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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⑧

2권 제2부 · 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엘스티르를 그의 집 문까지 바래다주며 그의 곁에서 말없이 곱씹은 이 사유의 흐름을 따라, 나는 방금 그의 모델의 정체를 알아차린 발견에 이끌려 가고 있었는데, 그 최초의 발견이 나로 하여금 화가의 정체에 얽힌, 한층 더 마음을 뒤흔드는 두 번째 발견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데트 드 크레시의 초상을 그렸던 것이다. 이 천재, 이 현자, 이 은둔자, 놀라운 언변을 지녔고 누구보다 무엇보다 우뚝 솟은 이 철학자가, 한때 베르뒤랭 부부의 “비호를 받던” 그 어리석고 타락한 보잘것없는 화가였다니, 과연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그들을 알았는지, 혹시 그들이 비슈 라고 부르던 이가 그가 아니었는지 물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치 내 질문이 이미 끝나 버려 다소 멀어진 자기 생애의 한 시절에 관한 것인 양, 자기 말이 내 안에서 얼마나 소중히 간직해 온 환상을 산산조각 내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 한 채로. 그러다 눈을 들어 내 얼굴에 떠오른 실망을 읽었다. 그의 얼굴에는 언짢은 빛이 어렸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그의 집 대문 앞에 거의 다다랐으므로, 마음과 지성이 그만큼 빼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다소 쌀쌀맞게 “잘 가게” 하고 인사하고는 다시는 나를 보지 않으려 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대하는 엘스티르의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스승다운 사람이었기에(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창조적 천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유일한 결점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그런 의미에서의 스승이었다는 점 말이다. 예술가가 정신의 참된 삶을 그 온전한 넓이로 살아 내려면 홀로여야 하며, 제자들에게조차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관한 것이든 남에 관한 것이든 온갖 상황에서, 젊은이를 더 잘 일깨우기 위해 그 속에 담긴 진실의 요소를 끌어내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상처 입은 자존심을 갚아 줄 만한 말을 하기보다는, 나에게 가르침이 되리라 여긴 말을 하기로 택했다. “어떤 사람도,”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지혜롭다 한들, 젊은 시절 어느 한때, 훗날 떠올리기 몹시 언짢아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식으로 살아 보지 않은 이는 없네. 그렇다고 그것을 온전히 후회할 일은 아니지. 우리 가운데 누구든 지혜로워질 수 있는 한도 안에서나마 자기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는지는, 그 마지막 단계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온갖 어리석고 해로운 화신(化身)들을 다 지나오지 않고서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름난 이들의 아들이며 손자인 젊은이들, 학창 시절 스승들이 마음의 고결함과 도덕적 세련을 심어 준 젊은이들이 있다는 걸 아네. 그들은 아마 지난날을 돌이켜 보아도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자기가 여태 한 말과 행동을 죄다 서명까지 붙여 공표할 수도 있을 걸세. 하지만 그들은 가련한 자들, 교조주의자들의 힘없는 후예들이며, 그들의 지혜는 부정적이고 메말라 있네. 지혜란 누가 갖추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광야의 여정을 지나, 아무도 덜어 줄 수 없는 노력 끝에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네. 우리의 지혜란 우리가 마침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그 시점이니 말일세. 자네가 흠모하는 삶, 자네에게 고귀해 보이는 태도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훈육이나 학교에서 스승들에게 받은 훈육의 결과가 아니라, 아주 다른 종류의 시초에서, 곧 그들 둘레에 만연하던 온갖 악하고 진부한 것의 영향에 맞선 반발에서 솟아난 것일세. 그것들은 하나의 투쟁이자 승리를 나타내지. 이른 젊음의 시절 우리가 한때 어떠했는가 하는 그 모습이, 훗날에는 알아보기 어려울뿐더러 곱씹어 보기에 결코 유쾌하지 않으리라는 것쯤 나도 아네. 하지만 우리는 그 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되네.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살았다는 증거이며, 삶의 흔한 요소들에서, 화실의 삶에서, 예술가 무리의 삶에서(화가라고 가정한다면 말일세) 그것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우리가 끌어냈다는 것이 삶과 정신의 법칙에 부합한다는 증거이니까.” 