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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⑨

2권 제2부 · 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그런데도, 그것이 뒤에 반드시 데려오는 피할 수 없는 실망이 어떠하든, 우리가 절반밖에 보지 못한 것, 우리가 한가로이 곱씹고 상상해도 좋았던 것을 향한 이 움직임, 이 움직임이야말로 감각에 이로운, 입맛을 돋우는 유일한 움직임이다. 게으름이나 소심함에서, 알고 지내기를 미리 꿈꿔 보지도 않은 채 알게 된 벗들의 집 문 앞으로 곧장 마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 그 도중에 감히 멈춰 서서 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살펴본 적이 결코 없는 사람들, 그런 이들의 삶에는 얼마나 따분한 단조로움이 배어 있을 것인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은 그 모임으로, 엘스티르가 나를 알베르틴에게 데려가게 하기 전에 마저 먹은 커피 에클레르로, 노신사에게 건넨 장미로, 그 자리의 정황이 우리도 모르게 골라낸 온갖 세세한 것들로 가득했으니, 그것들은 우리가 첫 만남에 대해 간직하는 그림을 특별하고도 자못 우연한 순서로 이루어 낸다. 그러나 이 그림을, 나는 몇 달 뒤 크게 놀라며 새로운 관점에서, 나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나만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알베르틴에게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가 그 에클레르며 내가 남에게 건넨 그 꽃이며, 내가 나에게만 중요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나만이 알아차렸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나에게 상기시켰기 때문인데, 이제 나는 그것들이 그 존재조차 짐작 못 했던 판본으로 알베르틴의 마음속에 이렇게 옮겨 적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그 첫날, 호텔로 돌아와 내가 가지고 온 기억을 눈앞에 그려 볼 수 있었을 때, 나는 그 눈속임이 얼마나 감쪽같은 솜씨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어떤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사람은 요술쟁이의 재간 덕분에, 내가 그토록 오래 바닷가를 거니는 모습을 좇던 그 다른 사람을 실제로는 조금도 구현하지 않은 채, 감쪽같이 그녀를 대신해 놓인 것이었다. 하기야 나는 그쯤은 미리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닷가의 그 처녀란 나 자신이 지어낸 허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엘스티르와 나눈 대화에서 그녀를 이 다른 처녀와 동일시해 버렸던 터라, 상상 속 알베르틴에게 했던 사랑의 약속을 실제의 알베르틴에게 지켜야 할 도리로 여겼다. 우리는 대리로 약혼해 놓고는, 그다음에 그 사이에 끼어든 사람과 혼인해야 한다고 여긴다. 게다가,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내 삶에서, 예의 바른 몸가짐이며 “완벽하게 상스러운”이라는 그 표현이며 발그레 달아오른 관자놀이의 기억에서 충분한 위안을 찾던 어떤 번민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 기억은 내 안에 또 다른 종류의 욕망을 일깨웠으니, 그것은 잔잔하고 조금도 괴롭지 않아 차라리 오누이의 정에 가까웠음에도, 길게 보면 못지않게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욕망이 나로 하여금 이 새로운 사람에게 입 맞추고 싶은 절박한 욕구를 시시각각 느끼게 했기 때문인데, 그 사람의 사랑스러운 몸가짐, 그녀의 수줍음, 뜻밖의 다가가기 쉬움은 내 상상의 부질없는 진행을 멈춰 세우면서도 감상적인 고마움을 자아냈다. 그리고 기억은 이내 서로 무관한 사진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여,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는 수집품 속 장면들 사이에서 온갖 연결 고리와 어떤 종류의 순서든 모조리 지워 버리므로, 가장 최근의 것이 반드시 그 이전의 것들을 파괴하거나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날 오후 내가 이야기를 나눈, 평범하되 마음을 끄는 알베르틴을 마주하고서도, 나는 여전히 바다를 배경으로 윤곽이 그려진 그 다른, 신비로운 알베르틴을 보고 있었다. 이것들은 이제 기억이었으니, 다시 말해 이제 나에게는 어느 쪽도 다른 쪽보다 더 참되어 보이지 않는 그림들이었다. 그러나 알베르틴에게 소개받은 이 첫 오후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그녀의 뺨에, 눈 바로 아래에 있는 그 자그마한 점을 되살려 보려 애쓰던 중에, 나는 엘스티르의 창에서 내다보다가 알베르틴이 지나갔을 때 그 점을 그녀의 턱에서 보았음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에게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내 부정확한 기억은 그 점을 알베르틴의 얼굴 여기저기로 떠돌게 하며 이번에는 이곳에, 다음에는 저곳에 붙여 놓곤 했다.

