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의 놀라움은 상당 부분 상대가 우리에게 예전과 똑같은 얼굴 또한 내보인다는 데서 솟아난다. 우리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모든 것을, 그것이 한낱 과일의 맛일 뿐이라 해도, 고스란히 되살려 내려면 어찌나 엄청난 노력이 드는지, 인상을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우리는 어느새 기억의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하고,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아주 짧은 사이에, 실제로 느꼈던 것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버린다. 그리하여 새로운 만남은 저마다 일종의 교정이 되어, 우리를 정말로 보았던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한 기억이 더는 남아 있지 않으니,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실은 그를 잊는 데에 그토록 크게 자리한다. 그러나 잊고 있던 면모가 나타나는 순간에도 우리가 여전히 볼 수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고, 어긋난 선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바닷가의 매혹적인 아가씨들과 함께한 이 나날의 나들이를 내게 그토록 이롭고 생기 넘치게 만들어 준 그 끊임없고 풍요로운 놀라움은, 발견에 못지않게 재인식에도 그득히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 소녀들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가 불러일으키는 동요가 더해지는데, 그것은 결코 내가 짐작하던 그대로인 적이 없어서, 다음 만남에 대한 나의 기대가 지난번의 기대를 닮았다기보다는 가장 최근의 대화가 남긴 아직도 고동치는 기억을 닮게 만들었다. 그러니 우리의 나들이 하나하나가 내 사유의 흐름을 거칠게 끊어 놓고, 내 방의 고독 속에서 한가로이 그어 둘 수 있었던 그 방향에서 그것을 아주 벗어나게 밀어냈음을 알 수 있으리라. 그 그어 둔 항로는, 들을 때 나를 불안하게 했고 아직도 머릿속에 울리고 있던 말들로 벌집처럼 윙윙거리며 집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잊히고 없었다. 상대는 우리가 그를 보기를 그치는 순간 허물어진다. 그런 뒤 그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그를 새로 창조하는 일이니, 앞서의 모든 창조와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바로 직전의 창조와는 다른 창조다. 이런 창조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변주가 곧 이중성이기 때문이다. 강렬하고 파고드는 눈길, 대담한 태도를 마음에 담고 있다면, 다음번에 그를 다시 만날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 다시 말해 거의 그것만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영락없이, 지난 인상에서 우리가 놓쳤던, 반쯤 나른한 옆얼굴, 일종의 꿈결 같은 부드러움일 것이다. 우리 기억을 새로운 현실과 맞대어 볼 때, 우리의 실망이나 놀라움의 크기를 드러내는 것도 바로 이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앞선 현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음을 일깨우는, 그 현실의 개정판처럼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난번에 소홀히 넘겼기에 바로 그 때문에 이번에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진짜 같고, 가장 실증적인 그 얼굴의 면모가, 이윽고 꿈과 기억의 몫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가 이제 다시 보고 싶어 할 것은 나른하고 둥그스름한 옆얼굴, 부드럽고 꿈꾸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다 다음번이면, 꿰뚫는 눈, 오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에 깃들어 있을 그 결연함, 그 강인한 성격이, 우리의 욕망과 그 욕망이 마땅히 상응한다고 여겼던 대상 사이의 어긋남을 바로잡으러 온다. 