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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⑩

2권 제2부 · 바다 풍경, 소녀들의 띠 장식

“어머, 저 어린 앙브르사크 자매를 안다고요? 이런, 대단한 친구들을 두셨네요. 하기야 저 애들은 아주 수수한 사람들이지만요.” 그녀는 마치 그것으로 설명이 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착한 애들이지만 어찌나 곱게 자랐는지 카지노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한다니까요. 우리가 무서워서요, 우리 물이 하도 나쁘거든요. 그 애들한테 끌리시나 봐요? 뭐, 취향 나름이죠. 사실 그냥 조그만 흰 토끼들이에요. 물론 거기에도 뭔가 있을지 모르죠. 조그만 흰 토끼가 마음에 드신다면, 그 애들이 오랜 아쉬움을 채워 줄지도 모르고요. 뭔가 끌리는 데가 있긴 한가 봐요. 그중 하나는 벌써 생루 후작과 약혼했다니까요. 그건 동생한테는 모진 타격이에요. 그 애가 그 청년한테 홀딱 반해 있거든요. 정말이지, 입술도 안 벌리고 말하는 그 꼴만 봐도 난 진저리가 나요. 게다가 차림새는 또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세상에, 비단 드레스를 입고 골프를 치러 가다니! 그 나이에, 옷을 제대로 아는 다 큰 여자들보다 더 요란하게 차려입는다니까요. 엘스티르 부인을 봐요. 옷 잘 입는 여자가 뭔지 보여 주잖아요.” 나는 그녀가 더없이 소박하게 차려입은 것처럼 보였다고 대답했다. 알베르틴이 웃었다. “제일 수수한 것들을 걸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옷을 기막히게 입죠. 당신이 소박함이라 부르는 걸 얻는 데 돈이 엄청나게 든다고요.” 엘스티르 부인의 드레스는 옷차림에 관해 차분하고 정확한 안목을 지니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고 지나갔다. 나에게는 그 안목이 없었다. 엘스티르는 그것을 최고로 지니고 있었다고, 적어도 알베르틴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줄도, 그의 화실에 어질러져 있던 아름답지만 아주 단순한 물건들이, 그가 오래도록 탐내던 보물들로, 그 내력을 죄다 꿰고서 이 경매장 저 경매장으로 좇아다니다가, 마침내 그것들을 손에 넣을 만큼 돈을 모을 때까지 뒤쫓은 것이라는 줄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알베르틴도 나만큼이나 아는 게 없어 나를 깨우쳐 줄 수 없었다. 반면 옷 이야기가 나오면, 멋 부리기 좋아하는 본능에서, 그리고 어쩌면 제 힘으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더 사심 없이, 더 섬세한 감정으로 다른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알아볼 줄 아는, 돈 없는 소녀의 안타까운 동경에서, 그녀는 엘스티르의 취향이 지닌 세련됨에 대해 훌륭하게 제 생각을 펼쳤다. 그 취향은 어찌나 까다로운지 그의 눈에는 모든 여자가 옷을 못 입은 것으로 보였고, 그는 알맞은 비례와 색조에 한없는 중요성을 두면서, 아내를 위해 엄청난 값을 치르고 양산이며 모자며 망토를 지어 오게 했는데, 그것들은 그가 알베르틴에게서 배워 매력적이라 여기게 된 것들로, 안목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와 마찬가지로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물건들이었다. 이 밖에도, 그림을 조금 그려 본 적이 있으나 스스로 고백하기로 그것에 아무런 ‘재능’도 없던 알베르틴은, 엘스티르에게 끝없는 감탄을 품고 있었고, 그의 가르침과 본보기 덕분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향한 그녀의 열광과는 뚜렷이 대조되는 그림 보는 눈을 보여 주었다. 사실인즉, 아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녀는 대단히 총명했고, 그녀가 하는 말 속의 어리석음은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녀가 처한 환경과 나이의 것이었다. 엘스티르의 영향은 좋은 것이었으나 부분적인 것에 그쳤다. 