시모네 에게서 이미 알던 처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녀를 발견한 내 실망이 어떠하든, 발베크 성당을 보았을 때의 그 거친 각성이 내가 여전히 캉페를레며 퐁타방이며 베네치아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막지 못했듯이, 나는 어쨌든 알베르틴을 통해서, 설령 그녀 자신은 내가 바라던 그 전부가 아니라 해도, 그녀의 벗들, 곧 작은 무리의 처녀들과 알고 지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처음에는 실패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 역시) 아직 오랫동안 발베크에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만나려는 노력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우연한 마주침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런 마주침이 설령 날마다 일어난다 해도, 그녀가 멀리서 내 인사에 목례만 하고 마는 데 그칠까 봐 크게 두려웠고, 한 철 내내 날이면 날마다 되풀이되는 그런 만남은 나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할 터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비가 내리고 나서 제법 쌀쌀했는데, 나는 바닷가 산책로에서 몸에 딱 맞는 토크 모자를 쓰고 토시를 낀 한 처녀에게 말을 붙임을 당했다. 그녀는 엘스티르의 모임에서 만났던 처녀와 너무나 달라서, 그녀에게서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인간의 정신력을 넘어서는 작업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내 정신은 그 일을 해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은 한순간의 놀라움이 지난 뒤였고, 그 놀라움은 아마 알베르틴의 눈길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전에 나에게 그토록 인상 깊었던 그녀의 교양을 본능적으로 떠올렸을 때, 그녀는 ‘작은 무리’에 전형적인 무례한 말투와 몸가짐으로 나를 정반대의 놀라움에 빠뜨렸다. 그것 말고도, 그녀의 관자놀이는 더 이상 얼굴에서 눈이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시각적 중심이 아니었다. 지금은 내가 그녀의 반대쪽에 서 있어서일 수도, 토크 모자가 그것을 가려서일 수도, 아니면 어쩌면 그 붉은 기가 늘 있는 것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었다. “이런 날씨라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발베크는 늘 여름이라더니 정말 다 헛소리라니까요. 여기서 뭐 특별히 하는 건 없죠? 골프 치는 것도, 카지노에서 춤추는 것도 통 못 봤어요. 승마도 안 하고요. 지루해 죽겠죠. 하루 종일 해변에서 빈둥거리는 게 너무 따분하지 않아요. 아, 알겠다, 그냥 도마뱀처럼 볕이나 쬐는 거군요. 그게 좋으신 거죠. 시간이 남아도나 봐요. 딱 봐도 나랑은 다르네요. 난 온갖 운동을 그냥 다 좋아하거든요. 라 소뉴 경마엔 안 왔죠! 우린 ‘트램’을 타고 갔는데, 그런 낡아빠진 ‘깡통’ 같은 걸 타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하시겠죠. 꼬박 두 시간이나 걸렸다니까요! 자전거로면 세 번은 왕복했을 텐데.” 생루가 세상에서 더없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노선이 끊임없이 굽이진다는 이유로 그 작은 지방 열차를 ‘굼벵이’라 부르는 것에 나는 넋을 잃고 감탄했던 터였는데, 알베르틴이 ‘트램’을 입에 올리며 그것을 ‘깡통’이라 부르는 그 능란함에는 그야말로 소스라쳤다. 나는 그녀가 어떤 화법에 통달해 있음을 느꼈고, 그 화법에서 그녀가 내 열등함을 알아채고 비웃을까 봐 두려웠다. 그렇지만 작은 무리가 이 철도를 가리키려고 가진 그 풍부한 동의어들의 전모는 아직 나에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말할 때 알베르틴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콧구멍을 닫은 채 입술 양끝만 움직였다. 