물론,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새로이 품게 되던 이 처음의 순전히 물리적인 인상들에 대한 이 충실함이 그들의 얼굴 생김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독자도 보았듯이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으며, 그 목소리는 어쩌면 한층 더 마음을 어지럽혔으니(목소리는 얼굴과 똑같이 낯설고 관능적인 표면을 내보일 뿐 아니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닿을 수 없는 입맞춤으로 아뜩해지는 저 알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저마다 연주자가 온 기예를 쏟아부은, 오직 그녀만이 지닌 작은 악기의 유일무이한 소리와도 같았다. 무심한 억양이 그려 내는, 그들 목소리 가운데 하나에서 문득 울리는 깊은 화음은, 잊고 있다가 다시 알아볼 때면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리하여 만남을 새로이 가질 때마다 완벽한 정확함을 기하려고 내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교정은, 소묘가의 교정인 만큼이나 조율사나 성악 교사의 교정이기도 했다.
이 소녀들이 내 안에 일으킨 여러 갈래의 감정의 물결은, 저마다 상대의 팽창에 맞서 버티는 저항 덕분에 한동안 조화롭게 중화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후 우리가 “족제비 놀이”를 하던 중 그 균형이 알베르틴 쪽으로 기울며 깨지고 말았다. 절벽 위 작은 숲에서였다. 그날은 여느 때보다 큰 판을 벌이고 싶었던 터라 무리가 데려온, 작은 무리와는 무관한 두 소녀 사이에 자리를 잡은 나는, 알베르틴의 옆에 선 한 젊은 남자를 부럽게 바라보며, 만약 내가 그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기적 같은 순간마다 내 친구의 손을 만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큰 진전을 향한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으리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리고 그것이 아마 불러왔을 결과들을 빼고 보더라도, 알베르틴의 손과 닿는다는 것은 내게 감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보다 더 예쁜 손을 본 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들 가운데서도 앙드레의 손은, 가늘고 훨씬 곱게 빚어진 그 손은, 말하자면 저만의 은밀한 삶을 지니고 있어서, 주인의 명령에 따르면서도 독립적이어서, 나른하게 멈추었다가 오래도록 꿈꾸다가 문득 관절을 쭉 펴곤 하며, 순종 그레이하운드 한 무리를 매어 놓은 가죽끈처럼 그녀 앞으로 뻗어 나오기 일쑤였는데, 그것을 본 엘스티르는 이 손을 여러 차례 습작으로 그렸다. 그중 하나, 앙드레가 불에 손을 쬐는 모습을 담은 그림에서는, 뒤에서 빛이 비쳐 두 장의 가을 낙엽처럼 금빛으로 물든 투명함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통통한 알베르틴의 손은 한순간 내맡기는 듯하다가 곧 그것을 쥔 손의 힘에 맞서 버티며, 오직 그 손만의 아주 독특한 감촉을 안겨 주었다. 알베르틴의 손을 쥐는 행위에는 관능적인 감미로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쩐지 장밋빛, 거의 연보랏빛에 가까운 그녀의 살결과 맞아떨어졌다. 그 손의 압력은 그 소녀의 존재 속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감각 깊은 곳까지 헤아리게 해 주는 듯했으니, 마치 그녀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러하듯, 비둘기의 구구거림이나 어떤 짐승들의 울음소리처럼 외설스러울 만큼. 그녀는 악수만으로도 큰 기쁨을 주는 부류의 여자여서, 젊은 남자와 소녀가 만날 때 서로 손을 맞잡는 일을 떳떳한 관습으로 만들어 준 문명에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여자였다. 만일 예법이라는 자의적인 규범이 손을 맞잡는 대신 다른 몸짓을 정해 두었더라면, 나는 날마다 알베르틴의 닿을 수 없는 손을 바라보며, 그 촉감을 알고 싶은 호기심을, 그녀의 두 뺨의 맛을 알고 싶던 호기심 못지않게 뜨겁게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족제비 놀이”에서 그녀의 곁에 있었더라면, 내 손안에 그녀의 손을 마음껏 쥐는 기쁨 속에서 나는 그 기쁨만을 그려 본 것이 아니었다. 