그녀의 지성은 그 모든 갈래가 같은 발달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림에 대한 안목은 옷과 온갖 멋에 대한 안목을 거의 따라잡았으나, 음악에 대한 안목은 아직 한참 뒤처진 채 그 뒤를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르틴은 앙브르사크가에 대해서는 죄다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작은 일에도 능한 것은 아니듯, 내가 그 아가씨들에게 인사를 하고 난 뒤에도 그녀가 나를 제 친구들에게 알려 줄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 애들한테 무슨 대단한 의미를 두시다니 너무 착하시네요. 그런 애들한텐 신경 쓸 것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런 어린애들이 당신 같은 사람한테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뭐, 앙드레는 말이죠, 정말 놀랄 만큼 영리해요. 착한 애예요. 이따금 아주 별나게 굴긴 해도요. 하지만 나머지 애들은 정말 지독하게 멍청하다고요.” 알베르틴과 헤어진 뒤, 나는 생루가 자기 약혼을 나에게 숨겼다는 것, 그리고 정부와 갈라서기도 전에 아내를 고르는 그토록 온당치 못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에 문득 날카로운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나는 앙드레와 마주쳤는데, 그녀가 한동안 나에게 말을 이어 가기에 나는 그 틈을 타 이튿날 그녀를 다시 몹시 보고 싶다고 말했으나,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어머니가 영 편찮으셔서 곁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다음다음 날, 엘스티르의 집에 있을 때, 그는 앙드레가 나에게 얼마나 끌렸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반박하기를, “하지만 처음부터 끌린 건 저였는걸요. 어제 다시 만나자고 청했는데 그녀가 안 된다고 했어요” 하자, “그래, 알아요. 그 얘긴 그녀가 죄다 해 주었지요.” 그가 대답했다. “몹시 미안해했지만, 여기서 몇십 리나 떨어진 어딘가로 소풍을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대요. 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던 터라, 이제 와 빠지기엔 너무 늦었던 거지요.” 이 거짓말이 (앙드레가 나를 그토록 조금밖에 몰랐으니) 별다른 대수는 아니었다 해도, 나는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계속 어울리려 해서는 안 되었다. 사람이란 한번 한 일은 한없이 되풀이하는 법이라, 해마다 어느 벗을 찾아가는데 그가 첫해에 약속한 자리에 나오지 못했거나 감기로 앓아누워 있었다면, 이듬해에도 그가 방금 걸린 또 다른 감기로 앓아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약속 장소에서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다시 그를 놓치게 될 터인데,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바꿀 수 없는 이유 때문이건만, 정작 본인은 그 이유 대신 상황에서 끌어낸 갖가지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앙드레가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나는 알베르틴과 잠시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해변에서 발견했는데, 그녀는 줄에 매단 야릇하게 생긴 기구를 공중에 던졌다 다시 받았다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그녀에게 조토의 「우상 숭배」 같은 자태를 안겨 주었다. 하기야 그것은 ‘디아볼로’라 불리는 물건으로, 지금은 하도 쓰이지 않게 되어, 훗날 세대의 비평가들은 그것을 가지고 노는 소녀의 그림을 마주치면, 마치 아레나의 우의화(寓意畵) 인물 하나를 두고 그러하듯, 그녀가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 자못 진지하게 논하게 될 것이다. 잠시 뒤, 궁상맞고 사나운 인상의 그 친구, 곧 첫날 앙드레의 날아오르는 발에 늙은 신사의 머리가 스치는 것을 보고 “저 가엾은 노인네, 정말 딱하기도 하지” 하며 그토록 심술궂게 비웃던 바로 그 처녀가, “안녕, 나 방해되니?” 