그 결과 느릿하고 콧소리 섞인 발음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아마 지방 출신이라는 내력, 영국식 냉정함을 흉내 내는 소녀다운 허세, 외국인 가정교사의 가르침, 그리고 코 점막의 충혈성 비대가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이 발음은, 그녀가 사람들과 더 친해지면 이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소녀다운 어조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불쾌하게 여겨질 만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것이었고, 나를 기쁘게 했다. 며칠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하면, 나는 “골프 치는 것도 통 못 봤어요”라는 말을, 그녀가 얼굴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뜸 내뱉던 그 콧소리 억양 그대로 혼자 되뇌며 마음을 새롭게 하곤 했다. 그러면 이 세상에 그토록 탐나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바닷가 산책로 여기저기에 점점이 흩어진, 잠시 함께 멈춰 서서 몇 마디 나눌 만큼의 시간 동안 어우러졌다가 이내 헤어져 저마다 제 갈 길로 산책을 다시 이어 가는 그런 한 쌍이 되었다. 그녀가 멈춰 선 틈을 타, 나는 그 작은 점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그리고 이번에는 확실히 알아내려고 눈여겨보았다. 그러자, 소나타에서 나를 매혹했던 뱅퇴유의 어느 악절이, 내 기억 속에서 안단테에서 피날레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마침내 악보를 손에 든 날에야 그것을 찾아내어 스케르초라는 제자리에 기억으로 못 박아 둘 수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점도, 내가 어느 때는 뺨에, 어느 때는 턱에 있는 것으로 그려 보던 이 점도, 마침내 그녀의 코 바로 아래 윗입술에 영원히 자리를 잡았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어느 시에서, 그 안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외우고 있던 시구를 놀라움과 함께 마주치게 되지 않던가.

바로 그때, 마치 바다를 배경으로, 햇볕과 바람에 그을려 황금빛이면서 동시에 장밋빛인, 처녀들의 행렬이 곱게 펼쳐지는 그 풍성한 장식적 전체가 온갖 형태로 자유로이 불어나기라도 하려는 듯, 알베르틴의 친구들이, 균형 잡힌 팔다리와 나긋한 몸매를 지녔으되 저마다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수록 커지는 한 무리를 이루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쪽으로 나아오면서도 바다에 더 가까이 붙어 나란한 선을 따라 걸었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잠시 함께 걸어도 좋겠느냐고 청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한 일이라곤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같이 안 가면 친구분들이 서운해할 텐데요.” 나는 우리 모두 함께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넌지시 말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골프채 가방을 멘 한 청년이 어슬렁어슬렁 우리에게 다가왔다. 방탕한 처신으로 재판장 부인을 그토록 격분케 했던 그 바카라 노름꾼이었다. 그는, 자기 딴에는 더없는 세련됨의 표시로 여기는 게 분명한 냉랭하고 무표정한 어조로, 알베르틴에게 인사를 건넸다. “골프 쳤어, 옥타브?” 그녀가 물었다. “어땠어? 컨디션 좋았어?” “아, 지긋지긋해. 도무지 안 되더라니까.” 그가 대답했다. “앙드레도 쳤어?” “응, 77타로 돌더라.” “어머, 그거 신기록이잖아!” “난 어제 82타로 돌았어.”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 제조업자의 아들로, 그 아버지는 다가오는 만국박람회의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사람이었다. 나는, 이 청년에게서, 그리고 그 소녀 무리의 그리 많지도 않은 다른 남자 친구들에게서, 옷과 그 옷을 걸치는 법, 시가, 영국식 음료, 말(馬)에 관한 온갖 지식이, 참된 전문가의 과묵한 겸손에 가까운 오만한 정확함으로 그가 세세한 부분까지 갖추고 있는 그 지식이, 지적 교양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없이 완전히 고립된 채로 발달해 있다는 사실에, 그 극단적인 정도에 놀랐다. 