여태 나의 수줍음이 삼켜 온 고백과 사랑의 선언을, 나는 손과 손을 어떤 식으로 누르는 것만으로 전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녀 편에서도 또 다른 압력으로 화답함으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을 내게 내비치기란 얼마나 쉬웠을 것인가. 얼마나 깊은 공모가, 얼마나 넓은 행복의 전망이 열려 있었던가! 그렇게 그녀 곁에서 보내는 몇 분 동안 나의 사랑은, 그녀를 알아 온 그 모든 시간 동안 이룬 것보다 더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그 순간들이 잠깐밖에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 이 놀이를 그리 오래 계속하지는 않을 터이므로 이내 끝나 가리라는 것, 그리고 놀이가 끝나 버리면 이미 너무 늦으리라는 것을 느낀 나는, 더는 내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부러 반지를 든 채로 붙잡히도록 내버려 두었고, 원 한가운데로 들어간 뒤에는, 반지가 지나갈 때 못 본 척하면서도 눈으로는 그 흐름을 좇으며, 그것이 알베르틴 옆에 선 그 젊은 남자의 손에 이르는 순간을 기다렸는데, 정작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놀이의 흥분과 즐거움 속에서 장미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어머, 우리 정말 요정의 숲에 와 있네요!” 앙드레가 사방에 우거진 나무들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는데, 그 눈에 어린 미소는 오직 나만을 향한 것이어서 다른 놀이꾼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으니, 마치 우리 둘만이 제 역할을 이중으로 해낼 만큼,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놀이에 빗대어 시적인 한마디를 던질 만큼 영리하다는 투였다. 그녀는 그 공상의 섬세함을 밀고 나가, 반쯤은 무의식중에 이렇게 노래하기까지 했다. “숲의 족제비가 이리로 지나갔네, 어여쁜 아가씨들이여, 이리로 지나갔네, 요정 숲의 족제비가!” 마치 트리아농에 갈 때면 으레 루이 16세 시대 복장을 갖춘 무리를 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나, 옛 가락 그대로 노래를 불러야 제격이라 여기는 사람들처럼. 그런 흉내에서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생각할 겨를만 있었다면 아마 안타까워했으리라. 그러나 내 마음은 온통 딴 데 가 있었다. 놀이꾼들은 내가 좀처럼 반지를 잡지 못하는 아둔함에 놀라기 시작했다. 나는 알베르틴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토록 예쁘고, 그토록 무심하고, 그토록 명랑한 그녀는, 정작 그것을 짐작조차 못했으나,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만일 눈치챘다면 틀림없이 언짢아했을 어떤 꾀 덕분에 내가 마침내 알맞은 손에서 반지를 잡아내는 순간에 나의 옆 사람이 될 참이었다. 놀이의 열기 속에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곱슬곱슬한 타래를 이루며 두 뺨 위로 드리웠는데, 그 메마른 갈색이 뺨의 연분홍빛을 한층 짙게 돋우었다. “그대의 머리채는 라우라 디안티의, 기옌의 엘레오노르의, 그리고 샤토브리앙이 그토록 사랑한 그 후손의 머리채로군요. 늘 그렇게 반쯤 풀어 내린 머리를 하고 다녀야 해요.” 나는 그녀에게 바싹 다가서기 위한 핑계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문득 반지가 그녀의 옆 사람에게 넘어갔다. 나는 즉시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을 억지로 벌리고 반지를 낚아챘다. 이제 그는 원 안의 내 자리로 들어가야 했고, 나는 알베르틴 곁에 있던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몇 분 전만 해도 나는 이 젊은이를 부러워하고 있었으니, 끈을 따라 미끄러지는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끊임없이 스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막상 내 차례가 되자, 너무 수줍어 그 접촉을 좇지도 못하고, 너무 마음이 흔들려 그것을 누리지도 못한 채, 나는 가쁘고 아프게 뛰는 심장의 고동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느 순간 알베르틴은 