그러는 사이 우리는 그의 집 문에 다다랐다. 나는 그 처녀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는 훗날 그들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나타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하리라 여겼던 지평 너머로 그저 스쳐 지나가 버리기만 하는 존재이기를 그쳤다. 그들 둘레에는 나를 그들에게서 갈라놓던 그 커다란 소용돌이가 더는 감돌지 않았다. 그 소용돌이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 어쩌면 영영 나에게서 달아나 버릴지 모른다는 것이 내 안에 불러일으킨, 끊임없이 활동하며 움직이고 다그치며 늘 새로운 불안을 먹고 자라던 욕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들을 향한 내 욕망을 잠재우고,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기꺼이 미루어 두게 되는 다른 온갖 욕망들 틈에 그것을 남겨 둘 수 있었다. 나는 엘스티르와 작별했다. 나는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그때 문득, 방금 전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무지 일어날 수 있으리라 여기지 못했던 그 온갖 우연의 사슬을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 엘스티르가 바로 그 처녀들의 친구라는 것, 그날 아침만 해도 나에게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그림 속 인물에 지나지 않던 그들이 나를 보았다는 것, 위대한 화가와 다정하게 어울려 거니는 나를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화가가 이제 내 은밀한 갈망을 알게 되어 틀림없이 그것을 달래 주려 애쓰리라는 것을. 이 모든 것이 나에게 기쁨의 원천이었으나, 그 기쁨은 숨은 채로 있었다. 그것은 다른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우리 혼자 남을 때까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기다리는 그런 방문객 가운데 하나였다. 그제야 우리는 그들을 알아보고, “무엇이든 분부하시지요” 하고 말을 건네며 그들이 전하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이따금 이 기쁨들이 우리 의식에 들어선 순간과 우리가 그것들을 맞아들일 겨를이 생긴 순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 그 사이 우리가 너무나 많은 사람을 만난 나머지, 그것들이 기다리다 지쳐 버리지나 않았을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을성이 있어 지치지 않으며, 사람들이 물러가기 무섭게 우리는 그것들이 거기서 우리를 맞을 채비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따금은 그때 우리 쪽이 너무나 지쳐 있어, 지친 정신에는 그 기억들, 그 인상들을 붙잡아 간직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인상들에게 우리의 연약한 자아란 유일하게 깃들 수 있는 거처요, 실현의 유일한 방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실패를 뉘우쳐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삶이란 현실의 먼지에 마법의 모래가 섞여 반짝이는 날, 삶의 하찮은 사건 하나가 낭만의 샘솟는 원천이 되는 날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흥미롭지 않으니까. 그럴 때면 다가갈 수 없던 세계의 곶 하나가 통째로 우리 꿈의 빛 속에 또렷이 솟아올라 우리 삶으로 들어오고,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이처럼, 꿈에서가 아니고는 결코 보지 못하리라 여길 만큼 그토록 애타게 꿈꾸던 이들을 실제로 보게 된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작은 무리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가망에서 내가 길어 올린 안도감은, 앞으로 며칠 동안은 그들을 지켜볼 수 없으리라는 사정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그 며칠은 생루의 출발 준비로 채워질 참이었다. 할머니는 생루가 당신과 나에게 베푼 온갖 친절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내 벗에게 어떻게든 건네고 싶어 하셨다. 내가 그가 프루동의 열렬한 흠모자라고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예전에 사 두었던 그 철학자의 자필 편지 모음을 가져오게 할 생각을 떠올리셨다. 생루는 그것이 도착한 날, 곧 발베크에서 그가 보내는 마지막 날에 그것을 보러 할머니 방으로 왔다. 그는 그것을 열심히 읽으며 한 장 한 장을 경건하게 어루만지고 문장들을 외우려 애썼다. 그러고는 탁자에서 일어나 너무 오래 머물렀다며 할머니께 사과하려던 참에, 이런 말을 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가져가세요. 간직하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그러려고, 드리려고 가져오게 한 거예요.”