그는 디너 재킷이나 파자마를 언제 어디서 걸쳐야 옳은지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으나, 이런저런 낱말을 써도 되는지 안 되는지 하는 사정은커녕 가장 단순한 문법 규칙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이 두 가지 교양 사이의 불균형은, 발베크를 ‘주무르는’ 조합의 회장인 그의 아버지에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최근 온 벽에 붙여 놓게 한,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그가 이렇게 선언했으니 말이다. “본인은 그 문제를 논하고자 시장을 만나 뵙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본인의 정당한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였도다.” 옥타브는 카지노에서 보스턴이며 탱고며 온갖 춤 경연에서 상을 휩쓸었는데,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젊은 여자들이 비유가 아니라 정말이지 말 그대로 ‘춤 상대와 결혼하는’ 그 해변 사교계에서 훌륭한 혼처를 얻게 해 줄 만한 재주였다. 그는 알베르틴에게 “괜찮지?” 하고는 시가에 불을 붙였는데, 그 모습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급한 일 하나를 마무리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는 사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결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으니까. 하기야 그가 무언가를 한다고 할 만한 것도 딱히 없었지만. 그리고 완전한 무위(無爲)는 결국 오랜 과로와 똑같은 효과를 우리에게, 그것도 몸과 근육의 삶에 못지않게 성격에도 끼치는 법이라, 옥타브의 사색하는 듯한 이마 뒤에 고이 모셔져 있던 그 온전한 지적 공허함은, 마침내 그에게, 태연자약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밤잠을 설치게 하는 무익한 사색의 갈망을 안겨 주고 말았으니, 그 꼴이 영락없이 과로에 시달리는 철학자 같았다.

그들의 남자 친구들을 알면 소녀들을 볼 기회가 더 많아지리라 여기고, 나는 하마터면 옥타브에게 소개를 청할 뻔했다. 그가 여전히 “도무지 안 되더라니까!” 하고 중얼거리며 우리 곁을 떠나자마자 나는 알베르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하면 다음번엔 그녀가 소개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안 돼요,” 그녀가 소리쳤다. “저런 얌전한 집고양이 같은 남자를 어떻게 소개해요. 여긴 저런 애들이 발에 채도록 널렸다니까요. 대체 저런 애가 당신한테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저 앤 골프를 제법 친다, 그게 다예요. 내가 아니까 하는 말인데, 당신하곤 전혀 안 맞는 부류라는 걸 알게 될걸요.” “이렇게 친구들을 버려두면 다들 화낼 텐데요.” 나는, 그러면 그녀가 나에게 무리에 끼라고 권하리라 바라며 되풀이했다. “아, 아니에요, 쟤들은 나 필요 없어요.” 우리는 블로크와 마주쳤는데, 그는 나에게 은근하고 의뭉스러운 미소를 던지고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아니 그보다는 ‘모르는 채로’ 아는 알베르틴이 곁에 있는 데 어색해하며, 뻣뻣하고 거의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저 촌뜨기 이름이 뭐예요?” 알베르틴이 물었다. “왜 나한테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날 알지도 못하면서. 나도 인사 안 했고요.” 나는 그녀에게 설명할 겨를이 없었으니, 그가 곧장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이렇게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실례하네,” 그가 말문을 열었다. “말씀 중에 끼어들어 미안하네만, 내가 내일 동시에르에 간다는 걸 알려야겠네. 더 미루면 결례가 되어 안 되겠어. 정말이지 드 생루앙브레가 나를 어찌 여길까 싶단 말일세. 두 시 기차를 타겠다고 알리러 들렀을 뿐이네. 그럼 이만.” 그러나 나는 이제 알베르틴을 다시 만날 일과 그녀의 친구들을 알아 볼 일만 생각하고 있었고, 동시에르는, 그들이 거기 가는 것도 아닌 데다 내가 갔다가는 그들이 아직 해변에 있을 때 돌아오기엔 너무 늦어질 터라, 나에게는 세상 저쪽 끝에 있는 곳처럼 여겨졌다. 나는 블로크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아, 그럼 좋아, 나 혼자 가지. 아루에 선생의 그 얼빠진 시구를 빌려, 생루의 그 성직자연하는 태도를 놀려 줄 겸 이렇게 읊어 주겠네.”