둥글고 발그레한 얼굴로, 무언가 짜고 하는 듯한 기색을 띠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마치 자기가 반지를 쥔 척하여 술래를 속이고, 자기가 방금 그것을 넘기려는 방향으로 그가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알베르틴의 그 은밀하고 내밀한 눈길이 오로지 그것만을 노린 것임을 곧바로 알아차렸으나, 그럼에도 그녀의 눈 속에, 순전히 꾸며 낸, 놀이의 필요에 맞추어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 어떤 비밀의, 우리 둘 사이의 어떤 밀약의 영상이 그렇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는 조금 충격을 받았으니, 그 밀약은 실재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부터 내게는 있음직한 일로, 그리고 더없이 감미로울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생각에 아직도 붕 떠올라 휩쓸리고 있던 그때, 나는 내 손을 살며시 누르는 알베르틴의 손을, 끈을 따라 내 손가락 밑으로 미끄러져 드는 그녀의 어루만지는 손가락을 느꼈고,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 애쓰며 내게 던지는 눈짓을 보았다. 그 즉시, 여태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던 한 무더기의 희망이 내 안에서 결정을 이루었다. “그녀는 놀이를 핑계 삼아, 자기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게 느끼게 해 주는 거야.” 나는 기쁨의 절정에서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 절정에 이르기가 무섭게 곤두박질쳤으니, 알베르틴이 성이 나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왜 못 잡아요? 아까부터 계속 당신한테 들이밀고 있잖아요.” 비탄에 얼이 빠진 나는 끈을 놓아 버렸고, 술래는 반지를 알아채고 덮쳐 잡았으며, 나는 다시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절망에 잠긴 채,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걷잡을 수 없는 무리를 바라보았고, 놀이꾼들이 다 함께 야유하며 지르는 소리에 찔리면서도, 웃을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도 그에 맞장구쳐 웃어야만 했으며, 그러는 동안 알베르틴은 자꾸만 되뇌었다. “정신을 안 차리면 놀이를 못 하는 거예요, 남들 놀이까지 다 망쳐 놓고. 앙드레, 다음에 우리 놀 때는 저 사람 다시 부르지 마. 부르면 난 안 와.” 놀이 따위에는 초연한 앙드레는, 로즈몽드가 흉내 내는 기분으로 따라 부르긴 했으나 영 신통찮았던 그 “요정의 숲”을 여전히 흥얼거리며, 알베르틴의 힐난에서 화제를 돌리려고 내게 말했다.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오래된 크뢰니에 절벽이 바로 코앞이에요. 자, 내가 아주 예쁜 오솔길로 데려다줄 테니, 저 어리석은 바보들은 놀이방 아기들처럼 계속 놀게 내버려 둬요.” 앙드레가 내게 무척 상냥했으므로, 나는 길을 가면서 알베르틴에게 나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만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앙드레에게 늘어놓았다. 앙드레는 자기도 알베르틴을 무척 좋아하고 매력 있는 아이로 여긴다고 대꾸했지만, 그런데도 내가 그녀의 친구에게 바치는 찬사가 그녀를 온전히 기쁘게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득, 움푹 팬 그 오솔길에서 나는, 유년의 더없이 아련한 추억에 가슴이 저며 우뚝 멈춰 섰다. 나를 향해 내민, 가장자리가 톱니 같고 반들거리는 잎새로, 나는 방금 산사나무 한 그루를 알아본 것이었는데, 봄이 다 가 버린 지금은 아, 꽃도 없었다. 내 둘레에는 아득한 성모 성월의, 일요일 오후들의, 오래전에 잊힌 믿음이나 그릇된 생각들의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그것을 붙들어 두고 싶었다. 나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고, 앙드레는 내 마음속을 헤아리는 어여쁜 눈치로, 나를 그 떨기나무의 잎사귀들과 이야기 나누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 잎들에게 꽃들의 소식을 물었으니, 고집스럽고, 도발적이며, 경건하기도 한, 명랑한 어린 소녀들 같던 그 산사꽃들의 소식을. “아가씨들은 여기서 떠난 지 벌써 오래됐답니다.” 