그는 우리 의지의 개입 없이 일어나는 신체 상태를 우리가 어쩌지 못하듯,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는 방금 매를 맞은 아이처럼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고, 할머니는 그가 늘어놓을 수 있는 그 어떤 감사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그를 뒤흔드는 기쁨을 억누르려 (부질없이) 안간힘 쓰는 그 모습을 보는 것에 훨씬 더 마음이 뭉클해지셨다. 그러나 그는 감사를 제대로 표하지 못했을까 봐, 이튿날 자기를 연대로 데려다줄 지방 철도 회사의 작은 열차 창문에 몸을 내밀고서, 할머니께 자기 대신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해 달라고 나에게 청했다. 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해 여름 짐에 매이지 않고 그날 저녁 돌아올 참이면 자주 그랬듯, 이번에도 길로 갈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차피 무거운 짐을 죄다 열차에 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열차를 타는 편이 더 간편하다고 여겼는데, 상의를 받은 지배인이 “마차든 열차든 거기서 거기, 애매하달까요” 하고 대답한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둘이 매한가지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사실 프랑수아즈라면 “그게 그거라 다를 게 없다”고 표현했을 법한 것이었다). “좋아요,” 생루가 마음을 정했다, “그 ‘작은 굼벵이’를 타지요.” 지치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그것을 타고 벗과 함께 동시에르로 갔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대신, 발베크 역에서 기다리는 내내, 다시 말해 작은 열차의 기관사가 그들 없이는 출발하지 않겠다며 시간을 안 지키는 친구들을 기다리고 또 제 요기를 챙기느라 보낸 그 시간 내내, 나는 일주일에 몇 번씩 그리로 그를 보러 가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블로크도 역에 나와 있었으므로(생루로서는 몹시 못마땅한 일이었다), 생루는 우리 일행인 블로크가 자기더러 동시에르로 점심을, 저녁을 먹으러, 아예 눌러 지내러 오라고 조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알아채고는, 마침내 그에게로 돌아서서, 마지못한 초대의 예의를 상쇄하고 블로크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려는 더없이 쌀쌀맞은 어조로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비번인 날 오후에 동시에르를 지나게 되거든 병영으로 나를 찾아도 좋소. 하지만 나는 좀처럼 비번인 적이 없다오.” 어쩌면 로베르는 또한,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며, 내가 내색한 것보다 블로크와 더 가까운 사이라고 여겨, 이런 식으로 나를 다그쳐 줄 길동무를 마련해 주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어조가, 사람을 초대하면서도 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런 방식이 블로크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았을까 걱정스러웠고, 생루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내 짐작은 틀렸다. 열차가 떠난 뒤, 한쪽 길은 호텔로, 다른 쪽 길은 블로크네 별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까지 함께 걸어 돌아오는 동안, 그는 우리가 며칠에 동시에르로 갈 것이냐고 끊임없이 물어 댔으니, “생루가 자기에게 베푼 온갖 예의”를 생각하면 그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기로서는 “너무 무례한” 일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초대가 얼마나 간곡함과는 거리가 먼, 겨우 예의만 갖춘 어조로 울렸는지를 그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 혹은 알아채지 못한 척 여겨지기를 바랄 만큼 별로 언짢아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블로크가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장 동시에르로 달려가 웃음거리가 되는 짓을 삼가 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조언을 건네지 못했으니, 그런 조언이란 생루가 블로크 본인이 감명받은 것만큼 간곡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넌지시 비침으로써 그의 비위를 거스를 뿐이었을 테니까. 그는 지나치게 선뜻 응하는 사람이었고, 이런 종류의 결점이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이들에게는 없을 뛰어난 자질들로 다 상쇄된다 하더라도, 그는 경솔함을 거의 사람을 미치게 할 지경으로까지 밀어붙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동시에르에 가지 않고서는 그 한 주를 넘겨서는 안 되었다(그는 “우리”라고 했는데, 그가 자기 방문의 구실로 나의 동행을 어느 정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집으로 오는 내내, 나무 숲에 둘러싸인 체육관 앞에서, 잔디 테니스장 앞에서, 시청 앞에서, 조개 좌판 앞에서, 그는 나를 세워 놓고 날을 정하라고 애원했으며, 내가 정하지 않자 잔뜩 성이 나서는 이렇게 말하며 나를 떠났다. “나리 좋으실 대로 하시구려. 나로 말하면, 그가 초대했으니 갈 수밖에 없소이다.”