‘내 본분은 홀로 서 있어, 그의 본분에 조금도 매이지 않으니;
그가 저버리기를 택할지라도, 나는 충직한 자로 남으리라.’ ”

“인물이 나쁘진 않다는 건 인정해요,” 알베르틴의 평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만 보면 아주 넌더리가 나요.” 나는 블로크가 ‘인물이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따져 보니 과연 그러했다. 다소 튀어나온 이마, 몹시 매부리진 코, 그리고 지극히 영리해 보이면서 스스로도 자기 영리함을 확신하는 듯한 기색으로 그는 호감 가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베르틴의 마음에 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어쩌면 어느 정도는 그녀 자신의 결점, 곧 작은 무리의 모진 태도와 무정함, 저희와 다른 모든 것을 향한 무례함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그 둘을 서로 소개해 준 뒤에도 블로크에 대한 알베르틴의 반감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블로크는, ‘세련된 축’의 자유분방한 관습과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범절 사이에서, 사교계의 몸가짐과는 다르면서도 유난히 불쾌한 형태의 처세술이라 할 어떤 특수한 절충이 이루어진 그런 계층에 속해 있었다. 누군가에게 소개될 때면 그는 회의적인 미소를 띠면서 동시에 과장된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고, 상대가 남자면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선생”이라고, 제가 내뱉는 그 말을 스스로 비웃는 듯하면서도 결코 바보가 아닌 사람에 속한다는 의식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이 첫 순간을, 그가 따르는 동시에 조롱하는 관습에 (마치 새해 첫날이면 “복 많이!” 하고 인사하듯이) 바치고 나면, 그는 한없이 교활한 태도를 취하며 ‘묘한 말을 늘어놓곤’ 했는데, 그 말들은 흔히 제법 맞는 말이었으나 알베르틴의 ‘신경을 긁었다’. 이 첫날 내가 그녀에게 그의 이름이 블로크라고 하자 그녀는 외쳤다. “저 사람 유대인 녀석일 거라고 뭐든 걸 수 있었어요. 저런 사람들은 꼭 눈치 없이 헛발을 짚는다니까요!” 게다가 블로크는 훗날 알베르틴에게 또 다른 짜증거리를 안겨 줄 운명이었다. 많은 지식인이 그렇듯 그는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말할 줄 몰랐다. 그는 무슨 말을 하든 유난스러운 수식을 붙였고, 개별에서 일반으로 훌쩍 건너뛰곤 했다. 남이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도무지 달가워하지 않던 알베르틴은, 자기가 발목을 삐어 얌전히 있을 때 블로크가 그녀를 두고 “그녀는 의자에 길게 누워 있으나, 그 편재성으로 말미암아 어렴풋한 골프장과 미심쩍은 테니스장을 동시에 드나들기를 그치지 않았도다”라고 한 데에 심사가 뒤틀렸다. 물론 그는 그저 ‘문학적인’ 척을 부린 것뿐이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핑계로 초대를 거절했던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그 말이 자기에게 곤란을 빚을지 모른다고 여긴 알베르틴에게는, 자기를 두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그 청년의 얼굴과 목소리에 넌더리를 내기에 충분했다. 알베르틴과 나는 나중에 함께 산책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마치 밑 없는 구렁에 조약돌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양, 내 말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를 도무지 의식하지 못했다. 