잎들이 내게 일러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잎들은, 그 아가씨들의 둘도 없는 벗을 자처하는 사람치고는 내가 그녀들의 습성을 유별나게 모르는 듯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둘도 없는 벗이라면서, 약속을 해 놓고도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들을 두 번 다시 찾아온 적이 없는 벗이라니. 그러나 질베르트가 소녀들 가운데 나의 첫사랑이었듯, 이 꽃들은 꽃들 가운데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래요, 나도 다 알아요, 그 꽃들은 6월 중순쯤 떠나지요.”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꽃들이 여기 있을 때 머물던 자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군요. 그 꽃들은 콩브레에서도, 내 방으로 나를 찾아왔어요. 내가 앓아누워 있을 때 어머니가 데려다주셨지요. 그리고 우리는 토요일 저녁마다 성모 성월 예배에서도 만나곤 했어요. 여기서도 그 예배에 갈 수 있나요?” “오, 물론이지요! 아니, 여기서 가까운 성당인 생드니 뒤 데제르에서는 우리 아가씨들을 모시는 걸 특히 소중히 여기는걸요.” “그러면, 지금 그 꽃들을 보고 싶으면요?” “오, 내년 5월은 되어야 해요.” “하지만 그때 여기 꼭 있으리라고 믿어도 되나요?” “해마다 어김없이 온답니다.” “다만 그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어머나, 그럼요! 아가씨들이 어찌나 명랑한지, 웃음을 그치는 건 다 같이 성가를 부를 때뿐이라, 도저히 놓칠 수가 없어요. 오솔길 저 끝에서도 향기만으로 알아챌 수 있답니다.”
나는 앙드레를 따라잡아, 다시 알베르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그것을 자기 친구에게 옮기지 않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알베르틴이 그 말을 전해 들었다는 소식은 끝내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앙드레는 마음의 일들을 훨씬 더 깊이 헤아릴 줄 알았고, 몸가짐도 세련되게 섬세했다. 가장 절묘하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눈길과 말과 행동을 찾아내는 일, 자칫 아픔을 줄 수 있는 말은 혼자 속에 담아 두는 일, 슬픔에 잠긴 벗의 곁을 지키기 위해 오후의 놀이를, 어쩌면 “가정 접견”이나 원유회를 (그것도 조금도 희생이 아닌 양) 기꺼이 단념하는 일, 그리하여 자기가 덧없는 즐거움보다 벗과의 소박한 벗함을 더 아낀다는 것을 그 벗에게 보여 주는 일, 이런 것들이 그녀의 몸에 밴 섬세함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그녀는 마치 겁쟁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래서 그 용기가 유달리 값진 그런 영웅적인 겁쟁이들과 같다고 말하게 되고, 그녀의 참된 성품 속에는, 그녀가 도덕적 고결함에서든, 예민한 감수성에서든, 참된 벗임을 내보이려는 고매한 바람에서든 순간순간 드러내 보이는 그 너그러움이 실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알베르틴과 나 사이에 싹틀지도 모를 애정에 대해 그녀가 내게 들려주는 온갖 다정한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녀가 그것을 이루어 주려고 제 힘닿는 데까지 다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쩌면 그저 우연이었을지 모르나, 나를 알베르틴과 맺어 주는 데 효험이 있었을 법한, 제 손안에 있던 자잘한 기회들 가운데 가장 사소한 것 하나조차 결코 쓰지 않았으며, 알베르틴에게 사랑받으려던 나의 노력이, 그녀의 친구 속에 그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은밀한 계략까지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망정, 적어도 그녀가 애써 감추었으며 그 여린 감수성으로 스스로 맞서 싸우기까지 했을 어떤 분노만은 그 속에 불러일으키지 않았다고,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앙드레가 보여 준 그 헤아릴 수 없이 섬세한 선의를 알베르틴이라면 도저히 낼 수 없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나는 앞의 여자의 바탕에 깔린 선함을, 훗날 뒤의 여자의 그것을 확신하게 되듯 그렇게 확신하지는 못했다. 