생루는 여전히 할머니께 제대로 감사드리지 못했을까 봐 몹시 걱정한 나머지, 하루 이틀 뒤 자기가 주둔한 도시에서 보내온 편지로 다시 한번 할머니께 감사를 전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그 도시는 소인이 그 이름을 찍어 놓은 봉투 위에서, 제 성벽 안, 루이 16세 기병 병영에서 그가 나를 생각하고 있노라고 일러 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나에게 달려오는 듯 보였다. 편지지에는 마르상트가의 문장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사자 한 마리와, 그 위에 얹힌, 프랑스 중신(重臣)의 관으로 이루어진 작은 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역에서 산 아르베드 바린의 책 한 권과 더불어,” 그는 이렇게 썼다, “꽤 즐겁게 지나간 여행 끝에(아마 러시아 작가인 듯한데, 외국인치고는 놀랄 만큼 잘 쓴 글로 보였네. 하지만 비평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무엇이든 읽어 낸 지식의 샘인 자네야 틀림없이 다 알고 있을 테니), 나는 다시 이 타락한 생활 한복판에 와 있네. 아아, 여기서 나는 발베크에 두고 와야 했던 것을 곁에 두지 못한 채 서글픈 유배객이 된 심정일세. 다정한 추억 하나, 지적인 매력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이 생활, 자네라면 아마 경멸의 눈으로 바라볼 이 환경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매력이 없지는 않다네. 지난번 이곳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달라진 듯하네. 그사이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가운데 하나, 곧 우리 우정이 비롯된 그 시기가 시작되었으니 말일세. 그것이 부디 끝나지 않기를 바라네. 우리 우정에 대해, 자네에 대해 나는 단 한 사람에게만 이야기했네. 자네에게 말한 적 있는 그 벗, 방금 이곳으로 뜻밖의 방문을 해 준 그 사람에게 말일세. 그녀는 자네를 무척 알고 싶어 하네. 그녀 역시 대단히 문학적인 사람이라, 자네와 잘 통하리라 여겨지네. 나로 말하면,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죄다 마음속으로 되짚어 보고, 결코 잊지 못할 그 시간들을 다시 살아 보려고, 동료들과 담을 쌓고 지내네. 훌륭한 친구들이지만 그런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거든. 이곳에서 맞은 첫날, 자네와 보낸 순간들에 대한 이 추억을 나는 글로 쓰지 않고 홀로 음미하며 불러내는 편이 차라리 나을 뻔했네. 하지만 나는 걱정스러웠네. 자네처럼 섬세한 지성과 지나치게 예민한 마음을 지닌 이가, 내게서 소식이 없으면 공연히 스스로를 괴롭히지나 않을까 하고 말일세. 다시 말해 자네가 여전히 이 무딘 병정에게 생각을 쏟아 주는 은혜를 베푼다면 말인데, 자네로서는 이 병정을 다듬고 세련되게 만들어, 조금 더 섬세하고 자네와 어울릴 만하게 갈고닦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걸세.”

대체로 이 편지는 그 다정한 정신에 있어, 내가 아직 생루를 알지 못하던 시절 그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써 주리라 상상하던 것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몽상은, 그의 첫인사가 보인 냉담함이 나를 얼음장 같은 현실과 마주 세우며 흔들어 놓았던 것인데, 그 현실이란 그러나 오래가지 않을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고 나서부터는, 점심때 우편물이 들어올 때마다 어느 것이 그에게서 온 편지인지 나는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편지에는 사람이 부재할 때 띠게 되는 그 두 번째 얼굴이 늘 서려 있었으니, 그 이목구비(곧 그의 필적) 속에서, 코의 윤곽이나 목소리의 억양에서만큼이나 한 개인의 영혼을 더듬어 읽고 있다고 여기지 못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식탁을 치우는 동안에도 기꺼이 자리에 남았고, 작은 무리의 처녀들이 지나갈 만한 때가 아니면, 더는 바다 쪽으로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엘스티르의 수채화에 그런 것들이 그려진 것을 본 뒤로, 나는 그것들의 시적 아름다움을 아끼듯이 현실에서 다시 찾아내려 했다. 아직 서로 엇갈려 놓인 나이프들의 부러진 듯한 몸짓, 아무렇게나 버려져 부풀어 오른 냅킨의 볼록함, 그 위로 햇빛이 노란 벨벳 조각을 기워 놓곤 하던 것, 그리하여 굽은 옆면의 고귀한 곡선을 한결 돋보이게 하던 반쯤 빈 잔, 그 얼어붙은 햇살처럼 맑은 반투명 크리스털의 한복판에, 거무스름하되 비쳐 드는 빛으로 반짝이는 포도주 앙금, 단단한 물건들의 자리 옮김, 빛과 그늘의 작용에 따른 액체의 변용, 반쯤 축난 접시 안에서 초록에서 파랑으로, 파랑에서 황금빛 노랑으로 옮아 가는 자두의 어른거리는 빛깔, 미각의 예식이 치러지는 제단인 양 식탁 위에 펼쳐진 흰 보 둘레에 하루 두 번씩 제자리를 잡으러 오는, 한 무리의 노부인 같은 의자들, 그 제단 위 굴 껍데기의 오목한 곳에는 자그마한 돌 성수반(聖水盤)에 담긴 듯 정화수 몇 방울이 고여 있었다. 나는 그때껏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곳에서, 더없이 평범한 사물들 속에서, ‘정물화’의 깊이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 애썼다.