우리의 말이란, 대개 그 말을 건네받은 사람에 의해, 그 사람이 자기 본바탕에서 길어 올린 의미로, 곧 우리가 그 말을 내뱉을 때 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채워진다는 것, 이는 일상의 되풀이가 끊임없이 증명해 보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에게 알베르틴의 교양이 그러했듯) 그 교양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취향도, 읽은 책도, 신조도 알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우리는 우리 말이 그녀 안에 그 의미와 닮은 무언가를 불러일으켰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짐승 안에서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짐승조차 알아듣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하여 알베르틴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보려는 시도는, 나에게는 미지의 것과, 불가능하다 할 것은 아닐지언정 그런 것과 맞닿는 일처럼 여겨졌으니, 말을 길들이는 일만큼 고된 동시에 벌을 치거나 장미를 기르는 일만큼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알베르틴이 내 인사에 목례는 해 주되 말은 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곧 함께 어딘가로 놀러 가기로 계획하고서 헤어진 것이다. 나는 다음번에 알베르틴을 만나면 좀 더 대담하게 대하리라 다짐하고, 그녀에게 할 말 전부를, 나아가 (이제 그녀가 고지식한 여자가 아니라고 꽤 확신하고서) 그녀에게 요구할 온갖 호의까지 미리 초안으로 짜 두었다. 그러나 정신은 식물이나 세포나 화학 원소가 그러하듯 외부의 영향을 받는 법이고, 정신을 담가 변질시키는 그 매질이란 곧 상황의 변화, 새로운 환경이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달라진 나는, 다시 알베르틴과 함께 있게 되자, 그녀에게 한 말이 하려던 말과는 조금도 같지 않았다. 붉게 달아올랐던 그녀의 관자놀이를 떠올리며, 나는 그녀가 사심 없는 것임을 아는 정중한 배려를 오히려 더 절실히 고맙게 여기지 않을까 자문했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눈빛과 미소에 담긴 어떤 것들에 당황했다. 그것들은 헤픈 몸가짐을 뜻할 수도, 활기가 넘치되 속마음은 더없이 얌전한 소녀의 다소 실없는 명랑함을 뜻할 수도 있었다. 하나의 표정은, 말에서와 마찬가지로 얼굴에서도, 갖가지 해석의 여지를 지니는 법이라, 나는 그리스어 산문 한 구절의 난해함 앞에 마주 선 학생처럼 망설이며 서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거의 곧바로, 그 키 큰 처녀, 앙드레, 곧 늙은 은행가를 뛰어넘었던 그 처녀와 마주쳤고, 알베르틴은 나를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친구는 유난히 반짝이는 두 눈을 지녔는데, 그것은 마치 어두운 집 안에서, 열린 문 너머로, 반짝이는 바다에서 반사된 푸르스름한 빛이 햇살과 함께 비쳐 드는 방을 언뜻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다섯 명 한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발베크에 머무는 동안 얼굴만은 아주 익히 알게 된 남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대체 누구일까 자주 궁금해하곤 했다. “뭐 대단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알베르틴이 비웃음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머리 염색하고 노란 장갑 낀 저 자그마한 노인은 솜씨가 좋아요. 그림도 곧잘 그리고요. 발베크 치과 의사예요. 사람은 좋아요. 저 뚱뚱한 사람은 시장이고요. 그 조그맣고 뚱뚱한 사람 말고요, 저 사람은 전에 본 적 있을 거예요. 춤 선생이에요. 아주 못돼먹었죠. 우리를 못 견뎌 해요. 우리가 카지노에서 하도 시끄럽게 굴거든요. 의자를 부수질 않나, 춤출 때 양탄자를 걷어 달라질 않나. 그래서 우리한테는 상을 안 줘요. 거기서 그나마 춤 좀 추는 여자애들은 우리뿐인데도 말이에요. 치과 의사는 참 좋은 사람이라, 춤 선생 약 올리려고 인사라도 건넬 뻔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저 사람들 틈에 드 생트크루아 가 껴 있었거든요. 그 사람은 도의회 의원이에요. 