하며 알베르틴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편하려고 모자를 벗은 참이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야릇하고 매혹적인 식물처럼 이마 위에 드리워, 그 잎맥의 섬세한 무늬를 온통 드러내고 있었다. 알베르틴은, 어쩌면 상대가 모자를 벗고 있는 꼴이 못마땅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쌀쌀맞은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도 그 처녀는 우리 곁에 머물렀고, 알베르틴은 그녀를 나에게서 떼어 놓아, 어느 순간엔 그녀와 단둘이 있도록, 또 어느 순간엔 그녀를 뒤따라오게 두고 나와 걷도록 이리저리 자리를 잡았다. 나는 소개를 받아 내려고, 그 처녀가 듣는 데서 소개해 달라고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알베르틴이 내 이름을 부르는 사이, “저 가엾은 노인네, 정말이지 딱하기도 하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표정이 그토록 잔인하다 여겼던 이 처녀의 얼굴과 파란 두 눈에,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가 어리며 반짝이는 것을 나는 보았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황금빛이었고, 머리카락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두 뺨이 발그레하고 두 눈이 파랬으니, 그것은 아직 장밋빛인 아침 하늘이 눈부신 금빛 점들로 곳곳에서 반짝이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의 불꽃에 이내 불이 붙은 나는, 이 아이가 사랑에 빠지면 수줍어하는 아이라고, 알베르틴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그녀가 우리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나를 위해서, 나를 사랑해서라고, 그리고 그 미소 어린 다정한 눈길로, 남들에게는 그토록 매섭게 굴면서 나에게는 그만큼 다정하게 대하겠노라고 마침내 나에게 고백할 기회를 얻어 기뻐했음이 틀림없다고 혼잣말을 했다. 필시 그녀는, 내가 아직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해변에서 나를 눈여겨보았고, 그 뒤로 줄곧 나를 생각해 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그 늙은 신사를 조롱한 것도 내 감탄을 사기 위해서였고, 그다음 날들에 그토록 시무룩해 보인 것도 나와 알고 지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호텔에서, 저녁이면 그녀가 홀로 해변을 거니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필시 나를 만나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알베르틴이 곁에 있어 무리 전체가 곁에 있는 것만큼이나 거북했을 텐데도, 그녀는 벗의 점점 싸늘해지는 태도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딱 붙어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 오직 알베르틴보다 오래 버티어 나와 단둘이 남게 되기를 바라서였고, 그리하여 어느 때 나와 만날 약속을 잡아, 식구도 친구도 그녀가 자리를 뜬 줄 모르게 빠져나올 핑계를 찾아, 예배 전이나 골프가 끝난 뒤 어느 안전한 곳에서 나를 만나기를 바라서였다. 그녀를 보기가 더욱 어려웠던 것은, 앙드레가 그녀와 다툰 끝에 이제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난 그 애의 그 지독한 거짓됨을 너무 오래 참아 왔어요.” 그녀가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 비열함을요. 그 애가 나한테 퍼부은 그 상스러운 욕들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어요. 다른 애들 때문에 그걸 다 견뎌 왔죠. 하지만 이번에 저지른 짓은 정말 너무했어요!” 