생루가 떠나고 며칠 뒤, 내가 엘스티르를 졸라 조촐한 다과회를 열게 하는 데 성공하여 거기서 알베르틴을 만나기로 되었을 때, 그랑 호텔을 나서는 순간의 나에게서 엿보이던 그 산뜻한 용모와 말쑥한 차림새는(아아, 둘 다 덧없는 것이었다) 각기 여느 때보다 긴 휴식과 몸단장에 들인 각별한 공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들을(그리고 엘스티르와의 친분에서 생겨나는 신망까지도) 좀 더 흥미로운 다른 누군가를 사로잡는 데 아껴 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것들을 그저 알베르틴과 알고 지내게 되는 단순한 즐거움에 죄다 써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내 머리는 이제 그 즐거움이 확실해지고 나니 그것을 아주 낮게 값매겼다. 그러나 내면에서, 내 의지는 이 착각을 한순간도 함께 나누지 않았다. 그 의지란 잇따라 나타나는 우리의 여러 인격에 끈질기고 한결같이 봉사하는 하인으로,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긴 채 멸시받고 짓밟히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충실하여, 오직 그 주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결코 아쉬워하지 않도록, 주인인 자아의 변덕은 아랑곳없이 쉼 없이 애를 쓴다. 오래 계획하고 애타게 기다리던 휴가를 막 떠나려는 순간, 우리 머리와 신경이 과연 이 온갖 수고를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자문하기 시작할 때, 의지는 그 게으른 주인들이 만약 여행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라도 하면 당장 그것을 더없이 멋진 경험으로 여기기 시작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역 밖에서 제 어려움을 늘어놓으며 망설임을 부풀리도록 내버려 두고는, 기차가 떠나기 전에 표를 끊고 우리를 객차에 태우는 일에 부지런히 나선다. 의지는 머리와 신경이 변덕스러운 만큼이나 한결같지만, 말이 없고 제 행동을 해명하지 않으므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인격의 다른 구성 부분들은 그 완강한 결의에 이끌리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채, 오직 제 자신의 온갖 망설임만은 또렷이 분별한다. 그리하여 내 신경과 머리는 알베르틴과 알고 지내는 데 있을 즐거움의 참된 값어치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동안 나는 거울 앞에서, 신경과 머리라면 다른 기회에 쓰려고 고스란히 아껴 두었을 헛되고 스러지기 쉬운 매력들을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의지는 내가 출발해야 할 시각을 그냥 지나치게 두지 않았고, 마부에게 소리쳐 일러 준 것은 엘스티르의 주소였다. 머리와 신경은 이제 주사위가 던져진 마당이니 마음껏 이것을 “안된 일”이라 여겨도 좋았다. 만약 내 의지가 마부에게 다른 주소를 일러 주었더라면, 그것들은 보기 좋게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몇 분 뒤 엘스티르의 집에 다다랐을 때, 내 첫인상은 시모네 이 화실에 없다는 것이었다. 과연 비단 드레스 차림에 모자도 쓰지 않은 처녀 하나가 거기 앉아 있었으나, 그 놀라운 머릿결도, 그 코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폴로 모자를 쓴 채 나와 바다 사이를 스쳐 지나가던 젊은 자전거 타는 처녀로부터 내가 빚어낸 그 인간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것은 알베르틴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인 줄 알았을 때조차 나는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젊을 적에는 어떤 사교 모임에 들어서든 우리는 옛 자아의 의식을 잃고 다른 사람이 되며, 응접실 하나하나가 저마다 새로운 우주여서,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덕적 조망의 지배를 받으며, 이튿날 아침이면 죄다 잊어버릴 사람들, 춤, 카드놀이 탁자에, 마치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원토록 중요하기라도 할 듯 주의를 붙들어 맨다. 알베르틴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목적지에 이르려면, 결코 내가 짠 것이 아닌 길을 따라야 했다. 