알베르틴의 넘치는 경박함에 언제나 다정하게 너그러웠던 앙드레는, 벗다운 말과 벗다운 미소로 그녀를 맞았고, 더 나아가 늘 그녀에게 벗으로서 처신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재산을 나눠 주어 이 한 푼 없는 벗에게 얼마간의 행복을 안기려고, 제게 돌아올 이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도, 군주의 총애를 얻으려는 조신보다 더 큰 수고를 날마다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아 왔다. 알베르틴이 그토록 가난한 것이 참 딱한 일이라고 그녀에게 말하면, 그녀는 언제나 사랑스럽도록 부드러웠고, 달콤하고 애잔한 표현을 골라 쓰는 데 사랑스러웠으며, 부유한 벗을 위해서라면 들이지 않았을 만큼 한없이 더 큰 정성을 그 벗을 위해 쏟았다. 그러나 누가 혹시라도 알베르틴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그리 가난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비치면, 앙드레의 눈과 이마의 빛을 겨우 알아볼 만한 그늘이 가렸고, 그녀는 언짢아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래도 알베르틴을 시집보내는 일이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덜 어려울지 모른다고 말하면, 그녀는 거세게 반박하며 거의 화난 듯이 되뇌었다. “어머, 아니에요. 저 애는 절대 시집 못 가요! 난 아주 확신해요. 그게 나한테는 얼마나 큰 걱정인지 몰라요!” 나에 관한 한, 앙드레는 그 소녀들 가운데 유일하게, 제삼자가 나에 대해 했을 법한 그리 유쾌하지 않은 말이라면 무엇이든 결코 내게 옮기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누가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먼저 그녀에게 이야기하면, 그녀는 믿지 않는 척하거나,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어떤 해명을 붙여 주곤 했으니, 이런 자질들을 통틀어 재치라 부르는 것이다. 재치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했을 때, 축하해 주면서도 사실 그럴 것까지야 없었다고 덧붙이는 사람들의 속성이니, 그리하여 우리가 강요당하지도 않고서 스스로 내보인 그 용기를 우리 자신의 눈에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처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다. “결투를 하다니,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겠구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모욕을 그냥 삼킬 수야 없었을 테니,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그러나 어느 편에나 늘 할 말은 있는 법이어서, 우리에 대해 오간 모욕적인 말을 옮기며 우리 벗들이 내보이는 즐거움, 적어도 그 무심함이, 그들이 말하는 순간 우리의 처지에 온전히 자신을 놓아 보지 않은 채, 침 끝을 찔러 넣고, 마치 그것이 사람의 살갗이 아니라 금박공의 가죽이라도 되는 양 칼날을 비틀어 넣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의 행위에 대해 오간 말 가운데, 또는 그 행위 때문에 말하는 이들 스스로가 우리에 대해 품게 된 견해 가운데 우리에게 언짢을 만한 것을 언제나 우리에게 숨겨 두는 그 재간은, 다른 부류의 벗들, 그토록 재치가 넘치는 벗들 속에 짙은 위선의 결이 흐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악의를 품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남들이 하는 말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그러하듯 오직 괴로움만을 안긴다면, 그것은 아무 해도 없다. 나는 앙드레가 그런 경우라고 짐작했으나, 아주 확실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작은 숲을 벗어나, 무성하게 우거진 오솔길들이 얽힌 길을 따라갔는데, 앙드레는 그 사이로 능숙하게 길을 찾아냈다. 문득 그녀가 내게 말했다. “자, 보세요, 저기 당신이 그토록 말하던 그 크뢰니에 절벽이에요. 그리고 이봐요, 운이 좋으시네요. 마침 딱 그 시각이라, 빛이 엘스티르가 이걸 그렸을 때하고 똑같아요.” 