표현들이) 어떤 반사작용의 순간적 결과, 그 음화(陰畫)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두르고 있었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이, 자기들에게 그다지 끌리지 않는 사람을 그가 부르는 것을 말렸음이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내가 그들에 관해 던진 그 모든 질문과 내가 그들에게 품은 관심을 그가 틀림없이 보았을 터인데도, 나를 부르지 않았을 리 없으니. “우리 방금 카르크튀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그의 별장 쪽으로 걸어가며 그가 말을 꺼냈다. “작은 습작을 하나 그린 게 있는데, 거기서는 해변이 어떻게 굽는지 훨씬 잘 볼 수 있어요. 그 그림도 나쁘지 않지만, 이건 다르지요. 괜찮으시다면, 우리 우정을 다지는 뜻으로, 그 습작을 당신에게 드리고 싶군요.” 그가 말을 이었으니, 우리가 바라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늘 다른 무언가를 내줄 채비가 되어 있는 법이다.
“혹시 그런 게 있으시다면, 미스 사크리팡 그 작은 그림의 사진을 꼭 갖고 싶어요. ‘사크리팡’, 그건 설마 진짜 이름은 아니겠지요?” “그건 그림 속 인물이 어느 시시한 소극(笑劇) 뮤지컬에서 연기한 배역의 이름이에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선생, 저는 그 여자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마치 제가 그 여자를 안다고 여기시는 것 같군요.” 엘스티르는 잠자코 있었다. “그거 결혼 전의 스완 부인 아닙니까?” 나는, 진실에 우연히 문득 발이 걸려 넘어지는 그런 일들 가운데 하나로서 넌지시 던져 보았다. 그런 일이란 참으로 좀처럼 드문 것이지만, 그럼에도 길게 보면, 그 이론을 무너뜨릴 온갖 빗나간 추측들을 잊어버리는 수고만 마다하지 않는다면, 예감이라는 설(說)에 얼마간 차곡차곡 힘을 실어 준다. 엘스티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초상은 과연 오데트 드 크레시의 것이었다. 그녀는 여러 이유로 그것을 간직하지 않는 편을 택했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덜 뚜렷한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그 초상은, 오데트가 제 이목구비를 다잡아 자신의 얼굴과 자태를, 그 큰 윤곽을 그녀의 미용사들과 재봉사들과 그녀 자신이, 곧 서 있는 자세와 말하는 방식과 미소 짓는 방식과 손을 놀리는 방식과 눈을 놀리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으로, 앞으로 오랜 세월 내내 지켜 나가게 될 그 창조물로 빚어낸 시점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스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인 그 ‘규격이 확정된’ 오데트를 담은 셀 수 없는 사진들 모두보다, 그가 제 방에 간직해 둔 작은 사진들을, 팬지꽃으로 장식한 밀짚모자 아래로, 부풀린 머리에 이목구비가 초췌한, 곱지도 않은 여윈 젊은 여인이 보이는 그 작은 사진들을 더 좋아하게 만들려면, 물릴 대로 물린 연인의 타락한 취향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점을 접어두더라도, 그 초상이 스완이 아끼던 사진처럼 오데트의 이목구비를 위엄 있고 매혹적인 새로운 유형으로 체계화하기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에 그려진 것이었다 해도, 엘스티르의 시선만으로도 그 유형을 흐트러뜨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예술적 천재의 반응은, 원자의 결합을 해체한 뒤 정반대의 순서로, 또 다른 유형을 따라 새로이 결합시키는 능력을 지닌 저 극히 높은 온도와 같다. 한 여인이 제 팔다리와 이목구비를 그러모아 이루어 낸 그 인위적으로 조화로운 전체, 그것이 지속되도록 날마다 외출하기 전 거울 앞에서 모자의 각도를 바꾸고 머리를 매만지고 눈빛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그 연속성을 확인하는 그 조화를, 위대한 화가의 예리한 눈은 순식간에 부수어 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머릿속에 품은 어떤 회화적 여성미의 이상을 충족시킬 여인의 이목구비의 재배열을 갖다 놓는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좇는 위대한 탐구자의 눈은 어느 나이에 이르면 흔히 자기에게만 흥미로운 그 관계들을 세우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어디서나 찾아내곤 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두고 야단법석하며 조르는 대신 손에 들어오는 악기로 만족하는 저 장인들이나 연주자들처럼, 예술가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그것이 제 목적에 쓸모가 있으리라 말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더없이 여왕다운 유형의 미인이던 뤽상부르 대공비의 사촌 하나는, 당시 새롭던 어떤 예술 양식에 이끌려, 자연주의 화파의 대가에게 자기 초상을 그려 달라고 청했다. 