그 길은 먼저 나를 엘스티르 앞에 멈춰 세웠고, 내가 소개받는 다른 손님 무리를 지나, 이어 식탁을 따라 이어졌으며, 그 식탁에서 나는 딸기 타르트를 한두 개 권받아 먹었고, 그러는 동안 방의 다른 쪽에서 시작되는 음악에 꼼짝 않고 귀 기울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 여러 사건에, 시모네 에게 소개받는 일과 똑같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소개란 이제 그런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니,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그것이 그날 내가 그곳에 온 유일한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나날의 삶의 부산함 속에서, 참된 행복이든 크나큰 슬픔이든 언제나 이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찬 방 안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지난 한 해 동안 기다려 온 대답을, 길하든 치명적이든 그 대답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하고, 생각들이 하나둘 떠올라 매끄러운 표면을 이루며, 그 표면은 기껏해야 이따금, 뿌리는 깊되 좀처럼 자라지 못한 기억이, 곧 우리에게 불행이 닥쳤다는 기억이 안에서 둔하게 지끈거리는 것으로 살짝 찔릴 뿐이다. 불행 대신 행복인 경우라면, 여러 해가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렇게 떠올릴지도 모른다. 우리 감정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우리가 그것에 오래 마음 쓸 겨를도, 심지어 거의 알아차릴 겨를조차 없이 일어났으며, 그것도 어쩌면 오직 그 사건을 기대하며 갔던 어떤 사교 모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엘스티르가 방 조금 안쪽에 앉아 있던 알베르틴에게 나를 소개하려고 함께 가자고 청했을 때, 나는 우선 커피 에클레르를 마저 먹고 나서, 방금 알게 된 한 노신사에게(그리고 그가 감탄하던, 내 단춧구멍에 꽂힌 장미를 어쩌면 그에게 건네도 좋겠다고 생각한 그 노신사에게) 짐짓 큰 관심을 보이며 옛 노르망디 장터에 관해 더 이야기해 달라고 청했다. 그렇다고 뒤이은 소개가 나에게 아무 즐거움도 주지 않았다거나 내 눈에 뚜렷한 중요성을 띠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으로 말하면, 나는 당연하게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호텔로 돌아와 내 방에 홀로 있으며 다시금 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그것을 의식했다. 이 점에서 즐거움은 사진과 같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우리가 찍는 것은 한낱 음화(陰畵) 필름일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집에 돌아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입구가 우리에게 막혀 있던 저 내면의 암실을 다시금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을 현상한다.

그 소개가 나에게 가져다준 즐거움에 대한 의식은 이렇게 몇 시간 늦춰졌으나, 이 소개의 중요성만은 나는 곧바로 느꼈다. 그런 소개의 순간에는, 우리가 별안간 부유해진 듯, 여태 몇 주째 헛되이 좇아 온 즐거움에 이제부터 우리를 들여보내 줄 통행증을 받아 든 듯 느껴짐에도, 우리는 이 획득이 우리에게 한낱 고된 탐색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것(그것만이라면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울 안도일 텐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에도, 곧 우리의 상상이 마구 일그러뜨려 놓았고 우리가 결코 그녀에게 알려지지 못하리라는 불안한 두려움이 부풀려 놓았던 그 여인의 존재에도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을 너무나 또렷이 깨닫는다. 우리를 소개하는 이의 입술 위에서 우리 이름이 울리는 순간, 더욱이 그가 지금 엘스티르가 그러하듯 우리에 대한 칭찬 섞인 소개로 그 이름을 부풀리는 순간, 동화 속에서 마법사가 한 사람에게 별안간 다른 누군가가 되라고 명하는 때와도 같은 그 성스러운 순간에, 우리가 그 곁에 이르기를 그토록 갈망하던 그녀가 사라져 버린다. 어떻게 그녀가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겠는가. 