그러고서 그녀는 이 처녀가 저지른 어떤 어리석은 짓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앙드레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알베르틴이 우리를 단둘이 남겨 두고 떠날 그 순간을 위해 지젤의 속내를 털어놓는 듯한 눈길이 나에게 약속했던 그 은밀한 말들은, 끝내 입 밖에 나오지 못할 운명이었다. 우리 사이에 고집스레 버티고 선 알베르틴이 점점 더 무뚝뚝하게 대꾸하다가 마침내 그 벗의 말에 아예 응하기를 그치자, 지젤도 결국 단념하고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나는 알베르틴이 그토록 쌀쌀맞게 군 것을 나무랐다. “이번 일로 처신을 좀 더 조심하는 법을 배우겠죠. 나쁜 애는 아닌데, 어찌나 말이 많은지 당나귀 귀도 떨어져 나갈 지경이라니까요. 게다가 매사에 코를 들이밀 일도 아니고요. 청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한테 딱 달라붙어요? 조금만 더 그랬으면 꺼지라고 했을 거예요. 게다가 저렇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니는 꼴은 못 봐 주겠어요. 아주 볼썽사납다니까요.” 그녀가 말하는 동안 나는 알베르틴의 두 뺨을 바라보며, 그 향기는, 그 맛은 어떨까 자문했다. 이번에는 그 뺨이 서늘하지 않고, 한결같은 분홍빛으로, 보랏빛이 감돌게, 크림빛으로 발그레했으니, 마치 꽃잎에 밀랍 같은 윤기가 도는 어떤 장미들 같았다. 나는 사람이 이따금 어떤 한 송이 꽃을 두고 느끼는 것과도 같은 열렬한 갈망을 그 뺨에 대해 느꼈다. “난 못 봤는데요.” 내가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봤으면서요. 누가 봐도 그 애 초상화라도 그리고 싶어 하는 줄 알았겠어요.” 그녀가 나무랐는데, 지금 내가 그토록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사실에도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래도 당신이 그 애를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 앤 눈곱만큼도 내숭 떠는 애가 아니거든요. 당신은 자기한테 꼬리 치는 계집애들을 좋아하잖아요, 다 알아요. 어쨌든 그 앤 다시는 우리한테 달라붙었다가 쫓겨날 일이 없을 거예요. 오늘 파리로 떠나거든요.” “나머지 친구들도 다 가나요?” “아뇨, 그 애랑 ‘미스’만요. 곧 시험이 있거든요. 집에서 죽어라 공부해야 해요, 딱한 것. 그 애로선 별로 신나는 일이 아니죠, 솔직히 말해서요. 물론 좋은 문제가 나올 수도 있죠,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엄청난 도박이에요. 내가 아는 어떤 애는 당신이 목격한 사고를 서술하시오.라는 문제를 받았대요. 그건 운이 좋았죠. 그런데 내가 아는 또 다른 애는 알세스트와 필랭트 중 누구를 벗으로 삼겠는지 밝히시오.라는 문제를 받았대요. 나 같으면 분명 아예 말문이 막혀 버렸을 거예요!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그건 여자애들한테 낼 문제가 아니에요.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어울리지, 남자 친구를 두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그 무리의 벗으로 받아들여질 가망이 거의 없음을 드러낸 이 선언에 나는 피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게 남자애들한테 나온 문제라 쳐도, 대체 그런 문제에 뭐라고 답하길 바라겠어요? 학부모 여럿이 골루아에 편지를 보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낸다고 항의했대요. 웃기는 건, 수상작 답안을 모은 책에 그 문제를 정반대로 다룬 답안 둘을 나란히 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어떤 시험관을 만나느냐에 달린 거죠. 어떤 시험관은 필랭트가 아첨꾼에 악당이라고 답하기를 바라고, 또 어떤 시험관은 알세스트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가 너무 까다로우니 벗으로는 필랭트를 골라야 한다고 답하기를 바라는 거죠. 교수들 자신도 마음을 못 정하는데, 딱한 수험생들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약과예요. 해마다 더 어려워진다니까요. 