그러나 나는 “족제비 놀이”를 하는 동안 그토록 높은 희망의 꼭대기에서 곤두박질친 일로 아직도 너무 비참했다. 그리하여, 여느 때 같았으면 틀림없이 느꼈을 그 기쁨은 없이, 나는 거의 발치에서, 더위를 피해 몸을 숨긴 바위들 사이에 웅크린 바다의 여신들을 언뜻 보았으니, 그들이야말로 엘스티르가 숨어 기다리다 그곳에서 불시에 붙잡아 낸 존재들이었다. 레오나르도가 그렸음 직한 아름다운 짙은 유약 아래, 그 경이로운 그림자들은, 몸을 감춘 채 은밀하고, 재빠르며 소리가 없어, 빛이 처음 어른거리기만 하면 곧장 바위 뒤로 미끄러져 틈새에 몸을 숨길 채비를 하고 있다가, 위협하던 빛살이 지나가고 나면 이내 다시 바위나 해초로 돌아왔는데, 그 위로는 절벽을 허물어뜨리는 태양과 냄새 없는 바다가 있어, 그들은 미동도 없이 발 가벼운 파수꾼으로서 그 바다의 잠을 지켜보는 듯, 물 위로 제 끈적한 몸뚱이와 짙푸른 두 눈의 골똘한 눈길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소녀들을 데리고 함께 돌아가려고 숲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나는 내가 알베르틴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 나는 그것을 그녀에게 알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것은, 샹젤리제에서 놀던 그 시절 이래로, 비록 나의 사랑이 잇달아 향한 상대들은 사실상 그대로였을망정, 사랑에 대한 나의 관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나의 연정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일이, 더는 사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절실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사랑 자체도 외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저 주관적인 기쁨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 기쁨으로 말하자면, 알베르틴이 그것을 마련해 주는 데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리라고 나는 느꼈으니, 더욱이 그녀는 내가 그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터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다른 소녀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에 잠긴 알베르틴의 영상만이 내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낮 동안에는 다른 구름들보다 조금 더 또렷하고 고정된 형태를 지닌 작은 흰 구름에 지나지 않던 달이, 햇빛이 스러지기가 무섭게 제 온전한 힘을 되찾듯, 다시 호텔로 돌아오자 내 마음에서 떠올라 빛나기 시작한 것은 오직 알베르틴의 영상뿐이었다. 내 방은 문득 새로운 곳이 된 듯이 보였다. 물론 이미 오래전부터 그 방은 첫날 밤의 그 적대적인 방이 아니었다. 우리는 평생, 우리가 머무는 주위 환경을 참을성 있게 바꾸어 가며, 습관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되게 해 줌에 따라, 우리 불편함의 뿌리였던 빛깔과 형태와 냄새의 해로운 요소들을 차츰 지워 나간다. 또한 그 방은, 여전히 나의 감수성을 좌우할 만큼 힘이 세어, 분명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쁨을 주기 위해, 여름날의 샘물처럼, 잘 닦인 옆면 중턱에서 빛에 흠뻑 젖은 쪽빛 수면을 비추던 대리석 수반 같던, 그리고 그 수면 위로는 열기의 물결처럼 만질 수 없이 희고 어스름한 구름 한 조각이 한순간 미끄러져 가던, 그런 방도 더는 아니었으며, 그림 같은 저녁 시간의, 온전히 심미적인 그 방도 아니었으니, 이제는 하도 여러 날을 지내 온 터라 나로서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다시 그 방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이번에는 사랑의 시각, 곧 저만 아는 이기적인 시각에서였다. 한 모퉁이에 비스듬히 걸린 크고 멋진 거울과, 유리문이 달린 훌륭한 책장이, 알베르틴이 나를 찾아온다면 그녀에게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리라고 생각하니 흐뭇했다. 해변이나 리브벨로 달아나기 전에 잠깐 몇 분 머무르던 통과의 장소이던 내 방은, 이제 내게 실재하는 정든 곳이 되어 새롭게 빚어졌으니, 내가 그 세간 하나하나를 알베르틴의 눈으로 바라보고 음미했기 때문이다.