화가의 눈은 삶 어디서나 찾던 것을 즉시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의 화폭에는 도도한 귀부인 대신 거리의 부랑아 소년이, 그리고 그 뒤로 피갈 광장을 떠올리게 하는 드넓고 비스듬한 보라색 배경이 나타났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위대한 예술가가 그린 여인의 초상은 그 여인 쪽의 온갖 요구를 조금도 충족시켜 주려 하지 않을뿐더러, 이를테면 여인이 나이 들기 시작할 무렵, 아직 젊은 몸매를 돋보이게 하여 제 딸의 언니처럼, 심지어 딸의 딸처럼 보이게 하는, 거의 소녀나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사진을 찍게 하고, 필요하다면 곁에 세운 딸을 그 자리에 맞추어 “지독한 추물”로 꾸며 놓는 그런 요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여인이 감추려는 바로 그 결점들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 결점들은(예컨대 열에 들뜬 듯한, 다시 말해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은) 그림에 “개성”을 주기에 화가에게는 그만큼 더 구미가 당기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의 온갖 환상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하다. 그림을 본 그 사람의 눈앞에서, 여인이 그를 위해 그토록 자랑스레 떠받쳐 온 이상, 그녀를 유일무이하고 불변하는 자태 속에 다른 인류로부터 그토록 멀리, 그토록 높이 올려 두었던 그 이상이 티끌로 부스러지는 것이다. 이제 추락하여, 난공불락으로 군림하던 제 고유의 유형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그녀는, 그 우월함의 전설을 우리가 더는 믿지 않게 된 한낱 평범한 여인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 유형 속에 오데트 같은 여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녀의 개성, 그녀의 정체성까지 담겨 있다고 여기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녀를 그 유형에서 이렇게 옮겨 놓은 초상 앞에 서면 그저 “저이를 어쩌면 저리 밋밋하게 그려 놓았나!” 하고 항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니, 조금도 닮지 않았잖아!” 하고 항변하게 된다. 그것이 그녀일 수 있다고 믿기 어렵다. 우리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도 화폭에는 전에 본 적이 있다고 분명히 느껴지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오데트가 아니다. 그 사람의 얼굴, 몸, 전체적인 모습이 낯익어 보일 뿐이다. 그것들이 떠올리게 하는 것은 결코 그런 자세를 취한 적 없는, 그 자연스러운 몸가짐의 윤곽 어디에도 그토록 기묘하고 짓궂은 아라베스크의 기미가 없던 이 특정한 여인이 아니라, 다른 여인들, 엘스티르가 지금까지 그린 모든 여인들이다. 서로 아무리 다를지언정 그가 한결같이 화폭 위에 이렇게 심어 놓기로 한 여인들, 곧 관객을 마주한 채 치마 밑으로 활처럼 굽은 한 발을 내밀고, 한 손에는 커다랗고 둥근 모자를 들어, 그 모자가 가리는 무릎 높이에서, 그림 위쪽에 역시 하나의 원반으로 나타나는 것, 곧 얼굴과 대칭을 이루게 한 여인들 말이다. 게다가 천재의 손이 그린 초상은 여인의 교태와 그녀의 이기적인 미의 관념이 규정해 놓은 그 유형을 해체하고 파괴할 뿐 아니라, 그 초상이 오래된 것이기까지 하면, 사진이 오래전 유행의 옷차림으로 모델을 늙어 보이게 하듯 원본을 늙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초상에서 그 연대를 드러내는 것은 그 시절 여인이 옷을 입던 방식만이 아니라,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방식도 있다. 그리고 엘스티르의 이 초기 화법은 오데트에게 가장 치명적인 출생증명서였다. 같은 시기의 사진들이 그러했듯 그것은 그녀를 이런저런 유서 깊은 화류계 여인들의 손아래 누이로 못 박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초상을, 마네나 휘슬러가 이미 망각이나 역사에 속해 버린 사라진 모델들을 그린 수많은 초상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