지젤이 통과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예요.”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거기 없었다. 나는 한동안 할머니를 기다렸고, 마침내 할머니가 나타나자, 뜻밖의 사정이 생겼다며 이틀쯤 자리를 비우게 될지도 모를 나들이를 허락해 달라고 졸랐다. 나는 할머니와 점심을 먹고, 마차를 불러 역으로 갔다. 지젤은 거기서 나를 봐도 놀라는 기색이 없을 것이었다. 동시에르에서 갈아탄 뒤 파리행 기차에는 통로가 딸린 객차가 있을 테고, 가정교사가 꾸벅꾸벅 조는 사이 나는 그 통로를 따라 지젤을 어두운 구석으로 이끌어, 내가 파리로 돌아가면 그녀와 만날 약속을 잡고, 그 날짜를 되도록 이른 날로 앞당겨 보려 했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캉이나 에브뢰까지 함께 가고, 다음 기차를 타고 발베크로 돌아올 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오랫동안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 망설였다는 것을, 그녀 못지않게 알베르틴과도, 그 눈이 반짝이는 처녀와도, 로즈몽드와도 사랑에 빠질까 곰곰이 생각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았다면 나를 어떻게 여겼을까. 이제 서로 애정의 끈이 나를 지젤과 맺어 주려는 마당에, 나는 뉘우침의 아픔을 느꼈다. 게다가 나는 알베르틴이 이제 더는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그녀에게 진심으로 장담할 수도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그녀가 지젤에게 말을 건네려고 몸을 옆으로 홱 돌려 거의 나에게 등을 지다시피 하는 것을 보았다. 시무룩하게 가슴께로 수그린 그녀의 머리, 그 뒤쪽에 난 머리카락은, 나머지와 다르고 심지어 더 짙은 빛이었는데, 마치 방금 미역이라도 감은 듯 반들거렸다. “천둥 벼락에 죽어 가는 오리 꼴이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라본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때까지 그녀의 발그레한 낯빛과 알 수 없는 눈길이 넌지시 내비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혼을 알베르틴의 몸속에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녀의 뒤통수에 흐르는 그 반짝이는 머리카락 폭포는, 잠깐 동안 내가 그녀에게서 볼 수 있는 전부였고, 돌이켜 볼 때에도 여전히 내가 보는 전부로 남았다. 우리의 기억이란, 같은 사람의 사진을 어느 때는 이것, 어느 때는 저것 하고 진열창에 내거는 가게와도 같다. 그리고 대개는 가장 최근에 내건 것이 한동안 눈에 보이는 유일한 것으로 남는다. 마부가 말에 채찍질을 하는 동안, 나는 지젤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감사와 애정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었으니, 그 말들은 모두 그녀의 다정한 미소와 내민 손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실은, 실제로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되 사랑에 빠지기를 바라던 내 삶의 그 시기에, 나는 마음속에 한번 본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형상만을, 곧 그 흐릿한 이목구비가 어떤 식별의 시도에도 버틸 만큼 나에게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지나가는 낯선 여인마다에서 한눈에 알아보던 그 형상만을 품고 다닌 것이 아니라, 나에게 사랑에 빠져,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써 둔 사랑의 희극에서 제 대사를 맡아 줄 여인의, 언제라도 육신을 얻을 채비가 된 그 도덕적 환영도 품고 다녔던 것이다. 그 희극에서는 필요한 신체적 자격을 얼마간 갖추기만 하면 어느 착한 소녀든 똑같이 그 배역을 맡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보였다. 이 연극에서는, 내가 주역을 새로 만들거나 되살리라고 불러들인 새 스타가 누구든 간에, 줄거리도, 사건들도, 대사 자체도 바꿀 수 없는 형태를 그대로 지켰다.