아주 좋은 집안 출신인데, 돈 좀 더 벌겠다고 공화파에 붙었죠. 이젠 점잖은 사람은 아무도 그 사람하곤 말도 안 섞어요. 그 사람은 우리 이모부를 알아요. 둘 다 정부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집안 나머지 사람들은 늘 그 사람을 상대도 안 해요. 방수 외투를 입은 저 마른 사람은 악단 지휘자예요. 당연히 알겠죠. 모른다고요? 아유, 연주를 기막히게 해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도 안 봤어요? 난 너무 좋던데! 그 사람이 오늘 저녁에 음악회를 여는데, 우린 못 가요. 시청에서 열리거든요. 카지노라면 상관없겠지만, 십자가상을 떼어 낸 시청에 우리가 갔다간 앙드레 어머니가 기절초풍하실 거예요. 우리 이모부가 정부에 있지 않냐고 하시겠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모는 이모예요. 내가 이모를 좋아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니라고요. 이모가 여태 바란 거라곤 오직 나를 떼어 버리는 것뿐이었어요. 아니, 나한테 정말로 어머니 노릇을 해 준 사람은, 그것도 아무 혈연도 아니라서 더욱 갸륵한 사람은, 내가 친어머니만큼이나 사랑하는 어느 친구예요. 그 사람 ‘사진’을 보여 줄게요.” 골프 챔피언이자 바카라 노름꾼인 옥타브가 잠시 우리 곁에 끼어들었다. 나는 우리 사이에서 어떤 인연을 발견했다고 여겼으니,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베르뒤랭가와 일종의 친척이며, 그보다 더 친한 벗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유명한 수요회를 경멸조로 이야기하며, 베르뒤랭 는 디너 재킷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뮤직홀에서 그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주 질색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영락없이 시골 변호사 같은, 프록코트에 검정 넥타이 차림의 늙은이한테서 “이런, 이 젊은 개구쟁이 녀석” 하는 인사를 받느니 차라리 안 받는 편이 훨씬 나으니 말이다. 옥타브가 우리 곁을 떠났고, 이윽고 그녀의 별장에 이르자 이번엔 앙드레 차례였다. 그녀는 산책 내내 나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은 채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녀가 가 버린 것이 아쉬웠는데, 더욱이 알베르틴에게 그녀의 친구가 나에게 얼마나 쌀쌀맞았는지 투덜대면서, 알베르틴이 나를 제 친구들에게 알려 주는 데서 느끼는 듯한 이 어려움을, 엘스티르가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었을 그 첫날 오후에 부딪친 듯했던 그 거부감과 마음속으로 견주고 있던 참에, 두 처녀가 지나갔고, 나는 그들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했으니, 어린 앙브르사크가(家) 자매였고, 알베르틴도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알베르틴이 보기에 이 만남으로 내 처지가 나아지리라 느꼈다. 그들은 빌파리지 부인의 친척 되는 어느 부인의 딸들이었는데, 그 부인은 또한 뤽상부르 부인의 친구이기도 했다. 발베크에 작은 별장을 두고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앙브르사크 와 앙브르사크 부인 부부는, 그곳에서 더없이 검소하게 살았고, 늘 그는 한결같은 프록코트 차림으로, 그녀는 짙은 색 드레스 차림으로 다녔다. 두 사람은 우리 할머니에게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하곤 했으나, 그 이상으로는 결코 나아가지 않았다. 무척 예쁜 그 딸들은 좀 더 세련되게 차려입었으나, 그 세련됨은 바닷가보다는 파리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긴 치마와 커다란 모자 차림의 그들은 알베르틴과는 다른 인종에 속한 듯한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알베르틴은 그들에 관해 죄다 알고 있었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