우선 한 가지 이유로, 그 낯선 이가 우리 이름이 불리는 것과 우리라는 사람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에,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아득히 먼 거리에 놓여 있던 그 눈(헤매고 걷잡을 수 없이 절박하게 엇갈리는 우리 눈이 결코 마주치는 데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 눈)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찾던 그 의식 어린 시선, 전할 길 없는 그 생각은, 기적처럼, 그러면서도 지극히 단순하게, 미소 짓는 거울의 유리 뒤에서인 양 그 눈 속에 그려진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와 가장 다르게 보이던 사람 속에 우리 자신이 이렇게 육화(肉化)되는 것이야말로 방금 소개받은 사람의 겉모습을 가장 크게 바꾸어 놓는 것이라 해도, 그 사람의 형체는 여전히 자못 어렴풋한 채로 남으며, 우리는 그녀가 신(神)으로 드러날지, 탁자로 드러날지, 대야로 드러날지 마음껏 자문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서 오 분 만에 흉상 하나를 빚어내는 밀랍 세공사만큼이나 날렵하게, 이제 그 낯선 이가 우리에게 건넬 몇 마디 말이 그녀의 형체를 실체로 만들어, 조금 전만 해도 우리의 욕망과 상상을 꾀어내던 온갖 가정을 배제할 확고하고 결정적인 무언가를 그녀에게 부여할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알베르틴은 이 모임에 오기 전부터 이미, 나에게 있어 우리 삶을 떠돌 만한 유일한 환영, 곧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언뜻 스쳐 보기만 한 지나가는 낯선 이에게서 남는 그런 환영이기를 그쳤다. 봉탕 부인과의 친척 관계가, 그 놀라운 가정들이 퍼져 나갈 수 있었던 통로 가운데 하나를 막아 버림으로써, 이미 그 가정들의 범위를 좁혀 놓았던 것이다. 내가 그 처녀에게 더 다가가 그녀를 더 잘 알게 될수록, 그녀에 대한 내 앎은 뺄셈의 과정을 겪어, 상상과 욕망의 온갖 요소가 무한히 값이 덜한 관념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그 관념에는 이윽고, 실생활의 영역에서 주식회사가 출자자의 자본에 이자를 치른 뒤 덤이라 부르며 얹어 주는 것과 얼추 맞먹는 무언가가 더해졌음을 인정해야겠다. 그녀의 이름, 그녀의 집안 인연이 내 억측에 그어진 최초의 한계였다. 그녀 곁에 바싹 서서 그녀의 뺨에, 눈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점을 다시 보는 동안 건넨 그녀의 다정한 인사가 또 다른 단계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가 언급한 두 사람을 두고 (“아주”라는 말 대신) “완벽하게”라는 부사를 쓰는 것을 듣고 놀랐으니, 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여잔 완벽하게 미쳤지만, 그래도 참 착해요”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 남잔 완벽하게 상스러운 데다 완벽한 따분쟁이예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완벽하게”라는 말버릇이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해도, 그것은 자전거를 탄 그 바쿠스 무녀(巫女), 골프장의 광란하는 뮤즈가 이르렀으리라고는 도무지 상상조차 못 했을 문명과 교양의 수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첫 번째 변신 이후로 알베르틴이 나에게 다시는, 그것도 여러 번 변하지 않으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우리에게 내보이는, 그 얼굴 표면에 드러난 좋고 나쁜 자질들은, 우리가 다른 각도에서 다가가면 전혀 다른 순서로 재배열된다. 마치 어떤 도시에서, 한 줄로 들쭉날쭉 늘어선 듯 보이던 건물들이, 다른 방향에서 보면 저마다 다른 거리로 물러나 앉으며 그 상대적 높낮이가 달라지듯이 말이다. 우선 알베르틴은 이제 나에게 냉혹하다기보다 거의 겁먹은 사람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나에게 버릇없다기보다 오히려 얌전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한 처녀들을 하나씩 두고 그녀가 갖다 붙인 “촌스러운 맵시”, “우스꽝스러운 태도”라는 평으로 미루어 그러했다. 끝으로, 그녀는 내 시선의 표적으로, 뚜렷이 발그레하고 눈에 그다지 곱지 않은 관자놀이를 내밀었을 뿐, 그때껏 내가 늘 그녀와 결부시켜 온 그 야릇한 눈길은 더는 내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두 번째 인상일 뿐, 내가 잇따라 거쳐 갈 다른 인상들이 분명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더듬거리며 나아가지 않고서는 안 되는 끝에 제 첫인상의 착시를 알아차리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타인에 대한 정확한 앎에 이를 수 있으니, 그런 앎이 과연 가능하다고 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에 대한 우리의 애초 인상이 교정되는 동안, 무생물이 아닌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붙잡았다고 여기면 그는 움직이고, 우리가 마침내 그를 또렷이 보고 있다고 상상할 때, 우리가 또렷이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은 이미 그에 대해 우리가 빚어 놓았던 옛 인상들일 뿐이며, 그때 그 인상들은 더는 그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