그다음 며칠 사이에, 알베르틴이 나를 그들에게 소개하기를 꺼렸음에도, 나는 그 첫날 오후의 작은 무리를 (지젤만 빼고. 역 옆 건널목에서 오래 지체된 데다 시간표까지 바뀌는 바람에, 나는 기차에서 그녀를 만나는 데 실패했으니, 내가 도착하기 몇 분 전에 기차는 이미 떠나 버렸고, 공교롭게도 나는 그 뒤로 그녀를 두 번 다시 떠올린 적이 없다) 죄다 알게 되었고, 내가 청하여 그들이 소개해 준 두세 명의 다른 처녀들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소녀에게서 찾게 될 즐거움에 대한 나의 기대가, 나를 그 소녀와 알게 해 준 또 다른 소녀에게서 싹텄으니, 가장 나중의 소녀는 정원사가 먼저 다른 품종의 장미를 써서 얻어 내는 그런 새 장미 품종 가운데 하나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 꽃의 사슬을 따라 이 꽃송이에서 저 꽃송이로 옮겨 가노라면, 색다른 소녀 하나를 알게 되는 즐거움은, 그 즐거움을 나에게 안겨 준 소녀에게로 나를 되돌려 보내곤 했으니, 그 고마움에는 나의 새로운 기대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윽고 나는 이 소녀들 틈에서 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아! 가장 싱그러운 꽃에서도, 오늘 활짝 핀 살이 마르거나 열매 맺음에 따라 장차 무엇이 될지, 곧 가을 씨앗의 궁극적이고 불변하며 이미 예정된 형태가 어떠할지를 통찰력 있는 눈에는 벌써 일러 주는, 겨우 알아볼 만한 그 징후들을 알아챌 수 있다. 눈은 동틀 녘 수면을 감미롭게 곱슬거리며 굽이치는 잔물결 같은 코를, 마치 움직이지 않는 듯, 연필로 붙잡을 수 있을 듯 황홀하게 좇는다. 그때 바다는 어찌나 잔잔한지 밀물의 흐름조차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에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얼굴이 이루어 가는 변전이 우리가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더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처녀들 중 누구든 그 곁에 선 어머니나 이모를 보기만 하면, 대체로 개탄스러운 어떤 전형의 인력에 이끌려 그 이목구비가 삼십 년도 못 되어 얼마나 먼 거리를 옮겨 갈지, 그리고 해 지는 시각까지, 그 얼굴이 지평선 아래로 아주 사라져 더는 빛을 받지 못할 때까지 계속 옮겨 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제 종족에서 가장 해방되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깃든 유대적 애국심이나 그리스도교적 격세유전만큼이나 깊고 피할 길 없는 것으로서, 알베르틴과 로즈몽드와 앙드레의 장밋빛 개화 아래에는, 그들 자신도 모르게, 때가 무르익기까지 숨겨진 채로, 투박한 코와 튀어나온 턱과, 나타나는 순간 사람들을 놀라게 할 가슴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것은 실은 무대 옆에서 “등장”할 채비를 이미 마치고 있었으니, 마치 느닷없이 예측할 수 없이 치명적으로 터져 나오는 드레퓌스주의나 성직자주의처럼, 상황이 요구할 때 사람 자신보다 앞선 어떤 천성에서 문득 솟아나는 애국적이거나 봉건적인 영웅심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바로 그 천성으로 사유하고, 살아가고, 진화하고, 스스로 힘을 얻거나 죽어 가면서도, 정작 그 천성을, 자신이 차례차례 그것으로 여기는 잇단 국면들과는 결코 구별해 내지 못한다. 정신적으로도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의 법칙에 기대고 있으며,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은화식물처럼, 우리가 스스로 골라잡는다고 여기는 온갖 사소한 특성을 죄다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파생된 관념만을 볼 뿐, 그것을 필연적으로 낳은 일차적 원인(유대인의 피든, 프랑스인으로 태어남이든, 그 무엇이든)은 알아채지 못하다가, 어느 주어진 순간에 그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앞의 것은 우리에게 심사숙고의 결과로, 뒤의 것은 제 건강을 향한 경솔한 무심함의 결과로 보이겠지만, 우리는 콩과식물이 씨앗의 형태를 물려받듯, 우리가 그것으로 살아가는 관념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으로 죽을 병까지도 가족에게서 물려받는 것이다.

철따라 다른 때에 꽃이 피는 어떤 식물에서처럼, 나는 이 발베크 바닷가에서, 내 벗들이 언젠가 그리 될 저 쭈그러든 씨꼬투리며 저 물렁한 덩이줄기를, 노부인들의 모습으로 표현된 채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한창 꽃필 때였으니. 그래서 빌파리지 부인이 나에게 함께 마차를 타자고 청했을 때 나는 핑계를 대어 빠지려 했다. 엘스티르를 찾아갈 때도 나는 늘 새 벗들과 함께가 아니면 가지 않았다. 생루에게 약속한 방문을 하러 동시에르에 가는 데조차 오후 한나절을 낼 수 없었다. 사교적 약속이나 진지한 토론, 심지어 다정한 대화라 해도, 이 처녀들과의 산책에 배정된 자리를 빼앗았다면, 그것은 점심 종이 울렸을 때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아니라 화첩의 책장을 넘기라고 끌려간 것과 같은 느낌을 나에게 주었으리라. 우리가 그들과의 어울림을 즐기리라 여기는 남자들, 젊은이들, 늙거나 나이 든 여자들을, 우리는 실체 없는 평면 위에서만 떠받든다. 우리가 그들을 오직 그 자체의 한계에 갇힌 시각적 지각으로만 의식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의 눈이 젊은 처녀들을 향해 쏘아질 때는, 그 눈이 다른 감각들이 보낸 사절 노릇을 한다. 감각들은 하나씩 잇달아, 향기롭고 촉감 있고 맛깔스러운 갖가지 매력을 찾아 뒤따르며, 손가락과 입술의 도움 없이도 그 매력을 누린다. 그리고 욕망이 뛰어나게 발휘하는 전위(轉位)의 기술, 종합의 재능 덕분에, 뺨이나 가슴의 빛깔 아래 자기들에게 금지된 감촉과 맛과 접촉을 재구성해 내어, 이 처녀들에게, 마치 장미원의 단맛을 훔치려 서 있을 때나 눈만으로 송이를 삼키는 포도덩굴 앞에 섰을 때 자아내는 것과 똑같은, 꿀처럼 달콤한 밀도를 부여한다.

비가 오면, 날씨가 알베르틴을 주눅 들게 할 힘은 없었지만, 그녀는 방수복 차림으로 퍼붓는 소나기를 뚫고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우리는 카지노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런 날이면 카지노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나는 거기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 없는 앙브르사크가의 젊은이들을 몹시 경멸했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벗들과 어울려 무용 선생을 놀려 대곤 했다. 우리는 으레 지배인이나, 독재자 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그 아랫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훈계를 들어야 했는데, 내 벗들은, 앙드레조차도, 그런 이유로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토록 디오니소스적인 존재로 여겼으나 실은 섬세하고 지적이며 올해는 건강이 영 좋지 않았고, 그런데도 그녀의 행동을 다스린 것은 건강 상태라기보다 다른 온갖 고려를 압도하고 약한 이와 강한 이를 유쾌함 하나로 한데 뒤섞어 버리는 그 나이의 기운이었는데, 방들의 바깥 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달음박질을 시작해, 의자를 죄다 뛰어넘고, 마룻바닥을 미끄러져 되돌아오고, 활짝 편 두 팔의 우아한 균형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러는 내내 노래를 부르고, 온갖 예술을 뒤섞었으니, 그 첫 청춘의 개화 속에서, 여러 “갈래”가 아직 나뉘지 않아 서사시 속에 농경의 규칙과 신학의 교리를 함께 끌어들이던 옛 시대의 시인들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 그중 가장 차가워 보였던 이 앙드레는, 실은 알베르틴보다 한없이 더 세련되고, 더 다정하고, 더 감수성이 예민했으며, 알베르틴에게는 손위 언니 같은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애정을 보였다. 카지노에서 그녀는 마룻바닥을 가로질러 내 곁에 와 앉곤 했고, 알베르틴과 달리 본능적으로, 내 춤 신청을 거절할 줄, 혹은 내가 지쳐 있으면 카지노를 포기하고 대신 호텔로 나를 찾아올 줄 알았다. 그녀는 나에 대한, 그리고 알베르틴에 대한 우정을, 마음의 일들에 대한 더없이 섬세한 이해를 드러내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건강 상태 덕분이기도 했으리라. 그녀는 알베르틴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언제나 너그러운 미소로 변명을 대 주었다. 알베르틴은, 앙드레처럼 단호히 남아서 나와 이야기하기를 택할 분별이 없어, 자기를 뿌리칠 수 없이 유혹하는 파티며 소풍을 거친 격렬함으로 드러냈다. 골프장 오찬회에 갈 시각이 되면,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때 그녀는 떠날 채비를 하고는, 앙드레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저기, 앙드레, 이제 뭘 꾸물거려? 우리 골프장에서 점심 먹기로 했잖아.” “싫어. 난 남아서 이분이랑 얘기할래.” 앙드레가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하지만 알잖아, 뒤리외 부인이 널 초대했다고.” 알베르틴이, 앙드레가 나와 함께 남으려는 뜻은 오직 자기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초대받았는지 몰라서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얘, 착한 아가씨, 그런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앙드레가 나무랐다. 알베르틴은 자기도 나와 함께 남으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더 우기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홱 젖히며 “좋을 대로 해.” 하고, 제멋대로 굴다 조금씩 죽어 가는 병자에게 쓰는 말투로 대꾸하고는 “난 얼른 가야 해. 네 시계 틀림없이 느릴걸.” 하며 가 버렸다. “쟤는 참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어쩔 도리가 없어.” 앙드레가 어루만지는 듯하면서도 나무라는 미소로 제 벗을 감싸며 말했다. 노는 것에 대한 이 열광에서 알베르틴이 옛날 그 본디의 질베르트를 어딘가 되울린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유형은 진화하더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여자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그 유사성은 그들을 골라내는 우리 자신의 기질이 지닌 고정성에서 비롯한다. 그 기질은 우리의 정반대이자 우리의 보완, 곧 우리의 감각을 채워 주고 우리의 마음을 쥐어짜기에 알맞은 존재가 아닐 이들을 죄다 걸러 낸다. 이 여자들은 우리 기질의 산물이며, 거꾸로 투영된 상(像)이요, 우리 감수성의 음화(陰畵)다. 그래서 어느 소설가가 제 주인공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의 잇단 사랑을 거의 똑같은 말로 그려 낸다 해도, 그것으로 자기를 되풀이한다는 인상이 아니라 창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니, 인위적인 새로움이란 신선한 진실을 넌지시 비추어 내는 되풀이만큼 결코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연인의 성격 속에, 이야기가 새로운 지역으로, 삶의 다른 위도로 옮겨 감에 따라 드러나는 어떤 변덕스러움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이야기 속 다른 모든 인물에게는 뚜렷한 성격을 부여하면서도 사랑받는 여인에게만은 아무 성격도 주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진실을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흥미롭지 않은 사람들의 성격은 이해한다. 그러니 우리 존재의 내밀한 일부가 되어, 얼마 지나면 더는 우리 자신과 어떤 식으로도 구별되지 않으며, 그 속내가 우리에게 끝없이 불안한 억측거리를 대 주어 우리가 그것을 쉼 없이 다시 지어내게 하는 사람의 성격을, 우리가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우리 이해를 넘어선 어딘가에서 솟아나,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은 그 여자의 성격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데, 그 성격이야 마음만 먹으면 멈춰 서서 살필 수도 있겠으나 아마 그러기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불안한 탐구가 겨냥하는 것은, 사람 살의 화사한 독창성을 이루는 표피의 자잘한 입자들에 견줄 만한 그런 성격의 세부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다. 우리의 직관적 방사선 촬영은 그것들을 꿰뚫어, 그것이 우리에게 찍어 내는 상은, 어느 한 얼굴의 상이기는커녕 오히려 해골의 저 기쁨 없는 보편성을 드러낸다.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